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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역사 ⑤

인더스 문명

신드바드가 인도로 간 까닭은?

글 : 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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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드바드는 인도 오간 뱃사람… ‘신드’는 ‘힌두’ ‘인더스강’ 의미
⊙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 인더스 문명에는 중앙권력 상징하는 왕궁·신전 없어
⊙ 인더스 문명은 수메르 문명과의 교류 속에서 발전하다가 교역망 붕괴로 무너져
⊙ 독립 후 사회주의적 경제 도입했으나, 1980년대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 급성장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모헨조다로 유적. 사진=위키피디아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는 유명한 이야기다. 다른 제목으로는 《천일야화(千一夜話)》다. ‘천 하루 밤’ 동안 이어진 이야기다. 페르시아와 아랍 지역 각지의 여러 설화의 모음집인데 유럽에 최초로 번역·소개한 이는 프랑스의 앙투안 갈랑(1645~1715년)이다. 《Alf laylah wa laylah》를 1704년 《Les Mille et une nuits》로 번역·소개했다. 영어로는 《One Thousand and One Nights》 즉 《천 하루 밤》이다. 본래 제목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갈랑 판 《천일야화》가 1706년 영국에서 《아라비안 나이트 엔터테인먼트(The Arabian Nights Entertainments)》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되었다. 이후 영국의 리처드 버튼(1821~1890년)이 《천일야화》의 이야기들을 1885~1888년 《The Book of the Thousand and One Nights》로 새롭게 번역해 소개했다. 그러면서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제목도 일반화되었다.
 
  한국에도 모두 번역돼 있다. 갈랑 판은 《천일야화》, 버튼 판은 《아라비안 나이트》다. 어떻든 매우 길다. 그래서 완독(完讀)한 경우는 사실 드물다. 그래도 그 안의 몇몇 이야기들은 한번쯤 들어봤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그중 하나에 ‘신드바드 이야기’가 있다. ‘알라딘 이야기’ ‘알리바바 이야기’와 더불어 《아라비안 나이트》의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로 꼽힌다.
 
  뱃사람·선원인 신드바드의 모험담이다. 읽어보지 않았어도 어린 시절 동화판으로 혹은 만화영화로 본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이름은 안다. 하지만 신드바드라는 이 이름 자체가 흥미롭다는 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뱃사람 신드바드
 
파키스탄 신드주. ‘신드’는 ‘힌두’와 통하며, ‘신드바드’가 내왕한 곳이다.
  신드바드(Sindhbad)라는 이름의 신드(Sindh)는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의 서북(西北), 오늘날 파키스탄의 한 지역의 이름과 동일하다. 파키스탄의 4개 주(州) 중 하나인 신드(Sindh)주인데 인더스강 하류에 있으며 아라비아해를 접하고 있다. 이 신드는 고대(古代) 산스크리트어의 신두(Sindhu)에서 유래했는데 ‘큰 물’이라는 뜻으로 바로 인더스강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산스크리트어 신두는 ‘힌두(Hindu)’의 어원이다. 힌두라는 명칭은 인더스강만이 아니라 현재의 인도에 대한 통칭이다. 신드바드는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 인도인일까? 그렇지는 않다. 신드바드의 고향은 소하르(Sohar)로 나온다. 오늘날 아라비아 남동쪽 끝 오만(Sultanate of Oman)의 항구도시다. 이 소하르에서 출발해 아라비아해를 건너면 가장 먼저 인도에 닿는다. 신드바드가 모험담에서 맞닥뜨린 곳곳이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떻든 인도가 빠질 까닭은 없다.
 
