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稅吏 38년, 봉사 30년의 조용근 한국세무사회 회장

“가난은 나의 자부심, 많이 나눠주면 더 많이 생겨”

  • : 김태완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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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쥐고기 먹고 영양실조 이겨내. 서울역에 가 지게 질 용의 있다”

“지금도 매일 목에 힘 뺐는지 만져봐. 공연히 오해 살 일 없어”


⊙ 국세청 개청 때 9급으로 들어가 대전국세청장까지 38년 재직, 퇴직 후 세무법인 세워 성공
⊙ 장학재단 만들고 나눔과 봉사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조용근
⊙ 1946년 경남 진주 출생.
⊙ 경북대 사대부고, 성균관대 상과 졸업.
⊙ 국세청 조사국 서기관, 서울 중부·영등포·경북 의성세무서장, 국세청 공보담당관,
    대전국세청장 역임. 現 석성 세무법인 회장, 다일공동체 밥퍼나눔운동본부 명예 본부장,
    국세청 국세행정위원, 기획재정부 세제발전심의위원, 행안부 지방세 정책위원.
⊙ 홍조근정훈장(2005), 근정포장(1992), 대통령 표창(1982), 자랑스런 한국인대상(2006·
    한국언론인연합회).
지난 1월 13일. 장소는 미얀마 양곤. ‘세금 귀신’으로 통하는 한국인 세무사들이 모였다. 태풍으로 학교가 무너져 수업을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사랑의 학교’를 신축해 기증하는 자리였다. 세무사의 선행(善行)이 특히 이목을 끄는 것은 ‘세무(稅務)’라는 직업 자체가 갖고 있는 ‘자린고비’ 이미지 때문이다. 누구나 재산을 불리면 불렸지 절대 쪼개거나 처분할 것 같지 않은(?) 인상을 세무사에게서 받는다.
 
  그러나 자료를 뒤져 보니, 세무사들의 나눔과 봉사 실적이 결코 적지 않았다. 2008년 미얀마에 2만5000달러를 모아 고등학교를 지어 줬고 대지진이 발생한 중국 쓰촨성에 피해복구 성금 3만 달러를 전달했었다. 솔선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금하거나 ‘사랑의 밥퍼’ 행사에 세무사들이 팔을 걷어붙여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도대체 세무사들의 집단인 한국세무사회가 ‘봉사와 기부의 단체’가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궁금해졌다. 세무사회를 이끌고 있는 조용근(趙鏞根·64) 회장에게 점점 구미가 당겼다.
 
  인간의 얼굴표정은 저마다 영성(靈性)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 전 그의 얼굴을 사진으로 한참 보았다. 미끈한 도회적 인상은 아니었다. 낙동강 을숙도를 따라 흐르는 국도(國道) 같거나 구부러진 논두렁 같은, 그러면서도 뭔지 모를 희열과 까칠한 고통이 담긴 얼굴이었다. 간단치 않은 상(相)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세무사회에서 그를 만났다.
 
  조용근 회장은 1966년 국세청이 개청하면서 9급으로 들어가 지방청장(대전)까지 오른 인물이다. 38년간 세금 일만 하다가 2004년 말 명예퇴직했다. 퇴직 후 국세청 고위직들은 대개 로펌(법무법인) 행을 택하지만 그는 전공을 살려 세무법인을 세웠다. 그리고 세무사 등록 2년이 채 안돼 직선으로 뽑는 한국세무사회 회장에 선출됐다. 이제 연임까지 했다.
 
  기자는 취재 도중 그의 말투와 그에게서 풍기는 인상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봤다. 생각에 빠져 그의 말을 놓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 녹음을 풀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얼굴과 살아온 삶을 곱씹어 보았다.
 
30여년을 함께한 철제 저금통. 매달 저금통을 꽉꽉 채워 이웃돕기에 썼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의 생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가난이 있고, 가난이 준 가족의 죽음이 있고, 가난을 이겨낸 헌신이 있다. 지금은 부유하지만 아직도 ‘가난한 마음’에 의지하며 나눔을 실천한다. 장학회를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대고, 딸의 결혼 축의금을 떼어내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았다. 청량리에서 노숙자와 독거노인에게 밥 푸는 일도 하고 있다. 가난은 그의 ‘자부심’이다.
 
  글이란 연장으로 살아 있는 인간을 기록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제한적이다. 조 회장의 글을 쓰면서 특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발’이 오를 때까지 한참 뜸을 들여야 했다. 속에서 한참을 뒤척인 다음에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몇 번이고 워드프로세서 앞에 섰다. 풋살구를 한 바가지 따 먹는 마음으로 그의 생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그는 김대중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 파동이 있던 2001년 국세청 공보관으로 재직했다. 말이 파동이지 정권 대 신문, 신문 대 신문, 신문 대 방송이 전쟁을 벌이는 시기였다. 싸움의 본질은 권력의 탄압이었고 그 중간에 언론사의 ‘탈세’를 조사하려는 국세청이 있었으며, 기자들에게 양식(기삿거리)을 제공하거나 비판기사를 ‘막으려는’ 공보관이 있었다.
 
