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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이승만·트루먼 동상 만든 김영원 교수

“예술가는 무리 지어 다니는 이리 떼가 아니라, 山中虎처럼 혼자 지내는 존재”

글 : 장원재  ㈜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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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동상은 ‘세계를 보는 정치가’, 트루먼 동상은 결단력 담아”
⊙ “공이 크면 허물보다 공적 위주로 평가해야”
⊙ 이승만 동상 선서문의 글씨까지 새겨 넣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있는 것 그대로 표현해줘야”
⊙ “‘너는 어떤 진영이냐?’라고 하는 자가 무슨 예술가? 그런 자는 정치하는 사람”
⊙ “흙을 만지는 것이 좋고, 그것이 제 삶의 여정”
⊙ “이승만·박정희 동상은 남대문에 세워야… 조선 시대를 등지고 이제 근대, 현대로 나아가자는 메시지”

金永元
1947년생. 홍익대 미술대 조소과 졸업, 同 대학원 조각과 석사, 충북대 사범대 미술교육과 부교수, 홍익대 미술대 조소과 교수, 同환경미술연구소장, 미술대학장,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헐러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사진=조선DB
  7월 27일, 휴전협정 70주년 기념일, 이승만(李承晩·1875~1965년), 트루먼(Harry S. Truman·1884~1972년) 두 분 대통령의 동상(銅像)이 섰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多富洞) 전적지에 섰다. 대한민국이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몰렸던 낙동강 방어선 바로 그곳이다. 기업인 김박 앨트웰 회장이 수십억원의 제작비용을 부담하고, 조갑제(趙甲濟) 동상건립추진위원장 등이 불철주야(不撤晝夜) 분투한 결과다. 동상은 7년 동안 창고에 모셔야 했다. 민간이 제작해 기증하겠다고 해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작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7월 30일 홍익대 김영원(金永元·76) 전 교수를 만나 동상 건립 후의 감회를 물었다. 광화문 세종대왕상,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앞 ‘그림자의 그림자’ 등을 만든 김영원 교수는 기념조각물의 세계적 거장(巨匠)이다.
 
  ― 작가로서 감회가 어떻습니까.
 
  “작품을 완성한 때가 2017년입니다. 동상 설치를 하고 나니까 큰 짐을 벗은 것처럼 홀가분합니다.”
 
  ― 2017년에 완성한 뒤엔 동상을 6년 이상 어디서 어떻게 보관했습니까? 좌대(座臺) 빼고 높이만 4m20cm, 무게도 3t이라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듯합니다.
 
  “창고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창고에도 가끔 들러서 동상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했죠. 세 분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위대한 정지’
 
7월 27일 이승만-트루먼 동상 제막 현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동상 앞에 선 김영원 교수, 김박 앨트웰 회장(가운데), 필자.
  ‘세 분’이라고 한 건 아직 창고에 모시고 있는 동상이 하나 더 있어서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동상이다. 작품을 완성했는데도 동상을 적절한 곳에 세우지 못했다면, 작품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작품과 ‘작품이 들어설 공간’, 그리고 공간을 오가는 사람들의 동선 등을 총체적(總體的)으로 고려해 작품을 만드는 김영원 교수에게는 이 미완의 프로젝트가 필생의 숙제처럼 다가왔을 터이다.
 
  “작품한테 미안하고, 동상의 대상께도 죄송하고, 동상건립추진위원회 분들께도 다 송구했습니다. 바로 작품 설치가 될 것으로 알고 시간을 쪼개가면서 동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1~2년도 아니고 7년이나 주물(鑄物) 공장 창고에 방치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죠.”
 
  동상을 일러 ‘위대한 정지’라고도 한다. 한 인물의 생애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을 담았다는 뜻이다. 동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위대함’을 느껴야 훌륭한 작품이다. ‘느낌’은 직관(直觀)이다.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신호와 정보를 이해하고 납득하는 과정이 아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온몸으로 교감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작동하는, 순간적이며 직관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예술적 과장’이 없어야 한다.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것이 모든 동상을 관통하는 불문율(不文律)이다. 사실적 묘사를 통해 한 인물의 전(全) 생애가 모두 드러나도록, 그리고 보는 이들이 감동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동상의 역설(逆說)이다. ‘사실적인 정지 상태’에 한 생애를 담으려면, 그리고 보는 이들에게 즉각적으로 감동을 주려면 ‘상징’과 ‘작가적 해석’이 들어가야 한다. 작품 제작에 앞서 동상의 주인공을 주도면밀하게 장기간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역사는 결과물 가지고 평가해야”
 
  ―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라고 봅니까.
 
