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벌 2세는 富보다 다양한 기회를 물려받은 사람”
⊙ 1919년 설립한 경방 부지 밀고 대형 쇼핑몰 세워… 1년 만에 매출 1조1000억원
⊙ 형과의 불화설…“만날 싸워요. 부부싸움하듯”
金潭
⊙ 1965년생. 인하대 경영학과 졸업.
⊙ 경방해외사업부, 경방유통부회장, 우리홈쇼핑 부회장 역임.
現 경방 대표이사 부사장 겸 경방타임스퀘어 대표.
⊙ 1919년 설립한 경방 부지 밀고 대형 쇼핑몰 세워… 1년 만에 매출 1조1000억원
⊙ 형과의 불화설…“만날 싸워요. 부부싸움하듯”
金潭
⊙ 1965년생. 인하대 경영학과 졸업.
⊙ 경방해외사업부, 경방유통부회장, 우리홈쇼핑 부회장 역임.
現 경방 대표이사 부사장 겸 경방타임스퀘어 대표.
지난 2006년 9월 초,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위치한 경방 사무실.
쇼핑몰 공사를 논의하기 위해 설계팀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상적인 회의였다.
“쇼핑몰 안에 기둥을 없애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구조가 복잡하니까 이쪽 부분은 기둥 없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다른 쇼핑몰들은 중간에 전부 기둥이 세워져 있지 않나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거기 기둥 있었죠?”
팀원들이 쇼핑몰 내부에 기둥 세우는 문제를 두고 충돌했다. 이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김담(金潭) 경방타임스퀘어 대표이사는 회의 자료를 덮었다.
“갑시다. 직접 보면 알겠죠.”
김 대표는 그 길로 인천공항으로 갔다.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일본 후쿠오카행(行) 비행기표를 끊고, 설계팀 직원들과 일본의 초대형 쇼핑몰 ‘다이아몬드시티’로 갔다. 기둥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 난 뒤, 다시 공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빨리 탈 수 있는 인천행 티켓을 끊었다. 직원들은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예정에 전혀 없던 당일 해외 출장. 이런 일은 이후에 여러 번 반복됐다.
“쇼핑몰이라는 것이 구조가 엄청 복잡하잖습니까. 기술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가능한지, 않은지를 모형만 봐서는 판단이 안 설 때가 초창기에 종종 있었습니다. 직접 가 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와서 다시 일하는 거죠. 당일치기로 해외 출장을 다녀온 적이 워낙 많아서….”
‘이 쇼핑몰을 짓기 위해 해외 어디를 몇 번이나 다녀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하도 많은 곳을 다녀서 횟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며.
당일치기로 해외 출장을 다니는 것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출장지에서 여유롭게 밥먹고, 골프 한 게임을 치지 않으면 당일로 다녀와도 시간이 남는다”고 한술 더 떴다.
이 사람, 엄청나게 급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무대뽀’가 아닐까 싶었다. 하긴 수십 년 동안 한자리에 있던 공장을 부수고, 이사회를 설득해 6000억원짜리 공사를 하여, 그 땅에 국내 최초로 ‘몰’을 만든 사람이니, 이 정도의 저돌성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담 경방 타임스퀘어 대표이사다.
인촌 김성수-동은 김용완
고려대학교 설립자이자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은 1919년, 민족의 경제적 자립과 독립을 이루겠다는 정신으로 경성방직주식회사(현 경방)를 설립했다.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다. 그리고 이곳 경성방직 영등포 직포 공장에서 광목, 면포 제품이 생산됐다. 경제 개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섬유산업은 세월이 흘러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이 공장이 가진 의미는 남다르다. 국내 재계(財界)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경방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경방은 순수하게 국내 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국민 기업으로 1956년 3월에는 국내 최초로 주식을 상장(上場)했다. 1970년 7월 사명을 바꾼 뒤, 경방어패럴(1990년 3월), 경방유통(1992년 7월)에 투자했고, 한강케이블TV(1994년 2월)를 설립했다. 경방필백화점(1994년 8월)을 준공하고, 2001년에는 우리홈쇼핑을 개국했다.
삼성, 현대, LG 등 재계 서열 상위에 랭크된 그룹에 비해 규모는 턱없이 작지만, 경제 부문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 회사. 우리의 현대사(史)와 궤를 함께한 1만8300평의 영등포 땅(경방필백화점 3200평과 공장부지 1만5100평)이 오늘날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단지로 변신했다. ‘경방타임스퀘어’다. 메리어트호텔, 신세계백화점, 이마트, CGV, 교보문고와 오피스 2개 동이 입점해 있다.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고(故) 김용완(金容完) 명예회장의 손자 김담 대표다. 고 김 명예회장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매제다. 부인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누이동생 고 김점효(金占效) 여사.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하 전경련)을 여섯 번 맡았던 한국의 대표 기업인이다. 고 김 명예회장의 장남이 김각중(金珏中) 경방 명예회장 겸 전(前) 전경련 회장이다. 그리고 김각중 명예회장의 차남이 김담 대표다.
지난 9월 7일, 영등포 경방타임스퀘어에서 김담 대표를 만났다. 오는 9월 16일은 쇼핑몰 오픈 1주년이 되는 날이다. 개점한 후 1년 동안 좋은 실적을 거둬서인지, 얼굴이 밝아 보였다.
―출범 1년의 성과에 대해 만족하나요.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국내에 처음으로 ‘몰’이라는 개념을 선보인 것이 가장 큰 성과였습니다. 매출, 방문고객 숫자 등에서 내부 목표치를 달성했고요. 성과보다는 공부를 많이 한 점이 좋았습니다. 고객들의 니즈(needs·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경영학 책에 나오거나 매뉴얼로 정해진 것이 아니잖습니까. 쇼핑몰을 개점해 영업하면서 고객과의 소통법을 배웠죠.”
―몰이 일반적인 백화점, 유통공간과 뭐가 다른가요.
“한마디로 원스톱 쇼핑몰이죠. ‘한지붕 아래서 모든 것을 다(everything under the one roof)’라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우선 규모가 커야 하고요, 백화점, 할인점, 호텔, 병원, 레스토랑 등 모든 것들이 입점해야 하죠.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파는 공간이 몰입니다. 이름이 타임(시간) 스퀘어(공간)인 점도 이 때문입니다.”
하루 평균 방문객 수 28만명(주말)
―영등포의 명소가 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나요.
“걱정 반, 기대 반. 사실 기획할 때에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신(新)개념 쇼핑몰이니까요.”
―기존 쇼핑몰과의 차이점이라면요.
“쇼핑몰은 해당 매장의 공간을 분양하지만 저희는 100% 임대했습니다. 부지와 건물은 경방이 소유한 채로 각 업체들에 임대를 하고, 운영 및 관리를 맡는 형태입니다. 모든 매장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고, 그만큼 이곳을 찾는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국내의 여타 쇼핑몰과 차원이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쇼핑몰이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이네요.
