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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최후진술(中)

“부귀도 영화도 꿈인 양 간 곳 없고…”

글 : 강만수  작가(前 기획재정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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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의 입은 내 모습을 기자들이 촬영하는 순간 극도의 모멸감 맛봐
⊙ 철창 속에 가두는 구속은 사실상 고문이고 가혹한 형벌
⊙ 피부가 발갛게 부풀고 가려워서 의료과에 갔더니 감옥독이라고 하며…
⊙ 사기꾼 목사의 인도로 방에서 주일 예배를 보고 설교도 들었다
⊙ 판사가 방관자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

[편집자 주]
강만수 전(前) 기획재정부장관이 과거 옥중에서 쓴 소설을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수장이었던 그는 산업은행장 재직 당시 대우조선해양 비리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2016년 12월 구속돼 4년여간 옥고(獄苦)를 치렀다. 옥중에서 10편 이상의 소설을 쓴 그는 지난 2022년 11월 한국소설가협회가 주관하는 제73회 한국소설신인상 단편소설 부문에 〈동백꽃처럼〉을 투고해 당선됐다. 강 전 장관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최후진술〉을 3월호에 이어 소개한다.

[작가 소개 | 姜萬洙]
서울대에서 법을, 뉴욕대에서 경제를 공부했고, 공직에서 일하였으며, 2022년 《한국소설》에 단편 〈동백꽃처럼〉으로 등단하여, 2023년 단편 〈쪽새미 애가〉를, 2024년 한국소설가협회 ‘2024 신예작가’로 선정되어 〈세종로 블루스〉를 발표함. snowkang21@naver.com
재판정으로 가는 호송차. 사진=뉴시스
  조사를 받은 지 일주일 후에 검찰은 언론을 통한 여론재판을 발판 삼아 D조선의 경영과 회계 부정에 대한 수사와 연계하여 배임 등 4개 혐의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 생기고 처음으로 수사한 D조선 경영 부정 사건과 관련하여 나와 참고인 30여 명에 대한 3개월여에 걸친 수사의 결과였다.
 
  구속영장 심사를 받으러 가는 날 아침 8시에 수사관이라는 두 사내가 내 아파트로 와서 구인장을 들이밀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그들과 함께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수사관들이 나를 자동차 뒷좌석 가운데 끼워 태웠다. 법원으로 갈 줄 알았는데 차는 검찰청사로 갔다. 의아했으나 왜 이곳으로 왔는지 묻지는 않았다. 10시가 다 되어서야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갔다. 후문으로 들어갔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혐의를 인정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강한 어투로 대답했다.
 
  “검찰이 나 때문에 국민의 세금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너무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플래시가 터지고 질문이 쏟아졌으나 더 말하지는 않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정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시작되었다. 검사가 구속영장 청구이유서를 읽었다. 검찰은 피의자인 내가 D조선 사장의 경영 비리를 발견하고도 검찰에 고발하지 아니한 것과, 나의 지인이 경영하는 벤처기업(해조류에서 휘발유를 뽑는 기술을 상용화한)에 D조선이 50억 원을 투자하도록 강압하여 50억 원 상당의 손실을 입혔다는 사실을 주요 혐의로 내세우며, 혐의 사실을 피의자가 부인하니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어 구속 수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내 변호사는 벤처 투자를 강압한 것이 아니라, D조선이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진출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후 과거 피의자가 일했던 부처에 출입하던 기자였던 벤처기업 사장의 부탁으로 D조선 사장을 소개해 주었을 뿐이다, 그 벤처기업은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까지 올라갔을 때 정부 연구기관이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성공한 신기술을 사업화한 것이다, D조선이 내부 검토를 거쳐 50억 원을 투자하였으나 원유 가격이 배럴당 50달러 이하로 떨어지자 사업이 부진하게 된 것이며, 성공하면 대박이 터지고 실패하면 원금도 떼이는 벤처 투자의 특성 상 이것을 배임으로 보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 피의자는 고위 공직을 지냈고 주거가 확실하여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없어 구속은 부당하다고 변론했다.
 
  검사는 분위기가 불리하다고 판단했는지 판사에게 “수사를 끝내지 못한 피의 사실 중에는 영화 장면 같은 일이 여러 개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며 서류를 높이 들고 흔들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구속영장을 발부해 달라는 과장된 행동이라 짐작했다.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이 법정이 영화의 한 장면은 아닐까? 내가 진짜 현실에서 이곳에 있는 걸까? 믿을 수도 없고 믿기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오전 10시에 시작하여 오후 2시까지 네 시간에 걸친 심사를 마치고 검찰 조사실로 돌아가 감금된 상태에서 심사 결과를 기다렸다. 수사관이 시켜 주는 설렁탕으로 점심과 저녁을 때우고 멍하게 앉아 창밖만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어둠이 짙어 가는 동안 한없이 기다렸다. 자정이 지나고 달력의 날짜가 내일로 넘어갔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를 지키던 수사관이 결과가 늦어지면 영장이 기각되는 경우가 많다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기각하려면 범죄의 소명이 부족하다거나 아니면 도주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사실을 판정해야 하므로 심리에 긴 시간이 걸린다고 말해 주었다. 수사관의 말이 맞았다. 다음 날 새벽 3시에 기각 결정이 났다고 알려 왔다. 검찰의 구인이 풀려 현관으로 내려가니 그때까지 기다리던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소감을 물었다. 나는 작심하고 말했다.
 