  “저는 국민학교 때 이승만 대통령 생신맞이 편지 쓰기 숙제를 하던 세대입니다. 해마다 행사가 있었죠. 그래서 그분이 항상 우리나라 대통령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하야(下野)하고 나서는 어린 마음에도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어요. 그런데 4·19 이후 3·15 부정선거 이야기가 연일 신문에 나고 어른들이 말씀하시고 이 대통령을 매도할 당시에는 저도 그분이 그런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 왜 생각이 바뀐 겁니까.
 
  “우리가 해방되고 북에서는 김일성이, 남쪽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지도자가 되었죠. 역사의 평가는 결과물을 가지고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우리가 갈 길은 바로 저기다’라고 원칙을 딱 세운 거죠. 북은 반대로 갔습니다. 당시에 북쪽이 우리보다 10배쯤 국력이 강했을 겁니다. 공업화 정도 등 여러 가지 여건도 좋았고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선택한 결과가 어떻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 경제 대국의 위치로 올라섰습니다. 북쪽에서는 저희가 말하기도 참 민망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부끄러운 환경 속에서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 점에서 남북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끝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 점이 동상 제작 의뢰를 곧바로 수락한 배경입니까.
 
  “네. 저는 지금 우리 국민이 누리는 자유나 그 모든 풍요가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확고히 했다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국부(國父)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물보다 공적 위주로 평가해야”
 
이승만 대통령 동상. 옆에 있는 화환은 윤석열 대통령이 보낸 것이다. 사진=배진영
  그렇다면 다부동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역사’라는 추상(抽象)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현했을까?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엔 ‘세계를 보는 정치가’의 표정을 담았습니다. 그 당시 세계정세를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유일한 인물이니까요. 외교를 통해 한미(韓美)동맹을 맺고, 그로써 우리의 안보라든지 우리 국민들의 삶이라든지 여러 가지 경제적인 면을 다 살핀 분이시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기조라든지 이런 것을 국제적인 시각에서 기획한 위대한 기획자입니다.”
 
  ― 공(功)이 큰 것은 확실한데, 아까 말씀하신 3·15 부정선거라든가 과(過)도 확실하지 않습니까.
 
  “물론 과도 있지요. 그러나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할 때는 공과를 다 살피되, 공이 크면 허물보다는 공적을 위주로 평가해야죠. 그것이 후대인(後代人)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잘 안다. 당대인(當代人)들은 그것을 몰랐다. 역사의 향방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게다가, 일상의 자잘한 소식부터 국제 정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들에 비해 정보를 얻고 분석하기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나중에 태어났다는 것을 특권(特權)으로 삼아 지금의 기준으로 윗세대를 공격하거나 비판하는 건 그래서 염치없는 짓이다.
 
  ― 이승만 대통령은 한복을 입으셨네요.
 
  “저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은 좀 세련되고 국제적인 외모를 갖추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그분 생애를 공부하다가 생각을 바꿨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애국자였고 하와이, 미국 등에서 평생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죠. 그리고 임시정부 초대(初代) 대통령이시고요. 이런 모든 행적을 고려하면 민족주의자고 애국자시다. 그래서 한복을 선택했습니다. 또 한복은 이승만 대통령의 자상함이라든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든지 이런 것을 여러 가지로 종합해서 부드럽게, 그리고 인간적인 풍모를 부각해보자는 그런 생각으로 만든 겁니다.”
 
  ― 동상에서 이 대통령이 손에 들고 계신 책자는 무엇입니까.
 
  “대통령 선서문(宣誓文)입니다. 선서문을 손에 들고 국민에게 인사하는 겁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상징성을 고려해 그렇게 만든 겁니다.”
 
  다부동에 선 이승만 동상은 선이 유려(流麗)하다. 두루마기 옷자락의 직선과 곡선이 절묘하게 만나며 우남(雩南)의 전신(全身)을 흘러내린다. 마치 그리스 신상(神象)처럼.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은 강건함 속에 부드러움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일까?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평론가들이 말하기를 제 작품은 ‘아름다운 곡선을 지니고 있다’라고 해요.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저는 낙동강 하류에서 자랐습니다. 낙동강의 물길이 흘러가는 것을 보며 자랐는데 그것이 제 몸속에 각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만들어도 이렇게 유연한 선이 나옵니다.”
 
