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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들여다보기

무슬림 제국의 수호자 노예 출신 군인, 맘룩(Mamluk)

글 : 박현도  명지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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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비(非)무슬림 소년 선발해 종교·군사교육… 주인에게만 의존하는 관계 바탕으로
    충성심 확보
⊙ 맘룩군대, 몽골군 막아내고 이집트에서 왕조 개창
⊙ 오스만튀르크는 그리스도교 소년들로 예니체리라는 정예부대 편성… 정변 일으키기도

박현도
1966년생. 서강대 종교학과 졸업, 캐나다 맥길대 이슬람학 석사 및 박사(수료),
이란 테헤란대 이슬람학 박사 / 현 명지대 중동문제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
이화여대 겸임교수,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중동연구회전문위원,
종교평화국제사업단 영문계간지 《Religion & Peace》 편집장 /
《법으로 보는 이슬람과 중동》 《IS를 말한다》 등 공저 다수 저술
오스만튀르크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는 정복전쟁의 선봉이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를 제외하고,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충성도 높은 군인들에 둘러싸인 지도자보다 더 마음 든든한 위정자가 있을까? 사실 충심 어린 무장(武將)들을 갖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무력으로 누르기에 그냥 충성하는 시늉만 내는 것이겠지’라고 냉소적인 생각을 하면서 ‘지도자에게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쳐 충성하는 군인들이 존재하기는 하였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놀라지 마시라. 이슬람 세계에는 그런 군인들이 실제로 있었다. 서슬 퍼런 폭압에 어쩔 수 없이 충성맹세를 하는 표리부동의 군인들이 아니라 진심으로 모든 것을 바친 충장(忠將)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름하여 ‘노예 출신 군인’이다.
 
  노예 출신 군인을 아랍어로 굴람(Ghulam), 맘룩(Mamluk)이라고 불렀다. ‘굴람’은 ‘소년’이라는 뜻인데, 어렸을 적에 노예로 팔려왔기에 굴람이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굴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나, 11세기 이후부터는 맘룩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맘룩’은 아랍어로 ‘소유된 자’라는 뜻이니, 노예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3세기부터는 맘룩이 굴람을 대체하였다. 굴람은 중요한 인물의 개인적 노예를 뜻하게 되었다. 맘룩의 개인적 노예를 굴람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굴람과 맘룩
 
11세기 그리스 역사가 요한네스 스퀼리트제스(Ioannes Scylitzes)의 세밀화.
무으타심(맨 오른쪽)을 알현하는 비잔티움 사신들.
  무슬림 세계에서 맘룩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9세기 압바스 칼리파조의 무으타심(Mu’tasim) 때다. 833년부터 842년까지 칼리파로 통치한 그는 칼리파가 되기 전 최대 8000여 명에 달하는 튀르크계(系) 굴람들을 친위대로 거느렸다. 어머니가 튀르크 노예 출신이라 튀르크계를 고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튀르크인들이 스텝 지역에서 이미 용맹한 전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므로, 튀르크계 전사를 선호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노예 출신 군인인가? 답은 아주 단순하다. 노예로 팔려왔기 때문이다. 무슬림 위정자들은 기존 무슬림보다 더 믿을 만하고 충직한 군인을 원하였다. 무슬림을 이슬람법상 노예로 부릴 수 없다. 그래서 노예상들에게 부탁하여 뛰어난 소년들을 노예로 들여왔다. 무슬림을 노예로 들일 수 없기에 비(非)무슬림이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소년은 장래 군인으로, 소녀는 위정자의 첩으로 팔려왔다. 피부색이 하얀 소년들만 선발하여 전사(戰士)로 양성하였다.
 
