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촌스러운 ‘양지다이어리’에 삼색 볼펜으로 꼼꼼하게 기록
⊙ “광화문도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적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李承晩·朴正熙 동상 건립 주장
⊙ “광화문도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적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李承晩·朴正熙 동상 건립 주장
- 그동안 사용한 수첩 묶음 사이에 앉은 김문수. 그는 매번 가장 싼 수첩을 사용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뜯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과 대한민국의 ‘한강의 기적’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우리가 독일과 비교되는 것조차 영광인 듯한 뉘앙스다. 이런 종류의 비교에 나는 아주 심한 모욕감을 느낀다. 나는 독일서 13년을 지냈다. 그러나 아무리 객관적으로 비교하려 해도, ‘한강의 기적’과 ‘라인강의 기적’을 비교할 수 없다. 같은 차원이 아니다.
‘라인강의 기적’은 절대 기적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독일이 어떠한 나라인가. 두 번이나 전(全) 세계를 상대로 ‘맞짱 뜬’ 나라다. 잠수함을 만들고, 탱크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든 나라다. 오늘날 원자탄, 로켓과 같은 최첨단 무기기술은 죄다 독일서 시작되었다. 전쟁에 졌어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 기술을 만든 사람들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다 망한 나라다. 식민지를 거쳐, 독립을 했다. 그것도 다 남의 힘으로 겨우 독립했다. 남의 힘으로 독립하다 보니, 이내 분단(分斷)되어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운다. 무기도 다 남의 나라 것 빌려다, 우리끼리 죽이고 살리고 한 것이다. 먹을 것도 없어,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던 민족이다. 동네아이들은 죄다 먼지 나는 미군(美軍) 지프차 꽁무니 따라다니며 ‘기브 미 껌’하던 나라다. 세상에 이렇게 한심한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이 나라가 하도 불쌍해 그 당시 도와주러 온 나라에는 태국도 있고, 필리핀도 있다.
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가 불과 50~60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强國)이 되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한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오늘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한국사회의 온갖 문제들이 가슴 아프고 힘들기는 해도,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참으로 가슴 뿌듯하다.
이승만·박정희 동상을 세우자는 金文洙
지식인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설픈 쇼비니즘’으로 비판받는다. 친구들은 내가 독일에 오래 살면서 외국인 차별에 너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주변부 열등감이 지나쳐 과잉애국심으로 왜곡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대 이후 세계사에서 지난 반(半)세기 동안의 대한민국처럼 발전한 나라는 없다.
최근, 내 생각과 같은 ‘어설픈 쇼비니즘’이 기사화된 것을 읽었다. “역사상 오늘의 대한민국보다 위대했던 적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김문수(金文洙) 경기도지사의 주장이다. 그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자랑스러워하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고구려’도, ‘세종(世宗)대왕의 조선’도 오늘날의 대한민국보다 위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물론 훌륭했다. 그러나 망해 가는 조선을 지키던 장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옳다.
그런데 그는 한발 더 나간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銅像)만 있는 것이 불만이란다. 이 위대한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의 동상도 광화문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 잠깐! 이건 좀 오버다. 아니 많이 오버다. 개인적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기념관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나가도 한참 많이 나갔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는 이런 주장을 하는 걸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김문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김문수의 변절?
내 대학시절 그는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대부(代父)였다. 그가 ‘도바리’를 거듭하며 부천·인천 등에서 각종 시위, 집회를 이끌던 일은 지금도 내게 사진처럼 선명하다. 그는 전설이었다. 각종 유인물이 비처럼 뿌려지는 연설대의 한가운데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그토록 부정하던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의 기원인 이승만과 박정희의 동상을 세우자고 하는 것이다. 그는 ‘변절(?)’했다. 그냥 변절한 것도 아니고 민자당,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거쳐, 경기도지사까지 되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1970~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모두 괴롭다. 그 청춘의 고통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우(左右), 혹은 보수와 진보로 나뉜 이 시대의 갈등을 외면하며 대부분 어정쩡하게 산다. 어쩔 수 없는 집안의 문제를 기억에서조차 지우며 사는 것처럼, 그 시절의 기억을 모두들 억누르며 산다. 도대체 김문수에게 그 시절의 기억은 어떨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오늘을 사는 것일까? 그를 만났다.
1 김문수는 참 촌스럽다. 그의 수첩도 죄다 싸구려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상당히 큰 문화행사에서 내가 사회를 본 적이 있다. 김문수가 경기도지사 자격으로 축사를 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간 후, 난 나름 유머라고 이야기했다.
“김문수 경기지사님은 다 좋은데, 참 가난해 보여요. 우리나라에서 서울시 다음으로 예산이 많은 경기도의 지사님인데, 스타일은 완전 함경북도지사 스타일이에요. 스타일이 참 촌스러워요.”
