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의 유신정치숙, 숙생 2025명 선발해 1100명 정치투입,
200명 衆議員 당선 목표
⊙ 유신정치숙, 동해대지숙(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 가와무라정치숙(가와무라 나고야 시장)
에 이어 가타 유키코 사가현 지사가 미래정치숙 개설
⊙ 도쿠가와 막부 말기 데키주쿠(適塾)·쇼카손주쿠(松下村塾) 등 8000여개의 私塾 출현해 메이지유신
이끌어
⊙ 마쓰시타정경숙, “먼저 인간이 된 뒤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가르쳐
200명 衆議員 당선 목표
⊙ 유신정치숙, 동해대지숙(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 가와무라정치숙(가와무라 나고야 시장)
에 이어 가타 유키코 사가현 지사가 미래정치숙 개설
⊙ 도쿠가와 막부 말기 데키주쿠(適塾)·쇼카손주쿠(松下村塾) 등 8000여개의 私塾 출현해 메이지유신
이끌어
⊙ 마쓰시타정경숙, “먼저 인간이 된 뒤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가르쳐
- 노다 요시히코 현 총리 등을 배출한 인재양성의 요람 마쓰시타정경숙. ‘경영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설립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일본은 이미 한국의 상대가 안되는 한물간 나라’라는 식의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삼성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지만, 일본 유수의 전자업체들은 망하기 직전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 특유의 미덕(美德)으로 전(全)세계가 찬탄하던 종신(終身)고용제는 엉망이 되고, 젊은이는 방향을 잃은 채 방황하고, 연금(年金)이나 퇴직금도 보장되지 못하는 회사가 대부분이고, 일본의 기술력은 바닥을 기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과연 일본이란 나라가 20세기 한순간 반짝 빛난 ‘어제의 강국’으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하지만 ‘한국 밖’으로 나와서 보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1980년대 거품경제 당시의 ‘일본신화(神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국제무대에서 나름의 위상과 권위를 갖고 있는 나라다.
지난 3월부터 워싱턴 스미소니언 아시아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한일(韓日) 문화제를 비교해 보자.
3월 11일부터 6월 13일까지 열리는 한국영화제에 들러 보면, 300여 객석 가운데 관람객 수가 평균 수십 명을 넘지 못한다. 필자가 찾았던 평일에는 ‘단 한 명’만이 외롭게 앉아서 관람하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서 일본의 호쿠사이(北齋) 판화전과 일본불교 탱화 전시회도 동시에 열리고 있다. 관람객들로 터져 나간다. 관심도나 참여자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내일의 일본 모습을 증명해 주는 대졸(大卒)취업률을 보자. 2011년 7월 발표된 정부통계를 보면 2011년 봄에 졸업한 대학생 중 91.9%가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대학원 진학 포함). 같은 기간 한국의 경우 대략 70%가 직업을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군 입대, 대학원 진학 포함). 90%대에 이르는 일본 대학생의 취업률은 1%포인트 범위 내에서의 차가 있을 뿐 거의 매년 비슷하다. 청년실업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지만, 90%대의 대졸취업률을 자랑하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1시간에 1000엔을 주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지천에 깔린 나라도 일본이다.
군사력을 살펴보자. 지난해 중국이 항공모함을 건조하면서 아시아 전체를 위협한다는 말이 들린다. 일본은 어떨까? ‘축소지향적인 일본’은 대형 항공모함이 아닌 이지스군함 10척을 갖고 있다. 양(量)이 아니라 질(質)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력이다. 흔히들 잊고 있는데,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미 1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했던 나라다. 미드웨이 해전(海戰)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할 정도의 무력(武力)을 보유했던 나라다. 그게 벌써 67년 전의 얘기이다.
2007년 11월 중국 최신예 군함 선전(深?)이 전후(戰後) 처음으로 일본에 들렀을 때, 일본 군사전문가들은 선전에 승선해 중국 해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면밀히 살폈다. 결론은 1개 이지스함대만으로 선전 1000척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중국은 해전(海戰)을 육전(陸戰)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당시 일본 군사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제2의 사카모토 류마’ 하시모토
일본이 가진 힘과 일본인의 저력(底力)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3월 24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날은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이 대표인 유신정치숙(維新政治塾)이 문을 연 날이다.
‘유신’이라는 말은 일본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을 단숨에 구미(歐美)열강 수준으로 끌어올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관한 향수(鄕愁) 때문이다. 그런 일본인들에게 ‘숙(塾·일본어 발음으로는 ‘주쿠’)’이란 말은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인재의 산실(産室)’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유신’과 ‘숙’이 하나로 이어진 ‘유신정치숙’은 일본정치의 풍운아(風雲兒) 하시모토가 구상한 정치가 양성소이자, 일본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취지에서 만든 정치단체이다.
유신정치숙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유신정치숙이 하시모토가 구상하는 신당(新黨)창당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숙생(塾生) 모집과정에서 나타난 엄청난 열기 때문이다.
《월간조선》 3월호에 실린 <일본을 덮친 신당 태풍>에서 언급했듯이, 하시모토 시장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都) 지사는 현재 민주-자민당이란 양당(兩黨)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일본을 개혁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창당 작업은 시간 문제고,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통일할 것인지만이 관건이다.
4월 4일, 도쿄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회동은 ‘제3의 신당’ 창당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주목할 부분은 두 사람의 회동에서 주인공이 하시모토란 점이다. 하시모토가 이시하라를 따라가는 식이 아니라 그 반대 상황인 것이다. 회동내용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에 어떤 결론이 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4월 10일, 이시하라 신당 참여가 유력시되는 국민신당의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는 현재의 집권당인 민주당 의원 40~50명이 곧 탈당할 것이란 정보를 흘렸다.
“5월 말 이시하라 신당이 나오면 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중의원(衆議院)에서의 민주당 과반수도 무너질 것이 전망된다.”
민주당 탈당 리스트 내에는 민주당 중진으로 총리 경선에도 참가했던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도 포함돼 있다.
가메이의 발언에서 유의할 부분은, 탈당할 민주당 의원이 ‘이시하라 신당’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있다. 대부분 ‘하시모토 신당’에 합류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정국의 핵(核)인 하시모토는 현재 21세기판 사카모토 류마(坂本龍馬)처럼 움직이고 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 사카모토 류마는 <선중팔책(船中八策)>이라는 정책비전을 만들었다. 지금 하시모토가 만들고 있는 신당정책의 타이틀도 <선중팔책>이다. 하시모토는 메이지시대 사카모토 류마의 개혁의지와 선구자적 자세를 자신의 이미지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하시모토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질적·양적인 면에서 하시모토에 관한 얘기는 총리 이상의 뉴스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히 하시모토가 주도하는 유신정치숙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현역 衆議員도 입숙 지망했다 탈락
유신정치숙에 입숙(入塾)하려는 정치지망생들의 뜨거운 열기는 정치무관심이 일상화한 일본인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2월 한 달 동안 이뤄진 숙생 모집에 무려 3326명이 지원했다. 오사카는 물론 도쿄·교토·홋카이도 등 전국에서 지원자가 몰려왔다. 여기에는 정치관계자는 물론, 교사·의사·회사원·공무원·대학생, 심지어 영화인·음악가·만화가 등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민주당 현역 중의원(衆議員)과 자민당 전 중의원도 응모했다.
언제부턴가 일본에서 정치가는 ‘할 일이 없거나 입으로 먹고사는 건달’처럼 인식되어 왔다. 한국처럼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결과 하나도 만들지 못하는 무능한 집단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기업은 1류, 관료와 행정은 2류, 정치는 3류’라는 말도 원래 일본에서 나온 것이다. ‘기업과 국민은 1류, 정치는 3류, 정치가는 4류’라는 것이 버블경제 이후 고착화된 일본인의 정치관이다. 결국 국민, 특히 젊은이들의 정치혐오가 만성화됐다. 그런데 도쿄도 아닌, 지방의 정치인 양성소에 3326명이 몰려드는 일대 ‘사변(事變)’이 일어난 것이다.