  “전쟁시절이었지요. 공보관 할 때 죽겠더라고. 몸으로 막아라 이거지. 공보관으로 1년8개월 동안 제법 긴 터널을 거쳤어요. 따지고 보면 기자들은 단순하잖아요. 자존심 하나 가지고 살잖아. 그래서 인간적으로 가까이 접근했지요. 먹지 못하는 술을 마시고 몸으로 부대꼈어요. 도리가 없잖아. 당시 안정남(安正男) 국세청장이 ‘공보관 똑바로 하라’고 하더라고. 간첩노릇 하지 말라는 거지. 마음은 언론사 편이지. 뒤로 어떻게 준비하라고 흘리고…. 그래서 안 청장에게 ‘공보관은 이중첩자 아니냐’고 했어요. ‘국세청과 조선일보라는 두 고래가 싸우면 공보관인 저만 등이 터진다’고 했지요. 안 청장도 저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조선일보도 좀 억울하지.”
 
 
  臟器 기증 서약서 들고 다니며 술마셔
 
장기기증등록증
  2001년 7월 14일 동아일보 김병관(金炳琯) 명예회장의 부인 안경희(安慶姬)씨가 자살한 것도 공보관 재임시절이었다. 그날 수도권 일원에는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시가지는 물에 잠겼고 흙탕물을 헤치고 대피하던 시민 21명이 물속으로 흘러나온 전기에 감전돼 숨진 것도 그때였다.
 
  “그날 국세청장 모시고 (상가에) 가려니까 못 간다고 해요. 혼자서 고대 안암병원에 가니 상주들의 표정이 어둡더군요. 개인 자격으로 왔다고 했어요. ‘제 아내가 경북여고를 나왔는데, 평소 사모님을 좋아했다. 대신 문상 가라고 해서 왔다’고 했더니 표정이 달라졌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중에 그런 야사(野史)를 글로 쓰려고 해요.”
 
  ―공보관의 원칙이란 게 있나요?
 
  “진실이지. 공보관을 하면서 가졌던 원칙은 ‘있는 모습을 그대로 이해해 주자’는 것이었어요. 기자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했어요. 기사가 잘됐다, 못됐다 반박하는 것은 질색이었어요. 대개 공무원들은 기사가 나가면 엉터리라고 생각하거든. 저는 달랐어요. 어찌됐거나 기자에게 잘 썼다고 격려했어요. 기자는 자존심 하나로 사는데 건들면 안되거든. ‘기사 쓴다고 고생했다. 잘 썼다. 내가 봐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 문제가 걸려 있다. 이것은 이렇다. 이것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해 달라’고 호소했어요. 데스크한테 가서도 ‘저 기자 잘한다’고 말해 줬어요.
 
   그 다음에 기사 제목 뽑는 편집부에 가서 양해를 구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국장을 찾아갔지요. 나름대로 절차와 계통을 밟아 가되 진정성을 가지고 호소했어요. 그리고 기사가 나간 뒤에 반드시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니까요. 그런 식으로 제 마음의 진실을 전달하려 했어요.”
 
  언론사와의 전쟁 와중에도 기자와 교분을 쌓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원칙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젊은 기자들은 그를 형이라 불렀고 핏발선 기사를 쓰면서도 그와 마음을 주고받았다.
 
  물론 직장 동료나 부하와의 관계도 두루 원만했다는 평이다.
 
  “직장 동료나 부하한테도 마음의 진실을 가지고 대하는 거야. ‘네게 그런 일이 있었나? 왜 진작 얘기 안 했어’ 하고 상대방과 공감하려 노력했어요. 그 사람의 감정에 함께 파묻혀 주는 거지. 그래서 ‘저분은 만나면 생김새는 별로인데 좀 호감이 생긴다’, ‘친근미가 느껴진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공직에서 물러난 뒤 그가 매번 다짐하는 일이 있다. 목에 깁스가 풀어졌나, 안 풀어졌나다.
 
  “권력층이나 고위공직자 보면, 퇴직 후에도 이게(깁스) 안 풀리는 거야. 안 풀려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저는 제가 잘못됐다면 즉시 사과합니다. 제가 많이 못 배웠다는 점이 장점이 됐어요. 많이 배운 사람들은 뻣뻣하잖아. 제 약점을 알게 되니까 겸손해지는 거지.”
 
  아무래도 공보관은 젊은 기자들과 부대껴야 하고 복잡한 현안을 다듬고 조율하는 자리다. 회식자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이때마다 그는 ‘장기기증등록증’을 들고 다니며 필요할 때 꺼내들었다. “장기를 잘 보관했다 기증해야 하기 때문에 손상시키면 안된다”며 술을 피했다. 그러면 강제로 술을 권하던 이들도 이해를 해 주었다.
 
 
  고교 때 ‘상업부기’ 배운 것으로 국세청 응시
 
조용근 회장의 고교시절. 경북대 사대부고 3학년 급우들과 함께. 앞줄 좌측에서 3번째가 조 회장이다.
  조용근 회장은 당시 특차(特次)였던 경북대 사대부고를 졸업했다. 서울대 상대 진학을 꿈꿨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집안이 가난해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2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아 대학에 진학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 1966년 2월쯤, 관보였던 서울신문에 사세(司稅)직 5급 을류(지금의 국세청 9급) 공고가 났다. 국세청이 그해 3월 3일 외청으로 발족하며 개청요원을 뽑게 돼 응시하게 됐다.
 
