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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시각

‘김유신함’은 없고, ‘신채호함’ ‘홍범도함’은 있다!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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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보수는 ‘민족사의 로마’ 신라에서 활로를 찾아야!
⊙ 한국 해군은 삼국 통일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자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건가? 홍범도함이 공산군에 어뢰를 쏠 수 있나?
⊙ 김일성 세력과 신채호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韓民族을 만든 金庾信!
⊙ 한국인 50% 이상이 신라계 姓氏, 김유신 매도는 조상에 침 뱉기
2021년 9월 28일 진수식을 가진 해군 SLBM 탑재 가능 3000t급 잠수함 신채호함. 사진=해군
  지난 4월 5일 HD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3000t급 잠수함 ‘신채호(申采浩)함’ 인도식이 있었다. 신채호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관점에 사로잡혀 삼국 통일을 사대주의라고 부정하고 민족통일 국가를 만든 1등 공신 김유신(金庾信)을 감정적으로 비방한 사람이다. 《조선상고사》에서 그는 《삼국사기》 등에 적힌 김유신의 전공(戰功)을 거의 허위로 몰고 ‘음험하고 사나운 정치가로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인물’이라면서 백제 왕실에 대한 성공적인 분열 공작까지도 순진한 민족감정으로 매도했다.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 이름을 국군 함정 이름으로 새겨 기릴 수 있나?
 
  민족(nation)이란 개념은 동양에서는 없었고, 19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일본을 통해서 수입된 ‘민족’(번역 자체가 틀렸다. 국민으로 번역했어야 한다)을 흉기화하여 자주적 통일의 화신(化身) 같은 존재인 김유신을 매도하는 사람을 숭앙하는 것은 조국뿐 아니라 조상에 대한 자기부정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인의 원형(原型)은 신라의 삼국 통일에 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육사에 있는 홍범도 흉상. 사진=조선DB
  2015년 박근혜(朴槿惠) 정부 시절 해군은 새 잠수함에 공산주의자 ‘홍범도(洪範圖)함’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가 항일(抗日)운동을 한 것은 소련을 위한 일이었지 대한민국의 독립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제(日帝)보다 못한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세우기 위한 것임으로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 육사(陸士)에 설치된 홍범도 흉상 이전도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자를 기리는 한국 잠수함
 
  남북 간 대결은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절대로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남북한 사이 다시 전쟁이 터지면 이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체제대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자를 기리는 한국 잠수함은 공산군을 향해 어뢰를 쏠 수 있나? 공산주의자를 매일 경배해온 한국 육군 장교단은? 이런 본질적인 모순점보다 더 충격적인 건 이런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약하다는 점이다. 특히 보수 세력 안에서.
 
 
  종족주의 수준의 역사 인식
 
  신채호함과 홍범도함을 배출한 한국 해군은 ‘김유신’을 함정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2015년 《동아일보》 보도를 참고하면 해군은 김유신이 동족(同族)을 상대로 전쟁한 인물이라고 해서 함정 이름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심은 김유신을 매도한 신채호를 함정 이름으로 결정한 데서 역으로 확인된다. 이런 해군이 김유신을 부리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군을 쳐서 이겨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왕(文武大王)은 함정 이름으로 사용한다. 한국 해군엔 최소한의 합리성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합리성은 감성적 존재인 민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인 국가에서 나온다. 이런 점에서 해군의 정신력 수준은 1300년 전 신라 때의 지도층보다 한참 후진적이다. 고대(古代) 국가 형성 이전의 종족주의(種族主義) 정도라고 할까.
 
  삼국 시대엔 ‘한민족(韓民族)’이 없었고 서로 말도 달랐을 것이다. 3김씨, 즉 김유신·김춘추(金春秋)·김법민(金法敏)이 주도한 삼국 통일에 의하여 공통의 말과 정치제도, 종교, 국토를 갖게 됨으로써 한민족 형성의 위대한 시작이 이뤄진 것이다. 신라는 백제를 치기 위하여 당(唐)과 손잡았고, 백제는 신라를 치기 위하여 왜(倭)를 한반도에 끌어들였지만 이는 민족 반역이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의 행동 윤리였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를 치기 위하여 프랑스와 손잡은 것을 두고 영국 지식인들이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민족 반역자라고 욕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채호와 한국 해군은 왜 하필 민족사 최고 인물 중 한 사람이자 당대(當代)엔 일본과 당에서도 알아주었던 ‘동양의 명장’ 김유신을 이렇게 보는 것일까? 육군사관학교는 ‘화랑대(花郞臺)’로 불리고 김유신은 대표 화랑(풍월주)이었다. 해군은 왜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군인’을 회피하고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를 숭배하는가? 해군사관학교와 육군사관학교는 민족을 지키는 ‘민족사관학교’가 아니라 국가를 지키는 국군사관학교인데도 말이다.
 