 
 
인생을 바꾼 미술 선생님

 
  경남 밀양시와 창원시의 접경지역, 낙동강변 마을이 김영원 교수의 고향이다. 사정이 있어 부모님이 아니라 조부모 내외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1944년 징용(徵用)으로 끌려갔다 진해(鎭海)로 탈출했다. 한학자(漢學者)였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한학(漢學)을 가르쳤다. 어린 김영원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초등학교 시절 한 해 결석일이 몇 달일 정도였다.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어찌어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도 마쳤다. 중학교 졸업 후 두어 해는 농사를 지었다.
 
  학교에 가고 싶어 ‘할아버지 뜻대로 법대에 가서 군수(郡守)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어렵사리 진학했던 고등학교 미술 시간, 김영원의 인생을 바꾼 마법의 순간이 찾아왔다. 미술 교사였던 도예가 곡우 진종만(谷牛 陳鐘滿·1931~2017년) 선생이 김영원 학생의 점토 작품을 한참 응시했다.
 
  “조각은 누구에게 배웠냐?”
 
  “배운 적 없습니다.”
 
  농사지으며 오후 내내 뭉게구름을 응시하고, 찰흙으로 ‘흙장난’을 친 일은 있다. 원하는 형상을 혼자서 이리저리 만든 것이다. 김영원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이자 ‘재미있는 일’이었다. 진종만 선생은 김영원을 ‘동아 민전’에 데리고 나갔다. 그때 만든 작품은 당대 최고 인기스타였던 재일동포 역도산(力道山)의 동작을 형상화한 다이내믹한 작품 〈레슬링〉. 결과는 학생부 부문(조소) 1등 특선이었다.
 
  “미대에 가고 싶어 무작정 부산의 미술학원에 찾아갔죠. 입시가 코앞이었어요. 학원에서는 난감해하며 받아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에 청소라도 하겠다고 해서 다녔죠. 워낙 기초가 없으니 입시생 한 명이 개인 지도를 해줬어요. 그해 그 학원에서는 저만 홍대 미대에 붙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심사위원 사이에 격론이 있었다고 했다. ‘가능성’과 ‘독창성’이 보이니 붙여주자는 쪽과 기초가 워낙 부족해 받을 수 없다는 쪽으로 갈렸다는 것이다.
 
 
  ‘완벽주의자’
 
  하고 싶던 미술을 마음껏 하겠노라는 부푼 꿈을 안고 상경(上京)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수업 중 “미술을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느냐”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일주일을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누구는 배 속에서 배워서 나오나?’ 예술에 대한 열정이 마구 치솟았다. 오기(傲氣)도 생겼다. 이를 악물고 작업실에서 살았다. 스스로도 나날이 실력이 느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결과물이 대학 2학년 때 거둔 ‘최고점수 국전(國展) 입선’이다.
 
  환일고 미술 교사 시절,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야구 해설가 고(故) 하일성씨가 이 시절의 동료다. 공모전 출품작 준비로 시간도 없고 결혼 생각도 없다고 했는데 다른 학교 교사였던 아내는 빵과 우유를 사서 학교로 찾아왔다. 간식이 올 시간(?)이면 미술반 학생들이 학교 옥상에 올라 전영의 히트곡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개사해 ‘어디쯤 오고 계실까’라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노총각 지도교사 들으라고 일부러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도 과장된 몸짓을 섞어 전하며 인연을 맺어줬다.
 
  김영원 교수는 결혼 전이나 후나 여전히 한결같다. 아침 6시30분에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때까지 작업에 몰두한다. 귀가해서 저녁을 먹고, 책을 읽고, 아내와 산책한다. ‘인간 시계’ 칸트가 떠오를 정도다. 그래서 미술평론가들은 그를 ‘완벽주의자’라고 평한다. 생활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도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동상을 보는 사람들이 이승만이 들고 있는 선서문을 읽을 일은 없다. 겉표지를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런데도 거장은 선서 글도 꼼꼼하게 새겨 넣었다. 동상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이 보려야 볼 수 없는 곳인데 이렇게 정밀하고 치밀하게 작업한 이유는 무엇일까.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생략한다는 건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있는 것은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상을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드론으로 촬영하는 분도 있을 것이고 항공 촬영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작품을 만들 때 안 보이는 부분도 보이는 부분 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청남대 역대 대통령 동상 만들어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면,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동상을 모두 만든 사람은 김영원 교수가 유일하다. 청남대에 설치된 역대 대통령 동상들이 그의 작품이다.
 
