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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장충식 범은장학재단 이사장

“스포츠에 매진해서 삶을 좀 더 품위 있게 살 수 있었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hy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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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단일팀 구성, 동계 스포츠 육성 등 스포츠 비화 담은 《도전과 영광의 길, 단국스포츠 70년사》 펴내
⊙ “쇼트트랙은 우리나라에 없던 종목… IOC 위원들 설득해 올림픽 종목으로 만들어”
⊙ 일본으로 넘어갈 뻔한 88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는 데 일조
⊙ “데모하다 감옥 간 학생, 단 한 명도 퇴학시키지 않아”
⊙ “모든 스포츠에는 희망이 배어 있다”

張忠植
1932년생. 단국대 정치학과 졸업, 美 브리검영대 대학원 졸업, 미 오하이오대 명예법학박사, 프랑스 몽펠리에대 명예박사, 러시아 레닌그라드공대 명예박사 / 단국대 총장, 대학배드민턴연맹 회장, 대학스키연맹 회장, 대학축구연맹 회장, 대학태권도연맹 회장, 대학교육협의회장, 남북체육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충남포럼이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뉴코리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 단장, 단국대 이사장 역임. 現 범은장학재단 이사장 / 국민훈장 모란장, IOC훈장, 체육훈장 청룡장, 올림픽훈장 등 수훈
사진=전체 본인 제공
  ― 나는 이런 사람이었노라고 한마디로 정리하자면요.
 
  “바보죠.”
 
  ― 왜요?
 
  “선친에게 받은 유산을 모두 단국대학교에 기부했지요. 정치권에서 입각하라,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모두 거절했지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과 권력을 모두 마다했으니 바보 아니겠습니까(웃음).”
 
  아흔넷의 어른은 호방하게 웃었다. 눈이 펑펑 오며 체감온도가 영하 15도까지 떨어졌던 지난 2월 7일에 이 어른은 넥타이에, 정장 조끼, 재킷까지 입은 정갈한 차림으로 기자 일행을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장충식(張忠植) 범은재단 이사장은 한평생 후학을 길러낸 교육자이자, 대학 체육을 육성한 체육계의 산증인이다. 그는 1967년 단국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면서 서른여섯의 나이에 총장에 취임해 대학배드민턴협회 회장을 시작으로 대학스키연맹, 대학축구연맹, 대학태권도연맹 회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대학 스포츠 발전을 이끌었다.
 
1989년 3월 9일 판문점에서 열린 1차 남북체육회담에서 남측 장충식 대표(오른쪽)와 북측 김형진 대표(왼쪽)가 악수를 나누는 모습.
  대한민국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을 맡아 우리나라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이바지했고, 1991년에 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단장으로서 남북 단일팀을 이끌었다. 광복 이후 최초로 조직된 청소년 남북 축구 단일팀은 우승 후보인 아르헨티나를 꺾고 8강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다. 남북 관중이 하나가 되어 단일팀 단가인 ‘아리랑’을 합창하는 모습은 여전히 많은 이의 기억에 있다.
 
  장 이사장은 최근 《도전과 영광의 길, 단국스포츠 70년사》를 펴냈다. 이 책은 단순히 단국대만의 얘기를 담는 것을 넘어 1989~1990년에 있었던 남북체육회담의 비사(秘史)까지 담고 있다.
 
 
  “경성사범대에서 럭비 하고, 60년대부터 스키 타”
 
단국대는 럭비부를 1959년 창단했다.
  “제가요, 어려서부터 육상을 하고 투포환을 했어요. 경성사범대(서울대의 전신)에 입학했는데 선배들이 제가 원체 체격이 크니까 ‘무슨 운동을 했느냐’고 묻더니 럭비부에 들어오래요. 럭비부가 있는 곳이 경희대, 동국대, 그리고 경성사범대뿐이었거든요. 경성사범대 럭비부는 B 학점 이상을 받은 학생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저는 럭비가 원초적이라서 좋았어요. 협동과 용기를 길러주는 스포츠이기도 하고요. 나중에 제가 단국대에 와서 럭비부를 만들었어요. 스키는 어려서부터 탔는데 나이 들어서도 꽤 오래 탔지요. 제가 스키를 배우던 60년대는 스키장이나 별다른 시설이 없어서 스키를 짊어지고 산을 올라가야 했어요. 그 당시 스키는 레저 스포츠가 아닌, 강원도 산자락에 살던 마을 사람들이 살기 위해 이용하는 교통수단 같은 거였어요.”
 