 
  김일성 세력은 김유신의 위대성을 안다
 
  2011년에 출판되어 지금 북한 각급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는 《조선력사인물》은 세 권이다. 100여 명의 역사적 인물들을 흥미 위주로 그린 대중적 역사물이다. 여기서 딱 한 사람 부정적으로 소개된 사람이 있다. 신라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이다. 김유신에 대한 기술(記述)은 트집 잡기이자 거의 욕설, 코미디 수준이다. 북한 정권, 그리고 남한의 종족주의자들이 집중적으로 비방하는 두 인물이 바로 이승만(李承晩)과 김유신인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선 박정희보다 이승만이, 문무왕보다 김유신이 더 두려운 것이다. 이승만과 김유신이 자유와 자주를 중심 가치로 한 민족 주체성을 최고 수준에서 구현한 인물임을 북한 노동당 정권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정권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인물이란 원리를 명심하면서 읽어보자(북한식 맞춤법대로).
 
  〈김유신은 화랑으로서 무술 훈련에 힘씀으로써 신라봉건통치배들 속에서 호전적인 무관으로 자라났다. 그리하여 김유신은 그 시기 싸움판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유능한 군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뒤늦게야 술에서 깨여난 김유신은 제가 단념했던 그 길로 제 말이 찾아갔다고 하여 말에서 뛰여내려 단칼에 그 목을 동강 냈다. 자기의 결심을 뒤흔들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애매한 말만 목 잘리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도 김유신의 생각은 기생 천관에게로 가 있었으니 목치는 놀음은 결국 제 뺨을 친 짓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눈엔 개과천선(改過遷善)도 악이다.
 
  〈김유신은 저들의 령토 확장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당나라 세력까지 끌어들이는 매국 행위를 감행함으로써 이미 고구려에 의하여 마감 단계에 이르렀던 삼국 통일의 위업을 좌절시키는 죄악을 범하였다.〉
  -소련과 중공을 끌어들여 동족을 친 전범(戰犯) 집단이 할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당나라의 내속은 신라를 도와주자는 것이 아니였다. 당나라 통치배들은 고구려,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 신라마저 타고 앉으려는 것이였다. 이렇게 김유신은 외세를 끌어들이는 천추에 용서 못 할 큰 죄를 범하였다.〉
  -그런 당을 상대로 9년간 결전을 벌인 끝에 세계 최강의 당군(唐軍)을 추방하고 한반도를 민족의 보금자리로 만든 신라의 위대한 민족독립 투쟁은 빼버렸다.
 
  〈고구려 땅에 발을 들여놓자 신라의 군사들은 동족의 나라를 밟아선 가책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김유신은 기고만장하여 웨쳐 댔다. “이만한 일이 두려워서야 어찌 신라의 군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힘을 내라. 나라의 운명이 우리들에게 달려 있지 않느냐!”〉
  -김유신이 국가가 민족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선언했다는 뜻인데 이야말로 신라 지도부의 합리성이고 근대성이다. 북한식 논리대로라면 국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한 것도 동족을 친 배신이 된다.
 
