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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들여다보기

아프리카 국가이자 中東국가인 수단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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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 군부 쿠데타, 내전 등 거쳐 이슬람 정권 수립
⊙ 한때 알카에다 후원해서 테러지원국 지정, 다르푸르 사태로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로부터 체포영장 발부받아
⊙ 아랍 경작지의 1/3에 해당하는 비옥한 농토 보유…, 근래 産油國 대열 합류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저서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수단의 수도 하르툼. 시가지 옆으로 나일강이 흐른다. 사진=박현도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
 
  고대(古代)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두고 한 말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유명한 문구다. 발원지로부터 총 길이가 무려 약 6800km에 달하는 나일강의 어원(語源)은 고대 그리스어 네일로스(Neilos)다. 이를 라틴어에서 닐루스(Nilus)라고 불렀고, 아랍인들은 닐(Nil)이라고 했다. 고대 셈어에서 강을 뜻하는 나할(nahal)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나일강이라고 하면 모두 이집트를 연상한다. 사실 나일강은 두 줄기가 수단에서 하나로 합쳐져 이집트로 흐른다. 한 줄기는 에티오피아 고원(高原)의 타나(Tana) 호수에서 발원한 청(靑)나일이고, 또 다른 줄기는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시작한 백(白)나일이다. 청나일은 명칭과는 달리 강물이 검은 침전토를 운반하기에 물색이 검정색인데, 검정과 청색을 혼용해 쓰던 토착어 때문에 청나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한편 백나일은 강물에 밝은 회색 침전토가 쓸려 가서 물색이 흰색처럼 보이기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 두 물줄기는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서 만나 북쪽 이집트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아프리카이면서도 中東인 나라
 
   이집트가 나일강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지만, 사실 수단이야말로 청백 두 나일을 모두 포용하고 있으니 진정 나일의 선물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한 나일강의 나라 수단은 아프리카 대륙에 있지만, 이슬람문화권이기에 여타 국가와는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라기보다는 흔히 우리가 아는 중동(中東)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낫다.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이 지배적인 종교문화인 나라이니 말이다.
 
  오늘날 수단은 2017년 10월 미국의 경제제재에서 해제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아직 테러지원국 명단에서는 제외되지 않았지만, 1997년부터 부과된 미국의 경제제재가 풀리자 꽉 막혔던 돈줄이 터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내심 테러지원국 해제도 바라고 있다.
 
  이에 우리 기업들도 수단 시장 개척에 조심스럽게 나섰다. 지난 10월 2일부터 4일까지 우리 기업 14개사가 수단을 방문하여 산업통상자원부, 플랜트산업협회,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무역협회, 무역보험공사 등 경제기관과 주(駐)수단 우리 대사관의 도움을 받으며 현지 판로 개척에 전력을 기울였다. 수단 정부의 관심도 지대했다. 두 명의 현직 장관이 경제협력 행사에 직접 참가하여 수단 홍보와 투자유치에 정성을 쏟았다.
 
  아프리카이면서도 중동의 향기가 진한 수단은 홍해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전략시장으로서 가치가 큰 곳이다. 월드컵 축구 예선에서 볼 수 있듯 수단은 분명 아프리카 대륙에 속하지만, 종교문화와 경제교역에서는 중동 아랍국가의 특징이 진한 곳으로,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상을 잘 활용하여 아프리카연합과 아랍연맹 둘 다 가입되어 있다.
 
  수단은 동쪽으로는 홍해와 에리트리아, 서쪽으로는 차드와 중앙아프리카, 남쪽으로는 남수단, 에티오피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수단은 2011년 지금의 수단, 즉 북수단에서 분리 독립했다. 남북 수단은 사실 하나의 나라를 이루기에는 종교문화적으로 이질적이다. 그러나 이질적인 두 지역이 수단 독립과 함께 하나의 정체로 묶였다. 양자는 치열한 내전 끝에 결국 2011년 헤어졌다. 남수단은 남수단공화국, 북수단은 수단공화국이 공식 국호다.
 
 
  마흐디 저항운동
 
무함마드 아흐마드는 자신을 ‘마흐디’로 선포하고 反英투쟁을 이끌었다.
  수단이라는 말은 아랍어로 ‘검다’는 뜻이다. 근대 이전의 아랍 지리학자들은 오늘날 모로코· 알제리·튀니지·리비아·이집트 남부 지역, 즉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을 ‘빌라드 앗수단(Bilad al-Sudan)’이라고 불렀다. ‘흑인들의 땅’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수단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1769~1849)가 1821년에 정복하면서 ‘이집트의 수단’이라고도 불렸다. 홍해에서 다르푸르, 누비아에서 아프리카의 대호수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했다.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지만, 1882년 이집트가 영국의 보호령(保護領)이 되면서 사실상 영국이 수단을 통치했다. 그러나 수단 사람들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이슬람 지도자인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스스로를 이슬람교의 종말론적 인물인 ‘마흐디(Mahdi)’로 선포하면서 반(反)이집트-반영(反英)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마흐디는 불의(不義)한 세상을 정화하여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신(神)이 보낸 인물을 말한다.
 
