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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분석

민주화 바람, 중국에도 불까

공산당 권위주의 통치와 시장경제는 양립 못해

글 : 김기수  세종연구소 국제정치경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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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와 소유권은 함께 발전, 공산통치로 인한 ‘역사의 단층’ 깊어
⊙ 민주화운동 진압해도 기득권세력 내 이해관계 심화로 자멸할 것
⊙ 민주화 운동 성공해도 複數정당제, 자유선거, 권력 분립 안착 어려워

金起秀
⊙ 54세. 연세대 심리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석사, 美미주리-컬럼비아대학원 정치학 박사.
⊙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同 수석연구위원 역임.
⊙ 저서 : 《중국, 도대체 왜 이러나》 《동아시아 역학구도: 군사력과 경제력의 투사》 등.
지난 2005년 1월 홍콩시민들이 중국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국은 작년에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덩치에는 걸맞지 않게 체제의 불안정과 관련한 의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의문이 나오는 것은 공산주의 정치제도와 자본주의 경제질서라는 이질적(異質的)인 두 체제가 병존(竝存)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정부가 반(反)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이나, 최근 이집트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도를 통제하는 것은 중국정부 스스로 현 체제의 유지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주의의 배경과 특징이 무엇이기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민주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의 첫 행보였던 1215년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는 “왕은 국민의 동의(同意)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고, 국법(國法)에 따른 재판을 통하지 않고는 국민을 구속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조세권과 사법제도의 독립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 합의가 잘 안 지켜지자 1600년대에는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이라는 정치변혁을 통해 더욱 강력한 조치가 취해졌다. 선거의 자유 등이 추가됐지만 내용은 마그나 카르타와 거의 동일했다. 여기서 왕의 조세권이 억제되었다는 것은 정치경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왕은 우선 국민의 소유권을 존중하여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면 안 되고, 또한 거둔 세금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하므로 시민이 정치에 참여, 그것을 감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대표(representation) 없는 과세(課稅) 없다”는 정치 명제(命題)가 뿌리내리는 순간이다. 국민소득의 원천인 자유로운 경제활동, 즉 시장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
 
  1689년에 터진 9년 전쟁에 즈음하여 부유한 상인들은 영국의 왕에게 전쟁비용을 뀌어주겠다고 제안한다. 대신 출자자들은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권한과 개인에게 대출할 수 있는 권리를 왕의 묵인하에 갖게 되었다. 이것이 영국 중앙은행, 즉 잉글랜드은행(영란은행)의 효시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채무가 금융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채무(債務)는 국채(國債)의 형태로 민간에 유통되었으므로 채권(債券)의 이자율은 정부의 경제적 업적과 신뢰도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시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 셈이다. 한마디로 서구(西歐) 민주주의는 소유권과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권력이 간섭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억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단층
 
덩샤오핑(오른쪽)은 1950년대 후반 마오쩌둥(왼쪽)의 반(反)우파투쟁의 충실한 집행자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공식 출범 이틀 전인 1949년 9월 29일 인민정치협상회의 1차 전체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제정된 공동강령에는 경자유전(耕者有田)과 보통선거가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선거란 인민의 정치 참여를, 경자유전이란 문자 그대로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민주자본주의의 가능성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1953~1958년 마오쩌둥(毛澤東)은 위의 강령을 무시한 채 공산화(共産化)를 단행했다. 소련식 집단화와 국유화(國有化)를 적용함으로써 사유(私有)재산제와 시장경제의 가능성을 뿌리째 뽑아 버렸다. 1957년에는 유명한 반우파(反右派) 운동을 전개하며 전국 500만명의 지식인 중 약 55만명을 타도했다. 마오쩌둥의 명을 받아 정풍(整風)운동을 실제로 집행한 인물이 다름 아닌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집체(集體) 노동에 기초한 인민공사(人民公社)가 1958년 출범한 것은 공산화의 완결판이었다. 당시 중국의 거의 유일한 자원이었던 농업생산을 산업화를 위해 무리하게 전환하며 추진한 사업이 인민공사와 동시에 마오쩌둥이 추진한 대약진(大躍進)운동이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1959~1961년 3000만~4000만명 정도가 아사(餓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단농장제의 결과 농업생산성은 처음부터 낮았고, 그런 농촌자원을 강제적으로 동원하며 산업화를 추진하였기에 농업자원이 소진되면서 식량부족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일종의 정치폭동인 문화대혁명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국 현대사에서 건국 초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반대 방향으로 권력이 행사됨으로써 과거와는 단절되는 단층(斷層·faulting) 현상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즉 점진적인 선형(線型)발전(linear progress)에는 실패한 셈이다.
 
