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시절, 영화 흥행 안되면 굶어 죽는다는 심정으로 만들어
⊙ 1981년 처음으로 영화사에 기획 제의해 〈만다라〉 만든 것이 흥행 성공
⊙ ‘빨갱이 아들’ 손가락질 받으며 자라 감정의 절제가 엄격해 눈물 흘리는 장면 안 만들어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졸업. 동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 1981년 처음으로 영화사에 기획 제의해 〈만다라〉 만든 것이 흥행 성공
⊙ ‘빨갱이 아들’ 손가락질 받으며 자라 감정의 절제가 엄격해 눈물 흘리는 장면 안 만들어
임도경
⊙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졸업. 동 대학원 언론학석사, 경희대 언론학박사.
⊙ 중앙일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장, 현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객원교수, 한국영상자료원 부원장.
영화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한 가지는 감상하는 방법이다. 영화관이나 TV 앞에서 팝콘 한 봉지쯤 들고 앉아서 주연배우와 스토리에 빠져 즐기고 나오면 된다. 이때의 평가는 ‘재미있다, 재미없다’ 둘 중 하나면 된다. 또 한 가지는 탐색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감독의 세계와 닿아 있다. 영화평론가들은 주로 이 방법으로 본다. 여기에는 보다 다양한 전문적 용어도 등장하고 필름 속에 담긴 더 많은 의미 찾기가 행해진다.
하지만 탐색이 반드시 그들만의 어려운 영역은 아니다. 조금만 시각을 넓히면 관객 누구나 탐색을 통해 영화필름 속에 담긴 보다 깊은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다. 특히 그 필름을 만들어 낸 감독의 영화적 가치구현의 관점을 한 번쯤 알아보고 스크린 앞에 앉는다면 영화의 재미는 배가된다.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까지 읽어 낼 수 있는 ‘깊은 감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한국영화는 김도산씨의 1919년 작품인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이다. 이 영화는 김도산씨가 직접 주연, 연출, 각본까지 맡았으며, 그해 단성사에서 상영된 28막3장의 무성 키노드라마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성장해 세계무대로 나갔고, 흥행 영화 관객 수가 천만을 돌파할 만큼 양적으로도 팽창했다. 이제는 관객들도 한 번쯤 한국영화 100년을 이끌어온 대표 영화감독들과 그들의 작품세계를 ‘탐색’해 볼 시점에 와 있다.
임권택과 그의 영화와의 만남
위대한 인상파 화가였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인 프랑스의 거장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는 “궁극적으로 영화예술이란 놀라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진실에 다가서는 것이다”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임권택(林權澤)의 영화는 이미 본질에 닿아 있다. 그는 한국적 정서를 영상에 옮기는 감독으로 독보적 위치에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한국적’이라는 의미보다는 그가 이 땅에서 체험한 질곡 많은 삶을 영화 속에 그대로 투영함으로써 관객과의 공명에 성공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에게 영화는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임권택 감독은 올 초 크랭크인한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1962년 스키 총격신으로 유명한 전쟁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입봉(감독으로서 첫 작품으로 데뷔하는 것)한 이후 그는 영화 속에서 50년 세월을 종주해 왔다. 이 긴 세월 동안 그는 <천년학> (2006)까지 모두 100편의 영화를 남겼다. 불교계와의 갈등으로 완성하지 못한 <비구니>(1984)와 올림픽 기록영화 <손에 손잡고>(1987)까지 염두에 두면 이미 100편을 넘어선 지 오래다. 하지만 이런 총량적 기록은 그가 현재 한국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1934년생인(출생신고는 36년생으로 돼 있다) 임 감독은 올해로 76세가 된다. 이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는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임 감독은 1991년 프랑스 예술문학 기사훈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취화선>으로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유네스코로부터 영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는 펠리니 메달을 받았다. 이어 2007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문화, 종교, 학술, 체육, 군사 등의 분야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운 개인에게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영화계 안팎으로 받은 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기여에 따라 가톨릭대에서는 공식적으로 중학교 중퇴생인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부산 동서대학교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임권택 예술대학’을 설치했다. 현재 그는 임권택 예술대학의 명예학장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것으로 그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만 되는 화려한 수사(修辭)일 수도 있다. 왜냐면 그는 아직도 완전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치열하게 영화를 만드는 현역 감독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07년 그는 <천년학>을 찍기 직전 발견된 방광암 수술을 하고 영화를 완성했다. 지금도 석 달에 한 번씩 검진을 받아야 하는 투병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떤 상황도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을 중단시키지는 못한다. 그는 지금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 출근하는 직업감독처럼 일하고 있다.
영화 만들기가 단순히 생계 수단이었던 시절을 거쳐 오늘날 한국영화의 대명사가 되기까지 그는 100편의 영화 속에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투영시켜 왔는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코드인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영화적 요소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흔적들을 찾아본다. 임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 100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그와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99편의 영화를 두고 나눈 대화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2, 민음사)와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 직후에 나온 임 감독의 영화연출강의록 <영화-나를 찾아가는 여행>(2007, 민음사)을 참조했다.
‘직업감독의 세월’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51번째 작품 <대추격>까지
한 해에 네다섯 편의 영화를 만들던 이 시기에 임 감독의 우상은 할리우드 영화였다. 그는 존 포드와 윌리엄 와일러, 빌리 와일러, 조지 스티븐슨의 <세인>을 수십 번씩 보면서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을 익히고자 했다. 당시 그의 목표는 2~3류의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하는 것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대부분의 감독들은 영화를 선택할 상황에 있지 않았다. 스크린 쿼터제에 따라 영화관들은 일 년에 일정 기간 이상을 상영해야 했고, 영화사는 일정 편수 이상의 한국영화를 제작해야만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 그래서 국산영화는 외화를 상영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작사와 흥행사들이 저(低)예산 주문제작형으로 만들어 배급하는 청부식 생산체제를 갖추고 운영됐다. 이렇게 만들어 개봉하는 국산영화가 한 해에 200여 편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1966년에 촬영한 <요화 장희빈>부터는 모든 영화가 컬러로 제작됐다.
그는 늘 ‘이번 영화가 흥행이 안되면 굶어 죽는다’는 벼랑에 선 심정으로 주어진 영화와 만났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동안에만 21편의 영화를 찍어 영화관에 걸었다. 이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충무로에서 믿을 만한 인기 직업감독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입봉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흥행에 성공한 데 따른 신뢰도 한몫을 했다. 이 시기에 대해 그는 “1973년에 <잡초>를 만들기 전까지는 영화를 만들면서 이런 소재는 내가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 다산기(多産期)에 그는 액션, 전쟁, 코미디, 사극, 스포츠, 반공영화 등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를 해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맞는 영화를 찾아냈다. 그에겐 충분한 실습기간이 된 셈이다.
그 당시에는 영화배우나 영화감독 모두 영화판 용어로 ‘가께모찌(다중 출연·연출)’를 해야 할 만큼 많은 영화를 찍었다.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문희, 남정임, 윤정희와 그 이후 신성일로 이어지는 긴 시절 그들과 영화를 만들었다. “배우들이 여러 편을 동시에 찍다 보니 한정된 시간에 그 현장에서 반드시, 대사고 뭐고 일단 찍고 봐야 했다. 아무것도 없이 다음 장소로 가는 동안 버스 안 통로 바닥에 누워서 자고 대사 쓰면서 찍었다. 배우들은 더 바쁘니까 자신들이 할 대사가 무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말도 안되는 대사를 했다. 후시(後時) 녹음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주어진 시나리오대로 찍는 감독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시나리오는 무조건 손을 댔다. 이런 자신감은 독서 습관에서 비롯됐다. 그는 수많은 영화를 정신없이 찍어대는 상황에서도 짬짬이 당시 유행하는 대중소설을 다 섭렵했다. 그 다작기에 표절 없이 이야기를 축적해 나갈 힘을 얻은 것도 독서를 통해 얻은 스토리텔링 능력 덕분이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은 나이 탓에 눈이 어두운 지금도 여전한데, 아직도 큰 스토리를 잡고 시나리오와는 무관한 ‘즉흥 연출’을 하며 영화를 만들어 가는 그의 저력이 여기서 나온다.
