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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입수] 이건희 삼성 회장의 생생한 육성으로 듣는 ‘삼성 新경영’(1993~1996)(3) 삼성 秘史 1편

汎삼성가는 왜,어떻게 분리됐나

글 : 권세진  월간조선 기자  sjkw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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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들과의 갈등 “좋은 건 지들이 하고 책임만 내가 지란 말이가?”
⊙ 이건희, ▲반도체 집중 및 그룹경쟁력 강화 ▲이병철 체제 탈피 ▲형제간 갈등 이유로 삼성그룹 계열 분리
⊙ 한국비료·CJ·신세계·한솔… 이건희는 어떻게 해결했나
⊙ “(형제들) 예우를 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어!”
⊙ 이건희가 가장 미워한 사람은 손경식 CJ 회장 “(CJ는) 재현이 준 거지 손경식 준 게 아니라고!”
⊙ 이건희, 손경식 미행 직접 지시했다!
⊙ 이인희(한솔)-이명희(신세계)-손복남(CJ)-홍라희(삼성), 汎삼성가 여성들의 복잡한 관계
  《월간조선》은 2020년 10월 25일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사망 후 이 회장의 육성을 담은 테이프를 단독입수해 그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 육성테이프는 이건희 회장이 ‘신(新)경영’을 선언한 직후인 1993~1995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이뤄진 신경영 선언 및 범(汎)삼성가의 계열 분리와 관련된 내용이다.
 
  《월간조선》은 앞서 두 차례에 걸쳐 이 회장의 경영관(觀)과 인간관에 대해 소개한 데 이어 이번 호에는 범삼성가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이 회장의 육성을 인용, 재구성해 소개한다. 이 회장이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1990년대 초반 이 회장의 형제들은 각각 한솔(이인희), CJ(이맹희), 새한(이창희), 신세계(이명희) 그룹으로 분리 독립했다. 테이프에는 이 회장이 이 과정에서 겪은 인간적인 고뇌가 드러나 있다.
 
 
  삼성그룹은 왜 갈라졌나
 
1987년 11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장례식에 모인 아들들. 오른쪽 남성부터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 3남 이건희.
  삼성은 1938년 이병철 창업주가 대구에 삼성상회를 개업한 것이 시작이다. 당시 29세던 이병철은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세웠다. 농산물과 별표국수 등을 판매했던 삼성상회는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해 몸집을 불린 후 1948년 서울에서 조홍제(전 효성그룹 회장)와 함께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며 서울에 자리 잡았다. 삼성은 6·25 이후 성장속도가 빨라졌으며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해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1963년 동방생명과 동화백화점을 인수했고, 1965년 《중앙일보》를 창간하고 새한제지를 인수해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삼성은 1969년 삼성전자 설립 후 1970년대에는 전자, 섬유, 화학, 건설, 관광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987년 이병철 회장 사망 후 이건희 부회장이 회장직을 승계하면서 1990년대에는 이병철 회장의 자녀들이 기존의 계열사들을 나눠 갖는 계열 분리가 이뤄졌다. 이때 CJ, 신세계, 한솔, 새한그룹이 분리됐다.
 

  삼성그룹의 공식 후계자였던 이건희 회장이 계열사들을 모조리 장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시켰던 배경에 의문을 갖는 사람도 많다. 범삼성가인 삼성, CJ, 신세계 등이 지금 하나의 그룹이라면 삼성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슈퍼 대기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은 늘 우리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조해왔다. 그런 그가 그룹을 분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육성테이프에 그 답이 있었다.
 
 
  대기업의 문제점을 일찌감치 파악한 이건희
 
범삼성가 가계도.
  이건희 회장은 1993년 6월 신경영 선언 후 2~3년간 계속 계열 분리에 관심을 쏟는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27시간 분량의 육성테이프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던, ‘이건희 회장이 그룹을 분리하려고 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반도체 등 삼성 주력 업종을 키우기 위해서는 비주력 업종을 분리시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각 계열사가 오너십, 이른바 ‘이병철 오너십’하에 일률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을 탈피하려 한 것이다. 세 번째는 이 같은 상황에서 그동안 생겼던 형제들과의 의견충돌이 가시화됐기 때문이다.
 
