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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서울 택한 세계 3대 아트 페어 프리즈, 그 뒷이야기

리움에 재벌가 사람들과 문화계 인사들이 모인 이유는?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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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3대 아트 페어 프리즈,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려
⊙ ‘삼청 나이트’ ‘한남 나이트’, 밤마다 파티장으로 변신한 갤러리들
⊙ 위상 높아진 한국 문화, 런던에선 코리안 페스티벌 ‘범 내려온다’ 열려
⊙ 프리즈 부스 곳곳에 걸린 윤형근, 이배 등 한국 작가의 작품들
⊙ 박경미 PKM 갤러리 대표, “몇십 년 걸릴 미술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 이건희 컬렉션이 한 번에 이끌어냈다”
프리즈 마스터스에 걸린 파블로 피카소의 대표작 〈Femme au beret rouge a pompon〉(1937)을 관람하는 관객들. 사진=조선DB
  입구 경비가 삼엄하다. 명단에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는 데 약 3분이 걸렸다. 이때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입구를 통과하자 일군의 사람이 보인다. 조금 이상한 건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있다. 등이 깊이 팬 드레스가 보인다. 가만 보니 낯익은 얼굴이 여기저기 보인다. 이병헌, 강동원, 임수정, 다이나믹 듀오 등등.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선택한 프리즈
 
프리즈 개막을 앞두고 리움에서 ‘CJ 나이트 포 프리즈 서울’이 열렸다.
  ‘내가 어디에 온 거지?’ 한물간 유행 표현을 빌리면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의 상황이었다. 소규모 저녁 모임이라 생각하고 터덜터덜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1층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지난 9월 1일 저녁의 일이다. 두리번거리다 보니 벽에 빛으로 쓰인 글씨가 보인다. ‘CJ 나이트 포 프리즈 서울(CJ Night for Frieze Seoul).’ 올해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린 ‘프리즈 서울’의 전야제 행사였던 것이다.
 
  문득 호주에 살던 시절 겪은 어떤 일이 떠올랐다. 가깝게 지내던 대만인 친구가 어느 날 식사를 하자고 했다. 당연히 친구들끼리의 자리라 생각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글쎄 주(駐)브리즈번(Brisbane, 호주의 도시) 대만인 야유회였다. 수백 명이 잔디밭에 모여 있었다. ‘나는 대만인이 아닙니다’를 수십 번 웅얼댔던 그날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 건 왜일까.
 
  프리즈(Frieze)는 2003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한 아트 페어다. 동명의 현대미술잡지 《프리즈》의 발행인 어맨다 샤프와 매슈 슬로토버가 영국 출신 아티스트 톰 기들리와 함께 시작했다. 스위스 바젤에 본거지를 둔 ‘아트 바젤(Art Basel)’, 프랑스 파리의 ‘피악(FIAC·Foire Internationale d'Art Contemporain)’과 함께 3대 아트 페어로 꼽힌다.
 
  아트 페어별로 그 특징이 확연히 다르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은 아트 바젤이다. 1970년 스위스 바젤의 화랑들이 모여 결성했다. 바젤은 독일,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접경지대다. 지리적 이점을 살려 크게 성공했다. 슈퍼 컬렉터들이 모이는 최대 규모의 아트 페어로 자리 잡았다.
 
  스위스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아트 바젤은 2002년 미국에 진출했다. 매년 12월 초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 마이애미비치’다. 2013년엔 아시아에 발을 디뎠다. ‘아트 바젤 홍콩’이다. 중국과 싱가포르의 컬렉터들을 겨냥했다.
 
  피악(FIAC)은 1974년 파리에서 탄생했다. 매년 10월 파리의 그랑팔레 에페메르를 중심으로 열린다. 피악 기간엔 파리 곳곳에서 ‘갤러리의 밤(갤러리들이 밤 10시까지 야간 전시를 하는 날)’ 등이 열리며 축제 분위기가 된다. 20세기 유명 화가들의 대작들도 만날 수 있지만 참신한 최신 트렌드의 신진 작가들도 만날 수 있는 폭이 넓은 페어다. 해마다 한 개의 나라를 선정해 전시를 하는데 1996년엔 한국을 주제로 전시를 열기도 했다.
 