“아휴, 돌아다니면 스트레스 받아요. 여기저기 잘못한 곳이 자꾸 눈에 띕니다. 자기 작품이 만족스러운 작가가 과연 있을까요?”(웃음)
쇼핑몰이 지난 1년 동안 일군 성과는 눈부시다. 개점 6개월 만에 매출 5200억원, 1년 만에 1조1000억원(추정 매출)을 기록했다. 하루 평균 28억원을 벌어들인 셈이다. 평일에는 하루 16만명, 주말에는 28만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경방 타임스퀘어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시원했다. 천장이 높았고, 사방이 유리로 돼 있어 햇살이 몰 안으로까지 들어왔다. 기존의 백화점이 매장으로 빼곡히 메워져 있는데 이곳은 정반대였다. 매장은 건물의 양쪽에만 모여 있고 몰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하 5층~지상 5층을 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한가운데에 있어 매장이 아니라 고객들이 몰 가운데를 꽉 채우고 있었다.
기자가 “기존의 백화점처럼 가운데 공간까지 매장으로 채웠으면 임대수입이 배는 늘었을 것”이라고 하자, 김담 대표가 손을 가로저었다.
“경방 타임스퀘어에 현재 200여 개의 매장이 있는데 전부 매장으로 채웠다면 3배 정도 늘었을 겁니다. 비워 둔 공간을 보면서 아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출범 초기부터 우리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담겨 있거든요. 매장을 위한 동선이 아니라, 고객의 입장에서 매장을 채워 넣자는 것입니다. 텅빈 가운데 공간이 주는 미학(美學), 고객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했던 우리의 가치를 임대 수입과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공실률 0%
―경영철학인가요.
“간혹 경방처럼 오래된 회사들의 흥망에 대해 살펴봅니다. 눈앞에 보이는 단기간의 이익, 손에 잡히는 이윤을 따르는 회사는 오래가지 못하더군요. 현재의 이익과 미래의 가능성을 바꾸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득, 무작정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지양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쇼핑몰 안에 빈 공간이 없어 보입니다.
“현재 100% 임대가 이뤄졌습니다. 몰을 오픈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공실률이었습니다. 키플레이어(주요매장)가 들어오면 따라오는 브랜드들이 있는데 그런 점포를 유치하는 데 사활을 걸었습니다. ‘자라’(스페인의 의류 브랜드)가 입점 결정을 한 것이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다른 매장의 임대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경방타임스퀘어 1층에 자리 잡고 있는 ‘자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패션브랜드다. 전(全) 세계 75개국, 1500여 개의 주요 도시에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이 브랜드는 입점 매장을 선정하는 데 무척 까다로운 심사를 거치기로 유명하다. 매장의 인테리어며 윈도 등 매장 디자인을 깐깐하게 기획한다. 오죽하면 업계에 ‘자라가 들어가는 사이트(Site)는 성공한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다. 경방타임스퀘어에는 루이뷔통, 티파니, 까르띠에와 같은 최고급 브랜드에서부터 저가 브랜드까지 다양한 매장이 입점해 있다.
김담 대표에게는 이곳에 입점한 매장 하나하나가 추억 어린 곳이지만, 교보문고는 유독 그러하다. 교보문고는 이곳에 광화문점에 버금가는 1200평(전용면적) 규모의 서점으로 들어와 있다. 당초 교보문고의 입점은 오너인 신씨 일가와 논의가 거의 끝났던 일이었다. 별 문제가 없이 진행됐던 일은 의외의 곳에서 틀어졌다. 교보문고가 다른 건물에 세를 들어 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교보문고 입점시키려고 공사 중에 다시 구조보강
교보측은 김담 대표에게 “교보문고가 들어갈 만큼의 부지를 떼어 팔라”고 요청했다. 처음부터 경방의 관리, 책임하에 100% 임대 매장을 둘 예정이었던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결국 딜은 깨졌고, 다른 중소 서점과 논의가 진행됐다. 이 와중에 타임스퀘어의 시공사인 GS건설은 2006년 6월, 건물 공사에 착공했다. 건물이 한창 올라가고 있는데 교보측에서 다시 입점을 제의했다.
김담 대표의 얘기다.
“서점은 건물에 구조보강을 많이 해야 합니다. 건물이 한창 올라가고 있는데 입점 의사를 밝혀서 한동안 고생을 좀 했습니다. 교보를 꼭 유치하고 싶기는 하고, 현실적으로 공사를 다시 보강해서 해야 하는 만큼 비용이 올라가고 고민스러웠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입점한 곳이 교보문고입니다. 결국 구조를 보강해서 지금의 자리에 들어왔죠.”
―입점한 점포가 200개 넘다 보니 각각 사연이 다르겠네요.
“많죠. 처음에는 입점을 해 달라고 사정하고 다니고, 나중에는 서로 들어오겠다는 것을 정리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래도 몇몇 공간은 몰 오픈 이후까지 그냥 둘걸 그랬어요. 이제 와서 보니 꼭 필요한데 장소가 없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점포가 있거든요.”
―혹시 영등포가 갖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쇼핑몰 사업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등포, 이곳은 참 희한해요. 신세계, 경방의 복잡한 사연이 묻어 있습니다. 예전에 경방필백화점이 있을 때 바로 옆에 신세계백화점이 있었습니다. 맞은편에는 롯데백화점이 있었죠. 쇼핑몰 사업을 구상하기 훨씬 이전에 바로 옆에 있는 신세계와 합치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신세계와 경방 모두 가져갈 수 있는 파이가 워낙 컸거든요.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일이 안됐습니다. 80% 이상 확신했던 일인데요. 될 것 같았던 일이 안되고, 또 안될 것 같았던 일은 되고, 뭐 그런 거죠. 경방필백화점 매각 얘기가 나돈 적도 있고, 여러모로 사연이 많은 땅이 영등포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둥지를 튼 것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도심의 재개발, 부동산 개발업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쇼핑몰 구상에 대해 이사회 반응 냉담
김담 대표가 오늘날의 ‘몰’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이었다. 당시 경방 내부에서는 ‘금싸라기’ 영등포 공장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를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김담 당시 이사도 영등포 공장터 재개발 구상을 시작했다. 경방의 옛 사옥 다락방에 달랑 책상 하나, 전화기 하나를 놓고서. 당초에는 이렇게 큰 쇼핑몰을 지을 생각이 아니었다.
