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명문가 외교관과 조선 신여성의 사생아로 태어나
⊙ 어머니는 출가해 일엽(一葉)이란 법명을 받고 비구니가 돼. 후일 찾아온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며 등 돌려
⊙ 한국전쟁 직전, 북한에서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다 탈출
⊙ 일본에서 화가로 활약하다 68세 때 출가
金泰伸
⊙ 1922년 출생.
⊙ 황해도 신천 소학교, 일본 도쿄혼고중, 도쿄제국미술학교, 고야산불교대학 졸업.
⊙ 수상 경력: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공모 아사히상 수상, 일본 닛푸전(日府展)상,
우에노모리(上野森) 미술관상, 신일본미술원전(新日本美術院展) 미술원상 수상.
⊙ 한국, 일본, 중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각종 초대전, 불사전, 개인전, 교류전 등을
열었으며, 300여 회 미술전람회 개최.
⊙ 어머니는 출가해 일엽(一葉)이란 법명을 받고 비구니가 돼. 후일 찾아온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며 등 돌려
⊙ 한국전쟁 직전, 북한에서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다 탈출
⊙ 일본에서 화가로 활약하다 68세 때 출가
金泰伸
⊙ 1922년 출생.
⊙ 황해도 신천 소학교, 일본 도쿄혼고중, 도쿄제국미술학교, 고야산불교대학 졸업.
⊙ 수상 경력: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공모 아사히상 수상, 일본 닛푸전(日府展)상,
우에노모리(上野森) 미술관상, 신일본미술원전(新日本美術院展) 미술원상 수상.
⊙ 한국, 일본, 중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각종 초대전, 불사전, 개인전, 교류전 등을
열었으며, 300여 회 미술전람회 개최.
‘이 세상은 이런 운명도 있는 세상이다.’(시인 高銀)
간혹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만나게 된다. 철저히 자기 이야기이면서도 허구적으로 보이는 삶, 운명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팍팍하게 산 사람을 만나면 절로 감동이 묻어난다.
68세 나이로 불가에 귀의한 화승(畵僧) 김태신(金泰伸ㆍ89) 화백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다. 그의 삶 자체가 굴곡진 현대사만큼이나 기구하다. 법명은 일당(日堂). 김천 직지사의 관응(觀應) 스님에게 수계를 받고 출가해 현재 서울 성북동 성라암과 경남 양산의 법수사에 기거하며 동양화를 그리고 수도에 정진 중이다.
기자는 지난 6월 일당 스님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가 그린 화집을 펼쳐보며 그가 쓴 글을 읽어 보았다.
‘라훌라’는 부처님이 속가에 두었던 친아들의 이름이다. 라훌라는 ‘애물(碍物)’이라는 뜻의 범어(梵語)이기도 하다. 부처가 출가하여 수도할 때 아들이 태어나자 수행에 방해된다 하여 이런 이름을 전했다고 한다.
192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비구승인 일엽(一葉) 스님(속가명 金元周ㆍ1896~1971)이 출가하기 전 청춘을 불사르던 시절에 낳은 아들이다. 일엽은 근대초기 여성해방을 부르짖던 ‘신(新) 여성’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 스님인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수 없었던 일당으로서는 라훌라의 존재와 다름없었다. 수덕사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숭산의 가파른 산길을 걸어 올라 어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늦봄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터질 듯 쿵쿵거리던 기억이 어제의 일인 듯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 스님’은 매정하게도 상봉의 감격을 느끼기도 전에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고 주문한다. 아들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때부터 분출구를 찾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은 저 자신의 내면으로 응축돼 저를 분노의 화신으로 만든 반면, 저를 살아 있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를 향해 표현해 볼 수 없었던 그리움을 그림과 글로 남기고 싶었어요. 그리고 예순여덟에 세속의 인연을 접고 어머니가 가신 길을 따라 출가하게 되었지요.”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버려진 아이
그의 아버지는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의 오다 세이조(太田淸藏)다. 오다 세이조의 부친인 오다 호사쿠(太田法祚)는 일본 시중은행의 총재였다고 한다. 에도(江戶) 시대의 명장인 오다 도칸(太田道灌)의 직계 손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더불어 일본의 천하를 통일한 사람이었다. 오다 가문은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라고 한다.
오다 세이조는 1921년 일본 도쿄행 특급열차에서 조선에서 유학 온 김원주(일엽 스님)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가 잉태된다. 오다 세이조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 은행총재인 아버지를 찾아갔으나 “조센징 며느리를 둔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일엽 스님은 1920년에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여 여성해방과 자유연애 사상을 부르짖던 분이셨어요. 당대 신여성이었던 나혜석과 윤심덕의 친구이기도 했고 ‘정조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新貞操論)’이란 글을 발표하기도 하셨지요. 이화학당을 거쳐 도쿄의 영화학교로 유학을 떠날 정도로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번의 결혼 실패 후 아버지를 만나 저를 낳았어요.”
그러나 부모의 결혼 반대로 오다 집안의 며느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하고 살면 제 일신은 편안하겠지만 나로 인해 천륜을 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려라’는 편지를 남기고 한국으로 떠나 버린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했네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같이 자존심이 센 분들이었고 한번 결심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꺾지 않은 지독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정에 굶주린 미아(迷兒)가 되어야만 했어요.”
