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 위에서 하룻밤 - 구베이커우(古北口)~진산링(金山嶺)장성 코스 : 월간조선

베이징(北京) 둥즈먼(東直門)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980번 시외버스는 쓰위안차오(四元橋)로 나와 징순루(京順路)를 따라 베이징 동북 방향으로 약 2시간을 넘게 달려 미윈셴(密雲縣)에 도착했다. 시각은 오전 11시30분.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미국인 크리스는 “예정보다 30분 이상 늦게 도착했다”고 툴툴거렸다. 출발하자마자 잠을 청했던 김정호(36)씨도 버스가 속도를 늦추자 기지개를 켰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서 있던 승객들도 버스가 미윈 내 버스정류장에 설 때마다 한 떼씩 버스 밖으로 사라졌다.

“여기는 중국 같지 않게 깨끗한데. 안 그래?”

크리스가 슬쩍 던지는 농담이 미윈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미윈은 언뜻 보면 북미(北美) 대륙에 있는 어느 작은 도시인 듯했다. 특히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강이 무척이나 맑아 보였다. 강 옆은 우리네 고수부지처럼 잘 정돈됐고 파란 잔디밭은 푸른 하늘과 더불어 도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강이 이어지는 저 멀리에 길고 깊은 산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의 목적지인 구베이커우(古北口) 진산링(金山嶺) 장성이 저 산 너머에 있다.

판룽산 장성 끝에서 바라본 진산링 장성의 모습.

미윈에서 버스 대절

버스는 종점인 신농춘(新農村) 버스정류장에서 마지막 손님인 우리 세 명을 내려놓았다. 나, 김정호씨, 크리스 오도로스키(이하 크리스) 등 칭화대(淸華大) 공공관리학원 석사 코스 동급생 세 명은 지난 10월 5일, 베이징 주변 장성 트레킹의 관문에 도착했다. 이날은 중화인민공화국 최대 경축일인 국경절(10월 1일) 연휴(1주일)가 한창인 때였다. 평소보다 버스가 30여 분 늦게 미윈에 도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말 그대로 한 떼의 중국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모두 미니버스 운전자들과 중국판 ‘나라시 택시’(무허가 택시)인 헤이처(黑車) 기사들이었다. 이곳에서 구베이커우 장성이나 진산링 장성까지 거리는 약 80~100여km. 버스는 하루에 서너 번밖에 없는 데다,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장성 입구까지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관광객 대부분은 차를 대절한다.

우리는 망설이지 않고 기사들을 상대로 흥정에 들어갔다. 흥정은 중국에 온 지 2년째가 되는 정호씨가 맡았다. 여기에 중국 체류 기간 5개월인 크리스도 거들었다. 이미 많은 정보를 갖고 온 덕에 우리는 오래지 않아 150위안(약 2만7000원)을 부르는 기사의 미니버스를 잡을 수 있었다. 옆에서 다른 기사들과 흥정하던 독일인 관광객 4명은 우리 흥정이 끝나자마자 ‘200콰이’(위안의 구어)를 불렀다. 아마 사전 조사 없이 온 탓에 우리가 흥정하는 모양을 눈여겨본 듯했다.

작고 낡은 미니버스는 우리 세 명을 태운 후, 미윈을 빠져나와 101번 국도를 타고 다시 북진했다. 여기서 구베이커우까지는 약 70여km.

중앙선 왼쪽을 달리는 우리 차

낡고 부서진 망루는 큰 바위 같은 모습을 하고 서 있다.

“한 시간은 넘게 걸리겠네요?”

내가 묻자, 정호씨가 답했다.

“중국입니다.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왕복 2차선 국도인데 한 시간은 걸리지 않나요?”

그는 긴 말 대신 “운전하는 거 보세요”라며 싱긋 웃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저 앞에서 한 떼의 차가 우리 쪽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우리가 탄 차의 우측에도 차가 있었다. ‘그럼 우리가 탄 차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렵지 않다. 중앙선 왼쪽을 신나게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2차선 국도 양쪽에는 우리네 국도처럼 농민들이 과일이며 옥수수 등을 팔고 있었다. 갓길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 차도, 우측의 차도, 앞에서 돌진해 오는 차도 도무지 속도를 늦출 기미가 없었다. 나와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손잡이를 잡았고 그 순간 사방에서 경적이 울려댔다.