시장조사와 구상을 거듭한 끝에 그는 2002년, 복합쇼핑몰 사업 모델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정했다.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프로젝트의 내용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했다. 몇몇 지인들은 “대한민국에 있는 브랜드를 전부 모아도 그 공간을 채울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연 매출이 1900억원 정도에 불과했던 경방이 공사비만 6000억원 이상이 투입되는 쇼핑몰 사업을 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김담 대표의 얘기다.
“이사회의 반응이요? 음…. 한마디로 냉(冷)했죠.”
―당시 상황을 보면 이사들이 이해갈 것 같은데요.
“자금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충 계산을 해 보니 1조원 정도가 들어가겠더군요. 경방 영등포 부지가 4000억원 정도 될 것 같고, 입점할 매장의 보증금이 3000억원 정도로 추산됐습니다. 나머지 3000억원은 은행에서 빌리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어차피 경방의 돈을 쓸 생각은 아니었고, 때마침 선진금융기법으로 무장된 대출이 많았습니다. 이참에 이것을 충분히 활용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보수적인 경방의 정서에서 무모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이사회의 반대를 각오했던 터라 놀라지 않았습니다. 비전문가들을 설득해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죠. 그보다 제 스스로에게 ‘너 얼마나 자신있어?’라고 끝없이 물어봤습니다.”
첫 작품은 우리홈쇼핑
―결국 이사회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까.
“타협을 봤습니다. 일단 부지에 대한 용도변경을 신청하고, 건축허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땅의 가치가 올라갈 테니까 그때 가서 땅을 팔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회사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사회와 ‘타협’한 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사들을 계속 설득했다. 결국 사업을 첫 구상한 지 4년 만인 2006년 6월에 서울시에서 건축허가가 떨어졌다.
‘경방타임스퀘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와중에 일이 터졌다. 경방이 지분투자를 했고, 김담 대표가 이끌고 있던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의 경영권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이호진(李豪鎭) 태광산업 회장이 우리홈쇼핑에 대해 적대적 M&A를 선언한 것. 김담 대표에게 우리홈쇼핑은 남다른 회사다. 우리홈쇼핑 얘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이 금세 변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입을 열었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그가 본격적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했던 2000년 무렵에 경방은 돈벌이가 잘 되지 않았다. 유통부문에 경방필백화점이 있었는데 단독 점포이면서 브랜드 입점이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백화점과 시너지 효과를 내고자 생각해 낸 것이 홈쇼핑 사업 진출이었다. 느닷없이 작은아들이 ‘홈쇼핑’이라는 낯선 업(業)을 하겠다고 나서자, 부친인 김각중 경방 명예회장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김 명예회장이 급히 그를 찾더니 다짜고짜 경기도의 모처로 오라고 했다. 그곳에는 먼저 홈쇼핑 시장에 진출한 모그룹의 K명예회장이 있었다.
태광산업과의 악연
김담 대표의 얘기다.
“제가 홈쇼핑 사업을 계속 하겠다고 우기니까 아버지께서 답답한 마음에 친구한테 물어보러 가셨나 봅니다. 두 양반께서 한 시간 정도 차를 드시며 대화를 했는데 K명예회장께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한 모양입니다. K명예회장이 저를 한참 쳐다보더니 ‘테레비에서 그거 팔면 돈은 우째 받노?’ 이러시더라고요.(웃음) 워낙 연세가 있으시니까 그분들 생각에는 잘 이해가 안 가셨던 거죠. 이렇게 해서 시작한 사업이다 보니 제가 책임지고 꾸려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홈쇼핑 사업권을 따냈고,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2001년 5월.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적 흐름이었을까. 개국 이듬해인 2002년에 매출 3500억원 영업이익 마이너스 13억원을 기록했던 홈쇼핑은 매년 성장을 거듭했고, 2006년 매출 6800억원 영업이익 780억원의 회사로 성장했다. 이윤이 남다 보니 투자 회사인 경방에 배당을 많이 줄 수 있었고, 사업 재미가 쏠쏠했다. 홈쇼핑 사업에 관심이 컸던 일본의 후지TV에 컨설팅을 하러 갔다가, 귀빈 대접을 받은 적도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홈쇼핑 시장은 성장세가 가팔랐고,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가 홈쇼핑의 성공적 진출로 인해 사내(社內)에서 인정을 받고, 경방타임스퀘어에 대한 구체적 실행을 하고 있던 와중에 경영권을 위협받게 된 것이다.
회사는 50%의 지분에 한 주를 더 가진 사람이 경영권을 갖는다. 총성 없는, 하지만 무엇보다 비정한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다.
―태광산업에서 M&A를 선언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지켜야겠다. 그냥 무조건 뺏기지 말자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김담 대표는 말을 아꼈다. 벌써 4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은 그에게 상처인 듯 보였다.
“외로웠죠. 회사 경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홈쇼핑 사업에 진출해서 겨우 돈도 벌고, 힘들게 이끌어 오면서 사업하는 재미를 알아 가던 때였잖습니까. 하지만 컨소시엄 형태이다 보니 우호지분을 모두 합쳐도 50%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주가 차익을 남기려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태광산업과 돈 싸움에서 밀렸죠.”
김담 대표는 신문에 ‘경방-태광산업의 홈쇼핑 전쟁’ 기사가 실리기 전에 부친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부친과 태광산업 창업주 이임룡(李壬龍) 회장의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김각중 명예회장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홈쇼핑 포기
김담 대표는 인터뷰 중에 여러 번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쌓아 왔던 신뢰관계, 인간관계가 무너졌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아버지께 죄송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 말라는 사업을 우겨서 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 욕심이었지, 아버지는 사업을 이렇게 꾸리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 있잖습니까. 아버지께 늘 죄송하죠.”
태광산업과 전쟁을 벌인 지 1년 만에 그는 우리홈쇼핑을 롯데그룹에 넘겼다.
―결국 진 건가요.
“그 전부터 롯데, 신세계 등에서 러브콜이 왔었는데 무시했습니다. 도저히 못 견딜 때 롯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약간의 우울증을 겪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솔직히 태광산업에는 못 주겠더라고요. 감정상. 그래서 롯데한테 뱉었습니다.”
외부에서는 ‘경방이 쇼핑몰을 지으려고 홈쇼핑을 팔았다’고 했다. 앞뒤가 달랐지만, 그는 침묵했다. 우리홈쇼핑을 팔아 생긴 이득으로 경방은 빚을 모두 청산했다. 경방은 당시 이익잉여금이 제로였고, 빚이 2000억원 정도 있었다.
