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안 보이고 계실 것 같으면서도 안 계신, 그래서 찾아나서는, 찾아 묻게 되는 존재”
⊙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張勉 전 총리의 3男. 서른 살 때 사제 서품.
미국·벨기에·오스트리아·이탈리아·타이완 등지에서 수학
⊙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글 가르쳐 ‘103위 한국 순교 성인’ 미사집전 이뤄내
⊙ 교황의 특사로 여러 차례 방북. “북한의 김일성 부자(父子) 우상화, 솔직히 겁난다”
⊙ “신앙이란 심연(深淵)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아”
張益
⊙ 1933년 서울 출생.
⊙ 경기중 5학년 당시 한국전쟁 발발로 중퇴. 미국 메리놀대 인문학 학사, 벨기에 루뱅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박사과정 수료,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 대학원 석사, 국립 타이완대 대학원 수학.
⊙ 1963년 3월 사제 서품. 1976년 서울대교구장 비서실장, 서강대·가톨릭대 교수, 1994년 춘천교구
주교로 착좌, 2006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역임.
⊙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張勉 전 총리의 3男. 서른 살 때 사제 서품.
미국·벨기에·오스트리아·이탈리아·타이완 등지에서 수학
⊙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글 가르쳐 ‘103위 한국 순교 성인’ 미사집전 이뤄내
⊙ 교황의 특사로 여러 차례 방북. “북한의 김일성 부자(父子) 우상화, 솔직히 겁난다”
⊙ “신앙이란 심연(深淵)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아”
張益
⊙ 1933년 서울 출생.
⊙ 경기중 5학년 당시 한국전쟁 발발로 중퇴. 미국 메리놀대 인문학 학사, 벨기에 루뱅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박사과정 수료,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 대학원 석사, 국립 타이완대 대학원 수학.
⊙ 1963년 3월 사제 서품. 1976년 서울대교구장 비서실장, 서강대·가톨릭대 교수, 1994년 춘천교구
주교로 착좌, 2006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역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포공항에 도착,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락호아(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며 공자 말씀으로 시작된 방한(訪韓) 성명을 우리말로 읽어 내려가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교황의 우리말 성명 초안을 잡고, 직접 교황에게 한글을 가르친 이가 바로 장면(張勉) 전 국무총리의 3남(男) 장익(張益·78) 주교다. 1933년 11월생인 그는 서른 살 때 사제(司祭) 서품을 받았다. 경기고 5학년 때 6·25가 터져 학업을 중단하고 당시 미국 대사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도미(渡美), 미국 메리놀대(인문학 학사), 벨기에 루뱅대(철학과 박사과정),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신학과 석사)를 거쳤다. 20대를 해외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며 편력한 뒤에는 4·19, 5·16 등 모국(母國)의 정치 격변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2공화국 붕괴와 장 총리의 실각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했다.
사제가 된 뒤 귀국해서는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비서(1976년에 비서실장이 된다)가 됐고 1978년부터 15년 동안 맏형 장진(張震)과 함께 서강대 강단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당시 로마 그레고리안대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는 바오로 2세의 우리말 미사 집전을 돕고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탄생시켜 한꺼번에 100명이 넘는 성인을, 로마 교황청 밖에서 시성(諡聖)하는 첫 기록을 남길 때 한국 천주교회와 교황청 간 메신저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4년 11월부터 천주교 춘천교구 주교로 착좌(着座)했다. 3월 25일은 교구장으로서 마지막 날이다. 주교가 된 지 꼭 16년 만이다.
추기경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성덕(聖德)과 학식(學識)을 겸비한 장 주교는 춘천교구장에서 물러나고서도 강원도에 머물며 사제가 없는 공소(公所·본당보다 작은 교회단위)에서 미사를 집전할 계획이다. 기자는 장 주교의 삶과 그가 만난 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춘천 효자동 성당으로 향했다.
―춘천교구장이 함흥교구장을 대행하는 자리인데. 함흥엔 가 보셨나요?
장 주교는 여러 번 방북할 정도로 북한과 인연이 남다르다. 1987년 6월 평양에서 개최된 비동맹 정상회의 때 교황청의 옵서버 자격으로, 이듬해 10월에는 교황청 파견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는 등 바티칸과 북한의 관계 증진에도 크게 공헌했다. 또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함께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했다.
“함흥엔 못 가 보고 원산엔 가 봤죠.”
―북한과 인연이 특히 깊다고 하던데요.
“인연이라기보다는 심부름을 좀 했죠.”
장 주교는 1997년부터 춘천교구 차원에서 대북지원사업인 ‘한솥밥 한식구’ 운동을 펴왔고 남북적십자사가 합의한 ‘지정기탁제’를 활용해 교회 내에서 처음으로 ‘북(北) 강원도(휴전선 북쪽 강원도)’를 지원해 왔다. 그 덕분에 ‘DMZ 평화상’(강원도 제정)을 수상했다.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가 겁나”
―통일이 언제 될까요.
“허허, 그걸 누가 알아요. 그렇게 물으시면 답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북한에도 예수님이 계시겠죠.
“허허. 그거야… 그렇죠. 북쪽 땅에 천주교의 옛 터전을 되찾겠다거나 천주교 세(勢)를 확장해야겠다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것을,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북한과 북한 사람을) 품 안에 안으려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외국에서는 북한을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 부자를 믿는 종교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있잖습니까.
“체제 유지를 위해 그렇게 몰고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북한) 체제나 저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얘기하고, 북한 주민들의 삶과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일성 부자를 신처럼 우상화한다는 점은 어떻게 보세요.
“겁나요, 솔직히 말해 겁이 나요. 그렇게 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평생 사제의 길을 걸었는데, 세례를 베푼 이들 중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까.
“누구 하나를 떠올리라고 하면 쉽지는 않은데… 이름 없는 분 중에서 나름 참다운 삶을 사시고 고통받던 중에 어떻게 어떻게 세례를 받은 분들이 기억에 남죠.”
―문인(文人) 중에 한운사(韓雲史) 선생에게 영세를 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렇기는 한데, 그분을 잘 몰라요. 문인 중에선 구상(具常) 선생을 존경했지요. 끔찍이 저를 생각해 주시고. 뭐라고 할까, 마음이 통했다고 할까?”
―시인 김광균(金光均) 선생에게도 직접 세례를 줬다던데, 기억 나십니까.
“그 어른도 구상 선생과 친분이 남다른 사이였어요. 저와 처음 만날 당시 와병(臥病) 중이셨는데 구상 선생이 가끔 찾아뵈라 하셔서 여러 차례 뵙고 성북동 성당에서 영세를 주었지요. 그 광경을 보고 다른 문인들이 많이 놀랐습니다. 쉽사리 영세받으실 분이 아니셨기 때문인가 봐요. 그분은 문학은 물론, 현대사의 시대적 갈등이라든지 인간의 삶과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하셨고 병고(病苦) 중에도 책을 얼마나 많이 읽으셨는지 몰라요. 오랜 사색 끝에 영세를 받겠다고 하셔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으셨지요.”
―그때 구상 선생이 대부(代父) 역할을 하셨다지요?
“네. 영세를 받으실 때 후배 문인들이 많이들 오셨지요.”
