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파 개혁 실패, 극우 세력 준동, 노조 파업, 좌파 인민전선 출현 등 혼란 거듭
⊙ 인민전선, 히틀러가 전쟁 준비하는 동안 노동시간 단축, 노조 권익 확대에 몰두
⊙ 인구 감소·반전 여론 속에서 유화적 외교 노선, 방어적 군사전략 채택
⊙ 피에르 라발, 독일에 유화 정책 펴다가 나치 점령 하에서 부역자로 변신
⊙ 동맹 없이 표류하던 프랑스와 달리 한국에는 한미동맹 있어
金昇泳
1960년생.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美 컬럼비아대 석사(국제안보정책), 터프스대 플레처외교법률대학원 박사(국제관계) / 《조선일보》 외교·통일 담당 기자·뉴욕 특파원, 영국 애버딘대 정치학과 조교수,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 부교수 역임. 現 일본 간사이외국어대학 국제공생학부 교수(20세기 미국·동아시아 국제정치사)
⊙ 인민전선, 히틀러가 전쟁 준비하는 동안 노동시간 단축, 노조 권익 확대에 몰두
⊙ 인구 감소·반전 여론 속에서 유화적 외교 노선, 방어적 군사전략 채택
⊙ 피에르 라발, 독일에 유화 정책 펴다가 나치 점령 하에서 부역자로 변신
⊙ 동맹 없이 표류하던 프랑스와 달리 한국에는 한미동맹 있어
金昇泳
1960년생. 서울대 불어교육과 졸업, 美 컬럼비아대 석사(국제안보정책), 터프스대 플레처외교법률대학원 박사(국제관계) / 《조선일보》 외교·통일 담당 기자·뉴욕 특파원, 영국 애버딘대 정치학과 조교수, 셰필드대 동아시아학과 부교수 역임. 現 일본 간사이외국어대학 국제공생학부 교수(20세기 미국·동아시아 국제정치사)
- 1934년 2월 6일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벌어진 시위. 사진=퍼블릭 도메인
윤석열 대통령의 12·3 계엄령 선포 이후 국내 정국의 혼미가 계속되는 가운데 대외정책 상의 불안 요인들이 축적돼 가고 있다. 자칫 국내 정국의 복잡한 요인들이 북러동맹이나 북핵(北核)문제 등을 둘러싼 미북(美北) 간 ‘거래외교’ 같은 나라 밖 위험 요인들과 맞물리게 될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1930년대 프랑스의 상황과 흡사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勝戰國)이었던 프랑스는 국내정치의 혼란과 외교적 고립이 맞물리면서 1940년 봄 히틀러의 전차군단에 6주 만에 궤멸(潰滅)됐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건전 우파의 개혁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소수 극우(極右) 세력이 준동했고, 이에 긴장한 좌파 정당들 간 연합이 강화돼 갔다. 특히 1936년부터 2년 동안 집권했던 좌파 대연정(인민전선)은 히틀러의 위협이 명백해졌는데도 주당(週當) 40시간 근무와 유급휴가제 도입 등을 우선시하면서 안보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지막 우파 정권의 개혁 실패
1930년대 초 프랑스 우파에 닥친 비극은 보수의 마지막 희망이라 할 수 있었던 민주동맹의 앙드레 타르디외(1876~1945년) 총리가 경제공황의 파고(波高) 속에서 개인적인 지도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장했다는 사실이다.
타르디외는 비록 선배 우파 정치인이었던 조르주 클레망소나 레이몽 포앵카레 같은 카리스마는 부족했지만, 일찍이 외교관을 거쳐 권위지 《르탕》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때 하버드대 교수로 일했을 만큼 비상한 지적(知的) 능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중도 우파 타르디외가 내세운 개혁의 노선은 경제 활성화를 통해 사회주의의 도전을 차단하고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강화해 나간다는 구상이었다. 그가 내건 개혁 구상은 개헌(改憲)을 통해 행정부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정치 안정을 다지려 한 것이었다. 이는 후일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한 드골 체제의 모델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 헌법은 총리가 실권을 갖는 내각제였지만 상징적인 대통령직도 혼용한 제도였다. 그러나 각료들이 독자성을 유지할 정도로 총리의 권한이 제한적이었고, 많을 때는 한 해에 몇 차례나 내각이 교체되는 등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곤 했다.
‘번영의 정치’라고 불린 타르디외의 개혁 구상은 1929년 가을부터 미국의 월가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프랑스 경제를 삼키면서 기반을 잃게 됐다. 여기에다 지나치게 엘리트주의를 추구하던 그는 정치적인 ‘세(勢)’를 모아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장하는 데 한계를 노출했다. 그 결과 타르디외는 세 차례 단기간 총리를 역임했지만 1932년 봄 선거에서 온건 좌파인 급진당이 주도한 좌파연합에 패배해 물러났다.
히틀러의 위험 경고한 타르디외
이후 프랑스 정치는 중산층의 지지를 확보한 급진당이 주도했고, 1930년대 내내 중도 우파 민주동맹은 소수당으로 남게 됐다. 만일 타르디외의 민주동맹이 정계 주도 세력으로 남았더라면 독일과의 대결을 불사하고, 영국의 유화 정책에 끌려다니기만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타르디외는 1933년 히틀러 체제 등장 이후부터 “이제 평화주의의 최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영불 양국에 전쟁 불사의 결의가 없으면 독일에 지배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타르디외 은퇴 이후 민주동맹 측에서는 정국을 주도할 유력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1934년 2월 거국 연정(擧國聯政)에 참여해 9개월간 외무장관으로 재임한 루이 바르투(1862~1934년)와 1934년 11월부터 7개월간 총리를 맡았던 플랑댕, 독일 침공 직전인 1940년 3월부터 석 달간 총리를 맡았던 폴 레노(1878~1966년)가 전부였다.
타르디외 실각 후 프랑스 정치를 주도한 급진당은 당명과 달리 실제로는 중산층의 지지를 받으며 시장경제와 국제 평화 노선을 지향한 온건 좌파 정당이었다. 1920년대 동안 이미 두 차례나 총리를 역임했던 에두아르 에리오(1872~1957년)와 국제연맹주의자였던 폴 봉크르, 에두아르 달라디에(1884~1970년) 등이 총리로 취임하며 급진당을 중심으로 한 온건 좌파 연합내각이 1934년 2월까지 계속됐다.
