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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십니까?] 張泰玩 전 수도경비사령관

“12·12 쿠데타로 강제 예편당한 군인들 명예회복을!”

오동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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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 전역 후 부친과 외아들 사망하는 등 3代가 고통당해
⊙ 鄭柄宙 특전사령관 1987년 경기도 인근 野山서 死亡… 金五郞 중령 부인, 실명 후 1993년 失足死

張泰玩
⊙ 1931년 경북 칠곡 출생.
⊙ 대구상고, 육군종합학교, 조선대 법대 졸업. 조선대 정치학 명예박사.
⊙ 1950년 육군 소위 임관(종합 11기). 26사단장, 육본 교육참모부 차장,
    수도경비사령관(육군소장) 예편.
⊙ 한국증권전산 회장,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장(27~28대), 16대 국회의원(새천년민주당),
    국회 보훈특별위원장 역임.
⊙ 現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
⊙ 상훈: 충무무공훈장(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보국훈장 천수장, 자랑스런 한국인상(1996),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1998년, 조선일보).
⊙ 저서: <12·12 쿠데타와 나>.
  1979년 12·12사건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張泰玩(장태완·78) 장군은 12·12사건이 나자 신군부 세력에 맞섰다가 강제전역당했다.
 
  “1987년 11월 화병으로 인해 받은 심근경색 수술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 가슴앓이 통증이 가끔씩 재발합니다. 나처럼 12·12군사반란(그는 12·12사건 대신 ‘12·12군사반란’이라고 했다)에 대해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죽기 전에 군사반란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심근경색 수술받기 직전 병실에서 일주일간 <12·12 쿠데타와 나>를 집필했습니다.”
 
  장 장군은 “2008년 6월 폐암 진단을 받고,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며 “매일 걷기와 근력 운동을 하며 지낸다”고 했다. 그는 “국내에 이렇다 할 쿠데타 관련 서적이 없어 나름 내 경험을 보태 가까운 시일 내에 책으로 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3년 7월 19일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다. 검찰은 1994년 10월 29일 12·12사건을 ‘軍(군) 형법상의 군사반란’으로 규정했고, 피고소-고발인 전원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했다.
 
  장태완 장군은 “12·12군사반란은 박정희 대통령이 하나회를 庇護(비호)한 것이 근본 원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은 새로운 쿠데타에 의한 顚覆(전복)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대비책으로 군을 완전 장악하고, 친위부대를 강화하고, 정보보고 체제를 다원화하고, 사조직을 가동했습니다. 특히 사조직은 내부 경쟁이 심한 水平的(수평적) 사조직보다 영속성이 있는 垂直的(수직적) 사조직을 선호했어요. 5·16쿠데타로 세력을 키운 8기생들을 견제하기 위해 전두환·노태우 등 정규 육사 4년제 출신의 사조직을 後見(후견)했습니다.”
 
  그가 1979년 11월 16일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작전참모를 시켜 파악을 해 본 결과 중대장급 이상 간부는 거의 하나회 장교였다고 한다.
 
  “하나회 회원들은 4년마다 진급하도록 규정한 군 인사법을 무시하고 金桂元(김계원) 육군참모총장에게 압력을 행사해 ‘육군인사규정’을 새로 만들어 ‘특별진급’을 시킬 수 있도록 했습니다. 超法的(초법적)으로 2년마다 특별진급을 시키는 바람에 군 5년 후배인 전두환이 내가 준장 진급을 한 지 2년 만에 준장 진급을 했어요. 내가 26사단장으로 나갔더니, 나보다 上格(상격)인 보안사령관이 됐더군요. 그때 사조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崔圭夏(최규하) 대통령, 盧載鉉(노재현) 국방장관만 자리를 지켰다면 군사반란을 막았을 것”이라고 했다.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만 내렸더라면…
 
1996년 12월 16일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12·12와 5·18 사건 항소심 법정에 선 전두환(오른쪽), 노태우(왼쪽) 두 전직 대통령. 박준병 당시 20사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황영시 1군단장 등 당시 12·12의 핵심들의 모습이 보인다(뒷줄 왼쪽부터).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무력으로 납치한 사실을 알았다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게 해달라고 사후 결재를 강요할 때 불호령을 내렸어야 합니다. 무엇이 두려운지 도피한 장관만 찾으면서 반란을 초동에 진압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장태완 장군은 “캄보디아의 마타크 총리처럼 국가원수는 국가 변란의 사태에서 의연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했다. 1975년 4월 12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기 직전, 캄보디아 주재 미국대사가 마타크 총리에게 ‘긴급 피신하라’고 헬리콥터를 보내 국외로 탈출할 것을 권유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조국에서 자유를 선택했던 많은 동포와 운명을 같이하겠다. 사람이 한 번 나서 언젠가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사랑하는 조국과 동포를 버리고 나 혼자 살기 위해 비겁하게 도망가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당신들 미국인을 믿은 과오로 죽어야 하는 사실이 얼마나 애통할지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의 메시지가 미군 헬기에 전해지기가 무섭게 시가전이 벌어졌고, 마타크는 체포돼 몇 시간 후 처형됐다.
 