  “너무 황당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공복인 검찰이 주인인 국민을 이렇게 마구 다루어도 될까요?”
 
  집에 돌아와 정신을 가다듬으니 어느새 박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돈을 챙긴 것도 없고 특별한 범죄 동기도 없는, 보통 사람의 보통 일이 죄가 된다니.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힘들고 슬픈 하루였다.
 
 
  먹잇감을 물었다가 놓친 사냥개처럼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검찰은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즉시 보강 수사를 해 2차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기자들에게 ‘피의자는 평생 사익만 추구한 전형적인 부정 공무원’이라고까지 발표했다. 구속영장이 기각되면 불구속으로 기소하는 게 일반적인데 검찰은 반드시 나를 구속하고야 말겠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표출한 셈이었다. 구속 기소를 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졌구나. 나의 본능이, 나의 육감이 먼저 눈치를 챘다.
 
  검찰은 먹잇감을 물었다가 놓친 사냥개처럼 더 잔인하게 달려들었다. 영장 심사에서 3명의 검사가 돌아가며 혐의를 장황하게 개진하고도 기각되자 악에 받친 것 같았다. 나의 수첩에 적혀 있는, 지난 정부 5년간의 행적과 관련된 모든 기관과 사람들을 3개월간 조사했다. 30여 곳을 추가로 압수수색했고, 300여 명을 불러 먼지를 털듯이 혹독하게 조사했다. 본건인 D조선과 관계없는 일인데도 내 수첩에 기록된 대기업 회장부터 금융기관장과 친구와 종친과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아내까지 불러 조사했다. ‘6조지기’에서 검사는 수갑 채워 ‘불러 조지기’라더니, 나의 인간관계를 파탄시키는 게 목표인 것처럼 나를 아는 많은 사람을 검찰청으로 불렀다. 검찰청 정문만 들어서도 가슴이 떨린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두려움이 증폭되고, 조사를 받는 동안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나도 그럴진대 나의 친구와 종친과 그들의 아내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게 되었다.
 

  검찰은 D조선 사건과 관계없는 K은행의 W산업에 대한 대출, 모 모 국회의원 후원금 납부, 퇴직 후의 친구 회사 고문 활동, 시골 종친회 활동 등에 대한 별건 수사를 통해 8개 혐의를 더 만들어 두 번째로 나를 소환했다. 추가로 참고인들을 불러 만든 60개의 진술조서와 1만2000쪽이나 되는 증거 기록을 기초로 추가 신문을 진행했다. 1차 소환 때보다 진술조서와 증거 서류가 몇 배나 되니 그만큼 신문 사항도 많았다.
 
  내가 모 국회의원의 청탁을 받고 부하 직원을 강압하여 W산업에 470억 원을 부당 대출하게 했다는 혐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신문했다. K은행은 매년 120여조 원의 대출을 하는데, 그 0.01% 수준인 100억 원대의 개별 대출은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알지 못한다. 나는 대출은 물론이고 그 국회의원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모릅니다” “아닙니다” 외에는 없었다.
 
 
  “모릅니다” “아닙니다”
 
새벽 2시에 도착한 서울구치소는 밤바람이 유달리 차가웠다. 일러스트=조선DB
  어린 시절 은어를 잡으러 자주 강에 갔었다. 물이 깊은 곳에 가서 몽둥이로 물을 치면 은어는 얕은 곳으로 피해 간다. 계속 몰면 도망갈 곳이 없어진 은어는 머리를 모래에 처박는다. 나는 모래에 머리를 처박고 만 은어가 되었다. 분노가 차올랐지만 어린 날 본 은어처럼 나 역시 도망갈 곳이 없었다.
 
  검찰은 수사의 시발점인 D조선의 50억 원 벤처 투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W산업에 대한 470억 원 대출 등에 대한 별건 수사로 찾은 8개의 혐의를 추가하여 총 12개 혐의로 2차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2차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던 날에도 아침 8시에 수사관 두 명이 우리 집에 왔다. 지난번처럼 나를 검찰청사에 먼저 구치했다. 나는 10시에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끌려가서 오후 2시까지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았다. 1차 구속영장 심사 시 담당 판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변호사의 변론과 나의 진술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번 판사는 무관심한 표정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졸기까지 했다.
 
  영장 심사가 끝나고 나는 다시 검찰청으로 돌아와 감금되었다. 다음 날 새벽 1시경에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 수사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결국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비가 올 때까지 지낸다는 인디언 기우제처럼 검찰은 나를 구속될 때까지 수사를 계속했고, 법원도 결국은 검찰을 따라갔다. 거대한 국가권력이 작은 국민 하나를 구속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휘둘렀다. 구속 수사하라고 지시받은 사건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현실이 되었다.
 
  구속영장이 발부된 새벽 2시 검찰 호송차에 실려 서울구치소로 갔다. 차에서 내리니 밤바람이 유달리 차가웠고 모든 것이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철문 앞에서 교도관을 기다리는 동안 수사관이 담배 한 개비를 주며 마지막으로 피우라고 했다. 오래간만에 담배 연기 한 모금을 들이켰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수사관이 나를 교도관에게 인계하고 전등불 아래로 사라졌다.
 
