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품시스템이란 농작물의 생산, 투입, 가축 사육부터 소비-폐기까지 관리하는 개념
⊙ 식품기준청(FSA), ‘농장에서 포크까지’라는 표어 아래 식품 관리
⊙ 인기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그동안의 급식은 기름진 쓰레기”라고 주장하며 급식 개선에 앞장
⊙ 식품기준청(FSA), ‘농장에서 포크까지’라는 표어 아래 식품 관리
⊙ 인기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그동안의 급식은 기름진 쓰레기”라고 주장하며 급식 개선에 앞장
- 영국의 학교 주방 모습. 위생과 건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예로 꼽힌다.
세계의 음식문화를 거론할 때 영국은 ‘단순하고 맛없는 음식뿐인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나 고든 램지(Gordon Ramsay) 등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요리사들이 영국에서 속속 배출됐고, 정크푸드를 배제한 영양 급식이 영국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영국의 음식문화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맛없는 나라’ 영국의 수도 런던은 세계 음식의 집합소나 마찬가지다. 프랑스ㆍ이탈리아ㆍ스페인 등 유럽음식은 물론 식민지였던 인도나 홍콩 음식을 파는 식당도 즐비하다. 타이ㆍ베트남ㆍ일본 등 아시아 음식점을 주택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도 런던이다.
그러나 영국의 음식ㆍ식품문화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광우병의 ‘발상지’가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1986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광우병이 발견됐고,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영국에서 100명이 넘는 광우병 환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광우병 쇠고기를 먹는 것이 인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90년 존 검머 당시 농무부 장관이 네 살 난 딸과 함께 TV에 등장해 영국산 쇠고기로 만든 햄버거를 먹으면서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6년 후 10명의 젊은이들이 인간 광우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중증상태에 빠진 사실이 발견됐고, 영국 정부는 그제야 광우병 쇠고기와 인간 광우병의 관계에 대해 인정하고 대대적으로 30개월 이상 소 도살작업에 나섰다.
이후 식품안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정부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2000년 식품안전 관련업무를 통합한 독립정부기구 식품기준청(FSA:Food Standards Agency)이 설립됐다. 2001년에는 농수산식품부가 환경부와 합쳐져 환경식품농림부(DEFRA:Department for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가 탄생했다. 또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학교급식을 비롯해 청소년들의 먹을거리를 안전하게 관리하자는 ‘스쿨 푸드 트러스트(school food trust)’와 ‘푸드 포 라이프 파트너십(food for life partnership)’ 단체가 설립되기도 했다. 영국의 식품안전 시스템은 세계 각국의 정부 관계자들이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오는 수준이 됐다. 영국의 수도 런던을 찾아 영국의 식품 관련 기관들을 돌아봤다.
“농산물 생산과 안전은 국가의 미래”
먼저 영국의 농업 및 식품 정책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선진국 중 농업정책의 ‘모범생’으로 불리는 곳이 바로 영국이다. 농업 종사자가 인구의 2%도 안되지만 농촌에 대한 지원이 많아 농민들의 만족도가 높으며, 식량자급률이 2008년 기준 72.4%에 달할 정도로 대부분의 식품을 자급자족하고 있다.
영국의 식품과 농업을 관장하는 정부 부처는 환경식품농림부(DEFRA)다. DEFRA를 방문하기 위해 런던의 중심부 웨스트민스터를 찾았다.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템스강을 따라 이어지는 웨스트민스터 지역은 영국 국회와 정부기관들이 밀집해 있는 영국 정치의 중심지다. DEFRA는 정부기관들이 모여 있는 스미스스퀘어의 한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DEFRA는 2001년 1월 농업ㆍ수산업ㆍ식품부인 MAFF(Ministry of Agriculture, Fisheries and Food)가 환경ㆍ교통ㆍ지역부(DETR)와 통합돼 설립됐다. 2008년 10월에는 DEFRA의 기후팀이 분리, 기존의 BERR(산업규제개혁부)과 합쳐져 에너지ㆍ기후변화부가 설립됐다.
DEFRA의 직원수는 1만여 명이며 연간 예산은 30억 파운드. 업무는 환경ㆍ농업ㆍ수산업ㆍ식품ㆍ동식물ㆍ농촌 관련 업무까지 광범위하다.
DEFRA의 식품ㆍ농업부문 홍보담당자 조애나 글라이드 씨는 “농업과 식량문제는 국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만큼 DEFRA는 많은 예산과 인력이 소요되는 중요 부처”라고 소개했다. 그의 설명이다.
“광우병 사태를 비롯해 구제역, 성인병, 비만 등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기존의 식품 공급 체계에 의문을 품게 됐습니다. 현대인들은 과일이나 야채를 충분히 먹지 못해서 또는 지방이나 설탕, 소금 등을 과잉섭취해 조기사망하기도 하고요. 식품 포장과 관련된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 처리문제, 환경문제, 농업에 소요되는 자원 공급문제 등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식품 생산량이 안정적이지 못하게 되면서 식량부족 사태를 겪을 수도 있고, 환경문제와 자원부족현상도 심각해집니다. 이 같은 식품과 관련한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2001년 설립된 통합부처 DEFRA지요.”
