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에하라 전 외무, 간 나오토 총리 등 在日교포의 정치헌금으로 잇달아 곤경
⊙ 모리 전 총리와 나카노 공안위원장은 한국음식점 단골손님
⊙ “일본 정파 싸움에 애꿎은 희생양. 일본사회에서 격리될까 노심초사”
李民晧
⊙ 41세. 한림대 일본학과 졸업.
⊙ 現 재일동포민족지 《통일일보》서울지사장. 해외교포문제연구소 편집위원.
⊙ 저서 : 《모국을 향한 재일동포의 100년 족적-재일동포들의 대한민국 공헌기록집》.
⊙ 모리 전 총리와 나카노 공안위원장은 한국음식점 단골손님
⊙ “일본 정파 싸움에 애꿎은 희생양. 일본사회에서 격리될까 노심초사”
李民晧
⊙ 41세. 한림대 일본학과 졸업.
⊙ 現 재일동포민족지 《통일일보》서울지사장. 해외교포문제연구소 편집위원.
⊙ 저서 : 《모국을 향한 재일동포의 100년 족적-재일동포들의 대한민국 공헌기록집》.
- 간 나오토 일본 총리.
지난 3월 6일 밤. 일본의 차기 총리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외무대신(장관)이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마에하라 대신은 재일(在日)한국인으로부터 받은 정치헌금에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로부터 닷새 뒤인 3월 11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이 날자 조간 톱기사로 ‘총리에게 위법헌금 의혹 104만 엔, 재일한국인으로부터’라는 제목의 보도를 냈다. 신문은 이 기사에서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의 자금관리 단체인 ‘소시카이’(草志會)가 2006년과 2009년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요코하마의 재일한국인으로부터 104만 엔을 수수한 의혹이 있다고 폭로했다. 간 총리는 이날 오전에 열린 참의원(參議院·상원) 결산위원회에 출석해 “《아사히신문》의 보도 내용이 맞다”고 시인했다.
마에하라 대신은 일본 내각의 중요 각료 중 한 명이었을 뿐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바람직한 총리 후보 1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 있는 정치인이다. 1962년생인 그는 중의원(衆議院·하원) 6선(選) 의원으로 민주당 대표를 거쳐 2009년 가을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 뒤에는 국토교통성과 외무성 대신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리더십 부족에 목말라 하는 일본의 정치 환경에서 마에하라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도 드물다. 그런 정계의 실력자가 외국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돼 장관직에서 불명예 퇴진한 데 이어, 그 여파가 채 누그러들기도 전에 집권 내각의 수장(首長)인 간 총리까지 똑같은 문제로 곤경에 처한 것이다.
간 총리 지지도, 24%까지 추락
간 총리 의혹이 제기된 3월 11일 일본 국회의 풍경은 마치 정권 타도를 외치는 집회장 같았다. 제1야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은 “민주당 정권이 대신은 물론 내각 수장인 총리까지 법률로 금하는 외국인 헌금 수수를 했으니, 내각이 총사퇴하든가 하원인 중의원을 해산하든가 어떤 식으로든 책임지라”고 간 총리를 몰아세웠다.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3월 7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 보도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간 내각의 지지율은 2010년 6월 내각 출범 이래 최저 수치인 24%까지 추락했다. “빨리 퇴진하기 바란다”는 응답자도 51%에 달했다. 심지어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간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그야말로 간 내각은 총체적인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일본 정계는 총리 퇴진을 시간문제일 뿐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격렬하게 요동치던 일본의 정치상황은 이날 오후 동일본대지진이 터지면서 그 자리에서 올스톱됐다. 오후 2시경 도쿄의 국회의사당이 강진(强震)으로 휘청거리자, 간 내각을 향한 성토가 벌어지던 의사장에서는 즉각 휴회(休會)가 선언됐다. 그 뒤 여·야당은 기약을 알 수 없는 정치휴전 상태에 들어갔고, 간 총리 내각의 수명도 연장됐다.
이 같은 선택은 오랜 역사 동안 숱한 재난을 겪어온 일본인들에게는 당연한 위기 대응법이다. 국가적 위기상황이 닥치면 정부가 앞장서고 국민은 지원하는 협력체제인 것이다. 진도(震度) 9의 대지진은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초강력 쓰나미를 유발하고 지도 지형을 바꿀 정도의 엄청난 괴력(怪力)을 보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각을 갈아치우자”는 정치흐름은 제자리에 묶어놨다. 대재난 앞에 이른바 외국인 위법헌금 파동은 일본국민의 관심 밖으로 급속히 밀려났다.
외국인의 정치헌금 금지
대지진 직전 일본 정계를 뒤흔들었던 이 파동의 실체는 무엇일까? 어떤 경위로 발생했으며 어쩌다가 재일한국인들이 원인제공자가 됐을까? 거주하는 외국인의 수가 200만명이 넘는 일본에서 하필이면 왜 한국인이란 말인가? 한국인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일본 정치인들에게 돈을 주었는가?
본론(本論)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일본의 외국인 헌금에 관한 법적 근거를 찾아보자. 간 총리와 마에하라 전 대신이 사퇴압박을 받은 건 일본의 정치자금규정법(政治資金規正法) 제22조 5항을 위반했다는 의혹 때문이다.