  “시험과목이 국·영·수(國英數) 세 과목에다 일반상식, 법학개론, 상업부기였어. ‘상업부기(商業簿記)’라는 과목에 눈이 번쩍 뜨였지. 제가 인문고에서 상업을 배웠거든요. 중학교 때 상업부기를 가르치셨던 김석규 선생님이 고교 때 담임으로 오신 겁니다. 김 선생님이 저에게 상업부기를 선택과목으로 권하셨거든요. 내심 독일어를 배울 생각에 갈등했지만 선생님 안면 때문에 배우게 됐어요. 그때 함께 배웠던 친구 중에 회계사가 된 친구도 있어요.”
 
  고교 은사의 권유로 상업부기를 배운 것이 그의 인생을 뒤바꾼 셈이다. 당시 상업부기를 선택과목으로 택한 학생이 전교에 1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조 회장은 아주 신이 났다.
 
  “국·영·수야 서울대 상대를 준비했으니 거의 만점이지. 하지만 나이가 어려 군대 미필에다 원호대상자도 아니지 가산점이 ‘제로’야. 합격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어요. 그때가 워낙 실업률이 높은 때여서 5만여 명이 지원했어요. 경쟁률이 100대 1이 넘었지. 제 수험번호가 2283번이었어요.”
 
  ―아니 수험번호를 어떻게 기억해요?
 
  “기억할 수밖에 없지. 왜냐, 그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으니까.”
 
  그는 가산점 하나 없이 합격증을 거머쥐었다.
 
  “그때 등록번호가 몇 번이냐 하면 179번입니다. 제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어서 그때의 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5만여 명 중에서 179등을 한 거죠. 가산점을 빼면 필기점수가 거의 만점에 가까웠어요.”
 
  당시 그는 대구 서구 비산동에 살았다. 첫 발령지는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대구서부세무서였다. 1960년대 후반만 해도 대구서부서는 세수(稅收)가 서울 영등포, 부산 동래 다음으로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1966년 6월 20일 대구서부서에 첫 출근했다. 만 20세가 되던 해였다.
 
  “대구서부서 관할이 굉장히 넓었어요. 대구 서구에다 달성군·칠곡·고령군, 서문시장, 북구 침산동·원대동까지 어마어마하지. 그때 대구는 섬유로 경기가 좋았어.”
 
  그는 세무 공무원에 만족할 수 없었다. 원없이 공부하고 싶었다. 학창시절의 미련을 억누르지 못해 대학진학을 준비했고 1년 뒤 청구대(현 영남대) 야간부에 4년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당시 야간부는 조 회장처럼 공부에 한(恨)을 품거나 직장에 다니며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청구대에 수석합격을 하고 나니,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 김경남 서부세무서장이 저를 부르더라고. ‘자네는 말이야, 내가 장학금을 줄 테니까, 세무공무원 치우고 공부하라’고 해요. 그래서 ‘말씀은 고맙지만 주경야독해 보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기왕에 하는 공부, 서울에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1968년 4월 성균관대 상학과 편입시험을 쳤다. 상학과는 요즘으로 치면 경영학과다. 68명이 지원했는데 2명 안에 들어 당당히 합격했다. 무슨 용기인지 합격증을 들고 먼 친척뻘 되는 국세청 세정감독관(지금의 감사관)을 찾아갔다.
 
  “간덩이가 부었지, 먼저 편지를 쓴 뒤 무턱대고 그분을 찾아갔어요. ‘제 형편이 이렇습니다. 서울 와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하고선 합격증 보여줬어요. 그분이 절 기특하게 생각하셨나 봐요. 그땐 우리 경제가 막 일어설 때여서 수도권에 세원(稅源)은 많은데 인력이 부족했어요. 지방의 우수인력을 서울로 뽑아 올리는 데 절 추천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1968년 5월 1일자로 성균관대와 가까운 서울동대문세무서로 발령이 났다. 본격적인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1997년 12월 경북 의성세무서장 퇴임식 모습. 조 회장은 1996년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의성세무서장을 역임한 뒤 1998년 1월 서울국세청 부동산 조사관리 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쥐고기 50마리 먹고 기운 차려
 
  기자는 여기서 이야기를 돌려 조 회장의 유년 이야기를 들어볼 요량으로 “집안 형편은 어땠느냐”고 물었더니 “아픈 추억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하다”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학창시절, 잊지 못할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초등학교부터 고교 졸업까지 학교를 단 한 번도 안 빠졌어. 12년 개근상을 탔어요. 성실하다는 평판의 밑거름이 됐어요. 두 번째는 버스를 안 타 봤어요. 초등학교는 그렇다 쳐도, 중학교(경상중)가 대구 남구 대명동에 있었는데 집(서구 비산동)에서 서부초등학교 앞길과 서문시장 뒷길로 해서 화장터를 거쳐 왕복 8km를 2시간 가까이 걸었어. 새벽 밥 먹고 일찍 나선 거지. 고등학교(사대부고)는 중구 삼덕동에 있었는데 약전골목으로 걸어다녔어요. 지금도 걷는 데는 자신 있습니다. 등산 모임을 가도 제일 먼저 정상에 오릅니다.
 