  마흐디 저항군은 1885년 하르툼으로 진격했다. 당시 수단 총독은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찰스 조지 고든이었다. 마흐디 저항군의 기세가 거세지자 영국 정부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지만 고든은 본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피신하지도 않았다. 결국 고든의 머리는 마흐디 저항군의 손에 떨어졌다.
 
  수단은 영국 총독 공관 부속 성공회 성당을 박물관으로 만들어 수단 독립운동 역사 관련 물품을 전시해 놓고 있다. 박물관 전시물은 마흐디 저항운동으로 시작한다. 저항군이 고든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사진, 중국 복식을 한 고든의 사진이 중국어 설명과 함께 걸려 있다.
 
 
  독립 후 南北 갈등
 
  마흐디 저항군의 수단 통치는 1899년으로 끝났다. 수단은 영국의 승인하에 이집트가 총독을 보내 다스리는 형식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집트와 영국의 통치를 거쳐 수단이 독립한 것은 1956년에 이르러서였다. 1952년 이집트 나세르의 군사혁명은 수단 독립의 청신호가 됐다. 혁명정부는 수단이 독립해야만 영국의 영향력이 소멸될 것이라고 보았다. 더군다나 혁명 지도자였던 나기브의 어머니는 수단 출신이었다. 영국은 수단 독립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신생 독립국의 앞날은 평탄하지 않았다. 5차례나 군부(軍部) 쿠데타가 이어질 정도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 초대(初代) 국회에서부터 북수단이 남수단을 압도했다. 사실 남수단은 독립 당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지니고 수단 독립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독립 후 수단의 정치는 북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수단 정부가 아랍이슬람화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비(非)무슬림 수단인들의 불만이 팽배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누메이리(1969~1985년 재임) 정권은 1983년 북부에서만 적용되던 이슬람법을 남부에도 강제 시행, 비무슬림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이슬람이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때, 진정한 신앙의 힘이 발휘되기는 어렵다. 누메이리 정부는 18개월 동안 50명 이상의 절도범 손목을 잘랐고, 외화를 소지한 죄로 콥트정교인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맥주를 판 가난한 여인은 태형에 처했다.
 
 
  비운의 개혁가 따하
 
바시르 수단 대통령.
  누메이리는 1985년 여성과 비무슬림의 완전한 권리를 옹호하면서 다(多)종교 세속사회에서 이슬람법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던 이슬람 개혁가 마흐무드 모함마드 따하를 배교죄(背敎罪)로 몰아 처형했다. 당시 수단 판사들은 따하가 죽어 마땅한 배교자라는 이집트의 최고 이슬람교육기관 알아즈하르와 무슬림세계연맹의 의견을 인용했다.
 
  따하가 죽은 1985년이나 지금이나 중동은 여전히 신의 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극단주의자들이 활개치고 있다. 신을 입에 올리며 죽인 선량한 무슬림들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최근까지 IS(이슬람국가)가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상기해 보면 극단주의의 힘은 여전하다.
 
  따하는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난 불우한 개혁가였다. 그는 영국 식민 지배 시절에 공화당을 만들어 정치활동을 하다가 수단 최초의 정치범이 된 인물이었다. 따하는 1985년 1월 18일 76세의 나이에 1만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을 당했다. 아랍인권기구는 이날을 ‘아랍인권의 날’로 선포했다.
 
  훗날 누메이리는 자신은 따하를 죽이길 원하지 않았으나 하산 투라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였다면서 따하 죽음 배후에 투라비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투라비는 1983년 이슬람법 시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하의 목숨을 앗아간 이슬람법 시행 때문에 수단정부와 남부의 수단민중해방군의 내전(內戰)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이슬람에 기댄 정치는 따하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됐다. 누메이리는 쿠데타로 실각했지만, 1989년 쿠데타로 집권한 바시르 현 대통령은 1991년 수단 전역에 다시금 새로운 이슬람 형법을 도입했다. 그는 남수단에도 무슬림 법관을 임명했다.
 
  바시르의 집권과 이슬람주의적 국가 질서 건립의 배후에 투라비가 있다. 그는 1990년대에 과격 무슬림들을 끌어들인 대중아랍이슬람의회를 만들어 사무총장이 됐다. 투라비는 정부가 수단민중해방군에 맞선 내전을 지하드(聖戰)로 선포하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반란군에 맞설 국방방위대 의무 징집이 시행됐다. 이슬람법 시행과 이슬람적인 헌법 제정으로 수단에서 ‘신의 통치’가 완성된 데에 투라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알카에다의 후원자 투라비
 
수단의 이슬람화를 주도한 투라비. 사진=뉴시스
  1999년 대통령과 벌인 정치투쟁에서 패하면서 투라비의 영향력이 사그라들었다. 투라비를 투옥하고 가택연금(軟禁)하면서 바시르 정권은 이슬람에 전보다 유연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투라비가 수단을 급진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의 뒷마당으로 만들어 끼친 해악은 적지 않다. 수단의 반정부 지식인들은 투라비가 이슬람을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현 수단의 정치체제 건설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동료이자 빈 라덴 사후 알카에다를 이끌고 있는 자와히리를 수단으로 불러들인 사람도 투라비다. 이들은 1996년 추방될 때까지 5년간 수단에서 거주했다.
 
