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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종군위안부 문제 합의 이후의 韓日관계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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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년사에서 시진핑은 ‘책임과 행동’, 아베는 ‘도전’ 강조
⊙ “위안부 합의로 日외무성 내에서 ‘안티(Anti) 코리아 스쿨’은 사라졌지만,
    ‘프로(Pro) 코리아 스쿨’이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日 외무성 관계자)
⊙ 미국이 한일 위안부 합의 압박한 것은 동맹국에 자체적인 해결 맡기는
    ‘오프쇼어 밸런싱(Offshore Balancing)’ 전략의 일환

劉敏鎬
⊙ 55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 저서: 《일본내면풍경》《미슐랭을 탐하다》 등.
작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기시다 후미오 일 외무상과 회담, 위안부 문제를 타결했다.
  신년이다. 대통령의 신년사는 새출발의 결의에 해당하는, 국민적 국가적 좌표다. 5000만 국민을 향한 심기일전 청사진 같은 것이 신년사다. 2015년 12월 31일 저녁,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한복 차림으로 나타나 신년사를 전했다. 전부 2분8초짜리 비디오 메시지다.
 
  영상을 접하면서 당장 머리에 떠오른 것은, 신년사를 대했을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난감한 표정이다. 신년사 내용 가운데 어디에 ‘방점’을 둬야 할지 상당히 머뭇거렸을 듯하다. 한마디로 가슴에 와닿는 말이 없다.
 
  다음날 신문·방송에 실린 신년사 타이틀을 보자. 대략 ‘4대 개혁 반드시 완수. 미래 30년 성장 기반 마련’ 정도다. 4대 개혁이란 말이 2016년 출발점의 키워드다. 취업준비생이나 정치부 기자들이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4대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혁명보다도 어려운 것이 개혁이라고 하는데, 하나도 아닌 4개의 개혁을 완수하려는 ‘결단과 용기’는 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4대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내외에서 불어닥칠 갈등과 태풍을 과연 헤쳐나갈 수 있을까?
 
 
  中, ‘불간섭외교’에서 ‘적극외교’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신년사에서 적극적 외교정책으로의 전환을 시사했다. 사진=유튜브 동영상 캡처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는 주변국 지도자들의 신년사와 비교된다.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신년사를 살펴보자. 국영 CCTV의 비디오를 보면 7분37초다. 붉은 넥타이를 맨 시 주석의 뒤에는 만리장성 그림이 보인다. 시 주석은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서 신년사를 발표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중요하게, 실감나게 다가온다.
 
  내용은 어제와 내일로 대별할 수 있을 듯하다. 신년사는 “열심히 했다. 중국인 노벨상 수상자도 나왔다. 항일승리 70주년 기념식도 성공리에 끝냈다. 통일의 첫걸음으로서 타이완(臺灣) 총통과도 처음으로 만났다”와 같은 어제의 성공담으로 시작한다. 이어, 실패와 좌절도 시인한다. “중국, 중국인, 중국 공산당의 노력에 의해 열심히 살아온 2015년이지만, 여객선 침몰이나 톈진(天津)항 폭발, 선전(深圳) 토사(土砂) 붕괴와 같은 비극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국민을 의식하면서 민주주의로 향해가는 중국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내일에 관한 메시지를 보자. “중등 수준의 사회를 위해 한층 노력해야 한다. 테러에 맞서 싸우겠다.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역할도 한층 더 강화해 나가겠다.”
 
  시진핑 주석의 메시지에서 특히 주목한 키워드가 있다. 그가 스쳐 지나가듯 언급한 ‘책임과 행동’이란 말이다. 그 대상은 국내가 아니라 세계다.
 
  “중국은 영원히 세계에 마음을 열 것이며, 곤경에 처한 인민들에게 능력껏 지원의 손길을 내밀어 중국의 기상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중국은 ‘불간섭외교’를 근간으로 해온 나라다. 1955년 반둥회의 이후 동서(東西)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른바 비동맹외교를 원칙으로 해왔다. 군사동맹은 물론, 남의 나라 문제에 간섭, 관여하지 않겠다는 노선이다.
 