그는 도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출생에 얽힌 비화도 소년기에는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일본인 친구 집에 잠시 맡겨졌다가 얼마 후 한국인 친구인 황해도 신천군의 송기수(宋基洙)씨 집에서 송씨 집안 아들로 자랐다. 그러니까 황해도 신천의 정미소집 둘째 아들이 된 것이었다.
“친아버지가 지어준 일본 이름은 오다 마사오(太田政雄)였지만, 의붓아버지 아래에서 송영업(宋永業)이란 이름으로 자랐어요. 부잣집 둘째 아들로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신천의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친아버지 오다 세이조는 이후 일본 정보기관 요원을 양성하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다. 조선으로 발령을 받은 뒤 아내를 수소문했으나 이미 출가한 뒤였다고 한다. 가정을 이루려던 꿈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오다 가문과 절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일본이 패망한 뒤 독일 주재 일본 특사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당, 해강, 청전과의 만남
소학교 시절, 일당의 학업성적은 또래보다 특출하지 않았으나 그림 솜씨가 빼어났다고 한다. 황해도 학생미술대회와 도(道) 대항 사생대회에 나가 최고상을 받았다. 그런 재능을 간파한 의붓아버지 송기수는 그를 당대 최고 동양화가였던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ㆍ1892~1979) 선생의 문하로 들여보낸다.
“사실 이당 선생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힘을 쓰셨기 때문이었어요. 이당 선생은 노모와 부인, 딸과 사셨는데 아들이 없어서 저를 수양아들로 키우셨어요. 그리고 ‘김설촌(金雪村)’이란 이름을 따로 지어주셔서 저는 그때부터 송영업이 아니라 김설촌으로 자라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설촌이란 이름이 제일 애착이 가요.”
묵향이 그윽하던 이당 선생의 집에는 당대 일류 화백들의 출입이 잦았다.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ㆍ1868~1933) 선생과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ㆍ1897~ 1972) 선생이 그를 귀여워하며 그림을 가르쳤다고 한다. 훗날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화가가 된 것도 이들 스승에게서의 배움이 컸다.
“흔히 동양화라면 수묵 산수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술학교에 들어가 보니 남화(南畵), 북화(北畵), 채색화, 수묵화 등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채색화를 해도 수묵화를 무시할 수 없어요. 동양화의 기초는 역시 수묵화거든요. 사군자에서 그림의 테크닉과 필력을 얻어서 채색화를 그리게 됐어요. 어린 시절, 청전 선생에게 산수화를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고 해강 선생에게 사군자의 필력을 배운 게 큰 힘이 됐지요. 현재의 채색화를 그리는 데 밑바탕이 됐어요.”
그가 도쿄제국미술학교의 동양화과에 입학한 것은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1941년이다. 그러나 그를 그림의 세계로 빠뜨린 것은 어머니 일엽 스님의 존재를 알면서부터다. 그의 나이 14세 때다.
―어머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우연히 어머니가 충남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 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출가(出家)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처음엔 ‘출가’라는 말이 재혼을 뜻하는 줄 알고 크게 실망했어요. 하지만 ‘스님이 됐다’는 말로 고쳐 듣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게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던지.”
그는 그 길로 수덕사를 찾아갔다. 이당 선생이 집을 비운 사이 전차를 타고 경성(서울)역에 내린 뒤 삽교행(行) 기차를 탔다.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뿜으며 달릴 때 그의 마음은 이미 수덕사의 앞마당을 뛰어가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수덕사에 도착해 어머니 스님을 찾았다. 잠시 후 “내가 김일엽인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다짜고짜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엽 스님은 주춤 뒤로 물러나며 주위를 둘러봤다. 장삼 자락으로 눈물을 닦고서 아들에게 “울음을 그쳐라”고 말하며 “다시는 어머니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리움에 찾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는 일엽 스님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저를 처음 본 어머니가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었어요. 눈덩이처럼 불어난 그리움이 눈물로 변해 콸콸 쏟아졌지만, 어머니 품에 안길 수도 없었어요. ‘절에 왔으니 절 풍속을 따라야 한다’며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뵈려고 수덕사를 자주 찾았다. 도쿄제국미술학교에 다닐 무렵, 방학마다 수덕사로 달려갔다. 도쿄에서 시모노세키(下關)로, 다시 부관(釜關)연락선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넌 뒤 서울의 이당 선생 집에 짐을 풀면 곧바로 수덕사로 향했다. 긴 여정이었으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을 이겨냈다고 한다.
하지만 일엽 스님은 아들을 절간에서 재워주지도 않고, 절 밖 ‘수덕여관’으로 내쫓기 일쑤였다. 수덕여관에서는 어머니의 친구인 나혜석이 친아들처럼 반겼다고 한다. 나혜석(羅蕙錫ㆍ1896~1948)은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油畵)를 공부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봉건적 사회관습에 도전한 여성운동가다.
―나혜석이 어머니를 대신해 반겨주던가요?
“어머니는 냉랭한 모습으로 대하며 눈길도 주지 않고 내쫓았어요. 그러곤 수덕사 아래에 있는 수덕여관에 가서 자라고 했어요. 그럼 나혜석 아줌마가 ‘수덕사 견성암까지 올라갔다가 쫓겨났구나’ 하시며 저를 친아들처럼 대해 줬지요. 아줌마는 제게 팔베개를 해 주었고, 그렇게 품에 안겨 아줌마가 어머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에 빠지곤 했어요.”
