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발굴] ‘푸른 눈의 한국인’ 호머 헐버트 : 월간조선

헐버트(Homer B. Hulbert)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문 역사가들마저도 헐버트의 참모습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일반인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고종(高宗)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외국인으로서 고종 황제의 특사(特使)를 세 번이나 맡았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勒約) 직후 자결한 애국자의 대명사인 민영환(閔泳煥)과는 참된 지성의 교감을 나눴다. 서재필(徐載弼), 이승만(李承晩)과는 독립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이상설(李相卨), 이준(李儁)과는 함께 헤이그 특사였다. 또한 일본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고종 황제와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구한말(舊韓末) 선각자들이 그토록 감사를 보냈던 한민족(韓民族)의 은인이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 버렸다. 필자는 그의 이름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조바심에 헐버트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자 수십 년을 동분서주했다.

헐버트와 한민족의 인연은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인연은 참으로 질기고도 장미꽃처럼 아름다웠다.

그는 조선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7월 4일 조선 땅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의 문명화와 주권 수호를 위해 헌신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 사건 이후 일제의 박해로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미국에서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1949년 광복절을 기해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돌아온 지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서거했다. 그는 생전에 기자에게 말한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영국의 국가적 위인들을 안장하는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는 소원대로 현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헐버트 서거 다음 해인 1950년 3월 1일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했다.

기독교 가문에서 출생

필자는 대학 시절 헐버트가 쓴 불후의 명저(名著)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읽으면서 그가 한민족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와 발전 가능성이 있는 민족으로 적시(摘示)한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의 생애를 좀 더 알고 나서는 그의 학문적 기품, 정의(正義)를 바탕으로 한 가치관적 삶, 뜨거운 가슴을 가진 박애주의 정신에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한 인간의 역량이 이렇게 대단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헐버트에 대한 감동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그의 생애를 훑어보면 쉽게 풀린다.

헐버트는 남북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863년 1월 26일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州)에서 대학총장을 지냈고 회중(會衆)교회목사였던 아버지와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다트머스 대학 창립자의 증손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교도(淸敎徒)의 후예였으며, 어머니는 인도에서 복음을 펼친 선교사의 딸이다. 부모 모두 청렴성과 정의, 사랑, 겸손이라는 그리스도 정신의 피가 흐르는 가문 태생이었다.

헐버트는 칼뱅주의의 엄격한 도덕성, 인간중심사상, 그리고 충실한 기독교 정신하에서 성장했으며, 헐버트 부모는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라는 가훈(家訓) 속에서 자녀를 키웠다.

헐버트는 유소년기부터 모험심이 강했다. 1880년 외고조(外高祖) 할아버지가 세운 다트머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분초를 아끼며 학업에 열중했다. 그는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깊었으며 독서를 좋아했다. 그리스 신화, 셰익스피어 등 대문호의 고전 서적들을 섭렵했다.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봉사와 희생정신을 배웠고, 운동을 좋아하여 체육부장도 지냈다.

23세 때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과 인연

대학 졸업 때의 헐버트.

그가 1884년 여름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유니언 신학대학에 입학할 무렵부터 한민족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1884년 조선에서 서양식 교육기관을 설립한다는 연락이 오면서 그는 1886년 유니언 신학대학 2학년에 재학 중 학교를 그만두고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그해 여름 조선으로 향했다. 육영공원은 조선과 미국이 국교 수립 이후 추진했던 최초의 개화 프로젝트였다.

헐버트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두 가지를 깨달았다. 먼저 한민족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가진, 학문을 숭상하는 문화민족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조선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판단했다.

교육을 조선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았던 헐버트는 1886년부터 1991년까지 5년 동안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민족의 진수(眞髓)를 하나 둘씩 발견하면서 한민족 사랑을 싹 틔웠다. 그는 이어서 1897년 한성사범학교 교장, 1900년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이 땅의 근대적 선각자를 배출했다. ‘헐버트 교과서 시리즈’를 통해 교과서 시스템도 마련했다.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초석(礎石)을 놓은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주권을 빼앗기자 헐버트는 ‘한국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며 한국인들에게 교육에 전념하여 일본의 멸시를 분쇄하고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것을 호소했다. 헐버트는 또 학교교육을 넘어 모든 백성이 골고루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국민교육을 주창했다.

그는 1903년 YMCA 창립총회 의장으로서 YMCA를 탄생시켰다. YMCA의 설립목적과 관련해 일부 선교사들은 선교에 국한하자고 주장했으나 그는 만인에게 교육의 장(場)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YMCA는 이후 계몽주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회단체로 자리매김됐다.

