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가 김정현의 ‘저 높은 중국, 낮은 중국’ ④ : 월간조선

중국인의 새해는 <춘제롄환완후이>(春節聯歡晩會) 줄여서 ‘춘완’이라 불리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한다. 중국 국영방송 CCTV가 매년 12월 31일 저녁 8시부터 1월 1일 새벽 1시경까지, 장장 5시간 가까이 생방송하는 새해맞이 프로그램이다. 굳이 시청률을 따지자면 거의 80%쯤 될 것이다. 일본으로 치면 <홍백가합전>에 비교할 수 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과 집 안에서, 반드시 ‘자오쯔(餃子·교자만두)’를 나눠 먹으며 새해를 맞는 중국인들에게 ‘춘완’은 채 널고정 프로그램이 될 수밖에 없다. 꼭 그날 밤에 보지 못했더라도 다음 날 아침부터 며칠 동안 재방송이 계속되니 어쩌면 모두가 한 덩어리라 보게 되는, 시청률 100%일지도 모르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최고의 프로그램이다. 그러니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나 출연자는 중국 최고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쟁쟁한 명성을 자랑하는 뮤지션들이 초대되는데, 올해는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곡 ‘My Heart Will Go On’의 가수 셀린 디옹(Celine Dion)과 그리스 국적의 국제적 음악가 야니(Yanni) 등이 출연했다. 우리나라의 ‘싸이’도 섭외하려 했지만 치열한 경쟁 끝에 B-TV(베이징 텔레비전)의 새해맞이 프로그램에 빼앗겼다고 한다.

춘완 의상 20년째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궈페이

발레리나 의상 점검을 위해 서슴없이 무릎을 꿇은 중국 최고의 의상디자이너.

‘춘완’을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의상디자이너 궈페이(郭培)의 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중국 최고의 의상디자이너라는 것은 ‘춘완’에서의 위상만 봐도 알 수 있다. 1966년생인 그녀는 벌써 20년째 ‘춘완’ 주요 사회자 및 출연자의 의상을 디자인하고 있다. 솔직히 2개월여를 시간에 쫓기고 품도 많이 들어 큰 이익이 없음에도 이제는 의리 때문에라도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급하게 요청했는데도 《월간조선》의 위상을 인터넷으로 확인한 궈페이 측이 동의해 춘제를 사흘 앞둔 지난 2월 6일 그녀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속장소인 그녀의 회사에서 무려 3시간이 넘도록 우두커니 기다린 다음에야 마주할 수 있었다. 정오부터 시작한 ‘춘완’ 여자 사회자 리쓰쓰(李思思)와 세계적 피아니스트 랑랑(朗朗)과 협연할 발레리나 허우훙란(侯宏瀾)의 발레복 가봉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 가봉실로 들어서니 리쓰쓰는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다며 촬영을 거절했고, 허우훙란은 쾌히 응했다. 발레리나의 우아한 자태보다도 어린 그녀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토슈즈를 신겨주거나 까다로운 요구에 기꺼이 응하는 궈페이의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역시 진정한 프로였고 최고였다.

저녁 7시를 넘겨 마주앉자 그녀는 다시 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식사도 대접하지 못한다며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이다. 아침에 우유 한 잔과 비스킷 몇 개를 먹은 게 전부라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조금 더 기다려도 괜찮으니 먼저 간단한 요기라도 하지 그래요.

“원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점심은 안 먹어요. 점심을 먹으면 내가 멈춰진(停頓)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만족스럽지 않아서요.”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가 좋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건강관리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요.

“대신 잠을 일정하게 자요. ‘춘완’ 행사 막바지 준비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반드시 8시간 수면의 원칙을 지켜요.”

2012년 ‘용의 이야기’에 출품한 드레스. 몽환적인 화려함에 관객은 저절로 탄성을 터트렸다.

—베이징에서 태어났군요.

“예. 조금 변두리이기는 하지만 몇 대째 베이징에서 태어나고 자란 베이징런(北京人)이죠. 아버지는 직업 군인이셨고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였어요.”

—군인이었다면 계급은.

