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물에 살던 고기가 바다에 나온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18대 總選(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된 林斗成(임두성·59) 의원은 18대 국회 첫 6개월을 보낸 소감을 “여전히 어색하다”며 이렇게 표현했다. 첫 정기국회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대로부터 ‘우수의원’으로 뽑혔지만, 임 의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하다”고 말했다. 임 의원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가족위원회 소속으로 의료기관의 도덕적 해이와 건강보험 관련 문제를 적절히 지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껏 의원 배지를 단 기쁨을 누릴 시기인데 왜 벌써 초조한 것일까?
“다른 의원들이야 再選(재선)에 도전할 수 있지만 저에겐 딱 한번뿐인 기회입니다. 임기 4년 동안 사회에 대해 응어리진 한센인의 恨(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야 하는데 벌써 6개월이 흘렀다 생각하니 초조해집니다.”
임 의원은 과거 한센병을 앓았던 병력을 가진 자신의 정치적 유효기간을 18대 국회로 한정하고 있었다. ‘天刑(천형)’이라 불린 癩病(나병) 병력자에게 이런 기회가 다시 오기 힘들 것이란 점을 그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임 의원은 “과거 우리 사회에서 ‘문둥이’라 부르며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한센인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고 누가 생각했겠느냐”며 “하늘이 준 기회인 만큼 4년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초조함 때문일까, 임 의원은 登院(등원)한 뒤 지금까지 32건의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18대 국회가 81일이나 헛돌다 지난 8월 19일 院(원) 구성을 한 것을 감안하면, 이후 석달 간 사흘에 한 건꼴로 법안을 발의한 셈이다. 법안 내용도 고엽제후유의증 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처럼 소외계층을 위한 법률부터 식품위생법 일부 개정안 등 일반 보건복지 사안까지 다양하다. 한센인 출신 첫 국회의원의 출발은 산뜻한 편이다.
16살 때 한센병 걸려
임 의원이 한나라당 비례대표 2번으로 공천을 받았을 때 여의도 국회 주변에선 “의외”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소외계층 대변을 표방해온 민주당 등에서도 예상하기 어려운 한나라당의 ‘깜짝 카드’였던 것이다. 그 자신도 “내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며 “아마 지역구 공천 파동으로 홍역을 겪은 한나라당이 부정적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나를 공천해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웃었다.
“한센인들의 모임인 한빛복지협회장을 지내면서 회원들한테 출마 권유를 받긴 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한센인이 정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특별히 정치권과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한참을 고민하다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인데 신청이나 해보자고 서류를 만들어 접수를 하러 갔는데, 공천 심사장에 가보니 정말 절망적이더군요.”
지난 3월 10, 11일 이틀간에 걸쳐 접수한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 신청에 임 의원은 둘째날인 11일 신청을 했다. 그러나 임 의원은 공천 신청 접수장에 몰린 쟁쟁한 ‘정치지망생’들을 보자 그동안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한센인의 피해의식이 다시 되살아났다고 했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접수자들의 이력서에 빼곡히 들어찬 화려한 학·경력에 주눅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공천 신청을 하러 한나라당 당사에 들어가기 전 ‘절대 주눅들지 말자. 한센인들의 한과 응어리를 풀 기회가 나한테 달려있다’란 생각을 곱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접수장에 대기하면서 옆 사람들의 서류를 보니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에 일류대학 출신과 외국 박사는 왜 그리 많은지…. 서류심사만 한다면 제가 꼴찌일 게 분명했어요. 솔직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집권여당의 비례대표 신청자들의 이력이 화려할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른 바 아니지만 막상 이 사실을 확인해보니 눈앞이 캄캄해졌다는 것이다. 한센병을 앓아 가족과 사회와 격리돼 살아온 임 의원에겐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였다. 이력도 한센인들의 모임인 한빛복지협회장 직함이 고작이었다.
이런 임 의원이 3월 24일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50명 발표 명단의 맨 위에 들어있었다. 당시 임 의원의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확정에 대해 언론은 ‘강·부·자(강남 땅 부자) 내각’과 ‘영남 편중 인사’ 논란에 시달리던 여권이 취약 분야인 소외계층과 호남 출신 배려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한센병 환자 출신에 전남 해남 출신인 임 의원은 이 기준에 딱 떨어지는 셈이었다.
