許文道
⊙ 73세.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석사, 同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도쿄특파원, 주일대사관 공보관,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대통령정무1비서관,
문공부 차관, 대통령정무제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 73세. 서울대 농대 졸업. 일본 도쿄대 사회학 석사, 同박사과정 수료.
⊙ 《조선일보》도쿄특파원, 주일대사관 공보관,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 대통령정무1비서관,
문공부 차관, 대통령정무제1수석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역임.
- 관동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은 당시 섭정으로 즉위를 앞두고 있던 쇼와 시대를 예비하는 血祭였다.
일본에서는 요새도 세상일로 입을 여는 사람들, 말하자면 저널리스트나 정치학자 같은 사회과학자들의 최대의 의문은, ‘일본이 왜 태평양전쟁을 시작했나’이다. 전쟁해야 하는 당사자들이 세계 최강의 미국, 영국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고 미리 충분히 알았던 전쟁을 ‘일본이 왜 시작했는가?’ 또는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나’이다. 이에 대해 몇 가지의 답이 있다.
대표적으로, 연전에 작고한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와 2차 전후 일본의 최고의 정치학자라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진단을 들어 보겠다.
일본…軍部에 점령당한 마법의 숲
시바(司馬)는 쇼와(昭和) 전기(前期·1926~45)의 일본이 마법 요술에 걸려든 숲과 같았다고 보았다. 일본 전체인 이 숲을 통수권이라는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는 군부에 점령당한 것이 제2차 대전 패전 전의 20년간이었다고 하고 있다. 군부 중에서도 참모본부에 진 치고 있는 엘리트 장교들이 정부, 내각의 통제 밖에서 무소불위로 통수권이란 방망이를 휘둘러, 리얼리즘을 깡그리 버리는 마법에 걸려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군부는 당시의 첨단 미디어인 신문과 라디오를 풀로 동원하여 방대한 언설을 국민 위에 퍼부어서는, ‘군의 명령일하에 온 국민이 그렇게도 원기 좋게 멸망을 향해 달려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바는 만년에 NHK의 대형 프로에 단독으로 출연하여서는, 우람해 보였던 메이지 국가가 패망해 들어간 쇼와 전기의 역사를 통한의 심정으로 점검해 보이고 있다.
“일본이란 나라의 숲에 다이쇼 말년, 쇼와 원년(1926) 쯤에서부터 패전까지, 마법사의 방망이가 탕! 하고 친 것 아닐까요. 그 숲 전체를 마법의 숲으로 만들어 버렸다. 발상된 정책, 전략, 혹은 국내 단속, 이 모든 것이 이상한, 뒤틀린 것이었어요.
이 마법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마법에 걸린 숲에서, 중국 침략이 나오고 태평양전쟁도 나왔다. 온 세계의 나라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쇼와(昭和)라고 하는 국가>, NHK북스)
시바는 마법을 발생시킨 연원이 어딘지를 끝내 명쾌히 밝히지는 않고 있다. 마법의 구사 주체로 선발도 높은 일본 육대(陸大) 출신의 참모본부 장교들을 들고 있으나, 이들 역시 마법에 걸려 리얼리즘이 결여된 정책과 전략으로 패망의 길을 질주한 셈이고 보면, 마법의 연원은 아닌 것이다.
시바는 ‘마법에 걸린 숲’이란 표현으로 그때의 일본을 좌지우지했던 군부의 엘리트 참모들이 조직성, 계획성, 현실성이 결여된, 즉 리얼리즘 결핍증에 빠져서는 얼토당토않은 터무니없는 전쟁판을 벌여 나라를 망쳤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은 ‘비합리적 결단의 방대한 퇴적’의 결과였던 것이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인 마루야마(丸山)도 일본 지배층이 구사했던 정책이나 전략을 합리 기준에 의한 판별이 아니라, 정신병리 차원에서 일본의 패전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마루야마는 아메리카 합중국과 전단을 연 추축국의 소행을 미치광이의 선택으로 본 미국의 제일급의 국제정치학자 T. 슈만의 소견을 자신의 소론 전개의 첫머리에 두고 있다. 이 미국 학자는 “광열주의나 과대망상병이 있어 필사의 몸부림으로 취한 광인의 몸짓을 외교라든지 전략이라든지 하는 종류의 문제로서가 아니고, 오히려 정신병리학의 문제로 하는 쪽이 설명하기가 쉽다”(丸山眞男, ‘軍國支配者의 精神形態’, <現代政治의 思想과 行動>, 未來社)고 하고 있다.
외교와 전략 아닌 精神病理의 문제
마루야마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에 도쿄에서 있었던 전범재판의 방대한 공판기록을 검토하여, ‘전쟁을 원했으면서도 전쟁을 피하려고 들었고, 전쟁을 피하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의 길을 끝내는 감히 택하고 만’ 일본 지배층의 정신과 행동방식을 선명히 드러내려고 하였다. 도쿄 이치가야의 법정에 섰던 25명의 피고들 중에는 아베 현 수상이 정치의 사표로 삼는 조부(외조부이지만 일본에서는 구별 없음) 되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도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최고 학부나 육군대학을 나온 수재들로, 사회에 나와서는 순조롭게 출세가도를 거쳐 제국 일본의 최고 지위를 차지한 고관들이다. 이들은 검찰관의 최후논고에 들어 있듯이 ‘국가의 정수로서, 국가의 운명을 확신적으로 위탁받은, 정직하고도 신뢰받는 지도자로 여겨졌다. 이들은 선악의 구별을 알고 있었고,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악을 선택하여 스스로 수백만의 인류에게 죽음과 상해를 가져오고… 파괴와 증오를 불러온 전쟁에의 길을 선택했던 자들’이다.
마루야마는 같은 파시즘, 전체주의라도 독일과 일본이 무력행사를 통한 정복의지를 드러냄에 있어서 보여주는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나치는 무력에 의한 정복의지를 군말 붙이지 않고, 당당하고 거침없이 드러낸 데 비해, 일본 군국주의는 정복행위를 야릇하게 은폐하고, 도덕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무력에 의한 타민족 억압은 언제나 ‘황도(皇道·천황의 도의)의 선포’였고, 타민족에 대한 시혜(施惠) 행위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역사인식이 문제되고 있는 뒤틀림의 연원이 이 부근에 있는 것으로 보여, 마루야마의 지적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다가온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은 일제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이었는데, 난징(南京)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A급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그가 어떻게 일제의 침략행을 도덕화하고 있는지를 전범재판에서의 그의 구술서는 보여주고 있다. 그는 중일전쟁의 본질을 다음과 진술하고 있다.