“누구도 외국인, 외국법인 또는 그 주된 구성원이 외국인 혹은 외국법인인 단체 기타 조직으로부터 정치활동에 관한 기부를 받아서는 아니된다.(何人も、外国人、外国法人又はその主たる構成員が外国人若しくは外国法人である団体その他の組織から、政治活動に関する寄附を受けてはならない。)”
원래 이 법의 제정 취지는 일본정치에 대한 외국의 관여와 영향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 있다. 위반할 경우는 3년 이하의 금고(禁錮) 또는 50만 엔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고, 형이 확정되면 형 집행기간과 그 후 최장 5년간 공민권(公民權·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정지된다.
하지만 간 총리와 마에하라 대신이 처벌받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처벌대상이 되려면 ‘외국인인 줄 알고 고의로 받았을 경우’여야 하는데 마에하라 대신은 “(돈 준 사람에 대해) 외국인이란 인식은 없었다”며 헌금을 받고 있는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간 총리는 한 술 더 떠 아예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서 의혹이 불거진 사흘 뒤 자신의 정치자금관리단체를 통해 수수한 104만 엔을 해당 재일한국인에게 돌려줬다. 돈을 받은 사람은 외국국적인지 몰랐다 하고, 준 사람들도 “위법(違法)인지 모르고 줬다”는 입장이니 고의성(故意性)을 입증하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인다.
마에하라 집안과 30년 교분
그렇다면 일본 정계(政界)의 실력자들에게 헌금을 한 재일한국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필자는 마에하라 대신이 사퇴하던 3월 6일 그의 지역구이자 재일한국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곳으로 확인된 교토(京都)에 머물고 있었다. 마에하라 대신에게 헌금을 한 장본인으로 지목된 장옥분(張玉分·72)씨와 연락을 시도했다. 그가 경영하는 야마시나쿠(京都 山科區)의 불고기가게 ‘야키니쿠준’(燒肉順)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후에 도쿄(東京)의 《통일일보》(統一日報) 본사 취재진이 장씨와 인터뷰한 뒤 그 내용을 보내왔다.
―마에하라 대신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습니까?
“마에하라 가족과는 30년 넘게 알고 지내온 사이입니다. 그 집안이 우리 가게가 있는 야마시나로 이사 왔을 때부터니까요. 마에하라 군이 (그가 2009년 10월 국토교통대신으로 임명돼) 야마시나 밖으로 나갈 때까지 쭉~ 이죠. 특히 그의 어머니와는 절친한 관계입니다. 마에하라는 우리 집 둘째 아들과 동갑내기라 저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지요.”
―돈을 주게 된 경위는?
“오랜 세월의 인연도 있고 내 아들 같은 사람이 정치가로 활약하려는 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연스럽게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계좌번호가 적혀 있는 (마에하라의 정치) 팸플릿을 보고 거기다 1년에 5만 엔 정도 송금(送金)하게 된 겁니다.”
―외국 국적자가 정치인에게 헌금하는 게 위법인지 몰랐습니까?
“몰랐죠. 알았다면 그런 바보 같은 소리 들을 짓은 안 했을 겁니다. 정치헌금이라 부르다니…. 조그만 야키니쿠 가게 경영자가 그걸로 득(得) 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마에하라에게 어떤 걸 부탁한 적도, 부탁할 일도 없습니다. (외국 국적자라서 일본에서) 선거권도 없는 마당에….”
일본인의 협박전화 받아
―파동 이후 마에하라 대신으로부터 연락은 있었습니까?
“외무대신에서 물러난 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오카상(어머니), 곧 야키니쿠 먹으러 갈 테니까’라고 하기에 ‘서둘러 올 것까진 없어’라고 했죠.”
―일본인들로부터 협박 받은 적은 없습니까?
“처음에는 전화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식의 협박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잠잠하네요.”
1939년 경북 예천(醴泉) 태생의 장옥분씨는 4세 때 부모를 따라 도일(渡日)한 재일한국인 2세다. 교토 야마시나(京都 山科)에서 야키니쿠 장사를 시작한 건 38년 전이라고 한다. 그가 속해 있는 재일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 관계자들과 교토의 재일한국인들에 따르면, 마에하라 대신은 결혼식과 장례식 같은 장씨 집안의 애경사(哀慶事) 때면 빠지지 않고 참석할 만큼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처럼 자신을 보살펴준 이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을까. 마에하라 대신은 2009년 10월 국토교통대신으로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씨를 장관실로 초대했다. 그때 장씨는 마에하라의 어머니, 다른 지인 1명과 함께 도쿄로 올라가 장관실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함께 식사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장씨는 그때 마에하라 대신과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담아 자신의 야키니쿠 가게에 걸어뒀는데, 그 사진이 이번 ‘외국인 헌금’ 파동의 단서가 됐다.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이 정보를 입수한 자민당의 니시다 쇼지(西田昌司·52) 참의원이 야키니쿠 가게의 조리사 면허가 ‘장옥분’이란 한국인 이름으로 기재돼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니시다 의원은 마에하라의 정치자금 수지보고서를 조사해 장씨가 일본 이름인 기무라 준코(木村順子) 명의로 헌금한 사실을 알아냈고, 3월 4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한 마에하라 대신에게 이 문제를 추궁한 것이다.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가 된 재일교포
한편 간 총리에게 104만 엔을 건넨 사람은 재일한국인계 금융기관인 구(舊) 요코하마쇼긴(橫浜商銀信用組合·現 중앙상은신용조합)에서 비상근(非常勤) 이사를 지낸 H씨(58)다. 그와의 인터뷰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장옥분씨와 마찬가지로 재일한국인 2세인 그는 도쿄와 요코하마(橫浜) 등지에서 부동산업체와 파친코점(店) 등 5~6개 사업장을 경영하고 있는 사업가다. 사건이 불거진 뒤 한동안 자택에서 칩거(蟄居)하던 그는 잠잠해진 다음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 H씨와 친하게 지낸다는 한 인사의 증언이다.