  1) 반도체에 집중
 
  이건희 회장은 1980년대 초반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시절 삼성전자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는 데 깊이 관여하면서 반도체 산업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반도체가 미래의 한국을 먹여 살릴 신사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회장 취임 후 반도체를 그룹의 주력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을 굳건히 하게 된다. 이전까지 삼성그룹의 주력은 긴 역사를 가진 제일모직, 제일제당, 제일합섬 등이었고 이건희 회장은 이 주력 계열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없었다. 형제들도 삼성전자와 인연이 없었다. 이 회장은 자신의 그룹 내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산업이 바로 전자와 반도체라고 판단하게 된다.
 
  전자와 반도체가 확실한 미래산업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집중하기로 한 이 회장은 ‘선택과 집중’에 꽂힌다. 노동집약적인 산업인 제당, 모직, 합섬 등이 21세기에는 높은 이익을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봤기 때문이다. 이에 이 회장은 전자와 서비스업을 그룹의 주력으로 하고, 다른 산업은 분리시킬 계획을 세운다.
 
  “삼성은 전자, 중공업, 제2금융만 주로 한다는 거. 지금 제당, 모직, 합섬 들고 있어 봐야 골치만 아프고 이익은 이익대로 안 나. 풀어줘서 네 멋대로 해봐라 하면 (잘될) 확률이 더 많지 않으냐 하는 생각이야. 삼성은 삼성다운 거를 하면서 세계 일류, 고부가가치로 가야 돼.”
 
  “삼성에서 떼어낼 업종이 뭐냐, 삼성이 더 깊이 들어갈 업종이 뭐냐, 그 업에서 내 위치가 어디냐 이걸 완전히 분석을 해야 돼. 조선(造船) 같은 건 처음부터 안 했어야 되는 거야. 중공업 같은 것도. 삼성 장래, 임직원의 장래, 전 그룹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각 팀 각 부서에서 매일 걱정해야 되는 거야. ”
 
  “제당이고 합섬이고 빨리빨리 빼내고 내 대(代)에서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야.”
 
 
  2) 이병철 그늘에서 탈피
 
  이건희 회장이 계열 분리에 속도를 낸 데는 ‘이건희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 회장이 그룹 회장에 취임한 시점은 만 45세, 한국 나이로 46세 때다. 대부분의 삼성 임원이 이 회장보다 5세 이상 나이가 많았고 비서실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실제로 신경영과 질(質) 위주의 경영을 주창한 것은 회장 취임 직후인 1988년 초다.
 
  그러나 이병철 체제에 물들어 있던 50대의 임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싹 바꾸라”는 젊은 회장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이 회장은 취임 후 1993년 신경영 선언 전까지 비서실장을 세 차례 교체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당시 삼성건설 대표이사인 현명관 사장으로부터 “지금처럼 그룹 전체가 일률적으로 돌아가는 체제가 아닌, 업종별 소그룹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경쟁력 강화와 효율성 증대를 위해 중점산업이 아닌 계열사는 떼어내고 대그룹을 소그룹으로 분류하는 시스템을 구상한다. 이는 업무 효율성 증대와 함께 ‘이건희 체제’를 탄탄히 하는 뒷받침이 됐다.
 