“대저 일화(日華) 양국의 투쟁은 소위 ‘아세아의 일가’ 내에서의 형제싸움으로서… 마치 한 집안 내의 형이 참다가 참다가 그래도 아직 난폭한 짓을 그만두지 않는 동생을 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를 미워해서 하는 짓이 아니고, 너무 귀여운 나머지 반성을 촉구하는 수단이래야 하는 것은 나의 연래의 신념으로서….”
이 마쓰이(松井) 대장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유지들 송별회에서도 ‘자기는 싸움에 나가기보다는 형제를 쓰다듬을 양으로 나가는 것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귀여운 나머지 쓰다듬어 준’ 결과는 난징의 30만 대학살이었다고 마루야마는 야유하고 있다.
일본 지배권력의 도덕치레
세계를 기만하고 자기를 기만하고
일제의 “지배권력은 이와 같은 도덕화에 의해 국민을 기만하고, 세계를 기만하였을 뿐만 아니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기만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의 그루 미국대사는 그전 10년간을 일본에 재임했고, 황실의 측근들과도 가까워, 패전 후의 천황제 존속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그루 대사도 일본인들의 자기기만과 리얼리즘 결여에는 혀를 내둘렀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반드시 불성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대다수는 참으로 그들 자신을 속이는 데 있어서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 이와 같은 심적 상태는, 아무리 뻔뻔스럽다 해도 자기의 부당함을 알고 있는 경우보다 훨씬 다루기 어렵다”고 그루 대사는 통찰해 보이고 있다.
1953년 제3차 한일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에 은혜를 주었다”고 발언하여, 회담을 장기간 암초에 들어 얹은 것은 유명하다. ‘한국에 은혜 주었다’는 이 발언이야말로 일본인들의 자기기만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오늘날의 위안부 문제에서 보이고 있는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자기기만적인 요소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어제오늘이 아닌 일본인의 행동양식에 구조화되어 있는, 뿌리 깊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루 대사가 지적하는 일본인의 자기기만적 성향이 한일 간에 공통의 역사인식을 갖는 데 있어서 최대의 장애요인인 것을 한번 치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악한 일을 하면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자기를 속이는 것이 자기기만이다.
‘일본의 지배권력은 특징적으로, 자기의 행동에 끊임없이 윤리의 안개를 뿜어대어서는 죄의식을 회피하려 했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와는 완전히 거꾸로 ‘선을 소욕했으되 항상 악을 저질렀던’ 것이 일본의 지배권력이었다고 마루야마는 총괄하고 있다.
‘멸망을 향해 달린 자’들의 자기기만
앞에서 보았듯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는 마법에 걸려든 숲이라 했고, 미국의 정치학자 T. 슈만은 발광현상 속에 빠져 있었다고 했고,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는 그때의 정치권력이 자기기만증과 리얼리즘 결핍증으로, 비조직성과 비계획성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이는 일본체제의 깊고 깊은 병리라 하고 있다.
국민작가 시바가 앞에서 “온 국민이 원기 좋게 멸망을 향해 달려갔다”고 했던 것을 보았다. 이는 태평양전쟁을 에워싸고서, 일본의 지배집단뿐만 아니고, 모든 국민이 함께 정신병리 속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일본이 리얼리즘이 결락되어 합리주의의 바닥이 빠져나가는 정신병리에 걸려드는 무슨 계기가 있었다는 말인가. 윤리 같은 것은 돌아보지 않는 영악한 합리주의로 근대 무력을 거머쥐어 몇천 년 동안 우러러만 보던 노대국 중국을 쳐서 굴복시키고, 세계 최강의 육군대국 러시아를 일러전쟁에서 이기고선 수천 년의 이웃 한국을 집어삼키게 했던 일본의 합리주의 구사의 수준은 가히 세계정상이라 할 만했다. 이런 일본한테 스스로 이길 수 없다고 보았던 전쟁을 시작하는 비합리주의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단 말인가.
무슨 계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국민작가 시바는 앞에서 “일본이란 나라의 숲에 다이쇼(1912~26) 말년, 쇼와 원년(1926) 쯤서부터 패전까지 마법사가 방망이를 탕! 하고 친 것이 아닐까” 한 것을 보았다. 작가 시바의 감성과 통찰력이 다이쇼 말년 언저리에서 전체 일본인의 심성과 심리에 변화를 일으키는 무슨 계기를 느꼈던 게 아닌가. 아쉽게도 작가 시바는 그것이 무엇이었다고 딱 짚어 놓지는 않았다.
시바의 서술은 문제의 통수권이 농간을 부려 일본을 요절낸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통수권의 농간 그 자체가 마법에 걸린 결과의 표출이었을 뿐, 통수권이 전체 일본에 마법을 건 것은 아니었다.
시바가 말하는 쇼와 원년은 다이쇼의 마지막 해였으니까, 다이쇼 15년간의 마지막 몇 해 사이에 일본인의 정신에 심대한 흔적을 남기고 그 혼을 뒤틀어 놓은 무슨 계기나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길게 따질 여유가 없으므로, 우리는 우선 1923년(다이쇼 12년) 9월의 관동대진재 속에서 일본관민에 의해 저질러진 조선인 대학살에 주목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出征과 血祭
전국(戰國)의 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0년 마지막으로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조(北条)를 평정한 다음, 1592년 임진왜란의 조선침략에 앞서, 정벌에 참여하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를 불러모아 군신(軍神)인 하치만(八幡)의 신사에서 국가적 상징과 의례의 성격을 갖는 의식(儀式)인 혈제(血祭)를 치렀다(헤르만 움스, <德川 이데오로기>, 黑住眞 등 日譯, 페리칸社). 하치만 카미(神)는 역사적으로는 오진텐노(應神天皇)를 이르는데, 그 뒤에는 4세기 경의 고대에 신라를 정벌할 때에 오진(應神)이 그 뱃속에 있었다는 진구(神功) 황후의 신화가 있다. 이 신화는 태평양전쟁에 패전할 때까지 일본 관민에 의해 믿어져 왔다. 혈제란 하치만 카미의 공덕을 기려 바치는 희생의 살육이었다. 전승은 전쟁신 하치만 카미의 가호로 받아들여졌다.
알아둬야 할 것은 도요토미가 조선을 정벌하기에 앞서, 조선인을 붙들어다가 살육하여 그들의 전쟁신에게 혈제를 올리고는 침략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를 균형감각 있게 냉철히 보려 했던 가미가이토(上垣外憲一)는 《문록(文禄) 경장(慶長)의 역(役)》에서, 한 종군기를 인용하여 부산에 상륙했던 일본군이 살려달라는 조선사람들을 남녀 불문하고 한 3만명 정도 무차별하게 학살하면서 ‘군신(軍神)에 바치는 혈제(血祭)’라 했던 것을 적어 놓았다.