  ― 아이고, 럭비에 스키에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운동을 원체 좋아했어요. 운동하는 친구들은 단순하고 순수하거든요.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라서 세상은 암울했지요. 럭비를 하면서 학우들과 몸을 부딪치며 뒹굴다 보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어요. 대학 총장이 된 이후에는 우리 대학 학생들부터 강하게 길러야겠다고 다짐하고 본격적으로 다양한 종목의 운동부를 만들었습니다. 단국대에 스키부를 만들고 싶었는데 스키가 있어야 말이지요. 일본의 재일동포들한테 애걸하고 사비(私費)를 털어 스키 60대를 갖고 들어와서 체육과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 아이들이 경쟁을 통해 한국 스키를 발전시킨 겁니다.”
 
 
  동계 스포츠, 비인기 종목 육성
 
  ― 단국대에 럭비부, 농구부, 레슬링부가 창단된 것이 1950년대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되나요? 태권도부, 스키부, 조정부, 수영부도 만들었지요.”
 
  ― 단국대가 배출한 선수들이 즐비하지만, 대표적으로 박태환 선수가 있습니다.
 
  “박태환 선수는 고등학교 때부터 눈여겨봤어요. 우리 대학에서 영입해 졸업할 때까지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저는 유명한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고 선수 선발은 감독들이 알아서 하도록 하는 편이었습니다. 금전적 스카우트 경쟁보다 선수 잠재력을 키우는 데 노력해 달라는 당부는 했어요. 박태환 선수도 다른 대학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부모가 우리 대학이 아들의 미래를 이끌어줄 의지가 강해서 선택했다고 들었습니다.”
 

  ― 지금이야 수영이 인기 종목이지만 그때만 해도 비인기 종목이었는데요.
 
  “제가요, 대학의 스포츠부를 육성할 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당시에 스포츠가 몇몇 구기 종목만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동계 스포츠나 비인기 종목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스포츠는 교육의 일환이니까 순위 중심으로 과열 경쟁하거나 돈을 앞세운 선수 스카우트 경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서른여섯에 대학 총장이 됐는데 정치 권력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나이보다 훨씬 정정하신데 이런 이유가 한몫을 했을까요.
 
  “제가요, 사실 여러 곳에서 제안을 받았어요. 국회의원에 출마해라, 장관이나 총리로 입각하라고요. 박정희 정부부터 여야(與野)를 막론하고 제안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한 번도 수락하지 않았어요. 스포츠를 통해서 국위(國位)를 선양할 것 같은 자리가 있으면 언제든 제 모든 노력을 기울이려고 했어요.”
 
 
  인터뷰 내내 존댓말 하는 아흔넷의 어른
 
  이 어른,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장충식 이사장은 손녀뻘인 기자에게 존댓말을 썼다. ‘제가요’ ‘저는요’라고 말하며 자신을 끝끝내 낮췄다. 동석한 김남필 전(前) 단국대 홍보처장은 장 이사장이 자신이 학생 때부터 손님이 오면 누구든 집무실 밖까지 마중을 나와서 손을 잡고 들어갔다고 했다. 몇 해 전의 낙상 사고로 고관절이 부러져 거동이 불편해 더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여전히 건강해 보였고, 몇몇 체육사에 대해서 아주 또렷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고 온 다음 날부터 ‘2025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우리 선수들이 금빛 행진을 이어가고 있어서 소개하자면, 단국대는 ‘동계 스포츠에 진심’이었던 학교다. 장충식 이사장은 선진국에서는 동계 스포츠에 대한 애호도가 높았는데 유독 한국은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동계 스포츠 육성에 매진했다. 단국대 스키부를 1968년에 창단했고, 1976년에는 빙상부를 창단했다. 빙상부는 2000년 이후 동계 아시안게임, 동계 올림픽의 메달을 휩쓸며 ‘단국대 빙상부는 곧 국가대표의 산실(産室)’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장 이사장은 대한민국 특성에 맞는 쇼트트랙 선수를 길러보고자 단국대에 쇼트트랙팀을 구성했다. 초창기의 빙상팀이 다져놓은 기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단국대 빙상팀 발전의 초석이 됐다.
 
