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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참전 작가의 60년 전 일기장

“어머니 당분간, 어쩌면, 아주, 안녕히 계십시오.”

  •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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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휘 작가가 60년 전 1965~66년에 쓴 일기장… 전쟁의 참혹함 담겨
⊙ “채명신 사령관이 달려왔다. 성큼성큼 다가와 장세동 대위의 손을 잡았다”
⊙ “잡혀 오는 V.C 용의자, 가족, V.C들. 너무나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가족(人間家族)들”
⊙ “실로 목숨이란 오묘한 것이었다”
⊙ 사이공 부둣가에 쌓인 산더미 같은 원조 물자, 암시장 거쳐 곧장 베트콩 손으로
⊙ “녹색의 정글은 인간의 힘으론 결코 벗길 수 없는 견고한 철옹성”
베트남 전쟁 당시 관측장교로 참전한 김광휘 소위.
원로 방송작가 김광휘(金光輝·84)씨는 꼭 2년 전인 2023년 4월 베트남 전쟁을 다룬 장편소설 《마이의 산》(해맞이미디어 刊)을 펴냈다. 기자는 이 소설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으나 지면을 통해 소개할 기회가 없었다. 다른 언론들도 다루지 않아서 소설은 빛을 보지 못했다.
 
  남베트남 패망(1975년 4월 30일) 50주년을 앞두고 《마이의 산》이 떠올랐다. 이 소설에 대해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남전이 평생의 트라우마였기에 1980년대부터 베트남전을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장편 《호지명의 딸》(1988)이라는 첫 소설을 썼고, 그것을 《귀인》(2014)으로 개작해 펴냈습니다. 이 작품을 다시 손봐 세 번째 고친 작품이 《마이의 산》입니다. 베트남전은 나를 따라다니는 귀신 같습니다. 허허….”
 
  김 작가는 “베트남전은 이제 영화 〈플래툰〉, 앨런 긴즈버그의 시, 가수 존 바에즈의 반전(反戰) 노래와 함께 역사의 유물로 남았다”며 “전쟁의 초기 참전자로서 기록을 꼭 남기고 싶었다”라는 다짐을 힘주어 말했다.
 
金光輝는 누구?
 

  1941년생. 대전고와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ROTC 2기로 임관해 1965년 맹호부대 선발대로 베트남 전쟁에 파견됐다. 방송작가로 MBC 라디오 〈홈런출발〉 〈격동50년〉, TV 〈문학산책〉 〈독서토론〉 〈제4공화국〉, 코미디 〈웃으면 복이 와요〉 등을 집필했다. 젊은 날 경험한 베트남전을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소설 《마이의 산》을 펴냈다. 《마이의 산》은 이전에 출간된 소설 《호지명의 딸》과 《귀인》의 완결편이다. 베트남전 회고담으로 《월간조선》 2022년 1월호에 〈나의 월남전 전우 장세동〉을 기고했다.
 
  “포병장교 한재민은 나의 分身”
 
김광휘 작가가 2023년 펴낸 장편소설 《마이의 산》.
  장편 《마이의 산》 주인공은 포병장교(소위) ‘한재민’이다. 이 ‘한 소위’가 싸우다 죽은 항구도시 이름이 퀴논(퀴농)이다. 미군들은 Qui Nhon이라고 썼고, 베트남 현지인들은 ‘꾸이년’이라 불렀다. 한자는 귀인(歸仁). ‘어짊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공식적인 영어 표기는 Quy Nhon이다.
 
  유서 깊은 고도(古都) 꾸이년에 대해 김 작가는 “귀인은 《논어》에도 《맹자》에도 나오는 단어”라고 소개했다. “일찍이 공자는 ‘어짊으로 돌아가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의 기본’이라고 했지요.”
 
  《마이의 산》은 김 작가가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그는 1965년 맹호부대 선발대로 베트남에 파견돼 베트남 정글과 산악, 들판에서 베트콩(VC)과 싸우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후에 무공훈장을 받았다.
 
  안정효, 황석영도 베트남전을 다룬 소설을 썼지만 그들 작품에는 치열한 전투 장면에 대한 묘사는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마이의 산》에는 실제 경험한 전투 장면을 포함해 작가가 베트남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주인공 한재민 소위의 일기와 전투일지를 토대로 베트남 전쟁의 실화를 그대로 담았다”고 김 작가는 설명했다.
 
  ― 한재민 소위는 작가의 분신(分身)으로 이해하면 되나요?
 
  “네, 나 김광휘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마이’라는 여성도 실제 만났던 인물입니다.”
 
  소설 속 한재민 소위는 ROTC 출신 포병장교다. 포격 연습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월남 어린이를 죽게 하고, 그 일로 아이 어머니인 마이라는 베트남 여성과 인연을 맺게 된다.
 
  마이는 북부 하노이 출신의 여성이다. 응오 딘 지엠 정권 말기에 데모대에 뛰어들었다가 운명이 바뀐 그는 한재민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 당시 쓰신 일기장이 있습니까?
 
  “집에 있습니다.”
 
김광휘씨가 1965년부터 베트남 현지에서 구입했음직한 방안지 노트에 흑청색 만년필로 쓴 일기장. 나중에 옮겨 쓴 듯 첫 일기는 ‘1965년 10월 1일’부터 시작한다.
  기자는 경기도 군포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아 나이 예순 된 일기장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재민, 아니 김광휘의 일기장은 ‘1965년 10월 1일’부터 시작한다.
 