  교도관의 안내로 구치소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들리는 철그럭 소리가 검은 새벽을 깨웠다. 불빛 희미한 마당을 가로질러 어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어떤 복도를 걸어서 어떤 방에 들어갔다. 교도관은 입고 있던 옷과 시계와 휴대전화 모두 상자에 담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녹갈색 죄수복과 러닝셔츠, 팬티, 양말, 고무신을 주었다. 키와 몸무게를 재고 혈압도 측정했다. 죄수복 차림으로 수용 번호 47이 적힌 번호판을 들고 머그샷(mug-shot)을 찍었다. 샤워장으로 데리고 가더니 샤워를 하라고 했다. 물기를 닦고 나오니 모포와 베개를 주었다. 교도관이 안쪽의 철문을 열고 긴 복도를 따라 나를 데리고 갔다. 복도는 길었고 초겨울 새벽바람은 차가웠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어떤 방에 들어갔다. 나는 12월 1일 새벽 3시경에 서울구치소 독거방 10동 1방에 수용되었다.
 
  한 평 반 정도의 독거방은 양팔을 벌릴 수 있는 정도의 폭에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정도의 길이에 작은 화장실이 딸렸고, 철판으로 만든 출입문은 교도관이 밖에서만 열게 되어 있었다. 방바닥은 얼음장보다 더 차가웠다. 무엇이 무엇인지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고 모든 것이 캄캄하기만 했다. 담요 한 장은 깔고 수의를 입은 채로 남은 한 장의 담요를 덮고 누웠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잠을 이룰 수도 없었고,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참으로 길고 참으로 슬픈 하루였다.
 
  검찰이 집요하게 수사한 배후에 10년 전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야당의 유력한 두 대권 주자가 상대방의 사생활에 대해 도를 넘는 폭로를 주고받았다. 그중에서 가짜 목사 관련 폭로가 문제였다. 어떤 목사가 다른 목사를 가짜라고 폭로하면서 그 가짜 목사가 여성인 상대 후보와 특별한 관계라고 주장했다. 그 여성 상대 후보는 천벌을 받을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폭로를 한 목사를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수사를 받게 된 목사는 폭로 내용을 내가 일하는 쪽의 후보 캠프로부터 받았다고 진술했다. 폭로 내용을 제공한 우리 캠프 사람이 긴급체포되면서 그의 포켓에서 100만 원짜리 자기앞수표가 나왔는데, 그것을 내게서 받았다고 진술한 게 문제였다. 그때 내가 맡은 일은 폭로 사건과 관계없는 선거 공약 개발이었고, 수표 추적 결과 다른 사람의 예금 계좌에서 발행된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 예금 계좌를 가진 사람에게 내가 다른 용도의 자금을 제공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함께 수사를 받았다. 결국 가짜 목사 사건을 일으킨 목사와 정보를 제공한 우리 캠프 사람이 구속되어 징역을 살게 되었다.
 
  내가 캠프에 참여했던 후보가 경선에서 이김으로써 대통령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선거가 끝난 후 승자의 포용 대신 폭로에 대한 보복을 주고받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는데 후보 공천을 하면서 예전에 반대편에 섰던 국회의원을 줄줄이 탈락시켰다. 그런데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그때 반대편 여성 후보가 당선되었고 반격이 시작되었다. 가짜 목사 폭로와 관련된 사람들은 반격을 피할 수 없었다. 폭로를 주도했다고 의심받은 두 사람은 뇌물수수와 직권남용으로 구속되었고, 출옥 후 한 사람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도 K금융그룹 회장 임기를 1년 넘게 남겨 놓고 물러났다. 내가 주지 않은 100만 원짜리 자기앞수표가 포켓에서 나왔던 사람도 공기업에서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내가 추천해 주었다고 기자에게 말했고 그 사실이 보도된 것이 설상가상이었다. 어느새 나는 사실과 달리 가짜 목사 고발 사건의 배후 인물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내가 K금융그룹 회장에서 물러난 후, 지난 정부에서 추진했던 4대강 정비사업에 참여한 건설회사의 비자금 및 정치자금에 관해 검찰의 자금 추적 조사를 통해 나도 내사를 받았다. 그러나 특별한 문제 없이 넘어갔다. 그러다가 감사원이 K금융그룹을 감사했고, K은행이 채권은행으로서 관리하던 D조선을 분식회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그 수사 과정에 내가 말려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구속되던 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오후에 검찰에 불려 갔다. 녹갈색 죄수복을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줄을 맞추어 교도관을 따라 긴 복도를 걸어가서, 신발 깔창을 빼고 발 수색을 받은 다음 검색실에 들어갔다. 몸을 수색하고,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팔을 묶고, 네 명씩 연승을 한 다음 마당에 대기한 호송버스에 태웠다. 나는 고령자라 수갑만 차고 호송버스 맨 뒤쪽에 앉았다.
 
 
  첫날부터 靈肉이 탈진
 
수갑을 차고 수의를 입은 내 모습을 수많은 기자들이 촬영하는 순간 극도의 모멸감을 맛보았다. 일러스트=조선DB
  서초동 검찰청 구치감 앞에 내릴 때 수갑을 차고 수의를 입은 내 모습을 기자들이 촬영하는 순간 극도의 모멸감을 맛보았다. 나의 이름은 교도소에서는 ‘47번’, 검찰에서는 ‘피의자’였고 짐승처럼 묶여서 끌려다녔다.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CCTV로 녹화를 당하면서 자정이 가깝도록 조사를 받다 보니 첫날부터 영육(靈肉)이 탈진했다.
 
