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은 기업(企業) 이상의 것이며, 돈을 벌기 위해 출판을 해서는 안 된다”
⊙ 을유는 30대 초반의 민병도, 정진숙, 윤석중, 조풍연이 1945년 12월 1일 창업
⊙ 첫 출판물은 한글 글씨본 《가정 글씨체첩》… 《지용시선》 《청록집》 《석초시집》은 이후 서정시 흐름 대표해
⊙ 《조선말 큰사전》은 194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에 맞춰 첫 책으로 나와
⊙ 《세계문학전집》도 전설… 1959년 어윈 쇼의 《젊은 사자들》 시작으로 총 100권 마무리
⊙ 을유는 30대 초반의 민병도, 정진숙, 윤석중, 조풍연이 1945년 12월 1일 창업
⊙ 첫 출판물은 한글 글씨본 《가정 글씨체첩》… 《지용시선》 《청록집》 《석초시집》은 이후 서정시 흐름 대표해
⊙ 《조선말 큰사전》은 194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에 맞춰 첫 책으로 나와
⊙ 《세계문학전집》도 전설… 1959년 어윈 쇼의 《젊은 사자들》 시작으로 총 100권 마무리

- 서울 종로 2가 대로변에 있었던 을유문화사 직매점. 1955년 무렵이다. 사진=을유문화사
“사변(事變) 전 10만 부 발행 가능의 원조용지 중 3만 부 용지만 쓰고 동란(動亂)으로 다 없어졌다. 수다한 경제적 난관을 무릅쓰고 일해 왔으나 지금(은) 지쳤다. 하루 바삐 발간될 수 있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지쳤다”며 손사래를 쳤던 정진숙은 끝내 《조선말 큰사전》을 불굴의 의지로 완간했다.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해 첫 권이 출간된 이래, 한국전쟁으로 지체되었다가 1957년 10년 만에 완성한 셈이었다. 원고 작성 기간만 28년, 편집 시작 11년 만에 을유의 정진숙이 해냈다. 미국 록펠러재단의 원조가 있었다 할지라도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전무한 채 온전히 민간의 힘으로 출판계의 혁명을 이루어 냈다.
《조선말 큰사전》이 나라 잃은 출판계의 최대 저작이요 인쇄 문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큰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해방의 기쁨과 불안이 교차하던 1945년, 그 혼란 속에서도 의연하게 출발한 을유는 《큰사전》이라는 ‘큰 사건’ 프로젝트를 완수하며 을유년(乙酉年)에 민간 출판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올해 을사년(乙巳年)에 창립 8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반일(反日) 불온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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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석(隱石) 정진숙(鄭鎭肅·1912~2008년). |
휘문 시절 성적이 우수하고 통솔력도 뛰어나 졸업 때까지 5년 동안 반장을 맡았다. 휘문을 졸업한 뒤 보성전문에 입학하였으나 건강 상태가 여의치 않아 한동안 쉬다가 1936년 11월, 스물다섯 살에 동일(東一)은행에 들어간다. 그는 조사계 주임으로,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큰 업체를 손수 찾아다니며 예금을 유치하는 등 일찍부터 남다른 비즈니스 감각을 드러냈다. 훗날 이 비즈니스 감각은 그의 애민사상과 맞물려 출판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힘이 된다.
어느 해 초여름, 정진숙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년)의 부름을 받았다. 곧장 인력거를 타고 계동 인촌댁으로 달려간 그에게 인촌은 마주앉은 모시옷 차림의 낯선 이를 소개했다.
“그거 이 사람에게 맡기세요. 동일은행 큰 일꾼입니다.”
“그래, 수고를 좀 해주게나.”
그는 허리춤에 찬 큼직한 전대(纏帶)를 풀어놓았다. 10원권도 좀 있었지만 거의 100원짜리 지폐로 10만원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이 무렵 10만원이면 천석지기로 셈하는 시절이었으니 엄청난 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인촌과 사돈 간인 갑부 이활(李活·1907~1986년)이었다.
열정이 넘친 30대 청춘들
1944년 12월 24일 정진숙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재계 거물인 한상용의 생질 이동구가 동일은행 지점장으로 부임해 왔는데, 그는 개성에서만 오래 근무한 탓에 서울 지리를 잘 몰랐다. 이런 이유로 정진숙에게 지점장 업무를 대신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 규모가 큰 거래선의 섭외, 총독부 재무관리들과의 접촉 등의 일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비상시국에 젊은이가 당대의 인물들과 만난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고 일경(日警) 정보망에 걸려 어느 날 체포되고 말았다.