“간 총리와는 수시로 전화하고 식사하고 낚시까지 함께 즐길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합디다. 사건 터지고 난 뒤 외출을 삼가고 외부와 접촉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받았다더군요. 그 사람 민주당만이 아니라 예전부터 자민당 의원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을 다져온 것으로 압니다. 주변 동포 가운데 그런 사람 많아요. 근데 일본 정치인 중에 재일한국인에게 신세 안 진 사람 찾을 수나 있답니까?”
취재 중에 만난 재일한국인들과 주일(駐日) 외교관 출신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빼놓지 않는 말이 “기분 나쁜 일”이란 것이다. 일본 정치 세력 간의 당파싸움이 본질인데 애꿎게 ‘자이니치’(在日, 재일한국인)를 끼워 넣은 것 같고, 매스컴들이 외국인 정치헌금 운운하는 모습에서 한국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재일한국인들이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 신세 같다는 것이다. 재일민단의 기관지인 《민단신문》(民團新聞)은 4월 27일자 기사에서 이러한 언짢은 재일한국인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국적을 초월한 한 사람의 정(情)과 선의(善意)가 결과적으로 법률에 저촉되고 장관의 사임으로 발전한 건 유감스런 일이다” “이 문제를 정식으로 외국인 정치헌금의 문제로 삼는다면 대부분의 국회의원이 사임해야 할 것이다” “마에하라 씨의 사임은 ‘선의의 주민’으로서의 자이니치를 베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일본 매스컴들의 관련 보도를 살펴보면 초점이 ‘외국인의 위법 헌금’ 부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부 신문은 ‘정치자금 스캔들’이라고까지 묘사했다.
이번 사건이 스캔들로 부를 만큼의 정치 이슈인지, 매스컴이 대서특필(大書特筆)할 만큼의 기사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통상적으로 일본에서 정치인의 뇌물 수수 문제의 보도는 수백만~수억 엔대의 거액이었지, 이번처럼 소액(少額) 사건이 특필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민주당 간사장의 뇌물 수수 의혹 사건만 봐도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금액은 3억~4억 엔대다.
재일교포와 일본정치인들의 친분
그렇다면 재일한국인들과 일본 정치인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총영사를 지낸 전직 외교관으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임하고 얼마 안 됐을 때, 60대 재일교포 유지(有志)의 아들 결혼식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하객(賀客)으로 관내 전·현직 국회의원과 전직 총리까지 거물급 정치인이 4명이나 와 있는 겁니다. 훗날 그 유지와 친해진 다음 교제비결을 물었더니 ‘선친(先親) 때부터 정치인 집안과 인연을 맺어왔다’면서 ‘그러니 우리 집안 행사에 오는 건 당연하지 않으냐’고 그럽디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대(代)를 이어 정치가를 하는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모리 요시로(森喜朗),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등 역대 일본 총리의 집안도 짧게는 아버지, 길게는 증조부 때부터 정치를 해왔다. 재일한국인들은 일본 내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일본 정주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된다. 그러다 보니 정착한 지역에서 가업을 잇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과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되고, 그 기간이 오래되다 보면 만남의 빈도는 많아지기 마련이다. 환경적으로 재일한국인과 일본정치인은 이래저래 얽힐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쌍방 간의 교류는 빈번하게 이뤄진다. 예를 들어 하토야마 전 총리는 재일민단이 작년 11월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개최한 ‘강제합병 100년, 조국과 함께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65년’ 행사에 특별 게스트로 참석했다. 또 자민당 중진의원인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2009년 사망) 전 재무대신의 경우 생전에 재일한국인들이 주축 멤버로 구성된 전국야키니쿠협회(全國燒肉協會)의 명예고문으로 활동했다. 나카가와 대신은 야키니쿠데이(8월 29일)와 신년회 같은 주요 행사 때면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고 한다.
일본 정치인들은 한국 음식점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도쿄만 살펴봐도 시나가와(品川)에 있는 고급 야키니쿠 음식점인 J식당은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측근들과 함께 자주 찾는 단골집이고, 마찬가지로 교포가 경영하는 아카사카(赤坂) B주점은 나카노 간세이(中野寬成) 국가공안위원장이 가끔씩 들러 한잔 하는 곳으로 소문 나 있다. 지금은 문을 닫은 긴자(銀座)의 한정식집 비원(秘苑)은 한때 일본 정치인들의 비밀 회합장소로 유명했다.