정창화 감독에게서 액션 배워
그는 당시 여러 장르의 영화를 찍으면서 코미디나 스포츠 장르는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특히 액션영화와 전쟁영화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 자신이 “힘만 있었으면 깡패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할 만큼 주먹의 세계를 동경한 것도 이런 영화를 잘 만들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찍은 액션영화 <욕망의 결산>(1964)은 후에 흥행작 <장군의 아들>(1990)을 탄생시킨 배경이 되기도 한다.
액션영화 테크닉에 자신이 생긴 데는 그의 사부인 액션물 감독 정창화씨의 영향이 가장 컸다. 정 감독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그의 불우한 과거부터 거론해야 한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 숭일중학교 3학년 당시 학교를 중퇴하고 어려운 상황이었던 집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한국전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던 부산에서의 2년간을 그는 가장 처절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생업은 미군이 남기고 간 군화를 파는 일이었다. 장사에는 별 수완이 없었다. 그는 1956년 군화판매상들이 모여 만든 신생영화사 영화 제작부에 입사해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다. 영화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판에 뛰어든 것이다.
처음 맡은 일은 소품 담당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노감독을 떠나 정창화 감독을 만난 일은 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정 감독은 조명팀에서 일하던 그를 조감독으로 발탁했다. 정 감독은 액션물 감독으로 유명했다. 그의 밑에서 그는 ‘다찌마와리(격투 장면)’ 찍는 방법을 익혔다. 만사를 치밀하게 관찰하는 그는 곧 감독의 신뢰를 받았다. 정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오케이 사인을 내기 전에 꼭 그에게 물어봤다. 그가 NG라면 NG였다.
물론 감독 데뷔 후에는 정 감독의 스타일을 답습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차별화를 시도해 시네마스코프로 액션물을 찍는 새로운 카메라 앵글에 도전했다. 남을 따라 하는 것은 그에겐 언제나 금기사항이다.
1960년대 말까지 영화 이외의 그의 인생은 없었다. 당시 그의 삶에 대한 회고이다.
“내가 감독으로 살고 있지만 그냥저냥 찍고 돈이 생기면 술 마시고 그냥 살았어요. 술을 많이 먹고 눈 위에 쓰러져 자다 얼어 죽을라는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남겠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죽는다는 생각을 먼저 하면서 살았으니까. 반공을 국시로 하는 통제사회에서 빨갱이 일족이었던 내가 꿈을 가질 수가 없던 거야.”
이 상황에서도 그는 지금까지 기억되는 몇몇 걸작들을 남겼다. 액션영화의 걸작 <돌아온 왼손잡이>(1968)가 대표적이다. 박노식, 김지미, 허장강씨 등 당시 쟁쟁한 스타군단이 총출동한 이 작품에 그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액션영화의 모든 전통적 요소들을 다 담았다. 항구, 주변의 배신, 실패한 사랑, 신체 손상까지 극적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지금까지 해 온 어떤 액션영화보다도 체질에 가깝게 와 닿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이 시절에 만든 <황야의 독수리>(1969), <속눈썹이 긴 여자>(1970), <둘째 어머니>(1971),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 등이 영화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임권택적 영화’의 시작과 번민
52번째 작품 <잡초>에서 75번째 작품 <우상의 눈물>까지
영화를 만드는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1973년에 개봉한 <잡초>는 임 감독에게 영화다운 영화로 만들었던 첫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는 “<잡초>가 진정한 의미에서 데뷔작”이라고 했다.
주어지는 대로 영화를 만들어 주던 시절을 넘기면서 그는 우리의 삶과 무관한 이야기를 찍는 데 서서히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마음을 영화사에서 알아줄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제작과 감독을 병행하며 <잡초>를 완성했다. 이런 각성과 노력을 관객은 외면했다. “이 영화를 완성하자마자 <증언>이라는 반공영화를 찍으러 다니느라 (개봉은)나 몰라라 하고 아는 형한테 극장 잡아서 틀어 달라고 했더니 ‘빵구 프로’로 들어가서 망했다. 이 작품은 거개가 다 못 봤을 것”이라고 했다. <잡초>는 필름까지 분실한 상태이다.
당시 영화관은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 등 호스티스 영화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던 시절이었다. 그가 인정했던 영화감독 이만희는 <삼포 가는 길>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었다. 이 틈에서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가족을 억척스레 지켜 가는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임 감독의 <잡초>는 외면당했다.
그는 당시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60년대까지 삼류 할리우드 영화는 따라잡지 않을까 했는데, 그 아류에 들어서서 해먹다가는 내 인생 망가진다고 본 거지. 어떻게 해서든 그 영향에서 벗어나야겠다 생각하면서 저급한 것에 물들어 있던 체질을 바꾸는 데 10년이 걸린 거야.”
이러면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정통 ‘다찌마와리’와도 결별했다. 1990년 <장군의 아들>이 나오기까지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액션은 없어져 버린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영화세계로 조금씩 전진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각성은 그를 지난 1960년대보다 더 암울하고 힘들게 했다. 그저 직업감독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마구잡이로 찍어대던 그 시절보다 번민은 더 컸다. 한국영화의 내리막길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그는 매해 두 편 정도씩 영화진흥공사나 우진필림 두 곳에서 ‘수주한’ 새마을영화와 전쟁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이 영화들은 개봉영화관에 걸리지 못하고 재상영관이나 동시상영관에 걸렸다. 이 시절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네 아직도 영화하고 있나?”는 아픈 질문까지 들어야 했다. 그나마 우수영화상을 받은 영화사에 외화수입권을 나눠주는 제도 덕분에 이런 영화라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새마을영화와 전쟁영화로 연명
그래도 그는 주어진 여건 안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 ‘임권택 스타일’ 한국영화의 효시로 인정받는 계몽영화 <족보>(1978)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는 이 영화에서부터 ‘풍경’을 중요한 미장센(영화 속 장면구성)으로 배치했다. <족보>는 일본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원작 소설을 한운사씨가 번역, TV 드라마로 만들었던 작품이다. 당시 흥행에는 참패했었다.
또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바탕으로 만든 반공영화 <깃발 없는 기수>(1979), <짝코>(1980)도 그의 대표작에 꼽힐 정도로 수작이다. 그는 특히 <짝코>에 애정을 갖고 있다. <짝코>는 영화 전문가들이 뽑은 건국 이래 한국영화 걸작 50선에서 38위를 기록했다.
임권택 스타일의 롱 테이크와 플래시 백 기법이 선보인 영화 <왕십리>(1976), 국방부가 군대까지 동원해 주면서 만들게 했던 반공영화지만 해외에서도 수작으로 인정받는 전쟁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펠리니의 명화 <길>을 연상시키는 새마을영화 <옥례기>(1977), 라스트신 연출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계몽영화 <상록수>(1978) 등이 이즈음의 수작으로 꼽힌다.
소년 반공영화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1978)의 주연 여배우인 채령씨와 1979년 결혼하는 것으로 그의 방황기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 아내는 그의 무협영화 <요검>(1971)에서 처음 만나 8년간 교제해 왔다.
‘거장의 시대로’
76번째 영화 <만다라>에서 <천년학>까지
1981년 작 <만다라>는 그를 세상에 커밍아웃시킨 작품이다. 작품성은 물론 흥행에까지 성공한 <만다라>는 그에게 앞으로 그가 추구해야 할 작품세계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그래선지 임권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만다라>로 시작한다.
이 작품으로 그는 해외 영화계에 알려진다. 유럽 영화계에서는 그의 작품을 두고 ‘미조구치의 현대 영화적 재현’이라고 했다. 1956년에 타계한 미조구치 감독은 실재의 본질,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갈등, 여성의 본질적 애정을 생생하고 아름다운 영상으로 표현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감독이다. 섬세하게 조절된 카메라 워크로 공간감각이 뛰어나게 연출한 전후 일본 이야기 <우케츠 이야기> (1953)가 대표작이다. 그는 서구 영화의 원근법을 벗어나 하이 앵글(high angle)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영화세계를 창조했다.