‘반일(反日) 불온분자’로 몰아 1945년 4월, 1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억울한 죄목으로 수원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8·15 해방을 맞았다. 옥문을 나서자마자 정진숙은 은행의 만류(挽留)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던졌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무언가 큰일을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정진숙은 해방되던 그해 12월 1일 민병도(閔丙燾·1916~2006년), 조풍연(趙豊衍·1914~1991년), 윤석중(尹石重·1911~2003년)과 함께 을유를 설립했다. 모두가 열정이 넘치는 30대 청춘들이었다. 민병도는 정진숙의 동일은행 동료로 훗날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조풍연은 정진숙보다 서너 살 아래지만 이미 연희전문 시절 《삼사문학》을 창간했고 이태준이 주도한 《문장》의 편집장으로 일한 출판계의 일꾼이었다. 민병도·조풍연은 교동학교 동기요 윤석중 또한 교동학교 선배였다.
‘달갑게 느껴지지 않아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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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어린이 도서. 을유문화사의 초창기 출판물 중에는 다양한 어린이용 도서가 있었다. |
“을유는 1945년 12월 1일에 뜻을 같이하는 네 사람의 동인이 창업하였는데, 그 동인은 모두 30대 초반의 민병도, 정진숙, 윤석중, 조풍연 선생이었죠.
이 가운데 맨 처음 출판사업을 하자고 발의한 이는 조풍연 선생이었습니다. 그에게 출판사 창업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은 윤석중, 민병도 선생이 선친에게도 제의를 했어요. 그러나 선친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아 망설였다’고 합니다.
선친께서는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나 자신이 출판에 대하여 너무나 아는 게 없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민병도 선생이 ‘출판 경력은 이제부터 쌓으면 될 것이고, 은행원 생활의 소양을 살려 착실하게 운영을 맡으면 어떻겠소’라며 결단을 재촉하였지요. 34세의 혈기방장한 정진숙은 결국 용단을 내리게 되었어요.”
경영에 있어 노하우를 가진 두 금융인과 출판 기획에 일가견이 있는 두 문인의 절묘한 결합이었다. 을유는 우선 그 창업의 대의(大義)를 민족문화 향상에 두었는데, 이것은 나중에 ‘전통적 민족문화의 선양과 선진적인 해외문화의 수용’으로 이어져 나아가는 ‘을유 사시(社是)’의 기초가 되었다.
탄생의 첫 계기는 정진숙 사장의 집안 어른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2~?) 선생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위당은 “36년간 일제가 망친 우리 문화와 역사를 복구하려면 다시 36년이 걸릴 것이니 문화를 되살리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고 정진숙에게 말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인쇄 시설의 낙후, 용지의 부족이라는 극히 열악한 국내 사정 속에서도 을유의 행보는 두드러졌다. 출범 무렵 달마다 평균 6, 7종의 신간을 펴냈고, 단행본 초판 발행 부수는 최저 5000부였으며, 책마다 나오기가 무섭게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946년 한 해 발행한 도서가 35종에 이를 정도였다.
윤석중은 《어린이와 한평생》(1985년, 범양사)에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영보빌딩 3층 조그만 방은 책상을 너무 들여놓아 제 자리에 앉으려면 가재처럼 옆으로 걸어야만 했다. 응접실은커녕 사장실도 없어 손님들은 선 채로 몇 마디 주고받다 돌아가야만 했다. 일, 일, 일, 일에 파묻혀 날 가는 줄도 몰랐다. 이태준·이강국(조선공산당 간부)이 밖에서 기웃거리다가 들어서지도 못하고 “여기 와 보니 정말 일하는 것 같군요” 하며 그냥 되돌아간 적도 있었다. 병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친구들이 걱정할라치면 몸 걱정할 틈이 어디 있냐고 대꾸할 만큼 우리들은 바빴다.〉
신생 출판사로서 얼마나 의욕적으로 일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영상 ‘빨리 감기’ 기능이 어울릴만한 장면이 연출되었으리라.
1946년 2월 1일, 우리 문자를 살려내는 일이 조국 건설에 앞서 시급히 해야 할 일이라는 위당의 뜻에 따라 을유문화사 첫 출판물로 이각경(李珏璟·1897~?)의 《가정 글씨체첩》을 선보였다. B5판 26면의 누구나 쉽게 보고 익힐 수 있는 한글 궁체 글씨본이었다.