  “쇼트트랙은 우리나라에 없던 종목인데, 가만히 보니 배기태, 김기훈 같은 우리 선수들이 서양 사람들보다 체격도 작고 근력에 한계가 있어서 스피드 스케이팅으론 따라가기 어렵겠더라고요. 감독한테 ‘쇼트트랙으로 바꿔서 훈련해 달라’고 해서 시작됐어요. 국제대회에 나가보니까 경쟁력이 있더라고요. 이걸 올림픽 종목에 넣어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IOC 위원들을 설득해서 된 거예요.”
 
 
  親北인 아랍 왕자의 마음 돌려 88서울올림픽 유치
 
장충식 이사장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스포츠과학기술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아 1988년에 천안캠퍼스에서 학술 대회를 열었다.
  그의 이력이야 수두룩하지만,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최에 일익을 담당한 것은 혁혁한 공으로 꼽힌다. 일본을 상대로 올림픽 유치 캠페인에 뛰어든 1981년 초반에 한국은 매우 불리했다. 한국은 후발국으로 스포츠 외교 면에서 일본보다 매우 뒤졌다. 중동 지역의 국가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일본 나고야에 많은 관심을 가진 반면, 서울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다. 특히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셰이크 파하드 위원장은 쿠웨이트 국왕의 막냇동생으로 친북(親北) 인사여서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장충식 이사장은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회장과 뜻을 모아 단국대에 파하드 왕자를 초청해 명예박사 학위를 주고 한국 답사를 통해 한국 스포츠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태권도가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홍보했다. 파하드 왕자는 여러 아랍 국가의 IOC 위원들을 설득해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뽑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 이사장은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훈장(1989년), 청룡장(1990년)을 받았고 1996년에는 IOC로부터 올림픽 훈장을 받았다.
 
  ―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은 역사에 어떤 의미일까요.
 
  “86아시안게임은 88서울올림픽을 위한 예행연습 같은 느낌이 있었지요. 88올림픽의 동력은 세계적 노출이었어요. 한국이 개국 이래 가장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던 때입니다. 그때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세계 기준에 맞고,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였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시험이라고 한다면, 이를 위해 온 국민이 희망과 열정을 쏟았고 다행히 그 결과가 합격선에 도달했어요. 그랬기에 여러 가지 변화를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88서울올림픽 이전의 한국이 ‘산업화 시대의 근대화’라면 그 이후는 ‘세계화 시대의 근대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올림픽 이전에 열렸던 모스크바올림픽, LA올림픽이 냉전 갈등으로 인해 동서구권이 보복성 불참을 선언해 반쪽짜리였다면 서울올림픽은 역사상 최대 나라가 참가한 온전한 올림픽으로 치러졌다는 점이 획기적이라고 봅니다. 이후에 동서구에서 해빙 무드가 일고 한국의 북방 정책도 현실화되면서 평화 무드가 구축됐습니다. 소련의 붕괴와 냉전체제의 해제라는 세계사적 급변의 새싹을 찾는다면 88서울올림픽의 동서구권 동시 참가가 아닐까 생각이 돼요.”
 
 
  1963년부터 남북 단일팀 시도
 
1950년에 학도의용군에 입대한 장충식 이사장.(왼쪽)
  남한과 북한이 스포츠 단일팀을 꾸리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1963년에 IOC의 중재로 최초의 남북체육회담이 개최됐고, 올림픽 단일팀 구성 등을 놓고 세 차례나 회담을 가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1984년에 김유순 북한올림픽위원장이 LA올림픽 및 국제경기 단일팀 파견 회담을 제의했으나 역시 성과가 없었다. 그해 북한올림픽위원회는 LA올림픽에 불참했다. 1988년에는 북한의 정준기 총리가 ‘88서울올림픽’ 공동 주최를 주장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IOC의 중재로 남측 김종하, 북측 김유순을 대표로 하는 로잔회담이 열렸는데 성과 없이 종료됐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에 불참했다. 1989년에 김유순 북한올림픽위원장이 베이징아시안게임에 파견할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제의했고, 정부는 남북체육회담 수석대표에 장충식 이사장을 임명했다. 이 회담 역시 성사되지 않았다.
 
