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발자취

정의채 몬시뇰이 남긴 세 이야기

“말할 수 없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폐허가 된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 “그때 그분(이병철)이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 “중대하고 필연적인 죽음의 정체를 모르기에…”(박경리)
작년 12월 27일 정의채 몬시뇰이 선종했다. 장례미사에 앞서 명동성당 지하경당에 고인이 누워 있다.
  한국 가톨릭의 지성(知性)이라 불린 정의채(鄭義采·세례명 바오로· 1925~2023년) 몬시뇰이 구랍 12월 23일 선종(善終)했다. 사제 수품 70년이 되는 해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정 몬시뇰은 우리 시대의 어른이었다. 대통령 위촉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이자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으로 진보 정권, 보수 정권 당시 골고루 직언(直言)을 했다.
 
  무엇보다 가톨릭대·서강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아시아가톨릭철학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 상임고문을 역임하는 등 학문적 업적과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1975년 펴낸 《형이상학》 초판은 서울대 철학과 교재 등으로 쓰이는 등 총 12쇄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당시 형이상학과 관련한 서적이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한 해 1700여 명 영세 베풀어
 
1955년 12월 18일 부산 서대신동성당 보좌신부 시절의 정의채. 오른쪽이 메리놀 선교회 권요셉(Fr.J.Conors) 신부.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을 겪으며 피란살이 신학교 삶을 거쳐 사제직에 올라 임시수도 부산에서 보좌신부 생활을 시작했다. 근 4년간의 보좌 시절 중 많을 때에는 1700여 명의 신자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그는 생전 기자에게 당시를 이렇게 말했었다.
 
  “한 해 1700여 명이라는 영세자를 냈지만,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때 장소가 마땅치 않아 비가 올 때는 거적을 쓰고 두꺼운 종이로 머리와 몸을 가려야 했어요. 고무신을 신고 땅 위에 서서 교리를 받았습니다.”
 
  6·25 전쟁 직후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1700여 명 세례는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보좌신부 서품을 받은 첫해, 그러니까 1953~54년 한 해 동안 100명의 영세자를 냈다. 둘째 해(54~55년)에는 500명, 셋째 해(55~56년)에는 700명의 영세자를 냈다. 그리고 넷째 해(56~57년) 2000명의 예비자가 운집해 이 중 1700명의 영세자를 내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지성인 교리반’을 운영하며 대학교수, 교육계 인사, 법조인, 문인, 정치인, 군 고위 인사 등에게 영세를 주었다. 기자에게 한 정 몬시뇰의 말이다.
 
  “돈이 없어 성당 건축은 엄두도 못 냈죠. 저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포교성성)’ 총무인 시지스몬디(Sigismondi) 대주교(훗날 추기경)에게 ‘교구나 선교 수도회가 선교사를 보낼 수 없으면 수도회에 재력이 있으니 무이자로 10~20년간 대여해주면 한국이 부흥해 후일 갚을 것’이라고 했어요.
 
부산 피란 시절 아이들과 함께 선 정의채 신부.
  그리고 ‘성직자 지망생이 많다’는 말도 곁들였습니다. 이후 많은 가톨릭 선교단체와 수도회가 한국을 찾았습니다. 유럽에서는 사제나 수도자 지망생이 많이 줄어드는데 한국은 성소(聖召) 지망생이 많은 것도 작용했습니다.”
 
  1957년, 정의채 몬시뇰은 더 높은 지성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장도(壯途)를 축하하기 위해 단층의 부산역사(驛舍)에 2000여 명의 신자가 운집해, 역장이 직접 나와 역내를 정비했다고 한다.
 
 
  어차피 논문은 실패로 알고 있다가…
 
2019년 3월 《월간조선》과 인터뷰 당시 정의채 몬시뇰의 모습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남긴 24가지 질문에 대해 답했다.
  로마 우르바노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1961년,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라는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교황청은 그를 가톨릭 교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 중 하나인 라테란대학 교수로 발령을 수차례 냈으나 정 몬시뇰은 고사했다. “폐허가 된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정 몬시뇰은 자신이 박사 학위를 받은 과정에 대해 기자에게 비교적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흥미로웠다.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 20세기 위대한 토마스주의자[thomisme·성(聖) 토마스 아퀴나스에 영향을 받은 철학·신학적 사조를 신봉하는 이들]인 C. 파브로(C. Fabro) 교수께 논문 지도를 의뢰했다. 한 달 동안 계속 파브로 교수의 강의가 끝나는 강의실 문 앞을 가로막고 강청(强請)하는 일대 시위를 폈다. 결국 허락을 받았다.
 