  “제작을 각각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어떤 대통령은 잘 만들고 어떤 대통령은 잘 못 만들고 개인 성향에 따라 작품이 달라질 거라 걱정해서 그랬는지 다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더군요(웃음). 뒷말 나올 여지를 차단한 거죠. 전직 대통령 동상은 그렇게 만들어진 겁니다.
 
  동상을 만들기 전 역대 대통령의 삶에 대해서 아주 기초적이나마 자료를 모아서 공부했어요. 저는 우리나라의 대통령 열 분을 다 존경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위해서 헌신하셨고 또 어떤 분들은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하셨고…, 그렇게 새가 양 날개를 가지고 날 듯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즘 정치 상황을 보면 좌우로 편을 나눠서 전쟁하듯이 다투고 싸우잖아요?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있는데 저는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는 나보다 뛰어난 인물이니까 존경해야죠. 단점은 좀 배제하고, 안 좋은 것은 좀 덮어놓고, 장점은 계속 드러내는 이런 정치를 좀 했으면 좋지 않겠나. 모든 분이 다 그 나름대로 공과가 있지만, 과를 보지 않고 공 위주로 평가하자. 역대 대통령 동상을 만들면서 제가 했던 생각입니다.”
 
 
  “동상으로라도 만나서 못다 한 말씀 나누시라고”
 
김영원 교수는 트루먼 대통령 동상에 대해 결단성 있고 신념에 찬 모습을 부각시키려 했다고 말한다. 사진=배진영
  ― 트루먼 대통령 동상은 어떤 관점에서 제작하셨습니까.
 
  “그분은 학식은 좀 짧지만, 순간적인 판단을 잘하시는 분이죠. 그리고 6·25 당시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투철한 어떤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봅니다. ‘저 개자식들을 물리쳐라’는 과격한 표현을 써가면서 6·25전쟁을 치렀는데 엄청난 결단이었죠. 역사의 흐름에 비추어 보면, 인류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개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6·25를 필두로 공산주의의 팽창이 저지되었고 40년쯤 지나서 공산주의체제가 거의 다 무너지지 않습니까? 동구권 공산국들이 다 무너졌는데 아마 그 단초가 된 날이 저는 트루먼 대통령이 6·25에 대처한 바로 그날이라고 봅니다. 트루먼의 자유에 대한 강한 신념이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그래서 그런 걸까요?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은 이승만 대통령에 비해서 단호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예. 결단성이 있고 과감하고 신념에 찬 모습을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이승만, 트루먼 두 분 동상은 모두 각자 정면을 보고 있다. 하지만 서로를 향해 미묘하게 몸을 틀었다. 마치 두 분의 동상이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다.
 
  “두 분이 의논해서 대한민국을 살리신 것이니까요. 6·25 때는 서로 만난 일이 없고,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끝나고 방미(訪美)했을 때 퇴임한 트루먼 대통령을 미주리주 사저(私邸)로 찾아가 만났다고 합니다. 그것이 두 분의 유일한 만남이었는데, 동상으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 한 말씀 나누시라고 살짝 마주 본 자세로 배치했습니다.”
 
 
  ‘인물 조각은 광선의 예술’
 
  김영원 교수가 동상을 만들 때 장소의 공간성(空間性)을 종합적으로 살핀 후 작업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국책사업(國策事業)의 경우엔 발주자가 부지(敷地)를 먼저 선정하고 이후 절차를 진행하지만, 이번엔 모든 것이 그 반대였다. 민간이 주도해 영웅의 동상을 모시는 일엔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다.
 
  “원래는 전쟁기념관에 세운다는 생각으로 동상을 만들었는데, 사회현상이랄까 분위기 때문에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경상북도와 칠곡군이 협조해주셨는데, 이번에 부지를 고르면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인물 조각은 광선(光線)의 예술’이라는 것이었죠.”
 
  ― 무슨 뜻입니까.
 