 
  가짜 同族論에 넘어간 한국군
 
김유신
  〈신라의 문무왕은 어전회의를 열고 열을 올렸다. “오늘 우리가 이긴 것은 오로지 대각간 김유신 장군의 공이요. 이제 나는 그 공을 치하하여 김유신 장군에게 태대각간의 벼슬을 내리려 하오.” 이렇게 김유신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공로’로 태대각간이라는 가장 높은 등급의 벼슬을 받았으며 죽은 후인 흥덕왕 때(826~836년)에는 ‘흥무대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이와 같이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 통치배들의 사대주의적이며 배족적인 외세 의존 정책에 의하여 당나라 침략군은 대동강 이북의 광대한 령토를 일시 차지하게 되였다.〉
  -김유신은 한국 역사상 왕이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장 높은 직위에 올랐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수십 년간 병권(兵權)을 잡고 네 왕을 모셨지만 왕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또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통일 대업에 몰두, 통일신라-고려-조선-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민족사적 정통성의 주류를 열었다. 신라가 확보한 국토는 그 흐름 속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압록강·두만강에 이르게 된 것이다.
 
  〈김유신은 673년 7월 죄악에 찬 한생을 마치였다. 종래의 봉건 사가들과 사대주의 사가들은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고 보는 데로부터 김유신을 삼국 시기의 ‘큰 인물’로, 삼국 통일에 이바지한 ‘인물’로 내세웠다. 그러나 력사적 사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 집권자들은 시종일관 령토 확장 야망으로부터 제힘으로는 강대한 고구려를 누를 수 없고 또 백제를 먹을 수 없게 되자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 간의 정복전쟁을 벌려놓았으며 광대한 조상의 땅을 당나라에 섬겨 바치는 큰 죄를 저질렀다. 하여 공정한 력사는 김유신을 치졸한 사대주의의 시조로, 민족반역자로 락인하고 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사이엔, 특히 집권 세력 사이엔 ‘우리가 남이가’ 식의 민족의식이 없었다. 말도 서로 제대로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을 치기 위하여 다른 나라와 동맹하는 것을 동족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방하는 건 유아적(幼兒的) 발상이고,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을 회칠하려는 자기부정이다.
  한때 신라의 삼국 통일을 높게 평가했던 북한이 이렇게 표변한 것은 역사전쟁에서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하고 고구려-발해 중심으로 정통성을 조작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민족사의 지류인 발해를 통일신라와 동급으로 왜곡하는 것은, 민족사의 이단인 북한 정권을 대한민국과 동급으로 치켜세우는 것과 똑같은 사실(史實) 부정인데 이런 역사전쟁 프레임의 함정에 한국군이 빠졌음을 보여주는 것이 ‘신채호함’이고 ‘홍범도함’이다.
 
 
  조지 워싱턴이 친영파인가?
 
  김유신이나 삼국 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영국 사람들이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 대영제국의 토대를 만든 노르만공(公) 윌리엄을 매도하는 것이나 미국인이 영국군 장교 출신이라고 워싱턴 장군을 친영파(親英派)라고 욕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그 나라엔 없다.
 
  한국인이 신라의 삼국 통일과 김유신을 부정하는 것은 민족사의 가장 영광된 스토리를 말살하여 스스로를 난쟁이, 비겁자로 만드는 반(反)교육적 행태이기도 하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영감(靈感), 상상력, 용기, 비전을 후손들에게 선물한다. 역사는 인간과 조직의 수준을 높이는 정신적 자산이 된다. 소년 때 이순신, 나폴레옹 전기(傳記)를 읽고 감동했던 박정희(朴正熙)가 두 위인을 닮은 사람이 되어 인류 공영에 이바지한 사례가 역사의 힘을 보여준다.
 
  작년 봄,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대만 문제를 무력(武力)으로 해결하는 데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자 중국 정부는 ‘주둥이 닥쳐’라고 했다. 불용치훼(不容置喙). 이럴 때 김유신을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자주(自主)의 화신(化身) 김유신이라면 뭐라고 반박했을까? 아마도 ‘물어!(咬之·교지)’라고 했을 것이다.
 
 
  ‘주인이 개의 다리를 밟으면 물어야’
 
  서기 660년 신라 태종무열왕 시절, 황산벌 싸움에서 백제 결사대를 무찌른 김유신의 신라군은 먼저 온 당군(唐軍)과 합류하기 위하여 당의 진영에 이르렀다. 당장 소정방(唐將 蘇定方)은 신라군이 늦게 왔다고 신라 장수 김문영의 목을 베려 했다. 김유신이 격분,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
 
  “대장군이 황산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늦게 왔다고 죄를 주려는 것인데, 나는 결코 죄 없이 욕을 당할 순 없다. 반드시 먼저 당군과 싸워 결판을 지은 다음 백제를 부수겠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조(太宗武烈王條)는 당시 김유신을 이렇게 묘사했다.
 