  논문 계획서를 제출하니 일별(一瞥) 의외라는 듯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매주 쓴 것을 갖고 파브로 교수를 만나는데 몇 년간 조언 한마디 없었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은 칭찬도 받고 견책도 듣는데 말이다. 줄곧 정 몬시뇰에게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논문이 다 끝날 무렵에서야 느닷없이 프린트를 넘기라며 어느 장의 첫머리를 그 앞장의 끝으로 보내라고 조언을 했다. 정 몬시뇰의 회고다.
 
  “저는 어차피 논문은 실패로 알고 있다가 너무 놀라 ‘그렇다면 왜 그 긴 시간 아무 말씀도 없었느냐’는 항변 아닌 놀람의 반항조로 물었어요. 파브로 교수는 ‘150명 이상의 세계 수재(秀才)들의 논문을 지도했는데, 전혀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고방식과 투시력을 드러내, 어떤 학자나 논문 작성자, 저술가도 그런 사고를 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결론을 낼지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정 몬시뇰은 기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남겼고, 그가 펴낸 대담집[《인류공통문화 지각 변동 속의 한국》(전 3권)], 철학서적(《형이상학》 《존재의 근거문제》 《철학의 위안(번역)》)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의 말씀 중 기자에게 큰 울림을 준 말씀을 기록으로 남긴다. 지면상의 이유로 ‘~습니다’를 ‘~이다, 했다’로 고쳐 소개한다.
 
 
  ①“내 가슴에 총을 겨누고…”
 
  “1949년 5월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덕원 수도원이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고, 6·25 발발 이후에도 남쪽으로 가지 못하고 북쪽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를 꿈꾸었던 모든 희망이 사라져 암흑세계에 갇힌 게다. 나는 순간순간 죽음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0월 하순에 접어들 무렵, 북한 전역은 유엔군의 공습으로 마비가 됐다. 인민군은 퇴각 중이었고, 무차별적 반동분자 소탕으로 집집마다 곡(哭)소리가 났다. 같은 마을에 사는 북한 노동당 ‘세포’위원장과 간부급에게는 총이 주어져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마을 뒷산 능선을 타고 이웃 동네 친척 집으로 피했다. 인민군 부상병인 5촌 조카의 군복을 빼앗다시피 해서 갈아입은 채 다시 도망을 쳤다. 그때 동네 노동당 세포위원장이 10m 뒤에서 총을 쐈는데 다행히 비켜갔다. 하느님이 신부가 되려는 이 ‘정의채’를 도운 것이 아닐까?
 
  서해안을 따라 걷다가 40리가량 북쪽에 위치한 정주 읍내로 들어갔다. 거기서도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또다시 북쪽으로 30리가량 걸어 고모 댁을 난생처음 찾았다. 그날 저녁이 되니 숨어 있던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다. 그래서 고모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그 동네를 나왔다. 나중 듣기로, 내가 떠난 뒤 7~8명의 마을 청년들이 모두 체포돼 모래사장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무작정 정주읍을 향해 걸었는데, 날은 어두웠지만 달은 유난히 밝았다. 읍으로 가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앞에서 인민군복을 입은 두 사람이 다가오더니 ‘거기 꼼짝 말고 서라’고 했다. 순간 ‘이제 최후를 맞겠구나’ 하고 느꼈다. 한 사람은 대위고 다른 사람은 상사쯤 되어 보였는데, 상사가 내 가슴에 총을 겨눴고 대위는 나를 심문했다.
 