“모두 손을 모아 무릎을 꿇고, 들을 수도 없는 조선말. 마노라 마노라라 하는 것은, 살려달라 쯤으로 들렸으나, 들어주지 않고 베어 죽이고 밟아 죽이고, 이것을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 하고. 여자도 남자도 개도 고양이도. 모두 베어 버리니, 벤 목은 3만 정도로 보였도다.”(위의 책 p.92)
조선에 쳐들어 온 도요토미의 군대는 바다를 건너기 전 침략에 앞서 혈제를 올렸고 상륙 직후 초전에서는 혈제라면서 조선사람을 무차별로 학살했음을 알게 된다.
사전에 보이는 혈제(血祭-지마쓰리)는 ‘전장에 임함에 있어서 길조를 바라고, 간첩 혹은 적방의 인간을 죽이는 것, 또는 전쟁터 등에서 적을 최초로 때려잡는 것을 말한다(廣辭苑, 岩波). 옛날 중국에서 전쟁터로 출발할 때에 희생 제물을 죽여 그 피로써 군신(軍神)에게 제사지낸 데서 왔다고 한다.
‘지마쓰리(血祭)’는 일본에 흔한 축제나 제례 등 마쓰리(祭)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17세기 초,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단체인 일본 야소회가 발간한 日·葡 사전에는 ‘마쓰리’만으로 군신에게 피를 바친다는 뜻이었다. 일본의 전국시대였던 16세기에는 마쓰리라면 으레 전쟁신에게 피를 바치는 지(血)마쓰리(祭) 였던 모양이다.
1923년 9월의 일본의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이 하나의 거대한 지마쓰리 이미지로 지금 떠오른다. 한국에도 들어왔던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영화 ‘바람이 분다’에는 관동대진재의 장면이 나온다. 유심히 보았다. 흑암이 섞인 붉은 화염이 하늘 전체를 가렸고, 화면 가득히 안경테가 벗겨져 나간 채 나카오리 쓰고, 게다짝을 끌며 지팡이를 거머쥔 것 같은 인파가 남부여대로 허둥대고 있었다. 이 속으로 간간이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섬뜩하게 단속적으로 들려왔다. 지옥그림이 이 같을 것이다. 이 지옥도를 배경으로 조선인 6600여 명이 ‘나부리코로시(혹독한 고통과 시달림 속에 죽게 함)’로 학살당하는 지마쓰리는 올려졌던 것이다.
昭和帝國 출범 前夜의 조선인학살은 血祭였다
무슨 전쟁터로 나갔기에 지마쓰리인가. 이때는 쇼와(昭和)제국의 출범전야이다. 다이쇼(大正) 천황의 신병으로 황태자인 히로히토(裕仁)가 섭정(攝政)이 된 것은 20살 때인 1921년 11월이었다. 대지진 다음해 1924년 1월에 결혼했고, 부친의 병사로 천황에 즉위하는 것은 1926년 12월이었다.
1923년의 관동대진재 때에 섭정 히로히토는 긴급칙령을 발하여 계엄령을 폄으로써 사실상의 통수권자로서 첫 체험을 했던 것이다. 조선인 학살의 지마쓰리가 섭정 히로히토가 재가한 계엄령하에서 행해졌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해야 할 것이다. 계엄령이란 말할 것도 없이 국가권력의 최고수준의 발동인 것이다. 대지진이 나던 이해 초 섭정 히로히토가 개정 제국국방방침을 재가함으로써,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제일의 주적이 되었다. 여태까지는 소련이었다. 등극 3년차에 1년 내내 거행된 즉위의식을 통해, 천황제 절대주의는 열렬하게 국민속에 받아들여졌다. 이를 통해 ‘성스런 신(神)’으로서의 지배자란 관념은 국민속에 더욱 강화되었고, 청정과 순수의 표본 같은 일본 국민의 순수성이 30년대, 40년대를 통해 잡박한 세계와 대결하여 바르디 바른 ‘성전(聖戰)’을 치러야 한다는 의식은 정서적으로 일본국민의 마음바닥에 깔렸던 것이다. 이같은 성전의 결과로 세워지는 것이 동아시아의 신질서라는 것이었다.
쇼와제국이 미국을 주적으로 하여 성전으로 나아간 그 전야에 치러진 혈제(血祭)가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이었다 할 것이다.
조선인 학살은 비서양 세계에서 유일한 근대화라고 자랑하는 일본의 수도 중심으로, 불과 3년전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규약에 인종차별 철폐를 없애자고 그렇게도 집요하게 운동했던 정부가 뻔히 보고 있는 가운데, 백주에, 계엄군대와 경찰에 선동된 도쿄 시민들 손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한국친우회 - 관동학살에 “알 권리 있다”
쇼와(昭和)의 문호 마쓰모토(松本淸張)가 조선인 학살에 대한 미국쪽 여론의 악감정을, 일본의 당시 워싱턴 영사의 외무성 보고에서 집어낸 것은 참으로 기특하다 해야겠다.(이후 일본정부가 대학살 사건을 은폐하려 들어서인지 관련 연구에 외국의 반응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보고서는 이승만, 서재필 등의 구미위원부가 미국 내의 한국 독립운동 관련 여론을 환기하고자 만든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의 연맹 회장인 플로이드 톰킨스 박사가 미국의 흄 국무장관에게 보낸 공개장이었다. 옮겨 본다.
“일본에 다년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헤드스트롬 선장은 ‘최대다수의 조선인을 살육하라’라는 공식명령이 나왔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 명령을 추진함에 있어서, 1923년 9월 2일의 일요일에 250명의 조선인이 5인씩 손발이 묶여져 배에 실려서는 기름을 끼얹어 산 채로, 태워 죽임당한 사실을, 목격자로서 그는 증언하고 있다. 또다른 아메리카인(人)은 9월 4일 화요일 밤, 총살될 8명의 조선인의 처형준비를 목격하였다. 병사들은 분명히 이들의 공포를 즐기고 있었고, 조선인을 총살하는 대신에, 총검으로 찔러서 ‘나부리코로시’로 했다. 수백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었고, 몇천 명이나 제대로 먹을 것도 없이 구류되었다. 일본 정부는 가해자를 징벌 못했다.
세계는 일본정부에 의해 용인된 조선인 학살의 상세를 알 권리가 있다. 드디어 일본 정부는 진실은 나타나고 마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어, 최초에 보도된 것의 오류를 인정하고, 조선인이 학살되고 구류된 것을 인정하는 정도까지 검열을 완화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가해자의 처벌이나 어떤 종류의 보상 약속도 들어보지 못했다. 문제되고 있는 법적 사정이란 것의 그 저쪽에 인도주의적 도의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데, 미국 국무성은 이들 불행한 사람들을 원조할 수단을 강구하여야만 할 것이다.”
