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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들여다보기

알 아프가니 등, 19세기 후반에 ‘기독교의 루터’처럼 이슬람 종교개혁 주장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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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드 아마드 칸, 알아프가니, 무함마드 압두 등, 루터를 모델로 한 근대적 종교개혁 주장
⊙ 자룰라 비기, “무슬림 세계는 이성을 포로로 잡아놓는 바람에 퇴보”
⊙ 이슬람교, 정치권력이 종교를 통해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던 과거의 유산 버리지 못하고 있어
⊙ 사우디아라비아의 최근 정변은 1979년 이후 지속된 극단주의·이슬람 원리주의 경쟁에서 탈피하겠다는 것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19세기 중·후반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이슬람 사상가 자말룻딘 알아프가니.
  올해로 마르틴 루터가 개혁의 목소리를 낸 지 딱 500년이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번역하고 있는 루터의 개혁운동은 엄밀히 따지자면 그리스도교 개혁인데, 낡고 부정한 일을 혁파하여 시대정신을 이끌었기에 종교를 초월하여 보편적 정의의 외침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대사(大赦・Indulgentia)라는 것이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죄를 지으면 고백성사를 하여 용서받는다. 고백성사 때 사제는 보속(補贖)으로 기도나 선행(善行)을 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일주일 동안 매일 미사에 참석하거나 주기도문을 하루에 열 번씩 며칠 동안 외라는 등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현세에서 이러한 죄의 대가를 다 치르지 못하여 남는 벌은 사후(死後)에 연옥(煉獄)에서 해소하여야 한다. 이렇게 남은 벌, 즉 잠벌(暫罰)은 대사로 면한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가톨릭 교회의 부정을 비판하고 나선 결정적 이유가 된 면죄부(免罪符)는 사실 오역이다. 대사부(大赦符)라고 하는 것이 맞다. 죄가 아니라 벌을 면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가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도 게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게시 여부와 관계없이 루터의 개혁정신은 가톨릭 교회가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는 세계 질서의 정점(頂點)에 있다는 서양 중세의 낡은 믿음을 혁파하는 선봉이 되었다.
 
  루터 이후 서양 그리스도교의 쇄신과 계몽주의 발흥, 인문과 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서양뿐 아니라 오늘날 눈부시게 진보한 세계는 바로 고리타분한 전통의 억압에 침묵하지 않고 과감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하고 나선 루터의 용감한 행동에 빚진 바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슬라흐와 타즈디드
 
  이슬람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들은 루터를 보면서 무슬림들은 왜 루터와 같은 사람이 나와서 전통의 인습(因習)을 깨뜨리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사실 이러한 질문을 루터의 개혁 500주년이 되는 올해뿐 아니라 근세기 들어 끊이지 않고 줄기차게 제기하였다.
 
  무슬림들은 루터와 같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슬람에는 루터와 같은 개혁이 필요 없다고 믿는 것일까? 테러, 폭력, 완고, 과격과 같은 단어로 이슬람을 연상하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태도와는 달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루터의 개혁정신에 영감을 얻고 스스로를 반성하며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던 무슬림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 인물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슬람은 이슬라흐(Islah)와 타즈디드(Tajdid)라는 말로 개혁을 이야기한다. ‘이슬라흐’는 코란에 나오는 말인데, ‘개혁’으로 번역한다.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갈 때마다 신(神)은 예언자를 보내어 인류를 바른길로 인도하면서 잘못된 믿음과 관습을 개혁한다. 즉 신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들이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 것을 요구한다.
 
  타즈디드는 ‘새롭게 한다’는 동사에서 파생한 동명사로 ‘쇄신(刷新)’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어울리는 단어다. 예언자 무함마드 언행록(言行錄)을 보면 무함마드는 세기마다 신이 무잣디드(Mujaddid), 즉 무슬림 공동체에 ‘쇄신자’를 보내어 무슬림들의 믿음을 새롭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쇄신자는 예언자가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 더 이상 신이 예언자를 보내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쇄신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세운 공동체를 모범으로 삼아 그동안 잘못된 신앙과 신행(信行)을 비판하고 비(非)이슬람적인 요소를 제거하여 코란과 예언자의 언행에 맞는 삶을 제시한다.
 