  〈김유신이 군문(軍門)에서 도끼를 잡자 성난 머리털은 꼿꼿이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은 저절로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이를 본 소정방의 부장(副將)이 겁을 먹고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하려 합니다’고 하니 소정방은 김문영의 죄를 묻어주었다.
 
  《삼국사기》 열전(列傳) 김유신전(傳)에는 그 뒤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당나라 사람이 백제를 멸한 뒤 사비의 언덕에 군영(軍營)을 만들어 신라 침략을 음모하였다. 무열왕이 알고 여러 신하를 불러 계책을 물었다. 다미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백성을 거짓 백제의 사람으로 만들어 그 의복을 입히고 도둑질을 하려는 것처럼 하면 당의 사람들이 반드시 공격할 것이니 그때 더불어 싸우면 뜻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김유신이 말하기를 “그 말도 취할 만하니 따르십시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사가 우리의 적을 멸해주었는데 도리어 함께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나”.
 
  김유신이 말하기를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했는데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
 
  당의 첩자는 신라가 대비하고 있음을 알고 백제 왕, 신료 93명, 군사 2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소정방이 포로를 바치니 당의 고종(高宗)은 위로한 뒤 “어찌 신라마저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소정방은 이렇게 말했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섬기기를 부형(父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의 대표 명장이 신라에 바친 최고의 찬사라 할 만하다.
 
 
  신라 사람들의 합리성과 신채호의 혼돈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했는데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犬畏其主 而主踏其脚則咬之, 豈可遇難而不自救乎)”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상대로 하여 자주를 지키는 정신을 실감 나게 표현한 명문(名文)이다. 특히 ‘자구(自救)’라는 단어가 흥미롭다.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라는 표현도 남다르다. 신라의 신하가 섬기는 대상은 임금보다 상위 개념인 나라(國)다. 요사이 문법으로 말한다면 정권이 아닌 헌법에 대한 충성이다. 7세기 신라 지도층의 합리적(근대적) 국가관을 엿볼 수 있다. 신채호의 정리되지 않은 민족관은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나온 것이고 신라 지도층의 합리성은 전쟁을 통하여 국가의 소중함을 실감한 덕분일 것이다.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란 소정방의 표현은 아래와 같이 실증(實證)된다.
 
  문무왕(文武王) 8년(서기 668년) 11월 5일, 왕은 멸망시킨 고구려의 포로 7000명을 이끌고 경주로 돌아왔다. 그는 신하들을 데리고 선조의 묘를 배알, ‘백제와 고구려의 죄를 물어 국운(國運)이 태평하게 되었다’고 신고하였다. 이듬해 왕은 죄인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삼국사기》 문무왕조(條)에 적힌 그 요지는 감동적이다.
 
  〈지금 두 적(敵)이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었다. 적을 무찌를 때 공을 세운 자들에게는 이미 상을 다 주었다. 전사(戰死)한 혼령들에게도 명예를 추증하였다. 그러나 감옥의 죄수들은 아직 은혜를 입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다. 이를 생각할 때 나는 먹고 잘 수가 없다. 국내의 죄수들에게 특사령을 내리니 오늘 미명(未明) 이전에 오역(五逆·임금, 아버지, 어머니, 조부, 조모를 죽이는 것)과 사죄(死罪)를 범하지 않은 자로서 갇혀 있는 자는 범죄의 대소를 불문 다 놓아줘라. 죄를 범하여 관직을 박탈당한 자는 다 복구시키고, 도적질한 자는 석방하되 도적질한 것을 갚을 능력이 없으면 징수를 면한다.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취하여 먹은 자로서 농작이 부실한 곳에 사는 자는 갚지 않아도 된다. 농작이 잘되는 곳에 사는 자는 올해 추수 때 취한 본곡(本穀)만 갚고 이자는 물지 않아도 된다.〉
 
 
  신채호는 왜 對唐 결전 부분은 쓰지 않았나?
 