비례대표 후보자 발표 당시의 심정을 임 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너무 기뻐서 뭐라 말도 못하고 방을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가족과 사회에서 격리된 채 좌절과 수모를 겪어온 지난 인생이 스쳤습니다. 누구보다 한빛복지협회 회원들이 기뻐해줬습니다. 사회에서 천대 받고 격리돼 살아온 회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쁨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한센인 회원 모두가 국회의원’이라며 열심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임 의원이 한센병을 앓은 건 16살 때였다. 여느 한센 병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처음엔 발병 여부조차 몰랐다.
“한센병은 몸의 신경이 무뎌지다 마비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신경이 마비되다 보니 상처가 나도 모른 채 생활을 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상처가 덧나고 이게 점점 심해지면 손이나 발이 문드러지고 얼굴이 붓고 기형으로 바뀌지요. 과거 한센병을 ‘나병’ ‘문둥병’이라고 부른 것도 사람의 외관을 흉측하게 바꾸기 때문이었어요.
“두성아, 소록도로 가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던데…”
그런데 저 역시 한센병을 앓는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겨울 날 옷을 벗었는데 상처에서 흘러나온 진물에 옷이 들러붙은 걸 보고 어머니가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어머니도 믿고 싶지 않았는지 나병일 것 같다고 짐작은 하면서도 나에게 말씀은 안 했어요.”
임 의원이 한센병 환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건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이 아닌 동네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사람들이 ‘두성이가 문둥병에 걸린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고 한다. 농사일을 하다 보니 상처가 옷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얼굴에도 조금씩 표시가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임 의원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거나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 부모가 ‘두성이랑 놀지 마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아 내가 몹쓸 병인 한센병 환자가 됐구나’란 생각에 죽고 싶었다”고 했다.
한센병 선고는 곧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임 의원 본인은 물론 품앗이를 해서 생계를 꾸리던 임 의원 어머니의 일거리도 떨어져나갔다. 고향 땅에서 가족과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은 한센병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다 18살 나던 해 어느 날 장터에 나갔다가 한 노인이 ‘너는 여기서는 살 수 없다. 소록도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소록도行(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내가 이제 누가 봐도 한센병 환자란 게 표시가 나는구나란 생각에 내 자신이 처량해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선 살 수 없겠구나란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어요. 그 길로 집에 가서 어머니께 ‘소록도에 가서 살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임 의원을 사람들이 없는 산속으로 데려가 통곡을 했다. 어머니는 “두성아. 소록도로 가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던데… 일을 어쩌느냐”며 울기만 했다. 결국 임 의원은 어머니와 두 동생을 뒤로 하고 야반도주하듯 소록도행 배에 올랐다. 그는 “소록도로 가는 길에 바다에 빠져 죽을 작정이었다”며 “내 짧은 인생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바닷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니 어느새 배가 소록도에 도착해 죽지 못했다”고 했다.
소록도 생활 2년 만에 완치
소록도 생활은 단조롭고도 피동적이었다. 같은 시간에 먹고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로봇 같은 공동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임 의원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던 예민한 시기였는데 내가 이 세상을 살아서 뭣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며 “그 시절엔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나마 한센 병력자들과 함께 살다 보니 일반인들의 멸시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는 게 유일한 樂(낙)이었다.
그러다 20세 나던 해 기적같이 한센병이 완치됐다고 한다. 소록도에 들어온 지 2년 만이었다. 불치병으로만 알았던 한센병이 언제 나았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나았던 것이다. 본인이 보기에 이제 외견상 한센 병력자란 표시도 안 날 것 같았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임 의원은 그 길로 고향 해남으로 돌아갔지만 이내 고향을 뜰 수밖에 없었다. 고향은 더 이상 임 의원이 꿈에 그리던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임 의원은 “나는 완치됐지만 한센병은 불치병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고향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문둥이 취급하며 멀리했다”며 “내가 고향에 있는 한 가족들이 먹고살 거리조차 찾을 수 없어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임 의원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향을 떠나 육지로 나갔다. 목포와 대전을 떠돌며 식당 배달부, 구두닦이, 넝마주이를 하며 밥벌이를 했다. 물론 한센 병력은 감춘 채였지만 얼마 안돼 기가 막힐 정도로 “저놈 문둥이 아니야”란 소문이 주변에서 돌았다고 한다.
