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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좋다 / 2030 부산의 비전 ‘유라시아 플랫폼을 열다’

재미있게 읽는 세계박람회의 역사

인류 발전을 견인해온 세계박람회 / 1851 런던박람회부터 2030부산세계박람회까지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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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진보시키고, 전 세계 모든 나라의 평화와 유대를 강화할 것입니다.”
최초의 세계박람회인 런던박람회(1851)를 위해 지어진 전시장 ‘수정궁’.
  아이스크림 콘, 토마토케첩, 텔레비전, 미니 스커트, 페리스 휠(대관람차), 놀이공원의 공통점은? 바로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됐다는 점이다. 1851년 처음 시작, 172년의 역사를 지닌 세계박람회는 매회 인간과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세계박람회에서 인류는 미래를 만나왔다.
 
 
  1851년 런던박람회로 첫 시작
 
  현재와 같은 형태의 세계박람회는 1851년 런던박람회가 효시(嚆矢)다.
 
  1851년 5월 1일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런던박람회 개막식이 열렸다.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1819~1901년)의 남편 앨버트 공은 연설 도중 이런 말을 했다.
 
  “세계박람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진보시키고, 전 세계 모든 나라의 평화와 유대를 강화할 것입니다.”
 

  인류의 ‘진보’와 ‘평화’는 지금까지 세계박람회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로 남아 있다.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남극을 포함한 모든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펄럭이는 영국 국기 유니온 잭에 하루종일 해가 비추는,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런던박람회는 대영제국의 위용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계기가 됐다.
 
  원래 영국은 세계박람회 개최에 소극적이었다. 자국의 산업 기술이 외국으로 유출될까 빗장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프랑스에서 국제박람회를 개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 사실을 알자 영국이 선수를 쳤다. 앨버트 공이 직접 나섰다. 박람회 조직위원회 명예회장을 맡아 후원금 모금에 앞장섰다.
 
  당시 출품된 물품 중엔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는 브랜드가 여러 개 있다. 찰스 굿이어의 고무 타이어, 새뮤얼 콜트의 총기류, 매코믹이 출품한 농기구가 대표적인 예다.
 
 
  에르메스와 루이뷔통 소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오른쪽). 앨버트 공은 런던박람회(1851) 개최를 지휘했다.
  4년 후인 1855년 파리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34개국이 참가한 파리박람회는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보르도 와인 공식 등급’과 ‘박람회에서의 미술품 전시’다. 오랜 라이벌이었던 영국이 공업이 발달한 데 반해 프랑스는 농업에 비교우위가 있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있던 보르도 와인에 주목했다. 세계박람회를 앞두고 등급 체계를 정했다. 당시에 만든 보르도 등급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세계박람회에 ‘미술의 전당’을 따로 세워 조각과 회화 작품을 선보인 것도 특징이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0년)의 작품이 큰 사랑을 받았다. 이후의 세계박람회에도 미술 작품들이 소개되는 전통이 이어졌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Hermes)’와 ‘루이뷔통(Louis Vuitton)’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세계박람회이기도 하다.
 
  1862년 다시 영국이 런던에서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초기부터 난항을 겪은 행사였다. 첫 세계박람회를 이끌었던 앨버트 공이 42세의 나이로 병사(病死)했다. 사촌 남매 사이기도 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은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다. 슬픔에 빠진 빅토리아 여왕은 세계박람회 개막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중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6개월 동안 610만 명이 입장했다. 영국은 두 번(1851·1862년)의 세계박람회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세계박람회를 열지 않았다. 세계박람회의 기능 변화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 이전까지 세계박람회는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국력을 과시하고, 대내적으로는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했다.
 
  영국은 두 번의 세계박람회를 통해 당대 최고의 제국임을 과시했다. 더이상 대국임을 추인받을 이유가 없었다. 막대한 예산을 들일 바엔 인도박람회 등 소규모 박람회를 열고, 도시 빈민을 구제하는 편이 나았다. 반면 다른 제국들은 달랐다. 프랑스의 경우 파리에서만 총 7번(1855·1867·1878·1889·1900·1937·1947년)의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약 11년 주기다. 이 때문에 한때 ‘발전 주기상 박람회는 같은 도시에서 11년 주기로 개최하는 게 적절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1889년 파리박람회가 열렸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였다. 이때 ‘에펠탑’이 등장했다. 박람회장 입구로 세워진 에펠탑은 원래 1910년까지만 세워두고 철거할 예정이었다. 세계박람회가 끝난 후에도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자 영구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출품된 발명품 중 에디슨의 컬러전구와 축음기가 단연 주목을 받았다.
 
 
  세계박람회 통해 도시 개발
 
  1876년, 미국이 세계박람회 역사에 첫 등장한다.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 도시들을 바꿔가며 세계박람회를 열었다. 필라델피아(1876년), 시카고(1893년), 세인트루이스(1904년), 샌프란시스코(1915년), 시카고(1933년), 뉴욕(1939년), 시애틀(1962년), 샌안토니오(1968년), 스포캔(1974년), 녹스빌(1982년), 뉴올리언스(1984년) 등 총 11곳이다.
 