  세 번째는 한 번도 수학여행을 못 갔어요. 대구 가까운 경주 불국사도 못 가봤어요.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안 가도 결석처리는 안 하더라고요. 대신 출석 확인받고 집으로 가는 데 얼마나 쓸쓸하던지…. 그때 그 기분은 잊지 못하지.”
 
  조 회장은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쥐고기 50마리를 먹은 것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순간적으로 쥐고기가 ‘쥐포’를 의미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했지만 ‘50마리’라는 말에 쥐포가 아니란 걸 알았다.
 
  조 회장의 아버지 조석규(趙石奎·작고)씨는 돈을 벌 생각에 가족을 두고 혼자 일본 밀항선을 탔다.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 강성이(姜成伊·작고)씨는 친정인 경남 의령군으로 어린 식솔 4남매를 데리고 낙향했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시절인 데다 더부살이를 했으니,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았다고 한다. 형이나 누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얻어먹어서인지 괜찮은데 다섯 살인 그와 두 살인 남동생은 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방 한쪽 구석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기운이 없어 널브러져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고기를 해 왔다. 그는 천천히 씹었지만 동생은 소화를 시키지 못했다. 얼마 후 동생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고 조 회장은 정체불명의 고기를 계속 먹은 탓에 병상에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이 고기가 바로 ‘쥐’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저는 살고 1949년생인 동생은 죽었어요, 소화가 안돼서. 나중 생각하니까 그 죽음이 무형의 자산이 됐어요.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제 정신의 지주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대전국세청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날 때 아이들 둘을 불러놓고 이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이라도 서울역에 가서 지게를 질 용의가 있다’고,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요.”
 
  쥐고기 사건과 학창시절 기억 때문인지 그는 남을 돕는 데 남다르다. 아내 유영혜(柳榮惠·57)씨는 그를 ‘봉사 중독자’라고 하지만 그를 말리진 못한다. 그는 서울국세청 조사관리계장으로 있던 1994년 무렵, 부모의 이름 한 자씩을 딴 ‘석성(石成) 장학회’를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보탰다.
 
  “장학금 지급 대상자의 성적은 안 봅니다. 무조건 가난하면 됩니다. 지금까지 500여 명에게 줬어요. 대학생은 200만원씩, 고등학생은 60만원, 중학생은 50만원씩 줬는데 대학생은 그래도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고교생 위주로 줍니다. 지금까지 모은 기금이 11억1000만원 정도 되는데 조만간 추가로 출연을 할 생각이에요. 그러면 15억원쯤은 될 겁니다. 그게 제 낙입니다. 해마다 제가 운영하는 석성 세무법인의 매출액 1%(약 4000만~5000만원)를 장학금으로 내놓습니다.”
 
  조 회장은 부친이 남긴 유산 5000만원을 10년간 차근차근 불려 1994년부터 2억2000만원으로 장학사업을 해 오다가 2002년 사비(私費)를 보태 3억원으로 장학재단 법인을 시작했다고 한다.
 
 
  give, and more take
 
조용근 회장은 2001년 김대중 정부시절, 언론사 세무조사로 갈등을 빚을 당시 국세청 공보관을 맡아 마음고생이 심했다. 1년8개월 가까이 공보관으로 긴 터널을 거친 뒤 2004년 7월 대전국세청장이 됐다. 사진은 대전청장 임명장 수여 모습.
  조 회장은 나눔에도 원칙이 있다고 했다. 단순히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주고받기)’가 아니라 기브와 앤드 사이에 쉼표를 친 원칙이라는 것이다.
 
  “기브 다음에 쉼표를 쳐 봐요. 그러면 ‘주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로 문장 자체가 달라집니다. 단순히 ‘주고받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먼저 주는 것에 인색합니다. 하지만 주면 더 많이 받을 수 있다(more take)고 생각해요. 세상엔 공짜가 없어요. 더 많이 얻으려면 먼저 줘야 합니다. 처음부터 받으려고만 하면 안됩니다. 쉼표가 필요해요. 되로 주고 말로 돌려받는 거죠.”
 
  조 회장은 1996년 무렵, 가까운 지인이 매달 쌀 20가마를 청량리로 보낸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세히 물어보니 청량리 노숙인과 행려자들에게 매일 식사를 제공하는 다일공동체 ‘밥퍼’의 최일도 목사를 돕고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갔다가 ‘삶’이 아니라 ‘생존’하는 노숙인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후 수시로 찾아가 도움을 주고 ‘밥퍼’ 봉사에도 참여했다. 2007년 8월 아예 ‘밥퍼 명예본부장’을 맡았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매월 두 차례 이상 밥퍼 봉사를 나간다.
 
  지난해 10월에는 딸 결혼식에서 받은 축의금 중 5000만원을 기부한 일도 있다. 2000만원은 ‘밥퍼 나눔운동’에 3000만원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국세청 직원의 자녀 등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30여 년 전부터 조그마한 철제 저금통에다 동전은 물론 지폐를 넣기 시작했다. 한 달 열심히 모으면 3만원 정도가 됐다. 구청으로부터 불우청소년을 소개받아 장학금을 온라인으로 부쳐 줬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는 사무실로 찾아오는 이들에게 저금통을 보여주며 일부러 자랑한다. 그 이유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남을 섬기는 기쁨을 맛보라는 뜻”이라고 귀띔했다.
 