  2003년 탄생한 프리즈는 3개의 페어 중 가장 후발주자이지만, 영국 메이저 화랑들의 활약으로 단숨에 주요 페어로 떠올랐다. 프리즈 중에서도 프리미엄 컬렉션인 ‘프리즈 마스터스’를 보면 그 저력을 알 수 있다. 고대 예술 작품부터 20세기 작품까지, 피카소, 마티스, 호크니 등 미술 교과서에서 본 작가들의 작품이 거래되는 부스다.
 
 
  리움에 집결한 문화계 인사들
 
  CJ 그룹은 왜 프리즈 전야제를 열었을까. 프리즈의 최대 주주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그룹 ‘엔데버’다. CJ 그룹과 엔데버는 인연이 깊다. CJ ENM은 지난 1월 엔데버의 자회사인 제작 스튜디오 ‘엔데버 콘텐츠’의 지분 80%를 약 9450억원에 인수했다. 여기에다, 이미경 CJ 그룹 부회장과 엔데버의 CEO 아리엘 에마누엘 사이에 친분이 있다는 게 CJ 그룹 측의 설명이다.
 
  이날 행사엔 이미경 부회장뿐 아니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리움미술관 운영위원장 등 삼성 오너 일가와 최태원 SK 회장 등 재계 인사들도 참석했다. 다수의 연예인도 눈에 띄었다. 아이돌 그룹도 있었는데 미안하지만 누구인지는 끝까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곳에서 운동화를 신고(그나마 흔하지 않은 모델이라는 게 약간의 위안이었다) 노트북이 담긴 커다란 가방을 멘 사람은 기자뿐이었다. 평범한 복장이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것 같았다. 다행히 그리 밝지 않은 조명이 기자의 당황함을 감춰줬다.
 
  바처럼 꾸며진 공간엔 와인과 샴페인 잔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다른 쪽 벽을 보니 테이블 위에 음식들이 있었다. 테이블엔 비비고(Bibigo)라 쓰인 간판이 붙어 있었다. 비비고 제품들로 만든 음식들이었다. 진짜 비비고 제품만으로 만든 게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맛있는 음식들도 있었다.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제품이라고 설명해줬더니 눈이 휘둥그레진 외국인도 있었다.)
 
  가만히 둘러보니 속칭 ‘셀럽’들 말고 국내외 작가들과 갤러리스트들도 보였다. 갤러리스트(Gallerist)는 갤러리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이들을 뜻한다. 예술품을 조사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Curator)와는 구분된다. 물론 규모가 작은 화랑에서는 갤러리스트가 큐레이터를 겸하기도 한다.
 
 
  런던 찾은 최정화 작가
 
최정화 작가가 런던 노팅힐에 있는 코로넷 극장 앞에 섰다. 극장 외관에 최정화 작가의 작품이 보인다
  백현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가수, 배우, 미술 작가로 활동 중이다. 리움에서 그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영국에서 온 안다 윈터스(Winters) 씨와 마주치자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무척 반가운 듯했다.
 
  윈터스 씨는 영국 런던에 있는 코로넷 극장(the Coronet theatre)의 소유주다. 코로넷 극장은 노팅힐에 있는 유서 깊은 극장이다. 1898년 처음 문을 열었다. 에드워드 7세가 자주 방문하기도 했다. 영화관으로 쓰이다가 2013년 문을 닫았다. 이듬해인 2014년 안다 윈터스 씨가 운영을 맡아 복합 아트센터로 재단장했다. 음악, 전시, 무용, 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품는 공간이다.
 
  윈터스 씨는 한국 문화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한국 미술의 시그니처(Signature)처럼 된 단색화뿐 아니라 한국 영화, 음악, 퍼포먼스 등 다양한 부문에 해박했다. 그 자신이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하다. 알고 보니 코로넷 극장에선 지금껏 여러 번 한국 문화를 주제로 전시를 열었다.
 
  올해도 한국 문화 페스티벌을 시작한 참이었다. ‘범 내려온다(Tiger is Coming)’라는 페스티벌이다. 8월 26일부터 10월 1일까지 열린다. 이 기간 동안 세계적인 설치 예술가 최정화와 이날치 밴드,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 차진엽, 일렉트로닉 뮤지션 하임 등이 런던을 찾는다.
 