  필라델피아박람회(1876년)는 미국의 독립선언 100주년을 기념했다. 미국이 이제 강대국이 되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행사였다. 그레이엄 벨의 전화기와 필로 레밍턴의 타자기, 하인즈 케첩이 등장한 전시회이기도 했다.
 
  시카고 박람회(1893년)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렸다. 실제 400주년이 되는 해는 1892년이지만 준비가 늦어져 1983년에 열렸다. 이때 바로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놀이공원이 등장한다. 미드웨이 플레이선스(Midway Plaisance)다. 서커스단, 음악회, 스트립쇼, 카지노, 술집, 식당가 등이 한곳에 모여 있는 그야말로 ‘놀이동산’이었다.
 
  이곳의 랜드마크는 바로 페리스 휠(Ferris Wheel)이다. 높이 80.4m의 원형 바퀴에 36개의 관람차가 부착돼 천천히 돌아가는 대관람차다. 건축가 조지 페리스가 고안해 지었다. 페리스 휠은 큰 인기를 끌었다. 세계박람회 개막 7주 후에 완공됐는데, 폐막 때까지 4개월 10일 동안 160만여 명이 탑승했을 정도다. 폐막 후엔 해체된 후 세인트루이스박람회(1904년)에 다시 세워졌다. 이후 세계 각국은 누가 더 큰 대관람차를 짓는지 경쟁에 돌입했다. 2023년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대관람차는 두바이의 ‘아인 두바이(Ain Dubai)’다. 높이 250m로 현대건설이 지었다. 시카고박람회 이후 세계박람회장엔 놀이공원이 필수적으로 들어섰다.
 
 
  세계 최초의 TV 중계… 1939년 뉴욕박람회 개막식
 
  뉴욕박람회(1939년) 개막식은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막 연설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미국 전역에 전해졌다.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중계였다.
 
  전기·전자기업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가 개발한 기술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송신탑을 이용해 NBC가 이룬 위업(偉業)이다. 텔레비전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1967년, 캐나다에서 몬트리올박람회가 열렸다. ‘Exposition(박람회)’의 줄임말인 세계박람회(Expo)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니 스커트’를 전 세계에 알린 세계박람회이기도 하다. 짧은 치마를 입고 있는 영국 전시관의 여성 안내요원들의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미니 스커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많은 나라의 전시관에서 안내요원의 유니폼을 미니 스커트로 바꿨을 정도다. 참고로 대한민국 전시관은 미니 스커트 행렬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렇듯 세계박람회는 백화점, 놀이공원, 미술관 탄생에 영향을 미치며 근대를 형성했다.
 
 
  세계박람회와 ‘자포니즘’
 
  1970년 세계박람회 역사에서 동아시아 시대가 시작됐다. 일본이 열었다. 세계박람회 개최는 일본의 오랜 꿈이었다. 일본은 세계박람회 역사의 초기부터 등장했다. 런던박람회(1862)에 일본의 칠기, 목판화, 칼 장식품이 출품됐다. 정식 참가는 아니었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보낸 사절단은 개막식에 직접 참석해 현장을 지켜봤다. 그때 기록한 상세한 관찰기가 남아 있다.
 
  1867년 파리박람회에 일본은 정식으로 참가한다. 종이, 의복, 칠기, 인형, 다색 목판화 등을 출품했다. 전시장에 찻집을 차렸는데 크게 화제가 됐다.
 

  파리박람회를 기점으로 유럽에서 일본 문화가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포니즘(Japonism)’이다. 지금의 한류(韓流) 격이다. 일본의 채색 판화와 풍속화인 우키요에는 프랑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빈센트 반 고흐, 에두와르 마네, 클로드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엔 일본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국제박람회를 열기로 결의한다. 일본 정부는 1940년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국제박람회를 열기로 하고 입장권까지 팔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을 벌이면서 세계박람회 개최는 멀어졌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렸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일본은 국제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흔히 3대 글로벌 행사로 세계박람회, 올림픽, 월드컵을 꼽는다. 세계박람회와 스포츠 행사는 차이가 크다. 일단 장기간 열린다. 올림픽은 2주가량 열리는 데 반해, 세계박람회는 3개월에서 길게는 반년 동안 열린다. 경제력은 물론 과학 기술, 문화의 수준이 올라가야 치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사회체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치러봤지만 세계박람회는 한번도 치러보지 못한 나라들이 있다.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등이다.
 
 
  대성공한 오사카박람회
 
  1970년 오사카박람회가 열렸다. 대성공이었다. 76개국, 4개 국제기구가 참가했다. 국제박람회가 열린 이래 가장 큰 규모였다. 183일간 6422만여 명이 방문했다. 국제박람회 역사상 최다 관람객이다(이후 2010 상하이세계박람회가 그 기록을 경신한다).
 
  오사카박람회를 통해 일본은 100년의 꿈을 이뤘다. 패전 25년 만에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세계박람회 기간 중엔 내셔널 데이, 스페셜 데이 등을 계기로 각국의 원수(왕·대통령·총리)와 정부의 주요 인사가 세계박람회 행사장을 찾는다.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전범국으로서 오랜 기간 국제사회와 단절됐던 일본은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국제사회로 완전히 복귀했다. ‘높은 기술력이 뒷받침된 기술 강국,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 온화하고 친근한 국민’이라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이때 형성됐다.
 