  비록 불발로 끝났지만, 이 과정을 자세히 살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때의 토의 내용이 결과적으로 1년 뒤의 남북 단일팀 성사에 기초가 됐기 때문이다. 또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해 작은 의견 하나조차 조율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생히 볼 수 있다.
 
  1989년에 수석대표였던 장충식 이사장은 처음부터 회담을 갈등의 전장이 아니라 화합의 마당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쓴 《시대를 넘어 미래를 열다》의 일부분이다.
 
  〈1984년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 장면을 비디오로 보여줬다. 회견을 하다가 의견 대립이 생기면 차분히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성을 지르다가 이윽고 욕설이 나오고 결국은 성냥통이나 재떨이를 던지고, 깨트리는 살벌한 장면도 있었다. (중략) 남북한이 휴전 중이니 회담장에서라도 상대방에 밀리면 전쟁에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내가 교육자인데 국가를 대표하는 회담에서 인신공격과 욕설, 기물 파손을 한다면 어떻게 학생들을 볼 수 있겠는가. 나중에 우리 후손들이 이 광경을 보면 조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남북 간의 회담을 진행하는 자세도 문제지만, 회담 현장에 있는 대표진을 뒤에서 조종하는 정부의 개입도 문제였다.
 
  “성공적 회담의 기본 방식은 이성적 대화이고, 이를 뒷받침할 전제조건을 현장 중심의 자율성 존중이라고 봤습니다. 김집 당시 체육부 장관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하며 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수석대표를 맡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정부가 내 주장을 수용했어요. 대표단의 재량권을 인정받은 거죠.”
 
 
  ‘아마추어 수석대표가 북한에 놀아나고 있다’
 
  대망의 1차 회담이 1989년 3월 9일 판문점 우리 측 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렸다. 회담 의제는 선수단 호칭, 단기, 단가, 선수단 구성, 선수단 복장, 선수 선발, 선수 훈련, 신변 안전 보장, 선수단 경비, 단일팀 공동위원회 구성 등 10개였는데, 1차 회담은 우호적으로 진행돼 선발 원칙에 합의했고 단가는 1920년대의 ‘아리랑’으로 하기로 했다. 2차 회담(1989년 3월 28일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도 진전이 있었고, 3차 회담이 기대됐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가 당국의 허가 없이 방북을 하고, 이로 인해 사법적 처리를 받게 됐는데 북한 측이 이를 비난하며 3차 회담을 거부했다. 7개월이 지난 1989년 10월 20일에야 평화의 집에서 회담이 다시 열렸다. 베이징아시안게임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장충식 이사장은 북한 측이 계속 제기해 온 단일팀 단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안을 한 북한 측이 놀라고 당황할 만큼 파격적인 수용이었다.
 
  “오히려 우리 측에서 시끄러웠습니다. 제가 북한의 의견을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는 비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추어 수석대표가 북한에 놀아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제 신념은 확고했어요. 회담을 하는 이유는 선전, 선동이 아니라 관계 개선을 위한 것입니다. 한 걸음씩 서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거면 회담할 이유가 있나요.”
 
  ― 북한과 직접 협상을 해보니 어떻던가요.
 
  “회담 중에도 북한은 끊임없이 회담장 뒤에서 쪽지가 들어왔어요. 쪽지가 들어오면 점잖았던 북측 대표가 갑자기 정치 공세를 늘어놓거나 장광설을 펼치며 회담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곤 했어요. 북측에 회담 전술을 짜고 지시하는 전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쪽 대표들에게는 절대 흥분하지 말고 역사상 최초의 단일팀을 만들어낸다는 목표에만 충실하자고 몇 번이고 당부했습니다.”
 