1945년 창업과 함께 그 산하 기관으로, 어린이 문화사업에 남다른 열의와 사명감을 가진 윤석중이 이룬 집념의 소산인 조선아동문화협회(아협)를 개설한다. 여기에서는 도서출판과 문화운동 두 일을 함께 추진해 나갔는데, 《가정 글씨체첩》에 이어 ‘아협’ 명의로 《어린이 글씨체첩》 《어린이 한글책》을 간행하였다.
1946년 2월 11일에는 ‘아협’ 명의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 《주간 소학생》이 B5판 12쪽으로 창간되었다. 을유는 이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코주부〉 김용환과 김의환 형제의 만화와 그림을 소개했고, 이들 형제의 작품은 ‘어린이 만화’와 ‘어린이 그림’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주간 소학생》은 이듬해 5월부터 월간으로 전환하면서 《소학생》으로 바뀐다.
《가정 글씨체첩》과 《청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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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6월 《지용시선》 《청록집》 《석초시집》 등이 나왔다. 조국의 해방을 맞아 빛을 보게 된 민족의 숨결을 담은 서정시들이었다. |
조국의 해방을 맞아 빛을 보게 된 민족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은 서정시들이었다. 을유가 문예출판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순간이다. 그해 9월에는 허준의 창작집 《잔등》이 소설로서는 맨 처음 출간되었고, 11월에는 이태준(李泰俊·1904~?)의 장편소설 《사상의 월야》를 출간했다. 본격 학술서인 《조선문학연구초》 또한 내놓았는데, 이 책은 나중에 《대학총서》로 발전하는 기틀이 된다.
정무영 을유문화사 대표의 말이다.
“창업 이후 두 달의 산고 끝에 첫 출판물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1946년 2월 1일에 선을 보인 이각경 선생의 《가정 글씨체첩》인데요, 이 책은 B5판 26면의 얇은 책자로 간행되었으나, 그 내용만큼은 누구나 쉽게 보고 익힐 수 있는 한글 글씨본으로써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책머리에 붓대 잡는 법, 글씨 쓰는 법 등을 간명하게 설명한 다음, 본문에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되는 고전 명문 중에서 가려 뽑은 구절들을 이각경의 궁체 글씨로 써놓았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지 겨우 다섯 달 남짓이 지난 무렵이라 한글의 원상회복과 언어생활의 질서 확립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는데요,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출판은 시의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각경 선생은 교육자 이만규(李萬珪·1882~1978년)의 딸로서 한글 궁체의 일인자로 꼽히던 이철경(李喆卿·1914~1989년)의 쌍둥이 언니이기도 했습니다.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한 뒤 선친의 절친한 친구였던 여운형(呂運亨·1886~1947년)의 조카 여경구와 결혼했고, 해방 후 아버지를 따라 월북했습니다.
《청록집》 《지용시선》 《석초시집》은 해방 이후 한국 전쟁에 이르기 전까지 우리 문학사에 나타난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흐름을 대표하는 책들로서, 을유가 문학 출판의 메카로도 이름을 떨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관련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출간 계기는 알 수 없는데요, 선친은 창립 동인들이 세 권의 책을 만들어놓고 즐거워하던 모습이 평생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습니다.”
을유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한 1975년 12월 9일 《조선일보》 5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 지금까지 참고서를 제외한 모든 분야의 책 1000여 종을 간행, 우리나라 출판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중략)
이 출판사가 특히 힘들여 낸 책으로 10년 걸려 완성한 《조선말 큰사전》(전 6권), 《한국사》(전 7권), 《세계문학전집》(전 60권), 《세계사상교양전집》(전 24권) 등을 들 수 있다.…〉
첫손으로 꼽히는 작품 《조선말 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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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말 큰사전》.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해 첫째 권이 출간된 이래, 한국전쟁으로 지체되었다가 1957년 완간되었다. |
〈해방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운송 창고를 뒤지던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해방 후 행방을 몰라 애태우던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 뭉치.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했던 학회 회원들이 함경도 함흥과 홍원에서 투옥된 후 사전 원고는 경찰에 압수돼 함흥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예심(1심) 재판의 증거물로 제출됐다.