순간 행사장 분위기가 싸~해졌다. 모두 당황한 것이다. 난 유머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전혀 유머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실제로 ‘김문수는 참 가난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만나 이야기해 보니, 진짜 촌스러웠다. 팬 볼과 각진 턱의 얼굴 자체가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스로도 외모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시골 아저씨 같은 복장으로 수첩이 가득한 상자를 안고 나타났다. 아무리 휴일에 입는 편한 복장이라지만, 마른 체형에 배꼽까지 올라오는 ‘아저씨 바지’는 경기도지사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사진도 찍어야 하니, 좀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보좌진의 충고에 나름 ‘가장 세련된 옷’이라고 다시 갈아입고 왔다. 그러나 그 전 옷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낡은 비닐커버의 ‘양지다이어리’
상자에서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은 그의 수첩들도 죄다 촌스러웠다. 모두 낡은 스타일의 비닐커버 ‘양지다이어리’였다. 요즘 ‘양지다이어리’에서도 세련되고 예쁜 수첩이 많이 나온다고 하자, 그는 그래도 이런 스타일의 다이어리가 가장 튼튼하다고 한다. 뜯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 스타일이나, 입는 옷맵시, 몸에서 놓지 않는 수첩, 좌다 참 ‘가난’하다. 삶의 가치나 사물을 평가하는 기준이나 모두 단순하다. 본질적 가치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수첩의 본질은 뜯어지지 않고 기록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노동운동 현장을 떠난 지 20년이 가깝지만 그의 삶의 태도는 노동운동할 때 그대로다. 아주 담백하다.
“요즘 어떠냐”는 내 인사치레 질문에, 그는 너무도 진지하게 “너무 행복하다”고 답한다. “원래 혁명가는 40살까지밖에 못 사는데 난 60이 다 되도록 살아 있으니 그렇게 행복하고 감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혁명가는 일찍 죽는다. 뒤집어 보면 오래 살면 혁명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를 꿈꿨던 김문수는 실제로 마흔까지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그처럼 치열하게 시대의 모순과 부딪혔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마흔 이후의 김문수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그가 마흔이 되던 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90년이다. 독일이 통일된 해다.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이다. 당시 노동운동이든, 학생운동이든, 이 사회의 변혁을 꿈꾸던 모든 이들에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그러니까 그 이론 체계와 현실 체계가… 70년 동안 했던 게 한 방에 넘어졌잖아. 소위 말하면 9·11 테러 때 월드 트레이드 센터 무너졌듯이, 우리 눈앞에서. 세계의 3분의 1이 와장창 넘어진 거지. 더 발전할 줄 알았는데 넘어진 현실을, 이걸 어떻게 해석할 거냐. 이걸 가지고 계속 얘기한 거죠. 그래서 이걸 우리가 받아들이자.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理性的)이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고, 개혁적이지 않다. 이것을 받아들인 거죠. 그래서 우리 그룹들이 모여 가지고 공부도 하고, 발제도 하고, 서구좌파의 흐름, 우파와의 투쟁관계… 이런 책들을 우리가 읽으면서,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는 뭐냐… 결국 그렇게 한꺼번에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고, 인간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정한 역사 속에 점진적인 비약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을 선택한 거죠.”
“지금도 괴롭다”
지금도 그는 ‘변절자’ 소리를 듣는다.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도 상대 후보에게 이 부분에 대해 비아냥거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매번 투박하고 단순하다. 나도 물었다. 하루아침에 노동운동의 대부에서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의 그 상황이 괴롭지 않았느냐고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김문수의 대답은 아주 솔직했다. 그때도 괴로웠고, 지금도 괴롭다는 거다.
“괴로웠지. 아직도 괴롭지. 괴로우면 고통이지. 이 괴로움이 지옥처럼 짧게 끝나지 않아. 길게… 지금도 괴롭지. 이상과 현실이 틀린 게 우리가 꿈꾸던 새파란 하늘 그리고 아주 높고 깨끗한 하늘…, 근데 이건 뭐 깨끗하지도 않고, 구름도 왔다 갔다 하지, 폭풍우도 치지. 이건 뭐… 현실이 너무… 우리의 꿈속에 있는 것이, 내 생애에 많은 사람들의 혁명적 열정과 헌신, 조직을 위해서… 당대에 되지 않는다… 한 방의 혁명은… 없다는 거지.”
20년 가깝게 자신의 드라마틱한 변신에 관해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을 텐데, 그의 대답은 여전히 단순하고 소박하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혹은 여당에서 야당으로, 당적(黨籍)만 바꿔도, 모두들 민족과 역사를 들먹이는 엄청난 수사가 동원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지극히 원론적인 설명만 한다. 그래서 여전히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는 그 괴로움을 철저한 ‘헌신’으로 풀어낸다. 그에게 개인적인 삶은 없다. 노동운동가일 때도 그랬고, 경기도지사인 지금도 그렇다. 오직 자신이 선택한 가치에 헌신할 따름이다. 그래서 참 밋밋하다.
인터뷰 내내, 나는 김문수 개인의 내면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항상 경기도와 국가의 미래에 관한 비전으로 넘어갔다. 직업정치인의 경우, 대부분 이런 식이다. 그러나 김문수에게는 20년에 가까운 정치인에게 느껴지는 ‘노회(老獪)함’이 없다.