집단안보 강화한 브리앙 노선
급진당의 외교 노선은 기본적으로 독일과의 화해를 추진하는 한편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집단안보 체제를 강화해 독일의 재무장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바로 ‘평화의 사도’라고 불리던 아리스티드 브리앙(1862~1932년)이 1920년대에 추진했던 노선을 유지한 것이다. 브리앙은 1932년 봄 타계(他界)했지만 그가 추진했던 ‘브리앙 노선’은 급진당이 온건 좌파 연정을 유지한 1930년대 중반까지도 프랑스 외교의 기반으로 영향을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장차 유럽 통합의 비전까지 제시했던 브리앙은 1920년대에 총리와 외무장관을 번갈아 맡았다. 그는 히틀러 등장 이전까지 온건한 대외 정책을 추구했던 바이마르 공화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교적으로 프랑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
브리앙은 1925년 12월 유럽 화해의 상징인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1878~ 1929년) 외무장관과 영국의 오스틴 체임벌린(1863~1937년) 외무장관의 지지 아래 이탈리아와 벨기에도 함께 서명한 쾌거였다.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독일은 처음으로 베르사유 조약이 결정한 독일의 서부 국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서부 유럽의 평화 질서가 정착됐고, 협상을 주도했던 브리앙과 슈트레제만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브리앙 노선은 단순히 감상적인 평화주의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브리앙과 프랑스 외무부는 결국 군사적으로 부활하게 될 독일이 인구·경제·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프랑스를 압도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1차대전 종전(終戰) 즈음부터 영국에게 몇 차례나 군사동맹 체결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미국도 고립주의로 돌아가서, 독일의 군사주의가 부활하게 될 경우 프랑스를 지원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브리앙은 독일과 화해를 추진하면서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침략전쟁을 방지하는 집단안보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집단안보 체제를 보전함으로써 유사시 영국의 군사 지원을 간접적으로 유도하려 한 것이다. 동시에 독일을 견제해 줄 동유럽의 신생 독립국들(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프랑스는 이들 신생 독립국들이 사활(死活)을 걸고 있던 집단안보 체제를 지지해야 했다.
이와 함께 브리앙은 대서양 건너 미국의 지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눈물겨운 외교를 펼쳤다. 브리앙은 1927년 미국의 1차대전 참전 10주년을 기념해 미불(美佛) 군사동맹 체결을 제안했다. 고립주의를 유지하던 미국의 프랭크 켈로그(1856~1937년) 국무장관은 이를 거절하는 대신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일반적인 ‘부전(不戰) 조약’이라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브리앙은 다국간 조약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며 체결을 서둘렀다. 이것이 ‘자위(自衛) 전쟁’을 제외한 일체의 침략 전쟁을 불법화한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다.
라발의 실용적 평화 노선
타르디외 총리가 물러난 후 등장했던 온건 좌파 연합 정권은 1934년 2월까지 브리앙 노선에 기초한 외교를 이어갔다. 문제는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대공황의 여파가 1930년대 초부터 유럽까지 휩쓸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이 와중에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한 평화 체제의 기반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집권한 히틀러는 1차대전 이후 정착된 베르사유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재무장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독립 노선을 내건 피에르 라발(1883~1945년)이 총리와 외무장관을 겸임하면서 대외 정책을 주도했다. 1940년 이후 나치 점령기 동안 협력정부(비시 정부)의 총리를 지냈던 라발은 종전 직후 처형당했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는 ‘평화제일주의’를 내세워 국민적 지지를 모았던 정치가였다.
프랑스 중부 시골 샤텔동 태생으로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던 라발은 극좌파 프랑스사회당(SFIO)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1차대전 당시 반전(反戰) 평화주의자로 출발했던 그는 이후 좌파와 결별해 무당파(無黨派) 노선으로 정치 기반을 다져나가다가 점차 우파 노선으로 돌아섰다. 늘 서민들의 편에 서기를 자처했던 라발은 여러 차례 노동쟁의 타결 등의 과정에서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 정치 지도자로서 주목받게 됐다. 그는 1931년 한해 동안 총리를 맡은 데 이어, 1934년 2월 다시 거국내각에 참여해 1936년 초까지 외무장관과 총리를 맡았다.
라발 연구의 권위자인 르노 멜츠 교수에 따르면, 라발이 누린 인기의 비결은 ‘탈(脫)이념적이며 초(超)당파적인 평화제일주의’였다. 외교에서 가치를 배제한 라발식 ‘실용적 평화 노선’은 파시스트나 비(非)민주적 국가와도 언제든 손잡겠다는 것이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나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소련 등 어느 강국이든 프랑스가 전쟁에 말려드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면 정치 체제와는 상관없이 비밀조약을 체결하며 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방식이었다. 정계 입문 당시부터 반전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라발은 프랑스의 국력이 기울어가던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기회주의적 실용 외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멜츠 교수는 “독일 점령하에서 라발이 히틀러에 협력한 것도 결국은 이전 1930년대 중반의 대독(對獨) 접근 노력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성과 없는 양보’로 끝난 라발의 유화 정책
사실 1930년대 중반쯤에는 이미 만주사변의 여파로 국제연맹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집단안보에 기초한 전쟁 방지는 기대하기 어려워져 가는 상황이었다. 경제난을 맞은 영국도 1차대전 이전처럼 비밀 외교(舊외교)를 부활시켜 히틀러를 견제하는 노선을 선호하고 있었다.
라발의 전임 외무장관인 루이 바루트는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소련, 핀란드와도 원조 조약을 모색하면서, 그 같은 다국간 조약 체제(‘동방 로카르노’) 안에 독일을 묶어 넣어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외무장관에 취임한 라발은 외교적 압박보다 히틀러에 대한 유화 정책을 모색했다. 이미 독일과 폴란드의 주저로 ‘동방 로카르노 구상’이 좌절된 이상 유화 정책만이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라고 본 것이다. 그는 히틀러가 저서 《나의 투쟁》을 통해 밝힌 침략성을 외면하면서, 히틀러가 반복한 ‘가장(假裝) 평화 공세’를 수용했다. 그는 의회 연설 등을 통해 국민들을 설득해 갔다.
먼저 라발은 1차대전 이후 국제연맹 관리 아래 있던 자르(Saar) 지역이 주민투표를 통해 독일로 복귀하는 것을 1935년 초에 허용했다. 주민투표는 나치당의 대대적인 선전 공세와 위협 아래 치러졌지만, 라발은 히틀러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은 같은해 3월 16일 베르사유 조약이 금지했던 징병제를 부활시키고 공군력 건설에 돌입했다. 라발의 유화 정책은 ‘성과 없는 양보’로 끝나고 말았다.
라발, 무솔리니에게도 접근
라발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접근했다. 무솔리니는 1939년 히틀러와 ‘강철동맹’을, 다음 해 9월에는 독일·일본과 함께 삼국동맹을 체결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프랑스와의 협력을 모색 중이었다.
서민적인 출생 배경을 공유하는 라발과 무솔리니는 개인적 친밀함도 유지했다. 1935년 1월 4일부터 라발은 대대적인 환영 속에 로마를 방문했다. 이때 가진 회담에서 라발은 외교관들의 주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령 소말리아나 튀니지 등 프랑스 세력권에서 이탈리아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준다는 비밀 합의를 해주었다. 1차대전 당시(1915년 런던 조약)부터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독일과 분리하기 위해 시사(示唆)해 온 양보들이었다. 라발은 그 대신 독일이 재군비나 오스트리아 합병 등의 방식으로 베르사유 체제를 허물 가능성에 대비해 공동 대응한다는 합의를 무솔리니로부터 받아냈다.