  “광선이 받쳐주지 않으면 인물 동상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졸작(拙作)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동상은 남향(南向)으로 세웁니다. 오전에 해가 뜨면 빛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명암(明暗)이 지기 때문에 실체감(實體感)이 드러나죠. 오후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면서 오전과 또 반대 방향으로 명암이 형성되고요. 동상이 남향이 아니면 낮에는 정면으로 빛을 받아 입체감이 사라지고 오후에는 역광(逆光)을 받아 흉물(凶物)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고려해서 장소를 선택하다 보니까 다부동 전적지 가운데 이번에 동상이 선 자리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시위나 고함은 예술혼을 빼앗을 수 없다”
 
2017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에 설치하려던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은 아직도 주물공장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진=조선DB
  작가가 말한 사회현상, 사회적 분위기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지난 정권은 이승만, 트루먼 두 분 동상의 설치를 사실상 불허(不許)했다. 박정희 대통령 동상 설치도 막았다. 이번에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을 세운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정치적인 이유로 작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까?
 
  “이미 홍역을 치렀지요.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상암동 박정희 기념관에 동상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동상건립위원회에서 동상을 기념관에 기증했는데, 기념관 마당이 시유지(市有地)라 서울시가 태클을 걸었습니다.”
 
  작가는 정치적 민감성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전쟁기념관에 동상을 세우려던 프로젝트가 무산(霧散)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치 당일까지 엠바고(일정 시점까지 보도를 금지하는 것)를 요청했다. 일단 동상이 세워지면, 누구라도 그것을 뜯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몇 신문에서 보도를 했다. 동상 건립을 반대하는 진영에서 설치 예정지에 텐트를 치고 그 자리를 점령했다. 소란스럽고 분위기가 험악했다. 몇몇 기자는 작가에게 “왜 저런 독재자 동상을 만들었느냐?”며 가시 돋친 질문을 던졌다. 적대적(敵對的)이었다. 김영원 교수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다. 괜히 잘못 이야기해 또 다른 물의를 빚는 것이 싫어서 침묵했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듣는데 하도 험악한 이야기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큐레이터와 함께 로비로 직진해 들어간 이유다. 200여 명 시위대에 맞선 단기필마(單騎匹馬)의 행군(行軍)이었다.
 
  “‘중구난방(衆口難防)식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함부로 고함치지 말고, 차분하게 질문하면 내가 다 대답하겠다’고 했죠. ‘좌파냐, 우파냐’ 묻기에 ‘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예술파다’라고 했습니다. ‘시위나 고함은 예술혼을 빼앗을 수 없다. 예술가는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예술가의 길을 선택해서 예술을 하는 것인데 너는 어떤 진영이냐?라고 하면 그럼 그런 자가 무슨 예술가냐? 그런 자는 정치하는 사람이다’라고 했지요. 그렇게 인터뷰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 은인”
 
  그렇다면 김영원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제 은인이죠. 제 어린 시절부터 20대까지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엄청나게 가난하고 굶주리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시골 출신인데, 주변 사람 모두가 너무너무 가난했어요. 그런데 지금 세계 10위 경제 대국으로 가는 기초를 만든 사람이 누구냐. 박정희 대통령 아니냐. 나는 그래서 ‘그분을 존경한다’라고 당당하게 인터뷰했죠.”
 
  신문마다 기사가 다 나왔다.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즉각 인신공격을 해왔다. 댓글 부대는 “예술가가 아니고 아주 기회주의자네”부터 온갖 욕설과 비난으로 게시판을 도배했다. 다음 생까지 먹을 욕을 다 먹었다고 느낄 정도였다.
 
  ―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겠습니다.
 
  “처음엔 기분 나빴죠. 하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민중미술이 대세라며 운동권 문화가 다른 흐름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 일련의 미술가들이 그를 찾아와 동참(同參)하라고 했다. ‘예술이 무기(武器)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김영원은 그때도 단호하게 물리쳤다.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는 반(反)예술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술은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가는 무리 지어 다니는 이리 떼가 아니라, 산중호(山中虎)처럼 혼자 지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산중에 살며 오직 작품으로만 이야기하겠다’라고 했죠.”
 
 
  ‘경복궁을 나와 시민들과 어울리는 군주’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은 ‘경복궁을 나와 시민들과 어울리는 군주’라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었다. 사진=조선DB
  김영원 교수는 집단으로 싸우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저항하더라도, 대놓고 일률적으로 외치는 것은 예술적이지 않다고 봤다. 예술가 각자의 양심에 비춰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민중 미술계는 그를 따돌렸다. 추상파(抽象派)는 추상파대로 그를 모더니스트라고 부르며 따돌렸다.
 