“혹시 아직도 홈쇼핑 사업이 아쉽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 안 합니다. 그 회사가 더욱 잘됐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제 별명이 사무라이거든요. 정이 많아서 쉽게 사람을 자르지 못하지만 한번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재벌 3세로 산다는 것
홈쇼핑 전투가 일단락된 후에 이번에는 ‘형제의 불화설’이 나돌았다. 김담 대표가 장내에서 경방의 주식을 대거 매집했기 때문이다. 그의 지분은 형인 김준(金畯) 경방대표이사 사장을 넘어섰다. 통상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장자(長子)에게 지분을 더 주거나, 또는 자녀에게 균등하게 지분을 준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뒤바뀌었으니, 오해를 살 만했다. 현재 경방은 김담 대표가 전체의 20.95%, 김준 대표 13.42%, 김각중 명예회장이 0.4%를 보유하고 있다.
―형과의 불화설이 있었죠?
“형님요? 둘이 만날 싸우는데요.”(웃음)
―사이가 안 좋으세요?
“부부싸움하듯이 싸워요. 재산 싸움을 하는 건 아니고요. 아버지께 회사 주식을 증여받으면 경영권이 누구한테 간다는 식으로 싸움이 일어날 수 있지만 저희의 경우는 아닙니다. 구두닦이의 ‘찍새’와 ‘딱새’라고 보면 됩니다. 형님과 저는 역할을 나눠서 업무를 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요.
“우리홈쇼핑을 만들 때 제 개인 돈이 좀 들어갔는데 회사를 처분하면서 그 돈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형님과 상의를 하다가, 그래도 가업(家業)인 사업, 또 경방을 이어가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 이익금으로 경방 주식을 제가 샀고, 형님은 경영권을 유지하는 정도로만 갖고 있겠다고 해서 최대주주가 됐습니다. 경영권싸움은 얼토당토않은 얘기입니다.”
―할아버지 김용완 선생, 아버지 김각중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재벌 3세입니다. 재벌은 늘 대중의 관심거리잖습니까.
“저희 집안이 큰 재벌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재벌에 대한 오해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큰 재벌 중에서 검소하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회생활을 겪어 보니까 재벌 2세, 3세들이 돈이나 회사를 물려받는 것은 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큰 재벌이라도 재산은 얼마든지 까먹을 수 있습니다. 재산보다는 사회적인 평판,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그런 것들과 기회를 많이 얻는 사람들이 재벌 2, 3세라고 생각합니다.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물려받고, 또 그 터전을 키워 나갈 기회가 큰 사람들입니다. 물려받는 재산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벌 2, 3세들이 물의를 일으켜 자주 신문에 오르내립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못 활용하면 그렇게 됩니다. 남들보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주어진 환경을 잘 이용하는 법, 스스로 매니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상 고민이 있을 때 상의하는 재벌 2세들은?
“박지원(朴知原) 두산중공업 대표와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김정완(金庭完) 매일유업 회장과는 콘텐츠, 아이디어를 자주 나누는 사이고, 정용진(鄭溶鎭) 신세계 부회장, 이재현(李在賢) CJ회장은 저를 진심으로 대해 주는 좋은 파트너죠. 문덕영 아주LFN그룹 사장은 이상하게 마음이 안좋을 때 생각나는 분이고, 이외에도 많아서요.”(웃음)
“좋아서가 아니라 필요하니까 한다”
쇼핑몰 사업은 복합적인 사업이다. 우선은 부동산 개발업이고, 커다란 공간에 매장을 넣어야 하는 임대업이다. 이외에 그 넓은 공간에 기운을 불어넣는 문화사업이기도 하다. 유행에 민감한 사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김담 대표의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은 오래된 ‘SKY’폰이었다. 요즘 재계에 한창 유행인 ‘트위터’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CEO들이 사생활을 공개하고 휴대폰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글쎄요. 트렌드에 대한 학습, 직원들과의 교감은 좋지만 굳이 새로운 것을 빨리 시도하는 편은 아닙니다. 사업에 필요하다면 꼭 해야겠지만요.”
―주위 얘기로는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하던데요.
“아, 전혀 아닙니다.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술, 공간에 대한 이해가 우리 사업에 필요하잖습니까. 간혹 좋아서 한다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저는 좋아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억지로 합니다. CEO는 고통스러워도 필요한 일이라면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CEO는 어떤 사람인가요.
“경영학 원론의 첫 줄에 나와 있는, 주주(株主)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애써야 한다는 기본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입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원칙입니다. 거기에 주주에게, 직원들에게, 스스로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CEO가 좋은 경영자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에 억지로 취미를 붙인다’고 했지만, 타임스퀘어는 개장 이후 여러 문화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쇼핑과 문화를 결합시킨 마케팅은 처음 설계단계부터 김 대표가 구상해 온 일이다. 단순한 이벤트 수준에서 벗어나 대중가요부터 뮤지컬 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연이 매주 쇼핑몰에서 펼쳐진다.
김담 대표와의 인터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질문을 하면 곧장 답하는 스타일이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단답형으로 답하고, 거기에 살을 붙여 설명을 했다. 40대(代)의 패기가 물씬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경방 평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무역부 수출과에 첫발을 내디뎠다. 인보이스, 선적 서류를 만드는 것이 첫 업무였다. 거래처 관리 업무를 맡았고, 경리, 자금부를 거쳤다. ‘회장님의 아들’로서 재미있게 지냈을 것 같은데, 그는 정작 이때부터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거래처나 은행에 가면 이상했습니다. 저를 좀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은 ‘회장님 아들이 왔네’라고 하고, 또 무시하고 싶은 사람은 ‘일개 평사원이 왔는데 내가 꼭 나가야 해?’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때 나의 존재 자체가 남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평사원’이자 ‘회장님의 아들’인 그는 1994년 경방 일본 지사로 떠났다. 월급 이외에 집에서 주어지는 ‘용돈’은 없었다. 일본의 비싼 물가 덕분에 택시를 탄 적이 없다. 전철 타기가 아까워서 걸은 적이 여러 번.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머릿속에는 ‘창업’이라는 두 글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경방으로 돌아왔고, IMF를 맞아 회사의 구조조정을 도맡아 했다. 불필요한 사업부문을 정리하고, 홈쇼핑이라는 신사업에 진출했고, 결국 국내에 처음으로 ‘몰’의 개념을 도입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 어언 20년이 됐다.