DEFRA가 설립되기 전에는 식품안전 조직체계가 MAFF와 보건부(DOH)로 이원화돼 있었다. 그러나 광우병이 대두된 1990년대 말 식품안전체계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2000년 식품기준청(FSA)이 설립됐고, 과거 MAFF에서 담당하던 위생관리 기준설정 및 안전성 평가업무 등 식품안전 업무가 FSA로 이관됐다. 이후 MAFF는 DETR과 통합돼 DEFRA가 된 것.
그를 비롯해 영국 농업ㆍ식품 관계자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단어가 바로 ‘식량안보(food security)’다. 영국에서 식량안보라는 개념은 세계2차대전 직후 애틀리 정권이 식품정책을 발표한 것에서 비롯됐다. 수십 년 전의 식량안보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식량안보는 개념이 다소 바뀌었다. 생산을 관리하고 해외식량시장의 변화에 적절히 반응해 식량의 양(量)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고 질(質), 즉 식품의 안전성을 확보하고 가공과 유통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 식량안보의 주제가 되고 있다.
식량의 양과 질 확보 위한 ‘식품 2030’
글라이드 씨는 “올해 초 DEFRA의 힐러리 벤 장관이 ‘식품 2030’이라는 새로운 식품전략을 발표해 2030년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식량안보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DEFRA가 발표한 ‘식품 2030’의 주제는 세 가지다. 첫째,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할 것, 둘째 농산물 생산이 지속가능할 것, 셋째 농산물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줄 것.
영국은 ‘애틀리 플랜’ 이후 거의 모든 농산물의 공급과 소비가 가능하게 됐지만, 과거의 방식으로 생산하고 소비했던 방식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DEFRA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비자 수요에 부응하는 공급 사슬을 제공하고, 소비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산지 및 첨가물 표기를 개선하며, 자원 절약과 음식쓰레기 효율적 처리에 대해 지원할 것이라고 DEFRA 장관은 밝혔다.
이에 따라 최근 DEFRA는 각종 관련 정책을 내놓았다. 향후 5년간 농식품분야 연구에 5000만 파운드를 투입할 예정이다. 또 기존의 귀농프로그램과 14~19세 청소년에게 농업관련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예산을 두 배로 늘렸다. 식품에는 원산지와 가공지를 반드시 표시하도록 했으며, 농산물 생산단계에서 자원을 절약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딸기를 생산하는 데 수로(水路)를 개선하면 훨씬 적은 물로도 농사가 가능합니다. 물은 적게 쓰고 생산량은 똑같이, 맛은 더 좋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지요. 이런 구체적인 방안들을 통해 ‘식품 2030’이 지향하는 목표는 영국 국민들의 식품안전을 꾀함과 동시에 영국의 농업과 식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2030년까지 이 계획들이 차질없이 이뤄진다면 그 이후에도 지속가능한 생산이 가능해져 장기적인 식량안보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DEFRA 농업ㆍ식품 부문의 업무가 식량 확보와 식량 안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식품 시스템은 우리나라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영국에서 식품시스템이란 식품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망라하는 개념입니다. 농작물의 생산, 투입재, 가축 사육, 영농, 가공, 소매, 소비, 폐기물 등 식품 생산-소비-폐기까지 일컫는 것이죠. 농업ㆍ식품 관련업무와 환경업무가 같은 부처에 속해 있는 것은 식품시스템이 환경과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농업 등 식품생산에 소요되는 물과 자원, 음식물쓰레기 폐기에 관련되는 비용과 리스크 등이 식품시스템에 포함됩니다. 단순한 먹을거리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해외 농산물 교역문제도 식품 관련 업무에 해당된다. 역사적으로 전 세계는 광우병 파동으로 쇠고기 수급에 차질을 빚기도 했고, 2007~2008년에는 곡물가격 폭등으로 곤욕을 치른 일도 있었다.
글라이드 씨의 설명이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이나 이를 관장하는 정부는 영국 내부의 수요-공급만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글로벌한 농식품의 수요-공급 요구에 반응해야 하죠. 지구촌 한 지역에서 기상재해나 가축질병 사태가 터져도 다른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농식품을 제공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영국 국내에서 농식품 자급자족과 완벽한 식품안전이 이뤄진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닌 거죠. 그래서 옛 농림부와는 다른, 힘있는 부처가 필요했고 DEFRA는 생산, 위생, 안전, 교역 등 식량에 대한 제반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식량문제를 중시하는 정부하에서 실제로 영국의 농민들이 혜택을 입고 있는지 궁금했다. DEFRA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농업종사자는 총 경제인구의 1.7%에 불과하지만 영국 농민의 평균 소득은 2008년 기준으로 영국 1인당 GDP 4만3785파운드(약 8300만원)보다 많은 4만4300파운드(약 8400만원)로 나타났다.
거의 매일 비가 오는, 날씨가 좋은 것도 아닌 영국에서 농민들은 어떻게 안정적인 소득을 거둘 수 있을까? 영국에는 농업보조금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글라이드 씨의 설명. “영국은 여러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기아를 경험했고, 식량안보에 대한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농업을 중히 여기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농업에 대한 보조금도 늘어났죠.”
DEFRA는 최근 농업인이 생산과정에서 에너지를 절감할 때 무이자 대출을 해주기로 했으며, 곡물건조기와 열감지기 등에 대한 보조금을 신설하기도 했다.