《조선상고사》를 지은 신채호.
  신채호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사》는 백제의 처절한 부흥운동을 영웅적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왜 여기서 끝냈을까? 신라가 당과 손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마저 먹으려는 당을 상대로 9년 동안 벌인 처절한 나당(羅唐) 전쟁 이야기를 하면 신라가 사대주의적으로 통일한 것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기 때문에, 즉 자신의 신라 비판 논거가 일거에 날아가니까 상고사의 대단원이 되는 가장 감동적인 이 줄거리를 생략한 것인가?
 
  신라가 최전성기의 세계 최대 강국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그 뒤 당이 고구려·백제 땅을 차지해버리고 내친김에 신라마저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니 668~676년 사이 벌인 대당(對唐) 결전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영웅적 전쟁이었다. 서기전 480년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대군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막아내고 전멸한 사건에 감동하는 한국인들은 더 감동적인 대당 결전의 전개 과정을 잘 모른다. 그러니 신라가 세계 최강 대국에 기적적으로 이겨 한반도를 통일했으며 한반도가 안정되니 약 3세기에 걸쳐 동양에 평화가 도래하여 고대사의 황금기가 열리고 당시의 신라는 세계화된 개방적 국가가 되어 명실공히 세계 일류가 되었음을 알 턱이 없다. 스파르타 용사들의 패전(敗戰)엔 감동하면서 신라의 승전(勝戰)엔 침 뱉는 국민들을 만드는 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신채호이고, 한국 해군은 그의 김유신 말살 정신을 이어받자고 함정에까지 이름을 붙여준 것이 아닌가?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민족의 決定
 
신라의 삼국 통일을 ‘민족의 결정’이라고 긍정한 손진태.
  신라의 삼국 통일을 ‘민족의 결정’이라고 긍정한 학자는 손진태(孫晉泰)이다. 그는 해방 직후 펴낸 《한국민족사개론》에서 신채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학문적 깊이를 보여준다. 나당 전쟁의 의미를 이렇게 썼다.
 
  〈신라는 당과 연맹, 백제·고구려를 정복했으나 대동강~원산 이남의 반도를 통일한 것은 676년경이었으니 통일 대업 완성을 위하여 16년간 당군(唐軍)과 투쟁하는 고난을 겪었다. 당은 백제·고구려를 전복한 뒤 그 점령지를 모조리 자기의 소유로 하였다. 신라도 당이 속령시(屬領視)하여 경주에 계림도독부라는 것을 두고 문무왕을 그 도독에 임명하였다. 이에 순종하는 것은 신라의 통일 이상(理想)의 유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연개소문식 경동(輕動)을 경계하고 은인자중하여 외유내강 당을 대하여 외교적으로는 공순(恭順)을 표하면서도 당·거란·말갈의 연합군과 8년간 50여 차례 싸워 실력으로 반도 내의 당병(唐兵)을 점차적으로 구축(驅逐)하여 676년경 대동강 및 원산 이남의 반도를 완전히 점령하였다. 이 압박에 놀란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의 통일에 의하여 조선의 민족은 결정되었던 것이니 고구려 땅 만주의 토지와 주민은 조선 민족 계열로부터 점점 이탈하여 후세의 만주 민족과 조선 민족은 별개가 되었다. 조선 민족은 고려조와 이조 초기 세종조까지 서북과 동북으로 점점 영토와 인민을 획득하여 현재의 국경선을 이루게 되고 약간의 몽고 민족과 여진 민족을 포섭, 동화하여 그들을 조선 민족화하였다. 이리하여 이조 말년까지 약 1000만의 인구를 가졌던 것이다.〉
 
 
  김유신이나 《삼국사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
 
  나당 전쟁의 전개 과정은 《삼국사기》 문무왕조에 실려 있는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 한 편의 르포 기사처럼 묘사되어 있다. 요사이 기자가 쓴 것 같은 박진감과 처절함을 주는 이 글을 나는 민족사 최고의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편지의 필자가 문무왕이란 점에서 글의 무게가 다르다. 현장감과 함께 김유신, 문무왕의 인격이 생동한다. 한국 해군 지휘부에서는 《난중일기》와 이순신(李舜臣)은 읽겠지만 김유신이나 《삼국사기》를 읽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민족사 2000년 중 1000년 역사를 기록한 정사(正史)를 읽지 않는 것은 구약(舊約)을 읽지 않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신라인의 혼(魂)과 감성(感性)을 문학적으로 가장 깊게 파고든 두 분은 시인 서정주(徐廷柱)와 시조시인 김상옥(金相沃)일 것이다. 두 사람은 신라(新羅) 정신을 민족혼의 저수지로 보았다. 현실의 밭에서 물이 마르면 이 상상(想像)의 저수지에서 민족혼의 물을 퍼내어 한국인들의 찌든 영혼을 적심으로써 고난을 극복하고 더 높게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한 분들이다.
 