앞에서 오는 차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약간 왼쪽으로 방향을 틀며 지나쳤고, 우측에서 나란히 달리던 차는 속도를 더 높였다. 우리 차는 그 속도 그대로 엄청난 소리의 경적음과 함께 우측 차 뒤에 코를 박으며 달리고 있었다. ‘쉬잇’과 ‘썅’ 소리가 우리 두 명의 입에서 나왔지만, 운전사는 무덤덤하게 운전을 계속했다.

“이래봬도 사고는 별로 안 납니다. 적응되면 별일 아니에요. 물론 저도 중국에 처음 왔을 때는 참 난감했습니다.”

정호씨는 도쿄(東京)대 법대를 졸업하고, 화장품 기업에 들어가 최근 2년간 중국법인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휴직 중이지만 이곳 근처에 공장이 있었던 탓에 지난 2년간 매일 이곳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일본 대학시험을 쳐서 도쿄대 법대에 입학한 수재(秀才)가 이 거친 환경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눈에 선했다.

크리스가 먼 망루에서 나와 정호씨가 텐트를 펴기 위해 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찍었다.

연암의 고행길 ‘청더’

곡예를 지켜보는 심정으로 30분쯤 지났을까. 길가에 ‘청더(承德) 60km’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는 구베이커우에 거의 도착했다는 의미인 동시에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그 유명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주무대를 지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청더가 바로 ‘열하’다.

이날 우리 일행이 출발한 코스는 공교롭게도 연암이 1780년 8월 5일 베이징에서 닷새 만에 500리 초행길인 열하로 떠났던 코스와 거의 일치한다. 연암은 이 닷새간의 강행군을 열하일기 23장 ‘막북행정록(漠北行政錄)’에 고스란히 담아놓았다. 열하일기를 보자.

1780년 8월 1일 연암 박지원, 연암의 삼종형(팔촌)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 등 조선 사신 일행은 한 달간의 장도(長途)를 거쳐 베이징에 도착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다. 건륭제가 어디에 있는 줄 몰랐던 박지원 일행은 나흘을 베이징에서 기다리다 8월 5일 갑자기 ‘건륭제의 고희(古稀) 연회에 8월 9일까지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는다. 열하일기에는 황실에서 조선 사신 일행을 일흔네 명으로 말도 55필로 제한하라고 명했다고 나온다.

이 때문에 연암은 한양에서부터 함께했던 가복(家僕) 중 한 명인 장복을 베이징 여관에 두고 창대만 데려가게 된다. 혼자 남게 된 장복이 동료인 창대와 주인인 연암과 헤어지는 게 서러워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곳이 우리 일행이 버스를 탔던 ‘둥즈먼’이다.

8월 5일 둥즈먼을 떠난 연암 일행은 8월 6일 백하(白河)를 거쳐 미윈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현재 미윈션을 가로지르는 강이 이 백하의 하류라고 한다. 열하일기에는 이날 미윈에 늦게 도착한 탓에 숙소와 땔감을 구하지 못해 저녁을 굶었다고 적혀 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연암이 데리고 온 가복인 창대도 말굽에 발을 밟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됐다.

‘술로 먹을 갈아 찬 이슬 속에 붓을 적시다’

산 아래까지 내려 온 장성의 모습. 밭 옆에서 허물어져 있는 장성은 옆집 담벼락 같았다.

8월 7일 연암 일행은 장대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아침 일찍부터 길을 재촉했다. 이날 연암 일행은 구베이허(古北河)에서 저녁을 먹고 밤에도 길을 재촉하여 구베이커우를 건너고 아홉 개의 강을 건넜다고 적었다. 이날의 경험을 적은 글이 열하일기 문장 중에서도 백미(白眉)라고 평가받는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밤중에 고북구를 떠나며)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하룻밤에 아홉 개 강을 건너며)이다.

