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인터뷰] 趙基心의 파프리카 정복기 : 월간조선

파프리카(Paprika·단 고추)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보라, 아이보리 등 총천연색의 야채다. 선명한 색깔만큼이나 영양소도 풍부해 ‘비타민의 보고’ ‘채소의 보석’으로 불린다.

유럽인들이 즐겨 먹던 이 야채가 어느덧 우리 식탁에서도 건강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샐러드나 파스타는 물론 다양한 볶음 요리에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가는 것이 파프리카다. 식이섬유가 풍부하면서 열량이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가 높다.

파프리카는 백화점이나 마트는 물론 재래시장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름 때문에 수입산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대부분 국내산이다. 뿐만 아니라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농가소득원이다. 일본 파프리카 시장의 70%를 한국산이 장악하고 있다.

파프리카는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다. 국내에서는 유리온실이나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고 있는데, 연간 총 생산량이 3만3000톤(2008년 기준)에 이른다. 이 중 1만7000여 톤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양의 파프리카를 수출하고 있는 업체는 전북 김제에 있는 (주)농산무역. 이 회사는 파프리카를 생산하는 영농법인 및 시설농가 42개소(농가 95호)가 공동 출자한 농산물 유통 회사다. 1999년 만들어 현재 46만4268㎡(14만여 평)의 유리온실에서 생산하는 연간 7000톤의 파프리카를 상품화하고 있으며, 이 중 4000톤을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 나머지 물량은 국내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 공급하고 있다. 생산에서부터 선별과 포장은 물론 유통까지 농업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회사가 파프리카로 올리는 연매출이 250억원이다.

농산무역은 농업 전문가들이 우리 농업의 미래를 논할 때 ‘규모화와 기업농 육성’의 성공 모델로 자주 언급되는 곳이다. 이 회사의 성공 비결은 뭘까.

일본에서 파프리카 처음 보고 感 잡아

회사 설립을 주도하고 안정적인 판로까지 개척, ‘한국 파프리카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조기심(趙基心) 대표를 김제시 순동에 있는 농산무역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 기자는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주먹만 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파프리카가 흙도 없이 양액(養液)만 먹고 2m 넘게 자란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한 번은 디자인 회사를 방불케 하는 사무실 인테리어에 놀랐다. 조 대표는 “작물이나 사람이나 환경이 좋아야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무실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홍보 책자와 파워포인트 자료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다. 조 대표는 “젊은 시절 패션업에 종사해 디자인 감각이 좀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목소리가 크고 에너지가 넘쳤다. 승부 근성도 대단해 보였다.

조기심 대표의 전직(前職)은 자신이 밝힌 대로 패션 사업가다. 그는 초등학교 재학 중 서울로 유학, 무학여고를 졸업하고 패션 업계에 뛰어들었다. 서울 남대문시장에 가게를 두고 공장까지 직영하며 제법 크게 사업을 벌였다. 해외 진출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시장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 파프리카였다. 야채이면서 과일처럼 달고 아삭아삭한 파프리카가 당시 일본에서는 개당 4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비즈니스 감각이 남달랐던 그는 ‘일본 파프리카 시장이 제법 크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뿐, 패션 사업가인 자신이 파프리카와 인연을 맺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당시 저는 패션 사업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고, 농사에 문외한(門外漢)이었기 때문에 파프리카에 대한 생각을 금방 잊어버렸어요. 그러고 몇 년이 흘렀는데, 남동생이 농사를 짓겠다며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1ha(3000평)의 임야에 유리온실을 지었지 뭐예요. 당시 시설 투자비가 평당 50만원으로 총 15억원이나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만큼의 돈을 들여 수익을 낼 농작물은 없어 보였어요. 동생도 걱정이 됐던지 시설 투자 대비 수익성 있는 작목이 뭔지 고심하더군요.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파프리카였습니다.”

국내 농업에 유리온실이 도입된 것은 1994년으로,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으로 세계무역기구인 WTO의 전신)의 다자간 무역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를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국내 농가들이 직격탄을 맞게 될 것에 대비, 선진국형 시설원예를 도입하기 위해 총 2조~3조원 가량의 자금을 지원했다. 조 대표의 남동생도 이때 유리온실을 지었다.

농산무역 산하 참샘영농조합 법인이 운영하는 파프리카 농장. 조기심 대표가 동생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업자 농간 막으려 일본에 직거래 제안

유도대(현 용인대)를 졸업한 동생 역시 농사에는 문외한이라 걱정이 많았다. 조 대표는 “당시 정부가 재배 작목에 대한 교육도 없이 유리온실 자금을 지원해 대부분의 농업인들이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국내 유리온실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작목은 오이와 토마토밖에 없었어요. 이 채소들은 고수익 작목도 아니거니와 기존 비닐하우스에서 많이 재배하고 있어 경쟁력이 떨어졌죠. 그래서 동생에게 일본 파프리카 시장을 한번 조사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조 대표는 애초부터 이 일에는 발을 들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동생이 판로(販路)를 찾지 못해 첫 수확물의 90%를 버려야 할 상황인 데다 나머지 10%도 수출업자들의 농간으로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조 대표의 이야기다.