1년 교육비 12만 엔
하시모토는 당초 400명 정도 응모할 것으로 보고, 이 중 200명을 숙생으로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응모자가 넘치면서 유신정치숙은 1000여 명을 탈락시키고 2025명을 제1기 숙생으로 선발했다.
현역 민주당 의원 등 기성 정치인들은 탈락했다. 정치이념과 비전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철새 정치인들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유신정치숙에서의 커리큘럼은 현장중심의 교육으로 이뤄지고 있다. 관련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얘기를 듣는 식이다. 이시하라는 하시모토와의 회동 때 오사카 정치숙에 가서 직접 강의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숙생을 4개 그룹으로 나눠 교육을 시킨 뒤 총선(總選)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6월 전에 이들을 정치무대에 투입한다는 계획하에 움직이고 있다. 하시모토의 유신정치숙에 가입한 기존의 지방의원 100여 명이 직접 숙의 운영에 참가할 전망이다.
유신정치숙 교육은 공짜가 아니라는 점도 흥미롭다. 1년간 교육비가 1인당 12만 엔(약 165만원)이다. 하시모토는 이들 정치예비군을 위해 한 달에 두 번 정도 직접 강의를 할 계획이다. 정책관련 최고전문가들을 불러 일본정치개혁에 관한 공부와 정책제안서를 만든다는 구상도 하고 있다.
정치무대에 직접 나서는 숙생은 1100명 정도가 될 전망이다. 정치토론이나 정책입안심사를 통해 자질이 부족한 숙생들을 탈락시킨다고 하는데, 숙생의 절반 정도가 탈락될 것이라고 한다.
하시모토는 유신정치숙의 의미를 “새로운 정치가를 탄생시키는, 새로운 검증과정으로서의 도전”이라고 못 박는다.
숙생 가운데 살아남는 1100여 명은 하시모토가 주창하는 유신의 깃발 아래 선거에 직접 나서는 후보자가 되거나 정책전문가·정치관련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로 변신할 것이다. 하시모토 칠드런(Children)인 셈이다. 이들은 정당지원금으로 나서는 기성 정치가와는 달리 자신의 돈과 생각, 네트워크를 가지고 직접 나서서 싸울 것이다. 개별화한 게릴라 형태의 정치운동이 탄생하는 것이다. ‘유신정치숙’이라는 깃발을 들기는 했지만, 모두 개별적으로 현장상황에 맞춰 싸우는 방식이다.
하시모토는 “유신정치숙 1기생 1100여 명 중 약 200명을 중의원으로 당선시키겠다”고 말한다. 이는 전체 중의원의 40%에 해당한다.
東海大志塾과 가와무라정치숙
유신정치숙뿐이 아니다. 아이치현(愛知縣) 지사 오무라 히데아키(大村秀章)가 주도하는 동해대지숙(東海大志塾)과 나고야(名古屋) 시장 가와무라 다카시(河村たかし)가 대표로 있는 가와무라정치숙(河村政治塾) 등이 속속 깃발을 올리고 있다.
4월 12일부터 문을 연 오무라(大村)의 동해대지숙은 도쿄와 오사카를 잇는 허브(hub)이자, 지방시대를 여는 정책대안(代案)공장 역할을 지향한다. 동해대지숙은 중의원에 도전하는 전국 단위의 정치지망생 육성보다는 지방자립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한다. 오무라 지사는 “숙 출신 가운데 정치에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지원에 나서겠다”고 말한다. 그는 “민주당, 자민당 관계자라 하더라도 뜻만 맞으면 연대(連帶)한다”는 입장이다.
동해대지숙은 중앙정치보다는 정책지향적인 숙이라 볼 수 있다. 오무라는 이미 하시모토와의 정치적 연대가 이뤄진 상태이기 때문에 유신정치숙과의 횡적(橫的)인 교류도 강화할 예정이다.
동해대지숙은 응모자를 아이치현 내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입숙(入塾) 희망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응모자를 아이치현 내로 한정했지만, 당초 정원으로 잡은 100명선은 공모 하루 만에 넘어섰다. 최종 선발된 숙생은 678명이었다. 오무라는 “(한번에 2000엔을 내고 참가하는) 사설 공부회(勉强會)이기 때문에, (정치에만 주목하는) 하시모토 시장의 정치숙과는 다른 자유로운 분위기의 정치조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동해대지숙의 구체적인 학습 일정은 잡혀 있지 않다.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전 금융상이 강사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감세(減稅)를 주창하는 나고야 시장 가와무라 다카시의 가와무라정치숙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 가와무라는 3·11 동일본대지진 수습을 위해서는 증세(增稅)도 있을 수 있다는 하시모토와의 의견 차이 때문에 하시모토가 주도하는 신당 참여는 불투명하지만 나름대로의 지명도와 정치적 비전을 바탕으로 가와무라정치숙을 확대하고 있다.
4월 21일부터 시작된 가와무라정치숙은 원래 나고야에 만들 생각이었다. 가와무라가 감세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나고야만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자들도 대거 응모했다. 이렇게 전국적 관심을 받으면서 가와무라는 나고야뿐 아니라 도쿄에도 자신의 정치숙을 열기로 했다. 숙을 중앙과 지방으로 이원화(二元化)한다는 의미이다. 숙생의 정원은 도쿄 200명, 나고야 800명이다. 정치숙 참가비용은 1회에 800엔으로 잡고 있다.
감세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고야만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자들도 응모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전무(全無)하지만, 일본 정치무대에서도 감세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인은 극히 드물다. 미국처럼 무조건적인 감세에 동의하지 않는 곳이 일본이다. 국민이 공짜가 가져다주는 환상의 위험성과 감세가 낳게 될 행정의 비능률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6월 이후로 예상되는 총선거의 최대 이슈가 ‘소비세 인상’으로 갈 것으로 예상되면서 감세를 내세우는 가와무라의 정치이념과 가와무라정치숙의 의미가 새롭게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인 정치환경을 볼 때, 감세정책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인 모두가 공감하는 정치공약이 될 것이다. 가와무라정치숙은 그같은 미래의 상황을 준비하는 ‘정책예비군’이라 볼 수 있다.
‘여성정치가 양성소’로 주목받는 미래정치숙
이른바 간사이(關西)지방으로 불리는, 도쿄 남부의 나고야·교토(京都)·오사카에서 시작된 정치숙 열기는 교토 북쪽에 이어진 시가(滋賀)현으로까지 확대됐다. 2006년부터 시가현 지사로 있는 가타 유키코(嘉田由紀子)가 4월 22일 미래정치숙(未來政治塾)을 개설한 것이다. 그는 ‘정치가 지망생을 위한 정책연구도량(道場)’이란 간판을 내걸고 미래정치숙을 열었다. 그는 원래 300명의 숙생을 모집하려 했지만, 지원자가 몰리자 당초 목표의 두 배 이상인 674명을 뽑았다.
미래정치숙의 숙생은 13세 중학생에서부터 74세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세대(世代)를 뛰어넘는 것이 특징이다. 숙생은 남성 423명, 여성 251명이다. 여성으로서 교육·아동·복지 문제에 주목하는 가타 지사의 이미지에 걸맞게, 여성숙생의 수가 다른 정치숙보다 월등히 높다. 미래정치숙의 연구·교육 내용도 복지·여성·가족·교육과 같은 분야에 중점을 둘 예정이다.
미래정치숙은 시가현에서 직접 교육을 받는 현장숙과,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숙으로 나뉜다. 현장숙 숙생이 217명, 디지털숙 숙생이 457명이다. 미래정치숙은 일본 TV저널리즘의 최고봉 중 한명인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總一朗)를 대표강사로 내세웠다.
가타 지사는 “미래정치숙은 정치가 양성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서 “나라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유신정치숙과 달리, 지방의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고 청년·여성·노인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장려하기 위한 곳”이라고 밝혔다.
