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12월 탈북자를 위한 자선공연 여는 ‘황진이’ 孫庭娥 : 월간조선

조선 중기 양반가의 서얼로 태어나 운명적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기녀(妓女)의 삶을 택한 황진이. 미모와 지성을 겸비했고, 예술과 자유를 사랑했던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녀의 일생은 홍석중(洪錫中), 이태준(李泰俊), 최인호(崔仁浩), 김탁환(金琸桓) 등 당대 걸출한 문장가들에 의해 소설로 그려졌고, 숱한 영화와 TV 드라마로 재현됐다. 도금봉, 김지미, 장미희, 이미숙, 송혜교, 하지원 등 내로라하는 최고 미인들이 황진이로 열연했다.

너무 많이 다뤄져 이제는 다소 진부한 듯한 황진이의 삶을 무대 위에서 생생하고 역동적으로 해석해 갈채를 받고 있는 또 다른 이가 있다. 춤과 노래, 음악과 미술이 한데 어우러진 총체극(總體劇) <황진이>의 안무가이면서 주인공으로 열연해 온 무용가 손정아(孫庭娥)씨다. 총체극 <황진이>는 대사 없이 춤과 노래로 구현되는 가무악극. 북, 장구, 가야금 등의 고유 장단에 현대음악이 곁들여지고, 태평무, 승무 등의 전통 춤사위에 현대무용이 접목돼 파격적이다. 내용도 세속과 인연을 끊고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가는 황진이의 내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손씨는 해외에서 돌아온 뒤 지난 10년 동안 <황진이> 공연에 매진해 왔다. 2007년부터는 매년 12월에 소년ㆍ소녀 가장 및 북한이탈주민 돕기 자선공연을 펼쳐오고 있다. 귀국 10주년을 맞아 올해는 더욱 특별한 무대로 관객과 만나겠다는 포부다. 손씨를 민주평통 강남구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녀는 민주평통 강남구협의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손씨는 나이를 짐작기 어려울 정도로 동안(童顔)이었다. 아담한 체구(160cm)에 선이 가늘고 고운 고전미인이었다. 맑고 낭랑한 목소리는 물론 무용으로 다져진 몸매는 ‘10대 체조선수’를 연상케 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해 온 까닭에 국내 대중에게 손씨의 존재는 아직까지도 낯설지만 국제무대 경력은 화려하다. 그녀는 중ㆍ고교 시절부터 굵직굵직한 국제 행사에 초청돼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로 활약했다. 인기와 실력이 절정에 달했던 20대 초에는 미국 뉴욕에 진출해 근 20여 년 동안 한국 전통문화를 세계에 심는 민간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2월 자선공연을 앞두고 황진이 못지않게 자유로우면서 도전적인 그녀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藝人이 아니면 비구니가 될 운명

1975년 일본 오키나와 박람회에서 공연한 민속예술가무단. 가운데가 손정아씨다.

제주도 애월읍 태생인 손씨는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녀는 “사정상 가족사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황진이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군의관이었던 아버지와 미8군에서 타이피스트로 근무했던 어머니가 만나 사랑을 했고, 그 사이에서 자신이 태어났다고 한다.

손씨가 고전무용에 입문한 것은 다섯 살 때 할머니의 권유에 의해서다. 독실한 불자였던 할머니를 따라 가게 된 절에서 그녀의 미래는 결정됐다.

“다섯 살 때 할머니를 따라 절에 갔는데, 그곳 스님께서 저를 보시더니 ‘이 아이는 예술가가 아니면 비구니가 될 운명을 타고났으니 춤과 소리를 가르쳐 보시지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유난히 저를 예뻐하셨던 할머니는 그 길로 저를 민속춤을 연구하는 분에게 데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사촌언니가 무용을 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그 길을 가도록 유도했던 것 같아요.”

제주에서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친 손씨는 어머니가 있는 서울로 상경, 한영숙(韓英淑) 고전무용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인 무용 수업을 받았다. 승무와 학춤 부문의 중요무형문화재였던 한영숙 선생은 88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 살풀이춤으로 한국무용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린 한국의 대표적 춤꾼이다.