1935년 봄 당시에는 영국 정부도 히틀러를 견제하기 위해 무솔리니에 대한 유화 정책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프랑스·이탈리아 세 나라 대표들은 히틀러가 재무장을 선언한 지 한 달 후인 4월 14일 이탈리아 북부의 스트레자에 모여 독일의 영토 확장 시도를 차단하며 베르사유 체제를 유지해 간다는 합의에 서명했다. 이 합의를 통해 세 나라는 1925년 체결된 로카르노 협정을 준수하며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반대한다는 세 나라의 공동 보조를 선언했다.
호어-라발 비밀협정
하지만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던 무솔리니는 뒤로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35년 10월 이탈리아는 항공기와 독가스까지 사용하며 국제연맹 회원국인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에서는 제재(制裁) 조치를 논의할 수밖에 없게 됐다.
라발은 겉으로는 경제 제재에 참여하는 척하면서 막후(幕後) 외교를 통해 석유·철강 등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물자들을 경제 제재에서 제외시키며 무솔리니와 타협을 모색했다. 독일 견제를 우선시하던 영국의 새뮤얼 호어 외무장관도 이에 동의, 사실상 에티오피아 국토의 대부분을 이탈리아 지배 지역으로 인정해 주는 방식의 타협안이 비밀리에 완성됐다.
‘호어-라발 협정’으로 불린 비밀 합의가 언론에 보도되자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여론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 결과로 두 나라 외무장관이 모두 사임하게 됐다. 프랑스의 경우 그 여파로 1936년 1월 긴축 재정 등으로 인기가 떨어졌던 라발 내각의 교체로 이어졌다. 당시 프랑스의 여론이나 좌파 정당들이 국제연맹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비밀 외교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5년 6월부터 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일해 온 라발은 사임 이후 1940년 독일 점령기 협력정부에서 부총리를 맡을 때까지 권력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
극우 세력의 대두와 마티뇽 합의
1934년 초 프랑스에서는 정치 사회적 대혼란이 이어지고 있었다. 1930년대 초 이래 프랑스에서는 경제공황의 여파로 수십만의 실업자가 발생했고 노동자들의 근로 환경이 악화되고 있었다. 동시에 우파 진영에서는 건전 우파가 약화된 가운데 ‘불의 십자단’ ‘악시옹 프랑세즈’ 같은 파시스트적 극우 단체들이 준동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극우파는 집권 가능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소련과 연계한 공산주의 세력 및 유대인들의 영향력 확대를 경고하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이들은 소규모 무력(武力) 조직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들 극우 단체들과 온건 좌파 정부 사이의 대립이 1934년 초 유혈 사태로 폭발했다. 발단은 1934년 초 희대의 유대계 금융사기꾼 스타비스키가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여당인 급진당 정치인들의 부패상 등이 여실히 드러났다. 극우 단체들과 일부 재향군인들은 2월 6일 하원 의사당 앞에서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극우단체원 일부가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진압에 나선 경찰이 발포해 민간인 15명이 사망하고 14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 같은 유혈 사태를 겪으면서 범(汎)좌파 진영에서는 무장한 극우파 단체들이 의회민주정치를 정지시키는 쿠데타를 시도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됐다. 이와 함께 대연정(大聯政) 노력이 본격화됐다. 그 결과 1936년 온건 좌파인 급진당과 사회당(SFIO), 공산당이 인민전선을 형성, 5월 12일 총선거에서 승리했다. 인민전선이 내건 슬로건은 ‘빵, 평화, 자유’였다. 선거 결과 사회당이 146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됐다. 급진당은 116석, 공산당은 72석을 확보했다.
인민전선 내각에서는 처음으로 사회당 당수였던 레옹 블룸(1872~1950년)이 총리를 맡았다. 사회당 의원들이 각료직의 과반(過半)을 차지했다. 노동자들은 인민전선 정부 출범 직전인 5월 하순부터 전례 없는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인민전선 정부가 출범하자 블룸 총리의 주도 아래 노조는 기업가들과의 협상에 참여, 노조와 근로자들의 권익을 확대하는 ‘마티뇽 합의’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허용하면서, 주당 40시간 근로제와 대대적 임금 인상, 유급휴가제(바캉스) 등 각종 복지 정책의 입법화가 시작됐다.
각종 개혁·복지 조치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인민전선 정권 초반 프랑스 노동자들 사이에는 마치 준(準)혁명 상황을 맞은 듯한 분위기가 고양됐다. 비록 한 해 만에 물가 상승으로 임금 인상이 의미를 잃게 됐고 2년 만에 안보 위기 가운데 막을 내렸지만, 인민전선 시절의 개혁 조치들은 아직까지도 프랑스 노동운동사에서는 가장 큰 성과로 여겨지고 있다.
스페인 내전
인민전선 내각의 총리 레옹 블룸은 국제연맹과 군축(軍縮)을 중시해 온 유대인 사회주의자였다. 법률가이자 문예평론가이기도 했던 그는 SFIO 안에서 지도적인 이론가였으며, 열렬한 평화주의자였다. 그러나 인민전선 내각이 출범하기 직전부터 국제정세는 블룸 내각도 평화주의에만 집착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있었다.
인민전선 내각 출범 석 달 전인 1936년 3월 7일,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이 비무장지대로 규정한 라인란트를 점령해 버렸다. 히틀러는 프랑스가 소련과 우호원조조약을 2월에 비준한 것을 구실로 독일군을 진입시켰다. 영국이 대응에 나서지 않자 금융위기 가운데 선거전 중이던 프랑스도 대응을 포기해 버렸다. 사실 당시 독일군 장성 중 다수는 영국이나 프랑스군이 라인란트로 들어와 저지하면 독일군이 대항할 능력이 없다면서 히틀러를 만류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프랑스나 영국이 군사적으로 대응할 결기가 없다고 판단해 군대를 투입하는 도박을 벌였고, 결국 라인란트 무혈(無血) 점령에 성공했다.
독일군의 라인란트 점령은 프랑스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동유럽 국가 사이에 체결돼 있던 동맹의 신뢰성까지 흔들었다. 라인란트 지역이 요새화됨에 따라 유사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의 동맹국들에게 프랑스군을 파견해 공동 대응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안보 상황이 악화된 가운데 출범한 블룸 총리와 인민전선 정부는 1936년 7월 시작된 스페인 내전 대응에 부심(腐心)하게 됐다. 블룸 총리와 인민전선 정부는 같은 좌파였던 스페인 공화파를 지지하고 싶었지만,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 정부와 함께 불개입 노선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스의 안보 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면서 라발 내각 때부터 프랑스가 공들여 왔던 이탈리아와의 반독(反獨) 공동 전선이 파탄 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와의 협력이 무산되면서 프랑스는 점점 더 외교·군사 양면에서 독자성을 잃고 유일한 희망으로 남은 영국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軍備 걸림돌 된 40시간 근로제
안보 환경이 급속히 악화되자 평화주의자 블룸 총리가 이끄는 인민전선 내각도 국방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게 됐다. 연정 파트너였던 급진당(온건 좌파)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국방장관을 맡아 뒤늦게나마 군비 증강에 착수하게 됐다.