  다음 날도 오전부터 외부와 전화 한 통 못 하고 자료 한 장 없이 조사를 받았다. 법률이 보장하는 인권과 방어권은 사실상 박탈된 상태였다. 검찰이 6개월여에 걸쳐 받은 수많은 참고인의 진술로 치밀하게 짜서 만든 구속영장 속 피의사실을 보강하고 빈자리를 메꾸기 위한 조사였다. 그들 앞에는 헌법도 인권도 의미가 없었다.
 
  구속된 지 3일째 되던 날은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에는 검찰이 부르지 않아 오전에 아내와 큰애가 면회를 왔다. 증거 인멸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접견은 아내와 자식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10분간 그저 눈물만 흘리다가 돌아갔다.
 
  감옥에서 맞은 첫 일요일은 꿈인지 생시인지 혼돈이 왔다. 꿈은 아닐까? 내가 꿈속에 들어온 건 아닐까? 눈을 감기만 하면 감방도 수의도 수갑도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제발 꿈이었으면. 나는 진심으로 꿈이기를 바랐다.
 
  내 방은 복도 쪽 첫 방이라 햇빛도 들지 않고 방바닥은 냉골이었다. 모포를 깔고 앉아도 12월의 찬 기운이 바로 올라왔다.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아 외풍이 심했다. 담요 하나로 온몸을 감쌌다. 아무도 못 만나고 아무 데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못 하는, 숨 막히는 고독과 슬픔과 분노와 수치의 공간이자 시간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해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24시간 불을 켜놓고 CCTV가 감시하고 있었다. 사방이 철창과 시멘트 벽으로 막힌, 한 평 반이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나는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의 폐쇄공포를 느꼈다.
 
  매일 수갑을 차고 검찰청에 가서 자정이 되도록 수사를 받았다. 증거 인멸을 핑계로 필요한 사람을 만나거나 전화하거나 필요한 물증들을 찾거나 할 수 없도록 구속해 놓고 수사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헌법은 그들의 발아래 있었다.
 
 
  아무 데도 못 가고 아무것도 못 하는
 
  문명국 혹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에서는 살인죄같이 물리적으로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확실하게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해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한다. 구속하더라도 보석금을 내면 자유로운 상태에서 수사도 받고 재판에 임하도록 한다. 미국에서는 기소하기 전에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려 보도되게 하면, 배심원들에게 선입견을 준다는 이유로 ‘오염된 사건(tainted case)’으로 분류되어 기소 불가능 사건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사실상 사전 피의사실 누출과 구속 수사와 구속 재판이 원칙이 되어 버려 문명 이전의 세상과 마찬가지였다. 피의자가 검찰에 출두할 때 포토라인에 세움으로써 언론이 먼저 인격살인부터 하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언론과 검찰이 카르텔을 이뤘다는 확실한 증거 아닌가. 미국의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는 살인 혐의의 심증이 확실했지만,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 변호사와 함께 효과적으로 변론함으로써 증거 부족으로 무죄가 되었다.
 
  철창 속 좁은 방에 가두어 외부와 차단하는 구속은 수사 절차의 하나가 아니라 사실상 고문이고 가혹한 형벌이다. 매일 문밖으로 출역(出役)을 나가고 신앙생활에 참여하고 그림과 서예 등 취미 활동이 허용되는 징역보다 구속이 10배나 힘들다고 한다. 나는 구속된 후 거의 식사를 못 했고, 매일 밤잠을 못 이루고 악몽을 꾸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꿈을 꾸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닥치는 대로 아무에게나 기관총을 난사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구속은 나를 극도의 절망에 이르게 했고, 절망이 계속되다가 체념에 이르게 했다. 그즈음 수사를 받다가 생을 마감한 국군보안사령관과 현직 검사장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와 그들의 죽음 사이가 한 걸음도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10일간의 구속 수사가 끝나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3명의 검사와 5명의 수사관이 6개월에 걸쳐 수많은 참고인을 부르고 증거물을 수색하고 압수하여 만들어 낸 90개에 이르는 참고인 진술서와 1만7000쪽에 달하는 증거 서류는 그 자체가 공포였다. 검찰이 방대한 진술서와 증거 서류를 만들 때 나에게는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좁은 감방에서 방대한 진술서와 증거 서류를 파악하고 변론 자료를 만들어 변호사에게 제공하는 동안 영혼은 고갈되어 갔고 육신도 허물어져 갔다. 유리한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길은 모두 봉쇄되었다. 무죄 추정의 원칙과 방어권을 보장하는 법률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법치국가에서 어떻게 검사가 법 위에 있을 수 있을까? 판사는 왜 그런 불법을 보고 말이 없을까?
 
  폐쇄공포와 불면증으로 고혈압과 당뇨가 악화하였고 평생 경험하지 못한 심한 변비까지 생겨 하루를 견디기도 고통스러웠다. 몸무게가 10kg이나 빠져 면회 오는 사람들이 몰라볼 정도까지 되었다. 여기저기 피부가 발갛게 부풀고 가려워서 의료과에 갔더니 감옥독이라고 하며 특별한 약이 없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이 방과 모포와 기구에 남기고 간 세균들에 적응할 때까지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육신은 우리에 갇힌 짐승으로 사는 일에 길들어 갔다.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고혈압과 당뇨병이 악화되고 우울증도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사람이 그립고 말이 고파 내가 원해서 독거방이 아닌 혼거방에 갔다. 병동의 혼거방은 4인실인데 내가 간 방에는 나를 합쳐 3명이 있었다. 녹갈색 죄수복 대신 옅은 하늘색 바탕에 짙은 푸른색 세로줄이 있는 환자복으로 바꿔 입었다. 내 모습이 영화 속 빠삐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파리에서 대서양 건너 기아나의 정글 속 교도소에 갇힌 절망과 분노의 그 빠삐용.
 