  ‘신드바드 이야기’ 중에는 인도 너머 동남아시아 일대를 연상케 하는 곳이 보인다고도 한다. 그럴 수 있다. 신드바드의 항해의 시기적 배경은 인도인들도 동남아시아까지 가는 게 드물지 않던 때다. 동남아시아에 힌두 문화가 퍼져 있기도 한 시대였다. 12세기에 크메르제국이 축조한 앙코르와트는 처음에는 힌두교사원으로 세워졌다가 나중에 불교사원으로도 사용되었다. 신드바드라는 이름의 선원의 모험담은 당시 그 일대를 누빈 실제 상인과 선원들의 항해담을 배경으로 했을 것이다.
 
  어떻든 신드바드 이야기는 중동 지역 세계가 서쪽 인도 지역 등의 세계와 교역을 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교역을 위해 바다를 건넌 이야기다. 그런데 이 같은 교역은 그때에 비로소 있었던 일이 아니다. 놀랍게도 까마득한 옛날의 문명의 초창기부터 이 같은 교역은 이미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등장한 최초 문명인 수메르 문명은 일찍이 그 초창기부터 서쪽 인도 지역의 인더스 문명과 교역을 했다.
 
 
  인더스 문명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3000~ 2500년경 성립된 인류 최초 4대 문명의 하나이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까지 번창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표적 도시로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가 있는데 그 면모가 놀랍다. 전체가 동일한 규격으로 구운 벽돌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잘 정비된 포장도로와 주택, 우물, 성채 및 다수의 곡물창고를 갖추고 있었다.
 
  모헨조다로의 경우 큰 길은 10m, 작은 길은 1.5~3m의 폭을 가진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뻗어 도시 전체를 바둑판처럼 구획하고 있었으며, 주거지와 공방, 상업지구 등이 잘 분리돼 있었으며 하수시설도 완비돼 있었다. 주택에는 우물, 욕실 등이 있고 배수시설은 물론 심지어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인더스 문명은 이른바 4대 문명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지금은 파키스탄 영토 내에 있지만 인더스 문명의 전체 범위는 오늘날의 파키스탄보다도 더 넓은 광대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인더스강은 3000km에 달하는데 하라파는 그 상류에 모헨조다로는 중류에 위치한다.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는 70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두 도시는 벽돌 규격에서 도시 구조까지 마치 동일한 건축가가 설계한 것처럼 닮아 있다.
 
  그런데 인더스 문명에선 다른 초기 문명들과는 달리 집중화된 권력을 상징하는 왕궁이나 웅장한 신전 건축물은 보이지 않는다. 왕궁도 신전도 없으면서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고 치밀한 계획적 도시를 건설한 문명! 이 문명은 과연 어떤 성격의 문명일까?
 
 
  실용주의가 지배한 상업제국
 
인더스 문명권.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지며 흥했고, 교역망이 붕괴하면서 몰락했다.
  인더스 문명은 문자 기록이 많지 않고 그조차 아직 해독(解讀)을 못 하고 있다. 현재까지 활석제 인장(印章)에 새겨진 문자 400자 정도가 확인되었지만 가장 긴 경우가 17자에 불과해 해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 인장들은 비록 문자는 해독되지 않았지만 그 자체가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각기 다른 문양과 문자의 인장이 수없이 많다는 것은 소수 권력자가 어떤 정치적·행정적 목적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인장들은 바로 상업 활동을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 교역이라는 요소를 갖지 않은 고대 문명은 없지만 인더스 문명의 상업 활동과 교역은 다른 문명에 비해 유난히 두드러진다. 인장들이 일부 지역이 아니라 인더스 문명 전역은 물론 멀리 바레인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광범위한 대외 교역도 있었던 것이다. 인더스 문명은 일종의 상업제국이었다.
 
  인더스 문명에도 당연히 지도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려한 궁전 벽에 자랑하듯 치적을 새겨둔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인더스 문명의 지도자들은 마치 반드시 필요한 곳 외의 과시적 소비에는 돈을 전혀 쓰지 않기로 작정한 현대의 사업가나 정치적 군림에는 무관심한 전문직 사람들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인더스 문명은 어떻게 이같이 극히 실용주의적인 상업제국의 면모를 갖게 되었을까?
 