무용뿐만 아니라 소리와 가야금도 익혔다. 중요무형문화재 19호인 김순태(金順泰) 선생에게 경기소리를, 중요무형문화재 5호인 정권진(鄭權鎭)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가야금 명인 박귀희(朴貴姬) 선생으로부터 가야금을 사사했다.

손씨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성 덕분에 춤과 소리는 물론 가야금 연주 실력까지 두루 갖춘 국악인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국내 국악인 중에 춤과 소리에 악기까지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국악원 원년 멤버였던 사촌언니는 손씨가 무대에서 춤을 추면 “황진이가 환생한 것 같다”며 감탄하곤 했다. 이때부터 무언가에 홀린 듯 황진이의 삶과 예술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자신보다 빼어난 미인이었던 사촌언니는 황진이와 같은 나이인 38세에 폐암으로 요절했다고 한다.

손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학교)에 학비 전액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초등학교 시절 다진 탄탄한 기본기 덕에 춤과 소리 부문에서 동급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기량을 발휘했다.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프로의 길을 걸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크고 작은 행사에 초청받아 무대에 섰어요. 얼굴이 알려지면서 영화 출연과 학생 잡지 표지모델 섭외도 들어왔죠. 밀려드는 스케줄로 학교 수업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여학생> 표지모델로 발탁

1981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남태평양 영화제 당시. 왼쪽부터 임예진, 유지인, 수하르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정영숙, 손정아, 김보연.

손씨는 1970년대 국악계 아이돌 스타였다. 타고난 미모에 발군의 춤과 소리 기량까지 갖추고 있어서 연예계의 유혹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김효천 감독은 그녀를 영화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끈질기게 설득했다. 하지만 국악 외길을 고집하며 모두 사양했다. 국정 홍보 영화인 <민방공이란 무엇인가>에만 한 번 출연했을 뿐이다.

“화보 촬영은 여러 번 했어요. 적십자사 헌혈 모델도 했고, 당시 인기 잡지였던 <여학생> 표지모델로 나간 적도 있죠. 또 한복 캘린더 모델로도 활동했어요. 하지만 그리 오래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춤추고 소리할 때가 가장 행복했거든요.”

고교에 진학하면서 해외공연에도 나섰다. 1975년 일본 도쿄의 제국극장에서 열린 광복 30주년 기념공연이 그녀의 해외 활동 데뷔 무대였다. 한영숙 선생을 비롯해 송수남(宋壽男) 순천향대 석좌교수, 양성옥(梁性玉)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 기라성 같은 국악계 선배와 가수 김정구(金貞九) 선생이 함께 공연했다. 당시 최연소 단원으로 참여한 그녀는 부채춤과 장구춤을 추었다.

“당시 조총련과 민단이 함께하는 자리라 대단했어요. 저는 솔로가 아니라 언니들과 함께하는 군무로 무대에 섰는데, 다음 날 현지 신문에 제 얼굴만 크게 클로즈업되어 실렸더군요. 그 때문에 언니들에게 눈총깨나 받았습니다.”

이후 국악예술학교 5년 선배인 김덕수(金德洙)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한국민속예술가무단을 조직, 엑스포나 영화제 같은 굵직굵직한 국제 행사에 초청돼 세계 곳곳을 누볐다. 그중 기억에 남는 행사는 1981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남태평양영화제. 당시 이 영화제에는 정영숙, 유지인, 김보연, 임예진 등 국내 톱 여배우들이 참석했다. 손씨는 축하무대에서 군무가 아닌 솔로 공연을 했다. 이를 지켜본 세계 유수 언론사 기자들이 다른 여배우들을 제쳐놓고 그녀에게 몰려들어 인터뷰 시도를 했다. 그녀를 한국을 대표하는 여배우로 착각한 것이다.

“공연이 끝난 후 국내외 감독들의 영화 출연 제의가 줄을 이었어요. 이때는 한 번 해볼까 꽤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집안의 반대가 심해 곧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뉴욕에 일으킨 한국 춤바람

해외 공연을 떠나기 위해 김포공항에 모인 민속예술가무단. 맨 오른쪽이 김덕수씨, 그 다음이 손정아씨다.