  무슬림들은 지난 1400여 년 이슬람의 역사 속에서 100년마다 쇄신자가 등장하여 무슬림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였다고 하면서 각기 나름대로 주요한 인물을 쇄신자로 열거한다. 그러나 누가 쇄신자인지는 종파마다 생각이 다르다. 게다가 이슬람에는 전 세계 신도들을 통솔하는 중앙기관이 없다. 때문에 로마교황청이 성인(聖人)을 인증하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에서는 누가 쇄신자인지 아닌지 공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신앙인들 중에서 우마이야조 칼리파였던 1세기의 우마르 2세(이슬람력 63~101/서기 682~720), 법학자이면서 신비주의자로 《종교학의 부흥》이라는 책을 써서 신앙의 의미를 밝히고, 그리스철학에 경도되어 코란의 가르침을 저버렸다고 철학자들을 비판하였던 5세기의 알가잘리(이슬람력 450~505/서력 1058~1111)를 많은 무슬림이 쇄신자로 꼽는다.
 
 
  이슬람의 자정(自淨)운동
 
알아프가니에게 영향을 준 사이드 아마드 칸.
  여느 종교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무슬림 역시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면서 종교의 의미를 물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맞춰 진정한 전통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슬림들의 자정(自淨)운동은 거시적으로 보면 19세기를 기점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19세기 이전까지는 무슬림들의 도덕적・영적 타락을 질타하면서 내부정화운동의 양상을 보였다. 19세기 이후로는 유럽 식민주의와 같은 무슬림 사회 외부에서 불어오는 영향에 따른 반응으로 ‘근대화와 이슬람’을 화두로 이슬람 전통을 바라보는 흐름이 생겼다.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으면서 타자(他者)에 비추어 나를 보면서 내가 어디쯤 있는가를 진정 심각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근대적 삶에 맞는 이슬람을 선도하며 이슬람의 기치 아래 모든 무슬림을 결집시키고자 노력한 이슬람 근대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은 자말룻딘 알아프가니(Jamalidin Al-Afghani・1838~1897)였다. 이란 아사다바드에서 태어난 그는 아랍 순니 세계에 더 폭넓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아프간 출신이라는 뜻의 아프가니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알아프가니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영국령 인도의 사이드 아마드 칸(Sayyid Ahmad Khan·1817~1898)을 들 수 있다. 칸은 인도에는 스틸(Steele)이나 애디슨(Addison) 같은 사람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루터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슬람의 루터’ 지향한 알아프가니
 
  이슬람을 종교를 넘어 포괄적인 문명으로 간주한 알아프가니는 루터를 유럽을 야만에서 문명으로 변화시킨 인물로 존경하였다. 그는 루터를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유럽이 야만의 상태에서 문명국으로 변한 이유를 살펴보면 루터가 시작하여 퍼뜨린 종교운동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위대한 인물은 유럽인들이 명백한 이성을 따르지 않고 교회 수장(首長)과 맹목적으로 종교에 복종하는 것을 보고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알아프가니는 이슬람에도 루터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슬람의 근간인 코란을 중시하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퇴보와 무지로부터 무슬림 사회를 구하여 발전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이슬람의 루터’가 되어 무슬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이슬람 사회에서 종교가 과학과 진보를 막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슬람보다 몇 세기 앞서 성립한 그리스도교도 이슬람처럼 종교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지만 일단 장애를 제거하자 급속히 발전하였듯,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무슬림 사회도 서양 사회처럼 문명의 길을 걸으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과학적인 사고의 틀을 만들지 못한, 아니 있었지만 잃어버린 무슬림 사회를 향하여 그는 서양의 과학문명은 서양의 것이 아니라 무슬림이 과거에 전해준 것이므로 겁내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였다. 이슬람은 이성(理性)과 과학의 종교인데 무슬림 사회가 숙명론과 저세상만을 지향하면서 현세의 성공을 등한시하였다고 질타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무슬림은 이승과 저승, 양계(兩界)에서 성공을 추구하고, 이슬람은 총체적 삶의 방식으로 종교의례뿐 아니라 법과 정부와 사회 전부를 포괄한다고 주장하였다.
 