정치인 김문수를 비난하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그 비난의 내용은 모두 20년 전 ‘변절’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서, 경기도지사로서의 지난 20년간의 김문수를 비난하는 이는 별로 없다. 모두 그의 투박한 ‘헌신’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촌스러운 헌신은 투박한 수첩만큼이나 쉽게 뜯기지 않는다. 아주 집요하다.
2 김문수는 아무 데서나 적는다. 그래서 찾아보면 다 나온다!
인간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법정에서도 목격자의 증언은 확실한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실험으로 증명한다. 기억의 왜곡에 대해 집중 연구한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연구는 어설픈 인간 기억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동일한 자동차사고 장면을 보여주고, 그 사건을 기억하라고 했을 때, 피험자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동일한 사건을 목격했지만 구체적 서술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김문수의 삼색 볼펜
물어보는 질문의 방식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충돌했을 때, 차들의 속도는 어느 정도였나요?”라고 물어보는 경우와 “자동차들이 세게 충돌했을 때, 차들의 속도는 어느 정도였나요?”라고 물어보는 경우에 대답은 확연히 달랐다. ‘충돌했을 때’라고 물어본 경우, 시속 34마일 정도라고 대답한 반면, ‘세게 충돌했을 때’라고 물어본 경우에는 시속 40.8마일로 대답했다. 질문을 ‘자동차들이 서로 접촉했을 때’라고 물으면 속도는 더 낮아져 시속 31.8마일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기억을 왜곡하는 방법은 너무 쉽고 간단하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기가 놓아 둔 물건이 어디 있는지 기억하지 못해, 매일 평균 55분을 허비한다고 한다. 자신의 생명과 관련된 경우조차, 기억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스카이다이버들은 종종 자기 낙하산을 펼치는 것을 잊는다고 한다. 스카이다이빙 사망사고의 약 6%가 이런 경우다. 뿐만 아니다. 차 안에 아이를 두고 내리는 부모도 있다. 비행기 조종사도 예외는 아니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망각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 간다. 그래서 아직도 조종사들은 아주 원시적인 점검표를 사용한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일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일일이 손으로 체크해가며 확인한다.
김문수도 일일이 체크한다. 그의 수첩은 빡빡한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처리된 일은 체크되어 있고, 해야 할 일이나 중요한 사안들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꼭 삼색 볼펜으로 기록한다.
‘변절’ 시기의 기록들
그는 만년필은 싫어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읽어 보려면, 잉크가 다 퍼져 읽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와 인터뷰하는 내내, 수첩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인터뷰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일하기 위해 적는 것이 아니라, 적기 위해 일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데서나 적는다. 앉을 곳이 없으면 그냥 주저앉아 적는다.
이론이나 불확실한 편견만 가지고 우기지 말고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는 거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의 ‘변절’ 시기의 기록을 함께 찾아봤다.
기록에는 ‘우리의 과제. M의 과제가 아니라 우리의 과제. M의 위기… 운동상 분열상 대단한… 권력 자체의 고유한 속성. 상대적 자율성의 문제…’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M이란 ‘마르크스주의’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바라보며 그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의 과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고민은 혁명이 아닌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이어지는 기록에는 ‘노동자와 민중당’에 관한 내용들이 있었다.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라면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만큼, 잘못된 사실이나 실패에 대한 인정도 빠르고 명쾌하다. 자질구레한 변명이 없다. 그는 한국의 ‘좌파’에 대해서도 한쪽만 이야기하지 말고, 명확한 ‘팩트’를 가지고, 동일한 잣대를 가지고 남한과 북한 양쪽을 토론하자고 이야기한다. 흑백논리는 ‘팩트’와는 거리 먼 편견이라는 거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비판하는 ‘좌파’들이 과거 그를 따르던 동료, 후배들이라는 사실이다.
“좌파가 쓴 글은 선악(善惡)이 선명해. 자본주의는 악이라는 거지. 자본주의라는 제도가 인간을 이렇게 황폐화시킨다고 하면 모든 게 끝나. 그럼 내가 묻고 싶은 게… 자본주의가 그렇게 사람을 황폐화시키는데, 당신은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이렇게 여러 가지 소비를 누리고 사는가. 자본주의 소비는 늘 허망하다고들 그래. 그럼 자기는 소비를 안하나? 근데 그냥 한마디로 끝내 버리지.
이건 완전히 웃기는 이야기야.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지성은 참 약해. 그냥 넘어간다고. 나는 안 넘어가지. 문제제기 하지. 자본주의는 다 악인가? 자본주의 소비는 늘 허망한 거냐? 늘 문제가 있는 거냐? 그럼 자본주의가 없는 북한이 안 허망하냐? 성공적이냐? 비전이 있냐? 내가 묻지. 답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면 그들은 또 그래요. 야,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이 자본주의가 그렇다는 거지. 아니, 그게 뭐야… 북한을 비판하는 소리는 전혀 안 해. 그게 뭐냐고…. 나는 그쪽에 내 청춘을 다 보냈고, 지금은 또 이리 와 있어요. 물론 그쪽에도 좋은 점은 있었어요. 우리 이런 거를 한마디로 흑백으로 하지 말자 이거야.”