―그 계기로 후배 문인들도 천주교를 믿게 됐나요?
“꼭 그 일이 계기가 됐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다른 문인들도 신앙을 찾으려는 이가 있으니 가까이 살펴보라’고 구상 선생이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말로 미사 집전 희망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어 스승으로 세계언론에 오를 만큼 화제가 됐던 장 주교는 당시 로마에 유학생 신분으로 체류 중이었다. 103위 한국순교자 시성과 관련, ‘바티칸 연락관’으로 임명되면서 교황이 시성식 대(大) 미사를 우리말로 집전하게끔 직접 한국어 교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200주년 행사 때 교황을 수행해 방한한 그는 본의 아니게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80년 당시 서강대 교수 시절 아닌가요? 어떤 계기로 로마에 가셨나요.
“‘광주 5·18’이 일어나고 위수령이 내려지는 등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로마에 가게 됐지요. 때마침 교황께서 방한(訪韓)을 준비하시는데, 바티칸에 한국 분이 없으셨어요. 한마디로 연락책이 필요했던 거지요. 우리말 미사집전이나 시성문제라든지…. 그때는 우리 사회가 편하지 않았어요. 교황께서는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는 어디를 방문할까,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또 우리말로 (미사집전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지요.”
―메신저 역할을 하신 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부탁 때문인가요.
“한국과 바티칸 양쪽에서 다 받았죠. 누군가 연락병이 필요했기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연락하는, 뭐랄까 창구 노릇을 해달라고 원해서 시작하게 됐죠.”
천주교가 한국에 닻을 내린 이후 역대 교황들은 한국 교회에 각별한 사랑을 보여줬다. 교황 비오 6세(1775~1799)는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한 조선(朝鮮) 교회 소식을 듣고 큰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교황청 사상 최초로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였다.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여의도 광장에서 김대건 신부와 정하상 신학생 등 순교한 103인을 성인으로 시성했다. 교황은 4박5일 체류기간 동안,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 묘소를 참배해 위로했고 소록도를 찾아가 한센병 환자와도 만났다.
―우리말 미사 전례는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나요.
“교황께서 먼저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말이 그렇지 방한 기간에 20차례 연설을 하셨는데 전부 우리말로 하시는 게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질 않습니까. 일단 우리말의 소리부터 아셔야겠다 싶어, 한글을 설명해 드렸는데 즉시 알아들으시더라고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한글이 귀에 익었다면 모를까 외국인이 써놓은 대로 소리 내라고 하면 그렇게 되질 않아요. 동화현상(말소리가 서로 이어질 때, 어느 한쪽이나 양쪽이 영향을 받아 비슷하거나 같은 소리로 바뀌는 현상) 같은 게 너무 많고 장단, 억양표시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폴란드 출신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조국 폴란드가 독일 치하에서 독일어를 강요받았던 아픔을 떠올리며 한국어 공부에 더욱 공을 들였다고 한다.
“한글 공부가 쉽사리 될 일은 아니잖아요. 좋은 교재가 없을까 해서 찾았더니, 외국인이 우리말을 배우려고 노력해 온 언어표기체계가 11개쯤 있더군요. 다 일장일단이 있고, 개중에서 제일 괜찮은 것을 골라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곁들여 설명해 드렸지요. 교황께서 ‘하다가 포기하더라도 하는 데까지 해 보겠다’고 자꾸 그러셔서 제가 힘들었습니다. ‘모처럼 한국까지 가서 남의 나라 말로 하면 알아듣겠느냐’며 걱정을 많이 하셨지요. 또 ‘소리로만 배우기보다 실제로 해 봐야 하지 않느냐’면서 17차례나 우리말로 미사를 드렸어요.”
―한국에서 거행된 103위 시성식은 교황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나요?
“103인을 성인으로 시성하는 것은 어떤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1925년에 한국순교자 79인을 시복하지 않았습니까. 19세기 말부터 이미 조사와 검토가 진행됐어요. 거기다 나머지 분들을 합쳐 103위 시성을 하게 된 겁니다. 시복·시성(諡福·諡聖) 담당부서가 있어서 거기에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최종 시성식을 하게 되지만, 누구를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이 성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교회가 알아 모시는 것이죠. 생으로 성인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103위 한국순교자 시성식은 여러 가지 의미로 파격이었고, 국외에서 시성식을 한 사례가 없었어요. 아주, 아주 파격적이었어요. 대부분 로마에서 이뤄졌으니까요.”
시복·시성이란 천주교에서 순교했거나 특별히 덕행이 뛰어났던 이를 죽은 후에 복자(福者)·성인(聖人 혹은 성녀)으로 추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자로 추대하는 것을 시복, 성인으로 추대하는 것을 시성이라고 부른다.
―바오로 2세는 한국을 잘 아시던가요.
“네. 굉장히 깊이.”
―어떻게 아셨을까요.
“아시다시피 그분은 나치 시대 폴란드에서 고교를 다니셨고, 나중에는 구(舊) 소련 치하에서 정치·사회·사상적 갈등이 굉장했어요. 그런 역사적 아픔이 있으셨기에 우리가 일본 치하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을 내면으로부터 이해가 있으셨어요. 더더구나 그래서 우리말로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지요. 한국에 오셔서 20차례 걸쳐 연설하실 때 그때마다 대상이 다르지 않습니까. 오시자마자 제일 먼저 광주로 달려갔는데 당시 정부로선 도저히 소화할 수 없었고, 교황께서 어느 자리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가 민감한 사안이었어요. 노동자와 시장 상인, 지성인도 만나셨는데 그들과 나누는 대화 내용도 서로 달랐지요. 그래서 배경자료를 잔뜩 만들어 드렸어요. 교황께서는 당시 한국 대학생의 생각이랄까, 정신문화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하셨고 소록도 한센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처지가 어떤지도 궁금해하셨어요. 전부 배경자료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장면 총리, 사제 결심 듣고 “시작은 쉽지만 잘 마쳐야 한다” 말해
장 주교의 아버지 장면 총리는 1951년 5월 바티칸 교황청 훈장을 받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정치가로서보다 성직자가 더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장 총리의 할아버지 장기빈과 할머니 황 루시아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 처가 역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장 총리의 결혼식도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이뤄졌다.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장 총리는 ‘금테 모자를 쓰고 칼을 찬’ 관리가 되기 싫어 경성 기독교청년회(現 YMCA) 영어학교에 진학했다. 그 시절, 용산 천주교신학교의 강사로도 활동했는데 이 신학교에서 장 총리에게 영어를 배운 세 살 아래 학생이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후일 대주교가 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였다.
―가톨릭과의 인연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네요.
“저야 뭐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영세를 받았으니까요.”
―언제부터 신앙을 가졌나요.
“할아버지 때부터 믿었는데, 할아버지는 10세 때 영세를 받았고 할머니 쪽도 대원군 박해 시절 영세를 받으셨어요. 양쪽 집안이 다 신자였던 것이지요.”
―스스로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습니까.