  그런 기존의 방침을 바꿔, 앞으로는 국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 시진핑 신년사의 핵심 중 하나다. ‘책임과 행동’은 그 같은 자세를 압축한 말이다. 시진핑은 “일대일로(一帶一路) 계획과 기후 문제, 지속가능발전은 중국의 힘을 밖으로 펼치기 위한 제1과제”라고 공언한다. 이미 부분적으로 시작했지만, 2016년은 중국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글로벌 활동 원년(元年)이 될 전망이다.
 
 
  아베, ‘돌 위에서 3년’
 
아베 일본 총리는 신년 기자회견에서 ‘도전’을 강조했다. 사진=일본총리실 동영상 캡처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어떨까? 일본에서 신년사는 천황의 몫이다. 총리는 12월 31일 ‘연두소감(年頭所感)’이란 형식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한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상징적 존재인 천황의 신년사보다 총리의 연두소감이 한층 더 피부에 와닿는다. 총리의 신년사는 글로 전달한다. 총리는 신년 업무를 시작하는 1월 4일 기자회견을 통해 시정(施政)에 관한 자신의 포부나 계획을 다시 한 번 알린다. 연두소감은 기자회견 내용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베의 메시지를 읽어보았더니 대략 4분30초 정도의 분량이었다.
 
  아베의 연두소감은 ‘돌 위에서 3년(石の上にも三年)’이란 말로 시작한다. 자신의 집권기간인 3년을 차가운 돌 위에서 지낸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추락한 일본을 재생하기 위한 ‘초석(礎石) 다지기 3년’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총리로 일해온 3년간을 회상하는, 과거에 주목한 메시지다. 3·11 동북 대지진 복구 작업, 안보법제 통과, 경제회생을 통한 고용증진에 관한 얘기 등을 망라한다.
 
  아베의 연두소감은 이어 ‘성을 쌓기까지는 3년이지만, 무너지는 것은 단 하루(築城三年, 落城一日)’라는 일본 속담으로 연결한다. 목표와 자세에 관한 부분이다. 1억 총활약, GDP 600조 엔 달성, 출생률 1.8이란 국내 차원의 목표와 2016년 일본에서 열리는 G7회담과 아프리카 정상회담 그리고 한중일 정상회담을 통한 국제사회에서의 리더십 발휘라는 글로벌 차원의 비전도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 같은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협력과 지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메시지 전체를 대하면 아베가 강조한 키워드가 무엇인지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신년소감에 6번 등장한 ‘도전(挑戰)’이란 말이다. “올해는 도전, 도전 그리고 도전일 뿐입니다. 미래를 향해 과감하게 도전하는 1년이 되도록 하는 것, 그런 결의뿐입니다.”
 
  아베는 연두소감 발표 4일 뒤의 기자회견에서도 도전이란 말을 2016년 국정운영의 키워드로 사용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에 따르면, 아베는 20분간에 걸친 신년 기자회견에서 도전이란 말을 24번 사용했다고 한다.
 
 
  코미디로 신년사 대신한 오바마
 
  미국의 신년사는 어떨까? 올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신년사는 코미디로 대체했다. 언론은 국제나 정치면이 아닌 연예란을 통해 오바마의 신년사를 소개했다. 백악관을 찾아온 코미디언과 만나 정치를 풍자하고 자신의 정책을 슬쩍 어필한 퍼포먼스형 메시지다. ‘오바마스럽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엔 ‘미국스럽다’는 것이 한층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미국을 ‘황혼 패권국(覇權國)’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미국은 한층 더 강해지고 있다. 미국 금리(金利) 인상 하나만으로도 글로벌 경제 전체가 난리다. 한국에서 ‘G2’라고 하는 중국도 예외일 수 없다. 경제성장률, 외환, 수출 등 중국 경제 전체가 미국 금리에 연계돼 있다. 안전하고 은행이자도 높은 미국으로 중국 자본이 이탈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20세기 미국은 ‘보이는(Visible)’ 패권국이었다. 21세기 미국은 ‘안 보이는(Stealth)’ 강국이다. 백악관 주변 경비처럼, 없는 듯 있는 듯한 안전망과 비슷하다. 총칼을 든 시위(示威)형 경비원이 아니라, 빠른 정보와 첨단장비에 근거한 철벽 경호체제다. 신년사를 대신한 오바마의 코미디는 미국의 자신감을 상징하는 증거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상태에서 굳이 나서 언어로 강조할 필요는 없다.
 