 
  코란을 창의적으로 해석한 무함마드 압두
 
아랍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무함마드 압두.
  알아프가니와 함께 무슬림 계몽활동에 나서서 아랍 세계에 더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무함마드 압두(Muhammad Abduh·1849~1905)였다. 알아프가니가 ‘이슬람 근대주의의 아버지’라면, 압두는 ‘아랍세계 이슬람 근대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슬람법학자로 알아즈하르대학교 학장을 지낸 압두는 성인숭배, 기적과 같은 비이슬람적인 대중적 믿음과 수동적이고 숙명론적인 수피들의 종교생활, 새로운 해석을 금지한 전통적 법학자들 때문에 무슬림 사회가 창조성과 역동성을 발휘하지 못하였기에 서구에 비해 무슬림 세계가 쇠퇴하였다고 진단하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해석이란 어떤 것일까? 코란 4장 3절은 4명의 아내까지 얻을 수 있으나 공정할 자신이 없다면 한 명과만 혼인의 연(緣)을 맺으라고 한다. 압두는 이러한 코란 말씀은 예언자 무함마드 시절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일부다처제가 허락된 것일 뿐 신이 명령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같은 장 129절은 “너희가 제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아내들 사이에서 결코 공정할 수 없으리라”고 이르고 있다. 공정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코란이 가리키는 혼인은 일부다처가 아니라 일부일처라고 압두는 해석한다.
 
  이렇듯 창의적인 해석을 내어놓은 압두는 루터와 같은 개혁가들이 사상의 자유와 폭넓은 지식으로 신앙을 고양하였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그는 “개혁가들의 그리스도교는 무함마드가 예언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이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 예배방식만 다를 뿐 이슬람과 개신교는 같다는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교는 개혁을 통해서 이슬람과 다를 바 없이 되었는데, 원래 훌륭한 위치를 점하고 있던 이슬람 세계는 왜 개혁을 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교와 같은 진보한 과학문명을 이루지 못한 것일까?
 
 
  “종교학자들 때문에 이슬람 쇠락”
 
이슬람의 통렬한 반성을 촉구한 무사 자룰라 비기.
  이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은 압두보다 한 세대 뒤 러시아 타타르 지역에서 개혁의 꿈을 꾼 무사 자룰라 비기(Musa Jarullah Bigi·1875~1949)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비기는 1912년 자신의 책 《숙고해야 할 몇 가지 문제》에서 무슬림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반성한다.
 
  〈문명세계는 교회의 권위로부터 이성을 지켜 발전하였다. 같은 시각에 무슬림 교육기관은 중세 신학 주석(註釋)을 공부하느라 바빴다. 무슬림 저자들은 그러한 책의 해설서를 쓰는 데 푹 빠졌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때 무슬림들의 마음은 창의적이지 못한 법학자와 철학자의 손에 사로잡혀 있었다. 무슬림 세계가 생명력을 잃고 동력을 상실하여 쇠락한 것은 바로 틀림없이 이와 같은 뇌 활동 정지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산 시절은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위대한 술탄이었던 쉴레이만 대제(Süleiman·1494~1566) 시기와 겹친다. 당시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이슬람국가보다 약하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가들 덕분에 그리스도교 세계는 진보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 무슬림 세계는 이븐 케말(Ibn Kemal·약 1468~1534), 에붓수우드(Ebussu‘ud·1491~1574)와 같은 종교학자와 지도자들 때문에 퇴락하였다.
 
  즉 문명세계가 이성의 자유 덕에 진보한 반면, 무슬림 세계는 이성을 포로로 잡아놓는 바람에 퇴보하였다. 마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예언이라도 하듯 맹인 무슬림 철학자인 아부 알알라으(Abu al-‘Ala’·아랍시인·973~1057)는 그의 시집 《루주미야트(Luzumiyyat)》에서 이렇게 읊었다.
 
  “그들은 앞서 나아갔지만 우리는 잠들러 갔네. 우리가 쇠락한 덕에 그들이 올라갔다네.”〉
 
  19세기 이후 알아프가니, 압두, 비기 등 무슬림 학자들은 이성의 창조적인 활동을 막은 전통의 폐습이 무슬림 세계를 퇴락의 길로 들어서게 한 원흉이었다고 입 모아 지적하였다. 이들은 마르틴 루터에게서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무슬림 세계보다 낙후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가 비약적인 발전을 한 이유는 이성을 가로막은 중세 로마 가톨릭 세계관을 무너뜨린 루터의 개혁정신에 있다고 간파하고 있었다. 특히 비기는 위 인용문에서 보여주듯 루터를 위시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였기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슬람의 루터가 되려는 야심을 가진 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루터식 종교개혁에 대한 경계
 