―나혜석은 왜 수덕사 밑의 수덕여관에 머물러 계셨나요?
“나혜석 아줌마는 이혼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며 수덕사를 찾았지만 ‘스님이 될 사람이 아니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봐요. 그래도 덕숭산을 떠나지 않고 수덕사 아래 머물며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지요.”
그는 수덕사에 들른 것이 계기가 돼 방학마다 귀국해 한국의 명산과 고찰을 두루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게 됐다. 이 과정에서 만공 스님, 탄옹 스님 등을 만나 자연스럽게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원이자 해인대학 학장을 역임한 최범술(崔凡述ㆍ1904~ 1979), 임환경, 김봉률(김천 직지사 스님) 등 독립운동가와 만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ㆍ1879~1944)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운반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편지 심부름을 부탁했는데 그 편지 속에 독립운동 자금이 있다는 것을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자금 전달에 이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친절하게 대해 주다 보니 편지를 운반하는 심부름을 한 것입니다. 나중 불교계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국가보훈처에 가서 증언했고, 그 덕에 많은 인사가 독립유공자가 될 수 있었던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예우하겠다고 했으나 사양했다.
김일성 화가가 되다!
그는 1944년 도쿄제국미술학교의 졸업반 학생이 되었다. 광복되기 1년 전으로 그해 4월에 일본 문부성(文部省) 주최로 개최된 대학생 전람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보다 군사훈련을 더 많이 받았고 전황(戰況)이 불리하자 다른 졸업생과 함께 학도병으로 참전하게 됐다.
제국미술학교 동창 20명 중 그를 제외한 모두가 전선으로 배치됐는데 그만 본토의 나고야 육군본부로 배속됐다. “추측이지만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배려 때문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군종화가로 배속됐고 계급장을 달지 않고 복무하는 특별군인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동창생 대부분이 전사했고 살아 돌아온 동창은 이데(井出)라는 친구 한 명뿐이었어요. 20대 중반도 넘기지 않은 젊은 화가들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목숨을 바쳐야 했는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그보다 살기 위해 죄 없는 적군(敵軍)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어요. 하지만 죽어간 내 동창들에게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 1945년 9월 22일 나고야 육군본부 영창에 수감된 한국인 죄수 200명과 함께 귀국했다.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광복과 더불어 남쪽에는 미군(美軍)이 진주하고 북쪽에는 소련군(蘇聯軍)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한반도는 허리가 동강 났지만, 그는 황해도 신천의 의붓아버지 송기수를 만나러 38선을 넘었다. 이당 선생이 만류했지만 고집을 피웠다.
“캐러멜, 초콜릿 같은 미제 잡화를 이북에 파는 장사치들과 함께 38선을 넘었어요. 이들이 길 안내를 해 주었어요. 당시엔 장사치들이 38선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저도 무사히 황해도 신천에 다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오산이었어요.”
―의붓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나요?
“38선을 넘어 사흘 만에 해주에 도착했는데 북한 보안대에 붙잡혔습니다. 부농(富農)이었던 의붓아버지는 부르주아 지주계급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고 당연히 저는 친일파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됐어요.”
―인민재판에 회부됐겠군요.
“일본 순사 출신의 인민군 보안요원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취조 과정에서 도쿄제국미술학교 출신이란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화위복이 됐어요.”
어느 날 평양에서 공산당 고급 간부가 찾아왔다. 스탈린과 김일성(金日成) 사진을 보여주며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렸더니 당장 평양으로 가자는 겁니다. 그 길로 평양 모란봉 인근의 한 적산가옥(敵産家屋)에 살면서 소련인 화가와 둘이서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게 됐어요. 초상화 제작 작업이 제게 주어진 혁명 과업인 셈이었지요.”
지금처럼 사진 기술이 발달해 있었더라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김일성을 직접 만나 100호짜리(130×160㎝) 큰 초상화를 그렸다. 그 그림이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다고 한다.
“당시는 사진술이 낙후된 터라 엄청나게 많은 초상화가 필요했던 시기입니다. 새로운 관공서마다 대형 초상화를 내걸어야 했고 내부 사무실에도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나란히 걸어야 했으니 일손이 엄청나게 달렸지요. 저는 친일파 자식에다 악질 부르주아 지주계급이라는 낙인이 찍혔었지만, 화가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얼마나 많이 그렸습니까.
“셀 수 없이 많이 그렸어요. 그 흔적들이 아직 북한에 많이 남아 있을 겁니다. 초상화 외에 다른 그림도 제법 그렸는데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어요. 평양과 함경도 청진, 황해도 해주 등 이북 전역을 돌아다니며 초상화를 그렸어요. 마음속으론 탈출할 생각이 컸지만,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탈출하게 됐나요?
“황해도 해주 쪽에 초상화를 그리러 갔다가 고향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했어요.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쯤, 해주의 용당포 쪽으로 탈출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도망치는 도중에 밀물이 밀려와 꼼짝없이 물속에 잠기게 됐을 때 저를 데리러 온 배가 나타났어요.”
결국 다시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나중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크게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일본에 정착, 작품 활동을 할 때는 조총련계 간첩으로 의심받기도 했다.