연암은 ‘야출고북구기’에서 구베이커우 장성을 만났을 때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미 밤이 깊었으므로 두루 구경할 수 없어서, 술을 몇 잔 사 마시고 곧 만리장성을 나왔다. 삼중(三重)으로 된 관문을 나왔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적어 놓으려고, 차고 있는 칼을 빼어 벽돌 위의 이끼를 긁어내고, 주머니에서 붓과 벼루를 내어 성 밑에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밤을 새울 거리로 삼으려고 몇 잔을 사서 안장 옆에 매달아 놓았던 술을 모두 벼루에 붓고 별빛 아래 먹을 갈아 찬 이슬이 내리는 가운데 붓을 적시어 수십 자를 크게 써 놓았다.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삼경 조선 박지원 이곳을 지나다.’(乾隆四十五年庚子八月七日三更朝鮮朴趾源過此)>

그리고 연암은 ‘나는 한낱 서생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서 장성 밖을 나섰다’라고 읊조렸다고 한다.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서 산해관을 지났을 때 이미 장성을 경험했다. 그런데 하필 구베이커우에서 감정이 북받쳐 오른 이유가 궁금했다. 열하일기를 연구한 많은 국학자가 대개 이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즉 조선의 선비로서 처음으로 장성 바깥인 막북에 나가본 것에 감동하고 뿌듯해 했다는 것이다. 연암이 야출고북구기 후반에 중국 선비 소철의 예를 들어가며 장성 밖을 가보는 것에 큰 의미를 뒀다는 것이 근거다.

일면 ‘그게 무슨 자랑거리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당시의 상황과 지금을 비교하면 금세 수긍이 간다. 연암이 찾아갔던 장성 바깥이 어떤 곳인가? 청나라 황제가 베이징의 자금성을 떠나서 머무는 또 다른 황궁이었다. 동시에 이곳은 청나라 융성을 이끈 강희제가 북방 제(諸) 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최일선 방어선이기도 했다. 당시 세계관으로 봤을 때 유일무이한 중심 청 황제의 황궁이자 최일선 요새를 처음 가본 선비라면 이 정도 감회가 들 만하지 않을까.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정치인, 학자, 기자들이 워싱턴 백악관 근처에 가본 것을 얼마나 많이 우려먹었는지 떠올려 보라.

장성 트레킹 시작

판룽산 장성 초입에서 만난 중국 할머니가 찍어 준 우리 일행. 나(왼쪽부터), 김정호씨, 크리스.

정호씨 말대로 한 시간이 안돼서 우리는 구베이커우 마을에 도착했다. 구베이커우 마을 북동쪽으로 판룽산(蟠龍山·반룡산) 장성이, 서쪽으로 워후산(臥虎山·와호산) 장성이 있는데 이를 함께 구베이커우 장성이라고 한다. 베이징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부터 서쪽으로 ‘황야관-스마타이-진산링-구베이커우(판룽산-와후산)-무텐위-젠커우-향수호-바다링 장성’ 순이 된다.

연암이 찾아갔던 열하는 베이징이 북동쪽이니 연암이 구베이커우 마을을 떠날 때 만난 장성은 이 판룽산 장성의 일부였을 것이다.

우리 일행도 이날 판룽산 장성 쪽으로 향했다. 이미 오후 1시가 넘은 탓에 워후산 장성 쪽으로 갈 경우 오늘 판룽산 장성으로 주파하기 어려울 듯해서다. 판룽산 장성은 총 길이 15km이며 84개의 망루가 밀집되어 있다. 망루는 대부분 산봉우리나 산골짜기가 시작되는 곳에 세우므로, 못해도 서른 번 이상은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번갈아 타야 한다는 결론이다. 한겨울이 아니라면 보통 성인 남자는 1시간에 산길 3km 정도를 간다. 그러면 대략 판룽산 장성 종주에 5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보면 된다.