인간은 절대 안 바뀐다
김문수의 기록 강박은 아주 어릴 때부터 생긴 습관이다. 참 똑똑하게 말을 잘하는 친구가 부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하나 부럽기도 하고. 그래서 생각했다. 다 적어서 외우자. 그러니까 자신의 논리가 정연해지더라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온 상자에는 그 어릴 적 기록들도 많이 남아 있었다. 절반쯤 불에 타 버린 일기장도 있었다.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아주 어릴 적 기록도 많이 있었다.
‘놀러 온 할머니께서 점쟁이라고 하셔서 관상을 봐 달라고 하였더니… 우리들은 모두 잘살겠다고 하셨다. 나는 점쟁이가 보는 것이 뭣이 맞겠느냐고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김문수나 지금의 김문수가 이야기하는 투나 생각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자란 후, 중학교 때의 일기를 들쳐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나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친절하며, 성화를 내지 않고, 조직적인 생활을 하고,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내 최선을 다하겠다고….’
또 이런 내용도 있다. ‘최선태. 그는 참 프라이드가 센 내가 좋아하는 친구이다. 그는 마치 범과 같아서 칭찬해 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난 그런 인간이 좋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 단지 그의 행동, 즉 그의 우스운 센 그의 pride 그것일 뿐이다.’
아, 이 대목에서 심리학자인 나는 좌절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의 김문수나, 노동운동가 김문수나, 경기도지사 김문수나 다 똑같다. 철저하고, 자기 주장 강하고, 꼬장꼬장하다. 인간 김문수는 하나도 안 변했다. 인간은 절대 안 바뀐다.
3 김문수의 수첩에는 불필요한 수사가 없다. 그의 주장은 주머니의 송곳처럼 당혹스럽다.
김문수의 수첩에는 정서적 표현이 거의 없다. 불필요한 수사는 전혀 없다. 정확한 기록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차갑다. 그가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둘러 가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그가 생각하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할 뿐이다. 그래서 경기도 공무원들은 그를 무서워한다. 보고할 때마다 불호령이기 때문이다. 그의 요구는 매번 동일하다. 제발 요점만 분명히 하라는 거다.
요점정리는 사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히 이해한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어설픈 보고는 무자비하게 당한다. 김문수는 자신이 경기도 공무원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는 인기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다. 비판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긴 20년 가까이 ‘변절자’란 소리를 들어 온 그가 뭘 무서워할까.
“사랑의 말은 한 줄도 길다”
그가 감옥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뭉치에서도 정서적인 표현은 거의 없다. 편지 가득 온통 노동운동에 관한 내용이다.
도대체 아내에게 애틋한 편지 한 통 보낸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약간 수줍어하며 서재 한 귀퉁이에 있는 시집을 꺼내 온다. 유시화의 시집 ‘한줄도 너무 길다’였다. 표지를 넘기자, 그가 아내를 위해 쓴 유일한 서정적 표현이 나온다. ‘사랑의 말은 한 줄도 길다. 2000. 9. 20. 내 사랑 설난영을 위하여. 김문수’
정치인의 아내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문수의 아내는 여타 정치인의 아내와 또 다르다. 평생 노동운동을 함께 하고, 옥바라지를 하고, 또 정치인의 아내로 희생하고 있다. 그 아내에게 고작 시집 한 권 선물하며 쓴 글이, ‘사랑의 말은 한 줄도 길다’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그 애틋한 표현을 본인의 입으로는 쑥스러워 차마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김문수답다. 그리고 그의 아내 설난영은 참으로 대단하다.
광화문도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적어야 한다
그는 도무지 다른 사람의 느낌이나 감정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 같다. 앞서 이야기한 ‘이승만과 박정희의 동상 세우기’ 경우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자신의 주장이 옳아도, 사람들의 일반적 상식과 정서를 고려한다면, 대중적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인이 그런 주장을 그토록 무리하게 할 일은 아니다.
이승만, 박정희의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는 그의 과격한 주장은 우연하게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수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확한 사실만을 기록하는 그의 수첩처럼 광화문도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적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광화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이라면 이 위대한 대한민국을 수립한 건국자 이승만과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박정희를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기록을 정확히 해야 하는 지도자들이 다들 피해 간다는 거다.