일본에 정착, 화가로 성공하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이당 선생 댁에 머물며 한국에서 살아갈 길을 찾았다. 이당은 그의 재능을 탁마(琢磨)시키고 훌륭한 화가로 키우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쏟았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거물급 초상화 주문을 그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그린 것이 동학의 창설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ㆍ1824~1864) 선생과 독립운동가 서재필(徐載弼ㆍ1864~1951) 박사의 초상화다.
서재필 박사는 자신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었던지 그를 사위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물감 원료를 구하기 위해 일본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한일국교 문제와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한국으로 돌아올 길까지 막막해졌다. 결국 어머니가 입적한 1971년까지 일본에 머무르게 됐고 그곳에서 교포 처녀와 결혼해 아들 셋을 낳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1971년 귀국하려 했으나 조총련계라는 이유로 불가능했어요.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가 신원을 보증해서 가까스로 귀국할 수 있었지요. 그때가 이듬해 1월이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 삽교행 기차를 타고 수덕사에 있는 어머니의 부도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의 추상같은 냉정함 속에는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어머니는 제가 정신적으로 이유(離乳)를 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였지요. 어차피 저를 거둬들일 수 없는 몸이라면 속세에 두고 온 아들이 어머니 없어도 살아가는 대장부가 되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게 됐던 것이지요.”
그는 귀국하기까지 일본에서 화가로 활동했다. 1948년 <아사히(朝日)신문> 주최 공모전에서 ‘아사히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1955년 일본 닛푸(日府) 공모전에서 전통춤인 승무(僧舞)를 그린 작품으로 최고상인 ‘닛푸상’을 탔다. 닛푸전은 일본의 3대 미술상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권위가 높은 공모전이다. 그는 닛푸전에 응모할 때 쓴 김태신(金泰伸)이란 이름을 지금도 쓰고 있다. 또 우에노모리(上野森) 미술관상, 한국문화원상,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상 등을 수상했고 일본 창조미술협회와 신미술협회의 심사위원을 거쳐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의 명사초대전 심사위원을 각각 역임했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의 산을 그리기로 결심했어요. 제게 산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을 그리고, 산을 그리면서 어머니를 잊고 싶었거든요. 산을 그린다는 것은 곧 어머니와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위로와 휴식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일당은 다소 신비로운 느낌의 ‘석채(石彩)’라는 독특한 재료를 써서 채색화를 그리는 화가다. 고구려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한 천연색을 뽑아내기 위해 직접 돌가루를 내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느낌이 배어 있다.
“석채 작업은 한 번만에 원하는 색상이 나오지 않아 물감이 마른 상태에서 다시 색상을 살핍니다.”
웬만한 인내심으로 해소되지 않는 지루한 작업을 거치며 꽃들이 다투어 핀 봄의 설악산이나 녹음 짙은 여름의 주왕산, 오색단풍으로 물든 지리산과 눈 덮인 한라산을 화폭에 옮겨놓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림이 대부분 고요하다. 평온하면서도 강렬한 자연의 섭리를 담고 있거나 정적이면서도 신비감이 비치는 산 그림자, 멀리 보이는 달, 비어 있는 듯하면서 꽉 채워진 여백미까지 담고 있다.
또 인물화 작업도 병행해 왔는데 세속적인 인물 대신 관세음보살이나 미륵반가상, 달마 같은 불교화를 주로 그렸다.
“이당 선생에게 채색화를 처음 배웠고 일본에서 활동하면서도 고집스럽게 한국의 산하나 한국적 소재와 정서를 화폭에 옮겨왔지요. 그러나 귀국해서 보니 채색화의 기법과 전통이 거의 소멸돼 그것이 늘 안타까웠어요. 가르쳐줄 스승도, 배우려는 학생도 없어졌습니다. 이 끊어진 전통을 찾아 이어주는 것이 제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당의 낯선 그림을 두고 혹자는 서양화라고 하는 이도 있고, 심지어 왜색(倭色) 짙은 일본화 작가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본에 가본 일도 없고 일본화를 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것이 아니면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 볼 수밖에 없는데 원래 우리가 가진 채색화의 전통을 잃어버린 줄은 모르고 왜색을 경계하자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냉대당하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고 오해받으며 살아왔어요.”
어머니를 따라 출가
그는 예순여덟의 나이로 출가한다. 속세의 시간으로 따져보면 ‘늦깎이 출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다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음악교사 아내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두었으나 어머니의 뒤를 따라 머리를 깎은 것이다. 김천 직지사 관응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다.