  윈터스 씨는 인스타그램(계정 @thecoronettheatre)에 접속하더니 최정화 작가의 인플래터블 아트 작품이 코로넷 극장의 외벽을 장식한 사진을 보여줬다. 인플래터블 아트는 튜브에 공기를 넣듯이 만들어진 작품을 뜻한다. 고색창연한 건물 외벽에 수박, 딸기, 석류 등 커다란 과일들이 매달려 있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인스타그램을 검색해보니 노팅힐에 상륙한 대형 과일들은 이미 런던에서 꽤 화제가 된 듯했다.
 
  8월 20일 자 《가디언(The Guardian)》도 코로넷의 한국 문화축제를 보도했다. ‘케이붐(K-boom)! 한국의 예술과 하이컬처(고급문화)가 영국에 상륙한다’라는 제목이다.
 
 
  “한국 문화 ‘아픔’이 매력”
 
코로넷 극장 내부에 자리한 최정화의 작품. 사진=코로넷극장
  사진들을 넘겨 보니 극장 내부에도 최정화 작가의 작품 여러 점이 놓여 있는 게 보인다. 그의 전시에서 자주 만난 금빛 왕관(Golden crown)과 경찰관 마네킹 등 반가운 작품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배치되어 있다.
 
  최정화는 시장에서 파는 플라스틱 소쿠리, 쓰던 냄비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가다. 윈터스 씨에게 왜 최정화 작가인지 물었다. 그는 ‘추억’을 언급했다.
 
  “최정화의 작품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물건들로 따뜻한 기억, 이야기, 추억을 전한다. 버려진 물건들로 빚어낸 작품들은 감동적이다.”
 
  내친김에 한국 문화에 관심이 깊은 이유도 물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한국 문화엔 아픔(pain)이 담겨 있다. 나는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나의 모국은 역사적으로 많은 아픔을 겪었다. 미국에서도 살아봤지만, 미국 문화엔 깊이 공감하기 힘들었다. 가족을 중시하는 한국 문화도 친근하다. 크로아티아에서도 가족과 친척들이 자주 모여 함께 음식을 먹고, 다투고, 웃는다.”
 
  윈터스 씨는 이병헌, 강동원 등 한국 배우들을 잘 알아봤다. 넷플릭스의 영향이 크긴 큰 듯했다.
 
  여러 작가들은 프리즈를 위해 한국을 찾은 김에 한국 여행을 계획한 듯했다. 독일에서 온 마티아스 바이셔(Matthias Weischer) 작가는 부산 등 한국의 지방 도시를 방문하고 돌아간다며 여행 계획을 들려주었다.
 
 
  삼청 나이트, 한남 나이트
 
  무한 리필되는 샴페인을 마시다 보니 취기가 올라왔다. 누군가 위로 올라가 전시를 둘러보자는 제안을 했다. 물론 술잔은 전시장에 들고 갈 수 없다. 전시장 곳곳마다 안내 직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혹시 전시품을 훼손할까 감시하는 업무도 함께 하는 듯했다.
 
  밤 9시에 약간은 비틀대며 미술관을 관람하는 건, 마치 수억원짜리 보석 목걸이를 목에 걸어보는 것처럼 즐겁게 긴장되는 경험이었다. (물론 그런 보석 목걸이를 걸어본 적은 없다. 상상해보자면 그렇단 얘기다.)
 
  밤 9시50분쯤 파티는 끝이 났다. 막판까지 남아 있던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힘들었던 일군의 미인과 한국 문화계의 총아(寵兒)처럼 보이는 남성 무리마저 사라졌다.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잠시 후 알 수 있었다.
 
  리움을 나와 이태원의 클럽으로 향했다. 갤러리 현대에서 클럽을 빌려 전야제 행사를 열고 있었다. 입구에서 이름을 체크했다. 미리 체크인을 해야 입장할 수 있었다. 들어가니 ‘한남 나이트’가 펼쳐져 있었다.
 
  프리즈 기간 동안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서울 삼청동과 한남동 곳곳에선 작가와 갤러리 관계자들, 컬렉터들이 어울리는 파티가 열렸다. 일명 ‘삼청 나이트’ ‘한남 나이트’다. PKM 갤러리, 갤러리 현대, 국제 갤러리 등 주요 갤러리들에서 열렸다.
 