 
  3) 형제들과의 관계
 
  이병철 회장 사후 이건희 회장은 형들인 이맹희-이창희와의 불편한 관계에 이어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누나(이인희)와 여동생(이명희)과도 미묘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형제들은 그룹 내에서 자신의 몫을 갖고 있었는데, 삼성전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계열사는 수익성이나 미래 성장가능성에서 불안요소가 많았다. 비주류 계열사를 갖고 있던 형제들은 대부분 그룹을 물려받은 이건희 회장이 자신들의 수익 문제와 유동성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고 있었고, 이 회장도 이를 알고 있었다. 이 회장은 결과적으로 계열사들의 부담을 상당 부분 떠안게 된다. 한솔, 새한의 경우 계열 분리를 조건으로 삼성에 회사 인수금액 현금일시정산과 자금지원 등의 요구를 하는 내용이 테이프에 담겨 있다. 비서실은 “우리에게 그만한 현금 동원력이 없다”고 하소연하기도 하고, 이 회장은 “좋은 건 지가 다 하고 책임은 여기서 지란 말이가?”라고 투덜대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겪은 이건희 회장은 이병철 창업주 시절부터 이어온 기업과 재단 등을 1990년대에 어떻게 정리하고 되찾았을까. 삼성의 알려지지 않은 사사(社史)를 이 회장 육성을 통해 소개한다.
 
 
  ‘이병철의 눈물’ 한국비료 재인수
 
  이병철 회장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한국비료를 설립한다. 그러나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를 반강제적으로 국가에 헌납하고 경영 일선에서 1년여간 물러나고 삼성과 박정희 정권의 관계도 악화됐다. 이건희 회장은 이 사건이 정치권의 공작과 집안 내 인물들의 밀고에 의한 합작품이라는 의구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 한국비료가 1994년 시장에 매물로 등장한다. 이건희 회장은 선친이 애착을 가졌던 이 회사를 되찾기 위해 입찰에 들어가려 하는데, 당시 제조업계의 강자였던 현대그룹이 이를 인수하기 위해 나섰다. 이 회장은 이 사실을 듣고 매우 언짢아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한국비료를 되찾으라”고 지시한다. 그는 현대에 대해 “과거사를 다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인간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등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현대의 일을 방해하라는 지시도 한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그룹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 한국비료에 대해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입찰금액으로 수백억, 천억원을 더 써서라도 반드시 삼성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입장을 이야기한다.
 

  “끼어드는 현대가 정신 바짝 차리게 하라고. (현대가) 나가는 모든 공사 수주에 우리도 다 참여해. 그들 하는 제일 좋은 업종에 다 들어가라고. (한국비료) 상황 다 알면서 끼어드는 건 인간 도리에 안 맞는 거야. (입찰금액) 천억원 더 써도 상관없어.”
 
  이 회장의 집념으로 한국비료는 경쟁사보다 수백억원 더 많은 금액을 써낸 삼성의 품으로 들어왔고, 삼성정밀화학이라는 이름으로 삼성그룹 계열사가 됐다. 이 회사는 삼성이 2015년 화학 분야에서 손을 떼면서 롯데로 넘어갔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 이후의 일이다.
 
 
  이인희의 한솔그룹
 
1972년 이병철 회장 장충동 자택에서 이병철 회장과 이인희, 이건희, 이명희, 이재용이 함께 찍은 사진.
  이병철 회장의 첫째인 고(故) 이인희 한솔 고문은 아버지를 닮은 총명함과 대범함으로 부친의 총애를 받았다. 아들이었다면 이견 없이 삼성을 물려받았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고, 삼성그룹 사람들은 모두 이인희 고문을 ‘이 고문’이라는 호칭으로 존경심을 담아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인희 고문은 한솔그룹의 전신인 전주제지를 맡고 있었으며 강북삼성병원 조운해 이사장과 결혼했다.
 
  한솔그룹은 1991년 삼성에서 독립했지만 2~3년 후에도 이건희 회장은 이인희 고문과 강북삼성병원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강북삼성병원의 전신은 1968년에 이병철 회장이 설립한 고려병원이다. 1991년 한솔그룹이 독립하던 시점에 삼성그룹에서 분리돼 고려의료원이 됐지만 1994년 삼성그룹에 재인수되면서 강북삼성병원이 됐다.
 