“한센병력을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완치가 됐다곤 하지만 마비된 신경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거든요. 특히 밑바닥 생활이라는 게 단체생활에 가깝다 보니 내 몸의 상처나 흉터를 본 동료들이 ‘문둥이’ ‘더러운 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어요.”
이 시절 임 의원의 사회생활은 정상인들로부터 도망의 연속이었다. 사회 어디에도 임 의원이 살 곳은 없는 것 같은 절망이 휘감았다. 임 의원은 “사람들이 똥을 옆에 놓고 밥을 먹을지언정 한센인은 상대도 하지 않는 시절이었다”고 했다. 정상인에 의한 소외와 수모감은 깊어졌다.
결국 임 의원은 1970년대 초 강원도 인제에 있는 한센인 집단거주지를 찾았다.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겠다는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 도착해보니 “어머니 품 같았다”고 한다. 13가구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얼마 뒤 인근 원주에 있는 한센인 마을과 합쳐져 150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 됐다. 물론 일반인 마을과 떨어진 원주 산골짜기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곳에서 임 의원은 닭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한센인 마을 정착해 인권에 눈떠
생계 유지의 방편으로 시작한 축산 일이었지만, 임 의원은 일을 시작하면서 한센인 등 장애인의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한센인들이 직접 장터에 달걀을 내다팔 형편이 못 돼 대부분 중간상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달걀을 사갔는데 정상인 마을의 달걀 가격에 턱없이 못 미치는 가격밖에 못 받는 점에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는 것이다.
“똑같은 닭이 나은 달걀인데 한센인 마을의 달걀은 정상인 마을의 달걀 값의 절반에도 못 미쳤어요. 중간상인들은 ‘우리가 안 사가면 너희가 달걀을 어디다 팔 것이냐’는 식의 횡포를 부렸습니다. 사회적 약자인 한센인들은 똑같은 노동력을 투입하고도 제값을 못 받는 정상인의 차별과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왜 한센인이 기른 닭까지 차별받아야 합니까.”
임 의원은 동네 사람들을 규합해 축산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가뜩이나 약자인 한센인 한명 한명이 정상인을 상대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축산농가는 모든 생산물을 조합에 납품하고 조합 측이 중간상인들을 상대로 협상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 중간상인들도 예전처럼 헐값에 달걀을 사가는 횡포가 줄어들었다. 이 공로로 임 대표는 이후 조합장과 마을 대표가 됐고 조합의 월 매출이 1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한센인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팽배하던 이 시절, 임 의원은 한 줄기 빛 같은 사람으로 故(고) 陸英修(육영수) 여사를 꼽았다. 그는 “가족에게마저 버려진 한센인에게 육 여사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며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 한센인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 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센인들이 육 여사와 인연을 맺게 된 건 강원도에서 한센인 정착마을을 만들다 지역주민의 반발에 부딪히면서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우리 동네에 감히 한센인 마을을 만들려 하느냐”며 한센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한센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청와대로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육 여사께서 마을에 한번 다녀가시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임 의원은 “기대도 안 했는데 육 여사께서 마을을 꼭 방문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주셨다”며 “정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 소식에 주변 마을 사람들은 한센인 마을 건설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 여사의 방문이 늦어지자 동네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영부인께서 할 일이 없어서 너희 같은 문둥이를 찾아오신단 말이냐”며 더 거세게 마을 건설을 방해했다.
다급해진 임 의원 등 한센인들은 이런 사정을 담아 다시 청와대로 편지를 보냈고 육 여사는 며칠 뒤 헬리콥터를 타고 이 마을로 직접 날아왔다. 임 의원은 “육 여사를 도지사와 시장 등 고위 공무원들이 수행해왔는데 육 여사께서 ‘어려운 한센인들을 도와달라’는 말씀에 마을 건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했다. 이후 몇 차례 더 한센인 마을을 찾은 육 여사는 한센인들이 만류하는데도 그들과 함께 우물의 물을 떠 마시고 감자도 쪄먹었다고 한다.
