[이 사람] 유니언 숍 폐지합의한 한국鑛害관리공단 李利在 이사장 : 월간조선

―명함을 건네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뭔가요.

“여기 뭐하는 곳이냐고. 그 질문이 제일 많죠.”

―그럴 것 같아 여쭤 봤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사가 일천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은 생각, 또 공단의 명칭 자체가 너무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사업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이름이 하나 있었으면 싶습니다. 혹시 추천할 이름 없나요?”

이이재(李利在) 한국광해관리공단 이사장과의 대화는 ‘이름’얘기로 시작됐다. 명칭만 두고 보면 도통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감이 오지 않아 이 질문부터 던졌다.

한국광해관리공단은 광산개발로 인한 피해, 즉 광해(鑛害)를 방지하고 석탄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非)영리 공익법인이다. 2005년 5월에 ‘광산피해의 방지 및 복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주요 업무는 광산별 광해방지계획 수립, 광해로 인한 손해배상, 광산지역의 환경개선 등이다. 석탄합리화사업단이 전신(前身)이다.

공단 노조, 유니언 숍 폐지에 합의

이 공단이 노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공단 노조가 사측과 파격적인 협약을 맺어서다.

공단 노조는 지난 2010년 12월 3일, “유니언 숍을 폐지하고 종전의 97개였던 단체협약 조항을 53개로 줄였다”고 밝혔다.

‘유니언 숍(union shop)’은 회사에 고용된 노동자가 일정 기간 내에 반드시 노조 조합원이 돼야 하는 가입제도. 노조가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광산 노조의 대다수는 이 제도를 채택해 왔다.

그런데 광해관리공단 노조는 강제가 아닌 자의(自意)로 노조에 가입하는 ‘오픈 숍’을 선택했다. 성숙한 노사(勞使) 관계를 위한 첫걸음이다. 노조의 결단이 놀랍고, 이를 이끌어낸 이이재 이사장의 협상 능력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이이재 이사장은 공(功)을 노조에 넘겼다.

“노사관계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생(相生)의 길로 가는 첫걸음을 뗐다고 봅니다. 과거에 공단 직원은 전원 노조원이 돼야 했지만 이제는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오픈 숍’은 훨씬 유연한 노조의 조직 형태입니다. 우리나라가 3만 달러 시대에 진입하기 위해 유연한 노조 조직이 필수인데 우리 공단이 해낸 겁니다. 노조원들 덕분입니다.”

―타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겠습니다.

“하고자 하는 의지가 중요하잖습니까. 사측에서 노조원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설명했고 노조원들이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인 거죠.”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요.

“경영 선진화를 향한 첫걸음으로 기억될 겁니다. 노사가 탄탄한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를 할 것이고, 우리 공단은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공공기관으로 거듭날 겁니다.”

광석 채굴로 인한 피해는 어마어마해

이이재 이사장의 표정이 밝았다. 큰일을 이뤄 냈다는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혼재(混在)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광산 개발로 인한 피해’로 넘어갔다.

“경제가 돌아가는 데 자원 공급은 필수입니다. 정부가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자원의 공급이 수반돼야 합니다. 자원개발로 인한 부작용과 환경, 인명 파괴를 예방하는 일도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개발과 그로 인한 피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니까요. 우리 공단은 과거 산업화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의 인류 문명이 지속되게 하는 데 필요한 기관입니다.”

―광산 개발로 인한 피해는 어느 정도입니까.

“광석을 채굴하면 우선 땅이 꺼집니다. 충북 음성 꽃동네의 집이 무너졌고, 일부 철도와 도로가 지나가는 지반은 붕괴 위험이 있었습니다. 정밀 계측기로 조사해서 조금이라도 붕괴의 위험이 있으면 파일을 박아서 땅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광산의 폐수는 지하 수맥을 건드리기 때문에 유해(有害)한 물이 나옵니다. 이 폐수가 한강을 타고 서해로 흘러나간다고 생각하면 아찔하지 않습니까. 광해는 축적성과 확산성이 특징입니다. 긴 시간 동안 누적되고, 오래도록 확산됩니다. 땅이 산성화되고 토양 조건이 변하기 때문에 그냥 두면 우리의 국토 자체가 망가집니다. 광산을 개발하면서 생긴 먼지, 소음, 진동 피해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사실을 알고 나면 여성들이 금장식 목걸이나 귀걸이 하는 것도 꺼려질 겁니다.”