 
  ‘절반의 성공’
 
1989년,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3차 남북체육회담. 장충식(오른쪽) 대표와 북측 김형진(왼쪽) 대표가 한반도기를 합의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후에 회담이 점점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은 베이징아시안게임 조직위로 보내는 합의서에 부정적이었어요. 단일팀으로 출전한다는 합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단일팀으로 출전한다고 보장을 하라는 겁니다. ‘합의’와 ‘보장’은 큰 차이가 있어요. 북한 측의 주장은 ‘단일팀 구성이 안 되면 우리가 베이징아시안게임에 출전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포함돼야 한다’는 것인데, 정부의 정치·외교적 전략은 차치하고 젊은 선수들이 가꿔온 아시안게임 참가의 꿈은 어쩌란 말입니까. 매우 복잡하고 위험한 얘기였어요.”
 
  ― 결과론적 얘기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회담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베이징아시안게임에 단일팀으로 출전하지는 못했지만요.
 
  “남북 단일팀의 호칭, 단기, 단가, 공동단장제, 선수단 구성 및 실무 사무국 설치 등의 구체적 합의를 이끌어낸 것은 자부할 만한 일이지요. 회담을 통해 얼개는 완성했는데 최종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은 겁니다. 남북 모두 상호 불신의 벽이 높았고, 각자 체육계나 정치계에 얽힌 속셈을 완전히 씻어내기 어려웠어요. 절반의 성공이었지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서 언젠가 단일팀을 꾸리겠다는 열망은 더 커졌어요.”
 
  결실을 거둔 주인공 역시 장충식 이사장이었다.
 
 
  단일팀 대신 친선 축구경기로 전략 바꿔서 북한 공략
 
김운용 당시 IOC위원이 1996년, 장충식 이사장에게 올림픽 훈장을 수여하는 모습.
  체육회담이 무산되고 체육부 장관에 임명된 정동성 당시 민정당 의원이 1990년의 어느 날, 장충식 이사장을 찾아왔다.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였는데 세 가지 주문이 있었다. 첫째, 베이징아시안게임의 선수단장을 맡아줄 것, 둘째 우리가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중국과 우호 관계를 구축해 달라, 셋째 아시안게임이 끝나면 남북한이 국제대회에 단일팀으로 참가하도록 비밀리에 성사시키라는 것이었다. 장충식 이사장은 책 《학연가연》에서 그날의 기억을 이렇게 기술했다.
 
  〈몸과 마음이 피곤했지만 좌절한 남북체육협상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정책이 결국 남북 간의 화해로 이어져야 그 값어치가 살고, 우리 민족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선수단장직을 수락하기로 했다.〉
 
  방법을 달리했다. 단일팀이 아니라 ‘경평전’이라는 축구대회를 부활시켜 보자고 했다. 경평전은 1929~1946년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렸던 축구대회의 애칭이다. 분단 이전에 남북 지역의 대표 선수들을 구성해 애향심을 고취하던 친선 축구경기였다. 북한이 남한의 스포츠 교류를 ‘유화 제스처를 통한 평화 공세가 아닌가’ 하는 불신의 눈초리로 봤기에 비공개 회담으로 방향을 틀었다. 단일팀 구성에 대해 많은 합의가 이뤄진 상태였기에 회담을 개시한 지 불과 4일 만에 합의서 작성을 완료했다. 1990년 10월, 장충식 이사장과 김형진 북측 선수단장은 베이징 메인프레스센터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갖고 통일 축구 성사 사실을 공개했다. 같은 달에 바로 남과 북은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남북통일 축구 경기를 했고, 1990년 10월 12일, 세계탁구선수권대회(1991년 개최)와 여러 국제대회의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을 하자는 남북공동합의문을 발표했다.
 
  그러고 1990년 11월 29일부터 또다시 실무 접촉 회의가 이어졌다. 4차 회담을 앞둔 어느 날, 장충식 이사장은 ‘오늘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결심을 했다. 그가 쓴 《시대를 넘어 미래를 열다》의 한 부분이다.
 