  기자는 ‘어짊으로 돌아가’ 베트남전의 현장을 돌아보는 데 이 일기장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기장 일부를 발췌 소개한다. 가급적 원문에 충실하되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현대어 표기에 맞게 고쳤다. 한자어는 한글로 옮기고 원문을 괄호에 넣고, 다시 나올 때는 그냥 한글로만 했다. 간간이 오기(誤記) 정정이나 지명 등 필요한 주석을 [ ]로 넣었다.
 
  1965년 10월 1일 금 맑다
  광덕이 어머님이 내 어머니 대신 떠나는 차 머리에서 우셨다.
  사단 연병장에 집결했다가 오후에 떠난단다.
  별로 미련도 생각도 없다. 결정된 사실이니 어서 떠났으면 하는 것뿐이다.
  오후 6시 15분 사단 출발.
  9시 용문(龍門)[경기 양평] 도착.
  용문까지 트럭으로 오는데 너무 쓸쓸하고 외로웠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병사나 장교들이나 표정이 모두 한결같이 무겁기만 하다.〉

 
  낡은 일기장은 꼭 60년 전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과 눈길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김광휘 작가는 ROTC 2기로 임관한 후 강원도 홍천에 있는 포병 사령부로 가게 되었다.
 
  “시동이라는 곳이었는데, 한자로 때 시(時)자 시동인지 시 시(詩)자 시동인지 알 바는 없으나 기왕이면 시(詩)에 사는 마을이라고 생각했지요.”
 

  기자가 돌아와서 찾아보니 홍천군 남면 시동리 한자가 과연 ‘詩’였다. 시동의 맨 끝에는 105mm 곡사포대대가 있었고 편제상 60대대라고 불렀다. 그 옆에 두 개의 105mm 곡사포대대 61대대와 628대대가 나란히 더 있었다. 그는 60대대에 배치되었다.
 
  ― 어떻게 해서 베트남에 가게 됐나요?
 
  “1965년이 되자 내가 근무하던 수도사단(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즉 맹호부대가 베트남으로 가게 됐어요. 나는 당시 소위였고 대대 보급장교로 매일 삼마치라는 고개를 넘어 홍천읍내로 가 보급품을 타오고 있었어요. 부대가 베트남으로 가게 되니까 나도 인질 비슷하게 가게 된 거죠. 아무튼 그리 된 기회에, 무엇보다 전쟁의 경험을 글로 표현하고 실제 전투를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닷새 만에 꾸이년 도착
 
  1965년 10월 3일 일요일 오전 9시 20분, 부산항 제3부두. 그를 태운 미 수송함 ‘제너럴 가이거(General Geiger)’에는 청룡부대원들과 500명 가량의 육군 맹호부대 선발대가 타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그 날짜의 일기다.
 
  10월 3일 일(요일) 맑다
  9시 20분.
  부산(釜山) 출발(出發).
  내가 지금까지 옹색하고 가련하게 자라 온 가난한 어머니의 나라, Korea.
  내 엄마의 눈물과 땀 속에 내 잔뼈를 굵어 온 가난한 이름 Korea.
  어머니 당분간
  어쩌면
  아주
  안녕히 계십시오.
  이럴 때 ‘엄마’가 생각나는 건 동물적인 본능일까?〉

 
  생전 처음 타보는 배였으며, 바다 여행이었다. 군악대가 힘차게 해병대 노래와 맹호부대 노래를 연주해 주었다. 함께 배에 타고 있던 해병들의 군가(軍歌)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고 한다.
 
  5박 6일의 항해 끝에 배는 베트남 중부 항구도시 꾸이년에 도착했다.
 
  10월 4일 월
  가없는 바다.
  위도(位度)[緯度의 잘못]를 하룻밤 거슬러 내려왔다고 이렇게 기온(氣溫)의 차(差)가 생길 수 있는가?
  벌써 남국(南國)의 열풍(熱風)이 불어오고 있다. 오후에 일본행(日本行) 미국(美國) 배가 멀리 스쳐갔을 뿐 가도 가도 또 바다.
  실로 목숨이란 오묘한 것이었다.〉
 
  〈10월 7일 목
  몇 시간 후면 Vietnam에 도착(到着)한다.
  나는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처럼 이 땅에서 떨어질 것인가?
  살아서 1년(年) 후(後)에 돌아간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영혼과 정신상태(精神狀態)까지 불건전(不健全)하고 회의에 떨고 있으며 주님의 은총(恩寵)에서 멀리 있다.
  육체적 condition이 지극히 불량하다. T.b[정밀타격] 후보생이 아닌가?
  죄(罪) 값은 사망(死亡)이라는 철칙(鐵則)을 생각하며.〉

 
  ‘한 앗사리온’은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 제국에서 쓰이던 소액으로 동전 한 닢 정도 의미다. 가치 없이 전쟁터에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당시 전쟁터에 도착한 김광휘 소위가 심리적으로 무척 불안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10월 8일 금
  오전에 ‘퀴논(Qui Nhon)’항에 도착하다.
  첫눈에 띄는 것은 오른쪽 산(山) 밑에 있는 성당(聖堂)과 시가(市街) 중심부(中心部)에 서있는 높은 고딕식과 돔식을 겸한 성당의 탑(塔)이었다.
  아름다운 항구.
  전진(戰塵)[싸움터의 흙먼지]이 이는 전쟁터 같지 않은 아늑한 해안도시(海岸都市). (중략)
  내가 처음 본 베트남인.
  돛배를 타고 온 부자(父子)나 형제(兄弟) 같은 성인(成人)과 나어린 소년(少年).
  피부는 암갈색.
  용모는 별로 특징 없음.
  G.I 모자를 쓴 꼬마가 우리 사병이 던져 준 사과를 건지려고 돛배에서 뒤웅박 같은 소쿠리배를 앙증스럽게 몰아 와선 냉큼 집어가는 모습은 날렵한 Vietcong을 연상케 하여 두려움이 앞섰다.〉

 
 
  처음 본 베트콩과 시체
 
김광휘 소위는 지금도 “베트콩이 쳐들어온다”는 악몽을 꾼다고 한다.
  GI는 ‘정부 물자(Government Issue)’라는 말인데 속어로 미군을 가리킨다. 김광휘 소위는 맹호1연대 제3중대의 관측장교로 발령받아 사단본부 부근에 있는 보병연대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중대가 옮기게 된다. 한국군으로서는 최초로 베트콩 지역에 떨어진 것이었다.
 