―왜요.

“광물을 캐면 이 중에 극히 일부만 금으로 채취됩니다. 이 적은 양을 캐기 위해 수많은 것들이 버려져야 합니다. 금이나 고가(高價)의 광물은 갈아서 채취하는데 쓸모없는 돌덩이들은 고스란히 우리의 산천(山川)에 버려집니다. 폐석이라고 하죠. 폐석이 쌓인 곳에는 나무도 안 자라요. 흙을 최소한 30cm 이상 다지고 쌓아야 나무를 심을 수 있습니다. 이러니 금 장식 액세서리를 함부로 할 수 있나요?(웃음)”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 기관의 주요 업무군요.

“우리 몸에 상처가 났는데 치료를 안 하면 곪아서 주변까지 옮아가잖습니까. 자원 개발은 땅을 건드리기 때문에 산림 훼손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상처 난 국토에 새살이 돋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석탄 사용량 연간 9000만톤

하이원 리조트.

인류의 발전사는 광산 개발과 궤를 같이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광산 개발의 역사는 일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에 조선광업법이 제정되기 이전에는 무허가로 광물을 캤다. ‘금이 노다지’라는 사실을 알았던 일본인들은 우리의 국토에서 금광을 찾아 금을 캐 갔다. 채굴 기술이 없던 우리는 금이 어디 묻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해방 이후에 몇몇 금광을 찾았지만 일본인들이 알짜배기는 모두 가져간 뒤였다. 우리 광산은 또다시 방치됐다.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기초 자금이 필요했고, 정부는 광물을 수출해 ‘시드머니(Seed money)’를 만들었다. 광산 개발은 최대의 이슈였고, 광산 개발을 한다고 하면 애국자로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석탄, 철광석, 텅스텐, 금 등 수천 가지의 광물이 나온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광산’이라고 하면 석탄 광산으로 인식한다. 우리의 주요 에너지 자원이 석탄이었기 때문이다.

이이재 이사장의 얘기다.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석탄이었습니다. 공장을 움직이는 것도, 가정용 연료도 모두 석탄이었습니다. 까마득한 얘기 같지만, 우리나라에서 석탄을 가장 많이 생산했던 때는 불과 22년 전입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최고점을 기록했고, 이후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강원도영동지방의 일부와 문경, 보령, 화순에서 많이 생산했지요.”

―급속하게 쇠퇴의 길을 걸었군요.

“석탄의 채산성이 떨어졌고 에너지의 소비 패턴이 도시가스나 LNG, 석유로 바뀌었습니다. 석탄은 캘수록 깊이 파 들어가야 하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고비용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석유 사용량이 늘어나면서 석탄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지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서울 송파구의 잠실 아파트는 ‘연탄 아파트’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연간 200만톤의 석탄이 생산됩니다. 전체 사용량이 9000만톤 정도인데 나머지는 해외에서 수입을 합니다.”

―탄광이 여전히 있습니까.

“장성, 태안, 경동의 세 군데에 아직도 탄광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석탄이 과거에나 지금에나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석탄이 공급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전기를 다 끊고 살아야 합니다. 석탄 화력발전소가 전체의 40%를 차지합니다. 원자력 발전의 목표치가 오는 2020년까지 전체의 20~30%로 끌어올리는 겁니다. 과거처럼 공해를 많이 일으키지 않는 화력발전소를 지어야 하죠. 발전소, 제철소에서 여전히 석탄을 주 원료로 사용합니다. 석탄 산업에 종사하면 구(舊)시대 사람인 양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석탄이 나올까요.

“그리 길지는 않다고 봅니다. 탄광 근로자들의 생계에 관한 것이라 정확히 말하기는 뭣하지만. 사실 땅속은 알 수가 없지요.”