 
  ‘문명의 강’은 교역의 고속도로였다
 
  인더스 문명 유적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외에도 광범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인더스강 유역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인더스강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 유적들은 지금은 간헐적으로만 흐르는 가가-하크라(Ghaggar-Hakra)강 유역에 발달된 도시들이었다. 가가-하크라강은 현재는 간헐적으로 흐르다 타르 사막의 가장자리에서 소멸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유량이 풍부하고 큰 강이었다.
 
  인더스강과 가가-하크라강 일대의 광범한 지역에서 인더스 문명의 도시와 주거 지역의 유적이 1500곳이 넘게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양식이 놀라울 정도로 동일했다. 이 같은 동일성은 농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교류가 있었다.
 
  인더스강(과 가가-하크라강)의 역할은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강은 광대한 지역을 연결하는 일종의 교역의 고속도로였다. 강을 길 삼아 광대한 지역에 걸쳐 거래와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인더스 문명은 대외 교역도 활발히 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에 비해선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인더스 문명의 중요한 도시 유적 중 하나에 돌라비라(Dholavira)가 있다. 돌라비라 유적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보다는 매우 늦게 발굴됐지만 마찬가지로 잘 계획된 도시였다. 그 특성으로 보아 인더스 문명 유적임에 명백했다.
 
  돌라비라는 인더스강과는 현저히 먼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의 해안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모헨조다로에서 268km, 하라파에서 793km. 하지만 도시의 양식 및 발견되는 유물과 그에 새겨진 문자도 모두 동일했다.
 
  의문은 돌라비라의 위치가 예전에는 가가-하크라강 하구였음이 밝혀지면서 풀렸다. 돌라비라는 내적으로 인더스 문명권 내 교역망과 연결돼 있었다. 돌라비라는 그러면서 강 하구 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인더스 문명의 대외 교역항의 역할을 했다. 수메르 문명과의 교역이었다.
 
 
  수메르 문명 기록 속의 인더스 문명과의 교역
 
‘우르의 스탠더드’에 사용된 청금석은 인더스강 동쪽 아프가니스탄에서 산출되어 수메르로 수출되었다.
  인더스 문명과 수메르 문명의 교역은 대단히 활발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수메르 문명 쪽에서도 확인된다. 수메르의 점토판 문헌에는 멜루하(Meluhha)라는 존재가 자주 등장한다. 우선 창조신화에 “엔키는 우르로 가서 그곳을 축복한 뒤 ‘검은 산’ 멜루하로 간다”는 대목이 있다. 주목할 점은 수메르 최고 신(神) 엔키가 멜루하를 수메르와 거의 동등하게 대접한다는 것이다.
 
  “엔키는 멜루하의 나무와 풀, 황소와 새들, 금과 은, 청동과 구리 그리고 인간들을 축복한다. 그리고 이어 엔키는 멜루하로부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으로 간다.”[《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1956, 사무엘 크레이머)]
 
  수메르 문명의 유물로 청금석(靑金石·Lapis Lazuli)으로 만든 도장과 우르의 스탠더드(Standard of Ur)로 불리는 군인 등을 새긴 부조(浮彫) 장식판이 있다. 우르 왕묘 부장품(副葬品) 중에는 금박과 청금석으로 장식된 숫양의 상도 있다. 청금석은 수메르 문명만이 아니라 이집트 문명에서도 귀하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청금석은 이집트는 물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도 산출되지 않는다. 인더스강의 동쪽 지역인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이 주산지였다.
 
  수메르는 이 청금석을 어떻게 구했을까? 인더스 문명과의 교역을 통해서였다. 인더스 문명은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도 포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교역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육로로 교역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해상교역이 큰 역할을 했다.
 