독립기관인 식품기준청
영국 정부에서 거시적인 식량 문제를 담당하는 부처가 DEFRA라면, 실제 소비자가 접하는 식품을 담당하는 부처는 FSA다. FSA는 런던의 번화가인 홀본(Holborn)의 항공센터(Aviation Center)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FSA의 우리식 명칭은 ‘부(部)’의 하부개념인 ‘청(廳)’이지만, FSA는 부처의 하부기관이 아닌 독립기관이다. FSA가 신설된 직접적인 계기는 광우병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광우병 사망자가 발생하자 1997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식품 기준 관련기관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여러 부처로 분산된 식품안전 체계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유럽연합(EU) 식품안전청 설립을 주도했던 영국의 석학 필립 제임스 박사는 “소비자 입장에서 식품행정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식품 생산과 소비자 관련 업무를 일원화해서 국민의 식품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FSA 설립을 이끌었다.
1999년 의회에서 식품안전 관련 독립부서 설립에 대한 법이 통과됐고, 2000년 FSA가 설립됐다. 당시 필립 제임스 박사는 “국민의 건강과 직결되는 식품 안전을 위해 국가 자원을 충분히 투입하고 정치세력화 방지를 위해 독립기구로 운영돼야 하며, 타 부처가 식품안전 관리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식품정책 결정은 투명하고 공개적이어야 한다”고 설립 배경에 대해 말했다.
FSA의 정책은 세 가지 기본 방침이 있다. ‘농장(farm)에서 포크(fork)까지’ 소비자의 안전을 지키는 것, 소비자에게 건강과 식품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것, 유해물질에서 소비자를 지키는 것이다.
FSA의 업무는 한마디로 ‘안전한 먹을거리 보장과 건강한 식생활을 위한 정책 마련’이다. 식품과 관련해 농약과 첨가물ㆍ화학물질 등에 대한 기준을 만들고, 생산자들이 기준을 지키고 있는지 감시한다. 소비자들이 식품을 꼼꼼히 고를 수 있도록 식품표시와 관련한 업무도 담당한다. 또 국민의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건강하지 못한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한다. 또 국내에서 생산된 식품뿐만 아니라 수입된 식품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제시하고 관련 업무를 실시한다. FSA는 연 7~8회의 공개위원회를 열고 식품과 위생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정책에 대해 검토한다. 이 위원회는 일반인 방청과 질의응답이 가능하며, 매회 100명 이상이 방청하고 있다. 웹사이트에서도 실시간으로 회의를 지켜볼 수 있다.
FSA 수석연구원인 앤드루 왓지 씨의 설명. “FSA의 원칙은 소비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것과 과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을 대상으로 식품관련 정보와 안전정보, 교육자료를 제공하는 것도 저희의 일이지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얼마나 안전한 환경에서 생산돼서 위생적으로 가공되고 유통되는지, 또 적절하게 판매되고 있는지, 즉 ‘농장에서 포크까지’라는 표어 아래 식품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광우병 파동이 있었던 1990년대 영국 대부분의 레스토랑과 펍에서 영국의 대표적 음식인 ‘로스트 비프(roast beef·덩어리째 구운 쇠고기)’가 메뉴에서 사라졌었는데, 식품안전관리가 일원화된 2000년대 들어서 영국산 쇠고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다시 높아졌고, 로스트 비프가 메뉴판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990년대 광우병 사태 당시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는데 최근에는 ‘수입식품보다는 국산’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FSA의 역할이 컸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FSA가 실시한 제도 중 우리나라에서도 시범적으로 시도됐었던 것이 ‘식품신호등’ 제도다. 소금과 설탕, 포화지방 등 섭취를 절제해야 하는 첨가물의 함량 수준을 나타내기 위해 포장에 빨강ㆍ노랑ㆍ초록색으로 위험ㆍ중간ㆍ안전 표시를 부착하는 것이다. 색깔만 봐도 건강에 좋은 식품인지, 좋지 않은 식품인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다. FSA는 수퍼마켓체인 등 식품유통업체와 제조업체ㆍ음식점 등에 신호등 마크 부착을 권장하고 있으며, 자율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이는 강제사항이 아니지만 영국의 수퍼마켓에서 판매하는 식품류의 70~80%에 이 마크가 붙어 있다.
한편 FSA가 다른 나라의 식품관련기관과 차별화되는 점은 동물사료도 식품과 똑같이 관리한다는 것이다. 광우병의 원인이 동물성 사료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갔다. “식육동물의 사료 역시 사람 입으로 들어가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식품의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왓지 씨는 설명했다.
급식 개선하니 학생들 집중력 80% 높아져
영국의 식품정책과 관련해 정부기관을 돌아본 후 민간기관 취재를 위해 웨스트민스터사원 인근에 위치한 ‘스쿨 푸드 트러스트(School Food Trust, 이하 SFT)’를 방문했다.
SFT는 학교급식을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2005년 교육 관련 기관 및 단체들이 1500만 파운드의 기금을 마련해 설립한 단체다. 2007년 정식 자선단체로 등록됐다. SFT는 ‘식탁을 바꾸자: 급식의 혁명’이라는 구호 아래 학교 급식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고 문제점을 지적, 개선을 제안해 왔다.