  과거 서구,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는 단층 현상의 명암(明暗)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단절의 불가피한 부산물인 사회적 충격이 거의 없었던 예가 영국과 미국이다. 그 반대의 경우가 대혁명으로 상징되는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대혁명 후 거의 100년 동안 정치적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중국의 경우도 역사의 순리와는 반대로 공산주의 개혁이 추진되었으므로 단층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충격의 흡수를 위해 많은 에너지가 소진됨은 물론, 여기에 공산주의 자체의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침하 현상이 겹치면서 건국 후 20년 이상 정치경제적 퇴보는 불가피했다.
 
 
  법치의 미흡이 사상적 혼란 야기
 
  마오쩌둥이 죽은 후 후계자로 지목된 화궈펑(華國鋒)조차 붕괴에 이른 국민경제의 실상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과거 브레즈네프 시절 끝 무렵부터 추락했던 소련경제의 실상을 인정하는 데서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누가 집권을 했든 중국의 개혁개방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 속도와 정도에 있어 대담성을 보인 인물이 덩샤오핑이라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1978년 실권(實權)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다음해 7월 제정된 ‘중외합자경영기업법(中外合資經營企業法)’에 기초, 개혁개방을 추진하게 된다. 중국 공산화 이후 처음으로 자본주의가 경제의 운영방식으로 도입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도입은 논리상 과거 마오쩌둥식의 공산주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아무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므로 단층의 충격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단층이 깊다는 것은 사회적인 충격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 소련과 같이 몰락할 수도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도 체제붕괴를 피한 것은 중국의 단층구조가 소련처럼 깊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기득권층이 자발적으로 개혁에 나선 것이 하나의 이유이고, 권력의 이완 현상이 없었다는 것이 또 다른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바로 후자(後者)가 현재까지 중국의 기득권층이 권력분산을 반대하는 논리적 배경이다.
 
  하지만 충격의 여진(餘震)은 개혁개방 기간 내내 전해졌고, 또한 다음의 체제적 모순을 피해 갈 수도 없었다. 자본주의는 도입됐지만 정치제도는 과거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이 특히 그러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서로 상이한 정치경제체제의 공존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1980년 이후 개혁개방이 처음 적용된 남부의 경제특구와 인접한 광둥(廣東)에서 자본주의 특유의 경제사범(經濟事犯)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밀수(密輸)거래가 적발된 것인데, 공산주의 정치체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81년 1월 중앙정부는 범죄자의 일망타진을 하달했다.
 
  하지만 사건은 꼬리를 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기술자가 자신의 업무 이외 시간에 다른 기업을 도와주고 돈을 받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부의 경제단위에서 대외(對外)거래를 통해 얻은 외환(外換)을 시장과 공식 환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이익을 취하기 위해 다른 물자 혹은 화폐로 교환하는 경우는? 또한 무역거래를 위한 상담 중 교제비를 사용하였다면?
 
  당시 중앙정부는 그런 모든 행위를 범죄로 처리했다. 하지만 그 수가 많았으므로 적발된 사람은 처벌한 후 다시 복권(復權)해 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법(司法)제도의 정비와 법에 의한 통치다. 당시 중국의 혼란은 제도적 뒷받침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反證)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법에 따르면 위의 행위들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서구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사법권의 독립에 기초, 법에 의한 통치가 지속적으로 강조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법에 의한 통치는 기득권의 양보, 즉 당시 왕이 권력을 신민(臣民)에게 이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이치로 중국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기존 권력을 양도할 의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사상적 혼란을 겪게 된다. 이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가시화된다.
 
 
  톈안먼사태
 
1989년 톈안먼사태 당시 톈안먼광장에 나와 시위학생들에게 자제를 호소하는 자오쯔양 공산당 총서기(가운데).
  ‘법의 지배’ 원칙이 확립되지 않는 경우 경제활동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은 애매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경제범죄에 대한 처벌은 권력의 자의적(恣意的) 판단에 의존하게 된다. 법치주의(法治主義)와 권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미비하면 경제 이권(利權)의 배분에서도 맹점(盲點)이 드러난다. 권력에 의한 자원의 자의적 배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돈을 가진 자 혹은 원하는 자와 권력가의 유착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결과는 당연히 부패로 나타난다.
 