 
  중개무역항 딜문
 
  기원전 2600년 이후로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들은 대외교역을 재조직하여 세 개의 외국, 즉 딜문(Dilmun), 그보다 더 동쪽의 항구 마간(Magan), 그리고 더 먼 멜루하(Meluhha)로부터 해로를 통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멜루하가 바로 인더스 문명 지역이다. 가가-하크라강 하구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 돌라비라는 바로 이 멜루하 곧 인더스 문명권의 관문 항구였을 것이다.
 
  수메르는 멜루하로부터 상아, 기름류, 가구, 금, 은, 청금석, 홍옥수를 수입하고 대신 양털, 옷감, 가죽, 곡식, 삼나무를 수출했다 한다. 수입품 중 홍옥수(紅玉髓)도 인더스 지역의 특산품이었다. 이 교역은 문명사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한다. 미국의 고고학자 그레고리 포셀(1941~2011년)은 수메르와의 교역이 인더스 문명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얘기한다.
 
  기원전 235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아카드의 왕 사르곤은 딜문, 마간, 멜루하 이 모든 곳에서 온 배가 자신의 도시에 정박한 것을 자랑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라가시(Lagash)와 다른 곳들에 멜루하인의 거류지가 있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딜문, 마간, 멜루하와 수메르의 교역은 전문적인 상인들이 벌인 고도로 조직화된 상업무역이었다.
 
  특히 딜문은 수메르와 인더스 양대 문명의 해상교역에서 중개무역항 역할을 하며 대단한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2800년경 고대 수메르의 우르크 제1왕조의 지배자인 길가메시의 서사시에 딜문이 낙원 같은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만큼 번영을 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 딜문은 어디였을까? 오늘날의 페르시아만의 섬나라 바레인이다.
 
  바레인 섬에는 약 8만 개 가까운 고분군이 있다. 1946년부터 바레인의 고분군에 대해 발굴 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분 중 하나에서 단추 형태로 만든 인더스 문명의 인장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당시 딜문에 왔던 멜루하, 즉 인더스 지역의 상인들이 현지의 장인들에게 주문 제작한 것이었다. 바레인의 이 고분군은 현재 ‘딜문 고분군(Dilmun Burial Mounds)’으로 칭해지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한편 우르에서 나온 수메르 고유의 원통형 인장에는 수메르 상인과 멜루하 상인이 통역을 사이에 두고 거래를 하는 장면이 새겨진 것이 있다. 통역은 멜루하 상인이 데려온 사람이었다. 인더스 문명의 상인들은 수메르 문명과의 거래를 위해 수메르 말을 익힌 통역을 거느리고 올 만큼 대외교역에 적극적이었다는 얘기다.
 
 
  인더스 문명의 쇠퇴는 교역망의 붕괴 때문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멜루하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1800년경 이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인더스 문명이 사라진 것이다. 아리안족이 침입하여 인더스 문명을 무너뜨렸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런데 아리안족의 본격적인 인도 진입은 기원전 15세기경으로 본다. 300년 가까운 공백이 있다. 시기는 추정일 뿐인 만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서는 외부 세력의 침공에 의해 파괴되고 인명이 살상된 흔적은 적어도 현재까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강의 변화가 초래한 농업 생산력의 위축이 원인이었을까? 그러나 오늘날에도 그 지역에선 농사에 문제가 없다. 더욱이 인더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곡물을 수입하기도 했다. 자신의 농업 생산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인더스 문명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은 교역망의 붕괴였다. 인더스 문명의 도시와 거주지의 유적들은 지금은 모두 강으로부터 꽤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다. 이것은 가가-하크라강의 소멸과 인더스강의 흐름 변화 때문인데 이 변화가 내부의 교역망에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 한다.
 
  인더스강과 가가-하크라강은 단순히 농업용수나 생활용수만 공급하는 역할을 한 게 아니라 상업제국 인더스 문명 물류(物流)의 대동맥이었다. 이것이 하나는 사라지고 또 하나는 줄기가 거듭 바뀜으로써 인더스 문명 내부의 교역망 교란이 초래된 것이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여러 격변이 거듭되면서 대외 교역이 과거보다는 약화돼 갔다. 이것도 인더스 문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중개지 역할을 했던 딜문-바레인의 번영도 일단 막을 내렸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교역망이 무너지면 번영은 무너지고 국가도 문명도 쇠락한다. 교역은 문명의 시작과 끝이다.
 