 
  너무 짧고 키워드 찾기 어려운 박근혜 신년사
 
2016년 신년사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 특별히 눈에 띄는 메시지가 없었다. 사진=청와대 동영상 캡처
  한국의 메시지는 중국·일본의 메시지와 비교해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일본의 신년사보다 훨씬 짧다. 중국에 비해 3분의 1 이하, 일본에 비해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주례사와 졸업사처럼, 신년사도 빨리 끝낼수록 좋다고 말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길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박 대통령의 2분8초짜리 신년사는 세계적으로 볼 때도 가장 짧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아직 테러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신년사는 무려 9분이 넘는다. 난민·테러 문제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호소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신년사도 6분30초에 달한다. 아마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장 짧은 신년사를 남긴 나라가 한국일 듯하다.
 
  둘째는 키워드다. 뭔가 여러 가지 얘기를 하기는 하는데 정작 와닿는 핵심이 없다. 시진핑이 강조한 ‘책임과 행동’, 아베가 역설한 ‘도전’과 같은 말이 대한민국 지도자의 신년사에는 없다.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를 찾으라면 메시지 중에 3번 언급된 ‘창조’라는 말이 떠오른다. “창조와 지혜를 상징하는 붉은 원숭이해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 창조적 열정과 지혜를 함께 모아서…” 이어 중간 부분에 가서 “혁신 3개년 계획을 잘 마무리하여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확실하게 뿌리 내려서…”에 등장한다.
 
  붉은 원숭이가 ‘창조의 화신’이라는 말은 얼른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원숭이의 이미지는 창조가 아니라, 모방이다. 기껏해야 꾀가 많다거나 재주를 부린다는 수준이다.
 
  전체 문맥을 보면 창조라는 말을 신년사 속에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느낌이 든다. 박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는 창조경제라는 말을 메시지 속에 넣는 과정에서 생긴 부조화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국민의 가슴에 와닿고, 특히 지도자가 혼신을 다해 추진하려는 의미로서의 신년사 키워드라 보기 어렵다.
 
 
  국제 문제에 대한 언급 전혀 없어
 
  세 번째 특징은 국제 정세나 국제 문제에 관한 얘기나 반응, 대응에 관한 메시지가 전무(全無)하다는 점이다. 미국은 물론 중국·일본에 대한 얘기 또한 아예 없다. 시진핑도 언급한 테러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도 전혀 없다. 굳이 국제 문제 ‘비슷한’ 것을 찾아내라면 말미에 언급한 북한 관련 메시지다. “튼튼한 안보는 국가 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입니다. 빈틈없는 안보태세로 북한의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면서, 대화의 문은 항상 열어놓고 평화통일의 한반도 시대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창조경제라는 말과 더불어 지난 한 해 동안 박 대통령이 강조한 최다 키워드 중 하나가 ‘글로벌’이다. 창조경제와 글로벌은 바늘과 실의 관계일 듯하다. 그러나 정작 신년사에는 글로벌에 관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테러, 신년이 들어서기 무섭게 터진 중국 경제 붕괴, 한일 위안부 협상의 후폭풍, 미국 대통령 선거와 한국 외교에 관한 얘기가 전혀 없다. 평소 박 대통령이 강조하던 글로벌 발상과 전혀 딴판인, 국내 문제에 99.99% 집중하는 내용으로 채웠다.
 