“그리 높은 계급은 아니었고 생활도 이웃과 다를 바 없었어요.”

—이를테면 장삼이사(張三李四)인데 의상디자인이라니 좀 의외군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어요. 또 옷 만드는 게 좋았고 바느질도 꽤 잘했지만 의상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미술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82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베이징이징공업대학(北京二經工業大學)에 운명처럼 의상디자인학과가 생겨 다른 생각은 할 것도 없이 지원했어요. 중국 의상디자인 1기가 된 셈인데 1986년 26명이 졸업했어요.”

당시 그녀는 최고 명문의 미술대학에 입학하는 데 학업성적이나 실기능력 모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물었다.

—무례하게 묻자면 요즘에도 그리 알려진 대학은 아닌 것 같네요.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배우고 싶은 걸 배울 수 있고, 배웠다는 게 중요하죠. 그리고 나름 저명하고 우수한 대학교예요(웃음).”

—그처럼 결심이 확고한 어떤 까닭이 있었나요.

“내내 꿈을 꿨으니까요. 사실 내가 자라던 시절은 문화대혁명 시기여서 외국의 문물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그러니 예쁜 옷에 대한 꿈은 꾸면서도 막연했는데, 중학교 때 우연히 영화 <시씨>(Sissi: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 불렸던 오스트리아 엘리자베스 폰 비텔스바흐 황후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로, 제목 시씨는 그녀의 애칭이다. 1955년 작)와 <로마의 휴일>을 보고 나도 저처럼 아름다운 옷을 만들며 살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특히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방 안의 커튼을 툭! 뜯어서 옷으로 만들어 입고 나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얼마나 아름답고 창조적으로 느껴지던지.”

디자인 철학은 ‘스토리텔링’

정교한 수예작업 과정.

—당신 디자인의 철학, 혹은 추구하는 바는 어떤 건가요.

“이야기요.”

—이야기? 무슨 뜻인가요.

“오드리 헵번의 그 행동이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동화나 소설책을 읽으면 작가가 표현한 아름다운 대목을 계속 중얼거리며 그걸 옷으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신의 패션쇼는 모두 제목과 주제를 가진 스토리텔링 방식인가요.

“그렇죠. 그저 옷만 보여준다는 건 내게 별 의미 없이 느껴져요. 아무리 아름다운 옷이라도 모델이 입고 런웨이 위를 걷는 것에 그친다면 그냥 옷일 뿐이죠. 나는 내 옷에 내 이야기, 즉 작품마다 각각의 영혼을 담고 싶은 겁니다.”

그녀가 지난 2012년, 베이징 무역센터 내에 있는 특급호텔 중국대반점(中國大飯店)에서 개최한 패션쇼 ‘용의 이야기(龍的故事)’는 3천명의 관객이 운집한 대성황을 이루며, 그 화려함과 독특한 창조성으로 세계 패션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특히 조명, 음악, 무용수들이 적절하게 배치된 쇼는 아주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오페라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용의 이야기’에 담은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기본적으로는 용을 주제로 한 동화인데, ‘믿는 자에게는 존재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信者有不信者沒有)’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비단 용뿐만 아니라 신(神)이거나 사랑이거나 모두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이야기의 영감은 어디에서 얻고, 어떤 이야기들을 주로 하나요.

“나는 예민하고 쉽게 감동을 받는 편이에요. 보던 영화나 드라마, 산책하는 길목의 작은 것, 여행지의 풍광, 친구의 사랑 이야기 등 모든 것에서 영감을 받아요. 그런 것들에서 받은 영감으로 인간의 이야기, 즉 성공의 기쁨, 그 과정의 고난, 즐거움, 행복, 사랑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 거죠.”

궈페이가 딸을 위해 만든 작품이다. 모델로 나선 14세 딸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현실적인 이야기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작업을 했습니까.