  같은 방에 수용된 한 사람은 목사라고 했고 또 한 사람은 부동산중개인이라고 했다. 목사라는 사람은 혈액원에서 혈액을 병원으로 수송하는 사업을 하다가 두 번째 사기죄로 고발되어 들어왔다고 했고, 부동산중개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스스로 얘기하지 않으면 묻지 않는다는 감옥의 불문율에 따라 나 역시 캐묻지 않았다. 그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용케도 감옥에서 신문을 볼 자유는 허용되고 있었다. 목사라는 사람은 과민성 우울증으로 몇 번 졸도하여 병동으로 오게 되었다면서 휠체어를 타고 다녔는데 방에서는 멀쩡하였다. 부동산중개인은 매주 수요일 외부 병원에 나가 혈액 투석을 받았는데 얼굴이 검어서 진짜 신장병 환자 같았다. 셋이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방 청소와 설거지도 당번을 정해 하루씩 하게 되니 사람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잠버릇이 나빠서 이를 갈고 코를 곤다며 양해를 구했더니 이구동성으로 자신들도 코를 고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감옥 와서 처음으로 전등이 꺼진 캄캄한 상태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밤 9시에. 일요일에는 사기죄 목사의 인도로 방에서 주일 예배를 보고 설교도 들었다. 두 번째 감옥에 들어왔다는 그는 감옥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옛날 남로당 당수 박헌영이 자기 똥을 먹는 방법으로 혈액검사에서 이상 반응이 나오도록 만들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고 얘기하며 병동의 환자 다수는 가짜 환자라고 했다. 내게 눈을 찡긋하며 자기도 가짜라는 것을 암시했다. 어느새 감옥 생활에 적응했는지 그러려니 하고 무심하게 지냈다.
 
  사람 냄새를 맡으며 한 달 정도를 살았는데 재판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증인 신문을 위한 변론 자료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진술서와 증거 자료를 좁은 방에 펴놓고 보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밤 9시가 되면 취침해야 하므로 혼자 밤늦게까지 변론 문서 작성하는 일도 불가능하였다. 몸 상태가 한 달 만에 상당히 좋아지기도 했고 변론서 작성을 위해 의료과의 진단을 거쳐 다시 일반 독거방으로 옮겨 갔다.
 
  증인 신문이 시작되자 법원에 출정하는 날을 빼고는 매일 변론 문서 작성에 매진했다. 밤 9시 취침 시간부터 다음 날 아침 6시 기상 시간까지는 밝은 전등은 꺼지고 겨우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어둑한 조명등만 켜져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새벽까지 때로는 밤을 새워 변론 자료를 준비했다. 나에게 적용된 배임, 직권남용, 정치자금법 위반, 제3자 뇌물 같은 혐의들은 살인이나 뇌물처럼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서 범죄의 구성요건을 알기 어렵고 복잡하기까지 해 변론 문서를 만드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문명국에는 없는 배임죄를 핵심으로 검찰이 제출한 12개 혐의의 긴 공소장과 90개에 달하는 참고인 진술서와 1만7000쪽의 방대한 증거 서류는 한 번 읽어 보는 것도 벅찼다.
 
  혐의가 12개나 되지만 돈 한 푼 받은 적 없었다. 일상의 일이 죄가 되었으니, 죄가 성립된다는 논리를 만든 검사들도 힘들었겠지만 그것이 죄가 안 된다는 논리를 세우기도 무지하게 어려웠다. 확실하게 돈을 받았거나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면 단순히 사실을 시인하면 끝나는데, 검찰이 만든 방대한 진술서와 증거 서류를 거꾸로 뒤집는 진술과 증거를 제시해야 하니 예삿일이 아니었다. 살인이나 뇌물같이 사건이 명백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어서 변호사도 내가 만들어 준 변론 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내가 주도적으로 재판을 준비하고 이어 가야만 했다.
 
 
  “지시했다” “지시로 받아들였다”
 