매장 오픈 전날, 전직원에게 이메일 보내
그는 꼭 1년 전인 지난 9월 15일, 개장을 하루 앞두고 텅빈 쇼핑몰을 둘러봤단다. 무언가를 이뤄 냈다는 감동에 집으로 돌아가서도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2000년 겨울, 경방의 옛 사옥 다락방에 달랑 책상 하나와 전화기 하나로 첫 살림을 꾸렸을 때 패기와 꿈은 있었지만 솔직히 앞날은 막막했습니다. 주위 상황과 환경 또한 열악했습니다. (중략) 업계의 관행이 어떠한 건지, 어떤 거래선을 택해야 하는 건지, 누구의 말이 맞는 건지, 우리는 처음부터 학습하며 일을 해 나가야 했습니다. 뼈아픈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에 치가 떨려 지독히도 긴 밤을 지새워야만 했습니다. (중략) 우리에게 출근시간, 퇴근시간, 여름휴가, 휴일, 주말 취미 등의 단어는 사치였습니다. 이 편지 한줄 한줄에 여러분 모두의 이름과 땀에 대한 감사를 담았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쏟아졌던 염려의 시선은 이제 감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내일은 또 다른 시작과 도전입니다.>
10년 동안 기획하고,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쇼핑몰을 탄생시킨 그는 벌써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경방타임스퀘어가 어디에 내놔도 경쟁력 있는 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재개발 지역에 제2호점, 3호점을 내놓을 생각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서울의 종로 한복판에 이런 쇼핑몰이 들어선다면, 정말 근사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저돌적’인 이 사람은 벌써 이 생각을 실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진 : 서경리
쇼핑몰 공사를 논의하기 위해 설계팀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상적인 회의였다.
“쇼핑몰 안에 기둥을 없애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구조가 복잡하니까 이쪽 부분은 기둥 없이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다른 쇼핑몰들은 중간에 전부 기둥이 세워져 있지 않나요?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거기 기둥 있었죠?”
팀원들이 쇼핑몰 내부에 기둥 세우는 문제를 두고 충돌했다. 이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김담(金潭) 경방타임스퀘어 대표이사는 회의 자료를 덮었다.
“갑시다. 직접 보면 알겠죠.”
김 대표는 그 길로 인천공항으로 갔다. 가장 빨리 떠날 수 있는 일본 후쿠오카행(行) 비행기표를 끊고, 설계팀 직원들과 일본의 초대형 쇼핑몰 ‘다이아몬드시티’로 갔다. 기둥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 난 뒤, 다시 공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빨리 탈 수 있는 인천행 티켓을 끊었다. 직원들은 사무실로 돌아와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예정에 전혀 없던 당일 해외 출장. 이런 일은 이후에 여러 번 반복됐다.
“쇼핑몰이라는 것이 구조가 엄청 복잡하잖습니까. 기술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가능한지, 않은지를 모형만 봐서는 판단이 안 설 때가 초창기에 종종 있었습니다. 직접 가 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와서 다시 일하는 거죠. 당일치기로 해외 출장을 다녀온 적이 워낙 많아서….”
‘이 쇼핑몰을 짓기 위해 해외 어디를 몇 번이나 다녀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하도 많은 곳을 다녀서 횟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며.
당일치기로 해외 출장을 다니는 것은 별일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출장지에서 여유롭게 밥먹고, 골프 한 게임을 치지 않으면 당일로 다녀와도 시간이 남는다”고 한술 더 떴다.
이 사람, 엄청나게 급한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무대뽀’가 아닐까 싶었다. 하긴 수십 년 동안 한자리에 있던 공장을 부수고, 이사회를 설득해 6000억원짜리 공사를 하여, 그 땅에 국내 최초로 ‘몰’을 만든 사람이니, 이 정도의 저돌성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담 경방 타임스퀘어 대표이사다.
인촌 김성수-동은 김용완
 |
| 故 김용완 경방명예회장. |
경방은 순수하게 국내 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국민 기업으로 1956년 3월에는 국내 최초로 주식을 상장(上場)했다. 1970년 7월 사명을 바꾼 뒤, 경방어패럴(1990년 3월), 경방유통(1992년 7월)에 투자했고, 한강케이블TV(1994년 2월)를 설립했다. 경방필백화점(1994년 8월)을 준공하고, 2001년에는 우리홈쇼핑을 개국했다.
삼성, 현대, LG 등 재계 서열 상위에 랭크된 그룹에 비해 규모는 턱없이 작지만, 경제 부문에서 남다른 의미를 가진 회사. 우리의 현대사(史)와 궤를 함께한 1만8300평의 영등포 땅(경방필백화점 3200평과 공장부지 1만5100평)이 오늘날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단지로 변신했다. ‘경방타임스퀘어’다. 메리어트호텔, 신세계백화점, 이마트, CGV, 교보문고와 오피스 2개 동이 입점해 있다.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고(故) 김용완(金容完) 명예회장의 손자 김담 대표다. 고 김 명예회장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매제다. 부인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누이동생 고 김점효(金占效) 여사.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하 전경련)을 여섯 번 맡았던 한국의 대표 기업인이다. 고 김 명예회장의 장남이 김각중(金珏中) 경방 명예회장 겸 전(前) 전경련 회장이다. 그리고 김각중 명예회장의 차남이 김담 대표다.
 |
| 김각중 경방명예회장. |
―출범 1년의 성과에 대해 만족하나요.
“대체적으로 그렇습니다. 국내에 처음으로 ‘몰’이라는 개념을 선보인 것이 가장 큰 성과였습니다. 매출, 방문고객 숫자 등에서 내부 목표치를 달성했고요. 성과보다는 공부를 많이 한 점이 좋았습니다. 고객들의 니즈(needs·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경영학 책에 나오거나 매뉴얼로 정해진 것이 아니잖습니까. 쇼핑몰을 개점해 영업하면서 고객과의 소통법을 배웠죠.”
―몰이 일반적인 백화점, 유통공간과 뭐가 다른가요.
“한마디로 원스톱 쇼핑몰이죠. ‘한지붕 아래서 모든 것을 다(everything under the one roof)’라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우선 규모가 커야 하고요, 백화점, 할인점, 호텔, 병원, 레스토랑 등 모든 것들이 입점해야 하죠.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파는 공간이 몰입니다. 이름이 타임(시간) 스퀘어(공간)인 점도 이 때문입니다.”
하루 평균 방문객 수 28만명(주말)
 |
| 일제시대 경성방직 공장. |
“걱정 반, 기대 반. 사실 기획할 때에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신(新)개념 쇼핑몰이니까요.”
―기존 쇼핑몰과의 차이점이라면요.
“쇼핑몰은 해당 매장의 공간을 분양하지만 저희는 100% 임대했습니다. 부지와 건물은 경방이 소유한 채로 각 업체들에 임대를 하고, 운영 및 관리를 맡는 형태입니다. 모든 매장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고, 그만큼 이곳을 찾는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국내의 여타 쇼핑몰과 차원이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쇼핑몰이 무척 만족스러운 모양이네요.