“아니에요. 내가 대학교 졸업 작품으로 낸 게 서양식 드레스인데 동기생들 중 그런 작품을 낸 건 내가 유일했어요. 당시 지도교수조차 서양 드레스 아랫부분이 원형으로 크게 퍼져 고정되는 방법을 몰랐는데, 무작정 오페라 공연장을 찾아가 옷 안감에 고정된 뼈대가 있다는 걸 알아냈을 정도로 패션계 사정이 열악했으니 꿈도 꿀 수 없었죠. 처음에는 기성복 만드는 회사에 수석디자이너로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자신만을 위한 옷을 디자인해 달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내가 만드는 옷은 최소 1만명을 위한 디자인인데 불평등한 처사고 낭비라고 생각했던 거죠. 나중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판매를 위한 게 아닌 내 이야기를 보여주는 옷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고객은 상류층이었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저는 그 덕분에 얼마간의 돈을 저축할 수 있었고, 그걸 밑천으로 1997년 ‘궈페이로즈스튜디오(Rose Studio)’라는 상호의 주식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어요.”

—여전히 맞춤 드레스를 생산하는 겁니까.

“드레스뿐 아니라 특이 체형 사람들의 주문에 따라 모자, 속옷, 신발 등 모든 의류를 생산해요. 내 구상에 따른 실무 디자이너 20여 명을 비롯하여 모두 300여 명의 직원이 있는데, 모든 공정이 수작업이어서 생산라인 직원이 대부분이에요. 특히 자수를 담당하는 직원만 160명에 이르러요.”

시판용 파티복. 중국적 디자인의 시작은 고 앙드레 김의 한국적 이미지 작품이 모티브였다.

—경영도 직접 하나요.

“나는 이상주의자예요. 그러니 경영에는 기본적으로 무지하죠. 그래서 처음에는 투자자 친구들도 있었는데 이윤창출을 첫째 목적으로 삼지 않으니 하나 둘 떠나는 아픔을 맛보게 되더군요. 그렇지만 운이 좋아 15년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아마 그이를 만나지 못했으면 난 영어와 경영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느라 아무것도 못해 냈을 거예요. 남편은 지금 내 통역이면서 회사 총재직을 맡아 경영도 잘해 주고 있어요.”

—남편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타이완 국적인데 원단 등 의류와 관련된 원자재 무역상이었어요. 그러니 내가 구상하는 옷에 맞는 원단 등 잘 모르고 부족한 모든 부분을 채워줬고, 그런 사이로 만남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결혼으로까지 이어졌어요. 내 반쪽 날개를 얻은 셈이죠.”

—가정생활은 어떤가요. 한 가지 일에 집중하면 집안일은 소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일에 관해서는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롭지만 가정에서는 아주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에요. 집에 돌아가면 완전한 가정주부이고 집안일도 아주 재미있어요. 기본적으로 두 딸아이는 물론이고 남편을 여전히, 처음처럼 사랑하는 걸요. 또 나는 예쁜 것을 좋아하고 부지런한 편이라서 집 안도 내 손으로 직접 꾸며요. 그 역시 일종의 창조적 행위인데 어떻게 재미있고 즐겁지 않겠어요.”

의례적인 답변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스치는 질문에도 성의를 다했다. 오히려 너무 세세히 설명해 정리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도 아니었다. 베이징런의 특징이다. 조용하고 친절하며, 이웃에 대한 배려심은 깊지만 타인의 일을 입에 올려 왈가불가하지는 않는다. 오랜 황도(皇都)의 전통 속에 자긍심과 신중함을 함께 익힌 때문이리라.

52억원 들여 단독 패션쇼 열어

시판용 드레스. 대부호 집안이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가격이다.

—비판도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요, 아름답고 환상적이라는 칭찬이 있는 반면 쓸모없는 짓이라는 비판도 있어요. 충분히 이해하고 개의치 않아요. 내 의상 작품은 내 꿈이기도 하지만 한편 문명의 선도라는 측면도 있어요. 인간의 삶은 진보의 연속이죠. 내가 처음 일하던 시기에는 디자이너라는 개념 자체조차 없었어요. 재봉사뿐이었죠. 그러나 선구자가 있고,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점차 전체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죠. 나는 중국 의상계의 선구였고, 대표라고 생각해요.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지금까지의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걸 꼽는다면.