“세계 제일의 야만의 정부”
일본에 와 있는 서양 각 나라의 대표들도 그냥 있지 않았다. 도쿄주재의 각국 대사들이 연명으로 일본정부에 대해 조선인학살에 관해서 항의했다.
그때의 주일본 미국대사 사이러스 우즈(Cyrus Woods)의 소감이 남았다. “이와 같은 가공할 (조선인)대학살이 백주에 공공연히 일어난 일본이라는 나라는 단연코 문명국으로 인정할 수가 없고, 특히 그것을 예사로 보고서 막으려고 하지 않은 일본정부는 세계에서도 제일 야만의 정부이다.”
메이지 이래 서양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은 서양사람들로부터 근대화되었단 소리를 제일 듣고 싶어했다. 그 극한의 반대소감이, 충분히 외교적일 수 있는 세계최강 미국대사의 입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1927년 F.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일전쟁이 시작되고서 3개월쯤 있다가, 일본이 문명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격리연설’(quarantine speech)을 하였지만, 미국의 관계당국자는 23년 이때에 이미 일본의 문명적 실체가 문명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어떤 것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조선인 대학살 다음해인 24년부터 31년까지 중간에 한 2년 빠지지만, 5년간이나 외상에 재임했던 시데하라(幣原喜重郞)의 유명한 대미(對美)협조외교라는 것도, 표면으로는 자본과 자원에서 미국에 기대야 하는 3류 제국주의의 현실적 필요도 있었으나, 깊이에서는 3·1운동이나 조선인 대학살을 계기로 미국에 싹트기 시작한 대일 악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음직하다.
자아도취…만능감…리얼리즘 상실
관동대진재 때 도쿄의 시민들에 의한 조선인 학살은 자경단(自警團)을 통해서였다. 지역 유지들이 대진재의 불안 속에 만든 신변조직이 조선인 폭동유언에 접해 자경단으로 전화된 경우도 있고, 관헌의 지령에 의해 조직된 것도 있다 한다. 구성은 지역의 청년단원, 소방단원, 재향군인 분회 등의 성원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본의 마을에 마쓰리(축제) 등 공동체 행사가 있을 때 나서는 사람들이다. 관동지방에 3689개에 달하는 자경단이 조직되었다고 조사되었다. 뒷날 대외여론이 악화되자 자경단에 대한 재판 같은 것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이유에 대해 ‘당시는 질서가 문란해서, 나라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가 주요 답변이었다.
그동안의 여러 연구를 종합하여 조선인 학살의 몇 가지 주요 측면을 적시해 보겠다.
학살은 계엄령하에서 행해졌다. 계엄령은 당시의 치안총수들에 의해 발의되었고, 치안총책인 미즈노(水野鍊太郞) 내무상은 계엄의 대상으로 조선인을 적으로 지목했다. 자경단은 행인들 중에서 인종청소하듯 조선인을 가려냈다. 경찰서장 등이 앞장서 ‘조선인은 죽여도 좋다’고 자경단에게 폭력을 풀었다. 가려낸 조선인을 자경단 모두가 둘러서서, 공동연희에 동참하듯이 제나름의 동작으로 광희 속에 ‘나부리고로시’를 하였다. 이 일이 도쿄를 중심하고 일본의 수도권 전역 3000여 곳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수도권의 전일본이 참여하여 조선인을 희생제물로 하는 대규모 혈제가 치러진 것이다.
이들은 조선인을 ‘나부리고로시’의 그때에 이미 환성을 올리고 광희작약하였다. 모두 발광체험을 겪었던 것일까. 어찌 일본인의 사회심리의 심층에 변환이 일어나지 않고 배겼을 것인가.
제국의 적이요 충성의 장애물인 조선인을 입맛대로 죽여 최고의 충성을 스스로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기의 확인과 자기 신뢰, 이로 인한 자아도취, 왜소한 자아가 공동학살에 참여함으로써, 전체 일본의 일부에로 강력한 귀속감에 빠져들며 갖게 되는 전지전능감, 이 모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강해지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만 현실로서 느껴지고, 반대로 외계의 현상은 의미를 잃고 만다고 사회심리의 통찰은 알려준다. 나르시시즘 속에서는 상대의 이미지가 비뚤어져 보이고 그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정지되고 만다. 여기까지 오면 합리주의의 기초가 되는 리얼리즘은 인간의 심성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앞에서 우리는 일본의 대표적 정치학자 마루야마(丸山眞男)가 일본 지배계층의 정신형태가 자기기만과 리얼리즘 결여에 빠진 결과로, 방대한 비합리적 판단을 집적한 끝에, 해서는 안 되는 줄 아는 전쟁에 끌려들지 않으려 들면서, 끌려들어 패망했다고 했던 것을 보았다.
작가 시바(司馬)는 쇼와의 일본이 뭔가의 마법의 작용으로 합리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마법의 숲으로 되어버리고 나서 패전할 때까지 20년간 리얼리즘이 결여된 선택만 하다가 망했다 하였다. 쇼와의 일본을 안으로부터 리얼리즘 결여로써 점령해 버린 군부, 그중에서도 통수권이란 요술방망이를 휘두른 참모본부의 수재, 엘리트 장령들의 행태에 대해 시바는 시대가 흘렀어도 절망해 보였다. 통수권이란, 천황 하나만 내세우면서, 삼권 위에 걸터앉아 문민·내각의 통제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加害者에게 박힌 트라우마
우리는 작가 시바에게서, 일본 전체가 마법의 숲으로 화하는 계기가, 패전 전의 쇼와시대 20년간에 있지 않다고 한 점을 택한다. 계기는 다이쇼(大正) 말년이라 할 1923년, 쇼와제국의 진군전야에 치러진 혈제, 즉 조선인 대학살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혈제는 피해자는 고사하고 가해자에게 보다 심각한 트라우마를 남긴 것이 아닐까. 진군전야에 혈제를 올린 쇼와제국은 혈제의 트라우마를 지고 출범했다. 메이지 헌법체제인 메이지 제국과 그 연장인 스스로를 파쇄해 들어가는 진공은 시작됐던 것이다. 그 행진은 비 서양세계 근대화의 금자탑이라는 대일본 제국을 파괴하고서야 1945년 끝났다.
아베 수상이 중의원 첫 당선을 한 지 일천한 1993년 8월, 자민당이 끼지 않은 연립내각의 수상이 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는 전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에서 태평양전쟁이 침략전쟁이라고 단정해 보였다. “나는 침략전쟁이었다고,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했던 것이다. 자민당은 즉각 반발했다. 당내에 ‘역사·검토위원회’가 설치되자, 새내기 의원인 아베는 바로 이름을 올렸다. 이 위원회는 호소카와 수상의 인식에 대한 대응으로서 《대동아전쟁의 총괄》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대동아전쟁이 일본의 자위전쟁이었고, 아시아 해방의 이념을 가진 전쟁이었다”고 하고 있다.