“돈 줬다고 사업적으로 득 본 일 없다”
한편 이해하려 해도 좀처럼 풀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인터뷰한 재일한국인들이 정치인에게 돈을 준 건 인정하면서도 한사코 청탁의 목적은 아니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국 국내인의 관점으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정치와 돈’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 아무개 정치인이 누군가에게 돈을 받았다면 분명 쌍방 간에 검은 거래가 있었으리라 의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재일한국인들은 ‘정치와 돈’을 그들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오사카(大阪)를 비롯한 간사이지방(關西地方) 일대에서 여러 개의 파친코점을 경영하는 K사장(73)의 고백은 일본 땅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의 생각을 읽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사업 규모가 클수록 정치인들과 만날 기회는 많아집니다. 경영자인 나는 한국국적이라 투표권이 없지만 직원들은 거의 일본인 아닙니까. 선거철이면 의원들이 수시로 찾아옵니다. 국회의원부터 시(市)의원까지 민주당 자민당 여야 할 것 없이요.
해가 바뀌면 새해 인사하러 오겠다고 연락을 해옵니다. 그렇게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은 없습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가 하던 대로 ‘차비나 하라’며 슬쩍 봉투를 포켓에 찔러줍니다. 돈 줬다고 사업적으로 득 본 일은 없어요. 기대도 안 합니다. 그 정치인 나중에 거물 될 텐데 밉보여서 좋을 건 없잖아요. 무슨 일 생기면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 내 아들 결혼식 때도 올 테고…. 미리 관리하는 차원이지요.”
이는 비단 K사장처럼 돈 잘 버는 사업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한적한 골목에서 야키니쿠 굽고 밥장사를 하는 영세업자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마이너리티의 한계
이러한 재일한국인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주일한국대사를 지낸 라종일(70·羅鍾一) 전 우석대 총장은 “일본이 일제(日帝)시대 때부터 줄곧 재일교포들이 공적(公的) 활동을 못하도록 제약해 온 영향이 크다”며 “뾰족한 방법이 없는 교포들로선 정치인들에게 돈을 주고서라도 일본 사회와의 교류와 접목을 시도하는 것”이라 진단했다. 정치인에게 돈을 주고서라도 일본 주류(主流)사회와의 ‘관계 맺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일한국인과 일본 정치인 간의 특수한 관계상은 평생을 마이너리티(Minority)로 살아가야 하는 ‘자이니치’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재일교포의 돈은 뒤탈이 없으니 먹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머조리티(Majority)의 우월감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런 걸 당사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말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치자. 그러나 제3자적 관점에서 일본의 정치 제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불합리(不合理)해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이번에 정치이슈로 떠올랐던 외국인 정치헌금의 위법 근거로 제시된 정치자금규정법만 해도 뜯어보면 모순이 발견된다. 이 법은 원칙적으로 정치인이 외국인이나 외국법인으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걸 금하고 있다.
예외가 있는데, 일본 현지법인으로서 외국인 또는 외국법인이 반수 넘게 주식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5년 동안 일본 주식시장에 상장(上場)돼 있을 경우엔 정치인과 외국인 간 기부금 수수가 가능하다. 이 조항은 2006년 당시 여당인 자민당이 글로벌화를 주장하며 해금(解禁)시킨 특례(特例) 규정이다. 이는 같은 외국인 신분이라도 정치헌금에 대해 기업은 ‘OK’ 개인은 ‘NO’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푼돈은 안 받고 큰돈은 받겠다”는 정치인들의 노림수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 법의 취지인 외국인의 일본 정치에 대한 간섭이나 영향력을 방지하겠다는 것에도 모순된다.
그뿐 아니다. 일본 정당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외국인의 당원 또는 서포터 입회(入會)를 허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당원 입회 자격을 보면 “당의 기본이념과 정책에 찬동하는 18세 이상이라면 누구든 가입할 수 있다. 재외일본인 또는 재일외국인도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재일한국인들 속에서 일본 정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는 “일본 국회의원 후원회 회장까지 지냈다”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으로서의 권리는 제한받고 있다. 재일한국인들은 일제 때 건너와 그 후손이 4세, 5세가 될 때까지 일본 땅에서 주민으로 살고 있고 꼬박꼬박 세금도 내지만, 정작 주민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지방참정권은 없는 실정이다. 재일민단에서 1995년 영주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 운동을 시작한 이래 일본 정계에서 ‘다 된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만도 수차례, 17년째를 맞고 있는 현재도 입법 전망은 안갯속이다.
재일교포들의 불안감
재일한국인 사이에서는 일본 정치인들이 당파(黨派) 싸움을 하면서 외국인정치헌금 문제를 불씨로 삼은 걸 두고, 참정권을 요구하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경고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참정권에 대해 목소리를 가장 강하게 내는 외국인이 재일한국인이고, 앞장서고 있는 건 그들의 조직인 재일민단이다. 이 때문에 시종일관 참정권 부여에 반대해 온 자민당이 찬성 입장을 표명해 온 민주당을 공격할 꼬투리로 외국인 정치헌금 문제를 꺼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재일한국인들에게 “너희 문제로 전도유망한 차세대 정치리더가 낙마(落馬)한 것도 모자라 현역 리더인 총리까지 궁지에 몰렸으니 암묵적으로 책임지라, 잠자코 있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동일본대지진 발생 2개월. 일본인들은 대재난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재기(再起)를 향한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번 대지진으로 확인된 사실은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손잡고 복구에 땀 흘리고, 힘들 때는 어깨를 두드려주는 이웃이란 것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로부터 조센진(朝鮮人) 부락이라 손가락질 받았던 오사카의 쓰루하시(鶴橋)에서는 동포들과 일본인 가정이 서로의 관혼상제(冠婚喪祭)까지 챙겨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봄이면 하나미(花見·꽃놀이)를 하고 1년에 한두 번은 당일치기 버스 관광을 같이 떠난다. 이런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한국이니 일본이니 국적 구분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의미도 없을 터다.