“아직 완전히 마음에 드는 작품은 없지만 가장 공들였던 건 수천 개의 천연진주로 장식한 흰색 드레스예요. 제작기간만 6년 가까운 5만 시간이 들었으니까요. 애정이 가는 작품은 지난해 ‘용의 이야기’에서 발표한 청색 드레스인데, 그건 열네 살 된 내 딸을 위한 작품이었어요.”

—천연진주 수천 개로 장식했다면 가격도 엄청나겠네요.

“약 3백만 위안(약 5억2천만원) 정도 돼요.”

—누가 구매했나요.

“팔지 않고 소장하고 있어요. 내 대표작품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한 번 패션쇼를 여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들죠?

“각각 달라요. 처음에는 200명 정도를 초청했는데 점점 관람을 요청하는 사람이 많아져 지난해 ‘용의 이야기’에는 2천명을 초청했고, 예산은 3천만 위안(약 52억원)이었는데 실제는 훨씬 초과했어요.”

—스폰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없어요. 우정으로 얼마쯤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마련해요.”

—그게 가능해요.

“베이징의 왕푸징(王府井)과 무역센터, 상하이 와이탄(外灘)에 각각 매장이 있지만 힘들죠. 그래서 매년 열지는 못하고 2년에 한 번씩 개최해요. 수입의 대부분을 패션쇼에 쏟아붓는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거예요.”

—작품은 주로 서양풍의 드레스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 왔죠. 하지만 5년 전부터는 중국 전통의상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특히 한대(漢代) 의상을 깊이 연구하고 있는데, 당시 의상이 중국 전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흔히 알려진 치파오(旗袍)는 만주족 의상으로 청(淸)나라 때에서야 들어왔고요.”

“앙드레 김은 한국의 국보”

민얼굴의 왕민. 사진보다는 실물이, 몸보다는 정신이 훨씬 더 아름다운 여인이다.

—한국과는 교류가 있습니까.

“특별한 교류는 없지만 앙드레 김 선생님을 아주 존경했어요. 몇 년 전, 한국에 갈 일이 있어 만나려 했지만 서로 길이 엇갈렸어요. 그 뒤에 다시 만나려 했지만 그만 돌아가셔서 매우 안타까워요. 저는 그분은 대한민국의 국보라고 생각해요. 사실 내가 중국 전통의상에 눈길을 돌린 것도 앙드레 김 선생님의 한국 전통미를 살린 작품들을 접하고 나서였어요.”

—앞으로의 계획 중 중요한 하나를 든다면.

“샤넬, 입생로랑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거예요. 한복(漢服)의 실용성과 전통수예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 조화를 이루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봐요. 또 중국은 수요층의 폭이 넓으니 내가 60세가 되는 15년 내로 반드시 이뤄질 거라고 믿어요.”

—오늘 이만큼 성공한 비결을 꼽는다면.

“단순한 거죠. 꿈을 꾸는 사람이 자신의 꿈 이외의 것을 생각하면 이룰 수가 없어요. 또 다른 사람이 심어준 꿈이 아닌 스스로가 꾸는 꿈은 그 자체로 이미 행복이잖아요. 그러니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거죠.”

‘단순’ 너무도 간단명료한 대답이다. 물론 특별한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생존을 외면한 꿈이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행운도 자신의 재능에 따른 꿈을 전제로 일정한 희생을 감내하는 정신으로 노력하는 사람에게나 찾아드는 것이리라. 궈페이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받은 급여는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월 60위안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이들이 돈이라는 욕망을 좇을 때 오직 꿈만을 생각했다. ‘단순!’하게.

—다른 취미가 있나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행복한 취미생활인데 다른 취미가 왜 필요한 거죠?(웃음)”

정답이다. 그녀는 워커홀릭도 아니고 베스트를 추구하는 야심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타공인의 중국 최고이다. 그것도 아주 천진하고 맑은 영혼의.

의상디자이너와 모델은 바늘과 실의 관계이다.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하는 모델을 추천해 달랬더니 궈페이의 입에서 곧바로 왕민(王敏)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전속모델에 대한 우대 같아 물었더니 아니란다.