  지금 내가 김유신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지난 총선으로 무너진 한국 보수의 정신을 재건하는 한 방도가 신라 정신이 아닐까 해서다. 유럽의 르네상스가, 중세 기독교 문제의 해결책을 그리스-로마 정신에서 찾으려 한 것처럼 노예근성에서 헤어나지 못한 한국 보수의 정신적 쇄신은 ‘한국사의 로마’인 신라의 정신에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 세력과의 역사전쟁에서도 대한민국 지키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신라 지키기이다. 최초의 민족통일국가인 신라가 최초의 국민국가인 대한민국과 이어진다는 점을 간파한 김일성 세력은 당초의 신라 예찬론을 버리고 신라 죽이기로 표변하였다. 민족사의 패배 세력인 고구려와 지류인 발해와 이단인 북한 정권을 앞세워 신라와 대한민국을 같이 공격하니 우리는 신라에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서정주의 신라 정신
 
‘신라 정신’을 탐구했던 시인 서정주. 사진=조선DB
  서정주 선생은 6·25의 참화 속에서 신라 정신을 캐내 자신의 시(詩) 세계로 만들고 그것을 평생 붙들고 간 분이다. 1995년 《월간조선》과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51년부터 53년까지가 내게 있어 신라 정신의 잉태기였지. 6·25 전쟁 중 극심한 절망감 속에서 나는 ‘국난(國難)이 닥쳤을 때 우리 옛 어른들 가운데 그래도 제정신 차려 살던 이들은 난국을 무슨 슬기와 용기와 실천력으로 헤쳐왔던가?’ 하는 것을 절실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더듬거려 보던 끝에 신라 정신과 구체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야.”
 
  그가 말하는 신라 정신의 요체는 ‘멀리 보고 한정 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려는 영원성’이다.
 
  “인생행로를 제한받고 또 스스로도 제한하며 얼마만큼만 가고 말려는 한정된 단거리주의가 아니라 한정 없이 언제까지나 끝없이 가고 또 가려는 저 무원부지(無遠不至)주의. 신라인들에게서 우린 그걸 배워야 해. 그러면 불안과 불신과 반감과 충돌 따위를 훨씬 줄일 수 있겠지.”
 
 
  “민중에 아첨해도 곤란”
 
태종무열왕비의 돌거북. 사진=퍼블릭 도메인
  “이 천지(天地)에 대한 주인의식이 신라인들에게 작용해 통일로 이끌어간 거지. 하늘과 땅을 맡아 생활하는 주인으로서의 강한 책임 의식. 이 점이 조선 시대 유교가 우리 민족에게 약자(弱者)의 팔자와 분수에 다소곳할 걸 가르쳐서 망국(亡國)의 길로 유도한 것과 전혀 다른 점이지. 각 개인의 값이나 민족의 가치는 에누리당하자면 한정이 없고, 에누리만 해나가다가는 민족의 장래가 정말 암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나와 내 민족의 존엄성은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지. 하늘과 땅과 역사의 주인 된 자로서 말이네.”
 
  “민중을 억압하고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민중에게 아첨하고 추파를 던지는 것도 곤란해. 진심으로 민중과 일치하고 화합하려는 정신, 그게 중요하지. 신라에는 여러 훌륭한 어른이 많지만 본받을 만한 인물을 한 분만 꼽으라면 나로선 김유신 장군을 들겠어. 김유신 장군을 배워라! 고난을 앞장서서 짊어진 모습을…”
 
  신라 정신에 매료되었던 시조시인 김상옥은 《詩와 陶磁》란 산문집에서 이렇게 썼다.
 