復古主義 내셔널리즘과 아베의 聖戰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인 무라야마 수상이 전후 50년이라고, ‘과거의 전쟁을 반대하고, 미래의 평화에의 결의를 다지는’ 결의를 국회에서 채택하려 했을 때는 아베는 이에 반대하여 불참했다.
종군위안부 관련 서술을 삭제하는 등 역사교과서 문제가 등장했을 때는 이를 지원하는 국회의원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정권에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다루는 책임을 맡고, 나중에는 관방장관이 되어, 납치문제의 전면적 해결이 국교정상화의 전제임을 강조하여 다수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
거기다 아베의 평소 야스쿠니 신사를 향하는 애틋함을 더하면, 지난날의 전쟁을 긍정하는 복고주의 내셔널리즘이 아베 정치의 근본이라 해도 될 것이다.
태평양전쟁 전야에도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 드는 일본한테 문제는 ‘중국으로부터의 철군’이었다. 독재자 도조 히데키(東条英穖)는 미국과 교섭할 대사를 떠나보내면서, 이 문제를 양보하면 “야스쿠니 신사(神社) 쪽을 보고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한다.
오늘날도 야스쿠니에 줄 서고 싶어하는 모든 일본의 정치인한테, 태평양전쟁은 성전(聖戰)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성전’의 야스쿠니 뒤에 있는 시바 료타로의 ‘마법의 숲’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베는 지금, 중국이 대두하고, 미국이 빠져나가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중국군을 견제하기만 하면, 세계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받아줄 것이라 여기는 듯하다. 역사 청산 없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한국과 세계가 끝내는 받아줄 것이라 여기는 듯하다.
어찌 발상이 세력균형의 냉전사고 언저리만 맴돌고 있는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수상까지 된, 다이쇼·쇼와의 기적적인 대논객 이시바시 단잔(石橋 湛山)의 지언(至言) ‘전법(戰法)의 극의(極意)는 사람의 화(和)에 있다(《石橋評論集》, 岩波文庫, p121)’를 한번 곱씹을 수는 없는 것일까.⊙
대표적으로, 연전에 작고한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와 2차 전후 일본의 최고의 정치학자라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진단을 들어 보겠다.
일본…軍部에 점령당한 마법의 숲
시바(司馬)는 쇼와(昭和) 전기(前期·1926~45)의 일본이 마법 요술에 걸려든 숲과 같았다고 보았다. 일본 전체인 이 숲을 통수권이라는 요술방망이를 휘두르는 군부에 점령당한 것이 제2차 대전 패전 전의 20년간이었다고 하고 있다. 군부 중에서도 참모본부에 진 치고 있는 엘리트 장교들이 정부, 내각의 통제 밖에서 무소불위로 통수권이란 방망이를 휘둘러, 리얼리즘을 깡그리 버리는 마법에 걸려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군부는 당시의 첨단 미디어인 신문과 라디오를 풀로 동원하여 방대한 언설을 국민 위에 퍼부어서는, ‘군의 명령일하에 온 국민이 그렇게도 원기 좋게 멸망을 향해 달려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바는 만년에 NHK의 대형 프로에 단독으로 출연하여서는, 우람해 보였던 메이지 국가가 패망해 들어간 쇼와 전기의 역사를 통한의 심정으로 점검해 보이고 있다.
“일본이란 나라의 숲에 다이쇼 말년, 쇼와 원년(1926) 쯤에서부터 패전까지, 마법사의 방망이가 탕! 하고 친 것 아닐까요. 그 숲 전체를 마법의 숲으로 만들어 버렸다. 발상된 정책, 전략, 혹은 국내 단속, 이 모든 것이 이상한, 뒤틀린 것이었어요.
이 마법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마법에 걸린 숲에서, 중국 침략이 나오고 태평양전쟁도 나왔다. 온 세계의 나라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쇼와(昭和)라고 하는 국가>, NHK북스)
시바는 마법을 발생시킨 연원이 어딘지를 끝내 명쾌히 밝히지는 않고 있다. 마법의 구사 주체로 선발도 높은 일본 육대(陸大) 출신의 참모본부 장교들을 들고 있으나, 이들 역시 마법에 걸려 리얼리즘이 결여된 정책과 전략으로 패망의 길을 질주한 셈이고 보면, 마법의 연원은 아닌 것이다.
시바는 ‘마법에 걸린 숲’이란 표현으로 그때의 일본을 좌지우지했던 군부의 엘리트 참모들이 조직성, 계획성, 현실성이 결여된, 즉 리얼리즘 결핍증에 빠져서는 얼토당토않은 터무니없는 전쟁판을 벌여 나라를 망쳤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은 ‘비합리적 결단의 방대한 퇴적’의 결과였던 것이다.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인 마루야마(丸山)도 일본 지배층이 구사했던 정책이나 전략을 합리 기준에 의한 판별이 아니라, 정신병리 차원에서 일본의 패전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마루야마는 아메리카 합중국과 전단을 연 추축국의 소행을 미치광이의 선택으로 본 미국의 제일급의 국제정치학자 T. 슈만의 소견을 자신의 소론 전개의 첫머리에 두고 있다. 이 미국 학자는 “광열주의나 과대망상병이 있어 필사의 몸부림으로 취한 광인의 몸짓을 외교라든지 전략이라든지 하는 종류의 문제로서가 아니고, 오히려 정신병리학의 문제로 하는 쪽이 설명하기가 쉽다”(丸山眞男, ‘軍國支配者의 精神形態’, <現代政治의 思想과 行動>, 未來社)고 하고 있다.
외교와 전략 아닌 精神病理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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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마루야마 이사오. |
마루야마는 같은 파시즘, 전체주의라도 독일과 일본이 무력행사를 통한 정복의지를 드러냄에 있어서 보여주는 현격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다. 나치는 무력에 의한 정복의지를 군말 붙이지 않고, 당당하고 거침없이 드러낸 데 비해, 일본 군국주의는 정복행위를 야릇하게 은폐하고, 도덕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무력에 의한 타민족 억압은 언제나 ‘황도(皇道·천황의 도의)의 선포’였고, 타민족에 대한 시혜(施惠) 행위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의 역사인식이 문제되고 있는 뒤틀림의 연원이 이 부근에 있는 것으로 보여, 마루야마의 지적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고 다가온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은 일제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이었는데, 난징(南京)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A급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그가 어떻게 일제의 침략행을 도덕화하고 있는지를 전범재판에서의 그의 구술서는 보여주고 있다. 그는 중일전쟁의 본질을 다음과 진술하고 있다.