  〈북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당일 합의를 완결하도록 압박을 해야겠다고 구상했다. 우리 쪽 강경파가 ‘장 수석이 또 북한에 졌다’는 비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다. 통일축구대회에서도 드러났듯이 스포츠가 가진 힘은 컸다. 교류는 결국 사람이 만나는 일이니 이처럼 대규모 교류가 이뤄지면 북한의 경직성도 서서히 유연화될 것이다. 이런 때 북한의 문을 열지 못하면 다음 기회에도 어렵다고 믿었다.〉
 
  1991년 2월 12일 마침내 ‘남북 스포츠 단일팀 구성 합의문’이 나왔다.
 
  선수단 호칭은 우리말로 코리아(KOREA), 선수단 단기는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 지도, 선수단 단가는 1920년대 남북이 함께 부르던 ‘아리랑’, 선수단장에 있어서 탁구단장은 북측, 축구단장은 남측이 맡기로 했다.
 
 
  “출전한 북측 선수들, 방에서 TV도 못 보게 관리”
 

  ― 이사장님께 1989~1990년은 아주 특별하겠네요.
 
  “제 인생에서 가장 보람찬 시기였어요. 선친은 남한과 북한이 언제고 평화통일을 해야 비로소 한민족이 부흥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선친의 유훈이 있어서 저는 진심으로 단일팀 회담에 참여했고 성사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을 했어요. 몇 번의 실패 후에 1989년 단일팀 구성에 대한 합의, 1990년 세계청소년축구 단일팀 출전 합의를 이뤄냈을 때의 감동은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시의 국제 정세도 우리에게 순풍으로 작용했고 여건도 좋았어요. 청소년 대표 단일팀을 이끌고 포르투갈에서 겪은 일은 잊히지 않아요.”
 
  ― 어떤 기억인지 말씀해 주시죠.
 
  “코치진과 임원들이 노동당의 모든 지시를 지키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엄격한 감시를 하며 사소한 개인행동도 못 하게 하더군요. 남한, 북한 아이들을 모두 호텔방에 나란히 뒀는데 우리나라 아이들은 방에서 TV를 보는데 북한 아이들은 그걸 못 보게 해요. 제가 북한 감독한테 ‘아이들한테까지 이럴 필요가 있느냐’고 설득해서 TV를 보게 해줬어요. 또 북측 단장이 나중에 북한에 들어갈 때 여기저기 선물을 할 곳이 많다면서 부탁을 하기에 와인 100병을 사비로 사서 줬어요.”
 
  ― 단일팀으로 경기하러 왔는데 그 정도로 통제를 하다니요.
 
  “포르투갈로 갈 때는 한국 비행기, 돌아올 때는 북한 비행기를 타고 왔지요. 세부적으로 조정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신기한 것이 계속 몸 부딪치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새 남북이라는 관념이 없어지고 친근함이 들어요. 남북한 문제는 한민족이라는 정서적 힘만으로 풀 수는 없을 겁니다. 예전보다 상황은 더 복잡해졌고 순진한 통일론만 앞세울 수는 없어요. 그래도 남북한이 다시 해빙 무드를 만든다면 그 채널은 스포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립운동가 부모
 
1991년,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치러진 2차 평가전을 위해 한반도기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다.
  장충식 이사장은 1932년 중국 톈진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범정(梵亭) 장형(張炯·1889~1964년) 선생은 지혜와 담력을 두루 갖춘 청년 독립운동가로 혜당(惠堂) 조희재(趙喜在·1882~1947년) 여사와 단국대를 공동 설립했다. 범정은 일찍이 단국대의 창학 정신을 구국, 자주, 자립으로 정했는데, 세 가지 모두 강한 신체와 체력을 요구하는 것들이다.
 
  부친 범정 선생의 부탁으로 부인인 양인식 여사는 만삭의 몸으로 중국 관내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전달해 주기 위해 중국에 들어갔다가, 장충식 이사장을 낳았다. 집안 어른들은 그가 일본 경찰에 노출되지 않을까 우려해 성씨를 바꾸고 중국인 학교에 보냈다.
 