취재 파일들을 정리하면서 일본 정치가 일반의 상식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도쿄의 한 일본인 사회봉사단체에서 일하는 K씨(58)의 발언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총리 퇴진 파동 때 ‘외국인’이란 용어가 자꾸 등장해 불안했습니다. 재일교포가 일본사회의 구성원 자격이 없다는 소리로 들리더군요. 이웃의 일본인들도 정치인들에게 2만~3만 엔짜리 파티권(정치후원행사 티켓) 사고 축하할 일 있으면 후원금을 냅니다. 이번 일로 우리는 그런 성의 표현도 안 된다고 하니 이러다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습니다.”⊙
마에하라 대신은 일본 내각의 중요 각료 중 한 명이었을 뿐 아니라, 여론조사에서 바람직한 총리 후보 1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 있는 정치인이다. 1962년생인 그는 중의원(衆議院·하원) 6선(選) 의원으로 민주당 대표를 거쳐 2009년 가을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 뒤에는 국토교통성과 외무성 대신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리더십 부족에 목말라 하는 일본의 정치 환경에서 마에하라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도 드물다. 그런 정계의 실력자가 외국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돼 장관직에서 불명예 퇴진한 데 이어, 그 여파가 채 누그러들기도 전에 집권 내각의 수장(首長)인 간 총리까지 똑같은 문제로 곤경에 처한 것이다.
간 총리 지지도, 24%까지 추락
간 총리 의혹이 제기된 3월 11일 일본 국회의 풍경은 마치 정권 타도를 외치는 집회장 같았다. 제1야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은 “민주당 정권이 대신은 물론 내각 수장인 총리까지 법률로 금하는 외국인 헌금 수수를 했으니, 내각이 총사퇴하든가 하원인 중의원을 해산하든가 어떤 식으로든 책임지라”고 간 총리를 몰아세웠다.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3월 7일자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 보도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간 내각의 지지율은 2010년 6월 내각 출범 이래 최저 수치인 24%까지 추락했다. “빨리 퇴진하기 바란다”는 응답자도 51%에 달했다. 심지어 민주당 내부에서조차 간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비등했다. 그야말로 간 내각은 총체적인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 처해 있었고, 일본 정계는 총리 퇴진을 시간문제일 뿐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격렬하게 요동치던 일본의 정치상황은 이날 오후 동일본대지진이 터지면서 그 자리에서 올스톱됐다. 오후 2시경 도쿄의 국회의사당이 강진(强震)으로 휘청거리자, 간 내각을 향한 성토가 벌어지던 의사장에서는 즉각 휴회(休會)가 선언됐다. 그 뒤 여·야당은 기약을 알 수 없는 정치휴전 상태에 들어갔고, 간 총리 내각의 수명도 연장됐다.
이 같은 선택은 오랜 역사 동안 숱한 재난을 겪어온 일본인들에게는 당연한 위기 대응법이다. 국가적 위기상황이 닥치면 정부가 앞장서고 국민은 지원하는 협력체제인 것이다. 진도(震度) 9의 대지진은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초강력 쓰나미를 유발하고 지도 지형을 바꿀 정도의 엄청난 괴력(怪力)을 보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각을 갈아치우자”는 정치흐름은 제자리에 묶어놨다. 대재난 앞에 이른바 외국인 위법헌금 파동은 일본국민의 관심 밖으로 급속히 밀려났다.
외국인의 정치헌금 금지
대지진 직전 일본 정계를 뒤흔들었던 이 파동의 실체는 무엇일까? 어떤 경위로 발생했으며 어쩌다가 재일한국인들이 원인제공자가 됐을까? 거주하는 외국인의 수가 200만명이 넘는 일본에서 하필이면 왜 한국인이란 말인가? 한국인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일본 정치인들에게 돈을 주었는가?
본론(本論)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일본의 외국인 헌금에 관한 법적 근거를 찾아보자. 간 총리와 마에하라 전 대신이 사퇴압박을 받은 건 일본의 정치자금규정법(政治資金規正法) 제22조 5항을 위반했다는 의혹 때문이다.
“누구도 외국인, 외국법인 또는 그 주된 구성원이 외국인 혹은 외국법인인 단체 기타 조직으로부터 정치활동에 관한 기부를 받아서는 아니된다.(何人も、外国人、外国法人又はその主たる構成員が外国人若しくは外国法人である団体その他の組織から、政治活動に関する寄附を受けてはならない。)”
원래 이 법의 제정 취지는 일본정치에 대한 외국의 관여와 영향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 있다. 위반할 경우는 3년 이하의 금고(禁錮) 또는 50만 엔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고, 형이 확정되면 형 집행기간과 그 후 최장 5년간 공민권(公民權·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정지된다.