  1989년 1월 홍콩의 《대공보(大公報)》가 ‘대륙의 부패를 파헤치다’라는 분석 기사를 보도하면서 중국의 부패가 쟁점화된 적이 있다. 당시 대부분의 중국 지도자들이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여기에 자본주의 특유의 시장 요동현상(volatility)이 더해졌다. 1988년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은행 저축을 인출하면서 물건을 사재기한 것이다.
 
  헷갈림의 정점(頂點)에 1989년 6월 3일의 톈안먼사태가 있었다. 시위대의 요구는 부패 반대와 민주체제의 확립이었다. 당시 중국 지도층에서는 두 개의 상반되는 시각이 존재했다.
 
  총리였던 리펑(李鵬) 등의 강경파는 시위의 원인을 사회기강의 해이에서 찾았다. 당연히 권력을 동원해 모든 불미스런 행위를 근절하는 것이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으로 대표되는 온건파들의 의견은 반대였다. 이들은 부패는 비대한 권력, 즉 민주화가 진척되지 않은 상황이 원인이며, 경제적 혼란은 통화팽창에 따른 심리적 기대가 이유였으며, 물가상승은 시위의 쟁점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민주화를 진척시키고 당시만 해도 전체 경제의 40% 정도에 머물던 시장경제의 비율을 확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소유권과 시장원리가 확대되어 권력이 축소되고, 이중(二重)가격제와 같은 가격체계의 모순이 사라지면 부패와 시장의 혼란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강경파의 주장이 채택되면서 톈안먼사태는 무력(武力)진압으로 마무리되었다.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후 공산당 내 불순 세력에 대한 숙청 등이 이어지면서 민주화의 요구는 현재까지 철저히 억제되고 있다. 그 과정의 중심에 덩샤오핑이 서 있었는데, 1957년 우파 지식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주도했던 인물이 덩샤오핑이라는 사실과는 우연한 일치일까?
 
  아무튼 덩샤오핑이 집권 내내 권력분산에 대해서만은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덩샤오핑의 한계였다.
 
  자오쯔양의 입장은 시위대의 의견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것이었다. 무력 진압은 곧 그의 실각을 의미했다. 그러나 과거 서구의 역사와 한국의 발전사는 자오쯔양의 견해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며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인 민주화가 당시 중국을 관류하던 사회적 흐름이었다면, 탄압은 대세에 역류(逆流)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발전 과정에 단층구조가 형성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집권층의 자발적이며 점진적인 개혁이 있는 경우에만 단층 현상을 모면할 수 있다는 서구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국이 건국 초기에 경험했던 단절의 역사가 다시 반복됐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경험으로 볼 때, 집권층의 자발적·점진적 개혁이 있는 경우에만 단층현상을 모면할 수 있다.
 
 
 
금융자본으로 확대된 부패

 
  1992년 덩샤오핑이 단행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기점으로 고도성장이 이어지면서 민주화 요구는 수면 밑으로 잠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서로 상이한 두 체제의 공존이라는 모순이 해결된 적은 없었다.
 
  경제가 팽창하면서 막대한 부(富)가 축적되자 권력과 사업가들의 유착이 과거보다 한 차원 높은 데서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지난날 산업분야의 사업 이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밀착을 넘어 금융자본의 배분을 둘러싼 이해의 결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誌)는 다음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로 대변되는 새로운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확대일로에 있는 소득불평등과 사회동요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즉 금융체제에 대한 시장원리의 확대 적용을 사실상 중단한 셈인데) 이렇게 되면 자기들끼리만의 거래 때문에 부채(負債)와 각종 금융상품의 적정가격에 대한 정보가 감추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외국인도 참가하는 경쟁입찰 제도가 있어야 적정의 가격이 매겨지고 정보가 공개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이유이다.
 