  그는 12·12사건이 날 때까지 張世東(장세동) 30경비단장(안기부장 역임), 金振永(김진영) 33경비단장(육군참모총장 역임) 등 수경사의 핵심 지휘관들이 반란에 참여한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쉬움이 있다면, 수도경비사령관 취임 24일 만에 겪은 사건이기 때문에 더욱 괴로울 따름입니다. 수경사령관은 ‘셰퍼드’처럼 타격하는 부대라 작전과만 크지, 정보과는 5명의 장교에 불과했습니다. 30경비단에 수도권 일원의 핵심 지휘관들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을 했어요.”
 
  장태완 장군은 쿠데타 진압에 실패하고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1980년 2월 5일 오후 4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장태완 장군이 조사를 받고 있는 서빙고 분실 2층에 있는 분실장실로 왔다. 장태완 장군이 면담실로 들어서자 전두환 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 선배!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건강은 어떠십니까”라며 손목을 덥석 잡았다고 한다.
 
 
  서빙고 분실에서 全斗煥과의 만남
 
장태완 장군의 가족사진. 앞줄 왼쪽이 부인 이병호 여사, 뒷줄 오른쪽은 장녀 장현리, 왼쪽은 12·12사태 이후 의문사한 아들 서울대 자연대 재학생 장성호씨.
  그 무렵 장태완 장군은 70kg의 몸무게가 58kg으로 줄어 있었다고 한다.
 
  “나야 이래저래 죽을 놈인데 건강 같은 것이 무슨 문제겠소. 전 장군,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내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오?”
 
  그러자 전두환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정승화 장군이 김재규 사건과 관련이 있는데도 조사에 불응하기 때문에 군 발전을 위해서 정 총장님께 가서 총장직을 내놓고 약 6개월 정도 댁에서 쉬고 계시면 대사나 장관, 그보다 더한 자리를 보장해 드릴 것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그때 “이 친구들이 쿠데타 계획을 치밀하게 짰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계속해서 전두환 장군의 말이다.
 
  “(정승화) 총장님께서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그 내용이 장 선배에게 전달돼 사건이 확대된 겁니다.”
 
  장태완 장군이 다그쳐 물었다.
 
  “그날 밤 연희동 술자리 장소에 당신 부대원들을 위장 배치해 놓았다가 우릴 얼마든지 처치할 수도 있지 않았소? 내 발로 내가 지휘할 수 있는 부대까지 갈 수 있도록 놔두었으니 내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오?”
 
  이에 전두환 장군이 이렇게 대답했다.
 
  “밑에 사람들이 장 선배를 사전에 연금시키자는 것을 내가 야단을 쳤어요. 그 어른은 우리가 모시고 큰일을 함께할 분인데 그렇게 하면 되겠나. 장 선배가 야단법석을 떠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입장이 난처했는지 모릅니다. 장 선배가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다음날 장 선배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군단장으로 내보내려고 했던 겁니다. 사정이 그렇게 된 것을 이해하시고 집에 가셔서 약 6개월 동안 쉬고 계시면 저희가 일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모든 것은 끝났소. 敗將(패장)으로서 죽이지 않고 집으로 보내준다니 나가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감방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장태완 장군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30년 군 생활을 마감하는 예편서를 썼다.
 
  “보안사 수사관들이 ‘일신상의 사유로 인해 예편을 상신합니다’라고 쓰라며 예편서를 내밀었어요. 막상 예편서를 쓰려고 하니 왈칵 울분이 북받쳐 올라왔어요.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3년간 소대장, 중대장 하던 시절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겁니다. 떨리는 손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후 예편서에 몇 자를 적었어요.”
 
 
  부친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
 
12·12사태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의 부인 백영옥 여사(오른쪽).
  1980년 3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출감한 장태완 장군은 30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다. 그는 출감 후 6개월 동안 사실상 가택연금 생활을 했다. 특수수사대 요원 두 명이 봉천동 자택에 상주했기 때문.
 