이들 가운데 징역형을 받은 네 사람이 항소를 했는데, 이때 경성고등법원으로 사건이 옮겨지면서 관련 서류와 증거물도 같이 서울로 보내졌다.
그러나 증거물 가운데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 뭉치가 들어 있던 상자는 법원에 전달되지 않았고, 경성고등법원은 해방 사흘 전인 1945년 8월 12일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린다. 이틀 뒤 해방이 되면서 8월 17일 함흥 감옥을 나선 학자들은 8월 19일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모인 학자들이 3년 전 경찰에 압수된 원고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 경성역 뒤 조선운송 창고에서 인부들과 함께 화물을 살펴보던 역장이 상자 속의 원고 뭉치를 발견하고 학회 측에 이를 알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빛을 보게 된 《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1947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식에 맞춰 첫 번째 책으로 묶여 나왔다.
사전 편찬에 참여한 김병제는 1946년 《자유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원고 상자의 뚜껑을 여는 이의 손은 떨리었다. 원고를 드는 이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고 회고했다.
기차가 가장 빠르고 안전한 운송 수단이었던 그 시절, 세상의 모든 짐들은 철도역 가까이 있던 조선운송의 창고에 먼저 맡겨졌다.〉
《조선말 큰사전》에 담긴 ‘편찬의 경과’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민족이 해방되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갇혔던 사람들은 함흥에서 서울로 돌아왔으나 사전 원고의 간 곳은 알지 못하였다. 비단 조선어학회의 동지들뿐만 아니라 온 사회 인사들이 염려와 수심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해 9월 8일 서울 정거장 창고에서 사전 원고를 찾게 되었으니 이십 년 동안 쌓은 공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았음은 하늘의 도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날 원고가 든 상자의 뚜껑을 여는 이의 손은 떨렸으며 원고를 손에 든 이의 눈에는 더운 눈물이 어리었다.〉
이 역사적인 원고를 들고 김병제(金秉濟·1894~?), 이극로(李克魯·1893~1978년)가 을유 편집실을 찾은 것은 1947년 어느 봄날이었다. 두 사람은 ‘큰사전’ 원고에 얽힌 곡절을 들려주면서 출판을 제의했다. 그러나 물자난이 극심한 때여서 용지 확보가 불투명해 얼른 답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두 번씩이나 거절을 해야만 했다. 세 번째는 이극로·김병제가 이희승(李熙昇·1896~1989년)과 함께 찾아왔다. 이극로는 원고 뭉치를 책상에 내치며 이렇게 말했다.
“누구 하나 ‘큰사전’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우리나라가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놈들한테나 찾아가서 사정해야 옳단 말이오?”
아호가 ‘물불’인 이극로의 노성(怒聲)에 을유 간부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물불’ 가리지 않는 그의 불 같은 열정이 빛을 밝힌 순간이었다.
“우리 을유가 역사적인 일을 외면할 수는 없다. 우선 1권만이라도 내고 대책을 강구합시다.”
뜻이 있으면 길은 열리게 된다. 2권부터는 록펠러재단의 원조를 받아 제작하게 되는데 을유는 정가를 반값으로 낮추어 내놓는다. 이 사업은 정진숙이 전무였을 때 시작하여 사장이 된 뒤에 완성되었다.
문고본 시대를 연 ‘을유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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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유문고》. 동서양과 시대를 통틀어 수많은 분야를 총망라한 문고 시리즈다. 1948년 ‘문화와 사상의 범국민적 보편화’라는 취지에서 박태원의 《성탄제》를 시작으로 26권까지 내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69년 3월 문일평의 《한국의 문화》를 필두로 속간되어 1988년 268권까지 출간되었다. |
한국의 문고 시리즈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의 신문관에서 간행한 ‘육전소설’류(類)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이미 1930년대에 박문문고, 조선문고가 나왔고 해방 이후 을유문고, 협동문고가 나와 우리말을 도로 찾은 독서계의 지적 요구를 채워주었다. 50년대 후반에도 휴대하기 쉽고 저렴한 문고판 시리즈가 쏟아져 전후 세대 의식의 지적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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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유문화사는 홍명희의 장편소설 《임꺽정》을 전 10권으로 간행키로 하고 1948년 3월 〈의형제 편 1〉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6권을 간행했다. 그러나 홍명희의 월북으로 완간하지 못했다. |
“1953년 가을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10여 종이라는 제법 많은 단행본을 부산에서 간행했습니다. 6·25 전에 이미 10여 권이 출간된 《대학총서》의 속간에 착수하여 이재훈의 《윤리학》, 홍우의 《화폐론》, 김효록의 《상업개론》 등을 간행하는 한편, 코넌 도일의 《도일 탐정단편집》, 빌헬름 딜타이의 《철학의 본질》,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색 글씨》 등을 번역·간행했습니다.”