특히 2006년 SFT가 펴낸 ‘점심식사 보고서(Lunch Report)’는 영국 내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급식 식단을 개선하고 위생상태를 개선했더니 학생들의 수업 집중력이 기존 대비 80% 높아졌고, 과제 수행 능력은 3.5배나 향상됐다는 결과를 발표한 것. 이는 정부가 학교급식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영국 정부는 2006년 학교급식 개선을 위해 3년간 약 5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하고, 정크푸드를 학교 급식에서 추방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브리안 도우 SFT 대변인의 설명이다. “기존의 급식은 안전성은 물론 영양균형 면에서 미흡한 사례가 많았어요. 최근 10여 년 동안 비만과 특정영양소 과다섭취 등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매일 먹는 급식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안전하지 않은 화학물질이나 농약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재방안이 없었습니다. 유기농식품은 꿈도 꿀 수 없었고요. 급식의 맛도 문제였습니다. 정부의 급식비 지원이 미흡해서 급식 원가가 지나치게 낮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청소년은 급식이 맛이 없다고 생각해 학교 근처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햄버거나 감자튀김 등 정크푸드를 즐겨찾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국의 인기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는 한 TV프로그램에서 “그동안의 급식은 기름진 쓰레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SFT는 급식 식단과 위생상태를 개선해 영양소의 균형을 잡고 맛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식품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교육을 실시해 안전한 식품에 대한 지식을 심어주는 동시에 평생 건강한 식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SFT는 급식업체뿐만 아니라 학교, 부모, 학생 모두가 이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우 대변인은 “우리는 정부 기관은 아니지만 교육부 및복지부, FSA, 지방자치단체 등과 지속적으로 업무 내용을 공유ㆍ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영국 정부는 학교 주변 패스트푸드 점포 신설 금지 방안을 내놓았는데, SFT는 이에 대해 환영하면서도 이미 패스트푸드가 학교 주변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가 있을지 염려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영국 중등학교 주변 패스트푸드 음식점은 평균 23개에 달합니다. 청소년들은 일주일에 10회 이상 이런 음식점을 찾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어요. 청소년 건강을 위해서는 패스트푸드점 신설 규제가 아니라 영업 자체를 규제하는 방안을 내놓아야 실질적으로 정크푸드를 제한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저희 같은 단체들이 더 많아지고 강해져야 정부도 강력한 방안을 내놓을 수 있겠죠.”
제이미 올리버, 학교급식 프로그램 직접 출연
SFT와 맥을 같이하는 영국 내 단체로 ‘푸드 포 라이프 파트너십(Food for Life Partnership)’이 있다. 토양협회 등 환경ㆍ식품관련 기관들로 구성된 이 단체는 각 학교가 식품ㆍ건강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시행하도록 권장한다.
‘푸드 포 라이프 파트너십’에 참여하는 학교는 식생활 교육을 위해 인근 텃밭 등에서 직접 채취한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수업을 실시하고, 식생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부모와 정부, 교육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계해 어린이의 영양상태를 향상시키도록 한다.
이 단체는 식품관련 프로그램을 모범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학교에는 실행수준에 따라 금ㆍ은ㆍ동 마크를 수여하고 있다. 학교에 텃밭을 만들거나 닭을 키우는 등 학교에서 음식재료 생산과정 교육이 이뤄지도록 지원하는 일이 이 단체의 일이기도 하다.
사실 학교급식문제가 전 영국국민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사인 제이미 올리버가 2005년 ‘제이미의 학교급식(Jamie’s Schooldinner)’이라는 4회짜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급식 개선을 주장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제이미의 학교급식’에서 제이미 올리버는 “현재 청소년의 절반이 급식을 먹고 나머지 절반은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 등 정크푸드로 때우고 있다”고 주장했고, 프로그램은 성장기 청소년의 건강을 저해하는 주범인 정크푸드를 몰아내고 학교에서 맛있고 건강한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이미 올리버는 이 프로그램 방영 후 토니 블레어 총리와 만나 정부의 급식지원금을 2배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 ‘스쿨 푸드 트러스트’와 ‘푸드 포 라이프 파트너십’ 등 단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고, 음식 관련 캠페인과 커리큘럼은 영국 전역의 학교로 퍼져나갔다. 학생들은 낯선 채소의 이름 맞히기나 좋아하는 간식 만들기 등을 통해 즐겁게 식품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간다.
브리안 도우 SFT 대변인은 “어릴 때부터 우리가 먹는 식품이 어디서 생산되며 어떻게 유통되고 조리되는지를 안다면 자연스레 성인이 돼서도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며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릴 때부터 식품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런던 시민들 사이에서는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심는 것이 유행”이라며 “수입 식품보다는 국산 식품, 국산 식품 중에서도 내 고장에서 난 식품(로컬 푸드·local food)을 선호하는 성향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식품의 개념 재정립해야
영국에서 7년간 영국의 농업경제학을 연구한 단국대 환경자원경제학과 김태연 교수는 “영국의 식품정책은 성공한 것으로 검증되고, 우리도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은 우리와 국토면적, 인구가 비슷한데, 전통적인 식량수입국이고 전쟁 등으로 식량부족을 혹독하게 경험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농촌의 소득이 감소하면서 농촌발전에 식품산업 발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단순한 농촌지원에서 벗어나 농산물 가공업을 지원했습니다. 지역별로 식품산업의 전통과 경쟁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방자치단체에 이 업무를 맡기기도 했고요. 그 결과 영국 내에서 농촌과 가공업, 소매업, 환경문제 등을 아우르는 ‘식품’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됐고, ‘식품’의 범주 내에 ‘농업’이 포함된다는 인식이 생겨난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식품이 농업의 하부개념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는 “우리나라는 ‘식품’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명확한 합의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며 식품관련 업무를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전담하는 우리나라 시스템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식품산업 정책이 농업과 연계되는 것보다는 독자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어요. 농림수산식품부 자체적으로도 아직 식품산업 발전의 궁극적 비전과 목표, 구체적인 방안이 미흡한 것 같습니다.”