  이태원 클럽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와인잔이나 맥주잔을 들고 몸을 흔들다가 인파에 떠밀려온 낯선 이와 인사를 나눈다. 코로나19 이후 실로 오랜만에 목격하는 풍경이었다. 귀를 울리는 비트 사이로 대화가 이어졌다. 시드니에서 온 갤러리스트, 뉴질랜드에서 온 아트 딜러와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아트 딜러, 아트 컨설턴트 또는 아트 어드바이저는 미술품을 구매하려는 컬렉터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전문가다. 작가와 컬렉터, 갤러리와 컬렉터 사이를 연결해준다. 갤러리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큰 유럽보다는 미국에 그 종사자들이 더 많다.
 
  얼마나 많은 ‘큰손’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느냐에 따라 아트 어드바이저의 위상이 나뉜다. 조앤 워런 그래디(Joan Warren-Grady) 같은 아트 어드바이저는 30년 이상 활동하며 200곳 넘는 전 세계 호텔의 미술품 구매를 도왔다.
 
  갤러리들이 여는 파티 외에도 서울 여러 곳에서 작가들과 미술 애호가들, 갤러리 관계자들의 만남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이런 곳에선 작가들의 사적인 면이 드러나기도 한다. 어느 유명 작가는 파티에서 익명의 청년에게 맥주를 끼얹었다는 후일담도 들려왔다. 컬렉터에게는 더할 수 없이 사근사근하고 붙임성 있는 그가 말이다. 차라리 작가보다 연상의 평론가나 컬렉터, 감독 같은 ‘갑(甲)’들에게 끼얹었다면 예술가스러운 깜짝 도발로 보이기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프리즈 후원하는 도이체방크
 
9월 2일 프리즈에 입장하기 위해 몰린 인파. VIP만 입장할 수 있는 날이었다. 사진=조선DB
  9월 2일 금요일, 프리즈의 개막 첫날이었다. 개막을 앞두고 VIP들이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호텔 로비 라운지에 모였다. 역시 명단에 이름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었다. 2시로 예정된 프리즈 개막을 앞두고 가볍게 점심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역시 샴페인은 빠지지 않았다. 독일계 은행인 도이체방크가 주최하는 점심이었다.
 
  도이체방크는 프리즈의 메인 스폰서다. 프리즈가 출범한 이듬해인 2004년부터 지금까지 함께했다. 은행이 왜 아트 페어를 후원할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미술품 구매자들과 은행의 이른바 ‘VIP고객’이 겹친다. 도이체방크는 프리즈가 열릴 때마다 슈퍼 컬렉터들을 초청한다. 최우수 고객 관리와 아트 마케팅을 한 번에 할 수 있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도 이전에 했듯 슈퍼 컬렉터들을 초대하나 싶었는데 도이체방크 쪽이 계획을 취소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미술품 자체가 은행의 자산이다. 프리즈를 위해 한국을 찾은 도이체방크의 글로벌 큐레이터 매리 핀들리는 예술경영지원센터가 9월 1일에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이체방크는 회화와 사진만 5만여 점에 달하는 미술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미술품을 은행의 각 지점에 걸어서 직원과 고객이 예술을 향유하도록 하고, 순회 전시도 열고 있다.”
 
  프리즈의 후원사로 BMW도 있다. BMW 뮌헨 본사에는 독일 추상화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대작 3점이 걸려 있다. 리히터는 그림값이 가장 비싼 생존 작가 중 한 명이다. 프리즈 서울에서 가고시안 갤러리가 리히터의 작품 〈촛불〉(1984)을 선보였는데 개막하자마자 팔렸다. 약 204억원이었다. BMW의 본사 로비에 걸린 그림값만 600억원이 넘는 셈이다.
 
  BMW는 1970년대 초 본사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리히터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당시만 해도 리히터는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 온 젊은 화가일 뿐이었다. 기업의 문화 마케팅이 좋은 안목과 만나면 자산 증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동아시아 최초 메이저 아트 페어
 
  라운지엔 한국 미술계 주요 인사들도 보였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보였다. 도이체방크 부행장이 환영 인사를 했다. 이어서 마이크 앞에 선 패트릭 리(Patrick Lee, 한국명 이인학) 프리즈 서울 디렉터는 약간 긴장한 듯 보였다. 그럴 것이 프리즈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메이저 아트 페어였다.
 