  장충식 이사장은 광복을 맞아 월남했다. 그는 경성제대 역사학과에 진학했는데, 나중에 범정 선생이 학적을 단국대학 정법학부 정치학과로 바꾸는 바람에 단국대를 졸업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던 1964년에 부친의 부름으로 귀국했다가 단국대의 경영에 참여하게 됐다. 그는 대학의 설립자이자 부친인 범정 선생이 늘 말해온 ‘단국대학 학생들은 모름지기 공부보다는 의식, 의식보다는 건강이 우선’이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체육 진흥 사업을 시작했다. 장충식 이사장은 선수 육성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의 체육 행사를 넓히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스포츠랑 상관없는 얘기인데 해도 되려나요? 제가요, 총장으로 재직 중에 중앙정보부, 보안사에서 두 번 고문을 당했어요.”
 

  ― 대학 총장을 고문할 일이 뭐가 있다고요.
 
  “정부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 다녀온 애들을 제적(除籍)을 시켜야지, 왜 복교를 시키느냐며 그랬어요. 물고문도 당하고 했는데, 그래도 절대 학생들을 퇴학시키지는 않았어요.”
 
  ― 단 한 명도요?
 
  “네, 단 한 명도요. 학생들이 결국 직업을 가져야 하잖아요. 나라에서 전부 교도소에 보내 죄수로 만들었는데 우리 대학에서마저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전국에서 학생 데모를 한 학생들을 한 명도 퇴학을 시키지 않은 학교는 단국대뿐이에요. 나중에 주례도 서주고, 유학 갈 때 신원 보증도 해주고 그랬어요. 정치권을 너무 쳐다보지 않아서 곤욕을 겪은 적도 있고요.”
 
 
  전국 대학 최초로 지방 캠퍼스 만들어
 
  ― 어떤 일이 있으셨는데요.
 
  “제가 정치를 싫어하는 게 남을 괴롭혀서예요. 정치를 하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꼭 남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게 되거든요. 그게 싫었어요. 김영삼 정부 때 탄압을 많이 받았어요. 김영삼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정치자금을 요구했는데 거절했거든요. 그런데 제 생각은 분명했어요. 학교 아이들이 낸 등록금을 어떻게 정치자금으로 주나요.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민관식 고문이 ‘이 사람아, 어쩌다 김영삼 대통령한테 미운털이 박혔나. 단국대학이 위험해’라고 하더군요. 그때 가택 수색당하고,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병원을 짓기로 했는데 은행권의 대출을 막아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어요.”
 
  ― 단국대 천안캠퍼스 병원이 생기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군요.
 
  “천안이요, 1970년대에 고등학교는 많은데 대학이 없어서 학생들이 서울과 대전으로 유학 가는 형편이었어요. 거기에 대학을 세우면 교육도시가 될 것 같아서 전국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지방 캠퍼스를 만들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천안시장 찾아가서 설득해서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천안에 종합병원 수준의 보건시설이 또 없어요. 그래서 치대를 만들었는데 성공했고 의과대학이랑 부속 병원을 만들기로 했어요. (단국대는 1988년 의예과를 만들었고 1990년 보건사회부로부터 종합병원 건립을 승인받았다.) 천안 인근에서 제일가는 병원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김영삼 정권 때라 은행 대출이 하나도 안 되니 어떡해요. 극동건설 사장 하던 양반이 ‘막내아들이 단국대를 졸업해서 내가 학부형인데, 외상으로 공사를 먼저 해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만든 거예요. 매우 고맙지요. 그 양반이 아니었으면 지금 저 병원이 있겠어요? 요즘도 입원실이 늘 만실이라고 해요. 그때마다 마음이 좋아요.”
 
 
  “스포츠는 영원히 발전해 나갈 것”
 
  ― 이사장님께 스포츠는 어떤 의미입니까.
 
  “저는요, 스포츠에 매진해서 제 삶을 좀 더 품위 있게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스포츠는 아무리 하찮은 기록이더라도 그 순간을 함께한 선수와 지도자, 관중의 승리에 대한 희망이 배어 있어요. 땀과 눈물, 도전과 영광은 단순히 이기고 지고, 몇 등이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스포츠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생존 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시대가 달라지면서 양식은 바뀌겠지만 영원히 발전해 나갈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데, 장충식 이사장은 굳이 비서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를 하느라 힘이 많이 들었을 터인데, 오히려 “고생했다”며 기자를 잡는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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