  그가 받은 비난 중엔 근거가 빈약한 것도 있었다. 세종대왕상 건립 당시 세 번이나 감사(監査)를 받았고, 언론에서도 ‘친일파가 그린 존영을 본떴다’며 작품 공개도 하기 전에 논란부터 일으켰다. 공개된 직후에는 한동안 잠잠하다가 서울시장 선거 이야기가 나오면서 또 비난이 일었다. ‘동상 크기가 왜 이렇게 크냐?’ ‘왜 금색으로 만들었느나?’는 비난도 있었다. 기자들과 만나 직접 청동을 보여주며 “이것이 청동이지 어디가 금이냐? 제발 좀 정확히 취재하고 기사를 써달라”고 절규했던 기억이 있다.
 
  광화문 세종대왕상 제작 시 가장 신경 쓴 점은 ‘공간과 사람’이었다. 오전 수업을 끝내고 해질 때까지 광화문 공간을 거닐었다.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앉아 수없이 가상(假想)의 설계도를 그렸다. 공간이 오롯이 작가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공모(公募)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세종은 애민(愛民)의 군주이니 사람들이 동상 주변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보행자(步行者) 위주의 공간을 만들고 동상을 세우는 안을 제출했다. ‘경복궁을 나와 시민들과 어울리는 군주’라는 아이디어에 심사위원들이 높은 점수를 줬다.
 
 
  “DDP는 건물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조각”
 
서울 동대문 DDP에 설치된 김영원 교수의 ‘그림자의 그림자’. 이 작품으로 DDP 건축의 예술성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사진=조선DB
  동대문 DDP 앞, 앞과 뒤, 좌와 우가 모두 트이고 슬라이스처럼 갈라진 남자의 몸 조각물도 김영원 교수의 작품이다. 이 조각물로 DDP 건축의 예술성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평도 있다.
 
  “처음 제안을 받고 수시로 DDP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이곳이 건물이 아닌 하나의 거대한 조각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이 건물 자체를 ‘환유(換喩)의 풍경’으로 만들었더군요. 환유란 철학적으로 보면 기표(껍데기), 즉 형식이죠. 저는 물방울이라는 형태를 통해 유기적인 모습을 지닌 모든 것을 다 표현한 것이라고 봤습니다. 모든 물질을 다 담은 듯한 공간이니 ‘인간의 이야기’를 매치시키면 생명이 넘치는 공간이 될 수 있겠다고 보고 작품 제작을 수락했습니다.”
 
  ― 그런데 작품을 왜 건물 안이 아니라 밖에다 세운 겁니까.
 
  “막상 하겠다고 하니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제 조각품이 하디드의 작품을 장식하는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까? ‘작품이 커야겠다, 그리고 서로 대화하는 형태로 가자’라는 결론을 내렸죠. 서로 예술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대화를 하면 거기서 또 많은 담론(談論)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동상의 핵심은 ‘위치’다. 그래서 고민했다. 동상의 하중(荷重)과 사람들의 동선(動線)도 고려해야 했다. 광화문과는 달리, 이곳은 관광(觀光)과 상업(商業) 동선이 복잡하게 섞이는 곳이었다.
 
  “원래 동대문이 하나의 시장(市場)이었잖습니까. 살기 위해 바둥거리는 곳이 바로 시장이죠. 제가 보기에 하디드는 그 공간을 힐링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지친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마음을 비우고 쉴 수 있는 곳으로 말이죠. 그러니까 이곳은 다른 시장과 똑같아지면 안 된다고 봤습니다.”
 
  실패하면 DDP에서 디자인 전시는 몰라도 다시는 순수 예술작품을 전시하지 않으리라는 압박감도 컸다. 고민 끝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건물을 배경으로 작품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도로변에 조각을 설치하니 건물이 배경이 되면서 조각이 부각됐다. 반응도 좋았다. 나쁜 댓글이 단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이승만·박정희 동상, 남대문에 세워야”
 
  숱한 걸작을 제작했지만 그에게는 아직도 미완(未完)의 과업이 있다. 7년째 창고에 모신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하루속히 적절한 장소에 모시는 일이다.
 