  삼성 재인수 전인 1994년 초 당시 고려의료원의 경영상태는 좋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상태였다. 한솔그룹에서 이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이인희-조운해 부부는 삼성이 병원을 인수해달라고 제안했다. 이 회장은 그들이 비싼 값에 삼성으로 떠넘기려 한다고 생각했고, 삼성 임원들 역시 이 점을 우려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아버지가 만든 고려병원은 결국 우리가 가져와야 할 곳” “삼성이 만든 게 2류나 3류로 떨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다”며 병원 측의 요구에 맞춰 인수하게 된다. 한솔제지가 《중앙일보》에 신문용지를 공급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중앙일보》는 이 회장의 처가이면서 이 회장이 삼성 임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국제 지가(紙價) 폭등으로 신문사들이 경영난을 겪을 때에도 《중앙일보》는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았고, 이 같은 이유로 이 회장은 한솔제지에 대한 지원에는 적극적이었다.
 
  또 이 회장은 큰누나이며 선친이 총애했던 이인희 고문에 대해서는 형제 중 유일하게 예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고문은 이건희 회장보다 14세가 많다. 그룹 계열 분리 기간 내내 다른 형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언급을 거의 하지 않는 이 회장이 이 고문에 대해서는 “남매간에 잘 지내야 되지 않나”라는 말도 한다.
 
 
  이맹희-이재현의 CJ
 
  삼성에서 분리된 그룹 중 유일하게 삼성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곳이 CJ다. 신세계와 한솔, 새한그룹은 오너가 이건희 회장과 적당한 타협을 통해 계열 분리를 마무리 지었지만, CJ와 삼성은 서로 오너 간 재산소송, 미행, 업무방해 등의 법적 문제가 얽히면서 두 그룹은 완전히 갈라서게 됐다.
 
  제일제당 계열사들은 1993년 7월 삼성에서 분리됐는데, 이 회장은 제일제당의 분리독립 배경에 이맹희의 처남(이맹희의 처 손복남의 동생)이며 이재현의 외삼촌인 손경식 CJ 회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손 회장은 경기고-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삼성에 입사, 삼성화재 대표이사를 거쳐 제일제당 분리 후 CJ 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이 회장의 손 회장에 대한 분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특히 이 회장이 1994년 측근인 비서실 소속 이학수 부사장을 제일제당에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보냈지만 제일제당의 반발로 이 부사장이 사실상 ‘왕따’를 당한 사실을 보고받고 격노했다. 당시 손경식-이재현은 “이건희가 회사를 빼앗으려 하는 것”이라고 반발, 사원들에게 “CJ를 지켜야 한다”고 독려하며 이학수 부사장을 업무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회장은 이 사건 이후 CJ와 손 회장 압박에 나선다.
 
  “제일제당은 (이병철) 회장이 장손인 재현이한테 준 거지 손(경식)한테 준 게 아니야. (중략) 제일제당이 땅이나 빌딩 산다는 정보 있으면 우리가 다 사버려. 손(경식)이 있는 이상은 삼성이 제당을 철저하게 견제할 거야. 대한민국에서 얼굴 못 들고 다니게 하겠다고.”
 
  “내 경영관이 달라졌다고. (내가) 3남이라고 (형제들) 예우를 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어. 이럴려면 세상에 기업을 할 필요가 어디 있어?”
 
  이후 제일제당을 그대로 둬선 안 되겠다고 판단한 이 회장은 제일제당에서 가장 미래가치가 높은 분야를 가져오기로 결심한다. 이 회장은 의료산업과 제약산업이 21세기의 주력산업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당시 계열사 중 제약·바이오 분야 사업부가 있는 곳은 제일제당뿐이었다. 이에 제일제당의 제약 분야를 떼어내서 삼성으로 가져오기로 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일제당의 제약 부문 인력을 몽땅 데려오라며 구체적인 방안도 직접 지시한다.
 