  게다가 새로운 형식이었다. 한국화랑협회가 주최하는 키아프(KIAF)와 손을 잡고 같은 기간, 같은 장소에서 열었다. 코엑스홀 1층에서는 키아프(9월 2~6일)가, 3층에서는 프리즈 서울(9월 2~5일)이 열리는 식이었다. 아트 바젤 홍콩은 아트 바젤이 기존에 있던 홍콩 아트 페어를 2011년에 사들이면서 출범했다.
 
  프리즈가 서울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첫째, 중국과 홍콩의 불안한 내치(內治) 상황이다. 코로나19 대응을 한다며 중국은 지금까지도 도시별로 봉쇄 정책을 고수 중이다. 둘째, 한국의 발달한 문화 인프라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미술계는 폭발적으로 질적, 양적 성장을 했다. 아직도 성장 잠재력이 상당하다는 게 중요하다. 선진국의 미술 시장은 GDP 대비 약 0.1~0.2%다. 아직 한국 미술 시장은 0.02% 수준이다. 셋째, 한국의 문화적 역량이다. 세계 속의 한국의 문화적 위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올라갔다. 여러 작가가 세계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옆자리엔 중국계 남성이 앉아 있었다. 인사를 나눠보니 홍콩에서 온 컬렉터란다. 많아야 마흔 살 정도로 보였다. 한국 미술에 관심이 있냐고 물었더니 솔직한 답이 돌아왔다. “한국 작가는 최근에 부상한 현대 미술 작가 몇 명 정도만 안다. 다른 작가들도 알고 싶어 프리즈를 찾았다.” 도대체 어떻게 큰돈을 벌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홍콩 컬렉터의 맞은편엔 태국에 거주 중이라는 아트 어드바이저가 앉아 있었다. 태국 현지에서 들리는 소식으로는 태국에서도 미술 산업이 꿈틀대고 있다. 물론 주된 고객은 중국계 컬렉터들이다. 그림은 어떤 곳에선 자금을 세탁하고 은닉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샴페인 잔을 든 컬렉터들은 벌써부터 다음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서로 명함을 교환하며 다음 페어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첫날부터 ‘완판’
 
이배 작가와 협업해 부스를 꾸민 생 로랑 매장.
  드디어 프리즈 개막, 이날엔 사전에 초대장을 받은 VIP들만 입장할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입장 줄이 길어졌다. 정말 VIP 입장 줄이 맞는지 되묻는 이들도 있었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아트 페어이니 작품 판매 실적이 중요하다.
 
  갤러리들을 둘러보니 개막 직후부터 그림들이 팔려나갔다. 몇몇 갤러리는 팔려나간 그림 대신 새로운 그림을 걸 준비를 했다. 5시쯤 일본에서 온 도쿄 갤러리에 들어가 물어보니 첫날인데도 상당수 작품이 이미 팔린 상태였다.
 
  전시장엔 갤러리들만 자리한 게 아니었다. 후원사인 LG 올레드와 생 로랑(Saint Laurent)도 전시장을 차렸다. 생 로랑 부스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과감하게 부스 전체를 이배 작가의 작품으로 가득 채웠다. 생 로랑의 브랜드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협업이었다. 전시홀 한쪽엔 카페 노티드 도넛 매장이 차려져 있었는데, 계산 줄이 너무 길어 도넛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 갤러리도 선전(善戰) 중이었다. PKM 갤러리, 갤러리 현대의 부스에 관객이 몰렸다. PKM 갤러리는 2004년 한국 화랑 중 최초로 프리즈 아트 페어에 초청됐다. 이후 아트 바젤, 피악, 아모리 쇼 등 주요 국제 페어에 꾸준히 참가했다.
 