“라훌라는 1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뒤를 이어 출가했지요. 그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며 밀행제일(密行第一)의 높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제가 어머니 스님의 라훌라였다면 애물의 상태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어머니 뒤를 이어 출가해 밀행제일의 경지에 오르는 라훌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아내에게 출가할 뜻을 비쳤을 때 아내는 처음에 농담 정도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크게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제 갈 길을 제발 막지 말아 달라”며 끝내 불가의 문에 들어섰다. 출가 후 직지사 중암(中庵)에서 머무르다 현재는 서울 성북동의 성라암과 경남 양산의 법수사에 화실을 차려놓고 그림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늦깎이 출가를 하고 보니 탈속이 쉽지 않아요. 머리를 깎기 전 분망하고 맥동 쳤던 저를 생각하면 마치 납자(衲子)의 수행 도정이었던 듯도 싶지만 라훌라가 되기란 더더욱 먼길임을 알게 됐어요. 하지만 서방정토에서 어머니를 만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이루기 위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아버지 오다 세이조는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1970년대 초에 특사로 나가 있던 서독에서 유명을 달리했어요. 어머니와 헤어지고는 독신으로 살다 떠났으니 아버지의 외로운 영혼이 구천을 헤매지나 않을지 안타깝습니다. 이승에서는 헤어졌지만 구천에 있을 아버지를 서방정토로 부르기 위해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현재 ‘영화 같은’ 그의 삶은 일본에서 진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사진 : 서경리
간혹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만나게 된다. 철저히 자기 이야기이면서도 허구적으로 보이는 삶, 운명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팍팍하게 산 사람을 만나면 절로 감동이 묻어난다.
68세 나이로 불가에 귀의한 화승(畵僧) 김태신(金泰伸ㆍ89) 화백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다. 그의 삶 자체가 굴곡진 현대사만큼이나 기구하다. 법명은 일당(日堂). 김천 직지사의 관응(觀應) 스님에게 수계를 받고 출가해 현재 서울 성북동 성라암과 경남 양산의 법수사에 기거하며 동양화를 그리고 수도에 정진 중이다.
기자는 지난 6월 일당 스님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가 그린 화집을 펼쳐보며 그가 쓴 글을 읽어 보았다.
‘라훌라’는 부처님이 속가에 두었던 친아들의 이름이다. 라훌라는 ‘애물(碍物)’이라는 뜻의 범어(梵語)이기도 하다. 부처가 출가하여 수도할 때 아들이 태어나자 수행에 방해된다 하여 이런 이름을 전했다고 한다.
1922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비구승인 일엽(一葉) 스님(속가명 金元周ㆍ1896~1971)이 출가하기 전 청춘을 불사르던 시절에 낳은 아들이다. 일엽은 근대초기 여성해방을 부르짖던 ‘신(新) 여성’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 스님인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수 없었던 일당으로서는 라훌라의 존재와 다름없었다. 수덕사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숭산의 가파른 산길을 걸어 올라 어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나이 14세가 되던 해 늦봄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터질 듯 쿵쿵거리던 기억이 어제의 일인 듯 선명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 스님’은 매정하게도 상봉의 감격을 느끼기도 전에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고 주문한다. 아들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때부터 분출구를 찾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은 저 자신의 내면으로 응축돼 저를 분노의 화신으로 만든 반면, 저를 살아 있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를 향해 표현해 볼 수 없었던 그리움을 그림과 글로 남기고 싶었어요. 그리고 예순여덟에 세속의 인연을 접고 어머니가 가신 길을 따라 출가하게 되었지요.”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버려진 아이
그의 아버지는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학과 출신의 오다 세이조(太田淸藏)다. 오다 세이조의 부친인 오다 호사쿠(太田法祚)는 일본 시중은행의 총재였다고 한다. 에도(江戶) 시대의 명장인 오다 도칸(太田道灌)의 직계 손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더불어 일본의 천하를 통일한 사람이었다. 오다 가문은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명문가라고 한다.
오다 세이조는 1921년 일본 도쿄행 특급열차에서 조선에서 유학 온 김원주(일엽 스님)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가 잉태된다. 오다 세이조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 은행총재인 아버지를 찾아갔으나 “조센징 며느리를 둔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일엽 스님은 1920년에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여 여성해방과 자유연애 사상을 부르짖던 분이셨어요. 당대 신여성이었던 나혜석과 윤심덕의 친구이기도 했고 ‘정조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新貞操論)’이란 글을 발표하기도 하셨지요. 이화학당을 거쳐 도쿄의 영화학교로 유학을 떠날 정도로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번의 결혼 실패 후 아버지를 만나 저를 낳았어요.”
그러나 부모의 결혼 반대로 오다 집안의 며느리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하고 살면 제 일신은 편안하겠지만 나로 인해 천륜을 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니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려라’는 편지를 남기고 한국으로 떠나 버린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했네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같이 자존심이 센 분들이었고 한번 결심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꺾지 않은 지독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정에 굶주린 미아(迷兒)가 되어야만 했어요.”
그는 도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출생에 얽힌 비화도 소년기에는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일본인 친구 집에 잠시 맡겨졌다가 얼마 후 한국인 친구인 황해도 신천군의 송기수(宋基洙)씨 집에서 송씨 집안 아들로 자랐다. 그러니까 황해도 신천의 정미소집 둘째 아들이 된 것이었다.
“친아버지가 지어준 일본 이름은 오다 마사오(太田政雄)였지만, 의붓아버지 아래에서 송영업(宋永業)이란 이름으로 자랐어요. 부잣집 둘째 아들로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신천의 소학교를 다녔습니다.”
친아버지 오다 세이조는 이후 일본 정보기관 요원을 양성하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다. 조선으로 발령을 받은 뒤 아내를 수소문했으나 이미 출가한 뒤였다고 한다. 가정을 이루려던 꿈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오다 가문과 절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일본이 패망한 뒤 독일 주재 일본 특사로 근무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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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신이 어머니를 떠올리며 그린 「승려도」. |
이당, 해강, 청전과의 만남
소학교 시절, 일당의 학업성적은 또래보다 특출하지 않았으나 그림 솜씨가 빼어났다고 한다. 황해도 학생미술대회와 도(道) 대항 사생대회에 나가 최고상을 받았다. 그런 재능을 간파한 의붓아버지 송기수는 그를 당대 최고 동양화가였던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ㆍ1892~1979) 선생의 문하로 들여보낸다.