  10월 29일 금
  어젯밤 2시경부터이었다. V.C들의 잠입(潛入).
  3소대(小隊) 지역(地域)에서 요란하게 지지더니 잡았다 하는 함성과 함께 사격은 끝났다.
  시체(屍體)는 아침에 확인되었다.
  T.N.T[폭발물]와 수류탄을 소지한 시체 2구(具).
  머리를 박박 깎고 허름한 빤스[팬츠]에 벙거지를 쓰고 개구리처럼 발을 뻗고 죽어 있었다.
  한 놈은 개울에 머리를 처박고 물을 마시듯 하고 죽었다. 악착같이 손을 움켜쥐고 표범처럼 날렵한 두 다리를 길게 뻗었는데 오랜 수림 생활과 단련으로 적당한 탄력이 있고 잘 닦여진 구릿빛처럼 야릇한 독기(毒氣)를 발하고 있었다.
  시체의 얼굴을 들었을 때 의외로 이목이 단정한 데 놀랐다.
  무엇을 위하여 너희들은 그처럼 용감한가?
  독립(獨立)인가, 빵인가.
  정열인가 투쟁 자체인가.
  목숨을 하찮게 여길 만큼 너희들의 정열은 큰가? 수류탄과 T.N.T만으로 중대의 화망(火網)이 기다리는 죽음의 Tunnel로 뛰어드는 건 너희들의 둔감성 때문인가?〉

 
  V.C는 Viet Cong, 즉 베트남 공산주의자다. 김광휘 작가는 “베트콩이다! 베트콩이 쳐들어온다!”는 외침을 처음 들은 그날을 기억한다. 어둠 속에서 중대장(장세동 대위)의 명령, “박격포, 조명탄 올려! F.O[관측장교], 조명탄 때려 줘!”라는 음성을 잊지 못한다.
 
  김광휘 소위는 떨렸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베트콩들을 처음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었다. 장세동 대위는 “김 소위! F.O! 미군 비행기 불러! 조명탄 쏴달라고 해!”라고 했다. 김 소위는 미군 연락장교에게 조명탄을 투하해 달라고 요청했다. 곧이어 거짓말처럼 미군 비행기들이 날아오고 하늘에서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고, 얼마 후 총성이 멎었다. 채명신 사령관이 달려왔다. 성큼성큼 다가와 장세동 대위의 손을 잡았다.
 
  “장 대위, 수고했어. 아주 멋지게 격퇴시켰군. 전과(戰果)는?”
 
  장세동 대위는 간략하게 보고했다.
 
  “베트콩 사살 2명입니다. 시체는 저기 있습니다.”
 
 
  고보이에서 ‘나’와 장세동
 
장세동 대위(왼쪽)와 김광휘 소위(가운데). 두 사람은 지금도 안부를 주고받으며 가깝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한국군이 단독으로 베트남전에서 중대 단위로 승리를 거두게 되자 채명신 사령관은 부대 운영을 중대 단위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 최초의 시범 부대로 장세동 중대, 즉 맹호 제1대대 제3중대를 미군들이 가까스로 교두보로 확보하고 있던 ‘고보이’라는 지역으로 투입하였다. 고보이는 꾸이년 북동부 강가의 전략촌(戰略村)이었다. 일기장을 펼쳐 보았다.
 
  11월 2일 화
  수일간의 집결지 방어를 마치고 드디어 front line에 투입(投入)되었다.
  넓고 넓은 들. 푸르고 푸른 들을 건너 2열 종대로 걷고 있었다.
  수렁과 늪. 개울. 대나무숲을 건너며 습습한 열풍 속에서 가만히 뇌어 본다.
  ‘지금부터 시작(始作)되는 거다’라고.
  미군 주둔지인 이곳–이름하여 Goboi(고보이)–대나무 숲으로 아름답게 둘러싸인 이 강둑 마을은 서부 시절(西部時節) 같은 술렁대는 흥겨움까지 있으나 어쩐지 살벌하고 두려운 기대에 차있는 것 같다.
  부락민 사이에 마구 끼어 있는 미군들.
  맥주와 코카콜라를 파는 동네 처녀들.
  흔들그네(해먹) 위에서 코를 골며 자는 미군 사병.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위엄을 피우는 선임하사관들과 동네 아낙네들의 웃음소리. 환자를 돌보아 주는 의무대. 애기 울음소리.
  마을 한가운데로 강(江)이 흐르고 강 건너 북쪽 끝에는 커다란 고딕식 성당이 서있었다.
  고무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너 교회까지 가는 길 양옆엔 키 큰 야자수와 대나무가 우거져 있다. 전전(戰前)엔 간장공장으로 이름났던 곳이라는 이 마을엔 아직도 시커먼 간장독에 꺼먼 늑멈[느억맘·베트남식 젓갈간장] 하나 가득 채워져 집집마다 후원(後園)에 버려져 있다.
  야릇하고 퀴퀴한 간장 냄새. 시골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운 불란서식 건물들.〉

 
  김광휘 소위는 이곳에서 용맹한 미군들과 만났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일대에서 용맹을 떨쳤다는 미 101공수사단 C중대였다.
 