  당연히 자본 배분의 왜곡 현상이 발생하는데, 결국에는 곪아 터지게 된다. 많은 고위 관료가 문제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개혁을 하려면 이번에는 정치적 이해가 걸림돌이 된다. 서로 다른 지방(省)들이 모든 금융사업에 동시에 관여하여 이득을 취하고 있으므로, 기존의 체제에 대한 개혁 혹은 개방은 지방이 중앙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자오쯔양이 주장했던 강한 권력의 필연적인 결과인 부패가 금융자본에까지 확대된 셈이다. 정치적 모순이 경제를 옥죄고, 반대로 경제적 이해는 정치적 결단을 방해하는 또 다른 왜곡된 구조가 뿌리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출신의 금융전문가인 예일대학 천즈우(陳志武) 교수도 《조선일보》를 통해 유착과 관련된 포괄적인 문제점을 파헤친 적이 있다. 그는 지속적인 발전의 조건으로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 민간부문의 사유재산을 정부기관으로부터 확실히 보호하는 장치의 마련, 그리고 정부가 보유한 국영기업 자체와 국영기업 보유자산의 민영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중국정부는 정치적인 의지가 없다. 30년 전에는 모두가 가난했고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개혁도 가능했겠지만 현 체제 속에서 이득을 얻는 이익집단이 존재하기에 개혁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해의 유착이 자발적인 개혁의 치명적인 걸림돌인 셈이다.
 
 
  자오쯔양, “현대적 시장경제하려면 의회민주주의 해야”
 
천즈우 예일대 교수.
  흥미로운 점은 위의 분석들이 과거 톈안먼사태의 원인을 제공했던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와 뒤를 이은 자오쯔양의 견해를 사실상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7년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기 직전 후야오방이 직접 주관하여 제정한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의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 사회주의 발전 과정에서 드러난 중요한 역사적 교훈은, 첫째 역량을 집중해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했고, 둘째 민주정치를 효과적으로 건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사회주의 민주 없는 법제는 절대 사회주의 법제가 아니며, 사회주의 법제 없는 민주는 절대 사회주의 민주가 아니다.”
 
  후야오방의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 톈안먼에 학생과 시민들이 모이면서 민주화 운동이 촉발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오쯔양도 그의 사후(死後) 미국에서 출판된 비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중국을 비롯한)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행한 민주제도는 완전히 형식에 치우쳐 있고 인민이 주인 되지 못하며 소수(少數), 심지어는 개인이 통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선진국이 실시한 것은 의회민주주의였다. 그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선진국 중에 다른 제도를 실시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는가. 이는 한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고 현대적인 시장경제, 현대문명을 실현하려면 정치체제는 반드시 의회민주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여 년 전 중국의 최고 지도자 중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그토록 꿰뚫고 있었던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이다.
 
 
 
‘폭동’ 수준에 도달한 지니계수

 
2008년 10월 중국 광둥성에서 경찰이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비해 정부청사를 경비하고 있다.
  고도성장이 빚어낸 최고 수준의 화려한 경제통계와는 반대로 중국에는 최악 수준의 정치경제 통계 또한 수두룩하다. 전체 인구의 0.3%인 390만명이 총 은행예금의 3분의1 이상, 그리고 국민 총소득의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하루 수입이 2달러 미만인 절대 빈곤층은 전체 인구의 54%에 이른다.
 
  대기오염이 가장 심한 세계 20개 도시 중 16개가 중국에 있다. 그 결과 매년 약 100만명의 중국인이 환경오염 때문에 목숨을 잃고 있으며, 약 2000만명은 호흡기 질환이나 그 밖의 환경 관련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중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값싼 상품의 지속적인 수출을 위한 희생이었다.
 
  최근에는 정치적으로 더욱 중요한 통계가 공개된 적이 있다. 소득 분포의 불평등을 보여주는 지니지수(Gini coefficient)가 그것이다. 1978~1984년 0.16에 불과하던 것이 2007년 0.47로 높아졌고, 2010년에는 드디어 0.5에 이르고 있다. 통상 0.4 이상을 고도의 불평등, 0.5 이상을 사회적 폭동 가능성의 수준으로 분류하고 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음을 알 수 있다. 후진타오가 시장의 확장과 금융산업의 개혁을 뒤로 미루고 소득 불평등 문제에 집중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과는 최근 4년 동안 연평균 9만 건 이상의 소요가 발생했다는 통계로 이어진다. 문제의 심각성을 간파했는지, 현직을 갖지 않고 있는 태자당(太子黨)의 재야(在野)인사들이 “공산당의 각급 위원은 물론 중앙위원과 정치국원도 모두 직선제(直選制)로 뽑아야 한다”는 건의를 연초(年初)에 했다.
 
  이 모든 것이 과도한 중앙집권식 정치권력과 권력의 억압적 통치, 서로 상이한 정치체제와 경제질서가 병존하고 있는 결과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1949년 민주화의 가능성이 무산된 점, 1989년에는 더 좋은 기회를 놓친 사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버린 기득권층의 이해 등을 감안하면 중국의 지도층이 스스로 정치개혁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제2의 톈안먼사태와 같은 국민들의 궐기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상존하기에 중국의 민주화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는 접지 않을 수 없다.
 