강인해 보이는 외모로 ‘보클뤼즈의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달라디에는 1차대전 참전 용사였다. 전후 급진당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는 탁월한 추진력으로 당 현대화와 조직 개혁을 주도했다. 1930년대 초에는 단기간이었지만 두 차례나 총리를 지냈다.
히틀러의 야심을 간파하고 있던 달라디에는 1936년 인민전선 출범 이후 몇 차례 총리가 교체되는 동안에도 4년 내내 국방장관을 맡았다. 특히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전격 합병한 직후인 1938년 4월에는 블룸과 결별하고, 우파들을 끌어들여 급진당 주도의 새 내각을 구성하고 총리가 됐다. 그는 2차대전 발발 직후인 1940년 3월까지 재임했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총리와 국방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의 대외정책을 주도한 것이다.
달라디에는 인민전선 집권 2년 동안 무기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사 기업들을 총동원해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했다. 그는 독일의 군비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1936년 가을부터 140억 프랑의 예산을 확보, 1차대전 이후 최대의 국방근대화 4개년계획에 착수했다. 마침 1936년 8월부터 인민전선 내각이 군수(軍需)산업을 포함한 국가기간(基幹)산업의 국유화(國有化)를 추진해 정부 주도로 무기 생산 체제를 본격화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걸림돌이 된 것이 인민전선 정부 초기에 도입한 주 40시간 근로제였다. 이 제도를 유지하면서 준전시(準戰時) 체제로 군수산업을 가동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달라디에는 1938년 4월 총리로 취임하면서 주 40시간 근로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는 여전히 감상적 평화주의 속에 국내 문제에 관심이 집중돼 있어 국방 문제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다.
방어적인 국방 정책
사실 1930년대 내내 프랑스는 국방 면에서 1차대전 이후 축적돼 온 여러 가지 내부적 한계들을 안고 있었다. 대전 기간부터 시작된 출생률 저하가 지속돼 징집 대상 인구가 줄어드는 가운데, 1928년 초부터 사병 복무 기간이 1년으로 단축되면서 병력 자원 확보가 어려워졌다. 독일이 징병제를 부활시킨 1935년 봄부터 복무 기간은 다시 2년으로 회복됐지만, 여전히 1차대전 이후 확산된 반전·평화주의가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같은 국내적 제약들은 프랑스군의 전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병력 숫자가 부족한 가운데 단기 복무 체제 아래에서는 훈련에 시간이 걸리는 정예화된 지상군을 양성해 공격적인 전술을 도입하기가 어려웠다.
군(軍) 지휘부에서는 다가오는 전쟁도 1차대전 때처럼 방어전 중심의 전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벨기에 남부의 국경부터 스위스까지에 걸쳐 요새화된 ‘마지노선’을 건설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프랑스 국방 당국은 독일군의 공격을 동부 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맹국들 쪽으로 향하도록 유도해서 최대한 ‘남의 땅’에서 주로 ‘남의 피’로 전쟁을 치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처럼 방어 중심 군사 독트린 때문에 프랑스군 지도부는 전차(戰車)를 공격용 무기로 적극 활용하자는 혁신적 전술의 채택을 거부했다. 1930년대 중반 당시 대령이었던 샤를 드골(1880~1970년)이 제의한 기갑사단 창설 제의는 배척됐다. “엘리트 기갑부대에 전차를 집중 배치해 주면 군부대들 사이의 평등과 화합을 해치게 된다”는 주장도 반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는 사이에 독일군은 하인츠 구데리안(1888~1954년) 주도 아래 전차와 급강하폭격기를 연계해 적의 종심(縱深)을 타격하는 전격전(電擊戰) 전략을 다듬고 있었다.
뮌헨 회담
1938년 3월 독일이 전격적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이탈리아가 협력해 주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이미 1937년 독·일 방공(防共)협정에 동참, 독일 편으로 돌아선 상태였다. 영국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저지하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의 무대응을 목도한 히틀러는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을 요구하고 나섰다. 1차대전 이후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북서부 산악 지대인 주데텐 지역에는 독일계 주민 3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1938년 봄부터 히틀러는 “독일 민족이 체코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며 ‘민족 자결(民族自決)’ 차원에서 주테텐 지역을 독일이 할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주데텐 지역은 군수산업이 들어서 있는 천혜의 산악 요새 지역이었다. 그런 요충지(要衝地)를 절대로 독일에 내줄 수 없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국인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가 동맹 의무에 충실하려 하면 독일과 일전(一戰)을 불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달라디에 총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국방장관으로 3년간 일하면서 독일군과의 군사력 격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독일군과 단독으로 대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야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청을 무시하고 히틀러와의 협상에 나섰다. 결국 1938년 9월 30일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4대국 지도자들은 뮌헨에서 주테텐을 독일에 할양하기로 결정했다.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회담의 논의 과정에서 배제됐다.
악명 높은 뮌헨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달라디에는 적극적 유화주의자였던 조르주 보네 외무장관의 건의를 수용했다. 프랑스로서는 유사시 영국의 군사적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체임벌린과 보조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뮌헨 회담 후 체임벌린은 런던 공항에서 자신과 히틀러가 서명한 종이를 흔들어 보이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여기에 있다”고 자랑했다.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전쟁 위기를 피하게 한 성공한 회담’이라는 여론 평가가 확산됐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뮌헨 회담 후 달라디에 총리는 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무기 생산을 늘리기 위해 총동원 체제를 가동했다. 우파 출신 재무장관 폴 레노와 공조해 40시간 근로제를 폐지하고, 1938년 11월 노조 대파업이 일어나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파업을 진압했다.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항공기 구매를 위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한편, 1939년 2월에는 영국으로부터 처음으로 군사 위기가 발생하면 유럽 대륙으로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히틀러의 시간표는 프랑스의 사정을 보고 기다려주지 않았다. 뮌헨 합의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39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남아 있던 영토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자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1939년 3월 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할 경우 영국은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달라디에는 소련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망설였지만, 이미 1920년대 초부터 동맹 관계를 맺어온 폴란드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보조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뮌헨 회담을 지켜본 소련의 스탈린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독일 파시스트의 침공을 소련 쪽으로 돌리기 위한 음모를 벌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는 공산주의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소련과의 동맹에 소극적이었다. 그러자 소련은 1939년 8월 23일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이 직접 방문해 성의를 보였던 나치 독일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손잡는 ‘외교 혁명’이 이뤄진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9월 17일에는 동쪽으로부터 소련이 침공해 폴란드의 절반을 차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대독(對獨) 선전포고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패전의 대가
그 후 영국의 지상군이 프랑스에 파견됐지만, 반년 이상 본격적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 전차군단이 벨기에 아르덴 숲을 돌파해 영·불 연합군을 공격했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프랑스군 종심을 타격하자 프랑스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됐다. 영국군 30여만 명만 겨우 덩케르크에서 기적적으로 철수했다. 6월 14일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됐다. 1차대전의 영웅이었던 필리프 페탱(1856~1951년) 원수(元帥)가 앞장서 항복했다. 프랑스는 그 후 4년 동안 독일군 점령 아래 치욕을 겪었다.