  “12·12군사반란 소식을 접한 부친은 ‘옛날부터 나라에 謀反(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며 막걸리 외에는 食飮(식음)을 단절하고 이듬해 4월 18일 73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불행은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했던가. 장태완 장군의 외아들 성호(1962년생)씨가 행방불명된 것이다. 가택연금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자연대학에 입학, 그해 자연대 수석을 차지한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성호씨는 평소 “아버지는 군인으로서 자신의 책임완수를 위해 충정을 다한 것을 역사는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며 부친을 위로했다고 한다.
 
  장 장군은 “1982년 1월 9일 아침, 안방에서 역사책을 보고 있던 내게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하고 으레 대문까지 배웅을 나가는 제 어미의 젖가슴을 두어 번 주물러 보곤 대문을 나선 것이 아들과의 마지막 인사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다급한 마음에 민정당 權正達(권정달) 사무총장과 朴俊炳(박준병) 보안사령관에게 수소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튿날인 1982년 2월 10일 서울대 당직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던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습니다. 아들은 경북 왜관읍에서 고향인 인동 쪽으로 1km 떨어진 낙동강 인근의 산기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1982년 2월 12일 아들 성호를 용인공원묘지에 안장한 후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내외의 인생은 사랑하는 성호(아들)가 이 세상을 떠났던 1982년 1월 9일로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인생은 더부살이로서 우리 일가 3代(대)를 망친 12·12사건을 저주하면서 불쌍한 외동딸 현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12·12사건 이튿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주도세력은 보안사령부 마당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반면 12·12사건 진압에 실패한 군인들과 그 가족들은 큰 불행을 겪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군사반란 소식을 듣고 연희동 술자리에서 긴급히 부대로 돌아와 인천의 9공수여단을 출동시켰고, 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부대 이동을 지시했다. 그러나 9공수여단은 육참차장 尹誠敏(윤성민) 중장의 명령으로 回軍(회군)하고, 그 사이 1공수여단, 3공수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 전두환 장군은 3공수여단장 崔世昌(최세창) 장군에게 특전사령관 체포 명령을 내린다.
 
 
  金五郞 중령 부인, 남편 잃은 충격으로 실명 후 失足死
 
1987년 11월 25일, 12·12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정병주(오른쪽)씨와 육군헌병감이었던 김진기(왼쪽)씨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특전사령관 체포 과정에서 특전사 비서실장 金五郞(김오랑) 소령은 3공수여단 병사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戰死(전사)했다.
 
  김오랑 소령은 鄭鎬溶(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요청으로 국립묘지에 안장은 됐으나, 그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사망했고, 부인도 충격으로 실명한 후 1993년 失足死(실족사)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987년 12·12군사반란을 재평가하는 운동을 벌이다 1989년 경기도 의정부 인근 야산에서 숨을 거뒀다. 장태완 장군의 말이다.
 
  “정병주 장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분이 아니었어요. 돌아가기 이틀 전 나와 보신탕을 먹으며 ‘장 장군, 저놈들 끝장 보는 것을 보고 죽자’라고 했어요. 하소곤 장군은 흉부 관통상을 당해 폐를 절반 정도 떼어내고 부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답니다. 이름도 없이 죽어간 친구가 국방부 초병 정선엽 병장입니다. 국립묘지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외딴 구석에 외롭게 묻혀 있어요.”
 
  장태완 장군은 “군사반란 주모자는 군형법에 따라 반드시 처형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군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 군사반란을 진압하던 사람들은 강제로 전역을 당해 비참한 삶을 살고 있고, 반란군에 가담한 군인들은 수경사령관, 보안사령관, 군사령관, 참모총장을 다 해먹었으니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이 어디 있어요?”
 
  장태완 장군은 “李明博(이명박) 정부는 강제 예편된 군인들의 功過(공과)를 따져 명예회복 작업을 서둘러야 하고, 국방부도 전사자·전상자·강제예편자들을 돌봐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장태완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12·12사건의 顚末(전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소. 난 오직 묵묵부답으로 답하고 싶을 따름이오. 난 국가와 민족과 역사 앞에 속죄받을 수 없는 죄인이에요. 이유야 어떻든 自決(자결)해도 모자라겠지만, 국가가 맡겨준 수도경비사령관과 비상계엄하의 수도계엄사무소장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속죄를 비는 마음으로 生(생)을 이어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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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9-04-22) 찬성 : 0   반대 : 1
이제 장태완 어르신이 돌아가신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너무나도 보고싶습니다!!!! ㅠㅠㅠㅠㅠ 이런분이 최고위직에 오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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