  빈 라덴을 영웅, 미국을 ‘악(惡)의 화신(化身)’으로 부른 투라비는 수단을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분자들의 피신처로 만들었다. 열렬한 지하드 지지자였던 투라비는 1998년 A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그해 8월 7일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두 곳이 동시에 폭탄 공격을 받아 200명 이상이 죽은 사건을 두고 “이해할 만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은 1993년 급진 과격분자 지원을 중단하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단 정부가 계속 국제 테러조직에게 수단을 도피처로 제공하고 있다고 하면서 수단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아울러 미국 정부는 수단이 이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란이 지원하는 단체에 만남의 장소, 환승처 및 도피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7년에는 행정명령 13067호를 발동하여 수단에 경제제재를 부과했다. 이듬해에는 알카에다의 화학무기 공장으로 의심이 가는 곳을 14발의 크루즈미사일로 폭격했다. 그러나 정보와 달리 의약품 제조공장으로 드러났다.
 
  2001년 9·11 뉴욕테러가 발생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수단 정부는 미국에 협력하여 국내 알카에다 조직 색출에 나섰다.
 
 
  다르푸르 사태
 
다르푸르 사태 당시 난민촌. 48만명이 목숨을 잃고 28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사진=조선BD
  2003년 서부 다르푸르에서 정부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며 반군(反軍)과 주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바시르 정부는 잔자위드(Janjawid) 민병대를 내세워 마을을 불태우고 살인·강간·고문을 자행했다. 약 48만명이 목숨을 잃고, 280만여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1994년 르완다 학살에 버금가는 잔인한 폭력사태였다.
 
  이 처참한 현실을 유엔은 ‘세계 최악의 인도적 위기’로, 미국 정부는 ‘학살’로 규정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2009년 3월 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하면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10년 7월에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바시르 대통령은 여전히 건재하다. 바시르 대통령이 수단 밖으로 나오면, 해당 국가는 그를 체포해서 국제형사재판소 재판정에 세워야 하나 남아프리카공화국·케냐 등 그가 순방한 국가들이 모두 체포명령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향후 바시르 대통령이 체포되어 심판을 받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독립 이래 끊임없이 내전과 정치 불안에 시달려 온 수단은 현재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유전(油田)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남수단이 독립하면서 충격이 컸지만, 협상을 통해 향후 손실액을 보상받는 것으로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작년 10월 미국의 경제제재가 해제됐지만 아직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수단은 내심 미국이 테러지원국에서 완전히 해제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투라비의 이슬람주의 비전에 휘말려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쓰면서 국가발전의 길에 어긋나는 역주행(逆走行)을 한 수단의 과거가 무척이나 안타깝다. 따하의 생각을 좀 더 존중했더라면 독립 후 내전이나 정치적 불안을 조금 덜 겪지 않았을까?
 
 
  1999년부터 석유수출국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이집트에 비해 수단의 역사문화적 위상이 많이 뒤처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단은 아랍세계 모든 경작지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곡물 창고다. 아랍농업개발기구(Arab Organization for Agricultural Development)가 본부를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둔 것도 수단의 농업이 지니고 있는 국제적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다. 현지에서 10년 동안 유학생활을 한 선배 교수의 말에 따르면 열무를 심었더니 한 해 6번이나 수확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농업 잠재력을 갖춘 나라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석유 때문이다. 1959년 이탈리아가 수단의 홍해 연안에서 석유 탐사를 시작한 이래 수단은 유전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79년 미국 셰브론사가 최초의 유전을 남수단 무글라드 서쪽에서 발견했다. 3년 후인 1982년에는 헤글리그와 유니티라는 중요한 유전을 발굴했다. 이들 유전은 내륙에 위치했기에 채굴한 석유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홍해 연안 항구까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해야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전, 개발 중단, 사업자 변경 등 우여곡절 끝에 북동부 홍해 연안 항구 부르수단에 이르는 파이프라인이 완성되어 1999년 처음으로 수단은 석유수출국 대열에 합류했다.
 
  파이프라인 개통식에서 석유수출을 ‘신의 선물’이라고 한 바시르 대통령의 말처럼 석유는 수단의 희망이고 미래였다. 하지만 석유에 몰입하는 사이 천혜의 농업은 그만큼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제야 비로소 수단 정부는 그간 소홀히 여긴 농업 재건에 눈을 돌리고 있다. 현대화와 수출산업화로 농축산업을 발전시키려는 수단 정부의 비전에 우리나라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아프리카와 중동을 잇는 가교 수단에 부국(富國)과 빈국(貧國)을 잇는 우리나라의 경험과 기술이 더해져 상생 협력의 미래가 열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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