장성 입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샀다. 1인당 20위안(3400원)이니 중국 물가를 생각하면 꽤 비싼 편이었다. 이날 날씨는 매우 맑았고, 오후 기온은 다소 더운 편이었다. 겨울 점퍼를 입었다가 10분도 안돼서 배낭 속에 집어넣을 정도였다. 드디어 ‘장성 하이킹을 하는구나’하는 마음에 우리 세 명은 다소 들뜬 기분이 됐다. 하지만 들뜬 기분도 잠시. 등산길에서 만난 동네 아주머니 한 명의 친절한 조언에 일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중국인 아주머니에 따르면 판룽산 장성 중간 지점에서 진산링 장성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는 것이다. 군사보호구역이라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였다. 정호씨와 크리스가 다른 길이 있는지 물어보자 ‘지역 농민들이 이용하는 농로(農路)가 있는데 외지인은 찾기 어렵다’는 말이 돌아왔다. 일행은 잠시 고민을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만둘 수는 없는 법. 일단 올라가기로 했다.

망루마다 다른 풍광

장성 가이드를 고용하고 올라온 캐나다인 커플.

판룽산 장성 아랫마을에서 얕은 경사로를 따라 약 30여 분을 올라가자 장성을 밟을 수가 있었다. 일단 장성에 오르자 사방이 그야말로 막힘이 없었다. 이곳이 베이징 인근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하늘 아래는 모두 산이었다. 산 위의 하늘도 한국의 가을 하늘처럼 새파랬다. 구름 한 점, 먼지 하나 없었다. 버지니아주(州)가 고향인 크리스는 “우리 고향 하늘도 가을엔 이렇게 맑다”고 했다.

우리는 진산링 장성 쪽으로 동진했다. 관광객을 위해 단장한 바다링 장성과 달리 판룽산 장성은 이미 자연 그대로가 됐다. 높이 세운 장성의 담벼락은 벽돌이지만 장성 위에 난 길은 흙길이었다. 그 흙길 사이로 이름 모를 풀과 꽃,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 아니라 산등성이를 밟고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망루(望樓) 중 일부는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져 그 자체가 산의 바위가 된 것처럼 보였다.

판룽산 장성은 그다지 경사가 심하지 않아 아주 힘든 코스는 아니었다. 등산화, 스틱, 충분한 물만 준비하면 어린아이나 노인들도 힘들지 않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망루 가운데 7~8개 정도가 높은 산봉우리에 있어 이곳을 오르고 내릴 때는 조심해야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성인 남자인 우리 세 명도 가끔씩 아찔한 망루가 있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장성의 코스 난이도에 비해, 우리 일행의 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망루를 지날 때마다 자꾸만 카메라에 손이 갔기 때문이다.

“불법행위는 절대 할 수 없다”

두어 시간이 흘렀을 때, 우리는 동네 주민들이 말한 지점에 도착했다. 멀리서부터 장성 아래를 가로질러 우리네 휴전선 같은 철조망이 남북을 갈랐다. 마지막 망루 앞에는 ‘軍事禁具. 禁地通行’(군사지역, 통행금지)이라는 벌건 글씨가 적힌 표지판이 서 있었다. ‘군사금구’라는 표지판을 본 순간, 장성 트레킹을 주도했던 크리스의 얼굴이 긴장돼 보였다. 장성 아래에서는 ‘몰래 지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웃던 그였다.

우리 한국인 동갑내기 두 명이 쳐다보자 크리스는 정색을 하며 “불법행위는 할 수 없다. 특히 군사지역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도 안 되지만 특히 들어가서는 안 될 크리스였다. 그는 미(美) 공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현재 미 공군(US Air Force) 소령(Major)이다. 그는 칭화대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 F-14 조종사였다. 잠깐 표지판 앞에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 망루에 있던 크리스가 나와 정호씨를 불렀다.

“이쪽에 길이 있대. 여기 길을 아는 사람들이 있어.”