1930년대 중반 대독 유화 정책을 주도했던 피에르 라발은 1940년 7월 출범한 대독 협력정부인 비시 정권에서 부총리를 맡아 협력했다가 해방 후 총살당했다. 달라디에 전 총리는 나치 치하에서 투옥됐다. 드골 장군은 런던으로 망명해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지원 아래 망명 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었다. 전쟁을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은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이 시작된 후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유대계 이민자들도 대거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살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로 보내져 독가스로 살해당했다.
“우리는 철저하게 고립돼 있었다”
제라르 아로 전 주미·주유엔 프랑스 대사는 1930년대 프랑스의 상황을 담은 《우리는 철저하게 고립돼 있었다》라는 책을 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군사적 지원을 막바지까지 거부하는 가운데, 공산 국가 소련은 신뢰하기 힘든 파트너였다. 프랑스가 대신 의지하려 했던 국제연맹은 무력(無力)해졌다. 프랑스가 동맹으로 지원해 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 신생 독립국들은 히틀러의 군사력에 대응할 힘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내정의 혼란 속에 안보상 결정적 시기를 ‘감상적 평화주의’와 노동·복지 개혁에 전념하며 보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1930년대 프랑스의 상황과 적지 않게 유사하다. 당시 프랑스와 가장 큰 차이는 한미동맹 체제가 아직 건재하다는 점이다.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의 영국’ 같은 위치에 있는 일본과의 관계도 한미일 협력 체제를 통해 실용적인 협력을 추진해 갈 수 있는 여건이다.
트럼프 정권 출범 이후 한미동맹의 장래에 대한 의문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한미동맹은 어설픈 중립주의보다 훨씬 신뢰할 수 있는 협력 체제다. 지금 대한민국이 해야 할 일은 상호 이익의 공통분모를 찾아 한미일 협력을 유지하면서 자체적 국방 능력을 확보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1930년대 프랑스가 오늘의 대한민국에 주는 교훈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1930년대 프랑스의 상황과 흡사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勝戰國)이었던 프랑스는 국내정치의 혼란과 외교적 고립이 맞물리면서 1940년 봄 히틀러의 전차군단에 6주 만에 궤멸(潰滅)됐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는 건전 우파의 개혁 시도가 실패로 끝나면서 소수 극우(極右) 세력이 준동했고, 이에 긴장한 좌파 정당들 간 연합이 강화돼 갔다. 특히 1936년부터 2년 동안 집권했던 좌파 대연정(인민전선)은 히틀러의 위협이 명백해졌는데도 주당(週當) 40시간 근무와 유급휴가제 도입 등을 우선시하면서 안보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마지막 우파 정권의 개혁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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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타르디외. 사진=퍼블릭 도메인 |
타르디외는 비록 선배 우파 정치인이었던 조르주 클레망소나 레이몽 포앵카레 같은 카리스마는 부족했지만, 일찍이 외교관을 거쳐 권위지 《르탕》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때 하버드대 교수로 일했을 만큼 비상한 지적(知的) 능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중도 우파 타르디외가 내세운 개혁의 노선은 경제 활성화를 통해 사회주의의 도전을 차단하고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강화해 나간다는 구상이었다. 그가 내건 개혁 구상은 개헌(改憲)을 통해 행정부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정치 안정을 다지려 한 것이었다. 이는 후일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한 드골 체제의 모델이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 헌법은 총리가 실권을 갖는 내각제였지만 상징적인 대통령직도 혼용한 제도였다. 그러나 각료들이 독자성을 유지할 정도로 총리의 권한이 제한적이었고, 많을 때는 한 해에 몇 차례나 내각이 교체되는 등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곤 했다.
‘번영의 정치’라고 불린 타르디외의 개혁 구상은 1929년 가을부터 미국의 월가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가 프랑스 경제를 삼키면서 기반을 잃게 됐다. 여기에다 지나치게 엘리트주의를 추구하던 그는 정치적인 ‘세(勢)’를 모아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장하는 데 한계를 노출했다. 그 결과 타르디외는 세 차례 단기간 총리를 역임했지만 1932년 봄 선거에서 온건 좌파인 급진당이 주도한 좌파연합에 패배해 물러났다.
히틀러의 위험 경고한 타르디외
이후 프랑스 정치는 중산층의 지지를 확보한 급진당이 주도했고, 1930년대 내내 중도 우파 민주동맹은 소수당으로 남게 됐다. 만일 타르디외의 민주동맹이 정계 주도 세력으로 남았더라면 독일과의 대결을 불사하고, 영국의 유화 정책에 끌려다니기만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타르디외는 1933년 히틀러 체제 등장 이후부터 “이제 평화주의의 최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경고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영불 양국에 전쟁 불사의 결의가 없으면 독일에 지배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타르디외 은퇴 이후 민주동맹 측에서는 정국을 주도할 유력 지도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1934년 2월 거국 연정(擧國聯政)에 참여해 9개월간 외무장관으로 재임한 루이 바르투(1862~1934년)와 1934년 11월부터 7개월간 총리를 맡았던 플랑댕, 독일 침공 직전인 1940년 3월부터 석 달간 총리를 맡았던 폴 레노(1878~1966년)가 전부였다.
타르디외 실각 후 프랑스 정치를 주도한 급진당은 당명과 달리 실제로는 중산층의 지지를 받으며 시장경제와 국제 평화 노선을 지향한 온건 좌파 정당이었다. 1920년대 동안 이미 두 차례나 총리를 역임했던 에두아르 에리오(1872~1957년)와 국제연맹주의자였던 폴 봉크르, 에두아르 달라디에(1884~1970년) 등이 총리로 취임하며 급진당을 중심으로 한 온건 좌파 연합내각이 1934년 2월까지 계속됐다.
집단안보 강화한 브리앙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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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티드 브리앙. 사진=퍼블릭 도메인 |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장차 유럽 통합의 비전까지 제시했던 브리앙은 1920년대에 총리와 외무장관을 번갈아 맡았다. 그는 히틀러 등장 이전까지 온건한 대외 정책을 추구했던 바이마르 공화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외교적으로 프랑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
브리앙은 1925년 12월 유럽 화해의 상징인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1878~ 1929년) 외무장관과 영국의 오스틴 체임벌린(1863~1937년) 외무장관의 지지 아래 이탈리아와 벨기에도 함께 서명한 쾌거였다. 로카르노 조약을 통해 독일은 처음으로 베르사유 조약이 결정한 독일의 서부 국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서부 유럽의 평화 질서가 정착됐고, 협상을 주도했던 브리앙과 슈트레제만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브리앙 노선은 단순히 감상적인 평화주의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브리앙과 프랑스 외무부는 결국 군사적으로 부활하게 될 독일이 인구·경제·군사력 등 모든 면에서 프랑스를 압도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1차대전 종전(終戰) 즈음부터 영국에게 몇 차례나 군사동맹 체결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이를 거절했다. 미국도 고립주의로 돌아가서, 독일의 군사주의가 부활하게 될 경우 프랑스를 지원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브리앙은 독일과 화해를 추진하면서 국제연맹을 중심으로 침략전쟁을 방지하는 집단안보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집단안보 체제를 보전함으로써 유사시 영국의 군사 지원을 간접적으로 유도하려 한 것이다. 동시에 독일을 견제해 줄 동유럽의 신생 독립국들(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프랑스는 이들 신생 독립국들이 사활(死活)을 걸고 있던 집단안보 체제를 지지해야 했다.