  한 주에 2번씩 3개월에 걸쳐 이루어진 재판은 42명의 증인 심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하는 사람을 보거나 기억에 없는 증언을 들을 때는 맥이 빠졌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손발을 떨면서 검찰에서 작성한 진술서 내용 그대로 증인석에서 진술했다. 내가 알아보라거나 챙겨 보라고 한 것을 하라고 지시했다거나 지시로 받아들였다고 증언했고, 그렇게 받아들인 이유는 내가 평소에 일을 강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에 지시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또 인사권도 갖고 있어서 그렇게 느꼈다고 말했다.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증언들이 나를 허탈에 빠지게 했다. 참을 수 없어서 내가 직접 심문하려 했더니 검사는 증인과 내가 상하관계에 있었던 것을 문제 삼아 이의를 제기하였고, 판사가 이의를 받아들여 변호사를 통해서만 심문하도록 제한했다. 판사는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도 피고인인 나에게 불리하게 판단하여 나의 반론 의지를 꺾었고 수시로 나의 방어권을 무시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K금융그룹에서 비서로 일했던 증인 둘은 그들의 느낌과 추측으로 10가지가 넘는 과장되거나 거짓된 증언을 했다. 그들은 내가 벤처기업 대표를 D조선 사장에게 소개하도록 한 것을 그 사장에게 벤처기업 투자를 압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W산업에 대한 대출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한 것을 해주라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증언했다. 내 부덕 때문이라 생각하니 지나온 나의 삶이 부끄러워졌다. 그들이 거짓 증언을 한 것은 그들이 가진 어떤 약점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어쩔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증언 전날 검사는 그들을 다시 불러 증언 내용을 재확인하기까지 하였다고 했다. 명백한 불공정 재판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응 수단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그것밖에 없었다. 법정에서 분한 마음을 표출하는 방법은 그들을 쏘아보며 네가 인간인가 의심하는 분노의 눈화살을 발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고는 체념하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감옥에서 죄수들은 검사는 소설가라고 하고 판사는 평론가라고 하며 비아냥거린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인디언과 같이, 검사는 하명받으면 피의자가 구속될 때까지 먼지떨이 수사를 해 소설을 쓰고, 판사는 그 소설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고 식민 통치와 권위주의 통치의 슬픈 유산에 순치되어 평론가 노릇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무죄 추정의 원칙과 불구속 수사 원칙을 지켜 피의자의 인권과 방어권을 보장해 주면서 재판을 주도적으로 끌고가야 할 판사가 방관자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격으로 판사가 더 밉다고들 했다. 감옥에 오기 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나 역시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는 높은 담장 안에 갇힌 사람들의 인권에 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와 변호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심에서 검찰은 7년 징역을 구형했다. 법원은 본건인 D조선에 관련된 배임 등 8건은 무죄로 하였지만, 별건으로 2차 구속영장에서 추가된 W산업에 대한 은행 대출과 관련된 배임 등 4건은 유죄로 판결하여 4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마분지 밥상에서 글을 쓰다 보니
 
  추석 전날은 최후진술서를 이렇게 고치고 저렇게 고치며 하루를 보냈다.
 
  종일 방바닥에 앉아 마분지 밥상에서 글을 쓰다 보니 어깨도 허리도 팔도 모두 아팠다.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지 못해 볼펜으로 써야 해서 아주 힘들었다. 더구나 먹지를 중간에 넣어 변호사에게 줄 서류도 함께 만들어야 하니 손목 인대가 엄청 아팠다. 먹지란 과거 복사본을 만들기 위해 쓰던 먹이 발라진 새까만 종이다. 용지 사이에 끼우고 꾹꾹 눌러쓰면 아래 있는 종이에 글씨가 복사된다. 요즘은 보기도 힘든데 구치소에서는 아직 팔고 있었다.
 
  글 쓰는 것을 멈추고 문에서 화장실까지 다섯 걸음 정도를 왔다 갔다 하며 걸었다. 다섯을 세고 뒤돌아 또 다섯을 세고 백 보를 셌다. 태극권 하듯 팔다리를 흔들고 윗몸을 흐느적거리며 걸었더니 몸이 개운하게 풀렸다. 다시 마분지 책상 앞에 앉아 진술서를 썼으나 해 질 녘이 될 때까지 마치지 못했다.
 
 
  추석날 길게 뻗은 구치소 지붕에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가을바람이 소슬히 불었고 슬프도록 맑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높은 담벼락 너머 수리산이 담 밑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비둘기 두 마리가 창밖 풀밭에 내려앉았다.
 
  어릴 때 산골에서 보낸 추석날이 생각났다. 내가 살았던 고향 집은 남향이었는데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다. 논밭 너머 봉우리 세 개가 연이어진 안산이 있었다. 집 뒤에 수령 백 년이 넘는 감나무가 두 그루 서있고 감나무 뒤에 대밭이 있었다. 목화도 많이 키웠는데 열매가 익어서 벌어지면 하얀 솜털이 탐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니는 물레를 자아 실을 뽑아서 밤이 이슥하도록 베틀에서 무명을 짜셨다. 그 무명에 검은 물을 들이고 재봉틀을 돌려 지으신 새 옷이 나의 추석빔이었다.
 
  한동네에 사는 10촌 이내 일가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밤, 대추, 배와 같은 햇과일과 함께 햅쌀밥을 먹고 송편을 먹었다. 읍내 장에서 사온 새 고무신을 신고는 아버지를 따라 삼촌들과 형님들과 함께 성묘하러 산에 올랐다. 앞산에 올라 증조부모 산소부터 시작해 뒷산 너머 선산에 있는 고조부모와 그 윗대 조상의 산소까지 돌고 나면 어느새 해는 서산 위에까지 가있었다. 산길에서 밤을 따 신발로 까서 먹는 재미가 좋았다.
 
  한가위 보름달이 높이 뜨면 동네 친구들이 모여 밤늦도록 숨바꼭질하며 놀았다.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일 년 중 가장 기쁘고 즐거운 시기였다. 지금은 항상 한가위처럼 풍요롭게 살고 있으니 천지개벽이 따로 없다 할 것이다.
 
  눈을 감고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수억 년, 수만 대의 조상들을 생각해 보았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 또 그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끝없이….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고 아담과 이브가 창조된 후 나는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비롯되었을까? 수억 년, 수만 대를 어떻게 이어서 감옥에 있는 나까지 오게 되었을까? 갑자기 서글퍼졌다. 내가 왜 감옥에까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점심때 사소들이 비빔밥을 만들어 입구 쪽에 있는 수용자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배식하고 남은 김치와 나물과 소시지를 모아 두었다가 잘게 썰어 밥과 함께 고추장에 비빈 후 플라스틱 반찬통에 담고 뚜껑을 잘 닫아서 뜨거운 물에 30분 정도 덥혀서 만든 것이었다. 추석 특식으로 송편도 두 개 나왔다. 나는 미리 사둔 초코파이를 내 오른쪽 독거방과 왼쪽 혼거방 그리고 두 명의 사소에게 나누어 주었다. 감옥에서도 한가위를 즐겁게 보내고 싶은 가난한 마음들이었다.
 