  “제 개인 사무실(석성 세무법인)에 가면 저금통이 있는데 제가 6급 때부터 모았어요. 저금통이 가득 차면 3만원도 되고 5만원, 10만원도 됐는데 가득 찰 때마다 구청 사회복지과에 연락해 소년소녀 가장 한 사람의 계좌를 불러 달라고 했어요. 지금은 (동전함에) 하루 1만원씩 넣습니다. 일종의 출근전표지요. 1만원을 넣으며 오늘 출근했구나 해요. 한 달 30만원을 모으면 구청에 전화해서 소년소녀 가장 3명의 계좌를 알려 달라고 해요.”
 
  몇 년 전부터는 다일공동체에서 펼치는 BCP운동(언청이 수술을 돕는 프로그램)을 위해 사무실에 새 저금통을 설치했다. 1인당 수술비 250만원 정도가 드는데 방문객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잘 모으면 1년에 4∼5명 정도를 수술해 줄 수 있다고 한다. 또 불우이웃 돕기 통장도 여러 개다.
 
  “사무실로 절 찾아와 세무 상담을 받는 이에게 ‘당신이 원하는 만큼 넣으라’고 권해요. 어떤 사람은 10만원도 넣고, 1만원도 넣어요. 1만원 이하는 안된다고 해요(웃음). 그렇게 돈을 모으면 1년에 1000만원이 넘게 모입니다. 그 돈이면 너덧 사람이 수술할 수 있는 돈입니다. 또 제가 어디 강의를 나간다, 이사회에 참석해 거마비(車馬費)를 받아 온다, 이런 것들은 불우이웃 돕기 통장에다 넣습니다. 말기 암환자를 위한 돈으로도 쓰이고 장애인을 돕는 기금으로도 쓰입니다.”
 
  그 역시 처음엔 남세스러웠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도 많았다고 한다.
 
  “처음엔 쑥스러웠어. 장학금도 숨어서 줬는데 지금은 숨길 수도 없잖아. 누군가 나서서 기부하고 나눠야 다른 사람도 동참할 게 아닙니까. 돈 많이 벌어 ‘깨끗한 부자’가 되는 게 어디 부끄러운 일인가요? 주위에서 ‘저 사람, 안 하던 짓 왜 하나? 다른 꿍꿍이가 있나?’ 색안경을 끼더라고요. 제 아내도 처음엔 인정을 안 했어요. 우리도 어렵게 사는데 왜 그러냐고 했어요. 지금은 그렇게 보는 사람이 없어요. 검증이 된 셈이지요.
 
  지난번 딸(趙秀彬·29) 시집 보낼 때, 축의금을 사회 환원하겠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축의금을) 받지나 말지 왜 받느냐’고 해요. 솔직히 기분이 나쁘더라고. 축의금은 품앗이인데 응당 받아야지. 그렇잖아요? 저는 실컷 줬는데, 딸 치울 때 안 받으면 공평하지 못하잖아요. 받고 나서 사회에 환원할 요량으로 축의금을 받았죠. 그래서 축의금 중 일부는 딸의 신혼집 전세금, 일부는 결혼식 비용, 나머지는 좋은 곳에다 썼어요. 그걸 보고, 축의금 내는 사람들이 독특하게 보더라고요. 그런 문화는 확산시킬 필요도 있다고 봐요. 대개 사람들은 자식들한테 무얼 물려줄까 고민하는데 어리석은 일이야. 열심히 살 수 있는 정신을 물려줘야 해요. 고기 잡아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치과의사인 딸이 병원 인턴 첫 월급으로 215만원을 받아 2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더군요. 그걸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자식을 잘 가르쳤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3修生 아들, 아버지 사랑 확인한 뒤 ‘공부의 신’ 돼
 
조용근 회장의 세무사회 집무실과 석성 세무법인 사무실에는 저금통이 여러개다. 출근전표를 찍듯 매일 모은 돈으로 나눔을 실천한다.
  이즈음에서 그는 장남인 성제(盛濟·30)씨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들은 고교 졸업한 뒤 3수(修)까지 해 아버지의 속을 태웠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성적이 좋지 않았고 고교 때는 전교석차 문과 10등 안에 들 정도로 성적이 괜찮았지만 모의고사 성적은 들쭉날쭉했다. 게다가 대학 문턱에서 자꾸 미끄러져 집안의 우환덩어리였다.
 