이와 함께 브리앙은 대서양 건너 미국의 지원을 끌어들이기 위해 눈물겨운 외교를 펼쳤다. 브리앙은 1927년 미국의 1차대전 참전 10주년을 기념해 미불(美佛) 군사동맹 체결을 제안했다. 고립주의를 유지하던 미국의 프랭크 켈로그(1856~1937년) 국무장관은 이를 거절하는 대신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일반적인 ‘부전(不戰) 조약’이라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브리앙은 다국간 조약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며 체결을 서둘렀다. 이것이 ‘자위(自衛) 전쟁’을 제외한 일체의 침략 전쟁을 불법화한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다.
라발의 실용적 평화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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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라발. 사진=퍼블릭 도메인 |
1933년 1월 집권한 히틀러는 1차대전 이후 정착된 베르사유 체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재무장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독립 노선을 내건 피에르 라발(1883~1945년)이 총리와 외무장관을 겸임하면서 대외 정책을 주도했다. 1940년 이후 나치 점령기 동안 협력정부(비시 정부)의 총리를 지냈던 라발은 종전 직후 처형당했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는 ‘평화제일주의’를 내세워 국민적 지지를 모았던 정치가였다.
프랑스 중부 시골 샤텔동 태생으로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던 라발은 극좌파 프랑스사회당(SFIO)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1차대전 당시 반전(反戰) 평화주의자로 출발했던 그는 이후 좌파와 결별해 무당파(無黨派) 노선으로 정치 기반을 다져나가다가 점차 우파 노선으로 돌아섰다. 늘 서민들의 편에 서기를 자처했던 라발은 여러 차례 노동쟁의 타결 등의 과정에서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 정치 지도자로서 주목받게 됐다. 그는 1931년 한해 동안 총리를 맡은 데 이어, 1934년 2월 다시 거국내각에 참여해 1936년 초까지 외무장관과 총리를 맡았다.
라발 연구의 권위자인 르노 멜츠 교수에 따르면, 라발이 누린 인기의 비결은 ‘탈(脫)이념적이며 초(超)당파적인 평화제일주의’였다. 외교에서 가치를 배제한 라발식 ‘실용적 평화 노선’은 파시스트나 비(非)민주적 국가와도 언제든 손잡겠다는 것이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나 나치 독일, 군국주의 일본, 공산주의 소련 등 어느 강국이든 프랑스가 전쟁에 말려드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면 정치 체제와는 상관없이 비밀조약을 체결하며 협력 관계를 모색하는 방식이었다. 정계 입문 당시부터 반전 평화주의를 주장했던 라발은 프랑스의 국력이 기울어가던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기회주의적 실용 외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멜츠 교수는 “독일 점령하에서 라발이 히틀러에 협력한 것도 결국은 이전 1930년대 중반의 대독(對獨) 접근 노력의 연장선 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성과 없는 양보’로 끝난 라발의 유화 정책
사실 1930년대 중반쯤에는 이미 만주사변의 여파로 국제연맹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집단안보에 기초한 전쟁 방지는 기대하기 어려워져 가는 상황이었다. 경제난을 맞은 영국도 1차대전 이전처럼 비밀 외교(舊외교)를 부활시켜 히틀러를 견제하는 노선을 선호하고 있었다.
라발의 전임 외무장관인 루이 바루트는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발트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동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소련, 핀란드와도 원조 조약을 모색하면서, 그 같은 다국간 조약 체제(‘동방 로카르노’) 안에 독일을 묶어 넣어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외무장관에 취임한 라발은 외교적 압박보다 히틀러에 대한 유화 정책을 모색했다. 이미 독일과 폴란드의 주저로 ‘동방 로카르노 구상’이 좌절된 이상 유화 정책만이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라고 본 것이다. 그는 히틀러가 저서 《나의 투쟁》을 통해 밝힌 침략성을 외면하면서, 히틀러가 반복한 ‘가장(假裝) 평화 공세’를 수용했다. 그는 의회 연설 등을 통해 국민들을 설득해 갔다.
먼저 라발은 1차대전 이후 국제연맹 관리 아래 있던 자르(Saar) 지역이 주민투표를 통해 독일로 복귀하는 것을 1935년 초에 허용했다. 주민투표는 나치당의 대대적인 선전 공세와 위협 아래 치러졌지만, 라발은 히틀러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은 같은해 3월 16일 베르사유 조약이 금지했던 징병제를 부활시키고 공군력 건설에 돌입했다. 라발의 유화 정책은 ‘성과 없는 양보’로 끝나고 말았다.
라발, 무솔리니에게도 접근
라발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접근했다. 무솔리니는 1939년 히틀러와 ‘강철동맹’을, 다음 해 9월에는 독일·일본과 함께 삼국동맹을 체결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영국·프랑스와의 협력을 모색 중이었다.
서민적인 출생 배경을 공유하는 라발과 무솔리니는 개인적 친밀함도 유지했다. 1935년 1월 4일부터 라발은 대대적인 환영 속에 로마를 방문했다. 이때 가진 회담에서 라발은 외교관들의 주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령 소말리아나 튀니지 등 프랑스 세력권에서 이탈리아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준다는 비밀 합의를 해주었다. 1차대전 당시(1915년 런던 조약)부터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독일과 분리하기 위해 시사(示唆)해 온 양보들이었다. 라발은 그 대신 독일이 재군비나 오스트리아 합병 등의 방식으로 베르사유 체제를 허물 가능성에 대비해 공동 대응한다는 합의를 무솔리니로부터 받아냈다.
1935년 봄 당시에는 영국 정부도 히틀러를 견제하기 위해 무솔리니에 대한 유화 정책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프랑스·이탈리아 세 나라 대표들은 히틀러가 재무장을 선언한 지 한 달 후인 4월 14일 이탈리아 북부의 스트레자에 모여 독일의 영토 확장 시도를 차단하며 베르사유 체제를 유지해 간다는 합의에 서명했다. 이 합의를 통해 세 나라는 1925년 체결된 로카르노 협정을 준수하며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반대한다는 세 나라의 공동 보조를 선언했다.
호어-라발 비밀협정
하지만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던 무솔리니는 뒤로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35년 10월 이탈리아는 항공기와 독가스까지 사용하며 국제연맹 회원국인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제네바의 국제연맹 본부에서는 제재(制裁) 조치를 논의할 수밖에 없게 됐다.
라발은 겉으로는 경제 제재에 참여하는 척하면서 막후(幕後) 외교를 통해 석유·철강 등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물자들을 경제 제재에서 제외시키며 무솔리니와 타협을 모색했다. 독일 견제를 우선시하던 영국의 새뮤얼 호어 외무장관도 이에 동의, 사실상 에티오피아 국토의 대부분을 이탈리아 지배 지역으로 인정해 주는 방식의 타협안이 비밀리에 완성됐다.