  네 번째 특징은 슬로건형 메시지라는 점이다. 앞서 밝혔듯이 ‘4대 개혁’ 같은 부분들이다. 4대 개혁은 물론, 창조경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란 것이 나의 월급, 취직, 정년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필자는 4대 개혁, 창조경제, 경제혁신 3개년 계획 같은 단어를 ‘집단주의·사회주의·결과주의’ 경제체제의 산물이라고 본다. 이런 체제에서는 구체적 내용에 대한 국민적 이해가 필요 없다. 일단 내려진 슬로건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시진핑이 말한 ‘12차 5개년 계획 성공’과 비슷한 맥락이다. 12차 5개년 계획은 공산당 간부들이 정한 슬로건일 뿐 일반 국민들의 관심이나 실익과는 거리가 멀다.
 
  《타임 100(Time 100)》은 매년 연말 발표하는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부제(副題)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The Most Influential People in the World)’에서 보듯 100명의 글로벌 뉴스메이커를 통해 지난해를 되돌아보는 식이다. 올해 한국인으로 《타임 100》에 오른 인물은 아무도 없다. 과거에는 대통령 등 정치인과 기업대표, 운동선수 등 한국인들이 100인 리스트에 곧잘 올랐었다. 2015년에는 제로다. 체중 130kg의 김정은은 5년 연속으로 100인 범주에 들어갔다.
 
  《타임 100》이 국가의 위상이나 국민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는 물론 아닐 것이다. 《타임 100》에 한국인이 없어도 좋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타임 100》에 한국인이 올랐는지 여부가 아니다. 《타임 100》에 한국인이 전무하다는 사실에 대해 너무도 무심한 한국적 분위기가 신기할 뿐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2015년 《타임 100》 가운데 아시아인은 16명이다. 중국인 4명, 일본인 2명, 인도인 2명이다. 중국·일본·인도의 오늘과 내일을 짐작게 한다.
 
  한국에서는 독일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타임》 ‘2015년 올해의 인물’에 뽑힌 것도 해외토픽 정도로 간단히 처리한다. 수많은 잡지 중 하나인 《타임》 기사에 왜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타임》은 세계의 흐름을 압축해서 전해주는 매체다.
 
 
  ‘天動說 신자’들이 판치는 한국
 
  메르켈이 《타임》 ‘올해의 인물’이 된 것은 강한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메르켈의 등장은 유럽의 맏형 통일 독일의 복권(復權)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전(戰前)체제의 완전한 부활이다. 일본의 완전한 복권과 부활도 곧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해진다. 필자는 가까운 시일 내에 아베 일본 총리가 《타임》 ‘올해의 인물’에 오를 것으로 예상한다. 이웃 나라 지도자가 세계를 움직이는 최고 지도자에 오를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서는 그 같은 논의나 관심이 전무하다.
 
  《타임 100》 얘기를 꺼낸 이유는 대통령이 전한 신년 메시지 속의 특징을 재차 살펴보기 위해서다. 박 대통령 신년 메시지의 네 가지 특징 가운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글로벌 이슈에 관한 얘기나 대응에 관한 메시지가 전무하다는 부분이다.
 
  한국의 외교, 나아가 정치를 보면 ‘모든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천동설(天動說) 신자’로 가득한 것 같다. 나라 밖의 얘기를 하거나, 다른 관점의 분석을 하면 ‘지동설(地動說)을 믿는 미치광이’ 소리를 듣기 쉽다.
 
  그 난리를 치다가 허무하게 끝난 《산케이(産經)신문》 지국장 기소 문제는 ‘천동설 신자들’의 해괴한 발상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좋은 증거다. “아무리 괘씸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국제적 상식을 무시할 수 없다”는 ‘지동설 지지자’들의 생각은 철저히 무시됐다.
 
  ‘천동설 신자’들의 눈에는 코앞에서 변해가는 하늘만 보이는 법이다. 세상이 한국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국제 문제에 적극 대응하거나 글로벌 무대에 애써 나설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한국이 아니라 바깥쪽 세상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말하는 ‘지동설 지지자’들의 생각을 사대주의적, 비애국적으로 치부할 뿐이다.
 
  ‘천동설 신자’의 특징은 대의명분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목숨을 걸고’ ‘역사와 민족의 이름으로’라는 식의 세계관으로 배수진(背水陣)을 친다. 전략·전술로서의 정치·외교와 전혀 무관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사는 한국인들의 ‘천동설 세계관’의 압축판이었다. 그건 연설 대필자가 임의로 쓴 글이 아니다.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2분8초짜리 메시지는 대통령의 사고(思考)에 맞춘 것이다. 《타임 100》에 관한 무관심은 우연이 아니다.
 