김 교수는 농업과 식품정책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 정부가 식량안보를 중시하고 있고, 농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농업에 대한 보조금도 다양합니다. 영국의 농촌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농촌 보조금을 자선금 수준으로 생각하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촌 정책과 지원방안을 수시로 바꿔 버린다면 우리 농촌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좋은 방안이 있더라도 갑자기 바꿀 게 아니라 영국처럼 수십 년에 걸쳐 차근차근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펼친다면 우리 농촌이 더 안정될 것이라 봅니다.”⊙
‘맛없는 나라’ 영국의 수도 런던은 세계 음식의 집합소나 마찬가지다. 프랑스ㆍ이탈리아ㆍ스페인 등 유럽음식은 물론 식민지였던 인도나 홍콩 음식을 파는 식당도 즐비하다. 타이ㆍ베트남ㆍ일본 등 아시아 음식점을 주택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도 런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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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대표 요리인 로스트비프. 광우병 파동 이후 한동안 영국인의 식탁에서 사라졌다. |
그러나 6년 후 10명의 젊은이들이 인간 광우병에 걸려 사망하거나 중증상태에 빠진 사실이 발견됐고, 영국 정부는 그제야 광우병 쇠고기와 인간 광우병의 관계에 대해 인정하고 대대적으로 30개월 이상 소 도살작업에 나섰다.
이후 식품안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정부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2000년 식품안전 관련업무를 통합한 독립정부기구 식품기준청(FSA:Food Standards Agency)이 설립됐다. 2001년에는 농수산식품부가 환경부와 합쳐져 환경식품농림부(DEFRA:Department for Environment, Food and Rural Affairs)가 탄생했다. 또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학교급식을 비롯해 청소년들의 먹을거리를 안전하게 관리하자는 ‘스쿨 푸드 트러스트(school food trust)’와 ‘푸드 포 라이프 파트너십(food for life partnership)’ 단체가 설립되기도 했다. 영국의 식품안전 시스템은 세계 각국의 정부 관계자들이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오는 수준이 됐다. 영국의 수도 런던을 찾아 영국의 식품 관련 기관들을 돌아봤다.
“농산물 생산과 안전은 국가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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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식품기준청은 런던의 번화가인 홀본에 위치하고 있다. |
영국의 식품과 농업을 관장하는 정부 부처는 환경식품농림부(DEFRA)다. DEFRA를 방문하기 위해 런던의 중심부 웨스트민스터를 찾았다.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템스강을 따라 이어지는 웨스트민스터 지역은 영국 국회와 정부기관들이 밀집해 있는 영국 정치의 중심지다. DEFRA는 정부기관들이 모여 있는 스미스스퀘어의 한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DEFRA는 2001년 1월 농업ㆍ수산업ㆍ식품부인 MAFF(Ministry of Agriculture, Fisheries and Food)가 환경ㆍ교통ㆍ지역부(DETR)와 통합돼 설립됐다. 2008년 10월에는 DEFRA의 기후팀이 분리, 기존의 BERR(산업규제개혁부)과 합쳐져 에너지ㆍ기후변화부가 설립됐다.
DEFRA의 직원수는 1만여 명이며 연간 예산은 30억 파운드. 업무는 환경ㆍ농업ㆍ수산업ㆍ식품ㆍ동식물ㆍ농촌 관련 업무까지 광범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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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중심부 스미스스퀘어에 자리 잡고 있는 환경식품농림부(DEFRA). |
“광우병 사태를 비롯해 구제역, 성인병, 비만 등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기존의 식품 공급 체계에 의문을 품게 됐습니다. 현대인들은 과일이나 야채를 충분히 먹지 못해서 또는 지방이나 설탕, 소금 등을 과잉섭취해 조기사망하기도 하고요. 식품 포장과 관련된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 처리문제, 환경문제, 농업에 소요되는 자원 공급문제 등이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식품 생산량이 안정적이지 못하게 되면서 식량부족 사태를 겪을 수도 있고, 환경문제와 자원부족현상도 심각해집니다. 이 같은 식품과 관련한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2001년 설립된 통합부처 DEFRA지요.”
DEFRA가 설립되기 전에는 식품안전 조직체계가 MAFF와 보건부(DOH)로 이원화돼 있었다. 그러나 광우병이 대두된 1990년대 말 식품안전체계의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2000년 식품기준청(FSA)이 설립됐고, 과거 MAFF에서 담당하던 위생관리 기준설정 및 안전성 평가업무 등 식품안전 업무가 FSA로 이관됐다. 이후 MAFF는 DETR과 통합돼 DEFRA가 된 것.