“사실 이당 선생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힘을 쓰셨기 때문이었어요. 이당 선생은 노모와 부인, 딸과 사셨는데 아들이 없어서 저를 수양아들로 키우셨어요. 그리고 ‘김설촌(金雪村)’이란 이름을 따로 지어주셔서 저는 그때부터 송영업이 아니라 김설촌으로 자라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설촌이란 이름이 제일 애착이 가요.”
묵향이 그윽하던 이당 선생의 집에는 당대 일류 화백들의 출입이 잦았다.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ㆍ1868~1933) 선생과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ㆍ1897~ 1972) 선생이 그를 귀여워하며 그림을 가르쳤다고 한다. 훗날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화가가 된 것도 이들 스승에게서의 배움이 컸다.
“흔히 동양화라면 수묵 산수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술학교에 들어가 보니 남화(南畵), 북화(北畵), 채색화, 수묵화 등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채색화를 해도 수묵화를 무시할 수 없어요. 동양화의 기초는 역시 수묵화거든요. 사군자에서 그림의 테크닉과 필력을 얻어서 채색화를 그리게 됐어요. 어린 시절, 청전 선생에게 산수화를 배운 게 많은 도움이 됐고 해강 선생에게 사군자의 필력을 배운 게 큰 힘이 됐지요. 현재의 채색화를 그리는 데 밑바탕이 됐어요.”
그가 도쿄제국미술학교의 동양화과에 입학한 것은 그의 나이 19세가 되던 1941년이다. 그러나 그를 그림의 세계로 빠뜨린 것은 어머니 일엽 스님의 존재를 알면서부터다. 그의 나이 14세 때다.
―어머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을 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우연히 어머니가 충남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 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출가(出家)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처음엔 ‘출가’라는 말이 재혼을 뜻하는 줄 알고 크게 실망했어요. 하지만 ‘스님이 됐다’는 말로 고쳐 듣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게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던지.”
그는 그 길로 수덕사를 찾아갔다. 이당 선생이 집을 비운 사이 전차를 타고 경성(서울)역에 내린 뒤 삽교행(行) 기차를 탔다.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뿜으며 달릴 때 그의 마음은 이미 수덕사의 앞마당을 뛰어가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수덕사에 도착해 어머니 스님을 찾았다. 잠시 후 “내가 김일엽인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다짜고짜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엽 스님은 주춤 뒤로 물러나며 주위를 둘러봤다. 장삼 자락으로 눈물을 닦고서 아들에게 “울음을 그쳐라”고 말하며 “다시는 어머니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리움에 찾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는 일엽 스님의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저를 처음 본 어머니가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었어요. 눈덩이처럼 불어난 그리움이 눈물로 변해 콸콸 쏟아졌지만, 어머니 품에 안길 수도 없었어요. ‘절에 왔으니 절 풍속을 따라야 한다’며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뵈려고 수덕사를 자주 찾았다. 도쿄제국미술학교에 다닐 무렵, 방학마다 수덕사로 달려갔다. 도쿄에서 시모노세키(下關)로, 다시 부관(釜關)연락선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넌 뒤 서울의 이당 선생 집에 짐을 풀면 곧바로 수덕사로 향했다. 긴 여정이었으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통을 이겨냈다고 한다.
하지만 일엽 스님은 아들을 절간에서 재워주지도 않고, 절 밖 ‘수덕여관’으로 내쫓기 일쑤였다. 수덕여관에서는 어머니의 친구인 나혜석이 친아들처럼 반겼다고 한다. 나혜석(羅蕙錫ㆍ1896~1948)은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油畵)를 공부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봉건적 사회관습에 도전한 여성운동가다.
―나혜석이 어머니를 대신해 반겨주던가요?
“어머니는 냉랭한 모습으로 대하며 눈길도 주지 않고 내쫓았어요. 그러곤 수덕사 아래에 있는 수덕여관에 가서 자라고 했어요. 그럼 나혜석 아줌마가 ‘수덕사 견성암까지 올라갔다가 쫓겨났구나’ 하시며 저를 친아들처럼 대해 줬지요. 아줌마는 제게 팔베개를 해 주었고, 그렇게 품에 안겨 아줌마가 어머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공상에 빠지곤 했어요.”
―나혜석은 왜 수덕사 밑의 수덕여관에 머물러 계셨나요?
“나혜석 아줌마는 이혼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며 수덕사를 찾았지만 ‘스님이 될 사람이 아니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봐요. 그래도 덕숭산을 떠나지 않고 수덕사 아래 머물며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지요.”