“우리 집안에서는 부모님이 아이들 보고 ‘어느 학교 가라’ ‘무슨 공부 해라’는 잔소리를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어요. ‘뭘 해도 좋다’고 내버려두는 겁니다. ‘잘만 해라. 잘해도 네 탓, 잘못해도 네 탓’이라고 하셨어요, 부모님이 남의 자식 키우듯, 의존심이 생기지 못하도록 키우셨어요. 7남매의 학교에 한 번도 가시지 않았어요. 성적이 어떻다고 입 밖에 내신 적도 없지요.”
―한국전쟁은 몇 살 때 경험했나요.
“경기중 5학년 때 전쟁이 터져 6학년들은 16세여서 죄다 군에 가고, 5학년 중에서도 생일이 빠른 친구는 참전(參戰)을 했어요. 전쟁 탓에 졸업을 못한 동창이 많습니다. 저도 경기고 100주년 때 명예졸업장을 받았어요. 예순이 넘어 고교 졸업을 한 셈이지요.”
―그때 참전은 안 했습니까.
“우리 반 친구 중에서도 전사자가 매우 많았어요. 그때 끌려가 6주 훈련받고 최전방 가서 많이 죽었어요. 저는 입대하려 해도 나이가 안됐죠. 더더구나 생일이 늦어서.”
―전쟁 참상을 직접 목격했겠습니다.
“대구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지요. 1950년 9월에 서울이 수복되면서 화물차 꼭대기에 매달려 서울에 왔어요. 실제 전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사방 도로변에 시체가 널려 있었고 정말로 끔찍했어요.”
―그게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나요?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사제가 될까 말까 했었지요. 한국전쟁이 계기가 됐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긴 어렵고요,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뒤 장 총리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시작은 쉽지만 잘 마쳐야 한다’고 하셨어요. 겉으로 내색은 안 하셨지만,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중 내가 미국 유학 가는 것 반대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요.
“전쟁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았잖아요. 그때 아버지가 미국 대사로 계셨는데 한 살 위 형이랑 두 살 아래 동생이랑 셋이서 학교에 다녔어요. 어머니는 위중하셔서 미국으로 치료받으러 가셨는데 집에 대포알이 날아들던 상황이었어요. 우리 뒤를 봐주시던 외삼촌이 인민군에 끌려가 우리 형제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됐지요. 하는 수 없이 교복을 입고 아버지가 계시던 미국으로 갔지요. 처음엔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게네들 (미국에) 보내면 안된다’고 못 가게 하셨어요. ‘전쟁통에 미 대사가 자기 자식들 데려가면 안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러다 서울이 수복되고 허락하셨지요.”
그렇게 한국을 떠나 사제가 돼 귀국하기까지 미국은 물론 이탈리아·벨기에·오스트리아 등 태평양과 구주(歐洲) 여러 나라를 돌며 지적 편력을 했다. 마흔이 넘어서는 한자를 배우겠다고 국립 타이완대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라틴어와 희랍어를 포함해 10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확인차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누가 시작한 말이에요? 10개 국어는 무슨…. 어려서 외국에 나갔으니까 여기저기 나라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게 됐고 나중에 정치 파동을 겪으며 귀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 나라 저 나라 전전하며 공부를 많이 하게 됐어요. 공부하려면 말부터 배워야 하지 않나요. 말 안 배우면 낙제하고 쫓겨나니까 그렇게 주워들은 겁니다.”
―타이완에는 언제 갔습니까.
“1970년대에 갔죠. 그때 여러 해 동안 휴가를 못 갔는데, 김수환 추기경에게 ‘밀린 휴가 한꺼번에 주세요’ 그랬죠. 그랬더니 ‘어딜 가려고?’ 그래요. ‘어려서 제대로 못 배운 한문을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네 나이에 지금 가서 뭐 하려고’ 그러셨는데 그때 제 나이가 마흔이었거든요. 타이완 공항에 내리니 아무 아는 사람도 없고 오라는 사람도, 가라는 사람도 없고…. 늘 혼자서 그렇게 다녔어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한문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귀국할 즈음, 스승에게 ‘수박 겉핥기란 말이 있듯 중국 수박이 하도 커서 겉만 핥아도 혓바닥이 다 닳아 집에 간다’고 했어요. 하하.”
이런 일도 있었다. 1989년 서울 세계 성체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 주교는 당시 까마라 대주교와 서독 슐렘바하 주교가 ‘세계 평화와 교회’를 주제로 강연할 때 독(獨)-한(韓)-영(英)-불(佛) 순으로 4개 국어를 메모 없이 연이어 동시통역했다.
―외국어 잘하는 비결이 따로 있나요.
“없어요. 세 살 먹은 아이 못하는 말 없잖아요. 어른 가지고 놀잖아요. 말이라는 게 사람의 기능 중에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 하느님이 그것 하나는 공통으로 안배하신 것 같아요. 음치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리가 안 나오잖아요. 팔다리 따로 노는 애들, 운동신경 때문에 안되잖아요. 수학 공부가 버거운 애들도 많지만 말 못하는 사람은 구경을 못했어요. 학교에서 꼴찌 하는 애들도 말은 곧잘 합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도 하는 말이 미친 소리지 문장과 발음도 멀쩡합니다. 그런데 외국어다 하니까, 얼어 가지고 장벽을 느끼는 것 같아요.”
아버지는 정치인이 아니라 신앙인
아들 눈에 비친 장면 총리는 어떤 사람일까. 장 총리가 정치일선에 나선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 타의적(他意的) 요인이 많았다는 것이 장 주교의 생각이다. 그는 “장 총리가 1946년부터 ‘남조선 국민대표 민주의원’,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 ‘제헌 국회의원’ 등 정치일선에 나서게 된 것은 평소 사회·문화적으로 두터운 신뢰를 받는 천주교 신자인 까닭에 자의보다는 다분히 주교의 명(命) 등 타의에 의해 교회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요청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 외교관이나 정치인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아버지는 뭐랄까, 신앙인이셨고 그 다음에 교육가셨어요. 젊은이 교육하는 데 온 마음을 쏟으셨어요. 정치는 우연히 하게 된 것이지 정치적 야망은 처음부터 없으셨어요. 철저한 신앙인이었지요. 젊은 시절, 미국에서 고학하실 때 ‘재속(在俗)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셨지요. 1936년인가 37년인가, 국내 처음으로 재속 프란치스코 제1기로 서원하셨을 때 어머니, 할아버지, 작은할머니까지 온 집안이 재속회에 가입했어요.”
그의 말처럼 장 총리는 독실한 신앙인이자 교육자다. 1920년 3월 경성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를 졸업한 장면 총리는 미국 유학을 꿈꿨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메리놀 선교회의 후원으로 장 총리의 동생 장발(張勃·초대 서울대 미대 학장)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된다. 그해 10월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으로 유학, 6개월간 메리놀 신학원에서 영어를 배웠고 이듬해 9월 미국 맨해튼가톨릭대에 진학, 교육학을 전공했다. 장 주교도 아버지가 인연을 맺은 메리놀대를 졸업했다.
―재속회에 가입하면 ‘준(準) 사제’로 살아가는 것인가요.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아씨시의 성자(聖子)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복음(福音)적 삶을 따라 그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제로 산다기보다는 프란치스코 성자의 복음에 따라, 어떤 처지에서 살든지 복음정신으로 살려 철저하게 노력하셨어요.”