<만다라>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영화사에 기획을 제의한 작품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임 감독의 설명이다. “화천 공사에서 <만다라> 이야기가 나왔는데, 원작을 읽으면서 죽어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이었지. 승려사회를 다루고는 있지만 계율 밖에서 살면서 계율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나 자신도 대충 사는 것에서 벗어나면서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승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자기 삶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게 참 아름답구나.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는 만다라를 찍으면서 자신이 겪어 왔던 세월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에 들어간다. 그전 작품에서는 간간이 비치던 그의 삶의 편린들이 이제부터는 영화 전면에 그 자신의 아픔을 낱낱이 고해하는 시기에 들어선다.
그는 <만다라>에서 <불의 딸>(1983) <길소뜸>(1985) <씨받이>(1986) <아제아제바라아제>(1989) <개벽>(1991) <서편제> (1993) <태백산맥>(1994) <취화선>(2002)에 이르기까지 가슴의 응어리들을 토해 내듯 영화로 만들어 냈다.
그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고, 8·15광복을 겪었으며, 6·25전쟁을 통해 세상이 몇 번씩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전남 장성에서 지주의 종손으로 자라 한창 예민한 십대 시절 집안 전체가 좌익활동으로 처참하게 몰락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또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온 후 ‘빨갱이의 아들’로 손가락질 받자 연좌제를 피해 고향을 떠나 부산까지 흘러갔다. 이때 인연을 맺은 영화는 어쩌면 그와 세상이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한국적 정서의 사실주의적 접근
<만다라> 이후 그는 영화를 통해 자신이 느끼고 보아 온 것에 대해 솔직해졌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에서 ‘사실적’인 것에 더 집착했다. 하지만 감정의 절제가 엄격해 그의 영화에는 슬퍼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별로 없다.
그는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 촬영감독 정일성씨 3인 체제로 <아제아제바라아제>(1989)부터 <하류인생>(2004)까지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이 중 특히 <서편제>는 한 극장에서 6개월을 상영할 만큼 인기가 높았다.
판소리 영화 <춘향뎐>(2000)은 그의 모든 정수를 한데 모아 놓은 작품이라며 영화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칸영화제에서도 기립박수를 받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이 작품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자리를 얻게 될 영화”라고 지목했다.
<만다라> 이후 그의 영화는 한국적 정서의 사실주의적 접근이라는 공통된 화두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불교(<만다라> <아제아제바라아제>)-판소리(<서편제> <춘향뎐> <천년학>)-동양화(<취화선>)에서 이제 한지(韓紙)를 소재로 한 101번째 작품 <달빛 길어 올리기>로 이어진다.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자신의 영화에 대한 꿈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지부진하게나마 계속 만들 수 있다면 좋겠어. 내가 젊었을 때는 갖고 있는 생각을 영화로 찍는 것이 아니었지. 살아 보니까 나이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고. 결국 나이만큼 찍는 것 같아. 딱 나이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일흔여섯을 넘긴 지금 그에게 ‘한지’는 어떤 영상 속에 구현돼 또다시 세계인들의 눈으로 전달될까 궁금해진다.⊙
▣ 임권택 감독 인터뷰
“난 매번 턱걸이를 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찍는다”
임권택 감독을 처음 본 것은 미완의 영화 <비구니>(1984)의 설악산 로케이션 현장에서였다. 그는 따뜻하고 겸손한 감독이었다.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어 26년 만의 만남도 편안했다. 이 세월 동안 그는 100편의 영화를 완성했고, 세계적 감독으로서 한국영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거장 임권택’을 모처럼 마주했지만, 수수한 모습은 처음 그대로였다.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더 확고해진 영화에 대한 열정이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은 구도자의 그것처럼 보였다. 한순간 숙연함이 느껴졌다.
그는 방광암이라는 어려운 병과 싸우면서도 두 편의 영화를 찍었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2006)과 현재 마무리 중인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건강 때문에 두 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아내 채령씨는 늘 남편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렀다. 그의 아내는 언제나 그랬다. 그가 온전히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다. 이런 아내가 그에게는 ‘로또 당첨’이라고 한다.
영화 막바지 작업으로 바쁜 임 감독을 만나기 위해 7월 5일 용인에 있는 자택을 찾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취화선> (2002)의 장승업이 바로 임 감독 자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동의하는지요.
“장승업은 화가고 나는 영화감독이라 장르가 다르지만 창의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합니다. 장승업은 삶의 기록이 별로 없어요. 고아 비슷하게 고향을 떠나 왔고, 기록 속에 이야기가 드러나는 것은 스무 살 무렵부터지요. 그 후 천재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52세에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장승업은 술을 잘 마시고 여자를 좋아해서 미인을 옆에 끼고 그림 활동을 했어요. 왕실에 불려 가서 그림 그리라고 했을 때 세 번 도망친 것을 잡아들일 정도로 자유롭게 살았어요. 40세경에는 신부와 자고 난 뒤 다시 안 왔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예요. 나도 40세까지 혼자 살았던 사람이고, 그전까지 생활상에 비슷한 점이 많겠다는 생각으로 영화 속에서 내 체험을 장승업의 삶에 채워 넣었는데, 거짓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곳에 내 인생이 투영된 것이므로 그런 시각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데이비드 린치, “당신은 완벽주의자”
―한국 관객들에게서보다 외국에서 인정을 받은 영화들이 더 많은데, 이유를 든다면.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는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천년학>을 마친 후 한지(韓紙)에 대해 2년간 공부했어요. 오랜 준비기간을 통해 영화를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다 찍을 때까지 사방에서 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많아서 혹시 내가 대충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영화를 찍은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예요.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한지가 한국사람들의 생활문화나 기록문화에 미친 영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한지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이, 이를 영화화하는 데 무섭기도 하고 또 관심이 있으니 그만큼 잘되겠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촬영을 마무리한 느낌은.
“‘무지 힘들었다’는 것이 첫 번째예요.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관객에게 어떻게 닿을지, 어떤 영화보다 궁금하고 두렵기도 하네요. 편수가 쌓이면 쌓일수록 더 두려워요. 내 영화 애호가들은 백여 편이나 했다면, 어지간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영화에 잘 담겠지라고 지레짐작하는데, 이런 기대와는 달리 난 매번 턱걸이를 해 왔다고 생각해요. 늘 내 영화가 관객한테 어떻게 비칠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백 편 동안 한 번도 관객에게 자신 있게 보일 수 있던 영화가 없었어요.”
―그래서 자신이 만든 영화를 잘 안 보나요.
“<서편제> <장군의 아들>은 그래도 TV에서 상영되는 걸 봤어요. 보통은 첫 시사회에서 관객반응 한 번 보고 나면 다른 시사회에서는 인사만 하고 자리를 떠요. 내 필름을 내가 보는 건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에요. 왜 그 당시에 저런 정도로 찍었을까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완벽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후 리셉션장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을 만났어요. 그가 우리 자리로 오더니 심사위원으로서 보기에 내 영화는 전체와 부분이 다 완벽하다며 ‘당신은 완벽주의자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웃음)”
“〈잡초〉가 진정한 의미에서 내 영화의 시작”
―그래서 매번 전작의 흠결로부터 새 출발을 하는 것인지요.
“그러는 이유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거예요. 영화 속에서 발견한 흠결은 새로운 영화를 할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자기 작품에 100% 만족한다고 외부에 이야기하는 감독조차도 양심이 있다면 그런 건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 겁니다. 찍을 당시 완벽한 것 같아도 미흡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예요. 완성을 지향할 뿐이지요.
늘 미흡하지만 내 손을 떠난 내 영화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지고 뭔가 그 전 영화와 달라진 영화를 했다는 평가를 듣는 것이 일련의 성과라면 성과인데,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요. 그것은 체질화된 것이고, 그 성과를 뛰어넘고 달라져야 합니다.”