육 여사의 지원으로 정착촌 건설이 어느 정도 완성된 1970년대 중반, 임 의원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센인의 딸로, 현재 부인인 정억순씨다. 임 의원은 호감은 갖고 있었지만 정상인인 정씨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임 의원은 마음에만 품어오던 부인 정씨와 맞선을 보던 날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했다.
편견에 맞서다
“선을 보러 나갔는데 첫눈에 ‘이 여자다’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은 ‘내가 싫다’는 겁니다. 한센인이어서 싫은가 보다란 생각에 단념하려 했습니다. 그동안 한센 병력자란 이유로 너무나 많은 좌절을 맛봐온 나로선 다시 상처 받기 싫었어요. 그래도 이유나 알고 단념하자는 심정으로 ‘왜 싫으냐’고 물었더니 집사람이 ‘못 생겨서 싫다’는 거예요. 그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임 의원은 “그때 집사람이 나에게 ‘한센인이어서 싫다’고 했으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얼굴이 좀 못났으면 어떠냐, 밥은 절대 굶기지 않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부인에게 끈질기게 求愛(구애)를 펼쳐 결국 결혼했다.
부인 정씨와의 사이에 두 자녀를 둔 임 의원은 이후 1만4000명에 달하는 한센인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전달될 수 있도록 한빛복지재단을 만들어 차별과 소외에 맞섰다. 소록도에 한센인들을 강제 격리시킨 일본 정부를 상대로도 보상 투쟁을 벌여 입법을 통한 보상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워낙 차별과 멸시가 뿌리깊어 그의 활동도 간혹 거칠어졌다. 그의 전력 중 前科(전과)가 12건이나 되는 것도 이런 저항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전과 문제는 제 인생을 되돌아볼 때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변명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의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전달됐다면 저 역시 우악스럽게 싸우진 않았을 겁니다.”
딸 아이 결혼때도 한센병 때문에…
임 의원은 몇 해 전 딸의 결혼 문제로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다 희망을 발견했다고 했다. 딸의 결혼에 찬성하던 사돈 측에서 임 의원이 한센 병력자인 걸 알고 반대하면서 혼사가 깨질 뻔했다 성사됐다는 것이다. 임 의원은 “내가 한센병 인권운동을 벌이는 장면을 TV에서 본 사돈댁에서 내 병력을 알고 결혼을 반대했다”며 “내 병력 때문에 아이들의 앞길까지 막는구나 하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이때 임 의원은 고민 끝에 가족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 결혼은 포기하자”고 선언했다고 한다. 임 의원은 “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완치된 한센병, 그것도 유전이 되지 않는 아버지의 한센병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한다면 그런 집에 시집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결국 결혼은 없던 일이 됐는데, 얼마 뒤 사돈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임 의원은 사돈 측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나갔다.
“사돈 측은 훌륭한 교육자 집안이었어요. 그런 교육자 집안조차 한센인에 대한 편견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결혼은 물 건너 갔지만 나가서 사돈댁에 오히려 내가 단단히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약속 장소에 들어선 순간, 사돈 측에서 “미안하다. 정말 우리가 잘못 생각했다”며 사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 의원은 “사돈이 내 손을 붙들고 사과부터 하며 ‘아이들을 결혼시키자’고 하는 바람에 애초 항의하려던 나는 말할 기회도 없었다”며 “딸 아이의 결혼 문제를 겪으며 한센인에 대한 편견의 한 고비를 넘었다는 희망이 보였다”고 했다.