“국내 수출업자들은 물건을 100원에 가져간 후 하자가 있어 수입처에서 50원밖에 받지 못했다는 식으로 농간을 부렸어요. 원가 120원짜리 물건을 100원에 가져간 것도 모자라 반 토막을 내서 주니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싶었습니다. 일본 수입처를 만나 직거래를 트는 방법밖에 답이 없다는 생각에 현지로 날아갔죠.”

당시 일본 수입처는 이토추(伊藤忠) 상사였다. 어렵사리 수입 담당자를 만나 품질에 대한 만족도를 물으니 최상급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수출업자가 농간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 대표는 이토추 상사 측에 단도직입적으로 “직거래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노’였다. 한국 농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토추 상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일본 수입처는 한국 농산물의 경우 생산자가 아니라 수출업자들이 잘 관리해서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들은 수출업자들이 관리하지 않으면 한국 농가는 인분(人糞)으로 농산물을 키우는 등 매우 비위생적으로 관리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일본 수입처들의 한국 농가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다.

국내 농산물 중 파프리카보다 먼저 일본에 진출한 품목이 토마토다. 조 대표는 시간을 내 일본 토마토 시장을 둘러봤다. 한국산 미니 토마토가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가격도 품질도 제각각이었다. 게다가 수출업자들이 돈을 쫓아 거래처를 수없이 바꾸는 바람에 한국산 토마토는 시장을 교란시키는 원흉이 돼 있었다. 한국 농가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리 없었다.

시장을 둘러본 후 그는 ‘물건을 썩히는 한이 있어도 더 이상 수출업자에게 의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때부터 직거래를 조건으로 다른 수입처들을 찾아다녔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거절 이유는 한결같았다. 한국 농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 20시간 두 달간 일본인 입맛 연구

출하할 파프리카를 수확하고 있는 모습. 파프리카는 연중 내내 다섯 차례에 걸쳐 수확한다.

파프리카는 파종(播種) 후 120일째부터 연 다섯 차례에 걸쳐 수확한다. 그가 일본에서 시장 조사를 하는 동안에도 농장에서는 파프리카를 계속 수확했다. 수출업자와 거래를 끊은 이후 수확량의 대부분을 폐기처분해 손해가 엄청났다. 그래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에서 직거래할 수입처를 찾는 한편 시장 조사를 계속했어요. 새벽 4시에 나가 밤 12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두 달 동안 지속했죠. 그 결과 일본인들의 입맛과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니 직거래에 대한 자신감이 붙더군요. 하지만 수입처들은 중개업자 없는 거래를 여전히 꺼렸어요. ‘한국 농민들도 돈이 아닌 신의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통사정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불신이 깊었어요.”

결국 판로를 찾지 못한 채 귀국했는데, 얼마 후 세계 최대 다국적 청과 업체인 돌(dole)재팬에서 전화가 왔다. 왜 물건을 공급하지 않느냐는 내용이었다. 거래한 적이 없는 곳이라 조 대표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 대표에게 돌재팬 측은 “한동안 굉장히 좋은 물건이 들어왔는데 갑자기 끊겨서 알아보니 당신네 농장에서 생산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조 대표는 그때서야 중간 수출업자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파프리카가 이토추 상사를 거쳐 실제 판매망을 갖고 있는 돌재팬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돌재팬은 생산 농장을 찾기 위해 한국인 매니저까지 채용했으니 물건을 공급해 달라고 했다. 조 대표는 이때가 아니면 유통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 한국인 매니저가 농장을 직접 방문했다. 그는 경위를 얘기했고, 직거래가 아니면 물건을 주지 않겠다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틀 후 직거래 계약이 성사됐다.

“돌재팬과 직거래를 튼 지 얼마 안되어 어떻게 알았는지 수출 중개업자가 찾아왔어요. 돌재팬보다 더 좋은 값에 팔아줄 테니 물건을 달라고 하더군요. 기가 막혀서 마시던 물을 그 사람 얼굴에 끼얹어 버렸습니다. 그러곤 ‘정직과 신뢰가 없으면 기업은 망한다. 나는 아주 작은 영농조합을 가지고 있지만 농업의 먼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돈 몇 푼에 신의를 팔고 싶지 않다’고 쏘아붙였죠. 속이 다 후련하더군요.”