“하느님을 어떻게 얕봅니까”
―신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까.
“하느님을 어떻게 얕봅니까. 두렵다는 게 어떤 의미로 외경(畏敬-공경하고 두려워함)한다는 뜻이겠지만 만만하게 너, 나 하는 존재가 아니죠. 하느님이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잖아요. 감출 것도 없고…. 제 모자람까지 다 알고 품으시는 자비로운 분이니까,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심판받을까 무서워서 두렵다는 뜻이 아니고….”
―범인(凡人)들은 신 앞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가 두렵죠.
“저의 모자람, 잘못까지 다 알면서 극진히 사랑해 주시고 그분 앞에 요만큼이라도 떳떳해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런 의미로 어려운 것이죠. 두려워서가 아니라.”
―불경스런 질문일 수도 있는데, 신에게 실망한 적은 없습니까.
“실망이요? 실망을 했다면 제 잘못이죠. 제 마음대로 주문을 해 놓고 배달이 안되니 화내는 것이잖아요. 그런 게 어딨어요. 하느님이 자판기인가? 하느님에게 실망한다는 것은 제멋대로 하느님을 그려놓고 화내는 것밖에 안돼요.”
―어떻게 신을 찾나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지요. 김수환 추기경과도 종종 그런 생각을 나누곤 했는데 그분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분은 득도(得道)를 위해 한 아이디어를 붙잡고 확신에 차서 답을 찾아나서지요. 하지만 저는 하나의 ‘물음’으로서 신앙의 길을 찾아나섭니다. 무엇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물음으로 마냥 길을 찾아 떠나는…. 저는 물음으로 사는 편이에요. 답으로 사는 게 아니고.”
―물음 자체가 답을 구하기 위한 과정 아닙니까.
“그렇죠. 하지만 똑 부러지는 답이 어디 있나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우리 생각에 담긴다는 것 자체가 답답한 생각이죠. 제 마음대로,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 속에 쏙 담길 수 있는 존재라면 하느님 자격이 없잖아요. 하하.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작은 분이 아니시잖아요. 어떻게 보면 ‘암흑의 하느님’이기도 하고, 그래서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항상 우리가 찾으면 있어 주시고, 부르면 답하시는 존재라면 좋겠지만,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보면, 오히려 안 그런 게 다행스럽기도 해요. 보일 것 같으면서도 안 보이시고. 계실 것 같으면서도 안 계신, 그러니까 우리가 찾아나서는, 찾아 묻게 되는….”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는 ‘신은 다시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불행이 왜 생깁니까. 불행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답이 없죠. 어떤 의미로든 그 까닭을 모르는 아픔이 진정한 고통이지 않습니까. 까닭을 알고 보람과 의미를 알게 되면, 아파도 괴롭지가 않죠. 그래서 불행은 자신이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장영희 교수님도 고통을 많이 겪었지만 오히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참 나’를 찾으셨고 고통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고요. 그런데 요즘엔 아픔을 자꾸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안 보는 게 편하니까 비켜 가려 하지만 불행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야 하는 게 삶입니다. 외면하는 것은 도피입니다. 오히려 더 허무한 것이죠.”
―이 시대를 두고 ‘신앙의 위기’라고도 하고, ‘교회의 위기’라고도 하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요. 글쎄요.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기도를 하루에 얼마나 합니까.
“너무 적게 합니다. 하하.”
―신과 아이처럼 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면 들어줄 것 같아서요.
“글쎄, 대화라는 것이 하느님을 상대로 말을 주고받는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죠. 어떤 의미로 긴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냥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나, 생긴 대로의 나, 모자라는 나, 하느님께서 귀엽게 보시는 나, 하느님 앞에 그냥 있는 것, 그것이 기도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보채거나 왜 대답을 안 하시냐고 따져 묻는 것이 아니지요.”
―‘빈자(貧者)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지금까지 대중에게 인식돼 온 것과 달리 죽기 전 50년 동안 ‘신의 부재’로 내적 갈등을 겪었다고 합니다.
“네, 젊어서부터 한평생 갈등하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지 못했기에 거기에는 못 미치죠. 사람들은 ‘그분도 그러셨어?’ 하고 놀라는데, 놀랄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야말로 가까이서 하느님을 찾기 위해 애썼고, 그래서 더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합니다. 성녀(聖女)인 소화테레사도 그랬고, 동양의 큰스님도 다 그랬습니다.”
“신앙이란 심연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아”
―신앙 체험이란 ‘수족관에서 큰 바다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고 하던데, 몸소 겪은 신앙의 체험은 무엇인가요.
“이런 비유도 있지요. 어떤 사람이 탄 배가 난파돼 죽기 살기로 나뭇조각을 끌어안고 표류하는데, 그런 심연(深淵)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게 신앙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참 어려운 질문인데…. 사제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드리기 위해 새벽에 깨었는데 문득 하느님이 제 일상(日常) 속에서 구체적으로 저를 품어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멀리서 막연하게 굽어보시는 존재가 아니라 크고 작은 제 일상에서, 모든 사람과 사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품어주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구체적인 일상이라면.
“구약(舊約) 성경의 ‘신명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사람이 자기 자식을 업고 다니듯, 지금까지 모든 길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업고 다니셨다는 겁니다. 아주 구체적인 삶을 통해, 무슨 특별한 시간이나 기도할 때 드러나는 존재라기보다 일상의 모든 일에서 사사건건(事事件件), 아이가 아버지나 어머니의 등에 업히듯 그렇게 우리를 업고 다니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날 불현듯 든 생각인가요?
“네, 특별히 짙게요. 사제로 첫 미사를 드리기 전, 그날 새벽에 그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아주 절박하게 와 닿았습니다. 구체적인 일상, 어저께 보는 것과 같은, 아쉬울 때 물 한잔 주듯, 이런 것을 통해서 존재하셨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 이후에는 느낀 적이 없었나요?
“하하. 그렇게 얘기를 하시면….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 하느님과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범상한 현실 속에서 계십니다.”
―제 딸이 “아빠. 하느님은 어떻게 생겼어?”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 줘야 합니까.
“그것 참 어렵네요.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처럼 생겼다고 말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뜻하지 않은 죽음이나 원하지 않는 사고는 왜 일어납니까. 천주교에서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그때그때 하나하나의 사고나 죽음에서 보면 분명 아픔이지요. 분명한 사실은, 누구도 유한성을 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무한한 무언가가 있다면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얼마든지 엿가락마냥 늘어나니까요.