  그러나 역사는 한 번의 끝이 영원한 끝은 아니다. 느리든 빠르든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든 새로운 출발은 오게 된다. 물론 새로운 회복은 절대로 급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너짐의 무게에 상응하는 만큼의 장구함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이어지고 역사가 계속되는 한 때는 다시 다가온다. 인도도 그런 과정을 다시 밟아갔다.
 
 
  아리안족의 인도 진출
 
  인더스 문명이 퇴장하는 가운데 인도 지역에 새로운 주역들이 등장했다. 기원전 2000~1500년경 아리안족이 천천히 인도로 밀려들어왔다. 처음 인더스강 상류 지역으로 내려온 아리안족은 기원전 1000년경에는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새로운 중심이 되어갔다. 이들은 새로운 종교도 갖고 왔다. 브라만교였다.
 
  이들이 자리 잡아가는 시기는 인도에서 문명이 새롭게 발흥하는 시기였다. 기원전 1500~500년경 인더스강에서 갠지스강 유역에 이르는 힌두스탄 대평원 지역에서 브라만교에 기초한 사회가 새롭게 성장해갔다. 이런 가운데 카스트 제도가 형성되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수드라, 바이샤의 신분 제도다. 그때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겠지만 그 부정적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인도의 취약점의 하나가 돼 있다.
 
  기원전 12세기경 쿠루 왕국이 세워졌다. 인도 아리아인 최초의 고대 국가였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연합에 가까웠다. 좀 더 본격적인 국가가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00~600년경의 16국 시대였다. 이들 16국들은 서서히 병합되어 주도적인 4개 국가가 성립되었다. 이 가운데 갠지스강 중류의 마가다 왕국이 가장 번성했다.
 
  바로 그 시기인 기원전 6세기 무렵 자이나교와 불교가 등장했다. 브라만교의 한계, 특히 카스트 제도의 문제점을 넘어서려는 문제의식을 품고 있었다.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22~184년)의 3대째인 아쇼카 왕(기원전 304~232년) 시기에는 불교가 국교(國敎)의 위치를 갖게 되기도 했다. 아쇼카 왕은 인도 최남단 일부와 지금의 스리랑카인 실론 섬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 지역을 통일했다. 그래서 마우리아 왕조는 최초의 통일왕조로 일컬어진다.
 
  마우리아 왕조 이후 쿠샨 왕조(105 ~250년경)와 굽타 왕조(320~550년)가 주요 왕조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배 영역은 부분적이었다. 곳곳에 여러 왕국이 세워지고 쟁패를 했다. 그런데 이 시기를 거치며 브라만교는 힌두교로 변모해갔다. 굽타 왕조는 힌두교를 지원했으며 굽타 왕조가 멸망한 뒤에도 여러 곳에서 힌두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8~10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이 인도로 동진(東進)해 오기 시작하면서 인도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206~1526년 도처에서 이슬람 왕국들이 수립되었다. 힌두 왕국들도 있었지만 이슬람 왕국들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이런 가운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다 16세기에 이슬람의 무굴 제국(1526~1858년)이 세워졌다. 무굴은 몽골이라는 뜻이었다. 몽골 제국의 후예를 자처했던 티무르 제국 출신의 바부르가 세운 나라였다. 무굴 제국은 마우리아 왕조 이후 인도의 두 번째 통일왕조로 간주된다. 최대 판도를 구축했으며 한때는 경제적으로도 막강했다. 그러나 안정성은 약했다.
 