그를 비롯해 영국 농업ㆍ식품 관계자들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단어가 바로 ‘식량안보(food security)’다. 영국에서 식량안보라는 개념은 세계2차대전 직후 애틀리 정권이 식품정책을 발표한 것에서 비롯됐다. 수십 년 전의 식량안보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식량안보는 개념이 다소 바뀌었다. 생산을 관리하고 해외식량시장의 변화에 적절히 반응해 식량의 양(量)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고 질(質), 즉 식품의 안전성을 확보하고 가공과 유통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 식량안보의 주제가 되고 있다.
식량의 양과 질 확보 위한 ‘식품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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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환경식품농림부(DEFRA) 힐러리 벤 장관은 올해 초 ‘식품 2030’ 전략을 발표하고 식량안보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
DEFRA가 발표한 ‘식품 2030’의 주제는 세 가지다. 첫째,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할 것, 둘째 농산물 생산이 지속가능할 것, 셋째 농산물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줄 것.
영국은 ‘애틀리 플랜’ 이후 거의 모든 농산물의 공급과 소비가 가능하게 됐지만, 과거의 방식으로 생산하고 소비했던 방식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다. DEFRA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비자 수요에 부응하는 공급 사슬을 제공하고, 소비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원산지 및 첨가물 표기를 개선하며, 자원 절약과 음식쓰레기 효율적 처리에 대해 지원할 것이라고 DEFRA 장관은 밝혔다.
이에 따라 최근 DEFRA는 각종 관련 정책을 내놓았다. 향후 5년간 농식품분야 연구에 5000만 파운드를 투입할 예정이다. 또 기존의 귀농프로그램과 14~19세 청소년에게 농업관련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예산을 두 배로 늘렸다. 식품에는 원산지와 가공지를 반드시 표시하도록 했으며, 농산물 생산단계에서 자원을 절약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딸기를 생산하는 데 수로(水路)를 개선하면 훨씬 적은 물로도 농사가 가능합니다. 물은 적게 쓰고 생산량은 똑같이, 맛은 더 좋게 하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지요. 이런 구체적인 방안들을 통해 ‘식품 2030’이 지향하는 목표는 영국 국민들의 식품안전을 꾀함과 동시에 영국의 농업과 식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2030년까지 이 계획들이 차질없이 이뤄진다면 그 이후에도 지속가능한 생산이 가능해져 장기적인 식량안보가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DEFRA 농업ㆍ식품 부문의 업무가 식량 확보와 식량 안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식품 시스템은 우리나라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영국에서 식품시스템이란 식품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망라하는 개념입니다. 농작물의 생산, 투입재, 가축 사육, 영농, 가공, 소매, 소비, 폐기물 등 식품 생산-소비-폐기까지 일컫는 것이죠. 농업ㆍ식품 관련업무와 환경업무가 같은 부처에 속해 있는 것은 식품시스템이 환경과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농업 등 식품생산에 소요되는 물과 자원, 음식물쓰레기 폐기에 관련되는 비용과 리스크 등이 식품시스템에 포함됩니다. 단순한 먹을거리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해외 농산물 교역문제도 식품 관련 업무에 해당된다. 역사적으로 전 세계는 광우병 파동으로 쇠고기 수급에 차질을 빚기도 했고, 2007~2008년에는 곡물가격 폭등으로 곤욕을 치른 일도 있었다.
글라이드 씨의 설명이다.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이나 이를 관장하는 정부는 영국 내부의 수요-공급만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글로벌한 농식품의 수요-공급 요구에 반응해야 하죠. 지구촌 한 지역에서 기상재해나 가축질병 사태가 터져도 다른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농식품을 제공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영국 국내에서 농식품 자급자족과 완벽한 식품안전이 이뤄진다고 해서 안심할 일이 아닌 거죠. 그래서 옛 농림부와는 다른, 힘있는 부처가 필요했고 DEFRA는 생산, 위생, 안전, 교역 등 식량에 대한 제반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식량문제를 중시하는 정부하에서 실제로 영국의 농민들이 혜택을 입고 있는지 궁금했다. DEFRA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농업종사자는 총 경제인구의 1.7%에 불과하지만 영국 농민의 평균 소득은 2008년 기준으로 영국 1인당 GDP 4만3785파운드(약 8300만원)보다 많은 4만4300파운드(약 8400만원)로 나타났다.
거의 매일 비가 오는, 날씨가 좋은 것도 아닌 영국에서 농민들은 어떻게 안정적인 소득을 거둘 수 있을까? 영국에는 농업보조금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글라이드 씨의 설명. “영국은 여러 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기아를 경험했고, 식량안보에 대한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농업을 중히 여기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농업에 대한 보조금도 늘어났죠.”
DEFRA는 최근 농업인이 생산과정에서 에너지를 절감할 때 무이자 대출을 해주기로 했으며, 곡물건조기와 열감지기 등에 대한 보조금을 신설하기도 했다.