―정창화 감독은 임 감독 인생에 어떤 의미인가요.
“나는 영화를 평생의 직업으로 알고 살아왔어요. 영화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그것을 할 수 있게 바탕을 마련해 준 감독입니다. 나는 애초에 영화계를 생업으로, 삶의 방편으로 들어왔는데, 정 감독님이 내 재능을 발견해 주었고, 중요한 일을 나한테 시켜 주었지요. 나 자신도 그 일을 하면서 영화가 좋아졌어요. 좋아하는 일로 평생을 살 수 있는 것은 행운이지요. 나한테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직업적 회한 그런 것이 없어요.”
―한국인들에게 임 감독의 대표작으로 <만다라>(1981)가 꼽히는데, 공감합니까.
“초기 작품 시절에 오랫동안 평론가들은 내 영화에 관심이 없었어요. 임권택 영화 하면 갑자기 <만다라>가 튀어나온 듯 생각하는데, 그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긴 수련기간이 있었어요. 물론 초기 작품들은 너무 부끄럽습니다. 만든 이후 한 번도 보지 않은 필름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출연진과 스태프까지 생각이 나지 않는 영화도 있어요(웃음). 8~9월에 영상자료원에서 내 전작전(全作展)을 연다고 하는데, 그런 필름은 안 보여줬으면 좋겠어요(웃음).”
―영화평론가들은 초기 작품에 대해 재해석을 하고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갖는지요.
“물론 당시에도 주어진 조건에서는 최선을 다해 만들었어요. 하지만 우리 삶과는 무관한 쓸개 빠진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가치관이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에요. 그때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든지, 영화를 통해 아름다운 꿈을 구현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어요. 그냥 생계형 직업감독이었지요. 계속 술 마시고 이러다가 노숙자처럼 죽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던 시절이에요.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갖고 만든 첫 작품이 <잡초>(1973)지요. 그 작품이 진정한 의미에서 내 영화의 시작이에요.”
“내 인생을 휴지처럼 써서야…”
―좌익운동을 했던 집안으로 인해 받았던 어려움이 <태백산맥>(1994)과 같은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건 아닙니까.
“나로서는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시대를 영화에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족보>(1978) <깃발 없는 기수> (1979) <길소뜸>(1985)도 그 시대를 거쳐 오면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던 것을 영화에 담은 작품이지요.”
―자신을 늘 ‘운이 좋은 감독’이라고 말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5·16군사혁명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국영화는 고사(枯死) 직전의 암흑기를 맞이했어요. 그 시기에 다른 영화감독들은 전부 비명을 질렀지요. 하지만 난 별 생각 없이 살면서 저(低)예산 의무제작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었어요. 한마디로 영화를 쉼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저질감독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이후 스스로를 세탁해 내는 과정으로 10년을 살았어요. 나이 들어 가면서 내 인생을 휴지처럼 써서야 되겠는가 하는 자성이 들었고,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으니 운이 좋은 것이지요.”
―그 당시에도 감독으로서 작품에 대한 일정 기대 수준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꿈은 일류는 못 되더라도 2~3류 할리우드 영화 수준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제작비나 인적 자원, 능력까지 모든 것을 총동원한 재주를 부려도 3류 할리우드 영화조차 이길 수 없다는 걸 빨리 알아차렸어요. 한국인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영화, 미숙하고 뒤떨어져도 개성만은 있는 그런 영화를 찍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자체가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거짓말하지 말고 살아오면서 겪은 삶 자체를 정직하게 찍어 내 우리만의 문화적 개성을 영화적 재밋거리로 바꾸고자 했지요.”
―방황하는 시기가 길었는데, 결혼과 가정이라는 것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내 삶이 좀 더 건강한 쪽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쯤 집사람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가정과 아이들은 내가 아비로서 책임을 다 못하고 인생을 끝내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 내게 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감독들의 영화는 자주 보는 편인가요.
“잘 안 봐요. 히트작들은 그래도 가끔 보는데,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를 봤어요. 나도 군사영화 <증언>(1973)을 찍었는데, 그 시대 군사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한다는 나름의 소신이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형제가 한 소대 안에 배속되고, 교전 거리가 너무 좁은 설정은 군대의 실상과 다르기 때문에 나 같은 1970년대 사고를 가진 감독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래도 그런 감독의 용기와 파격이 흥행을 성공시킨 요인이 된 것 같아요. 그런 흥행은 한국영화에 기여한 점이 크다고 봅니다.”
―21일 만에 천만을 돌파하며 국내 흥행기록을 세운 봉준호 감독의 <괴물> (2006)은 봤습니까.
“아뇨. 그런 유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봉 감독의 <살인의 추억> (2003)은 재미있게 봤어요.”
젊은 감독들 필름낭비 너무 많아
―경제상황에 따라 한국 영화산업도 연동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요.
“크게 보면 경제가 커진 만큼 영화도 따라서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불황일 때 투자가 침체기를 맞으나 앞으로 경제가 좋아지면 영화 쪽도 같이 좋아지리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젊은 세대가 한류(韓流)를 일으키며 여기까지 온 것도 그들의 능력이 발현된 것이라고 봅니다. 단, 젊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기 어려워지기까지 그 이전에 너무 심한 낭비(다른 영화들이 필름 20만∼30만 자를 쓰는 와중에도 <춘향뎐>(2000)은 8만 자, <취화선>(2002)은 11만 자 정도만을 썼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온 그에게 절약은 체질이다)가 있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봐요. 너무 쉽게 해 온 세월의 영향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지요. 조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조금씩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한때 조감독으로 데리고 있었던 곽지균 감독의 자살은 한국영화의 불황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하나요.
“자살을 할 만큼 스스로 너무 고립돼 살았던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건 한국 영화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예요.”
―100편 중 아끼는 작품을 뽑는다면.
“이런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어요. 나 스스로의 양심에 비춰서 완성도 높다고 보는 영화를 못 찍어 봤기 때문이에요. 단, 객관적인 성과(흥행)로는 <만다라>와 <서편제> <장군의 아들>이 꼽힐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만다라>는 그 필름 자체가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준 계기가 됐고,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유럽에 알려준 영화예요. <서편제>는 한국영화의 흥행 기록을 깼고, 우리 판소리, 우리 것을 관객이 되돌아보게끔 해 줬지요. <장군의 아들>은 1960년대 액션영화 감독 시절을 참회하는 상황에서 안 하고 싶었지만 결국 히트를 했고, 그것을 계기로 <서편제>를 찍을 수 있었으니 아끼고 싶네요.”
―영화를 만들 때 흥행성과 작품성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지요.
“물론 작품성이에요. 하지만 한 번도 흥행성을 잊은 적은 없어요. 관객 반응도 예측을 잘 못하겠는 게, <서편제>는 10만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뜻밖의 성과를 낸 것이고, 반면 <축제>(1996)는 내 생각에 <서편제>보다 더 낫다고 판단해서 관객이 터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많은 작품에서 ‘풍경’을 미장센의 주요 요소로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의 산하는 애정을 가지고 보는 것과 그냥 보는 것이 다릅니다. 그 산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그런 것이 다 필름에 담깁니다. 수난의 세월을 품고 있는 산하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비극적이지만 그 안에서 그대로 따뜻하다는 것을 찍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
―몇 해 전에 동국대학교 영상학과 겸임교수로 한 학기 동안 자신의 작품을 분석하는 강의를 했는데, 이렇게 작품을 해체해 보니 어땠습니까.
“그동안 현장에서 정신없이 찍어 온 필름을 두고 ‘신 바이 신(scene by scene)’으로 약점을 긁어 내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내가 왜 그때 그것을 찍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 어려웠지요(그도 그럴 것이 그는 최근 20여 년간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한 채 영화를 찍어 본 일이 없다. 그는 대략 큰 이야기 틀거지만을 만들어 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그가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안 쓰는 이유는 현장의 분위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대신 리허설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다음부터는 논리적으로 대답할 근거를 확실히 해 가면서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웃음).”