손씨가 미국에 정착한 것은 1983년. 공연차 뉴욕에 갔다가 브로드웨이의 매력에 빠져 눌러앉게 됐다고 한다.

“당시 뉴욕은 동양인이면 으레 일본인 아니면 중국인으로 분류될 정도로 한국에 대한 정보가 없는 곳이었죠. 코리아라고 하면 ‘노스 코리아’냐고 묻는 이가 많았어요. 뉴욕은 그야말로 한국 문화 불모지였습니다. 예술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심으리라는 도전정신이 내 안에서 솟구쳤어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았죠.”

진명고녀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어머니는 그녀의 미국행을 만류하지 않았다. 딸이 자신의 재능을 넓은 세상에 나가 마음껏 꽃피우기를 바랐다. 그녀는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코리안댄스뮤직원’이라는 조그마한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러곤 이민2세와 유학생들에게 한국의 춤과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의식 밑바닥에 잠자고 있던 한민족의 장단과 신명을 깨우기는 어렵지 않았다. 한국어를 몰라도 장단에 맞춰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아이들은 공연을 해도 좋을 만큼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었고, 우리 문화에 심취해 갔다.

그녀가 아무 연고 없는 뉴욕에 정착하기까지는 소수민족의 문화 예술을 소중히 여기는 미국 정부와 뉴욕 소재 원각사 주지 법안 스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뉴저지주 정부는 제가 한국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스튜디오를 개설하고 싶다고 하자 그에 필요한 자금을 대가 없이 출연해 주었어요. 미국은 그만큼 소수민족의 문화와 예술을 소중히 여기는 나라죠. 생활비는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던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후원해 주었습니다.”

미국 정치인들과 교류

조지프 P. 케네디 부부와 함께. 손씨는 1988~ 1992년까지 케네디 후원회 준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뉴욕 생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을 즈음 그녀는 제자들을 모아 재미한국무용단을 결성, 뉴욕에서 열리는 갖가지 행사에 참가했다. 뉴욕시에서 개최하는 소수민족 퍼레이드에도 나가고, 경찰과 소방관들을 위한 자원봉사 개념의 공연도 자청해서 했다. 그게 입소문이 나면서 크고 작은 행사에 초청됐다. 센트럴파크 서머스테이지, 카네기홀 신년 신춘기념회 공연, 마이애미 세계JC총회 축하공연, 유엔창립 50주년 유엔의 날 기념공연에 초청돼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크리스티나 토드 위트먼 뉴저지 주지사와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 관저에서 초청공연을 갖는 등 정치인들과도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됐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국에서 한국의 입지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어요. 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구본이 필요했던 시절이니까요. 핵무기 때문에 남한보다는 북한이 더 많이 알려져 있었어요. 우리는 공연을 통해 한국을 알렸습니다. 또 뉴욕 주재 한국대사들이 주지사나 시장과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죠. 미국의 정치인들은 문화예술인에게는 관대하지만 정치인들에게는 냉정한 면이 있거든요.”

각종 교육기관에서 요청하는 워크숍이나 강연 요청에도 열과 성을 다해 응대했다. 자연사박물관 내 공연장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국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뉴욕 베이사이드 내셔널하이스쿨, 뉴욕158주니어 하이스쿨, FIT, 컬럼비아대 등에서 수차례 특강을 했다. 손씨는 “우리가 진행하는 워크숍이나 특강 시간은 늘 만원이었다”고 자랑했다.

延亨默 북한 총리 주재 오찬에 초대 받아

손씨는 미국 체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1990년 10월 뉴욕에서 열렸던 남북영화제 축하공연을 꼽았다. 분단으로 가로막힌 남북 문화 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해 마련된 이 행사에는 윤일봉, 신성일, 장미희, 이미숙 등의 한국 배우와 홍영희, 오미란 등의 북한 배우가 참석했다. 손씨와 교포3세 12명으로 구성된 무용단은 양측 대표단과 500여 명의 뉴욕 거주 교민 앞에서 축하공연을 펼쳤다.