을유의 저자 가운데는 이른바 해방공간에 월북했거나 6·25 중에 납북된 인사가 상당수에 이른다. 홍명희, 이태준, 정지용, 손진태, 정인보, 김기림 등 많은 저자가 6·25를 전후해 중대한 신상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은 전쟁 뒤의 을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 《무녀도》 《삼대》 《임꺽정》의 출간 한국 전쟁 이전 을유는 많은 문학작품을 펴냈다. 안회남의 《불》, 최명익의 《장삼이사(張三李四)》, 김동리의 《무녀도(巫女圖)》, 이태준의 《복덕방》, 염상섭의 《삼대》, 김남천의 《맥》, 이양하의 《이양하 수필집》, 정인보의 《담원시조》, 김용준의 《근원(近園) 수필》, 박종화의 《대춘부》 《금삼의 피》 《다정불심》,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전 10권 중 6권), 박태원의 《성탄제》 등이 당시 우리말로 된 문학작품을 갈망하던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다. 모두가 우리 문학사에 귀중한 발걸음으로 평가되는 출판물이었다. 정무영 대표의 말이다. “《삼대》는 1931년 1월 1일부터 9월 17일까지 총 215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을 모아 출간했습니다. 《무녀도》와 《당랑의 전설》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7년과 1948년에 출간했고요. 《임꺽정》 첫째 권이 출간된 것은 1948년 3월 1일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1928년 11월 21일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해 몇 차례 중단을 거듭하며 1939년 3월 11일까지 연재되었고, 이듬해인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조광》지 10월호로 옮겨 연재를 계속했으나 결국 미완성인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조선일보사에서는 《임꺽정》을 전 8권으로 간행할 계획이었으나 〈의형제 편〉 상·하권과 〈화적 편〉 상·중권까지 4권만을 출간한 채 중단되었습니다. 을유에서는 《임꺽정》을 완결시킬 의도 아래 홍명희 선생과 교섭해 원고를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하여 전 10권으로 간행키로 하고, 1948년 3월 〈의형제 편①〉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그해 11월까지 여섯 권을 간행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홍명희가 그해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그대로 평양에 남아 있기로 함으로써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편집부 직원들이 홍명희가 월북한 뒤 아쉬운 마음에 그의 창동 자택을 찾아가 나머지 원고를 찾기도 했었다고 하더군요.” |
전쟁 뒤의 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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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 1959년 6월부터 1965년까지 진단학회의 주도로 간행된 한국사 개설서. 이로써 일제의 식민사관을 지양하고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말하게 되었다. |
이에 맞물려 《번역신서》도 간행했는데 700쪽이 넘는 대저(大著)만 해도 《사회학》(728쪽), 《문명비판과 가치의 세계》(736쪽), 《현대사회정치사상》(740쪽), 《서양철학사》(752쪽), 《경제사회학》(792쪽), 《정치학개론》(814쪽), 《미국정치외교사》(988쪽) 등 다양했다.
1959년부터 펴내기 시작한 《한국사》(전 7권) 시리즈는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할 만큼 해방 이후 우리 사학계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한 기념비적인 저작이었다. 그해 6월, 진단학회 편 《한국사》 첫째 권인 〈고대 편〉이 이병도(李丙燾·1896~1989년)·김재원(金載元·1909~1990년) 공저로 출간된다. 해방이 되고도 제대로 된 통사(通史) 하나 없던 우리 학계는 드디어 체면을 세울 수 있었다.