시가현은 일본 내륙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가타 지사도 큰 정치적 야망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미래정치숙이 유신정치숙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가타 지사와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이 연합한다면 도쿄 주도의 기성정치에 또 다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래정치숙은 최소한 ‘여성정치가 양성소’로서의 위상과 권위는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塾’이란 무엇인가?
한국인들은 일본의 정치숙이라고 하면, 현 총리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등을 배출한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유신정치숙·동해대지숙·가와무라정치숙 등이 모두 정치단체란 의미에서 31명의 중의원을 배출한 마쓰시타정경숙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옳고, 부분적으로는 틀리다. 원래 일본에서 ‘숙’이란 크게 네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고등학교나 대학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숙이다. 게이오(慶應)대학의 원래 이름인 게이오키주쿠(慶應義塾)대학이 그 예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구한말(舊韓末) 문을 연 한국의 사학(私學)에서도 ‘의숙(義塾)’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휘문의숙·양정의숙 등).
둘째,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학원’의 의미로 통용되는, 초·중·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공부방으로서의 숙이 있다.
셋째, 학자나 지식인이 대학에서만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가르치는 형태의 학습법을 말하기도 한다. 흔히 가숙(家塾)이란 말로 통용된다.
넷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전, 즉 에도(江戶)시대 말기부터 시작된 유학(儒學)·의학·군사학·외국학 관련 전문가가 자신의 집에서 가르치는 교육방법을 말한다. 흔히 사숙(私塾)이란 말로 표현된다. 가숙과 다른 것은 수학(修學)내용이 한 분야만이 아니라는 점과 대학과 같은 기존 교육기관과 무관하다는 데 있다. 가숙보다 사숙에 참가하는 숙생이, 돈이나 권력과 무관한 일반계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마쓰시타정경숙·유신정치숙·동해대지숙·가와무라정치숙은 네 번째 의미를 갖고 있는 사숙으로서의 집단이다. 자민당의 실력자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주도하는 오자와정치숙(小澤政治塾)도 마찬가지이다.
숙이라고 해서 모두 ‘정치숙’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경영컨설턴트이자 기업가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가 주도하는 일신숙(一新塾)의 경우 정치보다 경제개혁에 주목하는 사숙이다. 정치와 경제를 따로 분리한다는 것이 어렵겠지만, ‘사숙=정치숙’이란 공식은 잘못된 것이다.
란가쿠와 요가쿠
일본 최초의 사숙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사숙이란 것이 도쿠가와 막부(幕府)의 통제에서 벗어난 임의의 교육제도이기 때문이다. 사숙은 창시자인 숙주(塾主)의 독자적인 이념과 경영방식에 의해 유지될 뿐이다. 특별히 교육기관에 등록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과 예술을 집에서 가르치는 가정교사와 같은 것이다.
근대적 의미의 사숙은 막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후 일본은 기독교와 유럽문화의 전파(傳播)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됐다. 도쿠가와 막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쇄국(鎖國)정책을 폈지만, 일본 지식인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무역을 하면서 유럽문화의 우수성을 실감했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어학·천문학·의학·물리학·측정학·수학 등 서양 학문을 당시 일본인들은 ‘란가쿠(蘭學)’, 즉 ‘네덜란드학(學)’이라고 통칭했다. 막부의 금지령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일본인의 호기심과 관심을 막지는 못했다.
란가쿠에 이어, 독일·프랑스·미국으로부터 ‘요가쿠(洋學)’가 들어오면서 양적·질적 면에서 사숙의 영역이 확대됐다. 막부가 제공하는 중국식 세계관에 기초한 커리큘럼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닥치면서 새로운 세계를 배우려는 젊은이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당시 막부가 인정한 공식적인 교육기관인 ‘한코우(藩校)’는 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립교육기관이 사무라이나 귀족들에게 한정되면서 생겨난 것이 사숙인 셈이다.
‘데키주쿠(適塾)’는 19세기 초 일본이 대변혁기에 들어설 무렵 생겨난 사숙이다. 당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선구자적 인재를 양성해 낸 사숙의 최고봉이다.
오가타 고안(緖方洪庵)이 1838년 설립한 데키주쿠는 원래 ‘란가쿠주쿠(蘭學塾)’라는 이름으로 오사카 가와라마치(瓦町)에서 시작됐다. 이 데키주쿠 건물은 현재 역사유물로 오사카대학이 관리하고 있다. 란주쿠는 후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보다 4년 먼저 출발했다. 새로운 세계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들끓던 19세기 중엽, 일본 전역에는 8000여 개의 크고 작은 사숙이 있었다고 한다.
사무라이 출신으로 의학자이자 네덜란드어에 능통한 학자였던 오가타 고안은 어릴 때 천연두에 걸린 이후 몸이 약했다.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던 중 란가쿠에 빠진 오가타는 네덜란드 의학서적을 통해 천연두 예방법을 배워 일본 최초로 천연두 접종을 시작했다. 일본 최초의 병리(病理)전문서적인 《병학통론(病學通論)》도 저술했다. 그는 콜레라 예방과 치료에 관한 연구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오사카의과대학은 오가타 고안의 의학강좌를 모태(母胎)로 설립됐다.
후쿠자와 유키치 배출한 데키주쿠
오가타는 제자들을 모아 네덜란드어를 가르치고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신문명을 함께 나누기 위해 데키주쿠를 설립했다.
데키주쿠에서 오가타의 가르침을 받은 636명의 면면을 보면, 데키주쿠는 가히 ‘메이지시대의 하버드’라고 할 만한 19세기 동양 최고의 인재양성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유신에 직접 참여하고 이후 밀어닥친 근대화작업의 선두에 섰던 인물 중 상당수가 데키주쿠 출신이다.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인 게이오(慶應)대학을 설립한 문호(文豪)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일본 적십자사 초대 총재 사노 쓰네타미(佐野常民), 철인(鐵人) 아톰을 그린 만화가 데쓰카 오사무의 증조부인 데쓰카 료센(手塚良仙), 일본 육군 초대 군의(軍醫)사령관 이시자카 이칸(石阪惟寬), 주한공사와 학습원(일본 황족교육기관) 총장을 지낸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치로(大村益次郞) 등이 데키주쿠 출신이다.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만들어낸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 버금가는 근대화의 주역들을 만든 곳이 바로 데키주쿠이다.
데키주쿠가 설립 30년 만인 1868년 문을 닫았다. 오가타 고안이 숨진 지 1년 뒤이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일본근대화에 불을 지핀 뒤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1853년 7월 8일 도쿄만(灣)에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인도함대 소속 군함 4척이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일본은 개방에 반대하던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이행했다. 흑선(黑船·도쿠가와 막부 말기 일본에 온 서양 선박을 이르던 말)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서양식 근대화가 필요했고, 결국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통해 내부의 모순을 한순간에 해결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학계 일부에서는 페리의 ‘흑선’이 오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갔을 것이고, 설령 메이지유신이 없었더라도 일본의 근대화는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세기 들어 막부가 가진 한계와 모순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자각이 사숙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막부 타도와 일본 근대화는 이미 시동이 걸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데키주쿠와 쇼카손주쿠와 같은 사숙에서의 풀뿌리 계몽운동을 일본변혁과 근대화의 동인(動因)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는 마쓰시타정경숙 15기생이다. 1994년 4월에 입숙해 5년 가까이 공부하는 동안, 일본에 관한 남다른 경험을 쌓을 수가 있었다. 일본이란 나라에서의 ‘숙’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공부는 입숙 이후 마지막까지 이어진 필자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이유는 한국에서 정경숙을 만들고 싶어하는 수많은 한국 유력자들의 요청과 염원 때문이었다.