  “저는 박정희 정권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며 돌을 던졌고 민청학련 사건이 나던 무렵 군대에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미술 관련 보직을 받지 못하고 최전방 강원도 화천에서 3년을 복무했습니다.
 
  군 복무 당시 보초를 서며 혼자 멍하니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당시 나라에서 ‘합리적인 생활’을 캠페인으로 내걸었죠. 이상했습니다. 국민이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대통령에게 반대할 텐데, 대통령이 앞장서서 ‘합리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게 말이 되나? 그러다 보니 그간의 상황이 다 이해가 가더군요. 경부고속도로나 중화학공업 육성 같은 일은 거의 모든 국민이 다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죠. 그 당시 국민의 의사를 존중했다면 추진하지 못했을 겁니다. 꼭 해야 하는데, 하고 난 뒤의 풍요로운 미래도 보이는데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면 그때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의견이 저와 다른 분들도 이 점은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우고 싶은 장소가 있는지요.
 
  “네, 있어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근현대사의 위인이지 않습니까? 저는 두 분 동상을 남대문에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보아 둔 자리도 있습니다. 세월의 얼룩도 있고 서울로 들어오는 길이라든지 명동으로 가는 길이라든지, 그곳이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길목이잖습니까? 남대문을 등지고 서서, 조선 시대를 등지고 이제 근대, 현대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으면 어떻겠나 생각합니다.”
 
 
  “작업실의 흙이 당신의 진심에 반응할 것”
 
경기도 작업실에서의 김영원 교수. 이곳에서 김 교수는 세종대왕,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트루먼 대통령의 동상을 만들었다. 사진=조선DB
  ― 마무리 질문입니다. 후배들에게 당부할 말씀이 있다면? 작가 김영원에게 예술이란, 조각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어떤 탁월한 이념이나 개념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어떻게 출발이 되었는데 저는 농부가 밭에 나가서 일하듯이 제가 좋아서 열심히 작업했을 따름입니다. 흙을 만지는 것이 좋고, 그것이 제 삶의 여정입니다. 젊은 작가들에겐 ‘자신을 믿고 이 길을 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술에 왕도(王道)는 없습니다. 작업실의 흙이 당신의 진심에 반응할 것입니다.”
 
  ‘중력(重力)과 무중력(無重力)’으로 불리는 김영원의 초기 작품세계, 중년 시절 선(禪)과 소통하며 외국 평단의 극찬을 받은 이야기, 남성미와 관능미를 강조한 파격적인 불상(佛像) 제작, 해사(海士) 교정에 세운 이순신(李舜臣) 제독(提督) 동상을 활 쏘는 동작으로 제작한 이유, 국가 프로젝트로 진행한 국새(國璽) 당선작을 만든 이야기 등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 2024년 10월 고향 김해에 ‘김영원 미술관’이 들어선다. 그의 전모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뜻깊은 공간이다. 그곳에서 우리 역사의 위인들을 모두 만나고 싶다.
 
  다부동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던 인보길(印輔吉·83) 뉴데일리 회장은 이승만·트루먼 두 대통령의 동상이 선 데 대해 “8·15 광복 때는 다섯 살 때라 아무것도 몰랐다. 그때 사람들이 느꼈던 벅찬 감동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1977년 대학 재학 시절 한국에서 3개월 어학연수를 한 이래 매년 한국을 방문하며 꾸준히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아라키 가즈히로(荒木和博) 일본 다쿠쇼쿠(拓殖)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정부 때 일본의 친한파(親韓派) 지식인들은 ‘지금 한국은 우리가 알던 한국과는 다른 길로 나가는 것 같다’라고 걱정했었다. 다부동에 세워진 이승만·트루먼 동상을 보니, 지난 몇 년 동안 대한민국은 온라인상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21세기의 낙동강 방어 전투’를 치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부동 전투 다음은 ‘인천상륙작전’이다. 아직도 창고에 잠들어 있는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세우는 일이 9·28 수복일 터이다. 이승만·트루먼 두 분 동상도 다부동 언덕 낙동강 방어선 전적지에서 지금 이 순간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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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eus16604    (2023-09-12) 찬성 : 0   반대 : 0
올 8월에 다부동전투 기념관 앞에 나란히 세워진 이승만 건국 대통령 동상과 트루먼 대통령 동상을 보았어요. 두 분 실물과 비슷하고 주는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같은 작가분이셨군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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