역사는 편집이다. 끊임없이 재(再)구성된다. 현재의 지배적인 가치와 이념에 의해 재해석된다는 이야기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재구성, 재해석의 기초가 되는 기록이다. 그 기록은 매번 정확해야 한다. 정확하지 못하거나 기록이 누락되면 역사는 왜곡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아이덴티티, 즉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은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달릴 때는 과거의 긍정적 사건들만 기억난다. 힘든 기억들조차 의미 있는 고통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현재가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면 끊임없이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만 기억난다. 힘든 현재가 고통스런 과거를 불러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기억의 왜곡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래서 우울증이 무서운 것이다. 헤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년의 우울증이라곤 찾아올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인간 김문수의 당당함은 그의 수첩에서 나온다. 그의 수첩은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불편하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의 기록 앞에 기억의 왜곡이나 무의식적 억압이 설 자리는 없다. 그래서 김문수는 자신의 그 드라마틱한 개인사에도 그토록 당당한 것이다.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정확하다”
인터뷰 내내 ‘그는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근거 없이 말장난으로 우기는 이들을 그는 매우 싫어한다. 아주 오래 전, 그와 함께 민중당 창당을 준비했던 내 친구는 김문수의 꼬장꼬장함을 지금도 이야기한다. 구석에 앉아 그 특유의 사투리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로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에 모두들 질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인물에는 그다지 당당하지 못한 듯했다. 사진은 웬만하면 오른쪽을 찍어 달란다. 왼쪽 턱은 너무 각이 져, 날카로워 보인다며 씩 웃는다. 그러고는 쑥스러운지 이내 고개를 숙여 수첩에다 무엇인가를 다시 적는다.⊙
‘라인강의 기적’은 절대 기적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독일이 어떠한 나라인가. 두 번이나 전(全) 세계를 상대로 ‘맞짱 뜬’ 나라다. 잠수함을 만들고, 탱크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든 나라다. 오늘날 원자탄, 로켓과 같은 최첨단 무기기술은 죄다 독일서 시작되었다. 전쟁에 졌어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그 기술을 만든 사람들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다 망한 나라다. 식민지를 거쳐, 독립을 했다. 그것도 다 남의 힘으로 겨우 독립했다. 남의 힘으로 독립하다 보니, 이내 분단(分斷)되어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운다. 무기도 다 남의 나라 것 빌려다, 우리끼리 죽이고 살리고 한 것이다. 먹을 것도 없어,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던 민족이다. 동네아이들은 죄다 먼지 나는 미군(美軍) 지프차 꽁무니 따라다니며 ‘기브 미 껌’하던 나라다. 세상에 이렇게 한심한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이 나라가 하도 불쌍해 그 당시 도와주러 온 나라에는 태국도 있고, 필리핀도 있다.
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나라가 불과 50~60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强國)이 되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 눈부시게 발전한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오늘날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한국사회의 온갖 문제들이 가슴 아프고 힘들기는 해도,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참으로 가슴 뿌듯하다.
이승만·박정희 동상을 세우자는 金文洙
지식인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설픈 쇼비니즘’으로 비판받는다. 친구들은 내가 독일에 오래 살면서 외국인 차별에 너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주변부 열등감이 지나쳐 과잉애국심으로 왜곡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근대 이후 세계사에서 지난 반(半)세기 동안의 대한민국처럼 발전한 나라는 없다.
최근, 내 생각과 같은 ‘어설픈 쇼비니즘’이 기사화된 것을 읽었다. “역사상 오늘의 대한민국보다 위대했던 적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김문수(金文洙) 경기도지사의 주장이다. 그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자랑스러워하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고구려’도, ‘세종(世宗)대왕의 조선’도 오늘날의 대한민국보다 위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순신(李舜臣) 장군도 물론 훌륭했다. 그러나 망해 가는 조선을 지키던 장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옳다.
그런데 그는 한발 더 나간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銅像)만 있는 것이 불만이란다. 이 위대한 대한민국을 가능케 한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의 동상도 광화문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 잠깐! 이건 좀 오버다. 아니 많이 오버다. 개인적으로 이승만과 박정희의 기념관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성공과 실패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의 반열에 올리는 것은 나가도 한참 많이 나갔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는 이런 주장을 하는 걸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김문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김문수의 변절?
내 대학시절 그는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대부(代父)였다. 그가 ‘도바리’를 거듭하며 부천·인천 등에서 각종 시위, 집회를 이끌던 일은 지금도 내게 사진처럼 선명하다. 그는 전설이었다. 각종 유인물이 비처럼 뿌려지는 연설대의 한가운데는 항상 그가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그토록 부정하던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의 기원인 이승만과 박정희의 동상을 세우자고 하는 것이다. 그는 ‘변절(?)’했다. 그냥 변절한 것도 아니고 민자당,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거쳐, 경기도지사까지 되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1970~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이들은 모두 괴롭다. 그 청춘의 고통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우(左右), 혹은 보수와 진보로 나뉜 이 시대의 갈등을 외면하며 대부분 어정쩡하게 산다. 어쩔 수 없는 집안의 문제를 기억에서조차 지우며 사는 것처럼, 그 시절의 기억을 모두들 억누르며 산다. 도대체 김문수에게 그 시절의 기억은 어떨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오늘을 사는 것일까? 그를 만났다.
1 김문수는 참 촌스럽다. 그의 수첩도 죄다 싸구려다.
지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상당히 큰 문화행사에서 내가 사회를 본 적이 있다. 김문수가 경기도지사 자격으로 축사를 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간 후, 난 나름 유머라고 이야기했다.