  추석날 오후는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해가 수리산을 넘어가자 한가위 둥근달이 구치소 지붕 위에 높이 떴다. 추석 달밤의 정취를 즐기기 위해 전깃불을 끄고 싶었지만 방 안에는 스위치가 없었다. 두 손으로 쇠창살을 잡고 아련한 옛일과 가족들을 생각하며 뚫어지게 달을 바라보았으나 어릴 적 산골에서 보았던 계수나무도 토끼도 보이지 않았다.
 
  한가위 보름달 아래 창살 속에 내동댕이쳐진 채 내 삶은 ‘장녹수’를 불렀다.
 
  〈가는 세월 바람 타고 흘러가는 저 구름아
  수많은 사연 담아 가는 곳이 어드메냐…〉

 
  첫 절이 끝나기도 전에 보름달이 눈물에 가렸다.
 
  〈부귀도 영화도 꿈인 양 간 곳 없고
  어이타 녹수는 청산에 홀로 우는가.〉

 
  마지막 절은 통곡이 되었다. 마지막 절을 부르고 또 부르다가 목이 메어 소리도 죽었다. 그래도 송편과 비빔밥이 고마운 추석이었다.
 
 
  추석 다음 날도 하늘은 높았다. 시간은 밀려오는데 할 일이 없었다.
 
  6시에 일어나 밤 9시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7시, 12시, 오후 5시 세 번 밥 먹는 것 빼고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을수록 영혼은 더 분주해지고 생각은 더 많아졌다. 오늘은 국민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봄이면 들에 나가 꼴을 베어 오고, 여름이면 뙤약볕 아래서 콩밭을 매고, 여름방학이 되면 아침과 오후에 소를 먹이고, 가을이면 나락을 베고 고구마를 캐고, 겨울이면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던 일들. 가을 운동회 날 달리기에서 1등을 해 ‘상’자가 찍힌 공책을 타서 의기양양하게 엄마에게 자랑했던 일.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고모와 삼촌과 형제들. 그때는 3대가 함께 살았다. 머슴과 식모까지 합치면 열다섯 명이 넘었다. 5남 1녀가 함께 살며 싸우는 것도 중요한 일과였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는 것도 하나의 일상이었다.
 
 
  양변기를 아래위로 비누질하여 반질반질하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일이 많아 바쁘다는 것이 얼마나 복 받은 것인지 감옥에 와서 절실히 깨달았다. 밀려오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있는 일은 일부러 천천히 불편하게 했고 없는 일은 만들어서 했다. 오후에는 그저께 새로 입은 내의를 빨았다. 의자로 사용하는 양변기를 아래위로 비누질하여 반질반질하게 닦았다. 화장실 바닥을 물로 씻고 걸레로 닦아 방바닥같이 만들었다. 초코파이 상자 뚜껑을 잘라 내고 종이를 겹으로 발라 작은 반짇고리를 만든 다음 양말을 담았다. 우유 팩을 씻어서 약을 담는 용기를 만들었고, 두유 팩으로는 제비집(선반 대용으로 벽에 붙이는 종이 용기가 제비집 같다고 그렇게 불렀다)을 만들었다. 지난달에 만들어 붙인 제비집을 뜯어내고 새 제비집을 달았다. 새 제비집에 치약과 로션을 담았다.
 
  해가 수리산을 넘어갈 즈음 저녁 식사를 앞두고 복도 안쪽에서 손나팔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통방(다른 방 수용자와 대화하는 것을 말하는데 교도관의 눈을 피하여 가끔 이루어진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섭이 형… 재섭이 형!”
 
  작은 소곤거림이었다.
 
  “재섭이 형… 들려요?”
 
  이번에는 조금 큰 소곤거림이 들렸다.
 
  “누구냐? 준석이냐?”
 
  “예, 준석이에요. 형, 멸치볶음 하나 빌려줄 수 있어요?”
 
  “알았어. 한 봉지 보내 줄게.”
 
  그때 호통 소리가 들렸다.
 
  “통방하지 마세요!”
 
  교도관의 목소리였다. 다시 조용해지고 한참이 흘렀다.
 
  “형! 사소 통해 보내 줘요.”
 
  “응, 알았어.”
 
  더 작은 소곤거림이었으나 교도관이 또 들은 모양이었다.
 
  “통방하지 말라니깐! 조용히 해요!”
 
  다시 조용해졌다. 더 이상 소곤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구치소에서는 통방도 안 되지만 물건을 나누어 쓰거나 돈을 빌려주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통방 소리가 또 들릴까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사람이 그립고 말이 고픈 수용자들이라 복도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에도 귀를 쫑긋 세우고 우르르 창살문으로 몰려나온다. 모이를 주면 우르르 모이는 닭장 안의 닭들처럼.
 
  이번에는 더 작은 소곤거림이 들렸다.
 
  “사소! … 사소!”
 
  아까 그 사람들이 하는 소곤거림이었다. 복도 안쪽으로 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교도관에게 들키지 말았으면! 다시 이쪽으로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해졌다. 주임이 혹시 졸고 있었을까? 멸치볶음 빌리기가 세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성공한 것 같았다.
 