  ‘침묵의 화가’ 윤형근(1928~2007년)을 한국을 대표하는 단색화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주역이 바로 PKM 갤러리다. 프리즈에 참가한 갤러리 곳곳에서 윤형근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1억원에 가까운 그의 작품도 물어보면 이미 팔렸다는 답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미술 산업이 아직 성장하지 않은 나라의 갤러리가 해외 페어에 참가하는 건, 어떻게 보면 사기업이 하는 문화 외교와도 같다. 일단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
 
  페어에 한 번 참가하려면 2억원가량이 든다. 부스비 외에 운반비, 체류비 등을 합해서다. 메이저 아트 페어의 경우 조명을 하나 바꾸는 데 100만원, 200만원을 추가로 내야 한다. 대략적으로 계산해보면 해외 아트 페어에 나가서, 50에서 60호 크기의 그림을 한 점 걸어놓은 벽 하나를 계산해보면 1000만원 정도인 셈이다. 한국의 갤러리로서는 당장 큰 수익이 안 나도 미래를 보고 페어에 참가해왔단 얘기다. 그런 노력들이 한국 작가들이 해외에 알려지는 데 기여했다.
 
 
  아트 페어 찾은 2030
 
  프리즈 전시장에는 지드래곤, 김태희 등 여러 연예인도 다녀갔다. 기자는 2030들에 눈길이 더 갔다. 이들은 전시장 곳곳에서 미술 전공자처럼 공부하듯이 그림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부지런히 업로드했다. 부스 사이 복도에 길게 줄이 늘어서 있기에 따라가 봤더니 그 끝에 에곤 실레의 그림이 있었다. 프리즈에서만큼은 ‘배달의 민족’이 아니라 ‘예술의 민족’ 같았다.
 
  사실 2030, 소위 MZ 세대의 그림 사랑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주말에 삼청동이나 한남동의 화랑가를 돌아보면 거개가 젊은층이다. 데이트 코스가 ‘맛집-카페’에서 ‘맛집-전시’로 확장한 느낌이다.
 
  트렌드를 정확히 읽는 것은 역시 기업이다. 현대카드는 지난 8월 9일 서울 이태원에 ‘현대카드 아트 라이브러리’를 열었다.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를 주제로 다양한 서적과 자료를 한데 모아놓았다. 현대카드 소지자와 그 일행만 입장 가능한데, 주말에 가면 대기 차례가 40~50번씩 밀려 있기 일쑤다.
 
  박경미 PKM 갤러리 대표에게 이런 트렌드를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요새 식당이나 작은 가게들 보세요. 깜짝 놀랄 정도로 세련되었어요. 젊은층 중에 해외 연수나 유학 다녀온 이들이 많잖아요. 그 경험들이 농축되어 있다가 터진 겁니다. 불과 지난 5~6년 사이에 분출했어요. 젊은층에서 좋은 작가들이 많이 탄생할 거라 기대합니다.”
 
  박 대표는 이건희 컬렉션 얘기를 꺼냈다.
 
  “이건희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이건희 컬렉션이 공개됐잖아요? 그걸 계기로 미술품의 가치에 대해 온 국민이 알게 됐다고 생각해요. 미술품이 예술품이기도 하지만 자산 가치가 있다는 걸 일반인들은 잘 몰랐잖아요. 그런데 한국 최고 부자의 미술품이 공개되면서 알게 된 거예요. 몇십 년이 걸릴 인식 변화가 한 번에 일어난 겁니다.”
 
 
  ‘이건희 컬렉션 효과’
 
  이건희 회장이 타계한 후 유족들은 이 회장이 남긴 고미술품과 서양화 작품, 국내 유명 작가 근대미술 작품 등 1만1000여 건, 2만30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국보와 보물을 포함한 총 2만1600여 점의 고미술품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수장고는 삼성가의 기증으로 단숨에 화려해졌다.
 
  이건희 컬렉션은 지난해 7월부터 국민들에게 무료로 공개됐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희 회장에게 선물을 받은 듯하다.’ 이건희 컬렉션 공개를 안 그래도 젊은층의 예술 애호 트렌드로 기지개를 켜던 한국 미술 시장에 활기가 확 퍼진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한국 미술 시장은 지난해 기준 거래액 9000억원을 돌파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공개한 ‘2021년 한국 미술 시장 결산’을 보면 한국 미술 시장은 약 9223억원 규모다. 경매 시장 3280억원, 화랑 4400억원, 아트 페어 1543억원 등이다.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엔 3291억원 규모였다. 올해 상반기에는 거래액 5000억원을 넘겼다. 올해 안으로 거래액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로 일본의 미술품 시장 규모는 2020년 기준 약 3조2000억원으로 추산한다.
 

  박 대표는 미술품을 사는 영앤리치(Young & Rich)들을 이렇게 설명했다.
 