통행금지 표지판을 만나기 직전에 망루에 앉아 있던 서양인 커플과 중국인으로 보이던 동양인 두 명이 떠올랐다. 망루에 올라가자 크리스는 이들과 활짝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크리스는 동양인 남녀 두 명을 가리키며 “운이 좋았어. 이들이 장성 전문 중국인 가이드래”라고 말했다. 함께 있던 서양인 두 명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온 커플로, 중국 여행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인터넷으로 장성 전문 가이드를 고용해서 장성에 온 것이다. 크리스 말처럼 우리 일행은 운 좋게도 이들을 만나서 장성 아래에 있는 농로를 따라서 장성 트레킹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장성 아래로 내려갔지만 민가(民家)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구석에서 사는지 노(老)부부 몇 명이 군데군데 감을 따고 있었다. 중국말만 하지 않았으면 우리 시골 산기슭에서 만날 법한 그런 노인네들이었다. 장성 아래에서도 장성은 어느 곳에서나 보였다. 어느 장성의 담벼락은 산 아래 밭까지 이어져 군사적인 목적의 담벼락이 아니라 옆집 담벼락 같은 느낌이었다. 고즈넉한 장성을 걷는 것도 즐거운데, 장성 아래 농로를 걷는 느낌은 또 새로웠다. 우리 세 명은 연방 “우리가 운이 좋아, 우리 운이 좋아”를 외치며 장성 트레킹을 즐겼다.

30여 분 산 아래로 내려가서 평지를 걷던 우리 일행 앞을 다시 산이 가로막았다. 다시 장성으로 올라가기 위한 오르막이었다. 가을 하늘의 따가운 햇볕에 이날따라 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오르막길은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산등성이와 능선을 따라가다 계곡으로 빠지길 몇 차례 하자 장성이 다시 나타났다. 장성에 올라 뒤를 쳐다보니 저 멀리 처음 농로로 빠지던 망루가 보였다. 대략 대 여섯 개 산을 돌아서 온 것이다.

우리 일행은 약 5시 무렵이 돼서 판룽산 장성과 진산링 장성이 만나는 망루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캐나다 커플과 헤어졌다. 이들은 진산링 장성 중간에서 하산해 장성 아래 호텔에서 하루를 묵을 것이라고 했다. 두 장성이 만나는 망루에는 씩씩하게 생긴 중국인 아주머니가 진산링 장성 입장료라며 ‘50위안(9000원)’을 요구했다. 아주머니가 쓴 모자에는 ‘베이징시 수도국’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수도국의 문구가 ‘걸작(傑作)’이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上善若水.’(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노자(老子) ‘도덕경(道德經)’)

이 문구 하나를 놓고 얼마나 많은 동아시아의 ‘문사철(文史哲)’들이 해석과 해석을 거듭했는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노자의 후손들은 이 난해한 철학적인 명제를 이렇게 간단히 축자적(逐字的)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논의 끝에 ‘외국인이 별문제 없이 장성에서 텐트 치고 비박(Bivouac)하려면 달라는 대로 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가 고심 끝에 돈을 내자 아주머니는 하루 일을 마치고 산을 내려갔다. 그녀는 “진산링 장성 중간에는 야간에 순찰을 도니까, 판룽산 장성 쪽에서 텐트를 치라”고 친절히 일러줬다. 우리는 그녀의 충고대로 다시 몇 개의 망루를 거슬러 적당한 망루 하나를 찾았다.

망루 위에 텐트를 치다

해가 저물어 가고 하늘 어디에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 닿을 듯이 서 있는 낡은 망루가 멀리서 지는 해와 더불어 희미해져 갔다. 허물어지고 쇠락한 망루의 모습은 애잔했다.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사는 재미가 어떤 건지도 모른 채 죽어갔을 그 많은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서 있는 이 장성의 어느 한구석에 그들 중 누구 한 명의 영혼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따뜻한 술 한 잔을 부어주고 싶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크리스가 저 먼 장성의 망루에서 돌아왔다. ‘미 공군 조종사라서 그런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다니고서도 아직 기운이 쌩쌩하다. 크리스는 자신의 배낭에서 침낭과 텐트를 꺼냈다.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날은 어두워졌고, 쌀쌀함을 넘어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세 명은 망루의 옥상에서 재빨리 자리를 고르고 텐트를 폈다. 2~3인용인 텐트는 성인 남자 세 명이 자기에 넉넉했다. 각자 자신의 침낭을 펴놓고 챙겨온 저녁거리를 꺼내놓았다.