 
  千年恨을 얘기하더니…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은 작년 12월 29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 양국 간 위안부 문제 타결에 대해 설명했다. 사진=조선일보
  종군위안부 문제는 ‘천동설 대일관(對日觀)’이 드러난 또 하나의 사례다. 시작은 2013년 3월 1일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사실은 천 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다. 국내 피해자를 고려한 정치적 발언이다. 10년, 길어야 100년 이어질 한(恨)을 1000년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1만 년까지 안 올라간 것이 다행이다. 과연 전 세계에서 1000년 동안 한을 품고 살아가는 나라나 민족이 어디에 있을까? 설령 그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밖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진짜 검사(劍士)는 상대에게 악담을 퍼붓거나, 코너로 몰지 않는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처리하면 된다. 칼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도 진짜 칼잡이다.
 
  국내 여론을 고려한 ‘천동설’ 발언들이 지난 3년간 남발됐다. ‘만병통치약으로서의 반일(反日)’이다. 지난 3년간 그런 ‘천동설’ 발언 속에 살아온 국민들은 종군위안부 합의 결과를 황당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천년한(千年恨)’의 결과치고 너무도 빈약하고 애매하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처음부터 컸다고 볼 수는 없다. 3년에 걸쳐 국민들의 기대를 한없이 키운 장본인은 바로 현(現) 정권이다.
 
  필자는 종군위안부 합의 결과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큰 산을 넘었다는 점에서 ‘자괴적(自愧的)’이지만 박수를 보낸다. 국민적 기대를 한없이 높인, 지난 3년간의 천동설 대일관(對日觀)이 애처로울 따름이다.
 
일본 외무성 전경. 외무성 내에서 ‘코리아 스쿨’이 퇴조하고 있다. 사진=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필자는 합의 직후 일본 외무성의 미주(美洲) 담당 외교관 친구에게 내부 반응이 어떤지 물어봤다. 그는 ‘안티 차이나 스쿨(Anti China School)’ 얘기부터 했다.
 
  “과거 외무성 고급 관료가 되려면 한국과 중국 부임이 필수요건이었다. 이른바 ‘차이나 스쿨’ ‘코리아 스쿨’이다. 유학을 통해 중국어·한국어가 가능하고 현지에 친구들도 많은 외교관들이다. 아시아를 중시한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외교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단카이(團塊) 세대 외교관들의 반미정서가 ‘아시아 스쿨’ 득세의 이유였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아시아 스쿨’은 다른 얼굴로 변해간다. 규모가 작은 ‘코리아 스쿨’은 말할 것도 없고, ‘차이나 스쿨’ 외교관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 대신 나타난 것이 ‘안티 차이나’ ‘안티 코리아 스쿨’이다. 현재의 ‘아시아 스쿨’이라고 하면 반중(反中)·반한(反韓)을 기본으로 하는 외교관을 의미한다.
 
  외무성 내 분위기만을 본다면, 종군위안부 합의는 ‘아시아 스쿨’ 내에서 ‘안티 코리아 스쿨’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국 간의 현안이 해결된 상태에서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한국을 굳이 적(敵)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 외무성 내에서 중국 문제를 다루는 최고위 외교관은 중국어를 모르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중국어가 가능하다는 것이 오히려 출세에 장애가 될 정도다.
 
 
  미국의 오프쇼어 밸런싱
 
  주의할 부분은, ‘안티 코리아 스쿨’이 사라진다고 해서 반대로 ‘프로(Pro) 코리아’ 외교관이 나온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이다. 예전처럼 한국을 우선시하고 프리미엄을 주던 ‘프로 코리아 스쿨’이 주도하던 대한(對韓)외교는 끝났다. 실무형·법률형·중립형 코리아 스쿨이 종군위안부 문제 합의 이후 일본 외무성의 얼굴이 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종군위안부 문제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천동설 신자’들은 부정할지 모르지만, 합의 이후의 국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미국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최근 워싱턴에서 유행하는 말 중 하나로 ‘오프쇼어 밸런싱(Offshore Balancing)’이라는 용어가 있다. 직역(直譯)하면 ‘역외(域外) 균형’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미국이 글로벌 컨설턴트로 나선다는 의미다. 미국 밖에서 무력충돌 가능성이 있을 경우, ‘글로벌 카우보이’ 미군이 직접 나서는 대신 ‘글로벌 컨설턴트’로 충돌 당사자들을 불러 다독거리면서 서로간의 세력균형을 꾀하는 국제 정치다.
 