후발주자로서의 핸디캡 극복하고자 노력

광산 개발로 인한 피해는 어마어마하지만, 정작 병든 우리 국토를 제대로 가꿔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다. 이전까지 탄광 지역의 주민들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오염된 토양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을 먹고, 또 그 물을 먹으면서도 그냥 ‘팔자’려니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랬다가 환경 전문가들이, 광산 지역의 피해 주민들이 지역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정부에 요청해서 석탄합리화사업단이 발족됐다. 광산 개발로 인한 피해 중에서도 납, 카드뮴, 비소와 같은 중금속은 잘 다뤄야 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영역이다. 국가의 예산이 투입되는 만큼 전문가들로 구성해 그동안 황폐해진 우리 국토를 빠른 시간 내에 회복하려고 생긴 것이 한국광해관리공단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1950년대부터 이 광해방지 사업을 시작했다. 40년이나 늦게 시작된 우리의 광해 기술은 어디까지 왔을까.

이이재 이사장의 얘기다.

“해외 전문가를 부르고 기술연구소를 꾸려서 연구개발에 집중했습니다. 선진국과 기술 협력을 통해서 지반, 수질, 토양을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따라잡는 데는 명수가 아닙니까. 역사가 일천하지만 특정 기술에서는 상당히 선진국을 따라왔습니다. 광물 채취 후에 남은 무해(無害)한 돌가루를 건축자재로 재활용하는 법을 연구했고요. 해외 시장 개척을 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비영리기관인데 뭣하러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섭니까.

“우리와 같은 단계에 오지 못한 국가 중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거의 수혜국에서 타국을 지원하는 수원국이 됐잖습니까. 우리 사업은 다른 국가가 경제를 일으키는 데 고마운 역할을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돕고 있고, 또 다른 이유는 해외 자원개발 때문입니다.”

―해외 자원개발이라면.

“자원이 묻혀 있는 국가가 많습니다. 이들이 광산을 개발할 때 광해 방지에 대한 기술을 갖춘 곳을 선호합니다. 우리의 광해 방지 기술을 앞세워서 그들이 자원개발을 하는 데까지 파트너로 뛰어드는 겁니다.”

베트남 광물공사와 광산 개발사업 협약 체결

말이야 쉽지만 다른 국가의 자원개발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퍽 어려운 일이다.

이이재 이사장의 얘기에 따르면 광물 개발 건 때문에 면담을 요청한다고 하면 대다수의 나라는 거절을 한단다. 명함도 못 내밀게 한다. ‘거대 메이저사(社)에서 사정해도 만나 줄까 말까’란다.

그런데 공단은 지난 2009년 3월 베트남 석탄광물공사와 퀀닌성 광산을 포함해 ‘광해방지 및 석탄광 탐사·개발사업 업무협약’을 맺었다. 같은 해 5월에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첫 해외 사무소를 개소했다.

이들 국가를 설득하기 위해 이이재 이사장은 고전적인 방법을 썼다. ‘처음부터 같이 자원개발을 하자고 하면 부담스러워할 것이 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에게 우리나라 광산 개발 역사를 들려주고, 덕분에 산업발전은 이뤘지만 후유증이 컸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자원 개발을 할 때부터 그로 인한 피해를 함께 방지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런 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들과의 거리를 좁혀 갔다.

이이재 이사장은 “기술력이 없는 국가에 도움을 주고 우리나라가 자원개발 국가로 거듭나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고 했다.

취임 직후 전국 광산 실태조사 지시

한국광해관리공단은 ‘돈을 쓰는 기관’이다. 광산으로 인한 피해복구며, 폐광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국민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야 한다. 지식경제부에서는 연간 800억원 내외의 예산을 편성한다. 돈을 잘 쓰는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어렵다.

이이재 이사장은 취임한 이후부터 지난 2년 반 동안 ‘돈을 잘 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얘기다.

“처음 공단에 와 보니 데이터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았습니다. 예산은 정해져 있고 도움을 요청하는 곳은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전국에 광산이 몇 개인지, 그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었죠. 국민의 혈세(血稅)를 투입해야 하는 일인 만큼 제대로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습니다. 제 임기 안에 끝마칠 수 없더라도 공단의 기초 작업을 탄탄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공단은 전국적인 광해실태 조사를 벌였다. 결국 전국에 5400여 개의 광산이 있고 광산별로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광산 접근로에 필요한 사진자료, 컴퓨터 프로그램이 모두 개발됐다. 요즘은 공단 내에 ‘수질 오염이 가장 심한 광산’이라고 입력을 하면 순서대로 나온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의 국토 전체가 그의 관리 대상이다.