임 의원은 “WHO(국제보건기구)는 1988년 한국을 한센병 퇴치국으로 공식 선언하고 담당관을 철수시켰다”면서 “정작 한센인들이 사회에서 버려져 고통스럽던 1950~1980년대에 의원이 필요했는데 늦은 감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남은 18대 국회 동안 한센인만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아닌 모든 소외계층에 관심을 기울이는 의정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4월, 18대 總選(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 2번으로 당선된 林斗成(임두성·59) 의원은 18대 국회 첫 6개월을 보낸 소감을 “여전히 어색하다”며 이렇게 표현했다. 첫 정기국회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대로부터 ‘우수의원’으로 뽑혔지만, 임 의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하다”고 말했다. 임 의원은 이번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가족위원회 소속으로 의료기관의 도덕적 해이와 건강보험 관련 문제를 적절히 지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껏 의원 배지를 단 기쁨을 누릴 시기인데 왜 벌써 초조한 것일까?
“다른 의원들이야 再選(재선)에 도전할 수 있지만 저에겐 딱 한번뿐인 기회입니다. 임기 4년 동안 사회에 대해 응어리진 한센인의 恨(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야 하는데 벌써 6개월이 흘렀다 생각하니 초조해집니다.”
임 의원은 과거 한센병을 앓았던 병력을 가진 자신의 정치적 유효기간을 18대 국회로 한정하고 있었다. ‘天刑(천형)’이라 불린 癩病(나병) 병력자에게 이런 기회가 다시 오기 힘들 것이란 점을 그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다. 임 의원은 “과거 우리 사회에서 ‘문둥이’라 부르며 천대받고 멸시당하던 한센인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고 누가 생각했겠느냐”며 “하늘이 준 기회인 만큼 4년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초조함 때문일까, 임 의원은 登院(등원)한 뒤 지금까지 32건의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18대 국회가 81일이나 헛돌다 지난 8월 19일 院(원) 구성을 한 것을 감안하면, 이후 석달 간 사흘에 한 건꼴로 법안을 발의한 셈이다. 법안 내용도 고엽제후유의증 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처럼 소외계층을 위한 법률부터 식품위생법 일부 개정안 등 일반 보건복지 사안까지 다양하다. 한센인 출신 첫 국회의원의 출발은 산뜻한 편이다.
16살 때 한센병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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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18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당선증 교부식에 한나라당 대표로 참석한 임두성 의원(맨 왼쪽). |
“한센인들의 모임인 한빛복지협회장을 지내면서 회원들한테 출마 권유를 받긴 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한센인이 정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특별히 정치권과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한참을 고민하다 어차피 밑져봐야 본전인데 신청이나 해보자고 서류를 만들어 접수를 하러 갔는데, 공천 심사장에 가보니 정말 절망적이더군요.”
지난 3월 10, 11일 이틀간에 걸쳐 접수한 한나라당 비례대표 공천 신청에 임 의원은 둘째날인 11일 신청을 했다. 그러나 임 의원은 공천 신청 접수장에 몰린 쟁쟁한 ‘정치지망생’들을 보자 그동안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한센인의 피해의식이 다시 되살아났다고 했다. 어깨너머로 보이는 접수자들의 이력서에 빼곡히 들어찬 화려한 학·경력에 주눅부터 들었다는 것이다.
“공천 신청을 하러 한나라당 당사에 들어가기 전 ‘절대 주눅들지 말자. 한센인들의 한과 응어리를 풀 기회가 나한테 달려있다’란 생각을 곱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접수장에 대기하면서 옆 사람들의 서류를 보니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상에 일류대학 출신과 외국 박사는 왜 그리 많은지…. 서류심사만 한다면 제가 꼴찌일 게 분명했어요. 솔직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집권여당의 비례대표 신청자들의 이력이 화려할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른 바 아니지만 막상 이 사실을 확인해보니 눈앞이 캄캄해졌다는 것이다. 한센병을 앓아 가족과 사회와 격리돼 살아온 임 의원에겐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전부였다. 이력도 한센인들의 모임인 한빛복지협회장 직함이 고작이었다.
이런 임 의원이 3월 24일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50명 발표 명단의 맨 위에 들어있었다. 당시 임 의원의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 확정에 대해 언론은 ‘강·부·자(강남 땅 부자) 내각’과 ‘영남 편중 인사’ 논란에 시달리던 여권이 취약 분야인 소외계층과 호남 출신 배려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한센병 환자 출신에 전남 해남 출신인 임 의원은 이 기준에 딱 떨어지는 셈이었다.