  “우리는 그날 저녁부터 M16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들을 지켜보았습니다. 105mm 포탄이 떨어지고 여기저기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울려퍼졌지요. 부상당한 미군들을 실어 나를 헬기들이 연신 날아오기 시작했어요.”
 
  부중대장 김실근 중위가 그를 향해 말했다.
 
  “김 소위, 우리끼리 저놈들하고 싸우게 되면 당신 저 미군 포병들처럼 대포 잘 쏠 수 있겠소? 자신 있어?”
 
  그는 자신이 없었다. 장세동 중대장이 뒤에서 말했다.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거야! 김 소위, 우리는 할 수 있어. 겁먹지 마!”
 
  이후 미군들은 떠났고, 미군들이 떠나고 나자 그는 더 큰 무서움에 휩싸였다. 일기장에서 그 무렵에 썼을 법한 것을 찾아보았다. 11월 7일이었다.
 
  〈잡혀오는 V.C 용의자. 가족. V.C들.
  너무나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가족(人間家族)들이다….
  옷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헐은 옷을 입고, 마르고 영양실조된 얼굴에 실의와 공포만이 전부인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는 날쌔고 독한 살인자로 변한다. 지독하고 철저한 살인자(殺人者).
  죽음도 삶도 없는 투쟁의 도구(道具)로.
  나는 포병장교(砲兵將校)로서 한 가지 마음에 괴로운 사실이 있다.
  지도(地圖)를 펴고 포격할 곳을 표정[標定]할 때 총총히 밀집(密集)되어 있는 마을을 본다.
  V.C가 있는 마을. 마을 한가운데 Mark를 긋고 ‘사격 임무’를 내린다.
  포대 3발의 VT[근접 신관. 목표물에 접근해 폭발하도록 설계됨] 효력사를 내리고 지축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 생각해 본다.
  저 무거운 폭음(爆音) 속에 애기 울음소리.
  어머니의 애끊는 외침 소리.
  아이들의 호곡 소리는 없는가 하고.〉

 
 
  4월 19일 그날의 첫 전투
 
  1966년 4월 19일. 그날 아침 중대는 앞으로 있을 연대 작전의 준비 작업을 위해 꾸이년 북쪽 고보이평야 진격작전을 펴기로 했다. 바로 전날 부중대장 김실근 중위가 목표 부락인 탄광 마을까지 정찰을 끝내고 돌아왔다.
 
  “별 특이한 동향은 없었습니다. 적들이 침투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장세동 중대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런데 예감이 좋지 않아.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하고 썩 내키지가 않아.”
 
  당시 상황을 적은 일기를 찾아보았다.
 
  1966년 5월 3일
  약 2주일 전 바로 이 자리에서 V.C들은 우리에게 사격을 가하고 최후까지 버티었다.
  비처럼 쏟아진 아군(我軍)의 포탄(砲彈) 속에서 어떻게 주력(主力)이 살아서 도망쳤는지 궁금하다.
  4월 19일 그날
  우린 Goboi Base를 6.30 AM에 출발.
  극히 간단한 patrol이라는 생각으로 주의 없이 진로(進路)를 따라 전진(前進)했다. 이날 출발시에 중대장 장세동 대위가 유난히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통신병들에게 화를 낸 것 외에는 특별한 징조도 없었다.
  Turning point인 object 14를 바라보며 13번 앞 들에서 잠시 쉬면서 여유 있는 잡담도 했었다. 이때 1소대에서 수상한 인원이 회로(回路)인 15번 목표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일어섰다.
  추수가 끝난 튜이폭군(郡)[뚜이퍽] 예하의 빈들은 고요하고 평화(平和)로워 보였으며 진 수렁도 없이 기동하기에도 편했다.
  object 13은 Thanh Quang[탄꽝]라는 마을로 크지도 않은 소촌락이 두 곳으로 조그만 내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키 큰 야자수가 마을 입구에 나란히 서있고 초가와 불란서식 아담한 양옥도 섞인 전형적(典型的)인 베트남 촌락이었다.
  최인수 중위가 인솔하는 제2소대가 마을에 들어서고 김지영 중위가 지휘하는 화기소대 포반도 거의 마을에 들어섰을 때
  “총 가진 V.C가 있다!”라는 소대원의 고함 소리가 났다.
  그렇다. 총 가진 V.C 그것은 오래 전부터 우리 중대원이 바라던 선물이다.
  “산 채로 잡아라!”
  우리는 흥분하여 외치면서 뛰어갔다. 그러나 이건 무언가. 중대본부를 향해 일제히 불을 뿜는 적의 자동화기.
  “따따따따…!”
  단번에 부관이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나는 정신없이 엎드렸다.
  앞에 저격병이 우릴 향(向)해 계속 쏘고 있었다. 중대장이 지휘를 하기 위해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순간이다. 땅! 중대장님은 오른편 어깨에 관통상이었다.
  전방에 가던 화기소대장은 눈에 관통상을 입고 업혀 나왔다. 그 소대에서 전사자가 생겼다. 이날의 적(敵)은 지극히 완강했다.
  2소대 인원이 마을을 뒤지기 시작하자 적은 둑을 넘어 14번 목표로 퇴각해 버렸다. 2중대와 1중대가 서서히 포위망을 형성(形成)하고 압축해 오기 시작했다.
  14번 목표를 향(向)하여 우리의 각종 포(砲)와 소총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17시쯤 적은 잠잠해졌다.
  결국 포위망을 형성한 채 각 중대는 목표를 감시하며 날이 저물어 현지에서 주둔하기로 했다.
  어둡기가 무섭게 수천 발의 조명탄을 계속 밝히며 대낮처럼 만들어 놓았다.
  V.C의 인내력과 싸우는 미군의 dollar!
  모기가 하도 뜯어서 꼬박 뜬눈으로 날을 밝히다.〉

 
  ‘V.C의 인내력과 싸우는 미군의 달러’라는 신랄한 표현은 앨런 긴즈버그의 시 ‘아메리카(America)’에 나온 “거의 모든 우리의 언어는 전쟁에 의해 세금이 매겨졌다”라는 표현을 떠올리게 했다. 김광휘 작가는 이 일기를 토대로 《월간조선》 2022년 1월호에 〈나의 월남전 전우 장세동〉을 기고하기도 했다.
 