최초의 한글 교과서 만들어

큰딸, 둘째 아들, 셋째 아들 레너드(뒷줄 왼쪽부터). 배경으로 한국의 병풍이 보인다. 1910년 전후 미국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헐버트는 1889년 지리사회 총서(叢書)인 <사민필지>(四民必知)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를 저술하여 육영공원에서 교재로 사용했다. 그는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라면서, 조선인들에게 어려운 한자(漢字) 대신 쓰기 쉬운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창했다. 그는 <사민필지> 서문에서 조선의 지배층이 한자만을 고집하고 한글을 업신여긴다고 한탄했다.

그는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을 시작으로 한글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이라고 칭송했다. 그는 또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보고서에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한글이 영어보다 우수하다”(Korean surpasses English as a medium for public speaking)고 결론지었다.

헐버트는 1896년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우리나라 최초로 채보(採譜)하여 논문으로 발표함으로써 아리랑이 오늘날 세계의 노래가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는 쌀과 같은 존재다’라며 아리랑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를 정확히 파악했다. 아울러 그는 군밤타령도 오선지에 채보하여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 음악사에 양악보 시대를 가져오면서, 전래민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헐버트는 1893년 감리교 선교사가 되면서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4년여 동안 삼문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출판계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했다. 1893년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1906년 노량진교회 설립 예배를 인도하면서 노량진 상수원 근처에 살던 무당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그는 1887년 언더우드와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행하는 등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자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박해받는 한국인들을 돕는 것이 참 선교”라며 대일(對日)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독립신문>의 숨은 산파역

헐버트는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있으면서, 1896년 4월 7일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서재필을 크게 도왔다. 헐버트는 서재필의 신문 창간 제의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4개월 만에 <독립신문>을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헐버트의 삼문출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헐버트는 <독립신문> 편집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이 신문의 영문판(英文版)은 헐버트가 편집인이나 다름없었다.

헐버트는 이외에도 1892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영문월간지 <한국소식>(The Korean Repository)의 공동 편집인이었고, 항일(抗日)투쟁의 선봉자였던 영문월간지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1901년 창간해 주필을 맡았다.

헐버트는 15년에 걸쳐 한민족에 대한 연구를 한 끝에 800여 쪽에 36만 개의 단어로 기술(記述)된 초대형 역사책인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1905년에 펴냈다. 이듬해에는 역사, 문화, 전통, 풍습, 산업, 사회제도 등 한국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대한제국멸망사>를 펴내 한국의 어려운 처지를 세계에 소개했다. 헐버트는 한민족의 역사를 총체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술하여 국제적으로 알린 최초의 인물이며, 미국과 유럽의 한국사 연구는 헐버트로부터 시작됐다고 여겨지고 있다.

헐버트는 “한민족은 중국인들처럼 상술(商術)에 능하지도 못하며, 일본인들처럼 무사적(武士的)인 기질을 가진 민족도 아니다. 오히려 앵글로색슨 민족에 가까우며, 극동(極東)에 사는 민족 중에서 가장 우호적인 민족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민족을 ‘합리적 이상주의자’로 보았으며, 아울러 한민족이 변화에 대한 적응성이 뛰어나고, 두뇌가 우수해 성공잠재력이 큰 민족이라고 평가했다. 헐버트는 한민족이 금속활자, 거북선 등을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며 이러한 한국의 발명품들을 100년 전에 미국의 <하퍼스>(Harpers)지 등을 통해 소개했다. 그는 또 한민족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중국 문화를 한국화했으며, 한글을 창제하는 등 독창성이 뛰어난 민족이라고 보았다.

루스벨트 만나 한국 독립 호소

헐버트에게 내린 고종 황제의 특사증. 헤이그의 영어 명칭은 ‘The Hague’로서 다른 도시와 달리 Hague는 The를 붙인다.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입수.

헐버트의 한국 사랑의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이다.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한민족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弑害) 사건 이후 언더우드 등과 함께 시해 위협에 시달리던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고종의 침전(寢殿)에서 불침번(不寢番)을 섰다. 헐버트는 특히 1895년 11월 27일 춘생문사건(1895년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친미파의 도움을 받아 주한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 당일 권총을 가슴 속에 품고 고종을 보호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다. 그러나 그 5년 전에 있었던 을사늑약에서 이미 우리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日帝)의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는 등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다.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헐버트가 벌인 주권수호활동은 참으로 눈물겹다.