‘塾’은 ‘帝王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필자의 경우 ‘일본을 보다 정확히 알고 싶다’는 단순한 열망 때문에 입숙했지만, 한국 지식인들 가운데는 ‘큰 그림’ 속에서 정경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한국판 마쓰시타정경숙’을 만들어 세계와 국가를 움직이는 정치인 양성소, 한국이 가진 모순과 문제점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미래의 주역을 창조하는 인재사관학교를 만들고 싶어한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큰 그림’은 ‘큰 그릇’에서 탄생된다. 작은 그릇이 아무리 요동을 쳐도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설령 그렸다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마쓰시타정경숙, 나아가 하시모토의 유신정치숙과, 최근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각종 정치 관련 숙은 큰 그림이 아닌 ‘작은 그림’ 또는 ‘소박한 그림’이란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접근해야 ‘정치인 사관학교’로서의 기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큰 그림도 좋지만,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그림은 작고 소박하게 표현된다. 테니스 라켓 잡는 모습과 골프 스윙하는 모습, 볼링공을 닦는 모습만 봐도 어느 정도 실력인지를 알 수 있다. 손가락 데생부터 배우는 자세로 숙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메이지시대에 나타난 숙은 결과적으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인재를 만들어 공급했지만, 처음부터 제왕학(帝王學)이나 ‘치국(治國)의 방략(方略)’을 가르치는 기관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오사카의 데키주쿠는 국가를 움직이는 정치인이나 군인, 대교육자·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다. 15년 전 오사카에 들렀을 때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는 데키주쿠 건물을 방문한 적이 있다. 데키주쿠는 네덜란드어 사전을 편찬하고, 서양의 선진(先進) 예방의학과 복잡한 화학실험을 주로 했던 실무적·실용적 차원의 공부방에 불과했다. 숙식·공부·토론 공간의 크기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협소했다. 겨울에도 난방이 없고, 음식도 최소한으로 먹으면서 견디는 마치 극기(克己)훈련소 같은 곳이 데키주쿠이다.
‘큰 그림’은 없다
필자의 마쓰시타정경숙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하시모토의 유신정치숙이나 다른 정치 관련 숙들의 커리큘럼도 ‘큰 그림’과 무관한 것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국제정치학·경제학·군사학·당선전략·웅변술과 같은, 정치인이 되기 위한 노하우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인, 국가와 사회에 유익하고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작은 라면집 벽면을 보면, 반드시 어딘가에 짧은 메시지를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음식에 관한 원칙이나, 주방장이 추구하는 미식(美食)의 가치에 관한 글이다. 하시모토가 2000여 명의 유신정치숙 숙생들 앞에서 강연할 내용도 감히 ‘단언컨대’ 일본인으로서의 사명과 의무에 대한 원칙적이고도 기본적인 얘기가 될 것이다. 정치가로 당선되기 위한 전략전술, 좌우(左右) 이념, 주변을 무시하는 오만함이나 천박함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될 것이다. 숙의 분위기는 다소 엄숙한 느낌마저 들 것이다.
필자는 지가사키시(茅ヶ崎市)에 있는 마쓰시타정경숙에서 공부하는 동안 평일 아침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일과로 시간을 보냈다. 마쓰시타정경숙을 만든 숙주(塾主)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만든 5개에 이르는 숙의 설립취지(塾是)와, 숙생이 따라야 할 5개의 의무(塾訓)에 관한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먼저 인간이 된 뒤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것이다. 이를 매일 읽고 또 복창한다. 역사학 중국고전 정치학 경제학 문화학 미래학은 그 이후에 천천히 배운다.
이케바나에 얽힌 기억
정경숙에 머무는 동안 배운 것 하나로 ‘이케바나(活花)’에 관한 것이 인상 깊다. 이케바나 예법(禮法)에 따른 꽃장식에 관한 노하우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독창적이고도 나만의 색깔을 나타낼 수 있는 탁월한 이케바나의 노하우는 처음부터 아예 없다. 꽃의 각도, 색의 조화, 화병과의 화음, 꽃의 수, 줄기의 길이, 계절별 꽃장식….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케바나 작법(作法)을 얼마나 충실히 따라 하는가가, 수작(秀作)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길이 면에서의 화병과 꽃의 비율은 1대2, 꽃의 각도는 벽을 뒤로 한 단수(單數)의 꽃일 경우 벽에 대해 30도를 유지하고 벽 앞쪽으로는 45도 틀어져서 장식해야 한다, 꽃이 얼마나 많고 풍성한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송이 꽃이라도 최선의 미(美)를 나타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등… . 여기서 개개인의 창의력이나 색깔은 중요치 않다.
100% 똑같이 재현하는가를 실력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케바나만이 아니다. 다도(茶道) 검도(劍道), 그리고 향도(香道)도 마찬가지다. 그냥 똑같은 동작과 모습, 느낌을 재현하는 것이 공부다.
필자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런 과정을 참아 내기 어려울 것이다. 매일 연습을 한다 해도, 검도를 시작해서 신검(新劍)을 잡기까지의 기간은 최소한 5년이다. 죽검(竹劍)·목검(木劍)으로 매일 기합과 함께 내려치기를 반복해야 한다. “먼저 인간이 된 뒤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말을 반복하고 복창한다.
필자에게 “정경숙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배운 것이 별로 없다. 매일 청소하고 5개의 숙시(塾是)와, 5개의 숙훈(塾訓)을 반복하는 것이 교육 내용의 절반 이상이다. 하시모토의 유신정치숙이나 동해대지숙·가와무라정치숙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숙’은 스마트한 머리나 언변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자세와 기본을 가르치는 곳이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는 곳
일본역사 속에서 ‘숙’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 중 하나로 ‘함께(一緖)’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숙은 스승이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스승과 학생이 서로 배우는 곳이다. 사실 스승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스승은 발제(發題)를 하는 정도에 그치고, 토론과 합의를 통해 진실과 진리에 도달한다. 머리에 집어넣는 교육이 아니라, 몸과 가슴으로 익혀 가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이다.
아침 6시30분. 마쓰시타정경숙의 하루는 기상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아침체조를 하러 본관 앞에 모두 모인다. 이어 곧바로 마당청소에 들어간다. 스승·학생·방문객 모두가 참여한다. 예외가 없다.
데키주쿠의 숙주 오가타도 숙생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함께 공부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네덜란드 사전과 종두법을 개발해 냈다. 토론하고 또 토론하면서 하루 종일 숙생들과 생활했다.
마쓰시타정경숙 직원(塾員)들도 모두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생활한다. 함께 일어나고 식사하고 생활하면서 배운다. 서로를 통해 배우고 익히지만,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을 공유(共有)한다는 의식도 가져야만 한다.
마쓰시타정경숙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항상 몸과 마음을 추슬러 조심하고, 선후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언행(言行)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요시다 쇼인이 죽은 후 쇼카손주쿠를 이어받은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은 숙 출신자 중 일부가 메이지정부에 반대해 난(亂)을 일으키자 할복(割腹)자살을 했다. 스승과 숙생이 하나로 엮어진 일본식 집단의식의 현장이 ‘숙’인 것이다.
유신정치숙의 운영위원 중 전직 요코하마(橫浜) 시장이자 마쓰시타정경숙 10기생인 나가타 히로시(中田宏)라는 인물이 있다. 나가타는 10년 전 요코하마 시장 재직 당시 수상 공선제(公選制·총리를 국민의 직선으로 선출하는 제도)를 주장하면서 ‘일본의 케네디’로 불렸던 일본정치의 풍운아다.
나가타와 하시모토는 출신배경이나 정치적 비전이란 측면에서 비슷하다.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도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나가타는 하시모토가 오사카 시장으로 당선된 후 한동안 오사카 부(副)시장 물망에 올랐다. 전직 시장이 부시장을 맡는다는 것이 격에 맞지는 않다. 하지만 오사카를 일본개혁의 중심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이 방안은 심도 있게 논의됐다. 현재 나가타는 유신정치숙의 대체적인 교과내용과 기본철학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쓰시타정경숙의 교육방법이 유신정치숙에 접목(接木)될 것이란 점을 예상할 수 있다.