  〈4월 19일 김광휘 소위와 부대원들은 어느 목표 지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탄광 마을만 돌고 나면 고보이로 돌아가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기관총의 폭발음이 들렸다. 부중대장 김실근 중위가 부상을 당했고 앞서 가던 김지영 중위(육사 19기, 당시 화기소대장)도 눈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숲속 저격병의 기관총 총구가 보이더니 장세동 중대장 역시 풀썩 쓰러졌다. 그의 피가 김(광휘) 소위의 군복을 적셨다.
  유도 선수였다는 선임하사가 벌벌 떨면서 장 대위를 둘러업고 뛰었다. 총탄이 발뒤꿈치를 따라왔다. 달리면서 미국 헬리콥터를 불렀다. 좌표를 부르며 빨리 와달라고 소리쳤다. 장 대위는 헬기를 타면서 다시 눈을 뜨며 이렇게 말했다. “김 소위, 중대를 부탁해!”〉

 
 
  아군과 베트콩 사체
 
김광휘가 쓴 일기. 삶과 죽음을 직면하던 시기 신앙을 두고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김광휘 소위는 처음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해 죽음의 현장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몇 주 뒤 5월 12일자 일기에는 ‘영혼’ 이야기가 나온다. 전투 끝에 숨진 한국군 전우 1명과 베트콩 1명의 시신에 대한 심경도 적혀 있다.
 
  5월 12일 목
  사람이 영혼(靈魂)에 대(對)한 추구(追求), 사고(思考), 그 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지 않고 막연한 일상성(日常性)에 젖어 살다가 죽는 것은 의미(意味)가 없을 뿐 아니라 가치(價値)도 없다.
  지난 10일 최 중위 소대에서 잠복을 나갔다 V.C와 마주 부딪쳐 피차 쏘고 던지고 해서 죽은 2구의 시체를 보았다.
  내 손으로 만져 본 싸늘한 감촉의 죽은 손.
  김 상병의 손과 마구 골이 쏟아져 나와 죽은 처참한 V.C의 시체.
  한 사람은 Korea에서 나서 20여 년을 고생스럽게 자랐으며 그는 그대로의 결정에 따라 Vietnam에 왔고 이날 문득 숨진 것이다.
  그날 아침 어느 월남(越南) 노인(老人)이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부비트랩에 걸려 쓰러졌을 때 고히[고이] 잠들라고 묻어 주며 장난기 어린 몸짓으로 대나무까지 꽂아 주더라는 그가.
  또 소대 대항 오락회에서 ‘도쿄에서 온 편지’를 간들어지게[간드러지게] 부르던 그가 이날 오후 숨져 버린 것이다.
  총을 맞고도 엉금엉금 기어와 기어이 수류탄으로 Korean을 죽이고 숨진 V.C. 그는 Vietnam에서 출생한 농부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허름한 윗저고리와 팬츠만을 걸친 가련한 Vietcong…. 언제쯤 이루어질지 모를 남부 Vietnam의 중립화나 적화(赤化)를 민족해방(民族解放)이라는 꿈으로 삼고 굶주리며 쫓기며 살아온 사나이, 그도 죽었다.
  ‘죽음’은 모든 의미와 활동, 모든 변명(辨明)을 그치게 한다. 모든 목적과 이념과 신념의 끝이다. 지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종말(終末)이다. 적어도 그 개인에게는.〉

 
  이 대목에 대해 김 작가는 “인간은 자기 목숨을 던져 스스로 날개를 달 수 있다”고 말했다. “내려다보면 한없이 어둡고 아찔한 그 죽음의 계곡도 홀연히 황홀한 동작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그 선택권”을 인간은 누구나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얘기였다. 그것은 “빙벽 같은 절대의 언덕에 스스로 피켓을 꽂을 수 있는 자유의지의 승리”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소설 《마이의 산》에서 여주인공 ‘마이’로 탄생하기까지 밑거름이 되었다.
 
  그 무렵 그는 신앙의 문제, 종교의 문제까지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신앙에 대해 “회의(懷疑)와 결별(訣別)하는 것이자 선택(選擇)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계속되는 5월 12일 그날의 긴 일기다.
 
  〈신앙(信仰)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회의(懷疑)와 결별(訣別)하는 것이며 선택(選擇)하는 것이기도 하다.
  넓은 길을 가든가, 좁은 길로 가든가, 하나님 편에 서든가, 인간 편에 서든가,
  어떤 형태의 것이든 humanity를 신봉(信奉)하든가, Christianity를 신봉하든가,
  보편타탕성(普遍妥當性)과 인정(人情)에 의(依)해 살든가,
  주(主)의 뜻이라는 단일 노선(單一路線)에 서든가,
  믿음은 분명(分明)한, 명백(明白)한 선택이다.〉

 
 
  《부르지 못한 노래》를 읽으며 밤을 새우다
 
음료와 바나나를 파는 베트남 여성들 앞에서 김광휘 소위가 사진을 찍었다.
  김광휘 작가는 ‘1966년 8월 6일 부산 도착’까지 일기를 이어 갔다. 건너편 정글에서 들리는 원숭이의 울음을 듣거나 초저녁 요란한 총성을 듣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며 일기장을 채워나갔다. 일부를 건너뛰어 가며 소개한다.
 