고종 황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저지코자, 미국의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자신의 친서(親書)를 전달할 특사로 헐버트를 임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태프트-가쓰라(桂) 밀약(密約) 등을 통해 이미 친일(親日)노선으로 방향을 정한 뒤였다. 미국은 필리핀에서의 권익을 인정받는 대가(代價)로 한국을 일본의 손아귀로 넘기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헐버트는 1905년 11월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조야(朝野)에 조미(朝美)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이 일본의 한국침략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헐버트를 을사늑약이 끝날 때까지 만나주지 않다가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뒤에야 만나주었다.

고종의 헤이그 밀사는 헐버트 포함 4명

1942년 미국 오하이오주 애시랜드에서 임시정부 승인 촉구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모인 한미협의회 이사들. 맨 오른쪽이 이승만이며 맨 왼쪽이 헐버트이다.

이에 분개한 헐버트는 가는 곳마다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며 모국(母國) 미국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헐버트는 그 후 10년 넘게 루스벨트 대통령을 비난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1919년 서거 직전 자신이 한국을 일본에 넘겼다고 시인했다.

헐버트는 러일 전쟁 직후 극도로 심해진 일본의 한국인 박해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헐버트는 박해받는 한국인들을 위해 통감부를 찾아가 일본에 항의하는 등 있는 힘을 다해 한국인들을 도왔다. 심지어 일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부동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헐버트에게 부동산 등기문서를 들고 와 헐버트 명의로 이전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헐버트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에게 “한국인들에게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면 일본 비난을 중지하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907년 일본 궁내성(宮內省) 대신이 개성 부근에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을 고종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탈취해 갔다. 헐버트는 현장에 가서 사진을 찍어 외국신문에 이 문화재 약탈을 고발하면서 석탑 반환을 촉구했다. 후일 이 석탑은 돌아왔으며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워져 있다.

고종 황제는 1907년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하기 전인 1906년 헐버트를 조약 상대국 국가원수를 방문하는 특사로 임명했다. 헐버트는 조약상대국 국가원수들을 만나고 한국 특사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갔다. 일본이 헐버트만을 감시하는 사이 이준 열사는 무사히 한국을 빠져나갔으며 헐버트는 헤이그 등 유럽에서 한국인 특사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1907년 7월 10일 헤이그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일본의 침략주의를 비난하고 한국인 특사를 지원하는 연설까지 했다. 우리 역사는 헤이그 특사를 헐버트를 포함한 4인으로 기록해야 한다.

헐버트는 1907년 헤이그 특사파견사건 이후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후에도 한국인들을 격려하고,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면서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미국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고종 황제의 내탕금을 찾아라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준 1909년 10월 20일자 위임장. 고종 황제 어새가 뚜렷이 찍힌 또 다른 특사증이다.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입수.

헐버트는 특히 3·1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한국을 어찌할 것입니까?>(What about Korea?)라는 제목의 진술서를 미국 상원에 제출하면서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는 또 1942년 워싱턴에서 열렸던 ‘한인(韓人)자유대회’에서 고종 황제에 대해 “휜 적은 있으나 결코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헐버트는 생을 마감하기 전 두 가지 소원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일본이 탈취해 간 고종 황제의 내탕금(內帑金·조선시대에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을 찾는 일이었다.

헐버트는 1909년 미국 정부에서 보낸 경호원과 함께 서울에 잠깐 들렀을 때 고종 황제로부터 예상치 못한 부탁을 받는다. 고종 황제가 자신의 조카 조남승을 통해 위임장과 예치금 증서 등을 헐버트에게 보내면서 은행에 맡겨놓은 자신의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한 것이다. 상하이에 있는 독일계 은행인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예치한 내탕금을 찾아 미국은행에 예치해 두라는 것이다. 고종 황제는 1903년 덕화은행에 독일화(貨) 51만 마르크 상당의 금괴(金塊)와 상당액의 일본 엔화를 예치했는데, 1908년에 일본이 이 돈을 탈취해 갔다. 물론 독일 측은 예금인출(引出)을 방조했다. 이 돈은 당시 대한제국 총세입의 1.5%나 되는 돈이다. 오늘날의 가치는 정확히 산출할 수 없으나 이 돈을 연리 10%로 100년을 계산하면 약 2조원이 된다.

덕화은행 행장이 직접 써준 1903년 12월 2일자 1차 예치금 영수증. 이 예치금은 황제 폐하의 지시에 의해서만 처분될 것이라고 영수증 말미에 적혀 있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을 1989년 헐버트 손자의 집에서 헐버트가 남긴 서류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 20여 년을 이 문제와 씨름했다. 마침내 고종 황제가 예치 시 덕화은행장이 써준 예치금 영수증, 통감부 외무총장이 독일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써준 영수증 등 증거를 찾아냈다. 필자는 이어 내탕금의 예치 과정,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위임하는 경위, 일본이 예치금을 탈취하는 과정, 헐버트의 내탕금을 찾으려는 분투, 광복 후 우리 정부가 이 사실을 헐버트로부터 접하고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됐다.