중국 1세대 톱모델 왕민

‘중국 신부’라는 이름의 드레스를 착용한 왕민.

왕민. 키 180cm, 83-60-88의 몸매는 약속 장소에 들어서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게 한다. 화장기 없는 민낯에 청재킷 차림. 모델로서의 사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게다가 1977년생으로 벌써 30대 중반. 그래서일까, ‘정점(頂點)’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왕민은 지난 1998년 중국 최고모델 경연대회에서 톱모델로 뽑혔다. 말하자면 중국의 ‘1세대 톱모델’인 셈이다.

—춘제(중국의 설날)를 쇠러 고향에 간다 했는데 어딘가요.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이에요.”

—나도 난창에 간 적이 있습니다. 길거리에 미인이 많아 카메라 셔터를 여러 차례 눌렀는데 원래 미인이 많은 고장인 모양이죠.

“(웃음)남방지역이라 보편적으로 작은 체형이지만 귀여운 미인이 많은 편이에요. 저처럼 키가 큰 건 특별한 경우고요.”

—환경적 요인이라도 있는 건가요.

“장강(長江) 중하류 평원으로 풍부한 강수량과 습윤한 기후에 먹거리가 풍부한 덕분이 아닐까요. 또 대부분 큰 욕심 없이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도 한 요인일 테고요.”

—중국 모델계에 지역적 특징이 있나요.

“이전에는 동북(東北)지역 여인들이 키가 크고 이목구비도 또렷해 미인으로 불리며 모델계의 주축을 이뤘어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미국, 유럽 등 서방 출신 디자이너들이 오리엔탈 풍을 추구하며 그에 맞는 남방 출신들을 선호해서 이제는 중국에서도 장쑤(江蘇)나 안후이(安徽)성 출신 모델을 많이 기용해요.”

—어떤 계기로 모델이 되었습니까.

“20세 때 난창의 대학교에서 인테리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길에서 모델 제의를 받았어요. 호기심에 모델대회에 나갔다가 덜컥 입상해 이 길을 걷게 됐어요.”

—모델은 많은 여인들이 선호하는 직업인데 축복이군요.

“네. 1996년 상하이국제모델대회에서 10대 모델로 입상한 뒤로, 2003년 중국 CCTV 선정 10대 모델, 프랑스 패션텔레비전 수퍼모델 인터넷부문 선정 등의 수상(受賞)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샤넬, 펜디 등 여러 패션쇼에도 초대를 받았으니 엄청난 행운을 누린 거죠. 또 패션잡지 《엘르》의 표지도 찍었고, 광고도 중국 레노보컴퓨터 등 여러 편을 했어요.”

매력적인 치파오. 17세기,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며 등장한 복식이다.

—한국과도 인연이 있었나요.

“2001년 한국관광공사 초청으로 앙드레 김 선생님의 ‘공항 패션쇼’에 참가했어요. 그 뒤로 롯데월드, 동대문 ON & ON 패션쇼 등에 참가했는데 일반적인 런웨이가 아니라 대표적 관광지에서 안재욱, 한고은 등과 함께한 패션쇼라 아주 재미있었어요.”

—궈페이가 당신을 추천한 건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궈페이 선생님은 작품마다 완벽을 추구하는 스타일인데다 패션쇼마다 주제도 달라요. 모델을 선정하는 것도 아주 까다롭죠. 그런 선생님에게 매번 발탁되는 건 아마 제가 정해진 스타일이 있는 모델이 아니어서일 거예요.”

—그건 무슨 의미인지.

“특히 요즘은 대개 일찍부터 모델학교에서 일률적인 교육을 받고 일을 시작하니 스타일이 일정한 편이죠. 반면 저는 길거리 캐스팅으로 모델 일을 시작하며 무대에서 공부도 같이한 쪽이니 작품의 개성에 따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각각 달리 배운 셈이죠.”

—아, 조기교육은 몸과 마음이 고정되고 일반화되는 단점이 있겠군요.

“어느 쪽이건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저에게는 고정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강점이 된 것 같아요.”

—‘용의 이야기’에서는 어떤 작품들을 소화했죠.