“12명의 아이들은 실력뿐만 아니라 외모도 미스코리아를 능가할 정도로 빼어났어요. 장구춤과 부채춤을 추었는데, 공연이 끝나자 장내가 떠나갈 듯 갈채가 쏟아졌죠. 메인 행사가 끝난 후 저는 고위급 인사들만 참여한 피로연에서 소리 공연을 했습니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오니 북측 인사가 저를 아는 척하며 ‘내일 연형묵(延亨默) 총리가 주재하는 오찬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떠냐’고 묻더군요.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유엔 주재 북한 대사 허정씨였어요.”

손씨는 허정 유엔 주재 북한 대사를 센트럴파크 서머스테이지에서 만났다. 그가 공연을 보고 감동해 그녀와 단원들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 자리에는 무대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열창한 소프라노 전공 유학생도 한 명 있었다. 허정씨는 두 사람에게 “남조선에도 이렇게 노래 잘하고 매력 있는 동무들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라며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그러곤 남북 문화 교류 차원에서 식사나 한 번 하자고 해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만났다.

당시 50대 초반이었던 허정씨는 키 크고 미남인데다 매너가 아주 좋았다. 고교 시절부터 해외에 나갈 때마다 소양 교육을 받아온 손씨는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미지의 북한 인사 앞에서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북한은 왜 핵개발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허정씨는 “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지도 않거니와 설사 갖고 있다 한들 같은 동포인 남한에 터뜨리겠느냐. 핵무기 이야기는 순전히 남한 정부가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날 허정씨와는 문화와 예술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런 기억 때문에 손씨는 허정씨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정중한 초대에도 큰 고민 없이 응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우리 단원 12명을 모두 초청하는 것으로 알고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저만 초대하는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왜 나만 초대하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동무의 노래와 춤이 너무 아름답고 인상이 좋아서 특별히 초청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손씨는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허정씨와는 구면이었고, 그들의 호의에 응하는 것도 남북 교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초대에 응했다.

金正日의 여인으로 낙점?

그날 밤 자정 무렵 뉴욕 주재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북측이 마련한 오찬에 참석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안 가냐”고 하자 대사관 측은 사뭇 준엄한 목소리로 “앞으로도 계속 한국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싶으면 가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내일 아침에 어떻게 거절을 할지 고민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밤새 뒤척이다 오전 7시쯤 전화를 했습니다. ‘새벽부터 위경련이 일어나 오늘 오찬에 참석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 했죠. 몹시 아쉬워하더군요.”

그로부터 얼마 후 허정씨를 만났다. 그는 그녀에게 “그날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은 후 “한국 정부 측에서 못 가게 한 것 다 알고 있다”며 웃었다. 이날도 둘은 남북 정치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한 채 문화 예술 이야기만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후 안기부(현 국정원) 측에서 손씨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갔더니 허정씨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꼬치꼬치 물었다. 그녀는 그날 두 사람이 나눈 이야기를 솔직하게 모두 설명했다. 그러곤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람 상당히 멋있던데요”라고 말했다가 안기부 직원으로부터 “손 원장 빨갱이 아니요?”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북측 인사와는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다 2년 후 서울 워커힐 호텔의 남북고위급회담에 초청인사로 참석해 북측 인사들을 다시 만났다. 당시 호텔 만찬장에는 테이블마다 남측 인사와 북측 인사가 반반씩 섞여 앉아 있었는데, 서로 조심하느라 잔뜩 경직돼 있었다. 그녀는 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테이블을 돌며 “황진이옵니다”라고 인사를 전했다.

“제가 인사를 드릴 때마다 북측 인사들이 공통적으로 한 인사말이 ‘평양에 놀러 오라’는 거였어요. 생각해 보니 저를 만나는 북측 인사들은 모두 저를 북한에 초대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새터민(탈북자)에게 했더니 제가 김정일이 좋아할 만한 모든 요소를 갖췄다고 얘기해 깜짝 놀랐어요. 김정일이 저처럼 작고 아담하면서 목소리가 맑은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공연차 평양에 갈 일이 많았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손씨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 동부 문화위원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글로벌 문화 친선대사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손씨의 이런 다양한 경험을 필요로 한 한국예술단체총연합은 그녀에게 정책실장 자리를 맡기며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녀는 미국 국적을 기반으로 할 일이 많아 시민권을 유지한 채 귀국했다. 내심 고국에 들어가면 한국 전통예술을 세계에 알린 공로자로 환영받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그렇듯 문화계 역시 학연 지연의 고리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았다.