비례대표 후보자 발표 당시의 심정을 임 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너무 기뻐서 뭐라 말도 못하고 방을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가족과 사회에서 격리된 채 좌절과 수모를 겪어온 지난 인생이 스쳤습니다. 누구보다 한빛복지협회 회원들이 기뻐해줬습니다. 사회에서 천대 받고 격리돼 살아온 회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쁨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한센인 회원 모두가 국회의원’이라며 열심히 하겠다고 했습니다.”
임 의원이 한센병을 앓은 건 16살 때였다. 여느 한센 병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처음엔 발병 여부조차 몰랐다.
“한센병은 몸의 신경이 무뎌지다 마비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신경이 마비되다 보니 상처가 나도 모른 채 생활을 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상처가 덧나고 이게 점점 심해지면 손이나 발이 문드러지고 얼굴이 붓고 기형으로 바뀌지요. 과거 한센병을 ‘나병’ ‘문둥병’이라고 부른 것도 사람의 외관을 흉측하게 바꾸기 때문이었어요.
“두성아, 소록도로 가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던데…”
그런데 저 역시 한센병을 앓는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어느 겨울 날 옷을 벗었는데 상처에서 흘러나온 진물에 옷이 들러붙은 걸 보고 어머니가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어머니도 믿고 싶지 않았는지 나병일 것 같다고 짐작은 하면서도 나에게 말씀은 안 했어요.”
임 의원이 한센병 환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건 가까이에서 지켜본 가족이 아닌 동네 사람들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 사람들이 ‘두성이가 문둥병에 걸린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고 한다. 농사일을 하다 보니 상처가 옷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고 얼굴에도 조금씩 표시가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임 의원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거나 친구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 부모가 ‘두성이랑 놀지 마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아 내가 몹쓸 병인 한센병 환자가 됐구나’란 생각에 죽고 싶었다”고 했다.
한센병 선고는 곧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다. 임 의원 본인은 물론 품앗이를 해서 생계를 꾸리던 임 의원 어머니의 일거리도 떨어져나갔다. 고향 땅에서 가족과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은 한센병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다 18살 나던 해 어느 날 장터에 나갔다가 한 노인이 ‘너는 여기서는 살 수 없다. 소록도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소록도行(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내가 이제 누가 봐도 한센병 환자란 게 표시가 나는구나란 생각에 내 자신이 처량해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선 살 수 없겠구나란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어요. 그 길로 집에 가서 어머니께 ‘소록도에 가서 살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임 의원을 사람들이 없는 산속으로 데려가 통곡을 했다. 어머니는 “두성아. 소록도로 가면 죽는 것만 못하다고 하던데… 일을 어쩌느냐”며 울기만 했다. 결국 임 의원은 어머니와 두 동생을 뒤로 하고 야반도주하듯 소록도행 배에 올랐다. 그는 “소록도로 가는 길에 바다에 빠져 죽을 작정이었다”며 “내 짧은 인생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바닷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니 어느새 배가 소록도에 도착해 죽지 못했다”고 했다.
소록도 생활 2년 만에 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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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임두성 당시 비례대표 후보가 ‘비례대표 후보자 국민과의 언약식’에서 출마의 변을 밝히고 있다. |
소록도 생활은 단조롭고도 피동적이었다. 같은 시간에 먹고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로봇 같은 공동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임 의원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던 예민한 시기였는데 내가 이 세상을 살아서 뭣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며 “그 시절엔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나마 한센 병력자들과 함께 살다 보니 일반인들의 멸시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는 게 유일한 樂(낙)이었다.
그러다 20세 나던 해 기적같이 한센병이 완치됐다고 한다. 소록도에 들어온 지 2년 만이었다. 불치병으로만 알았던 한센병이 언제 나았는지 모를 정도로 빨리 나았던 것이다. 본인이 보기에 이제 외견상 한센 병력자란 표시도 안 날 것 같았고 고향으로 돌아가도 정상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임 의원은 그 길로 고향 해남으로 돌아갔지만 이내 고향을 뜰 수밖에 없었다. 고향은 더 이상 임 의원이 꿈에 그리던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임 의원은 “나는 완치됐지만 한센병은 불치병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고향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문둥이 취급하며 멀리했다”며 “내가 고향에 있는 한 가족들이 먹고살 거리조차 찾을 수 없어 결국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임 의원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향을 떠나 육지로 나갔다. 목포와 대전을 떠돌며 식당 배달부, 구두닦이, 넝마주이를 하며 밥벌이를 했다. 물론 한센 병력은 감춘 채였지만 얼마 안돼 기가 막힐 정도로 “저놈 문둥이 아니야”란 소문이 주변에서 돌았다고 한다.