하지만 간 총리와 마에하라 대신이 처벌받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처벌대상이 되려면 ‘외국인인 줄 알고 고의로 받았을 경우’여야 하는데 마에하라 대신은 “(돈 준 사람에 대해) 외국인이란 인식은 없었다”며 헌금을 받고 있는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간 총리는 한 술 더 떠 아예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서 의혹이 불거진 사흘 뒤 자신의 정치자금관리단체를 통해 수수한 104만 엔을 해당 재일한국인에게 돌려줬다. 돈을 받은 사람은 외국국적인지 몰랐다 하고, 준 사람들도 “위법(違法)인지 모르고 줬다”는 입장이니 고의성(故意性)을 입증하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인다.
마에하라 집안과 30년 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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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에하라 전 외무대신. |
―마에하라 대신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냈습니까?
“마에하라 가족과는 30년 넘게 알고 지내온 사이입니다. 그 집안이 우리 가게가 있는 야마시나로 이사 왔을 때부터니까요. 마에하라 군이 (그가 2009년 10월 국토교통대신으로 임명돼) 야마시나 밖으로 나갈 때까지 쭉~ 이죠. 특히 그의 어머니와는 절친한 관계입니다. 마에하라는 우리 집 둘째 아들과 동갑내기라 저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지요.”
―돈을 주게 된 경위는?
“오랜 세월의 인연도 있고 내 아들 같은 사람이 정치가로 활약하려는 데 어찌 모른 척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연스럽게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계좌번호가 적혀 있는 (마에하라의 정치) 팸플릿을 보고 거기다 1년에 5만 엔 정도 송금(送金)하게 된 겁니다.”
―외국 국적자가 정치인에게 헌금하는 게 위법인지 몰랐습니까?
“몰랐죠. 알았다면 그런 바보 같은 소리 들을 짓은 안 했을 겁니다. 정치헌금이라 부르다니…. 조그만 야키니쿠 가게 경영자가 그걸로 득(得) 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마에하라에게 어떤 걸 부탁한 적도, 부탁할 일도 없습니다. (외국 국적자라서 일본에서) 선거권도 없는 마당에….”
일본인의 협박전화 받아
―파동 이후 마에하라 대신으로부터 연락은 있었습니까?
“외무대신에서 물러난 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오카상(어머니), 곧 야키니쿠 먹으러 갈 테니까’라고 하기에 ‘서둘러 올 것까진 없어’라고 했죠.”
―일본인들로부터 협박 받은 적은 없습니까?
“처음에는 전화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식의 협박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잠잠하네요.”
1939년 경북 예천(醴泉) 태생의 장옥분씨는 4세 때 부모를 따라 도일(渡日)한 재일한국인 2세다. 교토 야마시나(京都 山科)에서 야키니쿠 장사를 시작한 건 38년 전이라고 한다. 그가 속해 있는 재일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 관계자들과 교토의 재일한국인들에 따르면, 마에하라 대신은 결혼식과 장례식 같은 장씨 집안의 애경사(哀慶事) 때면 빠지지 않고 참석할 만큼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처럼 자신을 보살펴준 이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을까. 마에하라 대신은 2009년 10월 국토교통대신으로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씨를 장관실로 초대했다. 그때 장씨는 마에하라의 어머니, 다른 지인 1명과 함께 도쿄로 올라가 장관실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함께 식사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장씨는 그때 마에하라 대신과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담아 자신의 야키니쿠 가게에 걸어뒀는데, 그 사진이 이번 ‘외국인 헌금’ 파동의 단서가 됐다.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이 정보를 입수한 자민당의 니시다 쇼지(西田昌司·52) 참의원이 야키니쿠 가게의 조리사 면허가 ‘장옥분’이란 한국인 이름으로 기재돼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니시다 의원은 마에하라의 정치자금 수지보고서를 조사해 장씨가 일본 이름인 기무라 준코(木村順子) 명의로 헌금한 사실을 알아냈고, 3월 4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한 마에하라 대신에게 이 문제를 추궁한 것이다.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가 된 재일교포
한편 간 총리에게 104만 엔을 건넨 사람은 재일한국인계 금융기관인 구(舊) 요코하마쇼긴(橫浜商銀信用組合·現 중앙상은신용조합)에서 비상근(非常勤) 이사를 지낸 H씨(58)다. 그와의 인터뷰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장옥분씨와 마찬가지로 재일한국인 2세인 그는 도쿄와 요코하마(橫浜) 등지에서 부동산업체와 파친코점(店) 등 5~6개 사업장을 경영하고 있는 사업가다. 사건이 불거진 뒤 한동안 자택에서 칩거(蟄居)하던 그는 잠잠해진 다음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 H씨와 친하게 지낸다는 한 인사의 증언이다.
“간 총리와는 수시로 전화하고 식사하고 낚시까지 함께 즐길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합디다. 사건 터지고 난 뒤 외출을 삼가고 외부와 접촉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받았다더군요. 그 사람 민주당만이 아니라 예전부터 자민당 의원들과도 두루두루 친분을 다져온 것으로 압니다. 주변 동포 가운데 그런 사람 많아요. 근데 일본 정치인 중에 재일한국인에게 신세 안 진 사람 찾을 수나 있답니까?”