한 번, 단 한 번 받은 삶을 값지게 살아야 합니다. 그릇으로 얘기하자면, 요만한 종지에 물을 채워도 가득이고, 큰 동이에 채워도 가득이지요. 그릇의 크기, 양만으로 인간의 삶을 따질 수 없고, 그 의미도 우리는 모릅니다. 아무도 죽어본 사람이 없어요. 가끔 ‘사후(死後)세계가 어떻더라’고 증언하는 이가 있지만 진정한 죽음을 체험하지 못했어요. 아무도 체험 안 한 죽음을, 삶을 통해 마무리 짓는 일은 인간사에서 제일 중요한 행위라고 볼 수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연습을 안 하고 당합니다. 그러니까 당황스럽고, 두렵고, 피하고 싶고, 뭔지 몰라 커다란 고통스런 수수께끼로 다가오죠. 하지만 죽음은 삶의 완결이자 완성입니다. 우연하게 죽고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속속들이 의미를 모르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돼요. 다만 생명은 더없이 소중하고 그것보다 소중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위한 도구로 생명을 쓸 수 없으니 한 번 받은 귀한 삶을 단 한 번 잘살아야 합니다.”⊙
사진 : 서경리
교황의 우리말 성명 초안을 잡고, 직접 교황에게 한글을 가르친 이가 바로 장면(張勉) 전 국무총리의 3남(男) 장익(張益·78) 주교다. 1933년 11월생인 그는 서른 살 때 사제(司祭) 서품을 받았다. 경기고 5학년 때 6·25가 터져 학업을 중단하고 당시 미국 대사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도미(渡美), 미국 메리놀대(인문학 학사), 벨기에 루뱅대(철학과 박사과정),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신학과 석사)를 거쳤다. 20대를 해외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며 편력한 뒤에는 4·19, 5·16 등 모국(母國)의 정치 격변으로 귀국하지 못했다. 2공화국 붕괴와 장 총리의 실각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했다.
사제가 된 뒤 귀국해서는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고(故)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비서(1976년에 비서실장이 된다)가 됐고 1978년부터 15년 동안 맏형 장진(張震)과 함께 서강대 강단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당시 로마 그레고리안대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는 바오로 2세의 우리말 미사 집전을 돕고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탄생시켜 한꺼번에 100명이 넘는 성인을, 로마 교황청 밖에서 시성(諡聖)하는 첫 기록을 남길 때 한국 천주교회와 교황청 간 메신저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94년 11월부터 천주교 춘천교구 주교로 착좌(着座)했다. 3월 25일은 교구장으로서 마지막 날이다. 주교가 된 지 꼭 16년 만이다.
추기경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성덕(聖德)과 학식(學識)을 겸비한 장 주교는 춘천교구장에서 물러나고서도 강원도에 머물며 사제가 없는 공소(公所·본당보다 작은 교회단위)에서 미사를 집전할 계획이다. 기자는 장 주교의 삶과 그가 만난 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춘천 효자동 성당으로 향했다.
―춘천교구장이 함흥교구장을 대행하는 자리인데. 함흥엔 가 보셨나요?
장 주교는 여러 번 방북할 정도로 북한과 인연이 남다르다. 1987년 6월 평양에서 개최된 비동맹 정상회의 때 교황청의 옵서버 자격으로, 이듬해 10월에는 교황청 파견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하는 등 바티칸과 북한의 관계 증진에도 크게 공헌했다. 또 2007년 10월에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함께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했다.
“함흥엔 못 가 보고 원산엔 가 봤죠.”
―북한과 인연이 특히 깊다고 하던데요.
“인연이라기보다는 심부름을 좀 했죠.”
장 주교는 1997년부터 춘천교구 차원에서 대북지원사업인 ‘한솥밥 한식구’ 운동을 펴왔고 남북적십자사가 합의한 ‘지정기탁제’를 활용해 교회 내에서 처음으로 ‘북(北) 강원도(휴전선 북쪽 강원도)’를 지원해 왔다. 그 덕분에 ‘DMZ 평화상’(강원도 제정)을 수상했다.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가 겁나”
―통일이 언제 될까요.
“허허, 그걸 누가 알아요. 그렇게 물으시면 답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북한에도 예수님이 계시겠죠.
“허허. 그거야… 그렇죠. 북쪽 땅에 천주교의 옛 터전을 되찾겠다거나 천주교 세(勢)를 확장해야겠다는 게 목표가 아니에요.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모든 것을,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북한과 북한 사람을) 품 안에 안으려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외국에서는 북한을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 부자를 믿는 종교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있잖습니까.
“체제 유지를 위해 그렇게 몰고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북한) 체제나 저들이 명분으로 내세우는 얘기하고, 북한 주민들의 삶과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일성 부자를 신처럼 우상화한다는 점은 어떻게 보세요.
“겁나요, 솔직히 말해 겁이 나요. 그렇게 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평생 사제의 길을 걸었는데, 세례를 베푼 이들 중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까.
“누구 하나를 떠올리라고 하면 쉽지는 않은데… 이름 없는 분 중에서 나름 참다운 삶을 사시고 고통받던 중에 어떻게 어떻게 세례를 받은 분들이 기억에 남죠.”
―문인(文人) 중에 한운사(韓雲史) 선생에게 영세를 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렇기는 한데, 그분을 잘 몰라요. 문인 중에선 구상(具常) 선생을 존경했지요. 끔찍이 저를 생각해 주시고. 뭐라고 할까, 마음이 통했다고 할까?”
―시인 김광균(金光均) 선생에게도 직접 세례를 줬다던데, 기억 나십니까.
“그 어른도 구상 선생과 친분이 남다른 사이였어요. 저와 처음 만날 당시 와병(臥病) 중이셨는데 구상 선생이 가끔 찾아뵈라 하셔서 여러 차례 뵙고 성북동 성당에서 영세를 주었지요. 그 광경을 보고 다른 문인들이 많이 놀랐습니다. 쉽사리 영세받으실 분이 아니셨기 때문인가 봐요. 그분은 문학은 물론, 현대사의 시대적 갈등이라든지 인간의 삶과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하셨고 병고(病苦) 중에도 책을 얼마나 많이 읽으셨는지 몰라요. 오랜 사색 끝에 영세를 받겠다고 하셔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으셨지요.”
―그때 구상 선생이 대부(代父) 역할을 하셨다지요?
“네. 영세를 받으실 때 후배 문인들이 많이들 오셨지요.”
―그 계기로 후배 문인들도 천주교를 믿게 됐나요?
“꼭 그 일이 계기가 됐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다른 문인들도 신앙을 찾으려는 이가 있으니 가까이 살펴보라’고 구상 선생이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말로 미사 집전 희망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어 스승으로 세계언론에 오를 만큼 화제가 됐던 장 주교는 당시 로마에 유학생 신분으로 체류 중이었다. 103위 한국순교자 시성과 관련, ‘바티칸 연락관’으로 임명되면서 교황이 시성식 대(大) 미사를 우리말로 집전하게끔 직접 한국어 교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인연으로 200주년 행사 때 교황을 수행해 방한한 그는 본의 아니게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1980년 당시 서강대 교수 시절 아닌가요? 어떤 계기로 로마에 가셨나요.
“‘광주 5·18’이 일어나고 위수령이 내려지는 등 도저히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로마에 가게 됐지요. 때마침 교황께서 방한(訪韓)을 준비하시는데, 바티칸에 한국 분이 없으셨어요. 한마디로 연락책이 필요했던 거지요. 우리말 미사집전이나 시성문제라든지…. 그때는 우리 사회가 편하지 않았어요. 교황께서는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가서는 어디를 방문할까,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또 우리말로 (미사집전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지요.”
―메신저 역할을 하신 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부탁 때문인가요.
“한국과 바티칸 양쪽에서 다 받았죠. 누군가 연락병이 필요했기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연락하는, 뭐랄까 창구 노릇을 해달라고 원해서 시작하게 됐죠.”