‘호어-라발 협정’으로 불린 비밀 합의가 언론에 보도되자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여론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 결과로 두 나라 외무장관이 모두 사임하게 됐다. 프랑스의 경우 그 여파로 1936년 1월 긴축 재정 등으로 인기가 떨어졌던 라발 내각의 교체로 이어졌다. 당시 프랑스의 여론이나 좌파 정당들이 국제연맹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비밀 외교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5년 6월부터 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일해 온 라발은 사임 이후 1940년 독일 점령기 협력정부에서 부총리를 맡을 때까지 권력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
극우 세력의 대두와 마티뇽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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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시옹 프랑세즈의 로고 |
이들 극우 단체들과 온건 좌파 정부 사이의 대립이 1934년 초 유혈 사태로 폭발했다. 발단은 1934년 초 희대의 유대계 금융사기꾼 스타비스키가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수사 과정에서 여당인 급진당 정치인들의 부패상 등이 여실히 드러났다. 극우 단체들과 일부 재향군인들은 2월 6일 하원 의사당 앞에서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극우단체원 일부가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진압에 나선 경찰이 발포해 민간인 15명이 사망하고 14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 같은 유혈 사태를 겪으면서 범(汎)좌파 진영에서는 무장한 극우파 단체들이 의회민주정치를 정지시키는 쿠데타를 시도할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됐다. 이와 함께 대연정(大聯政) 노력이 본격화됐다. 그 결과 1936년 온건 좌파인 급진당과 사회당(SFIO), 공산당이 인민전선을 형성, 5월 12일 총선거에서 승리했다. 인민전선이 내건 슬로건은 ‘빵, 평화, 자유’였다. 선거 결과 사회당이 146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됐다. 급진당은 116석, 공산당은 72석을 확보했다.
인민전선 내각에서는 처음으로 사회당 당수였던 레옹 블룸(1872~1950년)이 총리를 맡았다. 사회당 의원들이 각료직의 과반(過半)을 차지했다. 노동자들은 인민전선 정부 출범 직전인 5월 하순부터 전례 없는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인민전선 정부가 출범하자 블룸 총리의 주도 아래 노조는 기업가들과의 협상에 참여, 노조와 근로자들의 권익을 확대하는 ‘마티뇽 합의’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을 허용하면서, 주당 40시간 근로제와 대대적 임금 인상, 유급휴가제(바캉스) 등 각종 복지 정책의 입법화가 시작됐다.
각종 개혁·복지 조치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인민전선 정권 초반 프랑스 노동자들 사이에는 마치 준(準)혁명 상황을 맞은 듯한 분위기가 고양됐다. 비록 한 해 만에 물가 상승으로 임금 인상이 의미를 잃게 됐고 2년 만에 안보 위기 가운데 막을 내렸지만, 인민전선 시절의 개혁 조치들은 아직까지도 프랑스 노동운동사에서는 가장 큰 성과로 여겨지고 있다.
스페인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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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블룸. 사진=퍼블릭 도메인 |
인민전선 내각 출범 석 달 전인 1936년 3월 7일,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이 비무장지대로 규정한 라인란트를 점령해 버렸다. 히틀러는 프랑스가 소련과 우호원조조약을 2월에 비준한 것을 구실로 독일군을 진입시켰다. 영국이 대응에 나서지 않자 금융위기 가운데 선거전 중이던 프랑스도 대응을 포기해 버렸다. 사실 당시 독일군 장성 중 다수는 영국이나 프랑스군이 라인란트로 들어와 저지하면 독일군이 대항할 능력이 없다면서 히틀러를 만류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프랑스나 영국이 군사적으로 대응할 결기가 없다고 판단해 군대를 투입하는 도박을 벌였고, 결국 라인란트 무혈(無血) 점령에 성공했다.
독일군의 라인란트 점령은 프랑스에 대한 기습공격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동유럽 국가 사이에 체결돼 있던 동맹의 신뢰성까지 흔들었다. 라인란트 지역이 요새화됨에 따라 유사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의 동맹국들에게 프랑스군을 파견해 공동 대응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안보 상황이 악화된 가운데 출범한 블룸 총리와 인민전선 정부는 1936년 7월 시작된 스페인 내전 대응에 부심(腐心)하게 됐다. 블룸 총리와 인민전선 정부는 같은 좌파였던 스페인 공화파를 지지하고 싶었지만, 내전이 국제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 정부와 함께 불개입 노선을 유지했다.
스페인 내전은 프랑스의 안보 환경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탈리아가 독일과 함께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면서 라발 내각 때부터 프랑스가 공들여 왔던 이탈리아와의 반독(反獨) 공동 전선이 파탄 나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와의 협력이 무산되면서 프랑스는 점점 더 외교·군사 양면에서 독자성을 잃고 유일한 희망으로 남은 영국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軍備 걸림돌 된 40시간 근로제
안보 환경이 급속히 악화되자 평화주의자 블룸 총리가 이끄는 인민전선 내각도 국방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게 됐다. 연정 파트너였던 급진당(온건 좌파)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국방장관을 맡아 뒤늦게나마 군비 증강에 착수하게 됐다.
강인해 보이는 외모로 ‘보클뤼즈의 황소’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달라디에는 1차대전 참전 용사였다. 전후 급진당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그는 탁월한 추진력으로 당 현대화와 조직 개혁을 주도했다. 1930년대 초에는 단기간이었지만 두 차례나 총리를 지냈다.
히틀러의 야심을 간파하고 있던 달라디에는 1936년 인민전선 출범 이후 몇 차례 총리가 교체되는 동안에도 4년 내내 국방장관을 맡았다. 특히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전격 합병한 직후인 1938년 4월에는 블룸과 결별하고, 우파들을 끌어들여 급진당 주도의 새 내각을 구성하고 총리가 됐다. 그는 2차대전 발발 직후인 1940년 3월까지 재임했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총리와 국방장관을 지내면서 프랑스의 대외정책을 주도한 것이다.
달라디에는 인민전선 집권 2년 동안 무기와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사 기업들을 총동원해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했다. 그는 독일의 군비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1936년 가을부터 140억 프랑의 예산을 확보, 1차대전 이후 최대의 국방근대화 4개년계획에 착수했다. 마침 1936년 8월부터 인민전선 내각이 군수(軍需)산업을 포함한 국가기간(基幹)산업의 국유화(國有化)를 추진해 정부 주도로 무기 생산 체제를 본격화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걸림돌이 된 것이 인민전선 정부 초기에 도입한 주 40시간 근로제였다. 이 제도를 유지하면서 준전시(準戰時) 체제로 군수산업을 가동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달라디에는 1938년 4월 총리로 취임하면서 주 40시간 근로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는 여전히 감상적 평화주의 속에 국내 문제에 관심이 집중돼 있어 국방 문제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다.