“대저 일화(日華) 양국의 투쟁은 소위 ‘아세아의 일가’ 내에서의 형제싸움으로서… 마치 한 집안 내의 형이 참다가 참다가 그래도 아직 난폭한 짓을 그만두지 않는 동생을 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를 미워해서 하는 짓이 아니고, 너무 귀여운 나머지 반성을 촉구하는 수단이래야 하는 것은 나의 연래의 신념으로서….”
이 마쓰이(松井) 대장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유지들 송별회에서도 ‘자기는 싸움에 나가기보다는 형제를 쓰다듬을 양으로 나가는 것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귀여운 나머지 쓰다듬어 준’ 결과는 난징의 30만 대학살이었다고 마루야마는 야유하고 있다.
일본 지배권력의 도덕치레
세계를 기만하고 자기를 기만하고
일제의 “지배권력은 이와 같은 도덕화에 의해 국민을 기만하고, 세계를 기만하였을 뿐만 아니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기만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 시의 그루 미국대사는 그전 10년간을 일본에 재임했고, 황실의 측근들과도 가까워, 패전 후의 천황제 존속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같은 그루 대사도 일본인들의 자기기만과 리얼리즘 결여에는 혀를 내둘렀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반드시 불성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대다수는 참으로 그들 자신을 속이는 데 있어서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 이와 같은 심적 상태는, 아무리 뻔뻔스럽다 해도 자기의 부당함을 알고 있는 경우보다 훨씬 다루기 어렵다”고 그루 대사는 통찰해 보이고 있다.
1953년 제3차 한일회담의 일본측 수석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에 은혜를 주었다”고 발언하여, 회담을 장기간 암초에 들어 얹은 것은 유명하다. ‘한국에 은혜 주었다’는 이 발언이야말로 일본인들의 자기기만의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오늘날의 위안부 문제에서 보이고 있는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자기기만적인 요소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어제오늘이 아닌 일본인의 행동양식에 구조화되어 있는, 뿌리 깊은 것임을 알게 된다. 그루 대사가 지적하는 일본인의 자기기만적 성향이 한일 간에 공통의 역사인식을 갖는 데 있어서 최대의 장애요인인 것을 한번 치부해 두어야 할 것이다.
악한 일을 하면서 선한 일을 하고 있다고 자기를 속이는 것이 자기기만이다.
‘일본의 지배권력은 특징적으로, 자기의 행동에 끊임없이 윤리의 안개를 뿜어대어서는 죄의식을 회피하려 했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와는 완전히 거꾸로 ‘선을 소욕했으되 항상 악을 저질렀던’ 것이 일본의 지배권력이었다고 마루야마는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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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 |
국민작가 시바가 앞에서 “온 국민이 원기 좋게 멸망을 향해 달려갔다”고 했던 것을 보았다. 이는 태평양전쟁을 에워싸고서, 일본의 지배집단뿐만 아니고, 모든 국민이 함께 정신병리 속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일본이 리얼리즘이 결락되어 합리주의의 바닥이 빠져나가는 정신병리에 걸려드는 무슨 계기가 있었다는 말인가. 윤리 같은 것은 돌아보지 않는 영악한 합리주의로 근대 무력을 거머쥐어 몇천 년 동안 우러러만 보던 노대국 중국을 쳐서 굴복시키고, 세계 최강의 육군대국 러시아를 일러전쟁에서 이기고선 수천 년의 이웃 한국을 집어삼키게 했던 일본의 합리주의 구사의 수준은 가히 세계정상이라 할 만했다. 이런 일본한테 스스로 이길 수 없다고 보았던 전쟁을 시작하는 비합리주의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단 말인가.
무슨 계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국민작가 시바는 앞에서 “일본이란 나라의 숲에 다이쇼(1912~26) 말년, 쇼와 원년(1926) 쯤서부터 패전까지 마법사가 방망이를 탕! 하고 친 것이 아닐까” 한 것을 보았다. 작가 시바의 감성과 통찰력이 다이쇼 말년 언저리에서 전체 일본인의 심성과 심리에 변화를 일으키는 무슨 계기를 느꼈던 게 아닌가. 아쉽게도 작가 시바는 그것이 무엇이었다고 딱 짚어 놓지는 않았다.
시바의 서술은 문제의 통수권이 농간을 부려 일본을 요절낸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통수권의 농간 그 자체가 마법에 걸린 결과의 표출이었을 뿐, 통수권이 전체 일본에 마법을 건 것은 아니었다.
시바가 말하는 쇼와 원년은 다이쇼의 마지막 해였으니까, 다이쇼 15년간의 마지막 몇 해 사이에 일본인의 정신에 심대한 흔적을 남기고 그 혼을 뒤틀어 놓은 무슨 계기나 사건이 있었던 것일까. 길게 따질 여유가 없으므로, 우리는 우선 1923년(다이쇼 12년) 9월의 관동대진재 속에서 일본관민에 의해 저질러진 조선인 대학살에 주목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出征과 血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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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에 앞서 軍神 하치만의 神社에서 血祭를 치렀다. |
알아둬야 할 것은 도요토미가 조선을 정벌하기에 앞서, 조선인을 붙들어다가 살육하여 그들의 전쟁신에게 혈제를 올리고는 침략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를 균형감각 있게 냉철히 보려 했던 가미가이토(上垣外憲一)는 《문록(文禄) 경장(慶長)의 역(役)》에서, 한 종군기를 인용하여 부산에 상륙했던 일본군이 살려달라는 조선사람들을 남녀 불문하고 한 3만명 정도 무차별하게 학살하면서 ‘군신(軍神)에 바치는 혈제(血祭)’라 했던 것을 적어 놓았다.
“모두 손을 모아 무릎을 꿇고, 들을 수도 없는 조선말. 마노라 마노라라 하는 것은, 살려달라 쯤으로 들렸으나, 들어주지 않고 베어 죽이고 밟아 죽이고, 이것을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 하고. 여자도 남자도 개도 고양이도. 모두 베어 버리니, 벤 목은 3만 정도로 보였도다.”(위의 책 p.92)
조선에 쳐들어 온 도요토미의 군대는 바다를 건너기 전 침략에 앞서 혈제를 올렸고 상륙 직후 초전에서는 혈제라면서 조선사람을 무차별로 학살했음을 알게 된다.
사전에 보이는 혈제(血祭-지마쓰리)는 ‘전장에 임함에 있어서 길조를 바라고, 간첩 혹은 적방의 인간을 죽이는 것, 또는 전쟁터 등에서 적을 최초로 때려잡는 것을 말한다(廣辭苑, 岩波). 옛날 중국에서 전쟁터로 출발할 때에 희생 제물을 죽여 그 피로써 군신(軍神)에게 제사지낸 데서 왔다고 한다.