 
  ‘그만하면 됐으니…’
 
1952년 부제 수품을 받은 정의채 신부. 오른쪽은 노기남 대주교다.
  대위는 ‘동무는 누구며 왜 이 시간에 어디를 가느냐’고 다그쳤고, 나는 차분하게 ‘후퇴하는 인민군인데 신의주로 집결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면 ‘왜 혼자냐’고 묻기에 ‘뿔뿔이 헤어졌다’고 했다. ‘왜 지금 이 시간이냐’고 하기에 ‘낮에는 공습으로 숲속에서 잠이 들어 늦었다’고 했다. ‘그러면, 무슨 부대 소속이냐’고 물었는데 ‘이천몇백 부대’라고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아마 그 대위는 내가 인민군이 아닌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순간, 성령님과 성모님이 도우셔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준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위는 ‘빨리 가서 본대에 합류하시오’ 했는데 상사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이 동무를 본부로 데려가 신분을 더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사는 두 번, 세 번 완강하게 나를 다그쳤다. 그러자 대위는 ‘그만하면 됐으니 빨리 갈 길을 가자’고 명령하듯이 말했다.
 
  그들과 헤어져 나는 마구 걸었다. 갈 곳도 없었다. 노끈으로 만든 묵주로 감사기도와 간구기도를 드리며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그 길에서 우연히 고모님 댁에서 만난 청년과 동행하게 됐는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떠나고 마을 청년들이 모두 총살당했는데 그는 옆 사람이 총에 맞는 순간, 같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는 게다. 총 맞은 사람의 피를 같이 뒤집어쓴 채 말이다. 그랬더니 인민군이 ‘한 방에 둘이 죽었네’ 하며 같이 땅에 묻어버리더란다.
 
  남으로 내려가며 내 기도는 더 절박해졌다. 처음에는 사제가 되어 1년 만이라도 사목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사정이 급박해지자 1개월만, 더 급박해지자 일주일만, 죽음이 경각(頃刻)에 달린 순간에는 하루만, 한 번만 미사를 봉헌하고 죽게 해주소서, 하고 혼신(渾身)의 힘을 다해 기도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한 번만’ 미사를 드리게 해달라는 기도가 66년간(기자와 만났을 때가 2019년) 기도하는 삶을 살게 만들었다.”
 
  정 몬시뇰은 이런 말도 했다.
 
  “나와 같이 말할 수 없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 이렇게 큰 것이거늘 다른 사람에게야 얼마나 더 큰 것이겠는가. 나는 그저 ‘무한히 자비하신 주님은 찬미받으소서’의 외마디 기도 외에 지금 달리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②이병철 회장이 전해준 24가지 질문
 
  “이병철(李秉喆·1910~1987년) 회장의 문제(신과 구원에 관한 24가지 질문)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당시 천주교에서 요직을 거치며 사회에도 폭넓은 교류를 갖고 있던 박희봉(세례명 이시도로·1924~1988년) 신부에게 전해 받은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시기 전인 1987년 9월 중순경이었는데 박희봉 신부를 통해 인생을 정리하고 싶어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나는 그보다 몇 년 전 이병철 회장의 형님인 이병각씨의 임종을 도와 천주교에 귀의시켜 세례를 받고 세상을 떠나게 한 일이 있었다.
 
  또 한 번은 이병각씨에게 교리 설명을 위해 이병각씨 자택 사랑채에서 대화를 나눌 때, 마침 이병철 회장이 형님의 병문안차, 안채를 찾은 것을 보았기에 나는 형제간의 말씀에 지장이 될까 싶어 빨리 자리를 떠났다.
 
  후에 생각해보니 그 바쁘신 분이 하필이면 형님의 교리 시간에 병문안을 오신 것은 (교리 시간은 미리 정해진 것이었기에 일부러 나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치밀하고 만사에서 정확하고 시간의 분초를 아끼시는 분이 모르실 리 없었을 게다) 그분 형님에게 교리 시간을 물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정이 어찌 되었건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그런 만남의 제안이 왔기에 그냥 불쑥 만나 이런저런 말을 하기보다는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문제점을 정리해서 보내주시면 나도 준비하여 심도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전했다.
 