방어적인 국방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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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남부~스위스까지 건설된 ‘마지노선’은 1930년대 프랑스의 방어전 중심의 군사전략을 잘 보여준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이 같은 국내적 제약들은 프랑스군의 전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병력 숫자가 부족한 가운데 단기 복무 체제 아래에서는 훈련에 시간이 걸리는 정예화된 지상군을 양성해 공격적인 전술을 도입하기가 어려웠다.
군(軍) 지휘부에서는 다가오는 전쟁도 1차대전 때처럼 방어전 중심의 전쟁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벨기에 남부의 국경부터 스위스까지에 걸쳐 요새화된 ‘마지노선’을 건설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프랑스 국방 당국은 독일군의 공격을 동부 유럽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동맹국들 쪽으로 향하도록 유도해서 최대한 ‘남의 땅’에서 주로 ‘남의 피’로 전쟁을 치르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이처럼 방어 중심 군사 독트린 때문에 프랑스군 지도부는 전차(戰車)를 공격용 무기로 적극 활용하자는 혁신적 전술의 채택을 거부했다. 1930년대 중반 당시 대령이었던 샤를 드골(1880~1970년)이 제의한 기갑사단 창설 제의는 배척됐다. “엘리트 기갑부대에 전차를 집중 배치해 주면 군부대들 사이의 평등과 화합을 해치게 된다”는 주장도 반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는 사이에 독일군은 하인츠 구데리안(1888~1954년) 주도 아래 전차와 급강하폭격기를 연계해 적의 종심(縱深)을 타격하는 전격전(電擊戰) 전략을 다듬고 있었다.
뮌헨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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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회담의 주역들. 왼쪽부터 체임벌린 영국 총리,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히틀러 독일 총리,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 |
프랑스와 영국의 무대응을 목도한 히틀러는 이번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을 요구하고 나섰다. 1차대전 이후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북서부 산악 지대인 주데텐 지역에는 독일계 주민 3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1938년 봄부터 히틀러는 “독일 민족이 체코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있다”며 ‘민족 자결(民族自決)’ 차원에서 주테텐 지역을 독일이 할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주데텐 지역은 군수산업이 들어서 있는 천혜의 산악 요새 지역이었다. 그런 요충지(要衝地)를 절대로 독일에 내줄 수 없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국인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가 동맹 의무에 충실하려 하면 독일과 일전(一戰)을 불사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달라디에 총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국방장관으로 3년간 일하면서 독일군과의 군사력 격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는 영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독일군과 단독으로 대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야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청을 무시하고 히틀러와의 협상에 나섰다. 결국 1938년 9월 30일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4대국 지도자들은 뮌헨에서 주테텐을 독일에 할양하기로 결정했다. 당사자인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회담의 논의 과정에서 배제됐다.
악명 높은 뮌헨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달라디에는 적극적 유화주의자였던 조르주 보네 외무장관의 건의를 수용했다. 프랑스로서는 유사시 영국의 군사적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체임벌린과 보조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뮌헨 회담 후 체임벌린은 런던 공항에서 자신과 히틀러가 서명한 종이를 흔들어 보이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여기에 있다”고 자랑했다.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전쟁 위기를 피하게 한 성공한 회담’이라는 여론 평가가 확산됐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뮌헨 회담 후 달라디에 총리는 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무기 생산을 늘리기 위해 총동원 체제를 가동했다. 우파 출신 재무장관 폴 레노와 공조해 40시간 근로제를 폐지하고, 1938년 11월 노조 대파업이 일어나자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파업을 진압했다.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항공기 구매를 위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한편, 1939년 2월에는 영국으로부터 처음으로 군사 위기가 발생하면 유럽 대륙으로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히틀러의 시간표는 프랑스의 사정을 보고 기다려주지 않았다. 뮌헨 합의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39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남아 있던 영토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자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1939년 3월 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할 경우 영국은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달라디에는 소련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망설였지만, 이미 1920년대 초부터 동맹 관계를 맺어온 폴란드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보조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뮌헨 회담을 지켜본 소련의 스탈린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독일 파시스트의 침공을 소련 쪽으로 돌리기 위한 음모를 벌이고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는 공산주의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소련과의 동맹에 소극적이었다. 그러자 소련은 1939년 8월 23일 리벤트로프 외무장관이 직접 방문해 성의를 보였던 나치 독일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손잡는 ‘외교 혁명’이 이뤄진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9월 1일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9월 17일에는 동쪽으로부터 소련이 침공해 폴란드의 절반을 차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대독(對獨) 선전포고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패전의 대가
그 후 영국의 지상군이 프랑스에 파견됐지만, 반년 이상 본격적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 전차군단이 벨기에 아르덴 숲을 돌파해 영·불 연합군을 공격했다. 독일군 기갑부대가 프랑스군 종심을 타격하자 프랑스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됐다. 영국군 30여만 명만 겨우 덩케르크에서 기적적으로 철수했다. 6월 14일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됐다. 1차대전의 영웅이었던 필리프 페탱(1856~1951년) 원수(元帥)가 앞장서 항복했다. 프랑스는 그 후 4년 동안 독일군 점령 아래 치욕을 겪었다.
1930년대 중반 대독 유화 정책을 주도했던 피에르 라발은 1940년 7월 출범한 대독 협력정부인 비시 정권에서 부총리를 맡아 협력했다가 해방 후 총살당했다. 달라디에 전 총리는 나치 치하에서 투옥됐다. 드골 장군은 런던으로 망명해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지원 아래 망명 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었다. 전쟁을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은 1941년 독일의 소련 공격이 시작된 후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유대계 이민자들도 대거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프랑스에 살던 수많은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로 보내져 독가스로 살해당했다.
“우리는 철저하게 고립돼 있었다”
제라르 아로 전 주미·주유엔 프랑스 대사는 1930년대 프랑스의 상황을 담은 《우리는 철저하게 고립돼 있었다》라는 책을 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군사적 지원을 막바지까지 거부하는 가운데, 공산 국가 소련은 신뢰하기 힘든 파트너였다. 프랑스가 대신 의지하려 했던 국제연맹은 무력(無力)해졌다. 프랑스가 동맹으로 지원해 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 신생 독립국들은 히틀러의 군사력에 대응할 힘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내정의 혼란 속에 안보상 결정적 시기를 ‘감상적 평화주의’와 노동·복지 개혁에 전념하며 보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은 1930년대 프랑스의 상황과 적지 않게 유사하다. 당시 프랑스와 가장 큰 차이는 한미동맹 체제가 아직 건재하다는 점이다.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의 영국’ 같은 위치에 있는 일본과의 관계도 한미일 협력 체제를 통해 실용적인 협력을 추진해 갈 수 있는 여건이다.
트럼프 정권 출범 이후 한미동맹의 장래에 대한 의문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한미동맹은 어설픈 중립주의보다 훨씬 신뢰할 수 있는 협력 체제다. 지금 대한민국이 해야 할 일은 상호 이익의 공통분모를 찾아 한미일 협력을 유지하면서 자체적 국방 능력을 확보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1930년대 프랑스가 오늘의 대한민국에 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