  “아들이 어찌나 미운지 고함도 치고 매를 들기도 하고 그랬단 말이야. 어느 날 아내가 아이의 메모장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내용이 담겼다는 겁니다. 아내가 ‘도대체 당신이 뭐라고 했는데 이렇게 상처가 됐느냐’고 하더군요. 충격을 받았고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운영하는 ‘아버지 학교’에 토요일마다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5주 동안 다녔어. 한 번은 ‘선친에게 편지를 쓰라’고 하고, 또 한번은 아들에게 쓰는 편지와 함께 ‘아들이 사랑스런 이유 20가지를 쓰라’는 숙제를 내줘요. 그러잖아도 원수 같은 놈인데 20가지가 써지나요? 당시 영등포세무서장 시절이었는데, 결재까지 미루고 끙끙대며 썼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의 사랑스런 모습이 떠올라. 너덧 살 때인가, 침을 탁탁 뱉어 가며 아빠 구두를 닦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고, 휴일 날 그놈이랑 야구할 때도 기억나고…. 실타래 뽑히듯 영상이 떠올랐어요.”
 
  그렇게 20가지 이유를 써서 ‘아버지 학교’에 제출했다. 얼마 후 퇴근해서 집에 가니 아들이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했더니 아내는 ‘이상한 편지를 받더니 저런다’고 했다. ‘아버지 학교’에서 그가 쓴 편지와 사랑스런 20가지 이유를 코팅까지 해서 아들에게 보낸 것이었다. 그때가 대입 수능을 3개월 정도 남겨 둔 시점이었다.
 
  “다음날 아들이 눈이 퉁퉁 부어 가지고 ‘아버지~’ 하고 안기는 겁니다. 그 글을 쓰면서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깨달았고 아들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 것이지요.”
 
  수능을 치르던 날, 시험장으로 가며 아들이 “그동안 괴로움을 끼쳐 죄송하다”며 유언(?)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조 회장은 3수까지 한 놈이 그런 말을 하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날 저녁, 퇴근해 아들에게 ‘시험 잘 쳤느냐’고 물었더니 ‘1개를 틀렸다’고 하더란다. 조 회장은 농담이겠지 싶었다. 평소 실력으론 어림없으니까.
 
  수능 성적 발표 날, 아침 일찍 학교에 간 아들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초조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전 11시가 넘어 전화가 왔다. 진짜로 2점짜리 문제 1개만 틀려 398점을 받았다. 아들은 2001학년도 서울대 법대 정시에서 면접과 논술고사를 포함한 종합점수 수석으로 합격했다.
 
  ―편지가 아들 성적을 크게 올렸던 거네요.
 
  “전 그렇게 봐요. 수능을 얼마 안 남기고 성적이 크게 뛰었으니까. ‘아버지 학교’에 다닌 뒤 매일 아침 아들을 껴안았어요. 그러곤 ‘우리 아들 최고’라고 칭찬해 주니 아들이 신바람이 났던 겁니다. 그래서 아들의 잠재력이 폭발했다고 봐요.”
 
 
  ~구나, ~구나, ~군요, ~군요
 
조용근 회장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들 성제씨와 부인 유영혜씨, 딸 수빈씨.
  ―삶에서 생각과 태도를 바꾸면 전혀 새로운 세상과 미래를 볼 수 있다고들 합니다. 현재의 상황을 위기로 보느냐, 기회로 보느냐에는 중요한 가치관의 차이가 담겨 있어요. 위기를 기회로 보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인생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의식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열심히 살다 보면 잘살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살다 보니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지. 환갑 날, 잔치 대신 아내와 함께 다일공동체가 운영하는 영성수도회에 갔는데 화두가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사느냐’였어요. 영성수련(靈性修鍊)을 하면서 저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가 뭔지, 어떨 때 화를 내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유년시절이 떠올랐어요. 아버지가 밀항하셔서 일본에 가시고, 외가에 얹혀 살 때, 한번은 형이랑 제가 외갓집 행랑채 소쿠리에 담겨 있던 삶은 보리밥을 훔쳐 먹었어요. 당시에는 보리쌀에다 쌀을 조금 얹어 밥을 지어 먹었는데, 그날은 너무 배가 고파 둘이서 소쿠리째로 다 먹어 버렸어요. 다음날 아침에 어머니가 깨워요. 빨리 도망치라고. 지금은 보리밥, 줘도 안 먹지. 외할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로 때린다고 해서 팬티 바람으로 뒷산으로 도망쳤어요. 그때 그 사건이 안 잊히고 두고두고 화가 나는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화낼 일이 아니었어요. 제 마음의 창(窓)에서 화가 난 것이지, 일 자체로는 화낼 일이 아니잖아. 그때 불현듯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뜻을 깨달았지. 있는 모습 그대로 보라는 의미를 말이죠. 이후부터 남을 원망하고 탓하는 마음이 사라졌어. 웬만한 일에 화가 안 나요. 또 ‘~구나, ~군요’라는 화법(話法)은 공감하는 마음을 만드니 화낼 일이 없어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군요’라고 맞장구쳐 주면 갈등이 안 생겨요. ‘아, 그랬구나, 그래서 마음이 아팠겠군요’라고 해 주면 되는 거야. 그럼 대화가 술술 넘어가요. 결국엔 긍정적 사고를 갖게 되는 겁니다. 타인의 마음상태를 읽어 주는 것이죠.”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는 ‘신은 다시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믿었던 분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좌절하고 갈등하며 고난을 겪지요. 어떤 사람은 이겨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가치관과 태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삶에 당당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약자의 약점’은 바로 가난입니다. 전 어린 시절의 가난을 심각한 좌절이라 생각하진 않았어요. 낙관적으로 생각했고 어떨 때는 회피하려고도 하고…. 어떤 면에서 제가 믿는 신이 섭리하지 않았겠느냐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입니다. ‘너희 빛을 세상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세상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 대선배인 마태(마태오)가 가르쳐 주신 말씀이지요. 그도 세리(稅吏)였지요. 여기서 ‘너희 빛’이란 말은 선한 영향력이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바오로)도 비슷한 얘기(로마서 15장 1~2절)를 했어요. ‘강한 우리는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요. 일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지요. 그러니 저 자신보다 먼저 이웃을 기쁘게 하고, 그 마음과 더불어 나눔마저 행한다면 자신의 삶에 조금은 당당해지지 않을까요?”
 