  이런 말들이 박희봉 신부를 통해 전해진 얼마 후인 10월 초순, 나는 누구나 죽음 앞에서 당하는 고통스러운 인생 마지막 길 문제들을 논리 정연하고 놀라운 통찰력으로 광범위하게 제시하여 또박또박 필경(筆耕)한 24문제의 5장 질문지를 받게 되었다.
 
  이런 문제집을 받고 이 회장과 나는 만날 날과 시간을 박희봉 신부를 통해 조절하던 중, 이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치료를 받고 회복된 후에 시간을 다시 조절하자는 말을 전해 받았다. 나는 그분이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지만, 동·서 명의(名醫)들의 치료를 받고 있기에 며칠간 치료를 받으면 나을 것이라는 말씀도 전해 들었다. 또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분이 암인 것은 몰랐고 더욱이 말기라는 것을 몰랐기에 호전의 좋은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내가 그때 그분이 세상을 떠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그분을 찾아가서 내게 보낸 문제들을 풀고 세례를 베풀어 하느님께 가시는 길을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병은 급속도로 진행된 듯하다. 11월 19일 그분의 별세(別世)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내 생각에 이 회장은 구원을 받았다고 본다. 왜냐? 마지막에 길을 찾았는데 정상적으로 길을 열 수 있는 시간을 못 가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남긴 질문 24가지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필경사에게 시켜 작성한 신과 인간에 대한 24가지 질문이다.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1)기독교(천주교, 개신교) 2)유대교 3)불교 4)회교(마호메트교) 5)유교 6)도교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 종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17.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 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기도 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가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폴란드 등 동구(東區) 제국(諸國), 니카라과 등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23. 천주교 일부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③죽음과 대면한 소설가 박경리에게 세례를
 
  “박경리(朴景利·1926~2008년) 선생은 2008년 5월 5일 별세했다. 그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그의 외동딸 김영주(소화데레사)씨와 같이 6개월간 나에게 교리를 배우고 ‘대데레사’라는 이름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분은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지 1년여에 뇌졸중으로 서울 아산병원 중환자실에서 2008년 4월 30일 병자의 성사(9종부성사)를 받고 임종하였고 5월 7일 수요일 오전 10시 영안실에서 나의 영결미사 집전으로 저세상으로 마지막 길을 가셨다.
 
  나는 당시에 박경리 선생의 글을 받으러 정릉으로 가는 《가톨릭시보》(지금의 《가톨릭신문》) 기자에게 별생각 없이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다. 나는 쓰는 법도 배울 겸 우리네 사상의 흐름도 짚어볼 겸 이런 글 저런 글들을 읽을 때였는데 박 선생이 연재하던 글과 그분의 단편을 읽으면서 글이 참 깨끗하고 토속적인 것이 퍽 마음에 와닿았었다.
 
  그 말씀을 전했더니 박 선생은, 그런 당신의 글이 그분의 표현대로라면 ‘그런 승방(僧房)에서까지 읽힌다고요?’ 하며 놀라시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말들이 기자를 통해 2~3회 오갔는데 어느덧 크리스마스 때가 되어 인사로 크리스마스 카드에 아기 예수 탄생의 축하와 하느님의 은혜를 빈다는 몇 자의 글을 적어 보내드렸다.
 