  〈서양 사람의 종(鍾)은, 시간을 알리고 집회를 통고하는 하나의 연모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의 그것은 북과 함께 풍류를 주(奏)하는 중요한 악기다. 더구나, 신라의 에밀레종을 보면, 그 명(銘)에 일렀으되 원공신체(圓空神體)라 했다. 즉 ‘둥글고 빈 것은 신의 몸’이라 풀이할지니, 차라리 종을 악기라 하기보다 신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이렇게 신을 찾고 신을 대하는 마음으로 종을 주조(鑄造)했던지라, 그 보상화문(寶相華文) 속에서 울려 나오는 전설(傳說) 같은 신비한 음색(音色). 에밀레, 에밀레… 어찌 아기의 원혼(怨魂)이 울어 그 어미를 부른다 하리. 오직 예술에 순교(殉敎)하는 신라 정신을 다시 윤색(潤色)하여 불멸의 말씀으로 새겼음이니, 이 아니 묘(妙)한가.〉
 
  조각가 권진규는 ‘신라(조각)는 위대하고 고려는 정지되었으며 조선은 형식화되었다’는 평을 남겼다. 신라 정신을 형상화한 태종무열왕릉의 용맹한 돌거북과 조선조 왕들이 묻힌 동구릉(東九陵)의 움츠러든 돌거북을 비교하면 안다. 신라의 개방적 자주성이 6~8세기에 등장한 수많은 영웅 이야기와 예술품과 건축물을 통하여 장엄한 미학(美學)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은 다행이다. 다만 이를 느낄 수 있는 교양과 감수성이 있는가이다. 특히 국가 지도층이!
 
 
  한국인의 原型
 
이종욱 전 서강대 총장과 그가 지은 《김유신》.
  이종욱(李鍾旭) 서강대학교 전 총장(사학과 교수)이 2년 전에 쓴 《김유신》(지식산업사)은 평생을 신라사 연구에 바친 원로학자의 노작(勞作)이다. 그는 서문에서 “꿈을 꾸는 사람이 있어야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 신라에는 역사를 만들 거대한 꿈을 꾸고 한평생 목숨 걸고 노력하여 그 꿈을 이룬 사람이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김유신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했다.
 
  그의 꿈은 통일 대업인데 그 자신만이 아니라 나아가 신라사 그리고 한국사의 방향을 정하고 현재 한국·한국인을 만들어낸 웅대한 꿈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이 같은 거창한 꿈을 품었던 사람은 김유신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김유신이 삼국 통일을 통하여 한국인의 원형을 만들었고 우리 한민족은 그 틀 안에서 살고 있으며 따라서 김유신과 삼국 통일을 부정하는 것은 역사와 현실의 부정이요 조상 부정이란 것이다.
 
  그는 “1945년 해방 뒤 제대로 된 한국사 개설서 한 권 없던 상황에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불러오고자 한국사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과정에 한국사 연구자들이 신라의 삼한(三韓) 통합에 관한 역사를 왜곡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고구려가 민족 통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신라가 민족과 영토를 반으로 나누어 통일한 것이 민족의 커다란 불행이라거나,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청병(請兵)한 것을 사대사상에 사로잡혀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한국사는 반대 방향으로 갔을지 모른다는 주장도 했다.
 
  〈그들은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으면,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종성(宗姓)과 육부성(六部姓)을 가진 한국인은 그때 사라졌고, 그 나라에는 고구려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이 다수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신라 오리진의 한국인 스스로 자신의 조상인 신라인을 폄훼하고 사라진 남의 조상을 높이 받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 김춘추와 김유신을 반(反)민족적인 행위를 한 을사오적과 같은 인물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신라계 姓氏가 54%
 
  김유신 자신은 신라 최고의 관직을 차지했고,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성신(聖臣), 성인(聖人)으로 불렸으며 흥무대왕으로 추봉되는 등,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다. 그가 왕으로 세웠던 태종무열왕과 그 아들 문무왕은 삼한 통합을 이룬 왕이 되는, 엄청난 역사를 만들었다. 김유신의 자손들은 신라 시대에 대를 이어 복을 받고 관직을 차지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려·조선을 거쳐 지금도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는 본관을 가진 씨족이 번성해 있다. 김해 김씨는 1985년 조사에서 한국인 전체 4042만 명 가운데 377만 명으로 9.3%에 해당했다.
 