“김문수 경기지사님은 다 좋은데, 참 가난해 보여요. 우리나라에서 서울시 다음으로 예산이 많은 경기도의 지사님인데, 스타일은 완전 함경북도지사 스타일이에요. 스타일이 참 촌스러워요.”
순간 행사장 분위기가 싸~해졌다. 모두 당황한 것이다. 난 유머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전혀 유머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실제로 ‘김문수는 참 가난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만나 이야기해 보니, 진짜 촌스러웠다. 팬 볼과 각진 턱의 얼굴 자체가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스로도 외모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시골 아저씨 같은 복장으로 수첩이 가득한 상자를 안고 나타났다. 아무리 휴일에 입는 편한 복장이라지만, 마른 체형에 배꼽까지 올라오는 ‘아저씨 바지’는 경기도지사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사진도 찍어야 하니, 좀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는 보좌진의 충고에 나름 ‘가장 세련된 옷’이라고 다시 갈아입고 왔다. 그러나 그 전 옷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낡은 비닐커버의 ‘양지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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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수의 ‘촌스러운’ 수첩들. 그의 수첩은 송곳처럼 불편하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
머리 스타일이나, 입는 옷맵시, 몸에서 놓지 않는 수첩, 좌다 참 ‘가난’하다. 삶의 가치나 사물을 평가하는 기준이나 모두 단순하다. 본질적 가치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수첩의 본질은 뜯어지지 않고 기록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노동운동 현장을 떠난 지 20년이 가깝지만 그의 삶의 태도는 노동운동할 때 그대로다. 아주 담백하다.
“요즘 어떠냐”는 내 인사치레 질문에, 그는 너무도 진지하게 “너무 행복하다”고 답한다. “원래 혁명가는 40살까지밖에 못 사는데 난 60이 다 되도록 살아 있으니 그렇게 행복하고 감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혁명가는 일찍 죽는다. 뒤집어 보면 오래 살면 혁명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를 꿈꿨던 김문수는 실제로 마흔까지 혁명가의 삶을 살았다. 그처럼 치열하게 시대의 모순과 부딪혔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마흔 이후의 김문수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그가 마흔이 되던 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90년이다. 독일이 통일된 해다. 사회주의가 무너진 것이다. 당시 노동운동이든, 학생운동이든, 이 사회의 변혁을 꿈꾸던 모든 이들에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그러니까 그 이론 체계와 현실 체계가… 70년 동안 했던 게 한 방에 넘어졌잖아. 소위 말하면 9·11 테러 때 월드 트레이드 센터 무너졌듯이, 우리 눈앞에서. 세계의 3분의 1이 와장창 넘어진 거지. 더 발전할 줄 알았는데 넘어진 현실을, 이걸 어떻게 해석할 거냐. 이걸 가지고 계속 얘기한 거죠. 그래서 이걸 우리가 받아들이자. 인간이 그렇게 이성적(理性的)이지 않고, 도덕적이지 않고, 개혁적이지 않다. 이것을 받아들인 거죠. 그래서 우리 그룹들이 모여 가지고 공부도 하고, 발제도 하고, 서구좌파의 흐름, 우파와의 투쟁관계… 이런 책들을 우리가 읽으면서, 역사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는 뭐냐… 결국 그렇게 한꺼번에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고, 인간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정한 역사 속에 점진적인 비약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을 선택한 거죠.”
“지금도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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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꼭 삼색 볼펜을 사용한다. 중요한 사안은 일일이 빨간색으로 체크한다. 그래서 조사하면 다 나온다. |
“괴로웠지. 아직도 괴롭지. 괴로우면 고통이지. 이 괴로움이 지옥처럼 짧게 끝나지 않아. 길게… 지금도 괴롭지. 이상과 현실이 틀린 게 우리가 꿈꾸던 새파란 하늘 그리고 아주 높고 깨끗한 하늘…, 근데 이건 뭐 깨끗하지도 않고, 구름도 왔다 갔다 하지, 폭풍우도 치지. 이건 뭐… 현실이 너무… 우리의 꿈속에 있는 것이, 내 생애에 많은 사람들의 혁명적 열정과 헌신, 조직을 위해서… 당대에 되지 않는다… 한 방의 혁명은… 없다는 거지.”
20년 가깝게 자신의 드라마틱한 변신에 관해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을 텐데, 그의 대답은 여전히 단순하고 소박하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혹은 여당에서 야당으로, 당적(黨籍)만 바꿔도, 모두들 민족과 역사를 들먹이는 엄청난 수사가 동원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지극히 원론적인 설명만 한다. 그래서 여전히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는 그 괴로움을 철저한 ‘헌신’으로 풀어낸다. 그에게 개인적인 삶은 없다. 노동운동가일 때도 그랬고, 경기도지사인 지금도 그렇다. 오직 자신이 선택한 가치에 헌신할 따름이다. 그래서 참 밋밋하다.
인터뷰 내내, 나는 김문수 개인의 내면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항상 경기도와 국가의 미래에 관한 비전으로 넘어갔다. 직업정치인의 경우, 대부분 이런 식이다. 그러나 김문수에게는 20년에 가까운 정치인에게 느껴지는 ‘노회(老獪)함’이 없다.