  “우리가 제당은 못 뺏어도 제당의 장래성 있는 사업은 가져와야겠다는 거야. 삼성 이름 붙이기 좀 그렇다면 우리 중역 이름으로 제약회사를 만들고 일원동 병원(삼성의료원)에 제약연구소를 만들어서 최고급 제약을 만들고. 제일제당 의료사업부 사람 몽땅 다 데려와버려. 우수한 사람은 물론이고 B급이라도 다 데려와. (삼성)지역전문가 갔다 온 사람도 다 데려오고.”
 
  이후 삼성과 제일제당은 수년간의 갈등(아래 박스기사 참조)을 거쳐 1997년 법적으로 완전히 분리된다.
 
삼성의 CJ 미행사건
 
  이건희, 손경식 미행 직접 지시했다!
 
이건희 회장 사망 다음 날인 2020년 10월 26일 오후 손경식 CJ 회장이 빈소를 찾았다.
  삼성과 CJ의 감정싸움이 외부로 드러난 것은 2012년 2월 CJ 측이 “삼성 직원이 이재현 회장을 미행했다”고 고발하면서다. CJ 측은 불특정 인물들이 이 회장의 서울 장충동 자택 부근에서 미행해 업무를 방해했다며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재현 회장의 부친인 이맹희씨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상속 재산 일부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직후여서 두 그룹의 사이가 주목받았다. 고발된 삼성 계열사 소속 직원들은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경찰은 삼성 직원들이 미행 사실을 보고하고 지시받은 ‘윗선’은 밝혀내지 못한 채 수사를 종료했다. 당시 여론은 “삼성이 미행까지 하느냐”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삼성의 미행은 이보다 20여 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관행이다. 과거부터 이건희 회장이 직접 미행을 지시했고, 이 때문에 삼성은 미행에 크게 문제의식이나 죄의식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이 회장이 직접 미행하라고 지시했던 대상은 CJ의 손경식 회장이다. 미행을 시킨 것은 물론, 손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기 위해 손 회장 자택의 앞집을 확보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이와 관련한 1994년 이 회장의 육성이다.
 
  “어쨌든 신경 쓰게 만들어. 따라다녀서 피하면 또 따라다니고. 며칠 놔뒀다 또 다니고. 한 달 두 달만 하면 사람 미친다.”
 
  “(손경식) 앞집은 알아봤어? 주인 찾아가서 삼성이 대관하겠다고, 정당한 기업활동이라고 협조를 요구해 봐. 적당히 얘기를 하면 될 거 아냐. 더 좋은 집으로 구해주겠다 하든지, 우리가 이사하게 되면 그냥 주겠다고도 해봐.”
 
  “손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보고해. 일일보고 하라고. 조금이라도 뭐 한 거 있으면 바로 보고해.”
 
  이 회장이 손경식 회장에 대해 유독 분노한 것은 삼성의 주요 계열사를 혈육이 아닌 외부인, 그것도 장손(長孫)의 회사를 외가(外家)에 뺏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명희의 신세계
 
1997년 이병철 10주기 추모식에서 가족 대표로 참석하여 추모사를 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
  이건희 회장의 여동생 이명희 회장이 이끄는 신세계는 1991년 삼성에서 분리됐다. 하지만 계열 분리 이후에도 신세계는 여전히 유통업계의 2인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강남구의 영동백화점과 관련한 보고를 받고 이건희 회장은 화를 낸다. 영동백화점은 외환위기 이후 경영위기에 처하면서 신세계가 경영위탁을 받아 운영 중이었는데, 나산그룹이 이를 아예 인수해 직접 운영하겠다고 했지만 신세계가 자신들의 위탁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보고였다. 당시 신세계는 백화점업계에서 롯데에 크게 뒤처지는 상황이었다. 나산이 신세계의 위탁경영을 거절하고 직접 운영을 하려 한 것도 신세계의 경영방식을 믿지 못해서였다.
 