그는 수덕사에 들른 것이 계기가 돼 방학마다 귀국해 한국의 명산과 고찰을 두루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게 됐다. 이 과정에서 만공 스님, 탄옹 스님 등을 만나 자연스럽게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제헌 국회의원이자 해인대학 학장을 역임한 최범술(崔凡述ㆍ1904~ 1979), 임환경, 김봉률(김천 직지사 스님) 등 독립운동가와 만나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ㆍ1879~1944) 선생에게 독립자금을 운반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
“편지 심부름을 부탁했는데 그 편지 속에 독립운동 자금이 있다는 것을 처음엔 몰랐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자금 전달에 이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친절을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친절하게 대해 주다 보니 편지를 운반하는 심부름을 한 것입니다. 나중 불교계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국가보훈처에 가서 증언했고, 그 덕에 많은 인사가 독립유공자가 될 수 있었던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정부가 독립유공자로 예우하겠다고 했으나 사양했다.
김일성 화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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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일엽 스님. |
제국미술학교 동창 20명 중 그를 제외한 모두가 전선으로 배치됐는데 그만 본토의 나고야 육군본부로 배속됐다. “추측이지만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던 아버지의 배려 때문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군종화가로 배속됐고 계급장을 달지 않고 복무하는 특별군인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동창생 대부분이 전사했고 살아 돌아온 동창은 이데(井出)라는 친구 한 명뿐이었어요. 20대 중반도 넘기지 않은 젊은 화가들이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목숨을 바쳐야 했는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그보다 살기 위해 죄 없는 적군(敵軍)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어요. 하지만 죽어간 내 동창들에게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광복을 맞았다. 1945년 9월 22일 나고야 육군본부 영창에 수감된 한국인 죄수 200명과 함께 귀국했다. “다시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광복과 더불어 남쪽에는 미군(美軍)이 진주하고 북쪽에는 소련군(蘇聯軍)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한반도는 허리가 동강 났지만, 그는 황해도 신천의 의붓아버지 송기수를 만나러 38선을 넘었다. 이당 선생이 만류했지만 고집을 피웠다.
“캐러멜, 초콜릿 같은 미제 잡화를 이북에 파는 장사치들과 함께 38선을 넘었어요. 이들이 길 안내를 해 주었어요. 당시엔 장사치들이 38선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저도 무사히 황해도 신천에 다녀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오산이었어요.”
―의붓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나요?
“38선을 넘어 사흘 만에 해주에 도착했는데 북한 보안대에 붙잡혔습니다. 부농(富農)이었던 의붓아버지는 부르주아 지주계급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고 당연히 저는 친일파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됐어요.”
―인민재판에 회부됐겠군요.
“일본 순사 출신의 인민군 보안요원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취조 과정에서 도쿄제국미술학교 출신이란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화위복이 됐어요.”
어느 날 평양에서 공산당 고급 간부가 찾아왔다. 스탈린과 김일성(金日成) 사진을 보여주며 두 사람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지를 물었다.
“그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렸더니 당장 평양으로 가자는 겁니다. 그 길로 평양 모란봉 인근의 한 적산가옥(敵産家屋)에 살면서 소련인 화가와 둘이서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게 됐어요. 초상화 제작 작업이 제게 주어진 혁명 과업인 셈이었지요.”
지금처럼 사진 기술이 발달해 있었더라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김일성을 직접 만나 100호짜리(130×160㎝) 큰 초상화를 그렸다. 그 그림이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다고 한다.
“당시는 사진술이 낙후된 터라 엄청나게 많은 초상화가 필요했던 시기입니다. 새로운 관공서마다 대형 초상화를 내걸어야 했고 내부 사무실에도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나란히 걸어야 했으니 일손이 엄청나게 달렸지요. 저는 친일파 자식에다 악질 부르주아 지주계급이라는 낙인이 찍혔었지만, 화가였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얼마나 많이 그렸습니까.
“셀 수 없이 많이 그렸어요. 그 흔적들이 아직 북한에 많이 남아 있을 겁니다. 초상화 외에 다른 그림도 제법 그렸는데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어요. 평양과 함경도 청진, 황해도 해주 등 이북 전역을 돌아다니며 초상화를 그렸어요. 마음속으론 탈출할 생각이 컸지만,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탈출하게 됐나요?
“황해도 해주 쪽에 초상화를 그리러 갔다가 고향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했어요. 바닷물이 빠져나갈 때쯤, 해주의 용당포 쪽으로 탈출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도망치는 도중에 밀물이 밀려와 꼼짝없이 물속에 잠기게 됐을 때 저를 데리러 온 배가 나타났어요.”
결국 다시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나중 김일성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크게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일본에 정착, 작품 활동을 할 때는 조총련계 간첩으로 의심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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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은 한국의 산수(山水)를 배경으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작품 「月夜의 桂林」. |
탈출에 성공한 그는 이당 선생 댁에 머물며 한국에서 살아갈 길을 찾았다. 이당은 그의 재능을 탁마(琢磨)시키고 훌륭한 화가로 키우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쏟았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거물급 초상화 주문을 그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그린 것이 동학의 창설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ㆍ1824~1864) 선생과 독립운동가 서재필(徐載弼ㆍ1864~1951) 박사의 초상화다.