  맘룩은 10살 안팎의 나이에 무슬림 세계의 북쪽 킵차크 스텝 지역에서 팔려 온다. 이들 어린 노예는 종교와 군사교육을 받는데, 18살 정도에 이르면 교육을 마치고 자신의 주인인 통치자 내지 상관이 이끄는 부대에 기마 궁수로 배치된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주인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로 길러졌으니 충성심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다. 주인과 맘룩은 마치 부자(父子)관계와 같았다. 또 같은 부대에 있는 맘룩들은 서로 강력한 형제애를 느꼈다. 군부대 전체가 마치 대가족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맘룩은 한 세대 이상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맘룩의 아들은 맘룩이 될 수 없었다. 되었다고 한들 아버지만큼 강력한 충성심을 통치자나 상관에게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튀르크 이름을 유지하였던 맘룩들과 달리 이들의 아들은 아랍어 이름을 가졌다. 비무슬림에서 무슬림이 된 아버지 세대와는 달리 무슬림으로 태어난 이들이 가난한 비무슬림 소년이라는 사회 바닥층에서 최고의 엘리트 군인으로 부(富)와 명예를 지니게 된 아버지들보다 통치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할 수는 결코 없었다.
 
  충성도가 최상급인 군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노예소년을 지속적으로 사와서 어렸을 때부터 끝없는 교육을 통해 연대(連帶)의식이 강력한 군을 만드는 것이었다. 가난한 비무슬림 소년에서 부유하고 힘 있는 무슬림 군인으로 변모한 이들 맘룩의 충성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였다. 이들을 구매하는 자금은 국고에서 지불하였다.
 
 
  맘룩의 충성심
 
  이슬람 초기에 비아랍인이 무슬림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랍인의 마울라(Mawla), 즉 예속민(client)이 되는 것뿐이었다. 무슬림으로 개종해서 아랍 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하였다. 이슬람 세계가 확장되면서 마울라는 유명무실해졌지만 자유를 얻은 노예나 전쟁포로는 예속민이 되어 칼리파나 고관대작을 섬기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813년 이복형제 알마으문에 패한 알아민의 이란 남서부 아흐와즈(Ahwaz)주 총독은 전황이 가망이 없자 자신의 마울라들에게 도망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마울라들은 “당신은 노예였던 저희를 해방시켜 미천한 신분을 올려주시고 빈한한 자에서 부유한 자로 만들어 주셨다”면서 총독을 위해 싸우겠다는 임전불퇴의 의지를 보였다. 물론 모두 다 전사하였다. 맘룩들도 마울라와 마찬가지였다. 노예에서 자유인, 빈자에서 부자, 비무슬림에서 무슬림으로 만들어 준 자신들의 주인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맘룩들이 튀르크 일색이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용맹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9세기 바그다드 문필가 알자히즈(Al-Jahiz)는 튀르크인들이 “이슬람의 힘의 원천이요 거대한 군대가 되었고, 칼리파에게는 보호처와 뚫리지 않는 갑옷이요, 겉옷 안에 입는 가장 내밀한 옷이 되었다”고 튀르크인의 용맹함을 칭송하였다. 또 “튀르크인들에게는 앞에 둘, 뒤에 둘, 이렇게 눈이 네 개 있다. 앞을 보면서 활을 쏘는 것처럼 뒤를 보면서도 쏜다”면서 “일생 동안 땅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말을 탄 시간이 더 많다”고 평가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종교, 군사교육을 거쳐 전사가 된 이들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특히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온 노예상과 가장 먼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원적지를 떠난 순간부터 이들은 노예상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였기에 둘의 관계는 밀접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주인에게 양도된 후에도 노예상은 맘룩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맘룩은 자신의 주인에게 전적으로 충성하였다. 주인은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맘룩들을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킨다. 원주인이 미처 해방을 시키지 못하고 죽었는데도 맘룩들이 전 주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새로운 주인이 해방시켜 주는 것을 거절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물론 이 경우 이들은 향후 출세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노예에서 해방되면 누구나 다 똑같은 출발점에 선 군인이 되었다. 그런데 술탄이나 칼리파가 해방시켜 준 노예이거나 술탄 내지 칼리파 친위대에 속하였을 경우 고위직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군인으로 변모한 노예들은 튼튼한 상호 연대의식과 상관에 대한 충성심으로 강군(强軍)을 이루었다.
 