변화의 바람은 남쪽에서 분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유신정치숙은 마쓰시타정경숙 출신 의원들이 그러하듯, 민족주의 내지 우익(右翼) 성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는 ‘숙’이 전략전술적 차원의 정치가 양성학교가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자세를 다지는 교육을 주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일본문화를 강조한다는 것은 우익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는 다(多)민족·다국가에 기초한 세계관이 아닌 1민족 1국가관을 신당의 이념으로 할 방침이다. 하시모토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하시모토는 교육에 대해 초·중등 과정의 경우 기초부터 다져야 하며 일정 수준이 안 되는 학생은 졸업을 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모두가 스타’인 미국식 교육이 아닌, ‘1등과 2등을 확실히 구분하는 메이지시대의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하시모토의 생각이다. 이런 교육관은 유신정치숙의 교육과정에도 투영될 것이다.
유신정치숙 등 잇따라 출범하는 일본의 정치숙들이 도쿠가와 막부 말기 위기의 일본을 구했던 ‘숙’들처럼 21세기판 인재양성소 역할을 할지, 아니면 지난 20년간에 이어 또다시 실패하는 단발성(單發性) 정치실험극으로 끝날지는 6월 이후 총선에서 결판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 정치의 무대가 도쿄에서 오사카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오사카 한복판에 자리 잡은 170여년 전의 데키주쿠와, 오사카 출신으로 마쓰시타정경숙을 세운 숙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그러했듯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희망의 바람은 항상 일본의 남쪽에서 불어 왔다.⊙
과연 그럴까? 과연 일본이란 나라가 20세기 한순간 반짝 빛난 ‘어제의 강국’으로 전락하고 만 것일까?
하지만 ‘한국 밖’으로 나와서 보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다. 1980년대 거품경제 당시의 ‘일본신화(神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여전히 국제무대에서 나름의 위상과 권위를 갖고 있는 나라다.
지난 3월부터 워싱턴 스미소니언 아시아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한일(韓日) 문화제를 비교해 보자.
3월 11일부터 6월 13일까지 열리는 한국영화제에 들러 보면, 300여 객석 가운데 관람객 수가 평균 수십 명을 넘지 못한다. 필자가 찾았던 평일에는 ‘단 한 명’만이 외롭게 앉아서 관람하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서 일본의 호쿠사이(北齋) 판화전과 일본불교 탱화 전시회도 동시에 열리고 있다. 관람객들로 터져 나간다. 관심도나 참여자의 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내일의 일본 모습을 증명해 주는 대졸(大卒)취업률을 보자. 2011년 7월 발표된 정부통계를 보면 2011년 봄에 졸업한 대학생 중 91.9%가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대학원 진학 포함). 같은 기간 한국의 경우 대략 70%가 직업을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군 입대, 대학원 진학 포함). 90%대에 이르는 일본 대학생의 취업률은 1%포인트 범위 내에서의 차가 있을 뿐 거의 매년 비슷하다. 청년실업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지만, 90%대의 대졸취업률을 자랑하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1시간에 1000엔을 주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지천에 깔린 나라도 일본이다.
군사력을 살펴보자. 지난해 중국이 항공모함을 건조하면서 아시아 전체를 위협한다는 말이 들린다. 일본은 어떨까? ‘축소지향적인 일본’은 대형 항공모함이 아닌 이지스군함 10척을 갖고 있다. 양(量)이 아니라 질(質)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력이다. 흔히들 잊고 있는데,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미 1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했던 나라다. 미드웨이 해전(海戰)에서 패하지 않았더라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할 정도의 무력(武力)을 보유했던 나라다. 그게 벌써 67년 전의 얘기이다.
2007년 11월 중국 최신예 군함 선전(深?)이 전후(戰後) 처음으로 일본에 들렀을 때, 일본 군사전문가들은 선전에 승선해 중국 해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면밀히 살폈다. 결론은 1개 이지스함대만으로 선전 1000척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중국은 해전(海戰)을 육전(陸戰)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당시 일본 군사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제2의 사카모토 류마’ 하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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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치숙을 개설해 정치혁명을 꿈꾸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왼쪽)은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지사 사카모토 류마(오른쪽)에 비견된다. |
‘유신’이라는 말은 일본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일본을 단숨에 구미(歐美)열강 수준으로 끌어올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관한 향수(鄕愁) 때문이다. 그런 일본인들에게 ‘숙(塾·일본어 발음으로는 ‘주쿠’)’이란 말은 ‘메이지유신을 이끌었던 인재의 산실(産室)’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유신’과 ‘숙’이 하나로 이어진 ‘유신정치숙’은 일본정치의 풍운아(風雲兒) 하시모토가 구상한 정치가 양성소이자, 일본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취지에서 만든 정치단체이다.
유신정치숙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유신정치숙이 하시모토가 구상하는 신당(新黨)창당의 주역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숙생(塾生) 모집과정에서 나타난 엄청난 열기 때문이다.
《월간조선》 3월호에 실린 <일본을 덮친 신당 태풍>에서 언급했듯이, 하시모토 시장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都) 지사는 현재 민주-자민당이란 양당(兩黨)체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일본을 개혁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창당 작업은 시간 문제고,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통일할 것인지만이 관건이다.
4월 4일, 도쿄에서 이뤄진 두 사람의 회동은 ‘제3의 신당’ 창당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주목할 부분은 두 사람의 회동에서 주인공이 하시모토란 점이다. 하시모토가 이시하라를 따라가는 식이 아니라 그 반대 상황인 것이다. 회동내용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에 어떤 결론이 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4월 10일, 이시하라 신당 참여가 유력시되는 국민신당의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는 현재의 집권당인 민주당 의원 40~50명이 곧 탈당할 것이란 정보를 흘렸다.
“5월 말 이시하라 신당이 나오면 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중의원(衆議院)에서의 민주당 과반수도 무너질 것이 전망된다.”
민주당 탈당 리스트 내에는 민주당 중진으로 총리 경선에도 참가했던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도 포함돼 있다.
가메이의 발언에서 유의할 부분은, 탈당할 민주당 의원이 ‘이시하라 신당’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점에 있다. 대부분 ‘하시모토 신당’에 합류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정국의 핵(核)인 하시모토는 현재 21세기판 사카모토 류마(坂本龍馬)처럼 움직이고 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 사카모토 류마는 <선중팔책(船中八策)>이라는 정책비전을 만들었다. 지금 하시모토가 만들고 있는 신당정책의 타이틀도 <선중팔책>이다. 하시모토는 메이지시대 사카모토 류마의 개혁의지와 선구자적 자세를 자신의 이미지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하시모토의 인기는 높아지고 있다. 질적·양적인 면에서 하시모토에 관한 얘기는 총리 이상의 뉴스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히 하시모토가 주도하는 유신정치숙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현역 衆議員도 입숙 지망했다 탈락
유신정치숙에 입숙(入塾)하려는 정치지망생들의 뜨거운 열기는 정치무관심이 일상화한 일본인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2월 한 달 동안 이뤄진 숙생 모집에 무려 3326명이 지원했다. 오사카는 물론 도쿄·교토·홋카이도 등 전국에서 지원자가 몰려왔다. 여기에는 정치관계자는 물론, 교사·의사·회사원·공무원·대학생, 심지어 영화인·음악가·만화가 등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민주당 현역 중의원(衆議員)과 자민당 전 중의원도 응모했다.
언제부턴가 일본에서 정치가는 ‘할 일이 없거나 입으로 먹고사는 건달’처럼 인식되어 왔다. 한국처럼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결과 하나도 만들지 못하는 무능한 집단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기업은 1류, 관료와 행정은 2류, 정치는 3류’라는 말도 원래 일본에서 나온 것이다. ‘기업과 국민은 1류, 정치는 3류, 정치가는 4류’라는 것이 버블경제 이후 고착화된 일본인의 정치관이다. 결국 국민, 특히 젊은이들의 정치혐오가 만성화됐다. 그런데 도쿄도 아닌, 지방의 정치인 양성소에 3326명이 몰려드는 일대 ‘사변(事變)’이 일어난 것이다.