“아휴, 돌아다니면 스트레스 받아요. 여기저기 잘못한 곳이 자꾸 눈에 띕니다. 자기 작품이 만족스러운 작가가 과연 있을까요?”(웃음)
쇼핑몰이 지난 1년 동안 일군 성과는 눈부시다. 개점 6개월 만에 매출 5200억원, 1년 만에 1조1000억원(추정 매출)을 기록했다. 하루 평균 28억원을 벌어들인 셈이다. 평일에는 하루 16만명, 주말에는 28만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경방 타임스퀘어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시원했다. 천장이 높았고, 사방이 유리로 돼 있어 햇살이 몰 안으로까지 들어왔다. 기존의 백화점이 매장으로 빼곡히 메워져 있는데 이곳은 정반대였다. 매장은 건물의 양쪽에만 모여 있고 몰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하 5층~지상 5층을 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한가운데에 있어 매장이 아니라 고객들이 몰 가운데를 꽉 채우고 있었다.
기자가 “기존의 백화점처럼 가운데 공간까지 매장으로 채웠으면 임대수입이 배는 늘었을 것”이라고 하자, 김담 대표가 손을 가로저었다.
“경방 타임스퀘어에 현재 200여 개의 매장이 있는데 전부 매장으로 채웠다면 3배 정도 늘었을 겁니다. 비워 둔 공간을 보면서 아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출범 초기부터 우리가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담겨 있거든요. 매장을 위한 동선이 아니라, 고객의 입장에서 매장을 채워 넣자는 것입니다. 텅빈 가운데 공간이 주는 미학(美學), 고객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했던 우리의 가치를 임대 수입과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공실률 0%
―경영철학인가요.
“간혹 경방처럼 오래된 회사들의 흥망에 대해 살펴봅니다. 눈앞에 보이는 단기간의 이익, 손에 잡히는 이윤을 따르는 회사는 오래가지 못하더군요. 현재의 이익과 미래의 가능성을 바꾸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득, 무작정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지양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쇼핑몰 안에 빈 공간이 없어 보입니다.
“현재 100% 임대가 이뤄졌습니다. 몰을 오픈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공실률이었습니다. 키플레이어(주요매장)가 들어오면 따라오는 브랜드들이 있는데 그런 점포를 유치하는 데 사활을 걸었습니다. ‘자라’(스페인의 의류 브랜드)가 입점 결정을 한 것이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다른 매장의 임대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경방타임스퀘어 1층에 자리 잡고 있는 ‘자라’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패션브랜드다. 전(全) 세계 75개국, 1500여 개의 주요 도시에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이 브랜드는 입점 매장을 선정하는 데 무척 까다로운 심사를 거치기로 유명하다. 매장의 인테리어며 윈도 등 매장 디자인을 깐깐하게 기획한다. 오죽하면 업계에 ‘자라가 들어가는 사이트(Site)는 성공한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다. 경방타임스퀘어에는 루이뷔통, 티파니, 까르띠에와 같은 최고급 브랜드에서부터 저가 브랜드까지 다양한 매장이 입점해 있다.
김담 대표에게는 이곳에 입점한 매장 하나하나가 추억 어린 곳이지만, 교보문고는 유독 그러하다. 교보문고는 이곳에 광화문점에 버금가는 1200평(전용면적) 규모의 서점으로 들어와 있다. 당초 교보문고의 입점은 오너인 신씨 일가와 논의가 거의 끝났던 일이었다. 별 문제가 없이 진행됐던 일은 의외의 곳에서 틀어졌다. 교보문고가 다른 건물에 세를 들어 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었다.
교보문고 입점시키려고 공사 중에 다시 구조보강
 |
| 2009년 9월 16일 오전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오픈행사 참석자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
김담 대표의 얘기다.
“서점은 건물에 구조보강을 많이 해야 합니다. 건물이 한창 올라가고 있는데 입점 의사를 밝혀서 한동안 고생을 좀 했습니다. 교보를 꼭 유치하고 싶기는 하고, 현실적으로 공사를 다시 보강해서 해야 하는 만큼 비용이 올라가고 고민스러웠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입점한 곳이 교보문고입니다. 결국 구조를 보강해서 지금의 자리에 들어왔죠.”
―입점한 점포가 200개 넘다 보니 각각 사연이 다르겠네요.
“많죠. 처음에는 입점을 해 달라고 사정하고 다니고, 나중에는 서로 들어오겠다는 것을 정리하느라 바빴습니다. 그래도 몇몇 공간은 몰 오픈 이후까지 그냥 둘걸 그랬어요. 이제 와서 보니 꼭 필요한데 장소가 없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점포가 있거든요.”
―혹시 영등포가 갖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쇼핑몰 사업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영등포, 이곳은 참 희한해요. 신세계, 경방의 복잡한 사연이 묻어 있습니다. 예전에 경방필백화점이 있을 때 바로 옆에 신세계백화점이 있었습니다. 맞은편에는 롯데백화점이 있었죠. 쇼핑몰 사업을 구상하기 훨씬 이전에 바로 옆에 있는 신세계와 합치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신세계와 경방 모두 가져갈 수 있는 파이가 워낙 컸거든요.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일이 안됐습니다. 80% 이상 확신했던 일인데요. 될 것 같았던 일이 안되고, 또 안될 것 같았던 일은 되고, 뭐 그런 거죠. 경방필백화점 매각 얘기가 나돈 적도 있고, 여러모로 사연이 많은 땅이 영등포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에 둥지를 튼 것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도심의 재개발, 부동산 개발업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쇼핑몰 구상에 대해 이사회 반응 냉담
김담 대표가 오늘날의 ‘몰’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이었다. 당시 경방 내부에서는 ‘금싸라기’ 영등포 공장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를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김담 당시 이사도 영등포 공장터 재개발 구상을 시작했다. 경방의 옛 사옥 다락방에 달랑 책상 하나, 전화기 하나를 놓고서. 당초에는 이렇게 큰 쇼핑몰을 지을 생각이 아니었다.
시장조사와 구상을 거듭한 끝에 그는 2002년, 복합쇼핑몰 사업 모델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정했다.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프로젝트의 내용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했다. 몇몇 지인들은 “대한민국에 있는 브랜드를 전부 모아도 그 공간을 채울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연 매출이 1900억원 정도에 불과했던 경방이 공사비만 6000억원 이상이 투입되는 쇼핑몰 사업을 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김담 대표의 얘기다.
“이사회의 반응이요? 음…. 한마디로 냉(冷)했죠.”
―당시 상황을 보면 이사들이 이해갈 것 같은데요.
“자금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충 계산을 해 보니 1조원 정도가 들어가겠더군요. 경방 영등포 부지가 4000억원 정도 될 것 같고, 입점할 매장의 보증금이 3000억원 정도로 추산됐습니다. 나머지 3000억원은 은행에서 빌리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어차피 경방의 돈을 쓸 생각은 아니었고, 때마침 선진금융기법으로 무장된 대출이 많았습니다. 이참에 이것을 충분히 활용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보수적인 경방의 정서에서 무모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이사회의 반대를 각오했던 터라 놀라지 않았습니다. 비전문가들을 설득해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죠. 그보다 제 스스로에게 ‘너 얼마나 자신있어?’라고 끝없이 물어봤습니다.”