취재 중에 만난 재일한국인들과 주일(駐日) 외교관 출신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빼놓지 않는 말이 “기분 나쁜 일”이란 것이다. 일본 정치 세력 간의 당파싸움이 본질인데 애꿎게 ‘자이니치’(在日, 재일한국인)를 끼워 넣은 것 같고, 매스컴들이 외국인 정치헌금 운운하는 모습에서 한국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재일한국인들이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 신세 같다는 것이다. 재일민단의 기관지인 《민단신문》(民團新聞)은 4월 27일자 기사에서 이러한 언짢은 재일한국인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국적을 초월한 한 사람의 정(情)과 선의(善意)가 결과적으로 법률에 저촉되고 장관의 사임으로 발전한 건 유감스런 일이다” “이 문제를 정식으로 외국인 정치헌금의 문제로 삼는다면 대부분의 국회의원이 사임해야 할 것이다” “마에하라 씨의 사임은 ‘선의의 주민’으로서의 자이니치를 베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일본 매스컴들의 관련 보도를 살펴보면 초점이 ‘외국인의 위법 헌금’ 부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일부 신문은 ‘정치자금 스캔들’이라고까지 묘사했다.
이번 사건이 스캔들로 부를 만큼의 정치 이슈인지, 매스컴이 대서특필(大書特筆)할 만큼의 기사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다만 통상적으로 일본에서 정치인의 뇌물 수수 문제의 보도는 수백만~수억 엔대의 거액이었지, 이번처럼 소액(少額) 사건이 특필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전 민주당 간사장의 뇌물 수수 의혹 사건만 봐도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금액은 3억~4억 엔대다.
재일교포와 일본정치인들의 친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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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카가와 쇼이치 전 재무대신. |
“부임하고 얼마 안 됐을 때, 60대 재일교포 유지(有志)의 아들 결혼식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하객(賀客)으로 관내 전·현직 국회의원과 전직 총리까지 거물급 정치인이 4명이나 와 있는 겁니다. 훗날 그 유지와 친해진 다음 교제비결을 물었더니 ‘선친(先親) 때부터 정치인 집안과 인연을 맺어왔다’면서 ‘그러니 우리 집안 행사에 오는 건 당연하지 않으냐’고 그럽디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대(代)를 이어 정치가를 하는 사례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모리 요시로(森喜朗),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등 역대 일본 총리의 집안도 짧게는 아버지, 길게는 증조부 때부터 정치를 해왔다. 재일한국인들은 일본 내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일본 정주 역사가 100년 가까이 된다. 그러다 보니 정착한 지역에서 가업을 잇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과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되고, 그 기간이 오래되다 보면 만남의 빈도는 많아지기 마련이다. 환경적으로 재일한국인과 일본정치인은 이래저래 얽힐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쌍방 간의 교류는 빈번하게 이뤄진다. 예를 들어 하토야마 전 총리는 재일민단이 작년 11월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개최한 ‘강제합병 100년, 조국과 함께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65년’ 행사에 특별 게스트로 참석했다. 또 자민당 중진의원인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2009년 사망) 전 재무대신의 경우 생전에 재일한국인들이 주축 멤버로 구성된 전국야키니쿠협회(全國燒肉協會)의 명예고문으로 활동했다. 나카가와 대신은 야키니쿠데이(8월 29일)와 신년회 같은 주요 행사 때면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고 한다.
일본 정치인들은 한국 음식점의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도쿄만 살펴봐도 시나가와(品川)에 있는 고급 야키니쿠 음식점인 J식당은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측근들과 함께 자주 찾는 단골집이고, 마찬가지로 교포가 경영하는 아카사카(赤坂) B주점은 나카노 간세이(中野寬成) 국가공안위원장이 가끔씩 들러 한잔 하는 곳으로 소문 나 있다. 지금은 문을 닫은 긴자(銀座)의 한정식집 비원(秘苑)은 한때 일본 정치인들의 비밀 회합장소로 유명했다.
“돈 줬다고 사업적으로 득 본 일 없다”
한편 이해하려 해도 좀처럼 풀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인터뷰한 재일한국인들이 정치인에게 돈을 준 건 인정하면서도 한사코 청탁의 목적은 아니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국 국내인의 관점으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정치와 돈’은 바늘과 실 같은 관계. 아무개 정치인이 누군가에게 돈을 받았다면 분명 쌍방 간에 검은 거래가 있었으리라 의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재일한국인들은 ‘정치와 돈’을 그들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오사카(大阪)를 비롯한 간사이지방(關西地方) 일대에서 여러 개의 파친코점을 경영하는 K사장(73)의 고백은 일본 땅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의 생각을 읽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사업 규모가 클수록 정치인들과 만날 기회는 많아집니다. 경영자인 나는 한국국적이라 투표권이 없지만 직원들은 거의 일본인 아닙니까. 선거철이면 의원들이 수시로 찾아옵니다. 국회의원부터 시(市)의원까지 민주당 자민당 여야 할 것 없이요.