―개봉 당일 아직도 긴장이 되나요.
“굉장히 불안 초조해요. 실패는 감독으로서 다시 일어설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할 기회를 놓치지요. 하지만 나는 작은 몇 작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기회를 얻는 것이에요.”
―앞으로 활동계획은.
“지지부진하게나마 계속 만들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내가 젊었을 때는 갖고 있는 생각을 영화로 찍는 것이 아니었어요. 살아 보니까 나이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디다. 결국 나이만큼 찍는 것 같아요. 딱 나이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달빛 길어 올리기>는 언제쯤 볼 수 있나요.
“이번 가을에 배급사 세 곳이 함께 디지털 영화관에서 동시에 개봉할 예정이지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웃음).”⊙
하지만 탐색이 반드시 그들만의 어려운 영역은 아니다. 조금만 시각을 넓히면 관객 누구나 탐색을 통해 영화필름 속에 담긴 보다 깊은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다. 특히 그 필름을 만들어 낸 감독의 영화적 가치구현의 관점을 한 번쯤 알아보고 스크린 앞에 앉는다면 영화의 재미는 배가된다.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까지 읽어 낼 수 있는 ‘깊은 감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최초의 한국영화는 김도산씨의 1919년 작품인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이다. 이 영화는 김도산씨가 직접 주연, 연출, 각본까지 맡았으며, 그해 단성사에서 상영된 28막3장의 무성 키노드라마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영화는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성장해 세계무대로 나갔고, 흥행 영화 관객 수가 천만을 돌파할 만큼 양적으로도 팽창했다. 이제는 관객들도 한 번쯤 한국영화 100년을 이끌어온 대표 영화감독들과 그들의 작품세계를 ‘탐색’해 볼 시점에 와 있다.
임권택과 그의 영화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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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제55회 칸영화제에서. 배우 최민식씨, 임권택 감독 부인 채령씨, 임 감독, 배우 안성기씨(사진 왼쪽부터). |
이런 의미에서 임권택(林權澤)의 영화는 이미 본질에 닿아 있다. 그는 한국적 정서를 영상에 옮기는 감독으로 독보적 위치에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한국적’이라는 의미보다는 그가 이 땅에서 체험한 질곡 많은 삶을 영화 속에 그대로 투영함으로써 관객과의 공명에 성공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에게 영화는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임권택 감독은 올 초 크랭크인한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1962년 스키 총격신으로 유명한 전쟁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입봉(감독으로서 첫 작품으로 데뷔하는 것)한 이후 그는 영화 속에서 50년 세월을 종주해 왔다. 이 긴 세월 동안 그는 <천년학> (2006)까지 모두 100편의 영화를 남겼다. 불교계와의 갈등으로 완성하지 못한 <비구니>(1984)와 올림픽 기록영화 <손에 손잡고>(1987)까지 염두에 두면 이미 100편을 넘어선 지 오래다. 하지만 이런 총량적 기록은 그가 현재 한국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1934년생인(출생신고는 36년생으로 돼 있다) 임 감독은 올해로 76세가 된다. 이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는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임 감독은 1991년 프랑스 예술문학 기사훈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취화선>으로 제5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유네스코로부터 영화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는 펠리니 메달을 받았다. 이어 2007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문화, 종교, 학술, 체육, 군사 등의 분야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운 개인에게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영화계 안팎으로 받은 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기여에 따라 가톨릭대에서는 공식적으로 중학교 중퇴생인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부산 동서대학교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임권택 예술대학’을 설치했다. 현재 그는 임권택 예술대학의 명예학장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것으로 그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어쩌면 이런 것들은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 오히려 방해만 되는 화려한 수사(修辭)일 수도 있다. 왜냐면 그는 아직도 완전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치열하게 영화를 만드는 현역 감독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07년 그는 <천년학>을 찍기 직전 발견된 방광암 수술을 하고 영화를 완성했다. 지금도 석 달에 한 번씩 검진을 받아야 하는 투병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떤 상황도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을 중단시키지는 못한다. 그는 지금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 출근하는 직업감독처럼 일하고 있다.
영화 만들기가 단순히 생계 수단이었던 시절을 거쳐 오늘날 한국영화의 대명사가 되기까지 그는 100편의 영화 속에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투영시켜 왔는가.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코드인 ‘삶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영화적 요소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흔적들을 찾아본다. 임 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 100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그와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99편의 영화를 두고 나눈 대화집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2, 민음사)와 100번째 작품인 <천년학> 직후에 나온 임 감독의 영화연출강의록 <영화-나를 찾아가는 여행>(2007, 민음사)을 참조했다.
‘직업감독의 세월’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51번째 작품 <대추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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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권택 감독의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 |
1960~7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대부분의 감독들은 영화를 선택할 상황에 있지 않았다. 스크린 쿼터제에 따라 영화관들은 일 년에 일정 기간 이상을 상영해야 했고, 영화사는 일정 편수 이상의 한국영화를 제작해야만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 그래서 국산영화는 외화를 상영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작사와 흥행사들이 저(低)예산 주문제작형으로 만들어 배급하는 청부식 생산체제를 갖추고 운영됐다. 이렇게 만들어 개봉하는 국산영화가 한 해에 200여 편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1966년에 촬영한 <요화 장희빈>부터는 모든 영화가 컬러로 제작됐다.
그는 늘 ‘이번 영화가 흥행이 안되면 굶어 죽는다’는 벼랑에 선 심정으로 주어진 영화와 만났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동안에만 21편의 영화를 찍어 영화관에 걸었다. 이렇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충무로에서 믿을 만한 인기 직업감독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입봉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가 흥행에 성공한 데 따른 신뢰도 한몫을 했다. 이 시기에 대해 그는 “1973년에 <잡초>를 만들기 전까지는 영화를 만들면서 이런 소재는 내가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 다산기(多産期)에 그는 액션, 전쟁, 코미디, 사극, 스포츠, 반공영화 등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를 해 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맞는 영화를 찾아냈다. 그에겐 충분한 실습기간이 된 셈이다.
그 당시에는 영화배우나 영화감독 모두 영화판 용어로 ‘가께모찌(다중 출연·연출)’를 해야 할 만큼 많은 영화를 찍었다.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문희, 남정임, 윤정희와 그 이후 신성일로 이어지는 긴 시절 그들과 영화를 만들었다. “배우들이 여러 편을 동시에 찍다 보니 한정된 시간에 그 현장에서 반드시, 대사고 뭐고 일단 찍고 봐야 했다. 아무것도 없이 다음 장소로 가는 동안 버스 안 통로 바닥에 누워서 자고 대사 쓰면서 찍었다. 배우들은 더 바쁘니까 자신들이 할 대사가 무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말도 안되는 대사를 했다. 후시(後時) 녹음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이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그는 주어진 시나리오대로 찍는 감독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시나리오는 무조건 손을 댔다. 이런 자신감은 독서 습관에서 비롯됐다. 그는 수많은 영화를 정신없이 찍어대는 상황에서도 짬짬이 당시 유행하는 대중소설을 다 섭렵했다. 그 다작기에 표절 없이 이야기를 축적해 나갈 힘을 얻은 것도 독서를 통해 얻은 스토리텔링 능력 덕분이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은 나이 탓에 눈이 어두운 지금도 여전한데, 아직도 큰 스토리를 잡고 시나리오와는 무관한 ‘즉흥 연출’을 하며 영화를 만들어 가는 그의 저력이 여기서 나온다.
정창화 감독에게서 액션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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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편제>는 단성사에서 196일 동안 상영되면서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 |
액션영화 테크닉에 자신이 생긴 데는 그의 사부인 액션물 감독 정창화씨의 영향이 가장 컸다. 정 감독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그의 불우한 과거부터 거론해야 한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 숭일중학교 3학년 당시 학교를 중퇴하고 어려운 상황이었던 집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한국전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던 부산에서의 2년간을 그는 가장 처절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생업은 미군이 남기고 간 군화를 파는 일이었다. 장사에는 별 수완이 없었다. 그는 1956년 군화판매상들이 모여 만든 신생영화사 영화 제작부에 입사해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다. 영화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판에 뛰어든 것이다.