 
  영국령 시대의 유산
 
  무굴 제국은 1700년대 초중반 도처의 반란으로 무너져 명목상으로만 황제 칭호를 유지하게 됐다. 그러더니 1803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종속되었다. 그러다 1857년 세포이반란을 계기로 무굴 제국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하고 1858년 인도 제국이 세워졌다. 영국 국왕인 빅토리아 여왕이 무굴 황제를 대신해 ‘인도의 황제’가 됐다. 영국령 식민지였다. 어떤 점에선 인도의 세 번째 통일국가였다. 그런데 영국령 시대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 서구 근대와의 만남이었다.
 
  인도는 독립하면서 중심 지역에는 인도공화국이 수립됐지만 이슬람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따로 독립했다. 실론 섬의 스리랑카도 독립했다. 하지만 어떻든 인도는 더 이상 과거의 인도가 아니었다. 인도공화국에는 종교적·관습적으로는 여전히 카스트 제도의 영향이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완전히 퇴장했다.
 
  인도는 과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영연방 국가의 일원이 됐다. 독립 후 집권한 네루 수상은 영연방 탈퇴를 추진하지 않았으며 인도는 여전히 영연방의 일원이다. 영연방은 명목상이든 어떻든 민주주의·인권·법질서를 공동의 가치로 한다. 거기에는 카스트는 없다.
 

  한편 인도공화국 자체의 내적 통일성도 예전 전근대(前近代)의 왕조시대보다 훨씬 나았다. 인도는 언어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191개라고도 한다. 인도공화국의 공용어는 힌디어지만 다른 언어 인구도 상당하다. 헌법이 인정한 공식 언어만도 22개다. 힌디어가 공용어지만 주요 언어 지역에선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도에는 또 하나의 공용어가 있다. 영어다. 연방 행정기관뿐만 아니라 연방의회에서도 힌디어와 함께 영어가 공용어다. 그런데 영어가 더 주된 공용어다. 고등법원, 대법원에서는 영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게 돼 있다. 힌디어는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 선택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영어는 인도공화국의 내적 통일성 유지에 힌디어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영어는 영국 지배의 유산이다. 이 유산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현대의 인도가 가는 길
 
모디 총리는 ‘메이크 인 인디아’를 내걸고 인도의 경제발전에 힘쓰고 있다. 사진=인도 총리실
  네루는 처음에는 사회주의형 경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네루는 소련식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영국의 서구적 근대화를 학습한 인물이었다. 그의 노선은 본질적으로는 근대화였다. 이후의 인도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도는 결국 1980년대 접어들어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확실하게 전환했다. 그러면서 인도 경제는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인도는 지금 세계시장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큰 교역 국가 중 하나다.
 
  현재 실리콘 벨리에서는 기술인력에서부터 CEO에 이르기까지 인도 출신 인재들이 막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은 수학·과학 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인 인도의 교육의 힘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게 있다. 영어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만큼 인도 출신 인재들은 언어적 제약이 거의 없었다. 영어는 인도가 영국령 시대 덕분에 갖게 된 근대적 강점의 집약적 상징이라 할 수도 있다. 그 힘이었다.
 
  4500년 전 인더스 문명의 성장과 번영을 가져온 것은 수메르 문명과의 교역이었다. 그때 인더스 문명의 상인들은 수메르 문명과 교역을 할 때 수메르 문명권의 언어를 익힌 자신들의 통역을 대동하고 갔다. 수메르가 인더스의 언어를 익힌 게 아니라 인더스가 수메르의 말을 배웠다. 4500년 전 초기 문명들의 중심 문명은 수메르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와 같은 위치에 있는 나라들은 어디일까? 그리고 그 같은 나라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역사는 되풀이된다. 문명의 역사도 그렇다. 문명의 성쇠를 좌우하는 법칙은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인도는 수많은 약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랜 옛날의 인더스 문명과 같은 면모를 다시금 갖추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긍정적 면모의 유지를 놓치지 않는다면 큰 실패는 없을 것이라는 말은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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