하지만 저녁거리라야 고작 과일통조림, 오렌지, 초코파이, 월병뿐이었다. 산 위에서 푸짐하게 한 판 벌이는 우리네 등산과 비교하면 저녁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갑자기 오게 된 우리 한국인 두 명과 달리, 크리스는 시간이 있었을 텐데 그의 저녁거리도 간단한 건식(乾食)뿐이었다. 자기 입으로도 ‘정크푸드’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가 가져온 중국식 수프를 건네면서 ‘왜 저녁거리를 제대로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수프를 사양하며 간단히 대답했다.

“big food big poop.(빅 푸드 빅 푸프)”(많이 먹으면 많이 쌀 뿐)

산 위에서 음식을 많이 먹어 봐야 화장실 가기 귀찮다는 의미였다.

텐트 위에 은하수

지리산 종주를 하던 어느 겨울, 해산물 음식점을 운영하는 후배 한 명은 ‘과메기’까지 싸 들고 온 적이 있었다. 영하의 지리산 대피소에서 물미역에 과메기를 싸고 초장을 듬뿍 발라 코펠 밥그릇에 소주를 따라 마시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럴 때면 주위 등산객까지 가세해 한바탕 큰 술판이 벌어지곤 했는데….

나는 아쉬움이나 달랠 겸, 추울 때 마시려고 가져간 보드카를 꺼내 한 모금을 마시고 크리스와 정호씨에게 건넸다. 하지만 이도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크리스는 “추울 때 알코올이 몸에 들어오면 모공이 열려서 오히려 열이 발산된다”는 과학적인 설명과 함께 거절했다. 정호씨는 “보드카는 도수가 너무 높아서 사양하겠다”고 했다. 나는 혼자서 월병, 오렌지를 반찬 삼아 보드카로 저녁을 때웠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저녁을 먹는 동안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우리는 텐트에서 나와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봤다. 텐트 바깥은 완전히 어두웠으나, 일몰 직전에 불던 바람은 잠잠해져 있었다. 시간은 아직 8시도 되지 않았지만 주위에는 전혀 불빛이 없었다. 지평선 안에서는 민가도 보이지 않았고, 켜켜이 쌓인 산에 가로막혀 어딘가 있을 가로등이나 자동차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구렁이처럼 구불구불하게 산 능선을 감아 휘돌던 장성도 어둠 속에 자취를 감춘 듯했다.

인간의 불빛이 사라지자 대신 하늘 불빛이 대신했다. 우리 일행의 텐트 위로, 밤이 깊어질수록 별이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우유를 뿌려놓은 듯이 뿌옇게 밤 하늘 일부가 변했다. 얼마 만에 본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은하수네.”

“그렇네.”

세 남자는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미 공군조종사와 김정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한참 별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술기운이 오르고 눈이 감겼다. 침낭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려는데, 끝자리에 있는 크리스가 작은 랜턴을 손에 들고 <타임>

(Time)지를 읽고 있었다. 그는 김정은 3대 세습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여러 차례 머리를 흔들었다.

지난 9월 처음 봤을 때, 그는 블룸버그 통신 북한 전문기자인 브래들리 K 마틴의 〈아버지 같은 따듯한 지도자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북한과 김씨 왕조〉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약 9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보면서 그는 내게 두 가지를 질문했다.

“왜 한국 사람들은 미국이 북한을 비판하는 걸 싫어하느냐?”

“정말 김정일을 지지하는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냐?”

그는 북한의 3대 세습과 김정일을 지지하는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했다. 이런 사람이 어디 미국 공군인 그뿐인가. 우리에게 강의를 하는 칭화대 교수들에게조차 북한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중국 공산당원이자 중국 정부의 외교정책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교수가 가장 북한을 경멸하는 게 중국 지식인 사회의 현실이다.