 
  無知한 죽음 앞에서…
 
  얼마가 지났을까 박 선생으로부터 《Q씨에게》라는 책 한 권이 전달됐다. 제목이 특이해 펼쳐 보았더니 여러 단편 묶음이었다. 그중 한 대목에 내가 전한 크리스마스 카드에 대한 몇 줄 글이 있었다. 그 내용은 난생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았고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 그런 분의 축복까지 받아 무척 고마웠다는 말씀이었다. 그에 대한 감사의 말씀이 전해지며 혜화동 가톨릭신학대학에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때 나는 성직자의 정복, 즉 수단(검은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불교에 많이 젖어서였을까 그분은 그런 나를 무척 좋게 보았던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대화는 단도직입적이었다. 남녀 사이를 분탕질하는 사랑이 아닌, 순수한 인간성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소설로 대성하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분은 자신의 고민스러운 말씀을 솔직 담백하게 털어놓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문제였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하는데 그것이 요절의 형태이건 천수를 다한 것이건, 자살이건 수많은 형태의 죽음과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해 전혀 무지인 상태에서 무엇이라 아는 척 써놓으면 위선이고 또 모르쇠로 일관하려니 글이 안 된다는 식의 말씀이었다. 서구의 큰 문인들은 죽음과 마주쳐 그야말로 죽기 살기의 피투성이 사투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인간 누구에게나 중대하고 필연적인 죽음의 정체를 모르기에 무엇이라 할 수 없어 고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럴 때 어떻게 처리하시느냐고 물었더니 죽음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우회하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죽음의 문제이면 혹시 내가 좀 도와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했더니, 반색하시며 그 문제의 해결이라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6개월간 매주 한 시간씩 시간을 낼 수 있으시냐고 했더니 당신 딸과 같이 해도 되는 것이냐기에 더욱 좋은 일이라고 해 6개월간 명동 ‘지성인 교리반’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분은 성실한 분이었다. 당시 지성인의 특징은 일단 약속한 것은 꼭 지켰기에 6개월간 두 모녀가 참석해 가톨릭 영세를 하게 된 시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분은 교리적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심정적으로 죽음 문제의 교리 설명이 와닿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그 정도에서 물러설 듯한 기색을 내비치었다.
 
 
  신앙 안에서의 죽음의 이해와 극복
 
  그때 나는 그분이 소설을 깊은 심성적 흐름에서 쓰는가 싶어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의 다른 면을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명동의 아피(A.F.I.)라는 가톨릭의 국제 여성 교류 단체에서의 교리반이 끝난 후, 박경리 선생이 딸과 같이 커피 대접을 받게 하였다. 그들을 대접한 회원은 20대의 아리따운 프랑스 여인이었다. 그 회원은 프랑스의 좋은 학벌과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분은 손수 커피와 차를 끓이고 케이크를 준비하여 대접을 하였다. 박 선생이 의외의 대접을 받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그분의 출신과 학문적 배경을 설명하며 당시 아피 단체는 수도자는 아니지만 수도자와 비슷하게 자기 일생을 하느님께 바쳐 한국과 같이 가난하고 고통을 많이 받는 나라에서 일생을 헌신한다고 했다. 그 원동력은 죽음을 넘어서의 세계, 즉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이 봉사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신앙 안에서의 죽음의 이해와 극복은 놀라운 힘을 낸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그런 현실과 설명이 박 선생님을 감동시킨 듯했다. 결국, 박 선생은 가톨릭교회의 깊은 영성을 개척한 스페인 ‘아빌라의 대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
 
 
  스페인 ‘아빌라의 대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정의채 몬시뇰이 2008년 5월 7일 오전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소설가 고(故) 박경리 선생의 추도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오른쪽이 박홍 신부(전 서강대 총장)다. 사진=뉴시스
  이런 영세가 확정된 후, 또 한 가지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흥미로운 전무후무한 사건이 발생했다. 영세 전날, 나는 준비차 그분의 정릉 자택을 찾았다. 박 선생은 나를 마당 한 모퉁이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돌로 얼기설기 세워진 조그마한 제단이 있었다. 박경리 선생의 노모님이 딸이 인생의 중대한 계기(세례)를 맞는다니 그 전날에 좋은 일만 있기 위해 고사를 정성껏 지냈다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전에 듣도 보도 못 했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딸이 은총 많은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잘 받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에서 우상시되는 고사를 지낸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박 선생이 조금은 미심쩍어 하기에, 나는 그저 오매불망 딸이 잘되기만을 기원하는 지고한 어머니의 사랑과 치성이고 그런 것밖에는 더 좋은 것을 모르시는 것이니 고마운 일이라고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동양의 격언도 상기시켰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축일(5월 4일) 다음 날 5일에 박 선생의 영혼을 당신이 계시는 아버지의 거처로 불러 올리셨다. 진정 복된 죽음이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하다가 죽음이 무엇이냐는 40년 전 물어왔던 거목의 죽음의 길을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사제로서 마음의 착잡함과 뿌듯함과 보람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박경리 대데레사 선생님,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아멘.”⊙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2405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북스토어
프리미엄결제
2020년4월부록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