  이들을 더욱 강한 군인으로 만드는 법은 또 있었다. 15세기 이집트 역사학자 알 마끄리지(1364~1442)는 술탄들이 맘룩군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하여 비교적 단순한 옷을 입히고, 봉급을 서서히 올려주며, 천천히 승진을 시켰다고 한다. 그래야만 맘룩이 고위직에 올랐을 때 자신이 누리는 지위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현재의 영화를 제대로 비교할 수 있으니 말이다.
 
  10세기 지리학자 이븐 하우깔(Ibn Hawqal)은 “튀르크인들의 땅에서 온 노예들이 가장 소중하다. 튀르크 노예에 필적할 노예는 지구상에 없다”고 칭송한 바 있다. 이들이 구성한 맘룩 군대는 이슬람과 무슬림을 영광되게 하겠다는 의지가 가슴속에 온전히 스며들 때까지 새로운 종교와 군사교육을 받고 위대한 전사로 태어났다.
 
 
  맘룩왕조
 
  그러나 이들 노예 출신 군인들이 항상 정국을 안정시킨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자신들의 이익을 좇아 정변(政變)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구람이라고 부른 노예 출신 군인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무으타심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잠재우기 위하여 836년 새로운 수도 사마르라(Samarra)를 건설하여 자신의 친위대를 주둔시켰다. 바그다드의 기득권층이 새로운 군사 엘리트들의 부상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르라 역시 평온하지 않았다. 칼리파 알 무타와킬(Al-Mutawakkil, 재위 847~861)은 자신의 큰아들 알 문타시르(Al-Muntasir, 재위 861~862)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가 철회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튀르크 군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알 문타시르가 병사한 후에는 그를 지지하였던 튀르크 군대가 주도하여 새로운 칼리파를 옹립하였다. 알 무타와킬이 살해된 861년부터 알 무으타미드가 칼리파 자리에 오른 870년까지 9년간 칼리파직을 두고 튀르크 군대가 벌인 암투로 정국은 실로 무정부 상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혼미하였다. 노예 출신 군인들이 칼리파를 제치고 정권을 잡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슬람 역사상 실제로 노예 출신 군인이 정권을 휘어잡은 왕조가 있었다. 1250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를, 1260년에서 1516년까지 시리아를 통치한 맘룩 술탄조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맘룩 술탄조는 아윱조(Ayyub, 1169~1250) 술탄 친위대였던 킵차크 튀르크 맘룩 출신으로 구성된 바흐리(Bahri) 부대다. 십자군 전쟁 당시 무슬림의 영웅 살라훗딘이 세운 아윱조의 술탄 살리흐가 죽자 바흐리 부대원들이 후계자 투란샤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권력자의 충직한 친위대 역할을 하던 이들이 직접 정권을 잡아 왕조를 이룬 것이다.
 
 
  몽골군을 저지한 맘룩군대
 
맘룩군은 1299년 홈스전투 등에서 몽골군을 격퇴해 이슬람세계를 수호했다.
  맘룩군은 무슬림을 침략자 십자군과 몽골군으로부터 보호하고 이슬람 세계의 영토를 보전하였다. 맘룩조의 주역인 바흐리 부대는 맘룩조가 건립 전인 1250년 루이 9세가 이끄는 십자군을 만수라에서 격파하였다. 이를 두고 이집트 역사가 이븐 알 푸라트는 이렇게 칭송한다. “이는 다신교 개들이 튀르크 사자들에게 패한 첫 번째 전투다.” ‘다신교 개들(킬라브 알 시르크)’과 ‘튀르크 사자들(유수드 알 튀르크)’에서 ‘시르크와 튀르크’의 운율이 멋지게 맞아떨어진다. 이븐 칼둔(Ibn Khaldun 1332~1406)은 《역사서설》에서 이러한 맘룩조를 타락한 압바스 칼리파조가 몽골군의 손에 붕괴된 후 신께서 무슬림을 살리고자 보여준 자비로 표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1258년 압바스 칼리파조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무슬림 세계 서쪽으로 치고 들어오던 이교도 몽골군을 맘룩군대가 1260년 오늘날 팔레스타인 ‘골리앗의 샘(아인 잘루트)’에서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꺼져 가던 숨을 되살리고 이집트 무슬림들이 뭉치도록 하여 신앙을 살리고, 이슬람의 질서를 보존하며 이슬람의 변경을 지킨 것은 바로 신의 자비 덕분에 가능하였다. 신께서는 튀르크에서 수많은 부족들 중에 무슬림을 지켜 줄 통치자와 충직한 조력자를 무슬림들에게 보내셨다. 이들은 노예제를 통해 전쟁의 세계에서 이슬람의 세계로 왔는데, 신의 은총을 깊이 감춘 채 들어왔다.”
 