처음 맡은 일은 소품 담당이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노감독을 떠나 정창화 감독을 만난 일은 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정 감독은 조명팀에서 일하던 그를 조감독으로 발탁했다. 정 감독은 액션물 감독으로 유명했다. 그의 밑에서 그는 ‘다찌마와리(격투 장면)’ 찍는 방법을 익혔다. 만사를 치밀하게 관찰하는 그는 곧 감독의 신뢰를 받았다. 정 감독은 촬영 현장에서 오케이 사인을 내기 전에 꼭 그에게 물어봤다. 그가 NG라면 NG였다.
물론 감독 데뷔 후에는 정 감독의 스타일을 답습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차별화를 시도해 시네마스코프로 액션물을 찍는 새로운 카메라 앵글에 도전했다. 남을 따라 하는 것은 그에겐 언제나 금기사항이다.
1960년대 말까지 영화 이외의 그의 인생은 없었다. 당시 그의 삶에 대한 회고이다.
“내가 감독으로 살고 있지만 그냥저냥 찍고 돈이 생기면 술 마시고 그냥 살았어요. 술을 많이 먹고 눈 위에 쓰러져 자다 얼어 죽을라는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남겠다는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죽는다는 생각을 먼저 하면서 살았으니까. 반공을 국시로 하는 통제사회에서 빨갱이 일족이었던 내가 꿈을 가질 수가 없던 거야.”
이 상황에서도 그는 지금까지 기억되는 몇몇 걸작들을 남겼다. 액션영화의 걸작 <돌아온 왼손잡이>(1968)가 대표적이다. 박노식, 김지미, 허장강씨 등 당시 쟁쟁한 스타군단이 총출동한 이 작품에 그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액션영화의 모든 전통적 요소들을 다 담았다. 항구, 주변의 배신, 실패한 사랑, 신체 손상까지 극적 요소를 구성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지금까지 해 온 어떤 액션영화보다도 체질에 가깝게 와 닿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이 시절에 만든 <황야의 독수리>(1969), <속눈썹이 긴 여자>(1970), <둘째 어머니>(1971),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 등이 영화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임권택적 영화’의 시작과 번민
52번째 작품 <잡초>에서 75번째 작품 <우상의 눈물>까지
영화를 만드는 환경은 변하지 않았지만 1973년에 개봉한 <잡초>는 임 감독에게 영화다운 영화로 만들었던 첫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는 “<잡초>가 진정한 의미에서 데뷔작”이라고 했다.
주어지는 대로 영화를 만들어 주던 시절을 넘기면서 그는 우리의 삶과 무관한 이야기를 찍는 데 서서히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그의 마음을 영화사에서 알아줄 리 없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제작과 감독을 병행하며 <잡초>를 완성했다. 이런 각성과 노력을 관객은 외면했다. “이 영화를 완성하자마자 <증언>이라는 반공영화를 찍으러 다니느라 (개봉은)나 몰라라 하고 아는 형한테 극장 잡아서 틀어 달라고 했더니 ‘빵구 프로’로 들어가서 망했다. 이 작품은 거개가 다 못 봤을 것”이라고 했다. <잡초>는 필름까지 분실한 상태이다.
당시 영화관은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 등 호스티스 영화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던 시절이었다. 그가 인정했던 영화감독 이만희는 <삼포 가는 길>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었다. 이 틈에서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가족을 억척스레 지켜 가는 어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임 감독의 <잡초>는 외면당했다.
그는 당시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60년대까지 삼류 할리우드 영화는 따라잡지 않을까 했는데, 그 아류에 들어서서 해먹다가는 내 인생 망가진다고 본 거지. 어떻게 해서든 그 영향에서 벗어나야겠다 생각하면서 저급한 것에 물들어 있던 체질을 바꾸는 데 10년이 걸린 거야.”
이러면서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정통 ‘다찌마와리’와도 결별했다. 1990년 <장군의 아들>이 나오기까지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액션은 없어져 버린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영화세계로 조금씩 전진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각성은 그를 지난 1960년대보다 더 암울하고 힘들게 했다. 그저 직업감독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마구잡이로 찍어대던 그 시절보다 번민은 더 컸다. 한국영화의 내리막길에서 1970년대 후반까지 그는 매해 두 편 정도씩 영화진흥공사나 우진필림 두 곳에서 ‘수주한’ 새마을영화와 전쟁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이 영화들은 개봉영화관에 걸리지 못하고 재상영관이나 동시상영관에 걸렸다. 이 시절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네 아직도 영화하고 있나?”는 아픈 질문까지 들어야 했다. 그나마 우수영화상을 받은 영화사에 외화수입권을 나눠주는 제도 덕분에 이런 영화라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새마을영화와 전쟁영화로 연명
그래도 그는 주어진 여건 안에 최선을 다해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만들어 갔다. ‘임권택 스타일’ 한국영화의 효시로 인정받는 계몽영화 <족보>(1978)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는 이 영화에서부터 ‘풍경’을 중요한 미장센(영화 속 장면구성)으로 배치했다. <족보>는 일본작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원작 소설을 한운사씨가 번역, TV 드라마로 만들었던 작품이다. 당시 흥행에는 참패했었다.
또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바탕으로 만든 반공영화 <깃발 없는 기수>(1979), <짝코>(1980)도 그의 대표작에 꼽힐 정도로 수작이다. 그는 특히 <짝코>에 애정을 갖고 있다. <짝코>는 영화 전문가들이 뽑은 건국 이래 한국영화 걸작 50선에서 38위를 기록했다.
임권택 스타일의 롱 테이크와 플래시 백 기법이 선보인 영화 <왕십리>(1976), 국방부가 군대까지 동원해 주면서 만들게 했던 반공영화지만 해외에서도 수작으로 인정받는 전쟁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1976), 펠리니의 명화 <길>을 연상시키는 새마을영화 <옥례기>(1977), 라스트신 연출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계몽영화 <상록수>(1978) 등이 이즈음의 수작으로 꼽힌다.
소년 반공영화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1978)의 주연 여배우인 채령씨와 1979년 결혼하는 것으로 그의 방황기도 서서히 막을 내린다. 아내는 그의 무협영화 <요검>(1971)에서 처음 만나 8년간 교제해 왔다.
‘거장의 시대로’
76번째 영화 <만다라>에서 <천년학>까지
1981년 작 <만다라>는 그를 세상에 커밍아웃시킨 작품이다. 작품성은 물론 흥행에까지 성공한 <만다라>는 그에게 앞으로 그가 추구해야 할 작품세계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그래선지 임권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만다라>로 시작한다.
이 작품으로 그는 해외 영화계에 알려진다. 유럽 영화계에서는 그의 작품을 두고 ‘미조구치의 현대 영화적 재현’이라고 했다. 1956년에 타계한 미조구치 감독은 실재의 본질,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의 갈등, 여성의 본질적 애정을 생생하고 아름다운 영상으로 표현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감독이다. 섬세하게 조절된 카메라 워크로 공간감각이 뛰어나게 연출한 전후 일본 이야기 <우케츠 이야기> (1953)가 대표작이다. 그는 서구 영화의 원근법을 벗어나 하이 앵글(high angle)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영화세계를 창조했다.
<만다라>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영화사에 기획을 제의한 작품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임 감독의 설명이다. “화천 공사에서 <만다라> 이야기가 나왔는데, 원작을 읽으면서 죽어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이었지. 승려사회를 다루고는 있지만 계율 밖에서 살면서 계율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나 자신도 대충 사는 것에서 벗어나면서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승려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자기 삶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게 참 아름답구나.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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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권택 감독이 오랜 방황 끝에 내놓은 <만다라>는 작품성과 흥행면에서 성공하면서 그를 해외영화계에 알렸다. |
그는 <만다라>에서 <불의 딸>(1983) <길소뜸>(1985) <씨받이>(1986) <아제아제바라아제>(1989) <개벽>(1991) <서편제> (1993) <태백산맥>(1994) <취화선>(2002)에 이르기까지 가슴의 응어리들을 토해 내듯 영화로 만들어 냈다.