  ‘고립주의’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은 아니다. 지역 내 영향력을 통해 중재를 하지만, 마지막까지 안 될 경우 무력(武力) 개입에 나설 수 있다는 점에서 고립주의와는 다르다. 오바마가 우크라이나·시리아에 미군을 파견하지 않고, 관계국들과의 대화에 열중하는 것도 오프쇼어 밸런싱이란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프쇼어 밸런싱은 미군 파병을 자제하려는 민주당의 생각과 일치하지만, 남부에 기반을 둔 정통 공화당원들도 지지하는 외교정책이다.
 
  워싱턴 보수계 싱크탱크의 한 연구원은 한일 종군위안부 합의 문제를 미국의 동아시아 오프쇼어 밸런싱의 출발점이라 해석한다. 아시아 전문가이자, 필자의 10년 지기(知己)이기도 한 연구원의 분석이다.
 
  “중국이 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경우 이외에 한해, 앞으로 동아시아 안보는 지역 내 이해관계자들이 직접 맡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센카쿠(尖閣) 문제나 곧 닥칠 한국의 이어도 문제의 경우 당사국이 직접 처리하는 식으로 갈 것이다. 북한의 경우도 핵 문제를 논외로 할 경우 남북 당사자의 문제로 처리할 것이다.
 
  사실, 한국이 부딪칠 진짜 시련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북한 핵을 해결한 이후부터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북핵이 있기에 한미동맹도 기능을 한다. 북핵이 사라질 경우 한반도는 한국이 직접 처리해야 할 과제로 남을 것이다. 일본도 똑같은 상황이다. 동맹국 미국이 측면 지원은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일본을 적대시하는 중국을 상대할 나라는 바로 일본 자신이다.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은 아직까지는 미국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韓美日 정보협조체제
 
  결론적으로 보면, 오프쇼어 밸런싱에 근거해 큰 그림은 미국이, 작은 그림은 당사국이 직접 해결하는 방식이 펼쳐질 것이다. 크고 작은 그림의 경계가 어디까지가 될지는 미국과의 대화를 통해 도출해 낼 과제다. 동맹관계라 해서 모든 것을 미국이 떠안는 상황은 더 이상 없다. 단순한 무력시위나 정보나 보급 차원의 도움은 있겠지만, 피를 흘리는 전쟁 참가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일어날 것이다. 오바마 이후 공화당 대통령이 나와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일 두 나라가 좋은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미국의 지역 내 오프쇼어 밸런싱 역할이 보다 더 효과적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모두가 잘된 것이다.”
 
  군사안보 문제는 오프쇼어 밸런싱 정책 여부에 관계없이 가장 먼저 닥칠 한일협력 분야다.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한 한일 간 군사협력 부분이다. 핵심은 몇 년째 오락가락 떠다니고 있는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이다. 한국에서 서명 직전까지 갔다가 중단된 협정으로, 가장 먼저 합의에 이를 듯하다.
 
  연초 김정은의 핵실험 시, 한국은 관련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과 미국은 실험 이전에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한국만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한국을 미일군사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한 ‘음모론적 리크(Leak)’로 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대세가 한미일 정보공조로 흘러나간다는 점이다.
 