종교개혁의 부정적 측면을 경계했던 무함마드 이크발.
  그러나 이른바 이슬람 근대주의자들은 루터의 개혁정신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종교개혁이 불러온 부정적인 측면 또한 우려하였다. 근대 가장 영향력 있는 무슬림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영국령 인도 출생 무함마드 이크발(Muhammad Iqbal·1877~1938)은 자유주의가 분열을 조장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유로운 사상을 좇다가 한계를 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오늘날 우리는 유럽의 개신교 혁명과 유사한 시기를 겪고 있다. 루터 운동의 시작과 결과가 가르치는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찬찬히 돌이켜보면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운동이고, 그 결과 유럽에서 국가윤리체제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윤리를 점진적으로 대체하였다.〉
 
  이크발은 종교개혁의 결과 공통의 종교 윤리보다 국가 윤리가 우선시되고, 유럽이 겪은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양자가 대립하면서 혼란을 야기한다고 지적한다. 개혁은 필요하되 분열은 피해야 한다는 말이다. 국가와 종교라는 두 가지 다른 가치가 융합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것을 우려한 것이다.
 
  알아프가니부터 19세기 이후 무슬림 사회의 신심 깊은 근대주의자들은 이슬람에 변화를 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성을 되살려 새로운 해석으로 전통을 재해석하고 과학문명을 되살리려 한 이들의 시도는 안타깝게도 20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에도 여전히 미결(未決) 과제로 남아 있다.
 
  1930년 이크발은 다른 무슬림 국가들이 과거의 유산을 붙잡고 있을 때 터키만이 깊은 잠에서 깨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터키마저 지금은 다시 과거의 유산으로 되돌아가고자 하고 있다. 이크발이 살아 있다면 자신의 평가를 부끄러워할 처지다.
 
 
  정교분리 실패한 이슬람
 
터키의 서구화를 추진했던 아타튀르크.
  그렇다면 터키는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무슬림 세계는 사이드 아마드 칸, 알아프가니, 압두, 비기, 이크발이 기대하였던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안타깝지만 답은 부정적이다. 루터에게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길을 열어보려고 했던 무슬림 근대주의자들이 하나같이 이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해석을 말했지만, 무슬림 세계는 과학문명에 바탕을 둔 진보적인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처럼 중앙집권적인 교황청이 없기에 이슬람은 루터의 정신을 이은 개별교회 중심의 개신교와 같은 조직이다. 개개의 교회가 각기 다른 목소리를 내듯, 이슬람 또한 그러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야 괴칼프(Ziya G・kalp·1876~1924)가 자랑스럽게 말했듯, 루터의 종교개혁은 곧 ‘이슬람화한 그리스도교’를 만든 것이다. 이슬람처럼 교황도, 공의회도, 종교재판도 없는 교회 말이다. 그런데 왜 개신교 유럽 사회는 발전하였는데, 개신교보다 1000년이나 먼저 존재해 온 이슬람문화권은 그처럼 발전하지 못하였을까? 왜 루터가 필요하다고 근대주의자들은 생각한 것이었을까?
 
  이 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개신교와 달리 이슬람교는 정치권력이 여전히 종교를 통해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했던 과거의 유산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권은 무력을 쥔 이들이 장악하였고, 대체로 이들은 자신들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을 통치하였다. 이들에게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민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슬람법학자들을 우대하고 후원하여 민심의 지지를 받았다. 이슬람법학자들은 민중과 통치자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독립된 공간에서 이슬람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권력을 누렸다.
 
  근대국가가 들어섰지만, 민의가 아니라 힘으로 정권을 쥔 통치자들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이슬람을 매개로 이슬람법 전문가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누린다. 이러한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정리하여 서구와 같은 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인물이 바로 터키의 아타튀르크 케말파샤였다. 중동의 공화정(共和政) 국가들은 이러한 터키의 실험을 따랐지만, 모든 국가가 하나같이 여전히 종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세력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사우디 정변의 의미
 
  특히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누가 진정한 이슬람 정통국가인가를 두고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각축전이 전개되면서 근대주의자들이 꿈꿨던 이슬람법의 새로운 해석 대신 보다 더 보수적인 이슬람법 적용이 일상화되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이 극단주의를 일소하겠다면서 보수적인 종교색을 빼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온건한 이슬람국가’를 표방하면서 “1979년 이전의 자유로운 사우디아라비아로 되돌아가겠다”고 선언한 것도 1979년 이후 지속된 극단주의, 이슬람 원리주의 경쟁에서 탈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를 시작으로 종교와 국가가 일체화한 과거의 유산을 깨고 무슬림 근대 사상가들이 꿈꾼 새로운 해석에 바탕을 둔 무슬림 문화가 중동에 자리 잡을 수 있을까? 몹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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