서재필 박사는 자신의 초상화가 마음에 들었던지 그를 사위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물감 원료를 구하기 위해 일본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때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게다가 나중에는 한일국교 문제와 ‘빨갱이’라는 누명으로 한국으로 돌아올 길까지 막막해졌다. 결국 어머니가 입적한 1971년까지 일본에 머무르게 됐고 그곳에서 교포 처녀와 결혼해 아들 셋을 낳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1971년 귀국하려 했으나 조총련계라는 이유로 불가능했어요.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가 신원을 보증해서 가까스로 귀국할 수 있었지요. 그때가 이듬해 1월이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 삽교행 기차를 타고 수덕사에 있는 어머니의 부도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의 추상같은 냉정함 속에는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어머니는 제가 정신적으로 이유(離乳)를 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셨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였지요. 어차피 저를 거둬들일 수 없는 몸이라면 속세에 두고 온 아들이 어머니 없어도 살아가는 대장부가 되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게 됐던 것이지요.”
그는 귀국하기까지 일본에서 화가로 활동했다. 1948년 <아사히(朝日)신문> 주최 공모전에서 ‘아사히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1955년 일본 닛푸(日府) 공모전에서 전통춤인 승무(僧舞)를 그린 작품으로 최고상인 ‘닛푸상’을 탔다. 닛푸전은 일본의 3대 미술상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권위가 높은 공모전이다. 그는 닛푸전에 응모할 때 쓴 김태신(金泰伸)이란 이름을 지금도 쓰고 있다. 또 우에노모리(上野森) 미술관상, 한국문화원상,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상 등을 수상했고 일본 창조미술협회와 신미술협회의 심사위원을 거쳐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의 명사초대전 심사위원을 각각 역임했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의 산을 그리기로 결심했어요. 제게 산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을 그리고, 산을 그리면서 어머니를 잊고 싶었거든요. 산을 그린다는 것은 곧 어머니와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위로와 휴식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일당은 다소 신비로운 느낌의 ‘석채(石彩)’라는 독특한 재료를 써서 채색화를 그리는 화가다. 고구려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한 천연색을 뽑아내기 위해 직접 돌가루를 내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느낌이 배어 있다.
“석채 작업은 한 번만에 원하는 색상이 나오지 않아 물감이 마른 상태에서 다시 색상을 살핍니다.”
웬만한 인내심으로 해소되지 않는 지루한 작업을 거치며 꽃들이 다투어 핀 봄의 설악산이나 녹음 짙은 여름의 주왕산, 오색단풍으로 물든 지리산과 눈 덮인 한라산을 화폭에 옮겨놓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림이 대부분 고요하다. 평온하면서도 강렬한 자연의 섭리를 담고 있거나 정적이면서도 신비감이 비치는 산 그림자, 멀리 보이는 달, 비어 있는 듯하면서 꽉 채워진 여백미까지 담고 있다.
또 인물화 작업도 병행해 왔는데 세속적인 인물 대신 관세음보살이나 미륵반가상, 달마 같은 불교화를 주로 그렸다.
“이당 선생에게 채색화를 처음 배웠고 일본에서 활동하면서도 고집스럽게 한국의 산하나 한국적 소재와 정서를 화폭에 옮겨왔지요. 그러나 귀국해서 보니 채색화의 기법과 전통이 거의 소멸돼 그것이 늘 안타까웠어요. 가르쳐줄 스승도, 배우려는 학생도 없어졌습니다. 이 끊어진 전통을 찾아 이어주는 것이 제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당의 낯선 그림을 두고 혹자는 서양화라고 하는 이도 있고, 심지어 왜색(倭色) 짙은 일본화 작가라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본에 가본 일도 없고 일본화를 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무지한 것이 아니면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 볼 수밖에 없는데 원래 우리가 가진 채색화의 전통을 잃어버린 줄은 모르고 왜색을 경계하자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냉대당하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고 오해받으며 살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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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주왕산의 추경」. |
어머니를 따라 출가
그는 예순여덟의 나이로 출가한다. 속세의 시간으로 따져보면 ‘늦깎이 출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다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음악교사 아내 사이에서 아들 셋을 두었으나 어머니의 뒤를 따라 머리를 깎은 것이다. 김천 직지사 관응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았다.
“라훌라는 15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 뒤를 이어 출가했지요. 그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며 밀행제일(密行第一)의 높은 경지에 올랐습니다. 제가 어머니 스님의 라훌라였다면 애물의 상태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어머니 뒤를 이어 출가해 밀행제일의 경지에 오르는 라훌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아내에게 출가할 뜻을 비쳤을 때 아내는 처음에 농담 정도로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크게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제 갈 길을 제발 막지 말아 달라”며 끝내 불가의 문에 들어섰다. 출가 후 직지사 중암(中庵)에서 머무르다 현재는 서울 성북동의 성라암과 경남 양산의 법수사에 화실을 차려놓고 그림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늦깎이 출가를 하고 보니 탈속이 쉽지 않아요. 머리를 깎기 전 분망하고 맥동 쳤던 저를 생각하면 마치 납자(衲子)의 수행 도정이었던 듯도 싶지만 라훌라가 되기란 더더욱 먼길임을 알게 됐어요. 하지만 서방정토에서 어머니를 만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이루기 위해 머리를 깎았습니다.”
―아버지 오다 세이조는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1970년대 초에 특사로 나가 있던 서독에서 유명을 달리했어요. 어머니와 헤어지고는 독신으로 살다 떠났으니 아버지의 외로운 영혼이 구천을 헤매지나 않을지 안타깝습니다. 이승에서는 헤어졌지만 구천에 있을 아버지를 서방정토로 부르기 위해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현재 ‘영화 같은’ 그의 삶은 일본에서 진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사진 : 서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