  “부모한테 물려받은 부자는 돈을 잘 못 써요. 새로운 업종으로 돈을 번 신흥 부유층들은 돈을 잘 써요. 쇼핑몰, 가상화폐 등이죠. 인스타그램으로 소비를 과시하는 세대잖아요. 지방에 땅 몇십만 평 산 건 인스타그램으로 과시하기 힘들잖아요.”
 
  ― 좀 속물처럼 보이기도 할 테고요.
 
  “그런데 집 벽에 몇억원, 몇십억원짜리 그림 한 점 걸어놓으면 그걸로 된 거죠. 과시니 얄팍하니 비난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냥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싶어요. 이게 새로운 세대의 정서이고, 사고방식이라고요.”
 
 
  고무된 한국 미술계
 
  프리즈 서울 전시장을 둘러본 후 1층 키아프 전시장을 찾았다. 낙수(落水)효과일까, 키아프 역시 꽤 많은 이로 북적인다. 부스별로 둘러보니 거래도 활발해 보였다. 집계 결과를 보니 7만 명이 키아프에 다녀갔다. 키아프에 참가한 갤러리 현대는 이반 나바로, 김성윤, 이강승, 김창열, 이건용, 이슬기 작가의 작품을 모두 판매했다. 총판매금액은 42억원. 키아프는 올해부터 전체 판매금액을 집계하지 않는다. 이번에 키아프에 참가한 오현금 토포하우스 대표는 현장에서 느낀 프리즈와 키아프의 만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상당히 긍정적이에요. 한국이 아시아의 미술 중심지로 떠오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넓은 세상과 만나 한국의 화랑계도 세계 표준에 다가가는 거죠.”
 
  페어 둘째 날 밤이었다. 갤러리 현대, PKM 갤러리, 국제 갤러리 등을 돌며 ‘삼청 나이트’를 즐기던 작가에게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꼭 아트 바젤에 온 것 같다.”
 
  프리즈 서울의 선전에 한국 미술계는 고무됐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키아프 자카르타, 키아프 두바이, 키아프 로스앤젤레스를 열려고 한다”며 포부를 밝혔다.
 
  해외 진출은 좋다. 문제는 콘텐츠다. 한국의 화랑들이 세계 예술계 트렌드를 읽는 감각과 중장기적 안목에서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안목과 자원을 갖추고 있을까. 아트 페어는 결국 예술적으로 포장된 고도의 자본 거래 시장이다. 세계의 컬렉터들을 페어로 끌어모을 수 있을 만큼 고도화된 페어 운용 능력을 한국화랑협회가 되도록 빨리 습득할 수 있을까. 한국 화랑계의 과제다. 이건 정부가 나선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프리즈가 런던에서 출범하자마자 성공한 것은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트렌드를 잘 읽은 《프리즈》 매거진 경영진들의 감각, 영국의 메이저 화랑들의 뒷받침,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마크 퀸 등 영국의 젊은 예술가들(YBA·Young British Artist)의 부상, 도이체방크 같은 후원 기업과 찰스 사치 같은 슈퍼 컬렉터들도 페어가 자리 잡는 데에 기여했다.
 
 
  프리즈가 남긴 고민
 
  박경미 PKM 갤러리 대표 역시 작가 양성을 말했다.
 
  “해외에 소개할 수 있는 작가들을 발견하고 키워야 합니다. 윤형근 작가의 경우, 그분의 작품세계를 믿고 장기적으로 바라봤어요. 예를 들면 처음부터 원칙을 세워 작품의 가격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윤 작가의 작품을 가장 많이 거래하는 프라이머리(Primary) 갤러리인데, 저희가 가격을 타협하면 결국 그게 시장 가격이 되거든요.”
 
  한국화랑협회는 프리즈와 올해부터 5년간 함께 아트 페어를 연다. 프리즈의 사이먼 폭스 최고경영자(CEO)는 “서울에서 (프리즈 서울) 100주년을 기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다소 외교적인 발언으로 첫 개최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5년 후 키아프는 프리즈와 비교해 어떤 위상을 갖게 될까. 5년 후, 10년 후 한국 미술계엔 세계 미술 흐름을 주도하는 작가와 갤러리들이 얼마나 존재할까. 막이 내리고 고민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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