  5월 29일 일
  주일(主日)도 잊어버리고 하루를 보냈다.
  믿음이 적은 자여.
  나는 왜 이렇듯 겨자씨만 한 믿음이 없단 말인가?
 
  6월 5일
  주님은 아실 것이다. 나는 결코 성자(聖者)가 될 수 없다. 내가 성자가 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주님은 웃고 있을 것이다. ‘너 어리석고 무리한 행위는 그만두어라. 어린애처럼 순수하게 살아라. 다만 무절제하고 스스로를 모독하는 더러운 행위를 삼가라’고.
 
  6월 11일 새벽
  고정훈(高貞勳)씨 《부르지 못한 노래》를 읽으며 밤새우다.
  희부옇게 지새는 저 달빛 아래 나는 뜻 모를 눈물을 흘린다.
  월남에 온 후 두 번째인 듯한 눈물.
 
  6월 15일 수
  초저녁의 요란한 총성과 함께 잠복 초소로부터의 보고(報告).
  ‘V.C 2명 사살. 소총 1정 노획’
  사냥군의 스릴 같은 걸 즐기며
  모기 뜯기는 숲속에 숨어 V.C가 나타나기만 기다리는 사람 사냥꾼.
  훈장을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들.
  군인(軍人)의 생활(生活)은 이런 건가?
 
  6월 22일 수
  오늘부터 꼭 한 달.
  베트남 생활의 제일 끝 부분이다.
  오늘 장(長)거리 patrol이 있다.
  오늘도 무사함을 믿는다.
  앞으로 한 달 간은 Catholic 입문(入門)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한다.
  주여 모든 일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6월 28일
  용기가 없는 자여 용기를 내라.
  의(義)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열심과 확고한 태도를 갖도록.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할진대 내 계명을 지켜라’(요한 14,15).
  교리적 신앙. 행함의 신앙이 옳은 신앙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하시지 않았는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라.
  그리하려면 그를 위해 지키고 행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아,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는 피에 굶주린 젊은이들. 주여, 저들에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알게 하시옵소서.
  제3소대원들이 잠복 초소에 나타난 부녀자들을 무차별 사살을 했다고 한다. 이것을 말리지 못하고 부하들의 간담을 키운다는 의미로 장려했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가련한 소위.
 
  7월 11일
  오늘 2달여를 지루하게 보낸 Tinh Hoa 마을에서 최전방 base Chanh Dinh 마을로 이동해 왔다. Tinh Hoa는 4월 19일 격전(激戰) 때 V.C들이 최후(最後)까지 남아서 대치하던 곳이요 우리가 점령할 때 그 처참한 가옥과 마을의 잔해와 시체 냄새 때문에 도무지 정이 들지 않던 곳이다.
  그곳 생활을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적이 없으니 포를 쏠 수도 없다. 철조망 밖에 나갈 수도 없다. 볼 만한 책도 모조리 읽어 치워 볼 수도 없다. 햇빛 때문에 늘 골치만 아팠다. 유일한 낙은 하루에 두 번쯤 몸을 담가 보는 뿌연 냇물. 그러나 뱀이 우글거리는 그 냇가는 혼자 갈 때는 기분이 나빴다.
  오늘 그곳을 떠나오며 그동안 고보이에서 얻어다가 8개월 동안 길러 온 사랑스러운 깜둥이 개 goboi를 그만 놓고 왔다.
  꼭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며칠 전 낳아 논 6마리의 새끼가 오는 도중 더위나 먹지 않을까 하는 점과 우리 사병들이 냄새 나는 그 개를 이젠 싫어들 하는 점에서였다.
  고놈이 보고 싶다, 벌써. 불쌍하기도 하다. 우리와 교대한 보병들이 잘 키워 주겠지.
  새로 온 이곳은 여러모로 맘에 든다.
  우선 내 막사는 이 중대(中隊) Base 중에서 No 1. 제일 멋있고 시원하다. 단 하나 있는 2층 집의 이층을 내가 차지하게 되었다. 침대가 있고 멋있는 테이블이 있고 위층은 O.P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망대(望臺)가 지어져 있고 중대 주위로는 돌아가며 숲과 냇물로 자연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다. 좀 위험해서 그렇지 만점이다. 까짓것 부딪히면 싸우는 거다.
  이달 말이면 귀국(歸國)이다. 이곳에서 귀국선(歸國船)을 타게 될 것이다.
  하루가 삼추(三秋)와 같이 길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고, 이곳… 주의 가호가 끝까지 있기를 바란다. 겸손히.
  이곳에선 건강(健康)도 좀 회복하고.
 