1년 교육비 12만 엔
하시모토는 당초 400명 정도 응모할 것으로 보고, 이 중 200명을 숙생으로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응모자가 넘치면서 유신정치숙은 1000여 명을 탈락시키고 2025명을 제1기 숙생으로 선발했다.
현역 민주당 의원 등 기성 정치인들은 탈락했다. 정치이념과 비전이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철새 정치인들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유신정치숙에서의 커리큘럼은 현장중심의 교육으로 이뤄지고 있다. 관련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해 얘기를 듣는 식이다. 이시하라는 하시모토와의 회동 때 오사카 정치숙에 가서 직접 강의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숙생을 4개 그룹으로 나눠 교육을 시킨 뒤 총선(總選)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6월 전에 이들을 정치무대에 투입한다는 계획하에 움직이고 있다. 하시모토의 유신정치숙에 가입한 기존의 지방의원 100여 명이 직접 숙의 운영에 참가할 전망이다.
유신정치숙 교육은 공짜가 아니라는 점도 흥미롭다. 1년간 교육비가 1인당 12만 엔(약 165만원)이다. 하시모토는 이들 정치예비군을 위해 한 달에 두 번 정도 직접 강의를 할 계획이다. 정책관련 최고전문가들을 불러 일본정치개혁에 관한 공부와 정책제안서를 만든다는 구상도 하고 있다.
정치무대에 직접 나서는 숙생은 1100명 정도가 될 전망이다. 정치토론이나 정책입안심사를 통해 자질이 부족한 숙생들을 탈락시킨다고 하는데, 숙생의 절반 정도가 탈락될 것이라고 한다.
하시모토는 유신정치숙의 의미를 “새로운 정치가를 탄생시키는, 새로운 검증과정으로서의 도전”이라고 못 박는다.
숙생 가운데 살아남는 1100여 명은 하시모토가 주창하는 유신의 깃발 아래 선거에 직접 나서는 후보자가 되거나 정책전문가·정치관련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로 변신할 것이다. 하시모토 칠드런(Children)인 셈이다. 이들은 정당지원금으로 나서는 기성 정치가와는 달리 자신의 돈과 생각, 네트워크를 가지고 직접 나서서 싸울 것이다. 개별화한 게릴라 형태의 정치운동이 탄생하는 것이다. ‘유신정치숙’이라는 깃발을 들기는 했지만, 모두 개별적으로 현장상황에 맞춰 싸우는 방식이다.
하시모토는 “유신정치숙 1기생 1100여 명 중 약 200명을 중의원으로 당선시키겠다”고 말한다. 이는 전체 중의원의 40%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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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 시장은 가와무라정치숙을 만들었다. |
4월 12일부터 문을 연 오무라(大村)의 동해대지숙은 도쿄와 오사카를 잇는 허브(hub)이자, 지방시대를 여는 정책대안(代案)공장 역할을 지향한다. 동해대지숙은 중의원에 도전하는 전국 단위의 정치지망생 육성보다는 지방자립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한다. 오무라 지사는 “숙 출신 가운데 정치에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지원에 나서겠다”고 말한다. 그는 “민주당, 자민당 관계자라 하더라도 뜻만 맞으면 연대(連帶)한다”는 입장이다.
동해대지숙은 중앙정치보다는 정책지향적인 숙이라 볼 수 있다. 오무라는 이미 하시모토와의 정치적 연대가 이뤄진 상태이기 때문에 유신정치숙과의 횡적(橫的)인 교류도 강화할 예정이다.
동해대지숙은 응모자를 아이치현 내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입숙(入塾) 희망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응모자를 아이치현 내로 한정했지만, 당초 정원으로 잡은 100명선은 공모 하루 만에 넘어섰다. 최종 선발된 숙생은 678명이었다. 오무라는 “(한번에 2000엔을 내고 참가하는) 사설 공부회(勉强會)이기 때문에, (정치에만 주목하는) 하시모토 시장의 정치숙과는 다른 자유로운 분위기의 정치조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동해대지숙의 구체적인 학습 일정은 잡혀 있지 않다.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전 금융상이 강사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감세(減稅)를 주창하는 나고야 시장 가와무라 다카시의 가와무라정치숙도 크게 주목받고 있다. 가와무라는 3·11 동일본대지진 수습을 위해서는 증세(增稅)도 있을 수 있다는 하시모토와의 의견 차이 때문에 하시모토가 주도하는 신당 참여는 불투명하지만 나름대로의 지명도와 정치적 비전을 바탕으로 가와무라정치숙을 확대하고 있다.
4월 21일부터 시작된 가와무라정치숙은 원래 나고야에 만들 생각이었다. 가와무라가 감세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나고야만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자들도 대거 응모했다. 이렇게 전국적 관심을 받으면서 가와무라는 나고야뿐 아니라 도쿄에도 자신의 정치숙을 열기로 했다. 숙을 중앙과 지방으로 이원화(二元化)한다는 의미이다. 숙생의 정원은 도쿄 200명, 나고야 800명이다. 정치숙 참가비용은 1회에 800엔으로 잡고 있다.
감세를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고야만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자들도 응모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아직 전무(全無)하지만, 일본 정치무대에서도 감세를 공약으로 내세우는 정치인은 극히 드물다. 미국처럼 무조건적인 감세에 동의하지 않는 곳이 일본이다. 국민이 공짜가 가져다주는 환상의 위험성과 감세가 낳게 될 행정의 비능률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6월 이후로 예상되는 총선거의 최대 이슈가 ‘소비세 인상’으로 갈 것으로 예상되면서 감세를 내세우는 가와무라의 정치이념과 가와무라정치숙의 의미가 새롭게 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인 정치환경을 볼 때, 감세정책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일본인 모두가 공감하는 정치공약이 될 것이다. 가와무라정치숙은 그같은 미래의 상황을 준비하는 ‘정책예비군’이라 볼 수 있다.
‘여성정치가 양성소’로 주목받는 미래정치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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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정치숙을 개설한 가타 유키코 사가현 지사. |
미래정치숙의 숙생은 13세 중학생에서부터 74세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세대(世代)를 뛰어넘는 것이 특징이다. 숙생은 남성 423명, 여성 251명이다. 여성으로서 교육·아동·복지 문제에 주목하는 가타 지사의 이미지에 걸맞게, 여성숙생의 수가 다른 정치숙보다 월등히 높다. 미래정치숙의 연구·교육 내용도 복지·여성·가족·교육과 같은 분야에 중점을 둘 예정이다.
미래정치숙은 시가현에서 직접 교육을 받는 현장숙과,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숙으로 나뉜다. 현장숙 숙생이 217명, 디지털숙 숙생이 457명이다. 미래정치숙은 일본 TV저널리즘의 최고봉 중 한명인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總一朗)를 대표강사로 내세웠다.
가타 지사는 “미래정치숙은 정치가 양성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서 “나라 전체를 변화시키려는 유신정치숙과 달리, 지방의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고 청년·여성·노인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장려하기 위한 곳”이라고 밝혔다.
시가현은 일본 내륙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가타 지사도 큰 정치적 야망을 갖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미래정치숙이 유신정치숙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가타 지사와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이 연합한다면 도쿄 주도의 기성정치에 또 다른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래정치숙은 최소한 ‘여성정치가 양성소’로서의 위상과 권위는 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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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정경숙 출신 첫 총리인 노다 요시히코. |
첫째, 고등학교나 대학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숙이다. 게이오(慶應)대학의 원래 이름인 게이오키주쿠(慶應義塾)대학이 그 예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구한말(舊韓末) 문을 연 한국의 사학(私學)에서도 ‘의숙(義塾)’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휘문의숙·양정의숙 등).
둘째,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학원’의 의미로 통용되는, 초·중·고등학교 학생을 위한 공부방으로서의 숙이 있다.