  무슬림들은 비무슬림 소년들을 노예로 데려와 충직한 전사로 만들었고, 이슬람의 전사가 된 이들이 자신들을 데려온 무슬림을 보호하고 지켰다. 이븐 칼둔은 이렇게 말했다.
 
  “이슬람은 이들로부터 받은 혜택에 기뻐하고 왕국은 파릇파릇한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예니체리
 
오스만튀르크는 발칸지역 그리스도교 집안 소년들을 징발해 예니체리로 키웠다.
  맘룩조보다 노예 출신 전사들이 더 강력한 전투력을 보여준 시대는 바로 오스만튀르크 제국인데, 주역이 바로 ‘새로운 부대’라는 뜻의 예니체리(Yeniçeri, Janissary)다. 오스만튀르크의 영광은 모두 예니체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속 부대원들의 용맹함과 충직함은 전사의 표본이었다.
 
  14세기 후반 발칸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한 오스만튀르크는 15세기 들어 ‘데브시르메(devshirme)’, 즉 소년 징발이라는 제도 아래 그리스도교 집안 소년을 징발하여 술탄의 새로운 부대 전사로 길러 냈다. 정부 관리가 정복한 그리스도교 지역을 방문하여 가장 똑똑하고 뛰어난 그리스도 집안 소년들을 뽑는다. 수도 이스탄불로 들어온 이들은 할례를 받고 훈련소나 농장으로 보내져 노동을 하고 나이가 차면 군사훈련을 받는다. 종교적·군사적으로 정신과 육체가 잘 무장된 이들은 특급전사가 되어 술탄과 제국의 안위를 돌본다. 상비군으로서 전문적인 전사였던 이들이 참가한 전투는 늘 오스만튀르크의 승리로 끝맺었다.
 
1522년 병원기사단이 지키고 있는 로도스섬을 공격하는 예니체리부대.
  예니체리는 기본적으로 독신이었다. 그런데 독신제가 무너져 혼인이 허락되고, 아들마저 군인으로 등록되어 일정한 급료를 받으면서 예니체리의 강건함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이어졌다. 세속적 이익을 탐하고 가족의 안위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군인이 잘 싸울 수는 없다.
 
  데브시르메의 엄격한 기준이 사라지면서 입대 조건의 엄격함도 군사훈련의 엄밀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592년 경 예니체리는 느슨한 조건에서 입대한 이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야말로 아무나 봉급수령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이렇게 조금씩 안에서 무너져 갔다.
 
  세금만 축내는 무능한 예니체리를 개혁하고자 셀림 3세(재위 1789~1807)는 프랑스 교관을 채용하여 근대 유럽식 군대를 모방한 새로운 군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예니체리가 1807년 반란을 일으켜 셀림 3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독살하였다. 1826년 마흐무드 2세는 굳은 결의로 다시 한번 유럽식 군대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예니체리는 예상대로 술탄에 무력으로 대항했다. 마흐무드는 예니체리 막사에 포격을 가해 늙고 병든 예니체리 군인 4000명을 폭사시켰다. 살아남은 자는 잡혀서 참수되었다. 이로써 약 4세기 동안 유지된 예니체리의 전통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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