  7월 13일
  Robert Loh라는 중공(中共) 망명가(亡命家)가 쓴 《잃어버린 대지》(김준엽 역)라는 책자를 아주 인상(印象) 깊게 읽었다.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에서 일어나는 비인간적(非人間的) 생활상(生活狀)을 지적(知的)인 표현(表現)으로 너무나 선명(鮮明)하게 잘 그려 놓았다.
  나는 때때로 자본주의(資本主義)가 빚어내는 부패(腐敗) 때문에 내가 사는 사회(社會)를 혐오할 때가 많다. 자본주의의 부도덕(不道德)한 생활 태도에 반발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이긴 해도 공산국가에서 벌어지는 그처럼 잔인하고 비인간화의 굴레에 비하면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자유(自由)’라는 이 엄숙하고 귀(貴)한 공기를 마시며 나는 살 수 있으니까.
  베트남에서의 전투.
  미군은 Saigon을 완전히 자기대로 물들여 놓고 있다. 딸라[달러]를 뿌리며 창가(娼街)를 번창시키고 가난한 여자들을 타락시키고 사리사욕을 일삼는 탐관오리들을 두둔하고 철없는 군인들은 아무 이념(理念) 없이 사냥하는 기분으로 사람들을 잡고 농가를 불태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기본 자유를 옹호하고 참다운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고 자유국가를 유지하고저 베트남에 무수한 피와 물자를 뿌리면서도 사소한 부주의와 자각하지 못한 행위 때문에 과오를 범하고 있다.
  민중들도 믿지 못하고 있다. 호지명(胡志明)[호치민]도 민족주의라고 하지만 그 무지무지한 테러행위 살인행위 공포조직으로 벌써부터 공산주의를 배우고 있다.
  만약 베트남이 호지명의 지휘 하에 들어간다면 Cu Mong 고개 장터에 나오는 베트콩 지역의 여인들같이 공포에 질려 웃을 줄 모르는 비인간(非人間)들만이 존재(存在)하게 될 것이다.
  목적(目的)이 좋으나 자꾸 수단(手段)에 미스를 범하는 자본주의, 주의성 없는 자본주의와
  목적도 수단도 무시무시한 Vietcong, 환상과 공포에 젖어 있는 베트콩의 대결이다.
 
김광휘 소위가 한때 연정을 품었던 베트남 여성 마이. 소설 《마이의 산》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이다.
  7월 17일
  오늘 주님께 깊이 깊이 감사하며 나를 살게 하시는 주님께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애정(愛情)을 느낀다.
  나는 오늘로서 실제적(實際的) 전투행위(戰鬪行爲)는 끝을 냈다. 전방 O.P를 인계하고 포대로 철수해 왔다. 1차 귀국자에 대한 특혜란다. 나는 죽음이라는 직접적(直接的)인 위협에서는 벗어났다. 앞으로 며칠 동안 빈둥거리다 준비했다 가란다. 좋다.
  ‘너희들(후방에 있던 대대장, 포대장)도 사람이긴 한 모양이구나.’
  * 나는 이제 죽음의 잠을 깨야 한다. 각성(覺性)[覺醒]하고 살아 있는 생활을 해야겠다.
 
  7월 20일
  비가 온다. 밤 깊도록 조용하게 내리는 저 비. 며칠이면 떠나는 이 베트남의 밤비에 나는 귀기울이며 몸이 뒤틀리는, 쥐어짜는 듯한 아픈 향수를 느낀다.
  파초 잎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침엽수처럼 갈라진 커다란 야자잎 위에 교향시처럼 흘러내리는 빗줄기…. 나는 슬픔과 아름다운 꿈이 뒤범벅이 되어 잠이 오지 않는 밤이지만 지금쯤 전방 숲속에 웅크리고 있을 나의 전우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두려운 밤이 될 것인가. 얼굴과 등줄기를 타고 사정없이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눈물보담 인종[忍從]을 강요하는 고문이 될 것이 아닌가?
  비가 오면 슬픈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빗줄기가 눈물과 같은 형태(形態)여서일까?
  ‘사랑의 기쁨’ ‘Oh my papa’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감미로운 음악(音樂).
  우리 목숨은 이렇게 안전하게 살아 있을 때는 꽃송이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울 수 있다. 그러나 참혹한 죽음과 공포 밑에서는 아, 굴욕적인 땀과 일그러진 표정과 마구 짓밟혀지는 인성(人性)이 있을 뿐이다.
 
  7월 30일
  지금 배가 움직이고 있다. 만 10개월의 Vietnam 근무(勤務)를 마치고 나는 지금 살아 돌아가고 있다.
  꼭 죽을 것 같은 사지(死地)에서 서서히 풀려 나가고 있다.
  밤 20시 General Bachford에 실려 남지나해(南支那海)의 검푸른 물결 위에 내 지친 영혼이 나른하게 흘러가고 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어떻게 틀린 것인가를 절감(絶感)[切感]하며 간절히 기도(祈禱)하던 많은 밤들과.
  이 밤.
  숲속과 늪지에서 잠복으로 밤을 새울 내 전우(戰友)들에게 안녕(安寧)을
  그리고 신(神)에게 무한(無限)한 감사(感謝)를
 
  7월 31일
  오늘 아침 ‘나트랑’항(港)에 도착(到着).
  Qui Nhon항보다 크고 입만(入灣)도 아름다웠다.
  연안(沿岸)의 무성한 나무와 숲, 희고 깨끗한 건물(建物)들.
  한낮에 나즉히[나직이] 폭음을 내며 떠도는 전투기 외에 이 항구가 중부(中部) 월남의 유수한 해안(海岸) Base라는 걸 알아낼 수가 없다.
  이 배에서 실로 극적(劇的)으로 상봉한 구우(舊友) 정건영(鄭建永)군을 보내다.
  소설을 쓰던 나약한 갈비씨가 해병대 얼룩모자를 쓰고 상륙주정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웠다.
  몸조심해라!
 