셋째, 학자나 지식인이 대학에서만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가르치는 형태의 학습법을 말하기도 한다. 흔히 가숙(家塾)이란 말로 통용된다.
넷째,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전, 즉 에도(江戶)시대 말기부터 시작된 유학(儒學)·의학·군사학·외국학 관련 전문가가 자신의 집에서 가르치는 교육방법을 말한다. 흔히 사숙(私塾)이란 말로 표현된다. 가숙과 다른 것은 수학(修學)내용이 한 분야만이 아니라는 점과 대학과 같은 기존 교육기관과 무관하다는 데 있다. 가숙보다 사숙에 참가하는 숙생이, 돈이나 권력과 무관한 일반계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마쓰시타정경숙·유신정치숙·동해대지숙·가와무라정치숙은 네 번째 의미를 갖고 있는 사숙으로서의 집단이다. 자민당의 실력자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주도하는 오자와정치숙(小澤政治塾)도 마찬가지이다.
숙이라고 해서 모두 ‘정치숙’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경영컨설턴트이자 기업가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가 주도하는 일신숙(一新塾)의 경우 정치보다 경제개혁에 주목하는 사숙이다. 정치와 경제를 따로 분리한다는 것이 어렵겠지만, ‘사숙=정치숙’이란 공식은 잘못된 것이다.
란가쿠와 요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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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 있는 데키주쿠(適塾) 건물과 데키주쿠 창설자 오가타 고안(원안). |
근대적 의미의 사숙은 막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후 일본은 기독교와 유럽문화의 전파(傳播)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됐다. 도쿠가와 막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쇄국(鎖國)정책을 폈지만, 일본 지식인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네덜란드와 제한적인 무역을 하면서 유럽문화의 우수성을 실감했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어학·천문학·의학·물리학·측정학·수학 등 서양 학문을 당시 일본인들은 ‘란가쿠(蘭學)’, 즉 ‘네덜란드학(學)’이라고 통칭했다. 막부의 금지령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일본인의 호기심과 관심을 막지는 못했다.
란가쿠에 이어, 독일·프랑스·미국으로부터 ‘요가쿠(洋學)’가 들어오면서 양적·질적 면에서 사숙의 영역이 확대됐다. 막부가 제공하는 중국식 세계관에 기초한 커리큘럼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닥치면서 새로운 세계를 배우려는 젊은이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당시 막부가 인정한 공식적인 교육기관인 ‘한코우(藩校)’는 서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립교육기관이 사무라이나 귀족들에게 한정되면서 생겨난 것이 사숙인 셈이다.
‘데키주쿠(適塾)’는 19세기 초 일본이 대변혁기에 들어설 무렵 생겨난 사숙이다. 당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선구자적 인재를 양성해 낸 사숙의 최고봉이다.
오가타 고안(緖方洪庵)이 1838년 설립한 데키주쿠는 원래 ‘란가쿠주쿠(蘭學塾)’라는 이름으로 오사카 가와라마치(瓦町)에서 시작됐다. 이 데키주쿠 건물은 현재 역사유물로 오사카대학이 관리하고 있다. 란주쿠는 후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보다 4년 먼저 출발했다. 새로운 세계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들끓던 19세기 중엽, 일본 전역에는 8000여 개의 크고 작은 사숙이 있었다고 한다.
사무라이 출신으로 의학자이자 네덜란드어에 능통한 학자였던 오가타 고안은 어릴 때 천연두에 걸린 이후 몸이 약했다.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던 중 란가쿠에 빠진 오가타는 네덜란드 의학서적을 통해 천연두 예방법을 배워 일본 최초로 천연두 접종을 시작했다. 일본 최초의 병리(病理)전문서적인 《병학통론(病學通論)》도 저술했다. 그는 콜레라 예방과 치료에 관한 연구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오사카의과대학은 오가타 고안의 의학강좌를 모태(母胎)로 설립됐다.
후쿠자와 유키치 배출한 데키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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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키주쿠 출신인 게이오대학 창립자 후쿠자와 유키치. |
데키주쿠에서 오가타의 가르침을 받은 636명의 면면을 보면, 데키주쿠는 가히 ‘메이지시대의 하버드’라고 할 만한 19세기 동양 최고의 인재양성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유신에 직접 참여하고 이후 밀어닥친 근대화작업의 선두에 섰던 인물 중 상당수가 데키주쿠 출신이다.
일본 최초의 사립대학인 게이오(慶應)대학을 설립한 문호(文豪)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일본 적십자사 초대 총재 사노 쓰네타미(佐野常民), 철인(鐵人) 아톰을 그린 만화가 데쓰카 오사무의 증조부인 데쓰카 료센(手塚良仙), 일본 육군 초대 군의(軍醫)사령관 이시자카 이칸(石阪惟寬), 주한공사와 학습원(일본 황족교육기관) 총장을 지낸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치로(大村益次郞) 등이 데키주쿠 출신이다.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만들어낸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 버금가는 근대화의 주역들을 만든 곳이 바로 데키주쿠이다.
데키주쿠가 설립 30년 만인 1868년 문을 닫았다. 오가타 고안이 숨진 지 1년 뒤이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일본근대화에 불을 지핀 뒤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다.
일본의 근대화는 1853년 7월 8일 도쿄만(灣)에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동인도함대 소속 군함 4척이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후 일본은 개방에 반대하던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으로 이행했다. 흑선(黑船·도쿠가와 막부 말기 일본에 온 서양 선박을 이르던 말)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서양식 근대화가 필요했고, 결국 천황(天皇)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통해 내부의 모순을 한순간에 해결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학계 일부에서는 페리의 ‘흑선’이 오지 않았더라도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갔을 것이고, 설령 메이지유신이 없었더라도 일본의 근대화는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세기 들어 막부가 가진 한계와 모순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자각이 사숙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막부 타도와 일본 근대화는 이미 시동이 걸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데키주쿠와 쇼카손주쿠와 같은 사숙에서의 풀뿌리 계몽운동을 일본변혁과 근대화의 동인(動因)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는 마쓰시타정경숙 15기생이다. 1994년 4월에 입숙해 5년 가까이 공부하는 동안, 일본에 관한 남다른 경험을 쌓을 수가 있었다. 일본이란 나라에서의 ‘숙’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공부는 입숙 이후 마지막까지 이어진 필자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이유는 한국에서 정경숙을 만들고 싶어하는 수많은 한국 유력자들의 요청과 염원 때문이었다.
‘塾’은 ‘帝王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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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쇼인(원안)이 만든 쇼카손주쿠. |
상식적인 얘기지만 ‘큰 그림’은 ‘큰 그릇’에서 탄생된다. 작은 그릇이 아무리 요동을 쳐도 큰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설령 그렸다 해도 오래가지 못한다.
마쓰시타정경숙, 나아가 하시모토의 유신정치숙과, 최근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각종 정치 관련 숙은 큰 그림이 아닌 ‘작은 그림’ 또는 ‘소박한 그림’이란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접근해야 ‘정치인 사관학교’로서의 기관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큰 그림도 좋지만,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 그림은 작고 소박하게 표현된다. 테니스 라켓 잡는 모습과 골프 스윙하는 모습, 볼링공을 닦는 모습만 봐도 어느 정도 실력인지를 알 수 있다. 손가락 데생부터 배우는 자세로 숙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메이지시대에 나타난 숙은 결과적으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인재를 만들어 공급했지만, 처음부터 제왕학(帝王學)이나 ‘치국(治國)의 방략(方略)’을 가르치는 기관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오사카의 데키주쿠는 국가를 움직이는 정치인이나 군인, 대교육자·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다. 15년 전 오사카에 들렀을 때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는 데키주쿠 건물을 방문한 적이 있다. 데키주쿠는 네덜란드어 사전을 편찬하고, 서양의 선진(先進) 예방의학과 복잡한 화학실험을 주로 했던 실무적·실용적 차원의 공부방에 불과했다. 숙식·공부·토론 공간의 크기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협소했다. 겨울에도 난방이 없고, 음식도 최소한으로 먹으면서 견디는 마치 극기(克己)훈련소 같은 곳이 데키주쿠이다.