정치인 김문수를 비난하는 이들은 많다. 그러나 그 비난의 내용은 모두 20년 전 ‘변절’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서, 경기도지사로서의 지난 20년간의 김문수를 비난하는 이는 별로 없다. 모두 그의 투박한 ‘헌신’을 알기 때문이다. 그의 촌스러운 헌신은 투박한 수첩만큼이나 쉽게 뜯기지 않는다. 아주 집요하다.
2 김문수는 아무 데서나 적는다. 그래서 찾아보면 다 나온다!
인간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법정에서도 목격자의 증언은 확실한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실험으로 증명한다. 기억의 왜곡에 대해 집중 연구한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Elizabeth Loftus)의 연구는 어설픈 인간 기억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동일한 자동차사고 장면을 보여주고, 그 사건을 기억하라고 했을 때, 피험자들의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동일한 사건을 목격했지만 구체적 서술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김문수의 삼색 볼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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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사회주의의 몰락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시기의 기록. ‘마르크스의 과제가 아니라 우리의 과제’라고 씌어 있다. |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기가 놓아 둔 물건이 어디 있는지 기억하지 못해, 매일 평균 55분을 허비한다고 한다. 자신의 생명과 관련된 경우조차, 기억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스카이다이버들은 종종 자기 낙하산을 펼치는 것을 잊는다고 한다. 스카이다이빙 사망사고의 약 6%가 이런 경우다. 뿐만 아니다. 차 안에 아이를 두고 내리는 부모도 있다. 비행기 조종사도 예외는 아니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망각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 간다. 그래서 아직도 조종사들은 아주 원시적인 점검표를 사용한다.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일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일일이 손으로 체크해가며 확인한다.
김문수도 일일이 체크한다. 그의 수첩은 빡빡한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처리된 일은 체크되어 있고, 해야 할 일이나 중요한 사안들은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꼭 삼색 볼펜으로 기록한다.
‘변절’ 시기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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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와 민중당’에 관한 논의를 기록한 내용. |
이론이나 불확실한 편견만 가지고 우기지 말고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는 거다. 조사하면 다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의 ‘변절’ 시기의 기록을 함께 찾아봤다.
기록에는 ‘우리의 과제. M의 과제가 아니라 우리의 과제. M의 위기… 운동상 분열상 대단한… 권력 자체의 고유한 속성. 상대적 자율성의 문제…’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서 M이란 ‘마르크스주의’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바라보며 그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의 과제’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고민은 혁명이 아닌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이어지는 기록에는 ‘노동자와 민중당’에 관한 내용들이 있었다.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라면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만큼, 잘못된 사실이나 실패에 대한 인정도 빠르고 명쾌하다. 자질구레한 변명이 없다. 그는 한국의 ‘좌파’에 대해서도 한쪽만 이야기하지 말고, 명확한 ‘팩트’를 가지고, 동일한 잣대를 가지고 남한과 북한 양쪽을 토론하자고 이야기한다. 흑백논리는 ‘팩트’와는 거리 먼 편견이라는 거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비판하는 ‘좌파’들이 과거 그를 따르던 동료, 후배들이라는 사실이다.
“좌파가 쓴 글은 선악(善惡)이 선명해. 자본주의는 악이라는 거지. 자본주의라는 제도가 인간을 이렇게 황폐화시킨다고 하면 모든 게 끝나. 그럼 내가 묻고 싶은 게… 자본주의가 그렇게 사람을 황폐화시키는데, 당신은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이렇게 여러 가지 소비를 누리고 사는가. 자본주의 소비는 늘 허망하다고들 그래. 그럼 자기는 소비를 안하나? 근데 그냥 한마디로 끝내 버리지.
이건 완전히 웃기는 이야기야.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지성은 참 약해. 그냥 넘어간다고. 나는 안 넘어가지. 문제제기 하지. 자본주의는 다 악인가? 자본주의 소비는 늘 허망한 거냐? 늘 문제가 있는 거냐? 그럼 자본주의가 없는 북한이 안 허망하냐? 성공적이냐? 비전이 있냐? 내가 묻지. 답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러면 그들은 또 그래요. 야,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이 자본주의가 그렇다는 거지. 아니, 그게 뭐야… 북한을 비판하는 소리는 전혀 안 해. 그게 뭐냐고…. 나는 그쪽에 내 청춘을 다 보냈고, 지금은 또 이리 와 있어요. 물론 그쪽에도 좋은 점은 있었어요. 우리 이런 거를 한마디로 흑백으로 하지 말자 이거야.”
인간은 절대 안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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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문수의 어린 시절 일기 내용들. 일기내용을 읽어보면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 초등학교때의 김문수나 지금의 김문수나 하나도 다를 게 없다. |
‘놀러 온 할머니께서 점쟁이라고 하셔서 관상을 봐 달라고 하였더니… 우리들은 모두 잘살겠다고 하셨다. 나는 점쟁이가 보는 것이 뭣이 맞겠느냐고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김문수나 지금의 김문수가 이야기하는 투나 생각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조금 더 자란 후, 중학교 때의 일기를 들쳐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나도 모든 사람에게 절대 친절하며, 성화를 내지 않고, 조직적인 생활을 하고,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내 최선을 다하겠다고….’