“저는 대학도 미국에서 나온 데다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아 문화계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어요. 귀국 후 10년 동안 〈황진이〉 공연만 하며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지요. 앞으로 이중국적이 허용되면 활동 폭이 좀 더 넓어질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황진이〉 공연에만 전념할 생각이에요.”

첫 사랑

나이를 잊은 듯한 그녀의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도 미혼이다. 그녀에게 “진정한 황진이가 되려면 뜨거운 연애 경험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자 “사랑이 왜 없었겠어요”하며 살짝 연애담을 털어놓았다.

“20대에는 남자들이 저와 데이트 한번 해보려고 줄을 섰어요. 그중 꽤 진지하게 만난 이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사세가 기울어가는 준재벌집 아들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 창업주의 외손자였어요. 둘 다 저를 열렬히 사랑했는데, 저는 대기업 쪽보다는 준재벌 쪽에 마음이 가 있었지요. 이런 저를 두고 어머니께서는 ‘재벌가 남자를 두고 하필이면 망해가는 집안의 아들을 좋아한다’고 타박이셨죠.”

황진이가 그랬듯 사랑에 빠진 그녀의 눈에 조건이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남자 쪽 집안이 파산 후 미국으로 떠나면서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녀를 해바라기하던 재벌가 남자와도 연이 닿지 않았다. 무용하는 여자를 ‘기생’으로 여기며 천대하는 집안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어떻게 미국 연락처를 알아냈는지 재벌가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자는 “아직도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남자랑 결혼했느냐. 이혼하고 나와 살면 안 되겠느냐”며 통사정했다. 그녀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가슴에 좋은 추억으로 묻어두자”며 전화를 끊었다.

두 번째 사랑은 미국 생활 10년째이던 1990년 초에 찾아왔다. 그는 미국 명문 공대 출신의 엘리트였고, 한국 모 재벌기업 회장이 오른팔로 여길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다 경제사범이 되어 뉴욕에서 도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손씨보다 10년쯤 연상이었지만 젊고 명석했으며 무엇보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남자여서 매혹됐다고 한다.

“사랑도 싫다, 이젠 황진이처럼 살 터”

총체극 <황진이>는 전통 춤과 소리에 현대음악과 무용을 접목한 가무악극이다.

“그 사람과는 결혼까지 결심했을 정도로 사랑에 푹 빠져 지냈어요.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달콤한 청혼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죠.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땐 그 사람을 믿고 의지했던 만큼 깊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는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잃고 싶지 않아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겼다고 했지만 이미 신뢰에 금이 간 마당이라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더군요. 전 아닌 것은 칼로 무 자르듯 쳐내는 성격입니다.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에요.”

손씨는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리지 못하는 것 역시 나의 운명인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비구니가 부처님 모시고 염불하며 평생을 살 듯 저 또한 황진이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며 춤과 소리만 하며 살 팔자인가 봅니다. 그것이 제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죠. 세속을 떠나 구도의 길을 떠난 황진이처럼 말이에요.”

인터뷰 도중 손씨의 휴대전화 벨은 쉴 사이 없이 울려댔다. 12월에 있을 공연 때 의상을 담당할 디자이너, 무대를 장식할 서예가, 영상전문가, 작곡가 등의 스태프와 출연진이었다. 그녀는 “드라마 <황진이> 의상을 만든 김혜순 디자이너가 한복을 담당하고, 안숙선(安淑善)·이춘희(李春羲) 명창과 그의 제자들이 함께하며 장사익 선생이 게스트로 출연하기로 돼 있어 이번 <황진이>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공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닝타임 1시간20분짜리 이 작품은 오는 12월 2일 오후 4시와 저녁 8시 2회에 걸쳐 공연된다.⊙

사진 : 서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