  ―자신의 삶에서 가난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가난이 가르쳐준 게 뭡니까. 가난이 가져다준 행복과 불행 중 어느 것이 많은가요. 왜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납니까.
 
  “전 사선(死線)을 넘나들 정도의 가난을 겪었지만 왜 가난하게 태어났을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이렇게 해도 좋은 세상이네’. ‘이게 가난인가?’ 하고 생각했지 심각하게 갈등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서도 제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어요. ‘오퍼튜너티 이즈 노웨어(Opportunity is nowhere)’란 말을 직역하면 ‘기회는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단어 하나만 띄어 쓰면 전혀 다른 뜻이 되죠. ‘어디에도 없는(nowhere)’이란 뜻이 아니라 ‘지금 여기(now here)’라는 뜻이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의 현실을 기회로 살면 절망 속에 희망이 있다는 의미가 되죠.”
 
 
  마포서 법인세과 瀆職사건 때 파견 나가 살아남아
 
조용근 회장은 ‘밥퍼나눔운동본부 명예본부장’을 맡고 있다. 사진은 최일도 목사(왼쪽)와 찍은 ‘나눔’ 포스터.
  조용근 회장은 국세청에 근무할 당시 부동산 투기(投機) 근절 1인자로 꼽혔다. 1976년부터 88년까지 12년 동안 투기업무만 담당했다. 당시엔 전국적으로 부동산 투기 바람이 일던 시절이었다. 여의도 목화아파트,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 반포 아파트 등이 지어지면서, 투기 바람을 타고 아파트 값이 치솟았다. 청약률이 폭증해 부동산 중개인이 큰돈을 벌었다.
 
  “당시 투기억제 업무를 거의 혼자서 다 했어. 1978년 들어와 투기억제 지역을 고시했는데, 서울 강남 4개 아파트 단지와 전국 158개 동(洞)을 지정고시해 실거래 금액으로 양도소득세를 매겼지요. 그 고시업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투기를 잡았는데 7급부터 시작해 1988년까지 한자리에서 12년간을 그 업무만 했어요. 양도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 재산관련 세무 일만 해서 그 업무의 1인자가 됐어요. 다른 사람은 인사이동 때 1년마다 빠져나가는데 나는 붙박이였지. 투기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국회에 불려가 청장 답변자료까지 직접 써야 했지요.”
 
  자칫 뇌물시비나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정도(正道)를 지켰다고 한다. 특히 부동산 투기 대책분야에서 닦은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토지공(公)개념 도입 당시 토지초과이득세 실무 준비 단장으로 참여했고 탈세조사와 주식거래 조사 등을 총괄하는 조사분야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전국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만나자고 찾아왔지만 안 만나 줬지. 워낙 일이 바빠서. 안 만난 게 아니라 못 만났어요. 그때 아파트 값이 치솟아 물좋은 강남지역 부동산 중개업자들이 하루 100만원씩 벌던 시절이었어. 만약 그때 특혜분양을 받아 집을 샀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거야.”
 
  본격적인 투기억제 업무를 하기 전인 1976년 5월쯤, 마포세무서 법인세과에 잠시 근무할 때였다. 당시 세제가 종합소득세제로 바뀌면서 모든 소득을 인별(人別)로 모아 과세하게 됐다. 그때 조 회장은 법인세과에서 개인세과로 차출됐다.
 
  “마포서에 있을 때 법인세과 직원들이 거의 연루돼 다 잡혀간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어요. 그런데 저는 개인세과에 파견 나가 있었던 데다 3~4개월 뒤 국세청 본청으로 발령이 났어요. 마포서 법인세과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셈이지요. 만약 법인세과에 그대로 있었다면 살아남았겠어? 지옥에서 살아온 기분이었어요.”
 
  조 회장은 자신이 직무와 관련된 비리에 연루되지 않은 것은 자기가 믿고 있는 ‘신(神)의 간섭’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왜 이런 과정을 피할 수 있었나를 생각하면, 제 힘보다 강한 분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대전국세청장에서 물러난 뒤 세무사 경력 1년차인 그가 8500명의 세무사가 직접 뽑는 세무사회 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다.
 
 
  상대 후보 칭찬으로 세무사회 회장에 연임
 
  “세무사로선 ‘햇병아리’가 세무사회 회장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 아무리 지방청장을 했기로서니 국세청 경력을 안 가진 사람이 50%가 넘어. 국세청 출신이라도 비간부 출신이 좀 많겠어? 세무사 회원 8500명 가운데 저하고 관계없는 이들이 88%나 돼요.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선후배에 떠밀려 후보등록을 했을 때만 해도 회장이 될 거란 생각은 못했어요.”
 