일본 현지에서 철저히 시장 조사를 한 터라 조 대표는 품질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썼다. 그러자 처음 직거래를 틀 때만 해도 반신반의(半信半疑)했던 돌재팬도 그를 믿게 됐다. 한국에 IMF가 터져 토마토와 오이, 화훼 농가들이 부도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돌재팬은 그에게 계속 공급량을 늘려 달라고 요청했다. 돈이 없어서 온실을 더 지을 수 없다고 하자 아무 조건 없이 통장에 5억원을 넣어 주기도 했다.

“다른 농장들은 IMF 때문에 나자빠지는데도 우리는 온실을 늘려 갔어요. 환율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죠. 1ha에서 연 14억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였으니까요. 순수익만 10억원이었으니 엄청났죠.”

‘趙基心’ 담보로 일본서 3억 엔 빌려

다국적 청과 기업 ‘Dole’에 공급하기 위해 농산무역 내 선별장에서 직원들이 작업하고 있다. 농산무역은 선별 자동화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를 지켜본 주변 장미 농가들도 파프리카 재배 쪽으로 작목 전환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화훼에서 채소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1ha당 5억~6억원의 시설비를 추가 부담해야 해 엄두를 못 냈다. 이들 화훼 농가들은 IMF 직격탄을 맞아 부도 직전이라 땡전 한 푼 없었고, 대출 창구인 농협도 대출금을 회수하려 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너무 안타까워 돌재팬에 도움을 청했다”고 말했다.

“돌재팬은 계속해서 공급량을 늘려 달라고 했어요. 주변 농가들이 무너져 가는 마당에 저희 배만 채울 수 없어서 돌재팬 측에 돈을 좀 더 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떤 재산이나 배경이 아닌 인간 조기심을 담보로 빌려준다며 3억 엔을 통장에 넣어 주더군요. 이 돈을 7개 영농조합 법인에 각각 1억~5억원씩 무담보로 빌려줬어요. 또 연봉 2억원을 주고 채용한 네덜란드인 파프리카 기술자를 법인마다 데리고 다니며 무상으로 기술 전수를 받게 했습니다.”

이들 7개 법인이 생산한 파프리카 역시 돌재팬에 공급했다. 그런데 돌재팬 측에서 ‘이들이 공급한 제품에 하자가 있다’며 그에게 계속 컴플레인을 걸었다. 알아보니 품질 관리에 차이가 있어 돌이 원하는 수준을 못 맞추고 있었다. 돌재팬에서 그를 믿고 거금을 빌려준 만큼 모든 문제의 책임은 그가 짊어져야 했다. 그는 “2년 동안 계속된 품질 컴플레인으로 불면증이 생길 만큼 힘들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틈나는 대로 해당 농가에 품질 관리 노하우를 전수하고, 주의를 주는데도 컴플레인은 끊이지 않았어요.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인 저로서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고민한 끝에 수출 창구를 단일화하는 방법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죠.”

그렇게 해서 1999년 당시 12개 영농조합 법인이 주주로 참여한 (주)농산무역이 출범했다. 그는 “농장을 경영하며 농업 분야야말로 투명하지 않으면 조직이 와해되기 쉽다는 사실을 깨달아 생산자들이 공동출자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농산무역 창립 이듬해인 2000년에는 크기와 색깔 등 품질의 균일화를 위해 7억원을 들여 1652㎡(500평) 규모의 공동선별장을 설치했다. 몇 년 후 25억원을 들여 선별기를 업그레이드하고, 1652㎡(500평) 규모의 저온 창고를 지었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는 46억원을 투입해 선별자동화 시스템을 증축하고 있었다. 이 중 32억원은 지자체 사업으로 선정돼 정부가 보조해 주고, 나머지 14억원은 농산무역이 부담한다고 한다.

주위에서는 “미치지 않고서야 농업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느냐”고 야단이었다. 회원 농가들도 반대가 심했다. 그는 “1년이 아닌 10년 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투자하고 혁신해야 한다”는 경영 원리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반복 설명한 다음에야 겨우 이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가격 유지 위해 마트 집중 공략