“한센병력을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완치가 됐다곤 하지만 마비된 신경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거든요. 특히 밑바닥 생활이라는 게 단체생활에 가깝다 보니 내 몸의 상처나 흉터를 본 동료들이 ‘문둥이’ ‘더러운 놈’하며 수군대기 시작했어요.”
이 시절 임 의원의 사회생활은 정상인들로부터 도망의 연속이었다. 사회 어디에도 임 의원이 살 곳은 없는 것 같은 절망이 휘감았다. 임 의원은 “사람들이 똥을 옆에 놓고 밥을 먹을지언정 한센인은 상대도 하지 않는 시절이었다”고 했다. 정상인에 의한 소외와 수모감은 깊어졌다.
결국 임 의원은 1970년대 초 강원도 인제에 있는 한센인 집단거주지를 찾았다.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겠다는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모인 그곳에 도착해보니 “어머니 품 같았다”고 한다. 13가구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었는데 얼마 뒤 인근 원주에 있는 한센인 마을과 합쳐져 150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 됐다. 물론 일반인 마을과 떨어진 원주 산골짜기에 자리를 잡았지만, 이곳에서 임 의원은 닭을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한센인 마을 정착해 인권에 눈떠
생계 유지의 방편으로 시작한 축산 일이었지만, 임 의원은 일을 시작하면서 한센인 등 장애인의 인권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한센인들이 직접 장터에 달걀을 내다팔 형편이 못 돼 대부분 중간상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달걀을 사갔는데 정상인 마을의 달걀 가격에 턱없이 못 미치는 가격밖에 못 받는 점에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는 것이다.
“똑같은 닭이 나은 달걀인데 한센인 마을의 달걀은 정상인 마을의 달걀 값의 절반에도 못 미쳤어요. 중간상인들은 ‘우리가 안 사가면 너희가 달걀을 어디다 팔 것이냐’는 식의 횡포를 부렸습니다. 사회적 약자인 한센인들은 똑같은 노동력을 투입하고도 제값을 못 받는 정상인의 차별과 횡포에 시달렸습니다. 왜 한센인이 기른 닭까지 차별받아야 합니까.”
임 의원은 동네 사람들을 규합해 축산조합을 결성하기로 했다. 가뜩이나 약자인 한센인 한명 한명이 정상인을 상대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축산농가는 모든 생산물을 조합에 납품하고 조합 측이 중간상인들을 상대로 협상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 중간상인들도 예전처럼 헐값에 달걀을 사가는 횡포가 줄어들었다. 이 공로로 임 대표는 이후 조합장과 마을 대표가 됐고 조합의 월 매출이 1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한센인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팽배하던 이 시절, 임 의원은 한 줄기 빛 같은 사람으로 故(고) 陸英修(육영수) 여사를 꼽았다. 그는 “가족에게마저 버려진 한센인에게 육 여사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며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 한센인에게 다가와 손을 내민 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센인들이 육 여사와 인연을 맺게 된 건 강원도에서 한센인 정착마을을 만들다 지역주민의 반발에 부딪히면서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우리 동네에 감히 한센인 마을을 만들려 하느냐”며 한센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한센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청와대로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육 여사께서 마을에 한번 다녀가시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임 의원은 “기대도 안 했는데 육 여사께서 마을을 꼭 방문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주셨다”며 “정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 소식에 주변 마을 사람들은 한센인 마을 건설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 여사의 방문이 늦어지자 동네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영부인께서 할 일이 없어서 너희 같은 문둥이를 찾아오신단 말이냐”며 더 거세게 마을 건설을 방해했다.