그는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고, 8·15광복을 겪었으며, 6·25전쟁을 통해 세상이 몇 번씩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전남 장성에서 지주의 종손으로 자라 한창 예민한 십대 시절 집안 전체가 좌익활동으로 처참하게 몰락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또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온 후 ‘빨갱이의 아들’로 손가락질 받자 연좌제를 피해 고향을 떠나 부산까지 흘러갔다. 이때 인연을 맺은 영화는 어쩌면 그와 세상이 소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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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권택 감독(가운데) 전성시대를 연 트로이카. 정일성 촬영감독(왼쪽)과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 |
한국적 정서의 사실주의적 접근
<만다라> 이후 그는 영화를 통해 자신이 느끼고 보아 온 것에 대해 솔직해졌다. 그래서 그는 영화 속에서 ‘사실적’인 것에 더 집착했다. 하지만 감정의 절제가 엄격해 그의 영화에는 슬퍼도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별로 없다.
그는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과 촬영감독 정일성씨 3인 체제로 <아제아제바라아제>(1989)부터 <하류인생>(2004)까지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이 중 특히 <서편제>는 한 극장에서 6개월을 상영할 만큼 인기가 높았다.
판소리 영화 <춘향뎐>(2000)은 그의 모든 정수를 한데 모아 놓은 작품이라며 영화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칸영화제에서도 기립박수를 받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이 작품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자리를 얻게 될 영화”라고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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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번째 작품 〈달빛 길어 올리기〉 촬영현장의 임권택 감독. |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자신의 영화에 대한 꿈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지부진하게나마 계속 만들 수 있다면 좋겠어. 내가 젊었을 때는 갖고 있는 생각을 영화로 찍는 것이 아니었지. 살아 보니까 나이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고. 결국 나이만큼 찍는 것 같아. 딱 나이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일흔여섯을 넘긴 지금 그에게 ‘한지’는 어떤 영상 속에 구현돼 또다시 세계인들의 눈으로 전달될까 궁금해진다.⊙
▣ 임권택 감독 인터뷰
“난 매번 턱걸이를 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찍는다”
임권택 감독을 처음 본 것은 미완의 영화 <비구니>(1984)의 설악산 로케이션 현장에서였다. 그는 따뜻하고 겸손한 감독이었다. 그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어 26년 만의 만남도 편안했다. 이 세월 동안 그는 100편의 영화를 완성했고, 세계적 감독으로서 한국영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거장 임권택’을 모처럼 마주했지만, 수수한 모습은 처음 그대로였다.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더 확고해진 영화에 대한 열정이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은 구도자의 그것처럼 보였다. 한순간 숙연함이 느껴졌다.그는 방광암이라는 어려운 병과 싸우면서도 두 편의 영화를 찍었다. 100번째 영화 <천년학>(2006)과 현재 마무리 중인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건강 때문에 두 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아내 채령씨는 늘 남편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렀다. 그의 아내는 언제나 그랬다. 그가 온전히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다. 이런 아내가 그에게는 ‘로또 당첨’이라고 한다.
영화 막바지 작업으로 바쁜 임 감독을 만나기 위해 7월 5일 용인에 있는 자택을 찾았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취화선> (2002)의 장승업이 바로 임 감독 자신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동의하는지요.
“장승업은 화가고 나는 영화감독이라 장르가 다르지만 창의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합니다. 장승업은 삶의 기록이 별로 없어요. 고아 비슷하게 고향을 떠나 왔고, 기록 속에 이야기가 드러나는 것은 스무 살 무렵부터지요. 그 후 천재화가로 이름을 날렸고 52세에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장승업은 술을 잘 마시고 여자를 좋아해서 미인을 옆에 끼고 그림 활동을 했어요. 왕실에 불려 가서 그림 그리라고 했을 때 세 번 도망친 것을 잡아들일 정도로 자유롭게 살았어요. 40세경에는 신부와 자고 난 뒤 다시 안 왔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예요. 나도 40세까지 혼자 살았던 사람이고, 그전까지 생활상에 비슷한 점이 많겠다는 생각으로 영화 속에서 내 체험을 장승업의 삶에 채워 넣었는데, 거짓으로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곳에 내 인생이 투영된 것이므로 그런 시각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데이비드 린치, “당신은 완벽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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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취화선> 속의 장승업은 임권택 감독 자신과 흡사하다. |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는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천년학>을 마친 후 한지(韓紙)에 대해 2년간 공부했어요. 오랜 준비기간을 통해 영화를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다 찍을 때까지 사방에서 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많아서 혹시 내가 대충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영화를 찍은 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예요.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한지가 한국사람들의 생활문화나 기록문화에 미친 영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람들이 한지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이, 이를 영화화하는 데 무섭기도 하고 또 관심이 있으니 그만큼 잘되겠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촬영을 마무리한 느낌은.
“‘무지 힘들었다’는 것이 첫 번째예요.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관객에게 어떻게 닿을지, 어떤 영화보다 궁금하고 두렵기도 하네요. 편수가 쌓이면 쌓일수록 더 두려워요. 내 영화 애호가들은 백여 편이나 했다면, 어지간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영화에 잘 담겠지라고 지레짐작하는데, 이런 기대와는 달리 난 매번 턱걸이를 해 왔다고 생각해요. 늘 내 영화가 관객한테 어떻게 비칠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백 편 동안 한 번도 관객에게 자신 있게 보일 수 있던 영화가 없었어요.”
―그래서 자신이 만든 영화를 잘 안 보나요.
“<서편제> <장군의 아들>은 그래도 TV에서 상영되는 걸 봤어요. 보통은 첫 시사회에서 관객반응 한 번 보고 나면 다른 시사회에서는 인사만 하고 자리를 떠요. 내 필름을 내가 보는 건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에요. 왜 그 당시에 저런 정도로 찍었을까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완벽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후 리셉션장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데이비드 린치 감독을 만났어요. 그가 우리 자리로 오더니 심사위원으로서 보기에 내 영화는 전체와 부분이 다 완벽하다며 ‘당신은 완벽주의자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웃음)”
“〈잡초〉가 진정한 의미에서 내 영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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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권택 감독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 첫 작품’이라고 말하는 <잡초>의 한 장면. |
“그러는 이유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거예요. 영화 속에서 발견한 흠결은 새로운 영화를 할 수 있는 에너지입니다. 자기 작품에 100% 만족한다고 외부에 이야기하는 감독조차도 양심이 있다면 그런 건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 겁니다. 찍을 당시 완벽한 것 같아도 미흡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예요. 완성을 지향할 뿐이지요.
늘 미흡하지만 내 손을 떠난 내 영화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지고 뭔가 그 전 영화와 달라진 영화를 했다는 평가를 듣는 것이 일련의 성과라면 성과인데,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요. 그것은 체질화된 것이고, 그 성과를 뛰어넘고 달라져야 합니다.”
―정창화 감독은 임 감독 인생에 어떤 의미인가요.
“나는 영화를 평생의 직업으로 알고 살아왔어요. 영화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그것을 할 수 있게 바탕을 마련해 준 감독입니다. 나는 애초에 영화계를 생업으로, 삶의 방편으로 들어왔는데, 정 감독님이 내 재능을 발견해 주었고, 중요한 일을 나한테 시켜 주었지요. 나 자신도 그 일을 하면서 영화가 좋아졌어요. 좋아하는 일로 평생을 살 수 있는 것은 행운이지요. 나한테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직업적 회한 그런 것이 없어요.”
―한국인들에게 임 감독의 대표작으로 <만다라>(1981)가 꼽히는데, 공감합니까.