첫 작품은 우리홈쇼핑
 |
| 경방타임스퀘어의 내부 광경. |
“타협을 봤습니다. 일단 부지에 대한 용도변경을 신청하고, 건축허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땅의 가치가 올라갈 테니까 그때 가서 땅을 팔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회사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사회와 ‘타협’한 그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사들을 계속 설득했다. 결국 사업을 첫 구상한 지 4년 만인 2006년 6월에 서울시에서 건축허가가 떨어졌다.
‘경방타임스퀘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와중에 일이 터졌다. 경방이 지분투자를 했고, 김담 대표가 이끌고 있던 우리홈쇼핑(현 롯데홈쇼핑)의 경영권이 위협받게 된 것이다. 이호진(李豪鎭) 태광산업 회장이 우리홈쇼핑에 대해 적대적 M&A를 선언한 것. 김담 대표에게 우리홈쇼핑은 남다른 회사다. 우리홈쇼핑 얘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이 금세 변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입을 열었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그가 본격적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했던 2000년 무렵에 경방은 돈벌이가 잘 되지 않았다. 유통부문에 경방필백화점이 있었는데 단독 점포이면서 브랜드 입점이 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백화점과 시너지 효과를 내고자 생각해 낸 것이 홈쇼핑 사업 진출이었다. 느닷없이 작은아들이 ‘홈쇼핑’이라는 낯선 업(業)을 하겠다고 나서자, 부친인 김각중 경방 명예회장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김 명예회장이 급히 그를 찾더니 다짜고짜 경기도의 모처로 오라고 했다. 그곳에는 먼저 홈쇼핑 시장에 진출한 모그룹의 K명예회장이 있었다.
태광산업과의 악연
김담 대표의 얘기다.
“제가 홈쇼핑 사업을 계속 하겠다고 우기니까 아버지께서 답답한 마음에 친구한테 물어보러 가셨나 봅니다. 두 양반께서 한 시간 정도 차를 드시며 대화를 했는데 K명예회장께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한 모양입니다. K명예회장이 저를 한참 쳐다보더니 ‘테레비에서 그거 팔면 돈은 우째 받노?’ 이러시더라고요.(웃음) 워낙 연세가 있으시니까 그분들 생각에는 잘 이해가 안 가셨던 거죠. 이렇게 해서 시작한 사업이다 보니 제가 책임지고 꾸려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홈쇼핑 사업권을 따냈고,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2001년 5월. 그의 탁월한 경영능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적 흐름이었을까. 개국 이듬해인 2002년에 매출 3500억원 영업이익 마이너스 13억원을 기록했던 홈쇼핑은 매년 성장을 거듭했고, 2006년 매출 6800억원 영업이익 780억원의 회사로 성장했다. 이윤이 남다 보니 투자 회사인 경방에 배당을 많이 줄 수 있었고, 사업 재미가 쏠쏠했다. 홈쇼핑 사업에 관심이 컸던 일본의 후지TV에 컨설팅을 하러 갔다가, 귀빈 대접을 받은 적도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홈쇼핑 시장은 성장세가 가팔랐고,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가 홈쇼핑의 성공적 진출로 인해 사내(社內)에서 인정을 받고, 경방타임스퀘어에 대한 구체적 실행을 하고 있던 와중에 경영권을 위협받게 된 것이다.
회사는 50%의 지분에 한 주를 더 가진 사람이 경영권을 갖는다. 총성 없는, 하지만 무엇보다 비정한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다.
―태광산업에서 M&A를 선언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지켜야겠다. 그냥 무조건 뺏기지 말자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김담 대표는 말을 아꼈다. 벌써 4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은 그에게 상처인 듯 보였다.
“외로웠죠. 회사 경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홈쇼핑 사업에 진출해서 겨우 돈도 벌고, 힘들게 이끌어 오면서 사업하는 재미를 알아 가던 때였잖습니까. 하지만 컨소시엄 형태이다 보니 우호지분을 모두 합쳐도 50%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주가 차익을 남기려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태광산업과 돈 싸움에서 밀렸죠.”
김담 대표는 신문에 ‘경방-태광산업의 홈쇼핑 전쟁’ 기사가 실리기 전에 부친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부친과 태광산업 창업주 이임룡(李壬龍) 회장의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김각중 명예회장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홈쇼핑 포기
 |
| 경방타임스퀘어에 조성돼 있는 생태공원 모습. |
“아버지가 쌓아 왔던 신뢰관계, 인간관계가 무너졌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아버지께 죄송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 말라는 사업을 우겨서 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 욕심이었지, 아버지는 사업을 이렇게 꾸리고 싶어 하지 않았을 수 있잖습니까. 아버지께 늘 죄송하죠.”
태광산업과 전쟁을 벌인 지 1년 만에 그는 우리홈쇼핑을 롯데그룹에 넘겼다.
―결국 진 건가요.
“그 전부터 롯데, 신세계 등에서 러브콜이 왔었는데 무시했습니다. 도저히 못 견딜 때 롯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약간의 우울증을 겪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솔직히 태광산업에는 못 주겠더라고요. 감정상. 그래서 롯데한테 뱉었습니다.”
외부에서는 ‘경방이 쇼핑몰을 지으려고 홈쇼핑을 팔았다’고 했다. 앞뒤가 달랐지만, 그는 침묵했다. 우리홈쇼핑을 팔아 생긴 이득으로 경방은 빚을 모두 청산했다. 경방은 당시 이익잉여금이 제로였고, 빚이 2000억원 정도 있었다.
“혹시 아직도 홈쇼핑 사업이 아쉽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생각 안 합니다. 그 회사가 더욱 잘됐으면 하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제 별명이 사무라이거든요. 정이 많아서 쉽게 사람을 자르지 못하지만 한번 결정하면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재벌 3세로 산다는 것
홈쇼핑 전투가 일단락된 후에 이번에는 ‘형제의 불화설’이 나돌았다. 김담 대표가 장내에서 경방의 주식을 대거 매집했기 때문이다. 그의 지분은 형인 김준(金畯) 경방대표이사 사장을 넘어섰다. 통상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장자(長子)에게 지분을 더 주거나, 또는 자녀에게 균등하게 지분을 준다. 그런데 이들 형제는 뒤바뀌었으니, 오해를 살 만했다. 현재 경방은 김담 대표가 전체의 20.95%, 김준 대표 13.42%, 김각중 명예회장이 0.4%를 보유하고 있다.
―형과의 불화설이 있었죠?
“형님요? 둘이 만날 싸우는데요.”(웃음)
―사이가 안 좋으세요?