천주교가 한국에 닻을 내린 이후 역대 교황들은 한국 교회에 각별한 사랑을 보여줬다. 교황 비오 6세(1775~1799)는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한 조선(朝鮮) 교회 소식을 듣고 큰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는 교황청 사상 최초로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였다.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여의도 광장에서 김대건 신부와 정하상 신학생 등 순교한 103인을 성인으로 시성했다. 교황은 4박5일 체류기간 동안,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 묘소를 참배해 위로했고 소록도를 찾아가 한센병 환자와도 만났다.
―우리말 미사 전례는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나요.
“교황께서 먼저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말이 그렇지 방한 기간에 20차례 연설을 하셨는데 전부 우리말로 하시는 게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질 않습니까. 일단 우리말의 소리부터 아셔야겠다 싶어, 한글을 설명해 드렸는데 즉시 알아들으시더라고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한글이 귀에 익었다면 모를까 외국인이 써놓은 대로 소리 내라고 하면 그렇게 되질 않아요. 동화현상(말소리가 서로 이어질 때, 어느 한쪽이나 양쪽이 영향을 받아 비슷하거나 같은 소리로 바뀌는 현상) 같은 게 너무 많고 장단, 억양표시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폴란드 출신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조국 폴란드가 독일 치하에서 독일어를 강요받았던 아픔을 떠올리며 한국어 공부에 더욱 공을 들였다고 한다.
“한글 공부가 쉽사리 될 일은 아니잖아요. 좋은 교재가 없을까 해서 찾았더니, 외국인이 우리말을 배우려고 노력해 온 언어표기체계가 11개쯤 있더군요. 다 일장일단이 있고, 개중에서 제일 괜찮은 것을 골라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을 곁들여 설명해 드렸지요. 교황께서 ‘하다가 포기하더라도 하는 데까지 해 보겠다’고 자꾸 그러셔서 제가 힘들었습니다. ‘모처럼 한국까지 가서 남의 나라 말로 하면 알아듣겠느냐’며 걱정을 많이 하셨지요. 또 ‘소리로만 배우기보다 실제로 해 봐야 하지 않느냐’면서 17차례나 우리말로 미사를 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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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총리가 동성상업학교 교장 재직시인 1940년 3월 24일 부활절을 맞아 3남 장익의 첫 영성체를 기념해 찍은 가족사진. 가운데 휘장을 매고 꽃을 꽂고 선 아이가 장익 주교다. |
“103인을 성인으로 시성하는 것은 어떤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1925년에 한국순교자 79인을 시복하지 않았습니까. 19세기 말부터 이미 조사와 검토가 진행됐어요. 거기다 나머지 분들을 합쳐 103위 시성을 하게 된 겁니다. 시복·시성(諡福·諡聖) 담당부서가 있어서 거기에서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최종 시성식을 하게 되지만, 누구를 성인으로 만드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이 성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교회가 알아 모시는 것이죠. 생으로 성인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103위 한국순교자 시성식은 여러 가지 의미로 파격이었고, 국외에서 시성식을 한 사례가 없었어요. 아주, 아주 파격적이었어요. 대부분 로마에서 이뤄졌으니까요.”
시복·시성이란 천주교에서 순교했거나 특별히 덕행이 뛰어났던 이를 죽은 후에 복자(福者)·성인(聖人 혹은 성녀)으로 추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자로 추대하는 것을 시복, 성인으로 추대하는 것을 시성이라고 부른다.
―바오로 2세는 한국을 잘 아시던가요.
“네. 굉장히 깊이.”
―어떻게 아셨을까요.
“아시다시피 그분은 나치 시대 폴란드에서 고교를 다니셨고, 나중에는 구(舊) 소련 치하에서 정치·사회·사상적 갈등이 굉장했어요. 그런 역사적 아픔이 있으셨기에 우리가 일본 치하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을 내면으로부터 이해가 있으셨어요. 더더구나 그래서 우리말로 말씀하시겠다고 하셨지요. 한국에 오셔서 20차례 걸쳐 연설하실 때 그때마다 대상이 다르지 않습니까. 오시자마자 제일 먼저 광주로 달려갔는데 당시 정부로선 도저히 소화할 수 없었고, 교황께서 어느 자리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가 민감한 사안이었어요. 노동자와 시장 상인, 지성인도 만나셨는데 그들과 나누는 대화 내용도 서로 달랐지요. 그래서 배경자료를 잔뜩 만들어 드렸어요. 교황께서는 당시 한국 대학생의 생각이랄까, 정신문화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하셨고 소록도 한센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처지가 어떤지도 궁금해하셨어요. 전부 배경자료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장면 총리, 사제 결심 듣고 “시작은 쉽지만 잘 마쳐야 한다”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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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미대사 발령 직후인 1949년초 ‘10평짜리 임시 대사관’ 사무실에서 집무하는 장면 총리. |
장 주교의 아버지 장면 총리는 1951년 5월 바티칸 교황청 훈장을 받을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정치가로서보다 성직자가 더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장 총리의 할아버지 장기빈과 할머니 황 루시아 모두 천주교 신자였고 처가 역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장 총리의 결혼식도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이뤄졌다.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장 총리는 ‘금테 모자를 쓰고 칼을 찬’ 관리가 되기 싫어 경성 기독교청년회(現 YMCA) 영어학교에 진학했다. 그 시절, 용산 천주교신학교의 강사로도 활동했는데 이 신학교에서 장 총리에게 영어를 배운 세 살 아래 학생이 한국인 최초의 주교이자 후일 대주교가 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였다.
―가톨릭과의 인연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네요.
“저야 뭐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영세를 받았으니까요.”
―언제부터 신앙을 가졌나요.
“할아버지 때부터 믿었는데, 할아버지는 10세 때 영세를 받았고 할머니 쪽도 대원군 박해 시절 영세를 받으셨어요. 양쪽 집안이 다 신자였던 것이지요.”
―스스로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습니까.
“우리 집안에서는 부모님이 아이들 보고 ‘어느 학교 가라’ ‘무슨 공부 해라’는 잔소리를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어요. ‘뭘 해도 좋다’고 내버려두는 겁니다. ‘잘만 해라. 잘해도 네 탓, 잘못해도 네 탓’이라고 하셨어요, 부모님이 남의 자식 키우듯, 의존심이 생기지 못하도록 키우셨어요. 7남매의 학교에 한 번도 가시지 않았어요. 성적이 어떻다고 입 밖에 내신 적도 없지요.”
―한국전쟁은 몇 살 때 경험했나요.
“경기중 5학년 때 전쟁이 터져 6학년들은 16세여서 죄다 군에 가고, 5학년 중에서도 생일이 빠른 친구는 참전(參戰)을 했어요. 전쟁 탓에 졸업을 못한 동창이 많습니다. 저도 경기고 100주년 때 명예졸업장을 받았어요. 예순이 넘어 고교 졸업을 한 셈이지요.”
―그때 참전은 안 했습니까.
“우리 반 친구 중에서도 전사자가 매우 많았어요. 그때 끌려가 6주 훈련받고 최전방 가서 많이 죽었어요. 저는 입대하려 해도 나이가 안됐죠. 더더구나 생일이 늦어서.”