독립기관인 식품기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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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재래시장 포르토벨로마켓.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풍성하다. |
FSA의 우리식 명칭은 ‘부(部)’의 하부개념인 ‘청(廳)’이지만, FSA는 부처의 하부기관이 아닌 독립기관이다. FSA가 신설된 직접적인 계기는 광우병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광우병 사망자가 발생하자 1997년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식품 기준 관련기관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여러 부처로 분산된 식품안전 체계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유럽연합(EU) 식품안전청 설립을 주도했던 영국의 석학 필립 제임스 박사는 “소비자 입장에서 식품행정은 객관적이고 독립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식품 생산과 소비자 관련 업무를 일원화해서 국민의 식품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FSA 설립을 이끌었다.
1999년 의회에서 식품안전 관련 독립부서 설립에 대한 법이 통과됐고, 2000년 FSA가 설립됐다. 당시 필립 제임스 박사는 “국민의 건강과 직결되는 식품 안전을 위해 국가 자원을 충분히 투입하고 정치세력화 방지를 위해 독립기구로 운영돼야 하며, 타 부처가 식품안전 관리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식품정책 결정은 투명하고 공개적이어야 한다”고 설립 배경에 대해 말했다.
FSA의 정책은 세 가지 기본 방침이 있다. ‘농장(farm)에서 포크(fork)까지’ 소비자의 안전을 지키는 것, 소비자에게 건강과 식품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것, 유해물질에서 소비자를 지키는 것이다.
FSA의 업무는 한마디로 ‘안전한 먹을거리 보장과 건강한 식생활을 위한 정책 마련’이다. 식품과 관련해 농약과 첨가물ㆍ화학물질 등에 대한 기준을 만들고, 생산자들이 기준을 지키고 있는지 감시한다. 소비자들이 식품을 꼼꼼히 고를 수 있도록 식품표시와 관련한 업무도 담당한다. 또 국민의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건강하지 못한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한다. 또 국내에서 생산된 식품뿐만 아니라 수입된 식품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제시하고 관련 업무를 실시한다. FSA는 연 7~8회의 공개위원회를 열고 식품과 위생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정책에 대해 검토한다. 이 위원회는 일반인 방청과 질의응답이 가능하며, 매회 100명 이상이 방청하고 있다. 웹사이트에서도 실시간으로 회의를 지켜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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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드루 왓지 식품기준청(FSA) 수석연구원은 “과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식품정책을 마련한다”고 설명했다. |
실제로 광우병 파동이 있었던 1990년대 영국 대부분의 레스토랑과 펍에서 영국의 대표적 음식인 ‘로스트 비프(roast beef·덩어리째 구운 쇠고기)’가 메뉴에서 사라졌었는데, 식품안전관리가 일원화된 2000년대 들어서 영국산 쇠고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다시 높아졌고, 로스트 비프가 메뉴판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990년대 광우병 사태 당시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는데 최근에는 ‘수입식품보다는 국산’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FSA의 역할이 컸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FSA가 실시한 제도 중 우리나라에서도 시범적으로 시도됐었던 것이 ‘식품신호등’ 제도다. 소금과 설탕, 포화지방 등 섭취를 절제해야 하는 첨가물의 함량 수준을 나타내기 위해 포장에 빨강ㆍ노랑ㆍ초록색으로 위험ㆍ중간ㆍ안전 표시를 부착하는 것이다. 색깔만 봐도 건강에 좋은 식품인지, 좋지 않은 식품인지를 쉽게 가려낼 수 있다. FSA는 수퍼마켓체인 등 식품유통업체와 제조업체ㆍ음식점 등에 신호등 마크 부착을 권장하고 있으며, 자율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이는 강제사항이 아니지만 영국의 수퍼마켓에서 판매하는 식품류의 70~80%에 이 마크가 붙어 있다.
한편 FSA가 다른 나라의 식품관련기관과 차별화되는 점은 동물사료도 식품과 똑같이 관리한다는 것이다. 광우병의 원인이 동물성 사료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갔다. “식육동물의 사료 역시 사람 입으로 들어가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식품의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왓지 씨는 설명했다.
급식 개선하니 학생들 집중력 80% 높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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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수퍼마켓 식품매장 모습. 영국인들은 “수입식품보다는 국산”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
SFT는 학교급식을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2005년 교육 관련 기관 및 단체들이 1500만 파운드의 기금을 마련해 설립한 단체다. 2007년 정식 자선단체로 등록됐다. SFT는 ‘식탁을 바꾸자: 급식의 혁명’이라는 구호 아래 학교 급식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고 문제점을 지적, 개선을 제안해 왔다.