 
  두 가지 시나리오
 
  한국은 놀랍게도 건국 이후 현재까지 ‘단절의 역사’를 경험한 적이 없다. 겉으로는 민주화 요구가 거절된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단층현상을 찾기 힘들다. 이승만(李承晩)의 민주자본주의 체제 구축과 안보 확충, 박정희(朴正熙)의 중앙집중식 경제발전, 전두환(全斗煥)의 시장중심의 경제개혁, 노태우(盧泰愚)의 시장 확장과 시민에로의 권력 이양, 김영삼(金泳三)의 선진 투명경제를 위한 개혁과 세계화의 시동, 그리고 김대중(金大中)의 강도 높은 경제 구조조정과 국제화의 완수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한국현대사는 매 시기마다 그 전의 업적에 기초, 개혁이 단절 없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은 출발부터 민주자본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투표에 의한 정치권력의 창출과 소유권의 보장, 그리고 자유시장의 작동은 처음부터 국민들에게 너무도 자연스런 환경이었다. 역대 권위주의 정부 모두가 국민의 힘에 의해 교체된 것은 출발부터 국민의 인식과 수준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과 민주주의가 마치 변증법(辨證法)과 비슷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가운데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공산주의 정치경제체제로 출발했으므로 한국과 같은 발전 조건은 처음부터 결여되어 있었다.
 
  이것이 향후 단절이 없는 중국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이고, 역으로 과거 50년 동안 중국이 여러 차례 단절의 역사를 경험한 까닭이다.
 
  어느 특정 시점에 민주화의 시위가 가시화된다면 정부는 강제진압에 나서며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할 것이다.
 
  두 가지의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는데, 우선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하는 경우이다. 공산당 전체의 이해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과정을 통해 강화된 공권력이 체제 전체를 옭죄게 된다는 점이 문제이다. 권력이 지금보다 강화되는 경우, 기득권 내에서 기존의 경제 이권을 빼앗기는 형태로 피해를 입는 집단이 많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경유착(政經癒着)의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권력과 시장의 결탁, 그리고 외국과의 사업 연계구도 등을 통한 자원의 자의적 배분이 현재의 수준에서 정교하게 지켜져야만 기득권 전체의 이해가 보호될 수 있는데 그것이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이 경우 기득권 내의 자멸적 투쟁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다음으로 국민의 민주화 운동이 성공하여 기득권층이 교체되는 경우를 가정할 수도 있다. 문제는 선거조차 제대로 치러 본 적이 없는 중국이 합당한 정당제, 공정한 자유선거, 권력분립의 정치체제, 언론의 자유 등을 무리 없이 안착시킬 수 있냐는 것이다.
 
 
  갈 길이 먼 중국
 
  역사적으로도, 과거의 질서를 완전히 뒤바꾸는 충격적 조치가 있는 경우 순탄한 진보가 이루어진 적은 매우 드물었다. 단층 현상 때문인데, 앞서 소개한 건국 초기의 개혁 기회의 무산, 그리고 톈안먼사태의 무력 진압과는 정반대의 단절을 뜻한다. 앞의 예는 기득권층의 점진적인 개혁이 가능한 기회를 무산시켰다는 맥락에서 단층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이번에는 기득권층을 완전히 뒤집는다는 의미에서 단층현상이 불가피하다는 의미이다.
 
  어떤 경우든 내부적 혼돈과 모순이 정리되지 않으면 국력은 낭비될 수밖에 없다. 국력을 집중시킬 수 없는 나라가 강대국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내부의 모순을 최소화시킨 대표적인 예가 영국과 미국이었는데, 전자(前者)는 19세기의 패권국(覇權國)이었고, 후자(後者)는 현재의 패권국이다.
 
  이상이 중국의 성공적인 민주체제 구축과 지속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체제의 정착 가능성을 어둡게 보는 까닭이고, 나아가 중국이 초강대국이 되기 어렵다고 보는 이유이다.
 
  1960년대에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는 곧 ‘시민사회의 정치문화(civic culture)’”라는 정의가 내려진 적이 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분명히 구현되는 가운데, 사회의 다양성이 컨센서스를 이루며 그 위에 형성된 정치적 권위가 국민들 사이에 인정되는 제도라고나 할까. 그렇게 보면 아시아의 정치 선진국인 한국의 민주주의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는 원래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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