  1985년 실시한 인구 및 주택 센서스 결과 한국인의 275개 성(姓) 가운데 5대 성인 김(金)씨는 879만 명(이 가운데 김유신을 중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도 있다), 이(李)씨 599만 명, 박(朴)씨 344만 명, 최(崔)씨 191만 명, 정(鄭)씨 178만 명으로 이들을 합하면 2190만 명이다. 이는 당시 한국인의 54%에 달한다. 저자는 “물론 이 통계 수치를 그대로 믿자는 것이 아니지만 현재 신라인을 시조로 한다고 자처하는 한국인들이 다수인 것은 사실이고 이 같은 통계에 역사적 사실이 들어 있다고 본다”고 했다.
 
  〈이는 신라가 삼한 통합을 했기 때문이다. 김유신 스스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김유신의 꿈이었던 신라의 삼한 통합은 그 뒤 한국사의 주인공을 신라인의 후손으로 만들었다. 만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지금 그 나라 사람들 가운데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저자는 냉혹하게 현실론을 전개한다.
 
  〈정복자의 권리 행사에는 피정복자들을 노비로 삼는 일과 피정복자들의 재물 약탈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는 다른 문제들을 생각해본다. 정복한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 정책은 어떤 것이었을까? 신라의 정복자 권리 행사는 피정복 세력인 고구려와 백제 사람들을 신라인으로 만드는 일부터 시작되었음이 틀림없다. 우선 신라는 피정복국·피정복민들에 대한 정체성 말살을 시도했다고 본다. 백제와 고구려의 건국 신화를 인정하지 않고, 두 나라 왕실의 제사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 그 하나다.〉
 
 
  김유신 앞에서 머리를 들 수가 없다!
 
  백제나 고구려의 정치조직 자체가 사라졌고, 사회체제도 유지할 수 없었으며 두 나라의 문화도 기본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흔히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여 민족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렇게 보는 것을 망설여왔다고 했다. 무엇이 주(主)가 되고 무엇이 종(從)이 되었는가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백제나 고구려의 문화는 신라에서 소멸하는 과정을 겪었기에 대신라(大新羅)의 중심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없었다. 신라인들은 백제나 고구려의 문화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신라가 피정복 세력인 백제계와 고구려계 사람들을 신라인으로 편입하는 일은 다른 종족(種族) 사람들의 경우보다 쉬웠을 것이라고 했다. 저자(著者)는 그들 백제계와 고구려계 사람들이 대신라에서 신라인으로 자리 잡았기에 고려나 조선, 그리고 현재는 그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면서 “신라의 삼한 통합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는 민족의 용광로로서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면서 한국사를 한 차원 높여주는 계기였던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한국인들이 지금 중국 말을 쓰지 않고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668~676년 사이 문무왕·김유신·김인문 등 신라 지휘부가 당의 지배를 거부하는 결전에서 이긴 덕분이다. 이럼에도 한국 해군은 이 위대한 전쟁의 승장(勝將)으로서 한민족 형성의 기초를 놓은 김유신을 잊고 그를 민족반역자로 모함한 신채호와 스탈린의 소련에 충성한 공산주의자 홍범도 이름을 잠수함에 새겨 길이길이 기억하겠다 하고 있다. 이런 일이 이른바 보수 정권하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보수는 있지만 보수 정권과 보수 세력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김유신 앞에서 머리를 들 수가 없다.
 
 
  조선 성리학부터 신라-김유신 푸대접
 
  자주성과 상무정신을 잃지 않았던 고려 시대엔 땔나무 하는 아이들과 소 먹이는 총각도 김유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삼국사기》). 사대적 명분론이 강한 주자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수용한 조선조에 들어와서 신라와 김유신은 푸대접을 당했다. 조선의 유생(儒生)들은 김유신이 감히 부모 나라인 당에 저항했다고 분개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주자학의 위선적 명분론을 이어받은 좌익 사조(思潮) 속에서 김유신과 신라는 계속 학대를 당하고 있다. 신라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70여 년인데 조선조와 좌익을 합치면 약 600년이라 역사전쟁에서 불리하다. 신라 1000년을 대한민국에 더해야 민족사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주류(主流)로서 보수 세력은 이단(異端) 세력을 꺾고 역사를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민족사의 로마’ 신라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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