또 이런 내용도 있다. ‘최선태. 그는 참 프라이드가 센 내가 좋아하는 친구이다. 그는 마치 범과 같아서 칭찬해 주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난 그런 인간이 좋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 단지 그의 행동, 즉 그의 우스운 센 그의 pride 그것일 뿐이다.’
아, 이 대목에서 심리학자인 나는 좌절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의 김문수나, 노동운동가 김문수나, 경기도지사 김문수나 다 똑같다. 철저하고, 자기 주장 강하고, 꼬장꼬장하다. 인간 김문수는 하나도 안 변했다. 인간은 절대 안 바뀐다.
3 김문수의 수첩에는 불필요한 수사가 없다. 그의 주장은 주머니의 송곳처럼 당혹스럽다.
김문수의 수첩에는 정서적 표현이 거의 없다. 불필요한 수사는 전혀 없다. 정확한 기록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차갑다. 그가 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둘러 가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그가 생각하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할 뿐이다. 그래서 경기도 공무원들은 그를 무서워한다. 보고할 때마다 불호령이기 때문이다. 그의 요구는 매번 동일하다. 제발 요점만 분명히 하라는 거다.
요점정리는 사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히 이해한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어설픈 보고는 무자비하게 당한다. 김문수는 자신이 경기도 공무원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는 인기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다. 비판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긴 20년 가까이 ‘변절자’란 소리를 들어 온 그가 뭘 무서워할까.
“사랑의 말은 한 줄도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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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 아주 늦게 김문수가 아내에게 전한 유일한 사랑 표현이다. ‘사랑의 말은 한 줄도 길다.’ 김문수는 이토록 정서표현이 서툴다. |
도대체 아내에게 애틋한 편지 한 통 보낸 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약간 수줍어하며 서재 한 귀퉁이에 있는 시집을 꺼내 온다. 유시화의 시집 ‘한줄도 너무 길다’였다. 표지를 넘기자, 그가 아내를 위해 쓴 유일한 서정적 표현이 나온다. ‘사랑의 말은 한 줄도 길다. 2000. 9. 20. 내 사랑 설난영을 위하여. 김문수’
정치인의 아내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문수의 아내는 여타 정치인의 아내와 또 다르다. 평생 노동운동을 함께 하고, 옥바라지를 하고, 또 정치인의 아내로 희생하고 있다. 그 아내에게 고작 시집 한 권 선물하며 쓴 글이, ‘사랑의 말은 한 줄도 길다’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그 애틋한 표현을 본인의 입으로는 쑥스러워 차마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김문수답다. 그리고 그의 아내 설난영은 참으로 대단하다.
광화문도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적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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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김문수. 그는 아무 데서나 적는다. 적을 곳이 없으면 그냥 주저앉아 적는다. |
이승만, 박정희의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는 그의 과격한 주장은 우연하게 나온 것이 아니다. 그의 수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확한 사실만을 기록하는 그의 수첩처럼 광화문도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적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광화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공간이라면 이 위대한 대한민국을 수립한 건국자 이승만과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박정희를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기록을 정확히 해야 하는 지도자들이 다들 피해 간다는 거다.
역사는 편집이다. 끊임없이 재(再)구성된다. 현재의 지배적인 가치와 이념에 의해 재해석된다는 이야기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재구성, 재해석의 기초가 되는 기록이다. 그 기록은 매번 정확해야 한다. 정확하지 못하거나 기록이 누락되면 역사는 왜곡된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아이덴티티, 즉 인간의 정체성(正體性)은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달릴 때는 과거의 긍정적 사건들만 기억난다. 힘든 기억들조차 의미 있는 고통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현재가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면 끊임없이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만 기억난다. 힘든 현재가 고통스런 과거를 불러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기억의 왜곡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래서 우울증이 무서운 것이다. 헤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년의 우울증이라곤 찾아올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인간 김문수의 당당함은 그의 수첩에서 나온다. 그의 수첩은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불편하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한 사실의 기록 앞에 기억의 왜곡이나 무의식적 억압이 설 자리는 없다. 그래서 김문수는 자신의 그 드라마틱한 개인사에도 그토록 당당한 것이다.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정확하다”
인터뷰 내내 ‘그는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근거 없이 말장난으로 우기는 이들을 그는 매우 싫어한다. 아주 오래 전, 그와 함께 민중당 창당을 준비했던 내 친구는 김문수의 꼬장꼬장함을 지금도 이야기한다. 구석에 앉아 그 특유의 사투리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로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에 모두들 질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인물에는 그다지 당당하지 못한 듯했다. 사진은 웬만하면 오른쪽을 찍어 달란다. 왼쪽 턱은 너무 각이 져, 날카로워 보인다며 씩 웃는다. 그러고는 쑥스러운지 이내 고개를 숙여 수첩에다 무엇인가를 다시 적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