다급해진 임 의원 등 한센인들은 이런 사정을 담아 다시 청와대로 편지를 보냈고 육 여사는 며칠 뒤 헬리콥터를 타고 이 마을로 직접 날아왔다. 임 의원은 “육 여사를 도지사와 시장 등 고위 공무원들이 수행해왔는데 육 여사께서 ‘어려운 한센인들을 도와달라’는 말씀에 마을 건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했다. 이후 몇 차례 더 한센인 마을을 찾은 육 여사는 한센인들이 만류하는데도 그들과 함께 우물의 물을 떠 마시고 감자도 쪄먹었다고 한다.
육 여사의 지원으로 정착촌 건설이 어느 정도 완성된 1970년대 중반, 임 의원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센인의 딸로, 현재 부인인 정억순씨다. 임 의원은 호감은 갖고 있었지만 정상인인 정씨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임 의원은 마음에만 품어오던 부인 정씨와 맞선을 보던 날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했다.
편견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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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두성 의원이 지난 10월 17일 국정감사 시찰을 위해 서울시립서부노인전문요양센터를 방문, 현황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 |
임 의원은 “그때 집사람이 나에게 ‘한센인이어서 싫다’고 했으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얼굴이 좀 못났으면 어떠냐, 밥은 절대 굶기지 않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부인에게 끈질기게 求愛(구애)를 펼쳐 결국 결혼했다.
부인 정씨와의 사이에 두 자녀를 둔 임 의원은 이후 1만4000명에 달하는 한센인들의 목소리가 사회에 전달될 수 있도록 한빛복지재단을 만들어 차별과 소외에 맞섰다. 소록도에 한센인들을 강제 격리시킨 일본 정부를 상대로도 보상 투쟁을 벌여 입법을 통한 보상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워낙 차별과 멸시가 뿌리깊어 그의 활동도 간혹 거칠어졌다. 그의 전력 중 前科(전과)가 12건이나 되는 것도 이런 저항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전과 문제는 제 인생을 되돌아볼 때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변명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의 목소리가 정상적으로 전달됐다면 저 역시 우악스럽게 싸우진 않았을 겁니다.”
딸 아이 결혼때도 한센병 때문에…
임 의원은 몇 해 전 딸의 결혼 문제로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보다 희망을 발견했다고 했다. 딸의 결혼에 찬성하던 사돈 측에서 임 의원이 한센 병력자인 걸 알고 반대하면서 혼사가 깨질 뻔했다 성사됐다는 것이다. 임 의원은 “내가 한센병 인권운동을 벌이는 장면을 TV에서 본 사돈댁에서 내 병력을 알고 결혼을 반대했다”며 “내 병력 때문에 아이들의 앞길까지 막는구나 하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이때 임 의원은 고민 끝에 가족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 결혼은 포기하자”고 선언했다고 한다. 임 의원은 “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완치된 한센병, 그것도 유전이 되지 않는 아버지의 한센병을 이유로 결혼을 반대한다면 그런 집에 시집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결국 결혼은 없던 일이 됐는데, 얼마 뒤 사돈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임 의원은 사돈 측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나갔다.
“사돈 측은 훌륭한 교육자 집안이었어요. 그런 교육자 집안조차 한센인에 대한 편견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결혼은 물 건너 갔지만 나가서 사돈댁에 오히려 내가 단단히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약속 장소에 들어선 순간, 사돈 측에서 “미안하다. 정말 우리가 잘못 생각했다”며 사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 의원은 “사돈이 내 손을 붙들고 사과부터 하며 ‘아이들을 결혼시키자’고 하는 바람에 애초 항의하려던 나는 말할 기회도 없었다”며 “딸 아이의 결혼 문제를 겪으며 한센인에 대한 편견의 한 고비를 넘었다는 희망이 보였다”고 했다.
임 의원은 “WHO(국제보건기구)는 1988년 한국을 한센병 퇴치국으로 공식 선언하고 담당관을 철수시켰다”면서 “정작 한센인들이 사회에서 버려져 고통스럽던 1950~1980년대에 의원이 필요했는데 늦은 감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남은 18대 국회 동안 한센인만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아닌 모든 소외계층에 관심을 기울이는 의정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