특히 2006년 SFT가 펴낸 ‘점심식사 보고서(Lunch Report)’는 영국 내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급식 식단을 개선하고 위생상태를 개선했더니 학생들의 수업 집중력이 기존 대비 80% 높아졌고, 과제 수행 능력은 3.5배나 향상됐다는 결과를 발표한 것. 이는 정부가 학교급식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영국 정부는 2006년 학교급식 개선을 위해 3년간 약 50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하고, 정크푸드를 학교 급식에서 추방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브리안 도우 SFT 대변인의 설명이다. “기존의 급식은 안전성은 물론 영양균형 면에서 미흡한 사례가 많았어요. 최근 10여 년 동안 비만과 특정영양소 과다섭취 등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매일 먹는 급식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안전하지 않은 화학물질이나 농약 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재방안이 없었습니다. 유기농식품은 꿈도 꿀 수 없었고요. 급식의 맛도 문제였습니다. 정부의 급식비 지원이 미흡해서 급식 원가가 지나치게 낮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청소년은 급식이 맛이 없다고 생각해 학교 근처에서 쉽게 살 수 있는 햄버거나 감자튀김 등 정크푸드를 즐겨찾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영국의 인기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는 한 TV프로그램에서 “그동안의 급식은 기름진 쓰레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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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학생들은 식품관련 수업을 받고 요리실습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
최근 영국 정부는 학교 주변 패스트푸드 점포 신설 금지 방안을 내놓았는데, SFT는 이에 대해 환영하면서도 이미 패스트푸드가 학교 주변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효과가 있을지 염려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영국 중등학교 주변 패스트푸드 음식점은 평균 23개에 달합니다. 청소년들은 일주일에 10회 이상 이런 음식점을 찾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어요. 청소년 건강을 위해서는 패스트푸드점 신설 규제가 아니라 영업 자체를 규제하는 방안을 내놓아야 실질적으로 정크푸드를 제한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저희 같은 단체들이 더 많아지고 강해져야 정부도 강력한 방안을 내놓을 수 있겠죠.”
제이미 올리버, 학교급식 프로그램 직접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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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많은 학교가 교내에 식품관련 교육을 위한 텃밭을 가꾸고 있다. |
‘푸드 포 라이프 파트너십’에 참여하는 학교는 식생활 교육을 위해 인근 텃밭 등에서 직접 채취한 식재료를 이용한 요리수업을 실시하고, 식생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부모와 정부, 교육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계해 어린이의 영양상태를 향상시키도록 한다.
이 단체는 식품관련 프로그램을 모범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학교에는 실행수준에 따라 금ㆍ은ㆍ동 마크를 수여하고 있다. 학교에 텃밭을 만들거나 닭을 키우는 등 학교에서 음식재료 생산과정 교육이 이뤄지도록 지원하는 일이 이 단체의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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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인기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는 TV프로그램 ‘제이미의 학교급식’을 통해 급식개선을 주장했다. |
‘제이미의 학교급식’에서 제이미 올리버는 “현재 청소년의 절반이 급식을 먹고 나머지 절반은 햄버거와 감자튀김, 콜라 등 정크푸드로 때우고 있다”고 주장했고, 프로그램은 성장기 청소년의 건강을 저해하는 주범인 정크푸드를 몰아내고 학교에서 맛있고 건강한 급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이미 올리버는 이 프로그램 방영 후 토니 블레어 총리와 만나 정부의 급식지원금을 2배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 ‘스쿨 푸드 트러스트’와 ‘푸드 포 라이프 파트너십’ 등 단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고, 음식 관련 캠페인과 커리큘럼은 영국 전역의 학교로 퍼져나갔다. 학생들은 낯선 채소의 이름 맞히기나 좋아하는 간식 만들기 등을 통해 즐겁게 식품에 대한 흥미를 키워나간다.
브리안 도우 SFT 대변인은 “어릴 때부터 우리가 먹는 식품이 어디서 생산되며 어떻게 유통되고 조리되는지를 안다면 자연스레 성인이 돼서도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며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릴 때부터 식품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런던 시민들 사이에서는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심는 것이 유행”이라며 “수입 식품보다는 국산 식품, 국산 식품 중에서도 내 고장에서 난 식품(로컬 푸드·local food)을 선호하는 성향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식품의 개념 재정립해야
영국에서 7년간 영국의 농업경제학을 연구한 단국대 환경자원경제학과 김태연 교수는 “영국의 식품정책은 성공한 것으로 검증되고, 우리도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은 우리와 국토면적, 인구가 비슷한데, 전통적인 식량수입국이고 전쟁 등으로 식량부족을 혹독하게 경험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농촌의 소득이 감소하면서 농촌발전에 식품산업 발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단순한 농촌지원에서 벗어나 농산물 가공업을 지원했습니다. 지역별로 식품산업의 전통과 경쟁력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방자치단체에 이 업무를 맡기기도 했고요. 그 결과 영국 내에서 농촌과 가공업, 소매업, 환경문제 등을 아우르는 ‘식품’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됐고, ‘식품’의 범주 내에 ‘농업’이 포함된다는 인식이 생겨난 거죠. 우리나라에서는 식품이 농업의 하부개념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는 “우리나라는 ‘식품’의 개념과 범위에 대한 명확한 합의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며 식품관련 업무를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전담하는 우리나라 시스템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식품산업 정책이 농업과 연계되는 것보다는 독자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어요. 농림수산식품부 자체적으로도 아직 식품산업 발전의 궁극적 비전과 목표, 구체적인 방안이 미흡한 것 같습니다.”
김 교수는 농업과 식품정책이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국 정부가 식량안보를 중시하고 있고, 농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농업에 대한 보조금도 다양합니다. 영국의 농촌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안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농촌 보조금을 자선금 수준으로 생각하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촌 정책과 지원방안을 수시로 바꿔 버린다면 우리 농촌은 더욱 피폐해질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좋은 방안이 있더라도 갑자기 바꿀 게 아니라 영국처럼 수십 년에 걸쳐 차근차근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펼친다면 우리 농촌이 더 안정될 것이라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