《한국사》는 전 7권(본문 6권, 연표 1권) 총 6030쪽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로,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쓴 한국의 통사였다. 잃었던 민족의 생명을 되살려놓은 명저로, 그즈음 여러 신문 사설에서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당초 필자는 〈고대 편〉 이병도·김재원, 〈중세 편〉 김상기(金庠基·1901~ 1977년), 〈근세 편〉 이상백(李相佰·1904~1966년), 〈최근세 편〉 최남선이었다. 그러나 육당이 건강 악화로 중도에 포기하자 이선근(李瑄根·1905~1983년)이 대신 집필을 맡았다. 그런데 4·19 직후 정치적 문제로 이선근이 투옥되는 바람에 원고 집필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 위기를 정진숙은 정면으로 부딪쳐 뚫고 나간다. 이선근의 옥중 집필을 허락받기 위해 정진숙이 발 벗고 나선 끝에 마침내 뜻을 이루어낸다. 참고도서와 원고 용지를 서울교도소에 들여보내는 한편 집필된 원고를 받아와 편집을 진행했다. 필자 교체와 옥중 집필로 이루어진 〈최근세 편〉은 원고가 넘쳐 〈최근세 편〉과 〈현대 편〉의 두 권으로 간행되었다. 을유의 경영철학에 ‘불가능은 없다’가 담겨 있으리라.
민족의 생명을 되살려놓은 名著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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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유세계문학전집》. 1959년 8월에 어윈 쇼의 《젊은 사자들》을 시작으로 간행된 이 전집은 1차로 60권, 2차로 40권 등 총 100권으로 마무리되었다. |
《세계문학전집》 100권도 을유의 전설 중 하나다. 1959년 8월 어윈 쇼의 《젊은 사자들》을 시작으로 1차 전 60권, 2차 전 40권 총 100권으로 마무리되었는데, 맨 마지막 권은 《독일민담설화집》으로 1975년 11월에 나왔다. 번역은 원전(原典) 원어(原語)에 충실하려 했으며, 작품 선정도 선정위원회를 두어 독자적으로 골랐다.
전 100권으로 이루어진 《세계문학전집》의 원고는 30만 장이 넘고, 총 쪽수는 B6판 5만3700쪽이니 권당 평균 537쪽이 되는 셈이다.
굵직한 저작
을유의 《세계문학전집》 간행 이후 정음사와 동아출판사가 뛰어들어 세계 문학 출판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에 을유는 철저한 ‘원어주의’와 ‘완역주의’의 원칙을 세워 독자의 신뢰를 받았다. 을유의 《세계문학전집》은 두 가지 면에서 특기할 만한 업적을 남겼는데, 그 첫째는 상업적 성공이고, 둘째는 작품 분량이 많아 그때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거작들을 처녀 출판한 점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나 《겐지(源氏) 이야기》와 같은 1000여 쪽을 웃도는 대작도 펴냈다.
1962년에 간행을 시작한 《한국신작문학전집》은 단연 돋보이는 기획이었다. 등단한 지 15년 안팎인 신예 작가들의 장편소설을 전작(全作)으로 펴낸다는 기획 원칙은 당시 한국 출판계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박경리(朴景利·1926~2008년)의 《김약국의 딸들》은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전집은 1963년 1월 15일 손소희의 《남풍》으로 전 10권이 완간된다.
이 밖에도 굵직한 저작들이 많은데 모두 열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집대성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세계사상교양전집》(전 36권)은 1963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시작으로 《장자》 《고문진보(古文眞寶)》 《인구론》 등으로 이어지며,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 시리즈는 20년 동안 《세계문학전집》과 함께 을유의 쌍두마차로 상징되며 꾸준한 호평을 받았다.
또 《한국아동문학독본》(1962, 전 10권), 《임어당문집》(1971, 전 4권), 《한국학대백과사전》(1972, 전 3권), 《한국대표수필문학전집》(1975, 전 12권) 등도 기억에 남을 저작들이다.
오늘날에는 《국화와 칼》 《이기적 유전자》 《러셀 서양철학사》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글자 풍경》 등 단행본과 50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는 《을유세계문학전집》, 시공을 초월한 지적 성취를 담은 《을유사상고전》,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현대 예술의 거장》 등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파주 출판단지에 세워진 ‘은석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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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유문화사의 정무영 대표. |
― 경기 파주출판단지 샛강에는 출판인들이 건너 다니는 ‘은석교’가 있다고 합니다. 정진숙 선생의 아호에서 딴 이름입니다. 은석교가 생기게 된 연유가 궁금합니다.
“선친의 호 ‘은석(隱石)’은 두계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가 지어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는 일 자체가 은인자중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아버지께서는 ‘다이아몬드도 숨은 돌이 아니냐’고 농담 삼아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은석교는 이기웅 열화당 대표, 홍지웅 열린책들 대표, 한철희 돌베개 대표 등 국내 중진 출판인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만든 다리로 2004년 10월 24일에 준공되었고, 설계는 건축가 조성룡 선생이 맡아주셨습니다.”