이이재 이사장은 “온 국토에 대한 진료 기록부를 완성했다고 보면 된다”며 “광해 방지의 대책을 수립하는 기초 자료와 시스템이 구축된 만큼 이제는 예산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요즘 북한 때문에 걱정이 많다. 북한의 광산 개발로 인한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측되어서다.

그는 “어느 시점 이후에는 우리가 북한의 광해 문제에 관여해야 한다”고 했다.

강원랜드의 대주주

한국광해관리공단의 주요 사업 중 하나는 폐광 지역의 산업을 지원하는 것이다. 폐광 지역은 과거에는 인구 밀도가 높고 현금 흐름이 빨랐던 흥청망청한 곳이었다. 이런 지역이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걸으며, 지역 경제가 급속하게 붕괴된 것은 큰 사회적 문제 중의 하나다. 과거 사북사태(1980년 4월 21~24일 사북영업소에서 벌어진 노동항쟁)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다.

공단은 폐광 지역으로 이전하는 회사에 싼 이자로 융자금을 지원하고, 폐광 지역을 리조트로 변신시키고 있다. 강원도 정선 폐광 지역에 강원랜드, 경북 문경 폐광지에 ‘문경레저타운’, 삼척 폐광지에 ‘블랙밸리컨트리클럽’, 강원도 영월에 ‘동강시스타’, 충남 보령에 ‘대천리조트’를 만들었다.

공단은 강원랜드의 주식 7704만 주(전체의 36.01%)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강원랜드에서 나오는 이익금은 전국 7개의 폐광 지역에 골고루 나눠진다.

이이재 이사장은 “강원랜드에 골프장을 만든 것은 폐광 지역 재개발의 좋은 예”라고 했다.

“폐광 더미 위에 훌륭한 조경의 골프장을 만든 것을 선진 사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폐광 지역 개발은 지역 사회의 동의를 거치고 충분한 토론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어렵기는 합니다만요.”

―강원랜드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가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도박 중독자가 나오고, 가정 파탄이 이뤄지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입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정부가 폐광 지역을 리조트의 목적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우리에게 부여한 책무(責務)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리조트 사업이 성공할까 반신반의했다고 합니다. 폐광 지역을 그렇게 변신시키지 않았다면 그 지역은 이미 공동화되고, 재취업이 되지 못한 주민들이 사회적 불만 세력이 됐을지 모릅니다. 강원랜드에 대한 일부 문제점은 대주주로서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대학 낙방하고 곧장 입대

이이재 이사장은 낮고 굵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 상대방을 설득하기에 적합한 음성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설득하기’보다 ‘설득당하는’ 편이다. 오늘날 이 자리에 오른 이유도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이다.

강원도에서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온 그는 아버지가 바라던 ‘고시(考試)’의 길을 가지 못했다. 대학 입시에서 낙방했고, 만 18세 50일째 되는 날에 군(軍)에 입대했다. 남들보다 군에 빨리 가게 된 계기는 술김에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을 축하하러 가던 그는 종로3가 파고다 공원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보게 됐다. 바닷가에 총을 멘 군인이 그려진 포스터였다. ‘독도근무’라고 쓰여 있었는데 늠름하고 멋져 보였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술이 거나했던 그는 술김에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나 입대한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덜컥 큰소리를 쳤다. 어찌됐건 약속을 지켜야겠기에 자원 입대를 했다. 1·2·3 지망을 모두 ‘독도경비대’로 썼는데, 정작 그는 강원도 정선경찰서의 기동 타격대에 배치받았다.

얼떨결에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하고 나서는 집에 손을 내밀기 어려웠다. 절에서 공부를 하는데, 고등학교 때 은사님이 친구를 통해 편지를 전했다.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로 돌아와서 공부에 매달렸고, 결국 4년 장학금을 준다는 대학에 진학했다.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고 대학 때 공부를 했고, 성적이 좋아 몇 군데 회사에서 입사(入社) 제안을 받았다. 때는 바야흐로 1987년, 민주화 열풍이 불던 시기였다.