―전쟁 참상을 직접 목격했겠습니다.
“대구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지요. 1950년 9월에 서울이 수복되면서 화물차 꼭대기에 매달려 서울에 왔어요. 실제 전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사방 도로변에 시체가 널려 있었고 정말로 끔찍했어요.”
―그게 사제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나요?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사제가 될까 말까 했었지요. 한국전쟁이 계기가 됐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긴 어렵고요,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뒤 장 총리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시작은 쉽지만 잘 마쳐야 한다’고 하셨어요. 겉으로 내색은 안 하셨지만,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중 내가 미국 유학 가는 것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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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6월 4일 오전 10시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열린 장면 총리 30주기 추도 미사를 마치고 모인 인사들. 오른쪽부터 장 총리 4남 장순, 변호사 선우종원, 3남 장익 주교. |
“전쟁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았잖아요. 그때 아버지가 미국 대사로 계셨는데 한 살 위 형이랑 두 살 아래 동생이랑 셋이서 학교에 다녔어요. 어머니는 위중하셔서 미국으로 치료받으러 가셨는데 집에 대포알이 날아들던 상황이었어요. 우리 뒤를 봐주시던 외삼촌이 인민군에 끌려가 우리 형제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됐지요. 하는 수 없이 교복을 입고 아버지가 계시던 미국으로 갔지요. 처음엔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게네들 (미국에) 보내면 안된다’고 못 가게 하셨어요. ‘전쟁통에 미 대사가 자기 자식들 데려가면 안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러다 서울이 수복되고 허락하셨지요.”
그렇게 한국을 떠나 사제가 돼 귀국하기까지 미국은 물론 이탈리아·벨기에·오스트리아 등 태평양과 구주(歐洲) 여러 나라를 돌며 지적 편력을 했다. 마흔이 넘어서는 한자를 배우겠다고 국립 타이완대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라틴어와 희랍어를 포함해 10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확인차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누가 시작한 말이에요? 10개 국어는 무슨…. 어려서 외국에 나갔으니까 여기저기 나라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게 됐고 나중에 정치 파동을 겪으며 귀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 나라 저 나라 전전하며 공부를 많이 하게 됐어요. 공부하려면 말부터 배워야 하지 않나요. 말 안 배우면 낙제하고 쫓겨나니까 그렇게 주워들은 겁니다.”
―타이완에는 언제 갔습니까.
“1970년대에 갔죠. 그때 여러 해 동안 휴가를 못 갔는데, 김수환 추기경에게 ‘밀린 휴가 한꺼번에 주세요’ 그랬죠. 그랬더니 ‘어딜 가려고?’ 그래요. ‘어려서 제대로 못 배운 한문을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네 나이에 지금 가서 뭐 하려고’ 그러셨는데 그때 제 나이가 마흔이었거든요. 타이완 공항에 내리니 아무 아는 사람도 없고 오라는 사람도, 가라는 사람도 없고…. 늘 혼자서 그렇게 다녔어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한문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귀국할 즈음, 스승에게 ‘수박 겉핥기란 말이 있듯 중국 수박이 하도 커서 겉만 핥아도 혓바닥이 다 닳아 집에 간다’고 했어요. 하하.”
이런 일도 있었다. 1989년 서울 세계 성체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 주교는 당시 까마라 대주교와 서독 슐렘바하 주교가 ‘세계 평화와 교회’를 주제로 강연할 때 독(獨)-한(韓)-영(英)-불(佛) 순으로 4개 국어를 메모 없이 연이어 동시통역했다.
―외국어 잘하는 비결이 따로 있나요.
“없어요. 세 살 먹은 아이 못하는 말 없잖아요. 어른 가지고 놀잖아요. 말이라는 게 사람의 기능 중에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 하느님이 그것 하나는 공통으로 안배하신 것 같아요. 음치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리가 안 나오잖아요. 팔다리 따로 노는 애들, 운동신경 때문에 안되잖아요. 수학 공부가 버거운 애들도 많지만 말 못하는 사람은 구경을 못했어요. 학교에서 꼴찌 하는 애들도 말은 곧잘 합니다.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도 하는 말이 미친 소리지 문장과 발음도 멀쩡합니다. 그런데 외국어다 하니까, 얼어 가지고 장벽을 느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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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가운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 |
아버지는 정치인이 아니라 신앙인
아들 눈에 비친 장면 총리는 어떤 사람일까. 장 총리가 정치일선에 나선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 타의적(他意的) 요인이 많았다는 것이 장 주교의 생각이다. 그는 “장 총리가 1946년부터 ‘남조선 국민대표 민주의원’,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 ‘제헌 국회의원’ 등 정치일선에 나서게 된 것은 평소 사회·문화적으로 두터운 신뢰를 받는 천주교 신자인 까닭에 자의보다는 다분히 주교의 명(命) 등 타의에 의해 교회뿐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요청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꾸 외교관이나 정치인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아버지는 뭐랄까, 신앙인이셨고 그 다음에 교육가셨어요. 젊은이 교육하는 데 온 마음을 쏟으셨어요. 정치는 우연히 하게 된 것이지 정치적 야망은 처음부터 없으셨어요. 철저한 신앙인이었지요. 젊은 시절, 미국에서 고학하실 때 ‘재속(在俗)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셨지요. 1936년인가 37년인가, 국내 처음으로 재속 프란치스코 제1기로 서원하셨을 때 어머니, 할아버지, 작은할머니까지 온 집안이 재속회에 가입했어요.”
그의 말처럼 장 총리는 독실한 신앙인이자 교육자다. 1920년 3월 경성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를 졸업한 장면 총리는 미국 유학을 꿈꿨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메리놀 선교회의 후원으로 장 총리의 동생 장발(張勃·초대 서울대 미대 학장)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게 된다. 그해 10월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으로 유학, 6개월간 메리놀 신학원에서 영어를 배웠고 이듬해 9월 미국 맨해튼가톨릭대에 진학, 교육학을 전공했다. 장 주교도 아버지가 인연을 맺은 메리놀대를 졸업했다.
―재속회에 가입하면 ‘준(準) 사제’로 살아가는 것인가요.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아씨시의 성자(聖子)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복음(福音)적 삶을 따라 그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제로 산다기보다는 프란치스코 성자의 복음에 따라, 어떤 처지에서 살든지 복음정신으로 살려 철저하게 노력하셨어요.”
“하느님을 어떻게 얕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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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영성체 의식을 하고 있다. |
“하느님을 어떻게 얕봅니까. 두렵다는 게 어떤 의미로 외경(畏敬-공경하고 두려워함)한다는 뜻이겠지만 만만하게 너, 나 하는 존재가 아니죠. 하느님이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잖아요. 감출 것도 없고…. 제 모자람까지 다 알고 품으시는 자비로운 분이니까,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심판받을까 무서워서 두렵다는 뜻이 아니고….”
―범인(凡人)들은 신 앞에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가 두렵죠.
“저의 모자람, 잘못까지 다 알면서 극진히 사랑해 주시고 그분 앞에 요만큼이라도 떳떳해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생기잖아요. 그런 의미로 어려운 것이죠. 두려워서가 아니라.”