“부부싸움하듯이 싸워요. 재산 싸움을 하는 건 아니고요. 아버지께 회사 주식을 증여받으면 경영권이 누구한테 간다는 식으로 싸움이 일어날 수 있지만 저희의 경우는 아닙니다. 구두닦이의 ‘찍새’와 ‘딱새’라고 보면 됩니다. 형님과 저는 역할을 나눠서 업무를 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요.
“우리홈쇼핑을 만들 때 제 개인 돈이 좀 들어갔는데 회사를 처분하면서 그 돈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형님과 상의를 하다가, 그래도 가업(家業)인 사업, 또 경방을 이어가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 이익금으로 경방 주식을 제가 샀고, 형님은 경영권을 유지하는 정도로만 갖고 있겠다고 해서 최대주주가 됐습니다. 경영권싸움은 얼토당토않은 얘기입니다.”
―할아버지 김용완 선생, 아버지 김각중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재벌 3세입니다. 재벌은 늘 대중의 관심거리잖습니까.
“저희 집안이 큰 재벌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재벌에 대한 오해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큰 재벌 중에서 검소하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회생활을 겪어 보니까 재벌 2세, 3세들이 돈이나 회사를 물려받는 것은 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큰 재벌이라도 재산은 얼마든지 까먹을 수 있습니다. 재산보다는 사회적인 평판,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는, 그런 것들과 기회를 많이 얻는 사람들이 재벌 2, 3세라고 생각합니다.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물려받고, 또 그 터전을 키워 나갈 기회가 큰 사람들입니다. 물려받는 재산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벌 2, 3세들이 물의를 일으켜 자주 신문에 오르내립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못 활용하면 그렇게 됩니다. 남들보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주어진 환경을 잘 이용하는 법, 스스로 매니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상 고민이 있을 때 상의하는 재벌 2세들은?
“박지원(朴知原) 두산중공업 대표와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김정완(金庭完) 매일유업 회장과는 콘텐츠, 아이디어를 자주 나누는 사이고, 정용진(鄭溶鎭) 신세계 부회장, 이재현(李在賢) CJ회장은 저를 진심으로 대해 주는 좋은 파트너죠. 문덕영 아주LFN그룹 사장은 이상하게 마음이 안좋을 때 생각나는 분이고, 이외에도 많아서요.”(웃음)
“좋아서가 아니라 필요하니까 한다”
 |
| 태광산업과 홈쇼핑 경영권을 두고 벌인 싸움에 관한 질문을 받고 생각에 잠긴 김담 대표. |
“CEO들이 사생활을 공개하고 휴대폰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글쎄요. 트렌드에 대한 학습, 직원들과의 교감은 좋지만 굳이 새로운 것을 빨리 시도하는 편은 아닙니다. 사업에 필요하다면 꼭 해야겠지만요.”
―주위 얘기로는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하던데요.
“아, 전혀 아닙니다.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술, 공간에 대한 이해가 우리 사업에 필요하잖습니까. 간혹 좋아서 한다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저는 좋아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억지로 합니다. CEO는 고통스러워도 필요한 일이라면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CEO는 어떤 사람인가요.
“경영학 원론의 첫 줄에 나와 있는, 주주(株主)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애써야 한다는 기본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입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원칙입니다. 거기에 주주에게, 직원들에게, 스스로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CEO가 좋은 경영자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에 억지로 취미를 붙인다’고 했지만, 타임스퀘어는 개장 이후 여러 문화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쇼핑과 문화를 결합시킨 마케팅은 처음 설계단계부터 김 대표가 구상해 온 일이다. 단순한 이벤트 수준에서 벗어나 대중가요부터 뮤지컬 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연이 매주 쇼핑몰에서 펼쳐진다.
김담 대표와의 인터뷰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가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질문을 하면 곧장 답하는 스타일이었다. 모든 질문에 대해 단답형으로 답하고, 거기에 살을 붙여 설명을 했다. 40대(代)의 패기가 물씬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경방 평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무역부 수출과에 첫발을 내디뎠다. 인보이스, 선적 서류를 만드는 것이 첫 업무였다. 거래처 관리 업무를 맡았고, 경리, 자금부를 거쳤다. ‘회장님의 아들’로서 재미있게 지냈을 것 같은데, 그는 정작 이때부터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거래처나 은행에 가면 이상했습니다. 저를 좀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은 ‘회장님 아들이 왔네’라고 하고, 또 무시하고 싶은 사람은 ‘일개 평사원이 왔는데 내가 꼭 나가야 해?’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때 나의 존재 자체가 남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평사원’이자 ‘회장님의 아들’인 그는 1994년 경방 일본 지사로 떠났다. 월급 이외에 집에서 주어지는 ‘용돈’은 없었다. 일본의 비싼 물가 덕분에 택시를 탄 적이 없다. 전철 타기가 아까워서 걸은 적이 여러 번.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머릿속에는 ‘창업’이라는 두 글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경방으로 돌아왔고, IMF를 맞아 회사의 구조조정을 도맡아 했다. 불필요한 사업부문을 정리하고, 홈쇼핑이라는 신사업에 진출했고, 결국 국내에 처음으로 ‘몰’의 개념을 도입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 어언 20년이 됐다.
매장 오픈 전날, 전직원에게 이메일 보내
그는 꼭 1년 전인 지난 9월 15일, 개장을 하루 앞두고 텅빈 쇼핑몰을 둘러봤단다. 무언가를 이뤄 냈다는 감동에 집으로 돌아가서도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2000년 겨울, 경방의 옛 사옥 다락방에 달랑 책상 하나와 전화기 하나로 첫 살림을 꾸렸을 때 패기와 꿈은 있었지만 솔직히 앞날은 막막했습니다. 주위 상황과 환경 또한 열악했습니다. (중략) 업계의 관행이 어떠한 건지, 어떤 거래선을 택해야 하는 건지, 누구의 말이 맞는 건지, 우리는 처음부터 학습하며 일을 해 나가야 했습니다. 뼈아픈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무지와 무능에 치가 떨려 지독히도 긴 밤을 지새워야만 했습니다. (중략) 우리에게 출근시간, 퇴근시간, 여름휴가, 휴일, 주말 취미 등의 단어는 사치였습니다. 이 편지 한줄 한줄에 여러분 모두의 이름과 땀에 대한 감사를 담았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쏟아졌던 염려의 시선은 이제 감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내일은 또 다른 시작과 도전입니다.>
10년 동안 기획하고,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쇼핑몰을 탄생시킨 그는 벌써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경방타임스퀘어가 어디에 내놔도 경쟁력 있는 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재개발 지역에 제2호점, 3호점을 내놓을 생각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서울의 종로 한복판에 이런 쇼핑몰이 들어선다면, 정말 근사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저돌적’인 이 사람은 벌써 이 생각을 실행하고 있는지 모른다.⊙
사진 : 서경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