  “갓 블레스 유!”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해가 졌다.
 
 
  모포털이를 하던 S그룹, L그룹, B그룹 회장
 
  일곱째 날 금요일. 대체공휴일에도 창살 너머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독거방 수용자들은 교도관 인솔 하에 모포 두 장을 들고 철문을 지나 피자판 모양의 운동 마당으로 나갔다. 격주로 10분 정도 주는 모포털이는 사람과 만나서 말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고, 상큼한 청량제였다.
 
  나는 검사장이었던 옆방 사람과 함께 독거 운동장에 들어갔다. 열 명 넘게 모포털이 하러 나왔는데, S그룹, L그룹, B그룹 회장과 함께 전 산업부 C장관과 복지부 K장관도 있었다. 장관들과 재벌 회장들이 두 명씩 짝을 이루어 모포를 마주 잡고 퍽 퍽 소리가 나도록 터는 모습이 볼만했다. 담장에 부딪친 퍽 퍽 소리가 크게 메아리쳤다.
 
  평소 독거 수용자 운동장을 사용하는 최고수(사형 집행 대기자들을 그렇게 불렀는데 최근 20여 년 사형 집행이 없어 숫자가 많았다)들도 입구 쪽 옆에 따로 모여 모포를 털었다. 북쪽 높은 담장 구석에 작은 창문 두 개가 높이 달린 건물이 있는데 교수형장이라고 했다. 죄수의 형이 확정되면 교도소로 이감해 징역형을 집행하는데, 사형의 경우 집행 방식이 교수(목을 졸라 죽임)이기 때문에 구치소 내에 교수형장이 있다는 것이다. 빨간 표찰을 단 최고수가 지나갈 때는 서로 얼굴을 피하지만 어쩌다 눈인사를 나눌 때도 있었다. 반지하방에 어렵게 사는 모녀를 잔인하게 목 졸라 죽인 사건이 지난해 있었는데 그 살인범은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기도 했다. 희미한 그들의 표정은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체념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교수형장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거리를 생각했다. 나는 언제 죽게 될까? 죽기 전에 이 억울함을 풀 수 있을까? 전직 장관들, 재벌 회장들과 사형수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이 모포를 터는 행위가 어쩐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장면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오래오래 곰곰이 생각했다.
 
  10년 전 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잉태된 불화는 정치적 보복으로 끝나지 않았다. 5년 후 반대파가 정권을 잡자 지난 정부가 추진한 사업은 모조리 취소했다. 홍수 예방과 수자원 관리를 위해 건설한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의 보(洑)를 녹조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보 문을 열어 주위 농업용수를 고갈시키기도 하고, 신혼부부를 위한 보금자리주택 건설사업도 취소해 아파트 값을 상승시키기도 했다. 정권을 잡았으나 불화가 심했고, 분열된 의원 중 일부가 야당과 합세했다. 지인 여자가 국정에 관여했다며 국정농단으로 몰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탄핵했고, 이어진 선거에서 정권은 좌파에게 넘어갔다. 전직 두 대통령은 함께 일하던 장관 및 재벌 회장들과 함께 적폐로 몰려 법정에 서게 되었다.
 
 
  내 옆자리에는 우리나라 최고 재벌 회장이
 
어느 날 법정으로 가는 호송버스에 올랐더니 맨 앞자리엔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고 간 그 여자가 앉아 있었고 내 앞자리에는 우리나라 최고 재벌 회장이 앉았다. 일러스트=조선DB 참조
  어느 날 법정으로 가는 호송버스에 올랐더니 맨 앞자리에 여자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고 간 바로 그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내 앞자리에는 우리나라 최고 재벌 회장이 앉았다. 전 여자 대통령은 빨간불을 깜박이는 승합차를 타고 우리가 탄 호송버스에 앞장서서 가고 있었다. 적폐 청산 과정에서 전직 대통령, 전직 장관, 재벌 회장 등 100명이 넘는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들이 총 100년이 넘는 징역형을 받았다.
 
  100명이 넘는 전직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들이 서울구치소에 함께 갇힌 전대미문의 사태를 두고 수감자들은 서울구치소 수용자로 ‘의왕민국’(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에 있다)을 건국하면 유럽에서도 중위권 국가는 될 수 있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대통령에 각료에 대기업 회장까지 있으니 그럴 법한 이야기였다. 한 명의 대통령은 내가 있는 사동의 대각선 방향에 있는 여자 감옥에 있었다. 장관들은 서쪽 사동에, 재벌 회장들은 동쪽 사동에 갇혔다. 나를 감옥에 오게 만든 배후로 추정되는 청와대 사람들도 정권이 바뀌자 내 방의 아래층과 위층에 있으니 참으로 장난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한 명의 대통령은 서울 동쪽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술에 취하면 보이는 것이 없어지는데, 권력과 돈에 취해도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돈을 가진 사람은 돈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다가 낭패를 당하는 경우는 역사에도 허다하다. 정적에게 관용을 베풀고 반대자를 포용한 로마제국의 이야기는 그저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인가. 서로 공격하고 보복하던 같은 진영의 두 대통령이 함께 감옥살이 하며 보수 우파를 궤멸로 몰고 간 이런 행진은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는 속담처럼 두 대통령 옆에 있다가 정을 맞아 졸지에 감옥살이하는 사람들의 억울한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참으로 웃고픈 비극의 행진이 아닐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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