  그는 헐뜯고 비방하며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칭찬하는 포지티브 캠페인으로 맞섰다. 경쟁자들은 국회의원 재선 출신도 있었고 서울지역 회장을 4년이나 한 이도 있었다.
 
  “마타도어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그게 이길 수 있었던 요인이었어요. ‘이런 분과 어깨를 겨루면서 경선에 나왔던 것에 감사하다’고 했지요. 선거참모들이 ‘연습 게임하러 나왔느냐’고 그랬어요. 하지만 전 속으로 내가 이긴다, 아니 제가 이겼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상대방을 제압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마음의 확신을 가져야 기적이 생깁니다. 성경에서도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을 들어 저 산으로 옮긴다’고 하지 않았어요?”
 
  2007년 4월 한국세무사회 25대 회장으로 당선된 그는 2009년 투표 없는 재선의 기쁨도 안았다.
 
  그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인간은 극대화된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고난이라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 고난은 어떤 형식으로든 ‘가치있는 고난’이다. 고난을 바라보는 자세가 자신을 바꾼다. 그가 경험한 유년의 가난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이웃에 대한 관심의 길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에서 고비를 겪게 된다. 고비가 없다면 자신을 뒤돌아볼 수 없다. 고비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새로운 존재 가치와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자만이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조 회장은 그런 사람이다.
 
  그는 공직을 물러난 뒤 더 신나게 세상을 살아간다. 그가 세운 세무법인도 현재 전국에 지사를 여러 개 세울 정도로 커 가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밥을 퍼 나르고, 저금통을 꽉꽉 채워 이웃들에게 전한다. 지난해에는 국세청장 후보 물망에 오르내렸다.
 
  헌신은 학습된다는 말이 있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남을 돕는 자세는 더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는 꿈이다. 조용근 회장은 지금도 배우는 자세로 헌신하고 있다.⊙
 
  사진 : 조준우
 

  ▣ 납세자의 세금도우미, 한국세무사회
 
  한국세무사회는 8500여 명의 세무사로 이뤄진 납세자의 ‘세금도우미’ 단체다. 세무사들의 의무가입이 원칙이다. 조만간 세무사 1만명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이 크다.
 
  서울지방세무사회를 비롯, 중부·부산·대구·광주·대전지회 등 전국 6개 지방세무사회와 100개 지역세무사회를 두고 있으며 기획재정부 장관의 감독을 받는다는 점이 특징. 임원은 회장 1명, 부회장 4명, 이사 25명 이내, 감사 2명으로 구성되며 임원의 임기는 2년이다. 세무사회 회장은 전국 세무사들이 직접 선출한다. 부설기관으로 조세연구소와 세무연수원, 조세도서관이 있다. 국가공인 전산세무회계자격시험을 주관하는 곳도 세무사회다.
 
  세무사회는 특별회계를 합쳐 한 해 예산이 160억원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상당하다. 조용근 회장은 “납세자의 권익 보호와 세무행정 및 납세의무에 기여하는 게 세무사회의 설립목적”이라고 말했다. 납세자에게 양질의 세무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세무사의 재교육에 관심이 많다. 각종 개정 세법을 알리고 세무사에게 전문지식을 제공하거나 연수교육을 실시한다. 또한 세무사 직무의 지도와 감독, 납세자에 대한 무료 세무 상담과 홍보 등 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세무사들은 왠지 꼬장꼬장하고 꼼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납세자의 복잡하고 어려운 세금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조세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까다로운 회계장부를 대신 작성해 주거나 기업의 재무상태를 분석·진단하는 일도 세무사의 몫. 조 회장은 “세무사가 꼬장꼬장한 이미지만 있는 게 아니다”고 손사래 쳤다. “고객의 세금 고민을 해결하는 세무사, 복잡한 세법을 익혀 자문에 응해 주는 세무사,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는 세무사로 진화(進化)하고 있다”고 말했다.
 
  간혹 잘못 부과된 세금에 대한 이의신청과 세법에 어긋난 세무신고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납세자의 세무신고서를 작성하는 일도 그들의 역할이다. 조 회장은 “‘또 세법이 바뀌었다고요? 그럼 얼마를 더 내야 한다는 말이죠?’와 같은 당혹스런 문제까지 세무사들이 다 알아서 상담·조언해 준다”고 귀띔했다. 부가가치세·소득세·법인세 신고, 행정심판을 대리하거나 개별공시지가 이의신청을 대리하는 일까지 세무사의 영역이 넓다.
 
  세무사 시장의 연간 규모는 1조6000억~2조원에 이른다. 상당부분이 세금신고를 작성하는 기장(記帳)업무다. 조 회장은 “기장보다 한 단계 높은 컨설팅 업무와 같은 영역을 세무사들이 개척해야 한다”며 “중소기업 등 거래처의 경영 전반에 대한 조언 등을 통해 사업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도 세무사의 주요한 서비스”라고 말했다. 한국세무사회의 무료세무상담실 전화는 (02)587-3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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