‘지마쓰리(血祭)’는 일본에 흔한 축제나 제례 등 마쓰리(祭)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17세기 초,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단체인 일본 야소회가 발간한 日·葡 사전에는 ‘마쓰리’만으로 군신에게 피를 바친다는 뜻이었다. 일본의 전국시대였던 16세기에는 마쓰리라면 으레 전쟁신에게 피를 바치는 지(血)마쓰리(祭) 였던 모양이다.
1923년 9월의 일본의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이 하나의 거대한 지마쓰리 이미지로 지금 떠오른다. 한국에도 들어왔던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영화 ‘바람이 분다’에는 관동대진재의 장면이 나온다. 유심히 보았다. 흑암이 섞인 붉은 화염이 하늘 전체를 가렸고, 화면 가득히 안경테가 벗겨져 나간 채 나카오리 쓰고, 게다짝을 끌며 지팡이를 거머쥔 것 같은 인파가 남부여대로 허둥대고 있었다. 이 속으로 간간이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섬뜩하게 단속적으로 들려왔다. 지옥그림이 이 같을 것이다. 이 지옥도를 배경으로 조선인 6600여 명이 ‘나부리코로시(혹독한 고통과 시달림 속에 죽게 함)’로 학살당하는 지마쓰리는 올려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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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는 관동대학살 당시 섭정으로 계엄령을 재가했다. |
1923년의 관동대진재 때에 섭정 히로히토는 긴급칙령을 발하여 계엄령을 폄으로써 사실상의 통수권자로서 첫 체험을 했던 것이다. 조선인 학살의 지마쓰리가 섭정 히로히토가 재가한 계엄령하에서 행해졌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해야 할 것이다. 계엄령이란 말할 것도 없이 국가권력의 최고수준의 발동인 것이다. 대지진이 나던 이해 초 섭정 히로히토가 개정 제국국방방침을 재가함으로써, 미국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의 제일의 주적이 되었다. 여태까지는 소련이었다. 등극 3년차에 1년 내내 거행된 즉위의식을 통해, 천황제 절대주의는 열렬하게 국민속에 받아들여졌다. 이를 통해 ‘성스런 신(神)’으로서의 지배자란 관념은 국민속에 더욱 강화되었고, 청정과 순수의 표본 같은 일본 국민의 순수성이 30년대, 40년대를 통해 잡박한 세계와 대결하여 바르디 바른 ‘성전(聖戰)’을 치러야 한다는 의식은 정서적으로 일본국민의 마음바닥에 깔렸던 것이다. 이같은 성전의 결과로 세워지는 것이 동아시아의 신질서라는 것이었다.
쇼와제국이 미국을 주적으로 하여 성전으로 나아간 그 전야에 치러진 혈제(血祭)가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이었다 할 것이다.
조선인 학살은 비서양 세계에서 유일한 근대화라고 자랑하는 일본의 수도 중심으로, 불과 3년전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규약에 인종차별 철폐를 없애자고 그렇게도 집요하게 운동했던 정부가 뻔히 보고 있는 가운데, 백주에, 계엄군대와 경찰에 선동된 도쿄 시민들 손으로 자행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한국친우회 - 관동학살에 “알 권리 있다”
쇼와(昭和)의 문호 마쓰모토(松本淸張)가 조선인 학살에 대한 미국쪽 여론의 악감정을, 일본의 당시 워싱턴 영사의 외무성 보고에서 집어낸 것은 참으로 기특하다 해야겠다.(이후 일본정부가 대학살 사건을 은폐하려 들어서인지 관련 연구에 외국의 반응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보고서는 이승만, 서재필 등의 구미위원부가 미국 내의 한국 독립운동 관련 여론을 환기하고자 만든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의 연맹 회장인 플로이드 톰킨스 박사가 미국의 흄 국무장관에게 보낸 공개장이었다. 옮겨 본다.
“일본에 다년에 걸쳐 거주하고 있는 헤드스트롬 선장은 ‘최대다수의 조선인을 살육하라’라는 공식명령이 나왔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 명령을 추진함에 있어서, 1923년 9월 2일의 일요일에 250명의 조선인이 5인씩 손발이 묶여져 배에 실려서는 기름을 끼얹어 산 채로, 태워 죽임당한 사실을, 목격자로서 그는 증언하고 있다. 또다른 아메리카인(人)은 9월 4일 화요일 밤, 총살될 8명의 조선인의 처형준비를 목격하였다. 병사들은 분명히 이들의 공포를 즐기고 있었고, 조선인을 총살하는 대신에, 총검으로 찔러서 ‘나부리코로시’로 했다. 수백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었고, 몇천 명이나 제대로 먹을 것도 없이 구류되었다. 일본 정부는 가해자를 징벌 못했다.
세계는 일본정부에 의해 용인된 조선인 학살의 상세를 알 권리가 있다. 드디어 일본 정부는 진실은 나타나고 마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어, 최초에 보도된 것의 오류를 인정하고, 조선인이 학살되고 구류된 것을 인정하는 정도까지 검열을 완화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가해자의 처벌이나 어떤 종류의 보상 약속도 들어보지 못했다. 문제되고 있는 법적 사정이란 것의 그 저쪽에 인도주의적 도의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데, 미국 국무성은 이들 불행한 사람들을 원조할 수단을 강구하여야만 할 것이다.”
“세계 제일의 야만의 정부”
일본에 와 있는 서양 각 나라의 대표들도 그냥 있지 않았다. 도쿄주재의 각국 대사들이 연명으로 일본정부에 대해 조선인학살에 관해서 항의했다.
그때의 주일본 미국대사 사이러스 우즈(Cyrus Woods)의 소감이 남았다. “이와 같은 가공할 (조선인)대학살이 백주에 공공연히 일어난 일본이라는 나라는 단연코 문명국으로 인정할 수가 없고, 특히 그것을 예사로 보고서 막으려고 하지 않은 일본정부는 세계에서도 제일 야만의 정부이다.”
메이지 이래 서양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은 서양사람들로부터 근대화되었단 소리를 제일 듣고 싶어했다. 그 극한의 반대소감이, 충분히 외교적일 수 있는 세계최강 미국대사의 입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1927년 F.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중일전쟁이 시작되고서 3개월쯤 있다가, 일본이 문명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는 유명한 ‘격리연설’(quarantine speech)을 하였지만, 미국의 관계당국자는 23년 이때에 이미 일본의 문명적 실체가 문명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할 어떤 것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조선인 대학살 다음해인 24년부터 31년까지 중간에 한 2년 빠지지만, 5년간이나 외상에 재임했던 시데하라(幣原喜重郞)의 유명한 대미(對美)협조외교라는 것도, 표면으로는 자본과 자원에서 미국에 기대야 하는 3류 제국주의의 현실적 필요도 있었으나, 깊이에서는 3·1운동이나 조선인 대학살을 계기로 미국에 싹트기 시작한 대일 악감정을 누그러뜨리려는 시도였음직하다.