― 정진숙 선생 하면 ‘영원한 출판인’이라 불립니다. 산업화, 지식 정보 산업화에 성공한 20세기 한국 출판 앞에 선생의 이름이 함께 놓이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빚더미에 올라앉는 어려움 속에서도 ‘이해타산보다는 영구히 빛바래지 않고 남을 책을 만들겠다’는 사명감을 끝까지 지켜내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출판은 기업(企業) 이상의 것이며, 돈을 벌기 위해 출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 을유의 첫 사장은 민병도였고 은석 선생은 전무이사셨습니다. 정진숙 선생이 을유의 사장으로 취임한 것은 1952년 10월이지요? 휴전 전에 사장으로 취임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민병도 사장, 정진숙 전무, 윤석중 주간, 조풍연 편집국장도 각기 피란길에 올라 부산의 번화가인 광복동에 ‘을유 연락사무소’를 차렸습니다. 매일같이 사무소에 모여 을유의 재건책을 모색했으나 뾰족한 묘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조풍연 편집국장의 제안에 따라 조풍연과 윤석중이 향후 상무취체역(상무이사)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일체를 포기한다는 약정서를 쓰고 을유를 떠났습니다. 이후 윤석중 주간은 군문(軍門)에 적을 두고 정훈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조풍연 편집국장은 공보에 몸을 담고 전시의 공보 업무에 몰두하였습니다. 이런 중 이듬해 10월 민병도 사장마저 조흥은행 상무취체역이 되어 을유를 떠났습니다. 이런 이유로 홀로 남은 저의 선친이 을유 사장직을 이어받게 된 것입니다.”
― 출판사 이름을 ‘을유’로 명명한 사연이 궁금합니다. 1945년이 을유년이지요?
“을유문화사라는 이름은 조풍연 선생이 제안했고 동인들의 만장일치 찬성으로 결정된 사명입니다. 출판사 이름을 정하기로 하여 ‘해방’ ‘을유’ 등 몇 가지 제안이 나와 검토한 끝에, 조국이 해방되고 새 출판사가 창립된 1945년의 간지(干支)인 을유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사명으로서 동인들의 뜻이 모였던 것입니다. ‘을유출판사’가 아니라 ‘을유문화사’라고 한 것은, 출판사업을 중심으로 문학상 제정, 장학사업, 음악회 등 각종 문화사업을 병행하여 시행하기 위해서였고요.”
“베스트셀러는 을유와 거리가 멀어”
― 한국 출판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돌이켜보면 수십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는 을유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유의 책들은 꿋꿋이 제 몫을 해주었지요. 선친께서는 ‘남이 이런저런 이유로 안 내는 책, 그러나 반드시 내야 하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면 사명감을 가지고 출판하셨습니다. 이게 출판사의 진정한 책임이고 의무라고 생각하셨던 거죠. 언급하신 책들은 이런 사명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정진숙 선생이 눈을 감기까지 을유가 발간한 책은 몇 권이나 됩니까. 수천 권이 넘겠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입니까.
“7000여 종이 넘는 책을 펴내셨습니다. 가장 애정이 가는 책으로는 《조선말 큰사전》과 《한국사》를 꼽으셨습니다.”
― 정무영 대표가 을유에서 출간한 책은 몇 권이나 됩니까.
“500여 권 되는 것 같습니다.”
― 정 대표께서 가장 애착을 갖는 책은 무엇입니까.
“을유에서는 국내 최초로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한 바 있는데요, 2008년부터 새롭게 선보이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은 토머스 만의 《마의 산》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40권을 출간하였습니다. 국내 최고의 역자들이 작품의 숨결을 생생히 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며, 정본(定本)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2045년 창립 100주년에 즈음하여 총 300권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을유세계문학전집》이 새로운 시대에 독자들의 마음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합니다.”
― 선친이 이루고자 하신 꿈을 위해 정 대표는 어떤 노력을 하셨습니까.
“선친께서는 항상 ‘출판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이 아니라 사회에 봉사하는 문화사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게 옳다 생각합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모습이 무의식 중에 내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말 큰사전》이나 《한국사》 같은 대작은 10년 가까이 걸렸고 좌초될 위기까지 거치며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사명감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선친의 뜻을 이어가고자 할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