  8월 5일 24시
  내일 미명(來日未明)에 부산에 도착 예정. 이제 마지막 여로(旅路)의 잠 안 오는 밤이다.
  바다는 잔잔하고 별빛도 맑다.〉

 
 
  기억 속 베트남, 정글, 이데올로기
 
김광휘 소위. 그는 베트남 전쟁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트라우마이자 잊히지 않는 공포”라고 말했다.
  김광휘 작가는 지금도 꾸이년 해안 쪽의 하얀 모래언덕과 멀리 푸깟산(山) 밑까지 단숨에 뻗어나간 주름살 하나 없는 들판이 떠오른다. 벌써 60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또 담티만(灣)의 턱을 때리며 시퍼렇게 살아 굼실대는 남중국해의 물결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바다에다 들, 산 위의 구름, 일견 구색을 갖춘 그럴듯한 풍경이었음에도 막연하게나마 금속성 같은 비정함을 풍기고 있었지요. 베트남 땅 전체를 뒤덮고 있는 그 징그러운 녹색…. 벼, 바나나, 야자수, 열대 관목, 대나무, 그 끝에서 꼬리를 바르르 떨고 있는 뱀부 스네이크(대나무 독사)에 이르기까지, 타는 듯한 햇볕 아래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지독한 암록색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 당시 베트남 전쟁을 통해 겪은 이데올로기란 어떤 것인가요?
 
  “소설에서 ‘하이 중사’의 입을 통해 표현했는데, 베트남은 20년 넘게 싸웠고 전국 어디서나 서로 섞여 있고 심지어 한 가족도 양분되었죠. 다시 말해 한 몸뚱이에 두 가지 세균이 동시에 들어와 오랜 세월 같이 뜯어먹고 같이 서식하여 이제는 어떤 놈이 어떤 놈인지 구분도 못 하게 면역이 되어 있는 상태가 됐어요.”
 
  ― 직접 경험한 정글은 어떤 곳이던가요?
 
  “미로(迷路)처럼 파놓은 동굴과 정글 밑의 요새는 잠자리처럼 떠다니는 헬리콥터나 부엉이 같은 B52가 눈치채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교묘했어요. 거기다 사이공을 싸고도는 길고 긴 사행천(蛇行川)과 끝없는 녹색의 정글은 인간의 힘으론 결코 벗길 수 없는 견고한 철옹성이었습니다.”
 
  ― 당시 전쟁터에서 만난 인물 중 잊히지 않는 얼굴이 있나요?
 
  “포병 소위 때 베트콩 마을을 지나갈 때였어요. 성인 베트콩들을 다 끌어냈는데 한 소년이 죽은 척하고 엎드려 있더군요. 15살 정도 됐을까. 일으켜 세웠더니 베트콩 명단을 갖고 있었어요. 중대장이 그걸 빼앗아 ‘놈들이 어딨냐’고 통역관을 통해 다그쳐도 눈도 깜짝 안 해요. M16으로 위협해도 마찬가지였죠. 그냥 보내기 뭣해 짐꾼으로 썼어요. C레이션을 짊어지게 했는데, 개울 속으로 풍덩 뛰어들더군요.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어요. 개울 안에 자기네들만 아는 통로가 있었나 봐요. C레이션을 다 가지고 가서 우리는 쫄쫄 굶었죠.
 
  다음 전투에서 그 녀석이 베트콩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더군요. 다시 사로잡았어요. 고분고분하게 따라다니더니 또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니겠어요? 베트콩이란 게 그런 것이었어요.”
 

  김 작가는 그런 베트남을 《마이의 산》에서 ‘짐승의 나라’ ‘부패의 나라’로 묘사했다.
 
  〈진리가 없는 날, 힘센 놈이 없는 놈을 사정없이 타고 앉아 누르는 짐승의 나라, 입에서 시작하여 생식기로 끝나는 나라, 사이공 부둣가에 쌓인 산더미 같은 원조물자가 그야말로 ‘아샘블리’[어셈블리·assembly]로 끈도 풀리지 않은 채 암시장을 거쳐 곧장 비씨[VC]들 손으로 넘어가는 조화 속. 고관대작의 아들들은 프랑스나 미국으로 생쥐처럼 빠져 달아나 버리고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만 이 전선에서 저 전선으로, 참호에서 일어나 참호에다 코를 박고 죽는, 도착[倒錯]되고 강요되는 애국심. 싸우다 다친 놈이 헬리콥터를 타고 후송되는데도 돈을 먹여야 되는 막판의 모습. 군인이 죽으면 미망인이 어린것을 들쳐업고 사망 수당을 타러 가서 관리에게 삥땅을 떼어 놓고야 귀 떨어진 돈봉투를 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부패의 나라. 누가 누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단 말인가.〉(248쪽)
 
  ― 베트남전 참전이 선생님 인생에 미친 영향은 무엇입니까?
 
  “평생을 따라다니는 트라우마이자 잊히지 않는 공포 같은 것입니다. 내 일생에서 제일 큰 사건이었고,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 상처일 것입니다.”
 
  ― 종전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까?
 
  “인류 역사는 앞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베트남과 손잡고 또 다른 역사를 만들 것입니다. 현재 우리 기업들이 베트남에 잘 정착하여 중국 대신 생산 기지로 활용하고 있으니까.”
 
 
  “이 노인은 모골이 송연합니다”
 
  ― 한국은 여전히 좌우, 보수 진보로 나뉘어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당시 베트남 사회와 빗대어 오늘의 한국을 진단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마도 6·25 전(前)같이 좌우가 철저히 나뉘어 서로 죽일 듯 싸우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북쪽이 쳐내려올 것 같아 이 노인은 모골이 송연합니다.”
 
  ― 한국과 베트남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양국이 어떤 관계를 지속하면 좋겠습니까?
 
  “개인이나 국가 간이나 싸움은 싸움이고 미래는 미래입니다. 지금 베트남에는 수많은 한국의 중소기업체가 들어가 가장 활발히 일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젊은이들도 우리 한국 기업체에 들어와 아주 성실히 일한다고 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중요한 것은 미래입니다. 베트남은 오히려 중국 대신 한국 중소기업을 키워 줄 좋은 터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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