농산무역은 2004년 농업회사 법인으로 전환했고, 수출 공동 브랜드인 ‘휘모리’도 만들었다. 이때부터 이 회사에서 출하되는 파프리카에는 다국적 브랜드 ‘dole’과 한국산 농산물임을 밝히는 브랜드 ‘휘모리’가 공동으로 부착돼 일본 전역에서 판매되고 있다. 조기심 대표는 “일본 내에 우리 브랜드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 농산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쇄신하는 것이 급선무여서 ‘dole’ 브랜드를 함께 붙였다”며 “돌의 브랜드 파워가 큰 만큼 한국산 농산물에 대한 인지도도 높아질 것이라는 전략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농산무역이 일본에 수출하는 파프리카는 현재 ‘이온그룹’이 운영하는 수퍼 체인망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온그룹’은 한국의 신세계나 롯데와 같은 일본 최대 유통 기업이다. 조 대표는 “사업 초기 시장 조사를 철저히 한 덕에 마케팅 포인트를 경매시장이 아닌 마트 쪽에 맞췄는데, 결과적으로 성공했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파프리카는 온도와 습도는 물론 일조량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지는 아주 예민한 작물입니다. 보통 성수기인 5~7월에 전체 수확량의 60%가 생산되고, 비수기인 1~2월에는 20%밖에 나오지 않죠. 이 때문에 업소용으로 공급되는 경매시장에 나가게 되면 가격 등락(謄落)이 심해요. 물량이 적은 겨울에는 천정부지로 올랐다가 물량이 넘치는 여름엔 바닥으로 떨어지는 식이죠. 저는 크고 길게 가려면 가격 등락이 심한 경매시장보다는 연중 공급 가격이 균일한 마트를 공략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농업 경쟁력은 시설 경쟁력”

파프리카 농장 곳곳에는 해충을 잡아먹는 벌레(천적) 통이 매달려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공들인 덕에 농산무역이 수출하는 파프리카는 현재 공급량이 부족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 인기가 높다. 안전성 문제에서도 신뢰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조 대표는 “일부 한국산 농산물에서 허용 기준치 이상의 농약이 검출됐다는 보도가 날 때면 기운이 빠진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농산물에 대한 이미지 쇄신을 위해 한쪽에서는 죽어라 뛰는데,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없죠. 수출 창구가 단일화되지 않아 생기는 일입니다. 일본 파프리카 시장의 60~70%를 한국산이 점유하고 있는데도 가격 주도권을 못 갖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죠. 그런 점에서 하루빨리 품목별 규모화가 돼야 합니다.”

조 대표는 “소규모 영농들은 멀리 보지 않아 품목을 자주 바꾸고, 코앞의 이익만을 따져 시장을 어지럽힌다”고 말했다. 그는 “FTA 체결로 국가 간 관세 장벽이 무의미한 시대에 농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기업농을 육성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이전처럼 공산주의 식으로 똑같이 나누어 지원할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우리 농업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기업과 달리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그런 그에게 “농산무역의 미래 경쟁력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의 경쟁력은 파프리카가 아닙니다. 파프리카를 재배할 수 있는 시설이 경쟁력이죠. 저런 시설에서는 그 어떤 농작물을 재배해도 경쟁력이 있습니다. 생산력이나 품질에서 노지재배는 시설재배를 따라올 수 없지요. 12억 중국 시장을 공략하는 데도 시설재배한 고품질 농산물이 경쟁력이 될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조 대표를 따라 파프리카 농장 구경에 나섰다. 높이 4~5m 정도 되는 유리온실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쳤다. 그렇지만 일반 비닐하우스처럼 습도가 높지는 않아 청량한 느낌이었다. 온실 내에는 세로 1m, 가로 50cm 정도 간격으로 짙푸른 파프리카가 어느 칸에는 빨간 열매를, 어느 칸에는 주황 열매를 달고 끝도 없이 줄져 있었다. 조 대표는 “파프리카는 색깔별로 공급해야 상품으로서 가치가 있고, 색깔에 따라 기후 조건이 달라 따로 분리해서 재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농업 재벌 나오겠네요”

그러곤 갑자기 주황색 파프리카를 하나 따서 먹어 보라고 건넸다. 농약 대신 천적(天敵)으로 병해충을 관리하기 때문에 씻거나 닦을 필요 없이 그냥 먹어도 된다고 했다.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 회원 농가들의 생산이력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농산무역 회원 농가는 모두 이미 ISO9001(품질경영시스템 국제표준) 인증과 GAP(우수농산물관리제도) 인증을 받은 상태다.

방금 딴 파프리카는 달고 수분이 풍부해 맛이 그만이었다. 2m가 넘게 자란 파프리카는 겨우 손바닥만 한 암면(巖綿·인공무기섬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암면은 양액을 공급하는 가느다란 관으로 연결돼 있었다. 영양과 환경 관리는 모두 컴퓨터 시스템으로 한다고 하니, 온실은 그야말로 최첨단 과학단지였다. 조 대표는 “최근 이재오(李在五)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이 다녀갔는데 시설을 둘러보더니 ‘농업에서도 재벌 나올 날이 멀지 않았네요’라고 감탄하더라”고 전했다.⊙

사진 : 서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