  이 회장은 “(신세계는) 왜 백화점 운영의 본질을 모르느냐”고 화를 낸다. 신세계가 잘못되면 이미 계열 분리가 됐더라도 아직 사람들은 신세계를 ‘삼성이 운영하는 백화점’으로 알고 있고, 삼성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세계가) 유통업의 본질을 모른다는 거야. 롯데 다음가겠다고 하는데 롯데랑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이렇게 하다가는 3류로 떨어져. 진심으로 하지 않고서는 2등 지키기도 어렵다고. 이러다가는 3등으로 떨어지지 그대로는 안 될 거야. 내가 명희를 미워해서 뭐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고. 위기의식을 갖고 이걸 극복하려면 삼성과 오빠의 힘이 필요하다고 얘기해줘야지.”
 
  삼성은 1990년대 중반 경기도 분당에 대형 삼성플라자 백화점을 설립하기로 했는데, 이때 신세계는 노골적으로 삼성 측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 회장은 “신세계 너희가 경쟁력을 키우면 될 것 아니냐”라고 강조한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의 모든 계열사가 1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고, 이미 독립한 회사들 역시 1등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신세계에 불만이 많았다.
 
  “명희가 우리 집사람한테 그랬대. 같은 종류의 백화점을 삼성하고 신세계가 하는 거는 어른하고 애 싸움 아니냐고. 그럴 거면 제대로 해야지. 남대문 백화점 비슷하게 해놓고 말이야. 회장 비서실 점심 식사 할 때 과일을 신세계 거 사 오나? 아니잖아. 떨어져 나가고 나서도 걔들이 문제가 됐잖아. 집안싸움 남 보기 창피하다고. 우리(삼성)는 특화를 할 거야. 과학, 애들 교육, 이런 거. 신세계랑 비슷한 장소면 상의해서 사이좋게 하면 돼. 우리가 분당 백화점 하려는 게 백화점 하려고 땅 산 게 아니잖아? 수원 기흥 용인에 공장이 있으니 분당에 사무실이 필요한 거고. 서로 안심도 시키고 긴장도 시키고 좀 해야지.”
 
 
  이창희의 새한
 
  이건희의 둘째 형 이창희는 1970년대 새한전자와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 등을 맡아왔다. 그는 1980년 새한미디어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지만 1991년 백혈병으로 급사했고, 이후 아내 이영자와 아들 이재관이 회사를 맡는다. 새한미디어는 1995년에는 삼성그룹에서 제일합섬을 넘겨받아 새한그룹을 완성한다. 이 역시 동생이 장악한 그룹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창희 일가와 합섬 등 비주력 산업을 떼어내고자 했던 이 회장의 뜻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 과정에서도 이건희 회장은 자신에게 부담을 떠넘기고 독립하려는 새한그룹에 섭섭함을 표시하지만, 더 큰 뜻을 위해 이를 무마한다.
 
  1994년 어느 날 이 회장에게 비서실장이 “새한이 연말까지 분리를 할 것이며, 우리가 인사(人事)나 감사(監査)는 하지 않고 제일합섬 독자적으로 하도록 하고, 삼성은 노사관리 차원의 지원, 정보 공유, 자금 등 면에서 많이 도와달라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하자 이 회장은 “좋은 건 지가 다 하고 책임은 여기서 지란 말이가?”라며 살짝 짜증을 내지만, 결국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이 회장은 사실상 독립한 계열사들의 부담을 상당 부분 떠안고서야 계열 분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룹 계열 분리를 대부분 마무리한 이건희 회장은 형제들에 대한 섭섭함과 한탄을 늘어놓기도 한다.
 
  “삼성은 잘되고 자기들은 못되니까 나한테 약물중독이니 능력 없다느니 해놓고….”
 