“백수는 돈 못 버는 것이 두렵지 않다”

대학 때 가끔 아르바이트했던 출판사의 선배가 꼬드겼다. 출판사에서 잡지를 만들려고 하는데 함께 하자며. 이이재 이사장은 사람을 좋아한다. 어지간해서는 거절을 못한다. 그는 선배와 출판사 일을 했고, 모임에서 만난 두 살 연하의 부인 장경순씨와 1989년에 결혼했다.

이 이사장은 “바보같이 나랑 결혼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보증금 850만원짜리 반지하 신혼방을 얻어 준 것도 학교 선배들이었다. 집에는 손을 벌리지 못했다.

출판사 멤버 중 한 명이 통일부 산하에 ‘평화통일촉진위원회’라는 NGO 단체를 만들었고, 그는 여기서 상근으로 일했다. 후배 검사 한 명이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법률문화정보센터를 조직했고, 또 다시 그에게 부탁을 해 왔다.

법조특권의식으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법’이 너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일반인에게 1만원씩을 받고 법률 자문을 했던 이 단체는 ‘오세오닷컴’이라는 주식회사가 됐다. 그는 이곳의 대표이사를 맡았다.

지난 2000년 총선 때에는 한나라당 남경필(南景弼), 오세훈(吳世勳) 등 젊은 의원들과 함께 미래를 위한 청년연대를 조직했다. “젊은 인재를 끌어오는 ‘삐끼’ 노릇을 했다”고 했다. 지난 2002년에는 이회창(李會昌)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그의 낙선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원래 등산을 즐겨 하는 이이재 이사장은 고향에서 백두대간 회원들과 함께 지내며 마음을 추슬렀다. 백두대간보존회 창립(1992년) 때부터 관여를 했던 그였다. 이참에 백두대간보존을 법률로 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어 공청회, 토론회로 시간을 보냈다.

‘백두대간 탐사를 제대로 안 한 사람이 무슨 일이냐’는 핀잔을 듣고, 법률이 제정되면 제대로 탐사를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법이 제정된 이듬해인 2004년, 그는 77일 동안 산에서 지냈다. 산에서 먹고 자며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는 “산에 습기가 많아서 이 중 절반은 목욕탕에서 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집에 가지 않았다. 대신 그의 부인이 간간이 산에서 필요한 물건을 챙겨 왔다.

이 이사장에게 ‘백수로 지내는 것이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백수로 살아 본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회사에서 잘리면 어쩌나, 당장 월급 들어올 곳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합니다. 저는 오히려 그게 불쌍해 보입니다. 막상 해 보면 백수가 그렇게 무서운 건 아니거든요(웃음).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아집니다. 해 보니까. 하긴 공단 이사장이 되니까 월급을 또박또박 집에 가져가잖아요. 집사람이 좋아하긴 하더라고요(웃음).”

마지막은 농부로 살 것

이 이사장은 실제로 “월급을 받기 위해 애를 써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찾으면 기꺼이 찾아갔고, 어떤 일을 요청하면 되도록 거절하지 않았단다.

고향으로 내려간 그는 ‘강원인재육성재단’에서 상근(常勤)으로 일했고, 2005년에 서울에 올라왔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체육회를 맡아 달라고 했다. 강원도를 팽개칠 수 없어 거절했는데, 오 시장과 강원도 지사가 서로 얘기를 한 끝에 일이 그렇게 됐다. 그리고 한국광해공단 이사장에 오르기까지 그는 그렇게 살았다.

이이재 이사장의 얘기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감사하죠. 어떤 일이 주어질지, 또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 길을 갈 겁니다. 한강 탐사를 할지, 몽골에 가서 나무를 심을지, 저도 제 앞날을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무슨 일을 하든 끝은 똑같을 겁니다.”

―어떤 모습으로.

“다행히 부모님께서 남겨 놓은 논밭이 있어서 말년에는 그곳에서 지낼 겁니다. 사람은 흙을 만져야 해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제 마지막 모습은 농부일 겁니다. 큰 밀집모자 하나 쓰고, 손에 흙을 잔뜩 묻힌 상태로, 가장 자연스러운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인사차 악수를 건넸다. 두툼하고 투박한 손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흙의 기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