해가 바뀌면 새해 인사하러 오겠다고 연락을 해옵니다. 그렇게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은 없습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가 하던 대로 ‘차비나 하라’며 슬쩍 봉투를 포켓에 찔러줍니다. 돈 줬다고 사업적으로 득 본 일은 없어요. 기대도 안 합니다. 그 정치인 나중에 거물 될 텐데 밉보여서 좋을 건 없잖아요. 무슨 일 생기면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 내 아들 결혼식 때도 올 테고…. 미리 관리하는 차원이지요.”
이는 비단 K사장처럼 돈 잘 버는 사업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한적한 골목에서 야키니쿠 굽고 밥장사를 하는 영세업자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마이너리티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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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정권 운동을 벌이는 재일교포들. 재일교포가 연루된 정치헌금파문은 재일교포 참정권 운동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이러한 재일한국인과 일본 정치인 간의 특수한 관계상은 평생을 마이너리티(Minority)로 살아가야 하는 ‘자이니치’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재일교포의 돈은 뒤탈이 없으니 먹어도 좋다”는 말은 ‘결코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란 머조리티(Majority)의 우월감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런 걸 당사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말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치자. 그러나 제3자적 관점에서 일본의 정치 제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불합리(不合理)해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이번에 정치이슈로 떠올랐던 외국인 정치헌금의 위법 근거로 제시된 정치자금규정법만 해도 뜯어보면 모순이 발견된다. 이 법은 원칙적으로 정치인이 외국인이나 외국법인으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걸 금하고 있다.
예외가 있는데, 일본 현지법인으로서 외국인 또는 외국법인이 반수 넘게 주식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5년 동안 일본 주식시장에 상장(上場)돼 있을 경우엔 정치인과 외국인 간 기부금 수수가 가능하다. 이 조항은 2006년 당시 여당인 자민당이 글로벌화를 주장하며 해금(解禁)시킨 특례(特例) 규정이다. 이는 같은 외국인 신분이라도 정치헌금에 대해 기업은 ‘OK’ 개인은 ‘NO’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푼돈은 안 받고 큰돈은 받겠다”는 정치인들의 노림수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 법의 취지인 외국인의 일본 정치에 대한 간섭이나 영향력을 방지하겠다는 것에도 모순된다.
그뿐 아니다. 일본 정당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외국인의 당원 또는 서포터 입회(入會)를 허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당원 입회 자격을 보면 “당의 기본이념과 정책에 찬동하는 18세 이상이라면 누구든 가입할 수 있다. 재외일본인 또는 재일외국인도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재일한국인들 속에서 일본 정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는 “일본 국회의원 후원회 회장까지 지냈다”는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으로서의 권리는 제한받고 있다. 재일한국인들은 일제 때 건너와 그 후손이 4세, 5세가 될 때까지 일본 땅에서 주민으로 살고 있고 꼬박꼬박 세금도 내지만, 정작 주민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지방참정권은 없는 실정이다. 재일민단에서 1995년 영주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 운동을 시작한 이래 일본 정계에서 ‘다 된 듯한’ 분위기가 연출된 것만도 수차례, 17년째를 맞고 있는 현재도 입법 전망은 안갯속이다.
재일교포들의 불안감
재일한국인 사이에서는 일본 정치인들이 당파(黨派) 싸움을 하면서 외국인정치헌금 문제를 불씨로 삼은 걸 두고, 참정권을 요구하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경고장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참정권에 대해 목소리를 가장 강하게 내는 외국인이 재일한국인이고, 앞장서고 있는 건 그들의 조직인 재일민단이다. 이 때문에 시종일관 참정권 부여에 반대해 온 자민당이 찬성 입장을 표명해 온 민주당을 공격할 꼬투리로 외국인 정치헌금 문제를 꺼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재일한국인들에게 “너희 문제로 전도유망한 차세대 정치리더가 낙마(落馬)한 것도 모자라 현역 리더인 총리까지 궁지에 몰렸으니 암묵적으로 책임지라, 잠자코 있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동일본대지진 발생 2개월. 일본인들은 대재난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재기(再起)를 향한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번 대지진으로 확인된 사실은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손잡고 복구에 땀 흘리고, 힘들 때는 어깨를 두드려주는 이웃이란 것이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로부터 조센진(朝鮮人) 부락이라 손가락질 받았던 오사카의 쓰루하시(鶴橋)에서는 동포들과 일본인 가정이 서로의 관혼상제(冠婚喪祭)까지 챙겨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봄이면 하나미(花見·꽃놀이)를 하고 1년에 한두 번은 당일치기 버스 관광을 같이 떠난다. 이런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한국이니 일본이니 국적 구분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의미도 없을 터다.
취재 파일들을 정리하면서 일본 정치가 일반의 상식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도쿄의 한 일본인 사회봉사단체에서 일하는 K씨(58)의 발언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총리 퇴진 파동 때 ‘외국인’이란 용어가 자꾸 등장해 불안했습니다. 재일교포가 일본사회의 구성원 자격이 없다는 소리로 들리더군요. 이웃의 일본인들도 정치인들에게 2만~3만 엔짜리 파티권(정치후원행사 티켓) 사고 축하할 일 있으면 후원금을 냅니다. 이번 일로 우리는 그런 성의 표현도 안 된다고 하니 이러다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