  이건희 회장은 창업주의 3남으로 장자상속(長子相續)의 관행을 깨고 국내 최대 기업을 물려받아 세계적인 그룹으로 키워낸 입지전적 기업인이다. 그러나 그의 이면에는 피를 나눈 형제들과 치러야 했던 외로운 경쟁이 있었다.⊙
 
삼성家의 여성들
 
2015년 이맹희 CJ 명예회장 빈소를 찾은 홍라희 삼성박물관 리움 관장(오른쪽)과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건희 회장은 삼성가 여성들의 관계에도 신경을 썼다. 1990년대 삼성가를 좌지우지한 여성으로는 이병철 회장의 첫째인 고(故)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병철 장남 이맹희의 부인 손복남 CJ 고문, 이건희 회장의 동생 이명희 신세계 회장이 있다. 여기에 그룹 회장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까지, 여성들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작고한 이인희 고문은 이병철 회장이 매우 총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철 회장은 “인희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노” 하며 한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손복남 고문은 경기도지사·농림부 국장·안국화재 사장을 지낸 손영기의 딸로 ‘서울대 법대 3대 천재’로 불렸던 손경식(CJ 회장)이 그의 동생이다. 손 고문은 어린 시절부터 혼인을 맺기로 돼 있던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와 결혼하면서 삼성가의 맏며느리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이명희 회장은 막내로 어린 시절부터 온 집안의 귀여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라희 전 고문은 1980년대 후반부터 그룹 공식 후계자의 부인으로 삼성가 ‘퀸’의 지위를 갖게 됐다. 이 네 여성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펼쳐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이병철의 딸 이인희와 이명희, 며느리 손복남과 홍라희는 모두 삼성그룹 내에서 큰 영향력이 있었고, 이들은 이해득실에 따라 손을 잡게 된다.
 
  이건희 회장 역시 이런 역학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전략상 명희를 이쪽으로 데리고 와야지. 이 고문(이인희)은 고립을 시켜버리고.”
 
  “명희가 이쪽으로 가까워지면 손복남이 고립이 되지. 손복남하고 이인희는 맞지를 않아. 명희하고 손복남은 좀 통하고.”
 
  홍라희 전 관장은 맏며느리는 아니지만 회장 부인으로 사실상 그룹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제일제당 계열 분리를 전후해서는 이맹희-손복남의 자녀인 이재현(현 CJ 회장)과 이미경(현 CJ 부회장) 남매를 불러 “작은아버지(이건희)를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훈계도 한다. 앞서 CJ 단락에서 서술한 ‘제일제당 이학수 왕따 사건’ 직후다. 홍 전 관장은 “이학수 부사장이 너무너무 망신을 당하고 돌아왔다”며 이 사건을 제일제당 측이 해명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미키(이미경의 아명이자 미국 이름)야. 작은아버지(이건희)가 어머님(손복남)한테 당한 쇼크에, 이렇게 믿어왔던 사람들한테까지 당하시니 곡기를 끊고…. (중략) 작은아버지는 외삼촌(손경식)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데. 너희는 그게 아니라니 재현이도 미키도 너희가 제대로 어머님을 인도를 해야 효도하는 거야. 너희 각오를 반드시 다시 한 번 작은아버지에게 잘 말씀드려.”
 
  홍 전 관장은 이화여대에서 삼성이 크게 협조해주길 바라지만 본인이 나서기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에둘러 시누이들을 언급하기도 한다. 홍 전 관장은 서울대,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연세대, 차녀 이서현은 미국 파슨스디자인학교를 졸업했다. 이인희 전 고문과 이명희 회장, 손복남 고문은 모두 이화여대 출신이다. 홍 전 관장은 삼성 비서실장에게 이런 얘기를 털어놓는다.
 
  “이화여대에서 (이건희) 회장님이 여성 리더십을 강조하니까 삼성이 크게 협조를 해주길 바란다고요. 사실 저도 우리 애들도 이화여대에 인연이 없는데… 고모님들 있으니 한솔이나 신세계 가보시라고 했어요(웃음).”
 
  범삼성가의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집안 사람의 장례식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룹 분리 후 이병철 회장의 추도식에는 함께 모였지만, 삼성과 CJ의 충돌 이후 2012년부터 장손인 CJ 이재현 회장과 삼성 이재용 부회장 일가가 추도식을 따로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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