자아도취…만능감…리얼리즘 상실
관동대진재 때 도쿄의 시민들에 의한 조선인 학살은 자경단(自警團)을 통해서였다. 지역 유지들이 대진재의 불안 속에 만든 신변조직이 조선인 폭동유언에 접해 자경단으로 전화된 경우도 있고, 관헌의 지령에 의해 조직된 것도 있다 한다. 구성은 지역의 청년단원, 소방단원, 재향군인 분회 등의 성원들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본의 마을에 마쓰리(축제) 등 공동체 행사가 있을 때 나서는 사람들이다. 관동지방에 3689개에 달하는 자경단이 조직되었다고 조사되었다. 뒷날 대외여론이 악화되자 자경단에 대한 재판 같은 것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이유에 대해 ‘당시는 질서가 문란해서, 나라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가 주요 답변이었다.
그동안의 여러 연구를 종합하여 조선인 학살의 몇 가지 주요 측면을 적시해 보겠다.
학살은 계엄령하에서 행해졌다. 계엄령은 당시의 치안총수들에 의해 발의되었고, 치안총책인 미즈노(水野鍊太郞) 내무상은 계엄의 대상으로 조선인을 적으로 지목했다. 자경단은 행인들 중에서 인종청소하듯 조선인을 가려냈다. 경찰서장 등이 앞장서 ‘조선인은 죽여도 좋다’고 자경단에게 폭력을 풀었다. 가려낸 조선인을 자경단 모두가 둘러서서, 공동연희에 동참하듯이 제나름의 동작으로 광희 속에 ‘나부리고로시’를 하였다. 이 일이 도쿄를 중심하고 일본의 수도권 전역 3000여 곳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수도권의 전일본이 참여하여 조선인을 희생제물로 하는 대규모 혈제가 치러진 것이다.
이들은 조선인을 ‘나부리고로시’의 그때에 이미 환성을 올리고 광희작약하였다. 모두 발광체험을 겪었던 것일까. 어찌 일본인의 사회심리의 심층에 변환이 일어나지 않고 배겼을 것인가.
제국의 적이요 충성의 장애물인 조선인을 입맛대로 죽여 최고의 충성을 스스로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기의 확인과 자기 신뢰, 이로 인한 자아도취, 왜소한 자아가 공동학살에 참여함으로써, 전체 일본의 일부에로 강력한 귀속감에 빠져들며 갖게 되는 전지전능감, 이 모든 나르시시즘적 경향이 강해지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만 현실로서 느껴지고, 반대로 외계의 현상은 의미를 잃고 만다고 사회심리의 통찰은 알려준다. 나르시시즘 속에서는 상대의 이미지가 비뚤어져 보이고 그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정지되고 만다. 여기까지 오면 합리주의의 기초가 되는 리얼리즘은 인간의 심성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앞에서 우리는 일본의 대표적 정치학자 마루야마(丸山眞男)가 일본 지배계층의 정신형태가 자기기만과 리얼리즘 결여에 빠진 결과로, 방대한 비합리적 판단을 집적한 끝에, 해서는 안 되는 줄 아는 전쟁에 끌려들지 않으려 들면서, 끌려들어 패망했다고 했던 것을 보았다.
작가 시바(司馬)는 쇼와의 일본이 뭔가의 마법의 작용으로 합리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마법의 숲으로 되어버리고 나서 패전할 때까지 20년간 리얼리즘이 결여된 선택만 하다가 망했다 하였다. 쇼와의 일본을 안으로부터 리얼리즘 결여로써 점령해 버린 군부, 그중에서도 통수권이란 요술방망이를 휘두른 참모본부의 수재, 엘리트 장령들의 행태에 대해 시바는 시대가 흘렀어도 절망해 보였다. 통수권이란, 천황 하나만 내세우면서, 삼권 위에 걸터앉아 문민·내각의 통제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加害者에게 박힌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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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古主義 내셔널리즘을 추구하고 있는 아베 총리. |
아베 수상이 중의원 첫 당선을 한 지 일천한 1993년 8월, 자민당이 끼지 않은 연립내각의 수상이 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는 전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에서 태평양전쟁이 침략전쟁이라고 단정해 보였다. “나는 침략전쟁이었다고,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했던 것이다. 자민당은 즉각 반발했다. 당내에 ‘역사·검토위원회’가 설치되자, 새내기 의원인 아베는 바로 이름을 올렸다. 이 위원회는 호소카와 수상의 인식에 대한 대응으로서 《대동아전쟁의 총괄》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은 “대동아전쟁이 일본의 자위전쟁이었고, 아시아 해방의 이념을 가진 전쟁이었다”고 하고 있다.
復古主義 내셔널리즘과 아베의 聖戰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인 무라야마 수상이 전후 50년이라고, ‘과거의 전쟁을 반대하고, 미래의 평화에의 결의를 다지는’ 결의를 국회에서 채택하려 했을 때는 아베는 이에 반대하여 불참했다.
종군위안부 관련 서술을 삭제하는 등 역사교과서 문제가 등장했을 때는 이를 지원하는 국회의원 모임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정권에서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다루는 책임을 맡고, 나중에는 관방장관이 되어, 납치문제의 전면적 해결이 국교정상화의 전제임을 강조하여 다수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
거기다 아베의 평소 야스쿠니 신사를 향하는 애틋함을 더하면, 지난날의 전쟁을 긍정하는 복고주의 내셔널리즘이 아베 정치의 근본이라 해도 될 것이다.
태평양전쟁 전야에도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려 드는 일본한테 문제는 ‘중국으로부터의 철군’이었다. 독재자 도조 히데키(東条英穖)는 미국과 교섭할 대사를 떠나보내면서, 이 문제를 양보하면 “야스쿠니 신사(神社) 쪽을 보고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한다.
오늘날도 야스쿠니에 줄 서고 싶어하는 모든 일본의 정치인한테, 태평양전쟁은 성전(聖戰)인 것이다.
이들에게는 ‘성전’의 야스쿠니 뒤에 있는 시바 료타로의 ‘마법의 숲’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베는 지금, 중국이 대두하고, 미국이 빠져나가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중국군을 견제하기만 하면, 세계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받아줄 것이라 여기는 듯하다. 역사 청산 없는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한국과 세계가 끝내는 받아줄 것이라 여기는 듯하다.
어찌 발상이 세력균형의 냉전사고 언저리만 맴돌고 있는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수상까지 된, 다이쇼·쇼와의 기적적인 대논객 이시바시 단잔(石橋 湛山)의 지언(至言) ‘전법(戰法)의 극의(極意)는 사람의 화(和)에 있다(《石橋評論集》, 岩波文庫, p121)’를 한번 곱씹을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