  정보공유는 얻는 것만이 아닌, 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한국의 경우 사람을 통한 아날로그 정보, 일본의 경우 위성과 테크놀로지를 통한 디지털 정보가 주류가 될 것이다. 미국발(發) 정보를 한국이 일본과 균등하게 받을지 여부도 협정체결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군사정보 포괄 보호협정과 관련해 한국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이버(Cyber)와 스페이스(Space) 시큐리티에 관한 부분이다. 사이버와 스페이스는 2016년 워싱턴 펜타곤의 최대 현안이 될 전망이다. 지난해 오바마가 시진핑에게 ‘사이버 도둑질’을 그만두라고 말했지만, 중국은 계속해서 ‘사이버 도둑질’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최근 군사제도 개편을 통해 전략미사일 부대로 알려진 제2포병을 ‘로켓군’으로 승격하고, 사이버 스페이스 전쟁을 염두에 둔 ‘전략지원부대’도 신설했다. 사이버와 스페이스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오바마의 경고에 대한 정면도전인 셈이다. 피를 흘리는 전쟁이 아니라, 무혈(無血)로 진행되는 디지털 전쟁이 2016년 아시아 무대에서 시작될 새로운 전쟁이다.
 
 
  日, ‘마이 넘버’ 제도 도입
 
  일본은 이미 그 같은 상황을 예상하고 ‘미일동맹3.0’으로 나아가고 있다. 워싱턴의 분위기를 보면, 미국 동맹국으로서의 한국이 맞이할 중국과의 갈등은 곧 닥칠 ‘사드(THAAD)’ 한반도 배치에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군사정보 포괄 보호협정이 이뤄질 경우 사이버 스페이스 시큐리티로 이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하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한국 입장에서 보면 군(軍)만이 아니라 정부, 기업, 민간 모두에 활용할 사이버 시큐리티가 절실하다.
 
  문제는 협정체결 후 한국이 원하는 만큼의 기술과 정보를 미국이나 일본이 제공할 것인가라는 부분이다. 자칫하다가는 협정을 통해 정보 식민지나 일본의 2중대 같은 역할에 머물 수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2년 뒤인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이 열린다. 일본은 도쿄올림픽을 사이버 시큐리티의 원년으로 삼으려 뛰고 있다. 정부만이 아니라 기업, 개인에 이르기까지, 사이버 테러에 견딜 수 있는 난공불락 시큐리티 체제로 무장할 계획이다.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와 비슷한, 마이 넘버(My Number) 제도도 순식간에 도입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주민등록번호 체제하의 경험을 전해주면서 평창과 도쿄 올림픽에서의 사이버 시큐리티 공유체제를 구축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TPP 가입
 
  경제협력 문제는 한국이 종군위안부 합의에 이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간단히 얘기해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가입 문제다. 조건을 달면서 TPP 가입 문제를 논의하겠지만, 대세를 보자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일본은 TPP 아시아 총대리점 역할을 하는 나라다.
 
  워싱턴 싱크탱크의 연구원은 “미국은 아시아권 내 TPP 가입 문제를 일본에 전적으로 위임한 상태”라고 말한다. TPP 가입 문제를 왜 일본과 상의해야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책임은 한국 내 ‘천동설 신자’들에게 물어야 할 듯하다. 미국과 일본은 환율조작 금지와 북한산·중국산 상품이나 재료에 대한 별도 관세를 엄격히 적용하는 선에서 한국의 TPP 진입을 받아들일 전망이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TPP는 경제를 넘어선, 태평양 범(汎)민주주의 정치·경제·안보 집단 체제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10년간 중단했던 한일 공무원 교류를 시작한다는 뉴스가 들린다. 한국인 치고 일본의 악행(惡行)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미래로 흘러가고 있다. 어제를 잊지 않는 것은 좋지만, 어제에 매달려 살 필요도 없다.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따라가고 주워담기에도 힘에 부친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왕조몰락, 식민지, 남북전쟁이란 세 개의 초대형 폭탄으로 초토화됐다. 그런 참화를 겪은 가장 큰 이유는 세상과 문을 닫고 사는 ‘천동설 세계관’ 때문이었다.
 
  아마 가까운 시일 내에 한일 정상이 만날 것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많은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일본을 필요로 하듯, 일본 역시 한국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1000년 한’이 아니라, 앞으로 한일 간에 이뤄질 희망찬 ‘1000년 왕국’이 양국의 대화 중심에 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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