“궈페이 선생님 쇼에서는 누구나 한 작품만 소화해요. 저는 ‘중국 신부’라는 이름의 웨딩드레스를 입었는데,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할 수 있는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 중국 4대 민간전설 중의 하나)’의 축영대 마음을 한 마리 나비가 된 듯 하늘하늘한 느낌으로 표현하려 애썼어요. 드레스가 아주 무거워 힘은 들었지만 언제나처럼 저를 흥분시켰죠.”

—궈페이의 작품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꿈이죠. 선생님은 작품마다 이야기를 가미시켜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몽환적이고 과장되게 표현하는데, 바로 그런 과장과 몽환이 사람들에게 실현 불가능한 꿈을 실현하도록 유혹하는 것 같아요.”

앙드레 김과 알렉산더 맥퀸 존경

2012년 ‘용의 이야기’ 패션쇼에 참가한 세계적 노(老)모델 카르멘.

—특별히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또 있습니까.

“돌아가신 앙드레 김 선생님, 함께 작업해 보지는 못했지만 영국의 디자이너 고(故) 알렉산더 맥퀸(Lee Alexander Mcqueen·1969〜2010)을 지금도 존경해요.”

—어떤 점에서.

“알렉산더 맥퀸 역시 자신의 꿈을 작품에 담았는데 그분은 궈페이와는 다른, 욕망을 절제하면서도 자유분방하고 심플하게 표현한 점이 좋았어요. 앙드레 김은 본인이 가진 재능으로 타인의, 그 자신도 모르는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려 노력한 것 같았어요. 타인을 위한 배려와 서비스 정신이 투철했다고 보는데, 두 분 다 돌아가셔서 개인적으로 매우 유감이에요.”

—소속된 에이전시가 있나요.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1인 기업인 셈이죠. 중국 에이전시들은 이윤만 추구할 뿐 모델 일 그 자체의 예술성이나 가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어요. 몇 년 전 일본의 에이전시와 손잡고 일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매우 전문적인 지식으로 저는 오직 모델 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해줘 아주 좋았어요.”

—모델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인데 다른 길을 모색해 본 적은 없습니까.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여러 명의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분이 자신도 나이가 들면 작품의 색깔과 성격이 바뀔 텐데 그때도 은퇴하지 말고 내 작품을 입어주겠느냐고 묻더군요. 무심히 그러마 대답했는데, 나중에 카르멘 델로피체(Carmen Dell'orefice·1931년생)를 보고 그게 실현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분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잖아요. 2012년 궈페이 패션쇼 ‘용의 이야기’에도 참가하셨고요.”

—그래도 연기자와 같은 다른 일을 꿈꿔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모델 일이 좋아요. 나는 단순한 성격에 간단명료한 걸 좋아해요. 연기 역시 예술계의 일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성격의 일이잖아요. 순수한 내 영역에 다른 것이 섞이면 결국 불순물이 되는 건데, 수입이나 명성에 연연해 혼란스럽고 싶지 않아요.”

망설임도 없고, 단호하다. 비로소 그녀의 첫 느낌이 정점이었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왕민도 궈페이처럼 단순함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이 첨예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인구 13억이 넘는 거대한 중국을 오래 들여다보면 칙칙한 기분이 점점 더해진다. 고위 관료의 어마어마한 부패, 단숨에 일궈낸 터무니없는 부(富)의 어두운 이면,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서슴없이 저지를 것 같은 황당무계한 사건들…. 그러나 이 속에 이들처럼 맑은 영혼으로 제 길을 당당하고 온전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이들이 드넓은 땅덩어리, 세계를 위협하는 경제력 따위보다 훨씬 더 큰 파워로 느껴지고 두렵다. 결코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기분 좋은, 그러나 한편 중국의 저력이 더욱 두려워지는 인터뷰였다. 역시 5천 년 문명,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한 곳이라는 역사와 전통은 결코 쉬 사그라질 것이 아니었다. 물질에 휘둘리고 편벽한 지식에 집착하는 경박함으로는 금세 뒤떨어질, 아니 이미 휘둘리기 시작한 우리가 깊이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