‘큰 그림’은 없다
필자의 마쓰시타정경숙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하시모토의 유신정치숙이나 다른 정치 관련 숙들의 커리큘럼도 ‘큰 그림’과 무관한 것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국제정치학·경제학·군사학·당선전략·웅변술과 같은, 정치인이 되기 위한 노하우를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보다는 더욱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인, 국가와 사회에 유익하고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작은 라면집 벽면을 보면, 반드시 어딘가에 짧은 메시지를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음식에 관한 원칙이나, 주방장이 추구하는 미식(美食)의 가치에 관한 글이다. 하시모토가 2000여 명의 유신정치숙 숙생들 앞에서 강연할 내용도 감히 ‘단언컨대’ 일본인으로서의 사명과 의무에 대한 원칙적이고도 기본적인 얘기가 될 것이다. 정치가로 당선되기 위한 전략전술, 좌우(左右) 이념, 주변을 무시하는 오만함이나 천박함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될 것이다. 숙의 분위기는 다소 엄숙한 느낌마저 들 것이다.
필자는 지가사키시(茅ヶ崎市)에 있는 마쓰시타정경숙에서 공부하는 동안 평일 아침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똑같은 일과로 시간을 보냈다. 마쓰시타정경숙을 만든 숙주(塾主)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만든 5개에 이르는 숙의 설립취지(塾是)와, 숙생이 따라야 할 5개의 의무(塾訓)에 관한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먼저 인간이 된 뒤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것이다. 이를 매일 읽고 또 복창한다. 역사학 중국고전 정치학 경제학 문화학 미래학은 그 이후에 천천히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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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정경숙 개숙 20주년 기념사진. 졸업생의 약 70%가 이 자리에 참석했다. 둘째 열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가 노다 요시히코 현 총리. 뒤에서 네 번째 열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 |
이케바나에 얽힌 기억
정경숙에 머무는 동안 배운 것 하나로 ‘이케바나(活花)’에 관한 것이 인상 깊다. 이케바나 예법(禮法)에 따른 꽃장식에 관한 노하우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독창적이고도 나만의 색깔을 나타낼 수 있는 탁월한 이케바나의 노하우는 처음부터 아예 없다. 꽃의 각도, 색의 조화, 화병과의 화음, 꽃의 수, 줄기의 길이, 계절별 꽃장식….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케바나 작법(作法)을 얼마나 충실히 따라 하는가가, 수작(秀作)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길이 면에서의 화병과 꽃의 비율은 1대2, 꽃의 각도는 벽을 뒤로 한 단수(單數)의 꽃일 경우 벽에 대해 30도를 유지하고 벽 앞쪽으로는 45도 틀어져서 장식해야 한다, 꽃이 얼마나 많고 풍성한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송이 꽃이라도 최선의 미(美)를 나타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등… . 여기서 개개인의 창의력이나 색깔은 중요치 않다.
100% 똑같이 재현하는가를 실력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케바나만이 아니다. 다도(茶道) 검도(劍道), 그리고 향도(香道)도 마찬가지다. 그냥 똑같은 동작과 모습, 느낌을 재현하는 것이 공부다.
필자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그런 과정을 참아 내기 어려울 것이다. 매일 연습을 한다 해도, 검도를 시작해서 신검(新劍)을 잡기까지의 기간은 최소한 5년이다. 죽검(竹劍)·목검(木劍)으로 매일 기합과 함께 내려치기를 반복해야 한다. “먼저 인간이 된 뒤에 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말을 반복하고 복창한다.
필자에게 “정경숙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배운 것이 별로 없다. 매일 청소하고 5개의 숙시(塾是)와, 5개의 숙훈(塾訓)을 반복하는 것이 교육 내용의 절반 이상이다. 하시모토의 유신정치숙이나 동해대지숙·가와무라정치숙도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숙’은 스마트한 머리나 언변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자세와 기본을 가르치는 곳이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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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정경숙 출신으로 유신정치숙의 교과과정과 철학을 다듬고 있는 나가타 히로시. |
아침 6시30분. 마쓰시타정경숙의 하루는 기상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아침체조를 하러 본관 앞에 모두 모인다. 이어 곧바로 마당청소에 들어간다. 스승·학생·방문객 모두가 참여한다. 예외가 없다.
데키주쿠의 숙주 오가타도 숙생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함께 공부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네덜란드 사전과 종두법을 개발해 냈다. 토론하고 또 토론하면서 하루 종일 숙생들과 생활했다.
마쓰시타정경숙 직원(塾員)들도 모두 안에 거주하면서 함께 생활한다. 함께 일어나고 식사하고 생활하면서 배운다. 서로를 통해 배우고 익히지만,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을 공유(共有)한다는 의식도 가져야만 한다.
마쓰시타정경숙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항상 몸과 마음을 추슬러 조심하고, 선후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언행(言行)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요시다 쇼인이 죽은 후 쇼카손주쿠를 이어받은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은 숙 출신자 중 일부가 메이지정부에 반대해 난(亂)을 일으키자 할복(割腹)자살을 했다. 스승과 숙생이 하나로 엮어진 일본식 집단의식의 현장이 ‘숙’인 것이다.
유신정치숙의 운영위원 중 전직 요코하마(橫浜) 시장이자 마쓰시타정경숙 10기생인 나가타 히로시(中田宏)라는 인물이 있다. 나가타는 10년 전 요코하마 시장 재직 당시 수상 공선제(公選制·총리를 국민의 직선으로 선출하는 제도)를 주장하면서 ‘일본의 케네디’로 불렸던 일본정치의 풍운아다.
나가타와 하시모토는 출신배경이나 정치적 비전이란 측면에서 비슷하다.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도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나가타는 하시모토가 오사카 시장으로 당선된 후 한동안 오사카 부(副)시장 물망에 올랐다. 전직 시장이 부시장을 맡는다는 것이 격에 맞지는 않다. 하지만 오사카를 일본개혁의 중심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이 방안은 심도 있게 논의됐다. 현재 나가타는 유신정치숙의 대체적인 교과내용과 기본철학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쓰시타정경숙의 교육방법이 유신정치숙에 접목(接木)될 것이란 점을 예상할 수 있다.
변화의 바람은 남쪽에서 분다
한국인들이 보기에 유신정치숙은 마쓰시타정경숙 출신 의원들이 그러하듯, 민족주의 내지 우익(右翼) 성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이는 ‘숙’이 전략전술적 차원의 정치가 양성학교가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의 기본자세를 다지는 교육을 주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일본문화를 강조한다는 것은 우익으로 간다는 의미이다.
신당 창당을 추진하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는 다(多)민족·다국가에 기초한 세계관이 아닌 1민족 1국가관을 신당의 이념으로 할 방침이다. 하시모토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하시모토는 교육에 대해 초·중등 과정의 경우 기초부터 다져야 하며 일정 수준이 안 되는 학생은 졸업을 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모두가 스타’인 미국식 교육이 아닌, ‘1등과 2등을 확실히 구분하는 메이지시대의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하시모토의 생각이다. 이런 교육관은 유신정치숙의 교육과정에도 투영될 것이다.
유신정치숙 등 잇따라 출범하는 일본의 정치숙들이 도쿠가와 막부 말기 위기의 일본을 구했던 ‘숙’들처럼 21세기판 인재양성소 역할을 할지, 아니면 지난 20년간에 이어 또다시 실패하는 단발성(單發性) 정치실험극으로 끝날지는 6월 이후 총선에서 결판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 정치의 무대가 도쿄에서 오사카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오사카 한복판에 자리 잡은 170여년 전의 데키주쿠와, 오사카 출신으로 마쓰시타정경숙을 세운 숙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그러했듯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희망의 바람은 항상 일본의 남쪽에서 불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