  다음은 중국 차례였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하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다. 2년 뒤엔 2010 상하이세계박람회를 연다. 주제는 ‘더 나은 도시-더 나은 삶’. 190개국, 56개 국제기구가 참가했다. 역대 최다 규모. 북한과 대만이 처음으로 참가했다. 흥행 면에서도 대성공이었다. 184일 동안 7308만 명이 행사장을 찾았다. 오사카(1970년)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중국은 상하이세계박람회를 통해 개혁·개방 30년의 성과를 당당히 과시했다.
 
 
  1893년 박람회 데뷔한 조선
 
한국이 개최한 최초의 엑스포인 1993년 대전엑스포의 상징 한빛탑. 사진=조선DB
  한국은 어떨까. 한국도 세계박람회와 인연이 깊다. 시작은 1883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기술공업박람회다.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 일행은 보스턴박람회를 방문해 화병, 주전자 등 특산물을 전시물로 출품했다. 국제 규모가 아닌 소규모 전시였지만 세계박람회를 경험하기엔 충분했다.
 
  처음으로 공식 참가한 세계박람회는 1893년 시카고박람회다. 고종의 지시 아래 조선 대표단원들은 미국으로 떠난다. ‘제조와 교양관’ 내 25평 공간에 전시실을 차렸다. 기와를 구워 장식하고 가마와 관복, 조총, 장기판, 연 등을 전시했다. 개막식 날 미국전시관 앞에서 조선 아악을 연주했다.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고 있었다. 케이팝(K-pop)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다.
 
  대한제국은 1900년 파리박람회에도 참가한다. 시카고박람회 때와 달리, 독립적인 국가관을 세웠다. 1368㎡의 대지에 들어선 ‘대한제국관’은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목조 한옥으로 지었다. 설계는 프랑스인 페레(E. Feret)가 맡았다. 고종의 어진(御眞)을 걸고 생활용품들을 전시했다.
 
  한반도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다. 한국은 잠시 세계박람회장에서 퇴장한다.
 
  대한민국이 다시 세계박람회에 등장한 건 1962년 시애틀박람회에서다. 326㎡ 규모의 전시관을 당당히 자력으로 지었다. 식민지배와 전쟁의 참화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전 세계에 알렸다. 이후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 박람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드디어 1993년 한국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대전세계박람회’다. 대전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세계박람회라는 이름이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계박람회는 두 종류로 나뉜다. 등록박람회와 인정박람회다. 세계박람회를 관장하는 BIE는 1996년 규약을 개정했다. 세계박람회 주기를 5년으로 하되, 0과 5로 끝나는 해에 열기로 했다. 또한 5년 주기로 열리는 세계박람회는 ‘등록박람회(registered exposition)’로, 등록박람회 사이에 열리는 작은 규모의 박람회는 ‘인정박람회(recognized exposition)’로 나누어 정리했다.
 
  새 규정은 2000 하노버세계박람회부터 적용됐다. 2005 아이치, 2010 상하이, 2015 밀라노, 2020 두바이, 개최 확정된 2025 오사카·간사이로 이어진다. 이사이에 2008 사라고사, 2012 여수, 2017 아스타나 등 인정박람회가 열렸다.
 
  BIE는 공식적으로 등록박람회는 ‘월드엑스포(world expo)’로, 인정박람회는 ‘전문엑스포(specialized expo)’로 부른다. 월드엑스포와 전문엑스포는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차이가 꽤 크다. 개최 기간을 보면 월드엑스포는 6개월 이내, 전문엑스포는 3개월 이내로 열게 되어 있다. 월드엑스포는 인류와 미래에 대한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전문엑스포는 특정 분야를 다룬다.
 
2030부산세계박람회 부지로 활용될 부산 북항 일대 예상 조감도. 총 343만㎡로 축구장 480개 면적이다.
  박람회장 규모도 다르다. 월드엑스포는 규모의 제한이 없다. 전문엑스포는 25만㎡ 이내로만 지을 수 있다. 월드엑스포에서는 개최국이 제공하는 부지에 참가국이 자국 경비로 전시관을 짓는다. 전문엑스포는 개최국이 지어서 제공한다.
 
  1993 대전세계박람회와 2012 여수세계박람회 모두 전문엑스포(인정박람회)였다. 부산이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에 성공하면 한국은 처음으로 세계박람회(등록박람회)를 치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월드) 엑스포, 올림픽, 월드컵을 모두 유치한 세계 7번째 나라가 된다. 지금까지 세 행사를 모두 치른 나라로는 프랑스, 미국, 캐나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있다.
 
  사실 중요한 건 통계가 아니다. 세계박람회를 치르며 한국은 인류의 미래와 화합에 대해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2002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인이 한마음이 되는 순간을 경험했다면, 2030부산세계박람회를 통해서는 사상적으로 한 단계 더 높아질 수 있다. 한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어떤 국가인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통찰하고 단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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