―불경스런 질문일 수도 있는데, 신에게 실망한 적은 없습니까.
“실망이요? 실망을 했다면 제 잘못이죠. 제 마음대로 주문을 해 놓고 배달이 안되니 화내는 것이잖아요. 그런 게 어딨어요. 하느님이 자판기인가? 하느님에게 실망한다는 것은 제멋대로 하느님을 그려놓고 화내는 것밖에 안돼요.”
―어떻게 신을 찾나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지요. 김수환 추기경과도 종종 그런 생각을 나누곤 했는데 그분과 어떤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분은 득도(得道)를 위해 한 아이디어를 붙잡고 확신에 차서 답을 찾아나서지요. 하지만 저는 하나의 ‘물음’으로서 신앙의 길을 찾아나섭니다. 무엇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물음으로 마냥 길을 찾아 떠나는…. 저는 물음으로 사는 편이에요. 답으로 사는 게 아니고.”
―물음 자체가 답을 구하기 위한 과정 아닙니까.
“그렇죠. 하지만 똑 부러지는 답이 어디 있나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우리 생각에 담긴다는 것 자체가 답답한 생각이죠. 제 마음대로,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 속에 쏙 담길 수 있는 존재라면 하느님 자격이 없잖아요. 하하. 자격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작은 분이 아니시잖아요. 어떻게 보면 ‘암흑의 하느님’이기도 하고, 그래서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항상 우리가 찾으면 있어 주시고, 부르면 답하시는 존재라면 좋겠지만,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보면, 오히려 안 그런 게 다행스럽기도 해요. 보일 것 같으면서도 안 보이시고. 계실 것 같으면서도 안 계신, 그러니까 우리가 찾아나서는, 찾아 묻게 되는….”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는 ‘신은 다시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인간에게 불행이 왜 생깁니까. 불행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답이 없죠. 어떤 의미로든 그 까닭을 모르는 아픔이 진정한 고통이지 않습니까. 까닭을 알고 보람과 의미를 알게 되면, 아파도 괴롭지가 않죠. 그래서 불행은 자신이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질 않습니까. 장영희 교수님도 고통을 많이 겪었지만 오히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참 나’를 찾으셨고 고통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으셨던 것이고요. 그런데 요즘엔 아픔을 자꾸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안 보는 게 편하니까 비켜 가려 하지만 불행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야 하는 게 삶입니다. 외면하는 것은 도피입니다. 오히려 더 허무한 것이죠.”
―이 시대를 두고 ‘신앙의 위기’라고도 하고, ‘교회의 위기’라고도 하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요. 글쎄요. 어떤 의미로 말하는지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기도를 하루에 얼마나 합니까.
“너무 적게 합니다. 하하.”
―신과 아이처럼 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면 들어줄 것 같아서요.
“글쎄, 대화라는 것이 하느님을 상대로 말을 주고받는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죠. 어떤 의미로 긴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냥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나, 생긴 대로의 나, 모자라는 나, 하느님께서 귀엽게 보시는 나, 하느님 앞에 그냥 있는 것, 그것이 기도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보채거나 왜 대답을 안 하시냐고 따져 묻는 것이 아니지요.”
―‘빈자(貧者)의 성녀’ 테레사 수녀가 지금까지 대중에게 인식돼 온 것과 달리 죽기 전 50년 동안 ‘신의 부재’로 내적 갈등을 겪었다고 합니다.
“네, 젊어서부터 한평생 갈등하셨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지 못했기에 거기에는 못 미치죠. 사람들은 ‘그분도 그러셨어?’ 하고 놀라는데, 놀랄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야말로 가까이서 하느님을 찾기 위해 애썼고, 그래서 더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합니다. 성녀(聖女)인 소화테레사도 그랬고, 동양의 큰스님도 다 그랬습니다.”
“신앙이란 심연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것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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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수환 추기경이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끝난 후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고 있다. 오른쪽이 장익 주교. |
“이런 비유도 있지요. 어떤 사람이 탄 배가 난파돼 죽기 살기로 나뭇조각을 끌어안고 표류하는데, 그런 심연(深淵)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게 신앙이 아니겠느냐는 것이지요. 참 어려운 질문인데…. 사제 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드리기 위해 새벽에 깨었는데 문득 하느님이 제 일상(日常) 속에서 구체적으로 저를 품어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멀리서 막연하게 굽어보시는 존재가 아니라 크고 작은 제 일상에서, 모든 사람과 사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품어주셨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구체적인 일상이라면.
“구약(舊約) 성경의 ‘신명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사람이 자기 자식을 업고 다니듯, 지금까지 모든 길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업고 다니셨다는 겁니다. 아주 구체적인 삶을 통해, 무슨 특별한 시간이나 기도할 때 드러나는 존재라기보다 일상의 모든 일에서 사사건건(事事件件), 아이가 아버지나 어머니의 등에 업히듯 그렇게 우리를 업고 다니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날 불현듯 든 생각인가요?
“네, 특별히 짙게요. 사제로 첫 미사를 드리기 전, 그날 새벽에 그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아주 절박하게 와 닿았습니다. 구체적인 일상, 어저께 보는 것과 같은, 아쉬울 때 물 한잔 주듯, 이런 것을 통해서 존재하셨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 이후에는 느낀 적이 없었나요?
“하하. 그렇게 얘기를 하시면…. 일상적인 현실 속에서 하느님과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범상한 현실 속에서 계십니다.”
―제 딸이 “아빠. 하느님은 어떻게 생겼어?”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 줘야 합니까.
“그것 참 어렵네요.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처럼 생겼다고 말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뜻하지 않은 죽음이나 원하지 않는 사고는 왜 일어납니까. 천주교에서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그때그때 하나하나의 사고나 죽음에서 보면 분명 아픔이지요. 분명한 사실은, 누구도 유한성을 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무한한 무언가가 있다면 삶이 무의미해집니다. 얼마든지 엿가락마냥 늘어나니까요.
한 번, 단 한 번 받은 삶을 값지게 살아야 합니다. 그릇으로 얘기하자면, 요만한 종지에 물을 채워도 가득이고, 큰 동이에 채워도 가득이지요. 그릇의 크기, 양만으로 인간의 삶을 따질 수 없고, 그 의미도 우리는 모릅니다. 아무도 죽어본 사람이 없어요. 가끔 ‘사후(死後)세계가 어떻더라’고 증언하는 이가 있지만 진정한 죽음을 체험하지 못했어요. 아무도 체험 안 한 죽음을, 삶을 통해 마무리 짓는 일은 인간사에서 제일 중요한 행위라고 볼 수 있는데, 사람은 누구나 연습을 안 하고 당합니다. 그러니까 당황스럽고, 두렵고, 피하고 싶고, 뭔지 몰라 커다란 고통스런 수수께끼로 다가오죠. 하지만 죽음은 삶의 완결이자 완성입니다. 우연하게 죽고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속속들이 의미를 모르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돼요. 다만 생명은 더없이 소중하고 그것보다 소중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위한 도구로 생명을 쓸 수 없으니 한 번 받은 귀한 삶을 단 한 번 잘살아야 합니다.”⊙
사진 : 서경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