헐버트는 40년 동안 이 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으며, 그는 생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은 이자까지 합쳐서 꼭 돈을 받아내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필자는 이 문제는 흥밋거리로 보거나 사소한 문제로 치부해서는 아니 되며 민족정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새로운 한일 문제로서 헐버트가 소원한 대로 이자까지 합쳐서 돌려받아야 하며 경술국치 백 년을 맞아 고종 황제와 헐버트의 100년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김영일 광복회장, 김삼열 (사)독립유공자유족회장, YMCA 안창원 회장 등과 협의했으며, 모든 분이 일본이 탈취해 간 내탕금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소송을 해서라도 기필코 받아내야 한다며 곧 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편법은 원칙을 이기지 못한다”

필자는 우리 젊은이들이 헐버트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正義)는 헐버트다’라고 할 만큼 그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서서 행동한 정의의 사도였다.

헐버트는 요란스러운 애국보다는 내면(內面)으로부터 발산하는 올바른 애국심(right patriotism)을 강조했다.

헐버트는 ‘인격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라는 가훈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또 매사에 원칙을 지키는 삶을 중요시하면서 ‘편법(便法)은 원칙을 이기지 못한다(Expediency must always yield to principle)’라는 좌우명과 함께 언제나 일관된 가치관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관된 가치관 속에서 일제의 불의(不義)에 항거하며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됐다.

헐버트는 또 교육만이 나라를 지키고 문명사회를 만들 수 있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헐버트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박애주의자였다. 그는 전인(全人)교육과 투철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다져진 평등사상과 박애주의를 실천했다.

필자는 헐버트의 삶을 본보기 삼아,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이 지성인의 길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학문 탐구의 열정과 정의를 좇는 기개를 배우기를 희망한다. 또한 이 땅에서 헐버트 같은 열린 세계인이 더 많이 배출되어 지구촌 전체의 번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더욱 성숙한 세계인이 되기를 호소한다.

아울러 헐버트가 더욱 국민 가슴 속에 파고들어, 그의 진정한 모습이 알려지고, 헐버트란 인물이 우리 근대사에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한국에서 활동한 외국인들의 역사는 선교사의 역사나 외국인의 역사가 아니다. 그들의 역사는 바로 한국의 역사다. 따라서 그들의 업적을 올바르게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우리 역사 속에서 제자리를 찾아주어야 한다. 그러함으로써 우리는 국제적으로 보은(報恩)을 아는 문화민족으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인지도도 상승될 것이다.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

1949년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는 헐버트.

필자는 대학 시절 헐버트의 <대한제국멸망사>를 접하고 감동을 받은 이래, 십수 년에 걸쳐 미국의 다트머스 대학, 컬럼비아 대학, 버클리 대학 등을 직접 방문하여 헐버트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헐버트의 외손을 포함한 헐버트의 후손들을 일일이 추적하여 그들로부터 헐버트에 관한 자료를 발굴했다. 아울러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국제적 신문들의 100년 전 기사들을 추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필자는 1999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를 발기한 이래 헐버트 후손을 초청하는 등 헐버트 기념사업을 벌여왔다. 2007년에는 헐버트 및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관련 일본 정부 기밀문서를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확보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관련 일본 정부 기밀문서 자료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필자는 2003년 국제금융 관련 회의 참가 중 런던 템스 강변 고(古)서점을 뒤지다가 헐버트의 원본(原本)을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헐버트가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보고서에 기고한 라는 기고문을 발견하고는 말할 수 없는 환희에 젖기도 했다. 2004년 헐버트의 모교인 다트머스 대학에서 헐버트가 친필로 쓴 <나의 일생>(My Life Story)이라는 글을 읽고서는 적막한 호텔방에서 감동의 눈물을 한없이 흘린 적도 있다.

헐버트는 1934년 70세가 넘어 모교에 제출한 ‘졸업 후 신상기록부(Post Graduate Data)’에서 “나는 1700만 한국인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그러한 행동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 글은 언론에 발표되는 것도 아니고, 읽을 사람도 없으며, 그저 모교에 기록으로만 남을 따름이었다. 헐버트는 그러한 글에서 한국 사랑이 자신의 최고 가치라고 고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