미 공군사관학교 졸업생 1000명 가운데 매년 배출되는 전투기 조종사는 100여 명 안팎이라고 한다. 미 공군의 이 엘리트는 김정일 부자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에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새벽 무렵 어디선가 폭죽 소리가 여러 차례 울린 것을 제외하고 귀뚜라미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한 가지 더 있었다. 저 먼 하늘에서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는데, 잠결에 분간이 가질 않았다.

망루의 장성, 진산링

다음 날 우리 일행은 아침 7시에 다시 짐을 꾸려 진산링 장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산링 장성은 명(明)나라 장성의 대표적인 구간 중 하나로 명 홍무(洪武) 원년(1368년)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대장군 서달(徐達)의 주관하에 시공되었다. 융경(隆慶) 원년(1567년) 왜구를 무찌른 명장인 계진(?鎭) 총사령관 척계광(戚?光)과 계료(?遼) 총독 담륜(潭綸)이 서달이 짓던 것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짓고 개축했다고 한다. 지난 1987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고, 바다링만큼은 아니지만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장성 가운데 하나다.

총 구간 10.5km인 진산링 장성은 서쪽의 룽링커우(龍嶺口)에서부터 허우촨커우(后川口)에 이른다. 세월의 풍화 작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판룽산 일대와 달리 진산링 구간은 완벽한 요새와 같았다.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진산링 장성이 산봉우리가 높고 험준한 곳에 촘촘히 망루를 지었기 때문이다.

베이징 관광국에 따르면, 진산링 장성은 10km가 넘는 장성 구간에 있는 망루가 100개에 달한다. 망루와 망루 사이의 제일 짧은 거리는 60m도 안되며, 가장 먼 것도 200m가 채 되지 않는다. 중국 장성 가운데 이만한 밀집도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베이징 관광국의 설명이다. 어제 본 판룽산 장성에 비해 진산링 장성의 망루는 크고 웅장했다. 대다수의 망루는 상·하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망루 내부에 수십 명이 들어가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베이징 관광국에 따르면 망루 내부는 60~70명의 병사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망루 아래층 내부에는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통로 6개가 가로, 세로로 뻗어 있었다. 아치형의 문 10개가 있어 자유자재로 사람들이 통과할 수 있었다. 위층에는 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언덕에서 보초를 설 때 사용하던 소규모의 벽돌로 쌓은 방이 있는데, 병사들이 비바람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오전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관광지화된 진산링 장성의 샤링커우 이후 구간에는 벌써부터 사람이 붐비기 시작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다시피 한 망루에서는 다국적 관광객 부대가 장성의 아침을 즐기고 있었다.

중국 역사와 세월,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

우리 일행의 첫 장성 트레킹은 웅대하고 거대한 쓰마타이(司馬台) 장성을 바라보는 허우촨커우 망루에서 끝이 났다. 쓰마타이 장성이 올해 6월부터 대규모 보수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는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쓰마타이 장성은 베이징의 장성 트레킹 애호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성 구간이라고 한다. 베이징 관광국은 이 아름다운 장성을 언제 재공개할지 밝히지 않고 있다.

언젠가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이 초보 시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베토벤 음악 안 듣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칭 클래식 애호가인 이 초보들은 ‘내가 어디 남들 다 듣는 베토벤만 듣는 수준이냐?’며 콧방귀를 뀌면서 점점 난해한 음악을 찾아다니게 된다.

그러다 집안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자고 있는 베토벤 CD를 발견한다. ‘오랜만에 정말 클래식 한 번 들어볼까’하는 마음으로 베토벤을 다시 접하는 순간, ‘빠지직’하는 느낌과 함께 그는 마침내 초보 애호가에서 탈출하게 된다고 한다. ‘역시 클래식은 베토벤이야’하는 마음과 함께.

나는 장성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장성도 베토벤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티베트, 신장(新疆), 윈난(雲南) 오지(奧地)를 찾아다니며 고행(苦行)을 하는 한국인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장성의 내밀한 모습을 보려고 해봤을까.

너무나 유명하고 너무나 가까이 있어 외면했다면, 마음 한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장성을 꺼내 들어도 좋을 것 같다. 우리네 옆에 중국 역사와 세월의 ‘베토벤’이 수천 년 동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