“초기 작품 시절에 오랫동안 평론가들은 내 영화에 관심이 없었어요. 임권택 영화 하면 갑자기 <만다라>가 튀어나온 듯 생각하는데, 그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긴 수련기간이 있었어요. 물론 초기 작품들은 너무 부끄럽습니다. 만든 이후 한 번도 보지 않은 필름도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출연진과 스태프까지 생각이 나지 않는 영화도 있어요(웃음). 8~9월에 영상자료원에서 내 전작전(全作展)을 연다고 하는데, 그런 필름은 안 보여줬으면 좋겠어요(웃음).”
―영화평론가들은 초기 작품에 대해 재해석을 하고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갖는지요.
“물론 당시에도 주어진 조건에서는 최선을 다해 만들었어요. 하지만 우리 삶과는 무관한 쓸개 빠진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가치관이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에요. 그때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든지, 영화를 통해 아름다운 꿈을 구현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어요. 그냥 생계형 직업감독이었지요. 계속 술 마시고 이러다가 노숙자처럼 죽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던 시절이에요.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갖고 만든 첫 작품이 <잡초>(1973)지요. 그 작품이 진정한 의미에서 내 영화의 시작이에요.”
“내 인생을 휴지처럼 써서야…”
―좌익운동을 했던 집안으로 인해 받았던 어려움이 <태백산맥>(1994)과 같은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건 아닙니까.
“나로서는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시대를 영화에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족보>(1978) <깃발 없는 기수> (1979) <길소뜸>(1985)도 그 시대를 거쳐 오면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던 것을 영화에 담은 작품이지요.”
―자신을 늘 ‘운이 좋은 감독’이라고 말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5·16군사혁명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섰을 때 한국영화는 고사(枯死) 직전의 암흑기를 맞이했어요. 그 시기에 다른 영화감독들은 전부 비명을 질렀지요. 하지만 난 별 생각 없이 살면서 저(低)예산 의무제작 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었어요. 한마디로 영화를 쉼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저질감독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이후 스스로를 세탁해 내는 과정으로 10년을 살았어요. 나이 들어 가면서 내 인생을 휴지처럼 써서야 되겠는가 하는 자성이 들었고,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으니 운이 좋은 것이지요.”
―그 당시에도 감독으로서 작품에 대한 일정 기대 수준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꿈은 일류는 못 되더라도 2~3류 할리우드 영화 수준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제작비나 인적 자원, 능력까지 모든 것을 총동원한 재주를 부려도 3류 할리우드 영화조차 이길 수 없다는 걸 빨리 알아차렸어요. 한국인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영화, 미숙하고 뒤떨어져도 개성만은 있는 그런 영화를 찍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자체가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거짓말하지 말고 살아오면서 겪은 삶 자체를 정직하게 찍어 내 우리만의 문화적 개성을 영화적 재밋거리로 바꾸고자 했지요.”
―방황하는 시기가 길었는데, 결혼과 가정이라는 것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내 삶이 좀 더 건강한 쪽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쯤 집사람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가정과 아이들은 내가 아비로서 책임을 다 못하고 인생을 끝내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 내게 하는 존재입니다.”
―다른 감독들의 영화는 자주 보는 편인가요.
“잘 안 봐요. 히트작들은 그래도 가끔 보는데, 관객 천만 명을 돌파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2004)를 봤어요. 나도 군사영화 <증언>(1973)을 찍었는데, 그 시대 군사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한다는 나름의 소신이 있었을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형제가 한 소대 안에 배속되고, 교전 거리가 너무 좁은 설정은 군대의 실상과 다르기 때문에 나 같은 1970년대 사고를 가진 감독은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래도 그런 감독의 용기와 파격이 흥행을 성공시킨 요인이 된 것 같아요. 그런 흥행은 한국영화에 기여한 점이 크다고 봅니다.”
―21일 만에 천만을 돌파하며 국내 흥행기록을 세운 봉준호 감독의 <괴물> (2006)은 봤습니까.
“아뇨. 그런 유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봉 감독의 <살인의 추억> (2003)은 재미있게 봤어요.”
젊은 감독들 필름낭비 너무 많아
―경제상황에 따라 한국 영화산업도 연동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는지요.
“크게 보면 경제가 커진 만큼 영화도 따라서 발전한다고 생각해요. 불황일 때 투자가 침체기를 맞으나 앞으로 경제가 좋아지면 영화 쪽도 같이 좋아지리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젊은 세대가 한류(韓流)를 일으키며 여기까지 온 것도 그들의 능력이 발현된 것이라고 봅니다. 단, 젊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기 어려워지기까지 그 이전에 너무 심한 낭비(다른 영화들이 필름 20만∼30만 자를 쓰는 와중에도 <춘향뎐>(2000)은 8만 자, <취화선>(2002)은 11만 자 정도만을 썼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온 그에게 절약은 체질이다)가 있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봐요. 너무 쉽게 해 온 세월의 영향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지요. 조건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조금씩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한때 조감독으로 데리고 있었던 곽지균 감독의 자살은 한국영화의 불황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하나요.
“자살을 할 만큼 스스로 너무 고립돼 살았던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건 한국 영화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예요.”
―100편 중 아끼는 작품을 뽑는다면.
“이런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어요. 나 스스로의 양심에 비춰서 완성도 높다고 보는 영화를 못 찍어 봤기 때문이에요. 단, 객관적인 성과(흥행)로는 <만다라>와 <서편제> <장군의 아들>이 꼽힐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만다라>는 그 필름 자체가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준 계기가 됐고,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유럽에 알려준 영화예요. <서편제>는 한국영화의 흥행 기록을 깼고, 우리 판소리, 우리 것을 관객이 되돌아보게끔 해 줬지요. <장군의 아들>은 1960년대 액션영화 감독 시절을 참회하는 상황에서 안 하고 싶었지만 결국 히트를 했고, 그것을 계기로 <서편제>를 찍을 수 있었으니 아끼고 싶네요.”
―영화를 만들 때 흥행성과 작품성 중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지요.
“물론 작품성이에요. 하지만 한 번도 흥행성을 잊은 적은 없어요. 관객 반응도 예측을 잘 못하겠는 게, <서편제>는 10만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뜻밖의 성과를 낸 것이고, 반면 <축제>(1996)는 내 생각에 <서편제>보다 더 낫다고 판단해서 관객이 터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요.”
―많은 작품에서 ‘풍경’을 미장센의 주요 요소로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의 산하는 애정을 가지고 보는 것과 그냥 보는 것이 다릅니다. 그 산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그런 것이 다 필름에 담깁니다. 수난의 세월을 품고 있는 산하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비극적이지만 그 안에서 그대로 따뜻하다는 것을 찍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
―몇 해 전에 동국대학교 영상학과 겸임교수로 한 학기 동안 자신의 작품을 분석하는 강의를 했는데, 이렇게 작품을 해체해 보니 어땠습니까.
“그동안 현장에서 정신없이 찍어 온 필름을 두고 ‘신 바이 신(scene by scene)’으로 약점을 긁어 내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내가 왜 그때 그것을 찍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 어려웠지요(그도 그럴 것이 그는 최근 20여 년간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한 채 영화를 찍어 본 일이 없다. 그는 대략 큰 이야기 틀거지만을 만들어 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그가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안 쓰는 이유는 현장의 분위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대신 리허설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다음부터는 논리적으로 대답할 근거를 확실히 해 가면서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웃음).”
―개봉 당일 아직도 긴장이 되나요.
“굉장히 불안 초조해요. 실패는 감독으로서 다시 일어설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할 기회를 놓치지요. 하지만 나는 작은 몇 작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기회를 얻는 것이에요.”
―앞으로 활동계획은.
“지지부진하게나마 계속 만들 수 있다면 좋겠어요. 내가 젊었을 때는 갖고 있는 생각을 영화로 찍는 것이 아니었어요. 살아 보니까 나이에 따라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디다. 결국 나이만큼 찍는 것 같아요. 딱 나이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달빛 길어 올리기>는 언제쯤 볼 수 있나요.
“이번 가을에 배급사 세 곳이 함께 디지털 영화관에서 동시에 개봉할 예정이지요.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