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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金宇中의 대우’ 소멸 그 후 20년

‘대우 DNA’는 아직 살아 있다!

글 :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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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경영’으로 5대양 6대주 호령하던 대우그룹의 몰락
⊙ 사라진 줄 알았던 ‘대우 DNA’ GYBM(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사업) 프로그램 통해 ‘기지개’
⊙ “GYBM 출신들, 교포사회의 중추로 거듭날 것”
⊙ 수익성 보장 안 됨에도 베트남에 15억 달러가량 투자한 대우
⊙ 대우 계열사 인수한 某 기업이 이상하게 여긴 ‘대우의 독특한 시스템’
⊙ “대우, 다른 대기업에 비해 로비력 없었다”
⊙ 김우중과 노무현의 惡緣… 김우중 사면은 정작 盧 정권 시절 이뤄져
대우그룹은 물론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이었던 서울역 앞 대우센터빌딩(현 서울스퀘어 빌딩).
  “대우그룹 12개 핵심 계열사가 결국 워크아웃에 들어간다. 100개 대우 채권금융기관(외국계는 제외)은 26일 오후 6시 은행회관에서 협의회를 열고, 대우를 워크아웃에 넣기로 전격 결정했다. 이에 따라 대우그룹은 사실상 해체되고, 공식적으로 은행 관리를 받게 됐다.”
 
  ‘거함(巨艦)’ 대우그룹의 해체를 알리는 1999년 8월 27일 자 《조선일보》 1면 톱기사의 첫 머리다. 자산 78조원, 매출 61조원(1998년 기준, 금융법인 제외)의 현대그룹에 이은 재계 2위의 대우는 창립 32년 만에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올해는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 해다. ‘세계 경영’으로 5대양 6대주를 호령하던 대우그룹은 왜 그렇게 속절없이 무너졌던 걸까. 그 과정에서 ‘승부사’ 김우중(金宇中) 회장은 왜 속수무책이었던 건가.
 
 
  유동성 압박에 시달린 ‘대우’
 
  1997년 ‘외환위기’로 대표되는 IMF의 파고(波高)를 대우그룹도 피할 수 없었다. 1998년 상반기부터 IMF발(發) 고금리 정책, 금융·기업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대우에도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금융 당국이 부실 금융기관 정리를 위해 BIS 비율(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 적용 기준을 강화하자, 시중 은행들은 BIS 비율을 맞추기 위해 기업에 대출했던 자금 회수에 나섰다. 1998년 한 해 동안 금융 부문은 기업 부문으로부터 약 15조원을 회수했다. 1997년 금융 부문이 기업 부문에 43조원을 공급하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액수를 거둬들인 것이다.
 
  이러한 금융 경색으로 대우는 극심한 유동성 압박에 시달렸다. 돈줄이 막히자 대우는 급한 대로 단자(短資·CP)와 회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98년 7월 22일 정부가 ‘CP 발행제한 조치’를 단행하자, 대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대우가 CP 한도를 초과하는 걸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CP 한도를 줄이도록 대우를 조여왔다. 같은 해 10월 27일 발표된 ‘회사채 발행한도 제한 조치’도 대우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98년 10월 29일 나온 ‘노무라증권’ 보고서는 대우에 대한 시장(市場)의 불신을 더욱 증폭시키는 꼴이 됐다.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제목의 보고서는 대우가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할 방도가 없다고 지적한 것이다. 보고서는 “회사채 보유에 대한 금융기관의 제한 조치는 대우그룹에 비상등이 켜지게 만들었다”면서 “유일한 대안은 자산매각밖에 없어 보이나 M&A(기업인수합병) 시장에서 투자가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회사나 자산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대우 채권단의 實査 결과
 
  진퇴양난에 빠진 대우는 결국 정부와 채권단에 의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워크아웃 이후, 채권 은행단은 회계법인을 통해 대우 12개 계열사를 실사(實査)했다. 그 결과, 대우의 자산이 장부상 가치보다 훨씬 적고 부채 규모는 더 크다고 결론내렸다.
 
  대우 12개 계열사의 재무 상태를 보면 장부상 자산은 91조8000억원, 부채는 77조7000억원으로 자산이 부채보다 14조1000억원 많은 우량기업 상태였다(1999년 6월 말). 그러나 실사 이후 같은 해 8월 말 자산은 61조2000억원, 부채는 86조8000억원으로 부채가 자산보다 25조5000억원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12개 계열사 여신 회수율을 50%로 가정하고 실사)
 
  실사 이후 부채가 9조원가량 증가한 이유는 부채로 보지 않은 채무를 부채로 봤기 때문이다. 가령 대우 계열사들이 다른 회사에 보증을 선 뒤 원채무자가 갚을 수 있다고 판단해 부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나, 실사 결과 갚을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게 당시 회계법인의 판단이었다.
 
  12개사의 자본잠식 규모는 모두 26조원에 달했다. 그룹 지주회사 역할을 한 ㈜대우의 자산 부족액이 14조5000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대우자동차(5조700억원), 대우전자(2조6800억원), 대우통신(3300억원)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회계법인이 대우 부실의 원인 중 하나로 꼽은 건 바로 ‘밀어내기 수출’이었다. 국내 공장에서 만든 대우자동차가 직접 대우자동차 현지 법인으로 수출해도 되는데, ㈜대우를 통해 나가면서 장부상 거래 규모가 더욱 부풀려졌다는 주장이다. 밀어내기 수출로 인해 외상매출금 등 매출채권이 급증했고, 현금 흐름이 악화돼 장부상 많은 이익을 냈으나 운전자금은 부족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김우중의 작심토로
 
김대중(DJ) 대통령과 악수하는 김우중 전 회장. 김 전 회장과 전직 대우 간부들은 대우그룹이 DJ 정권의 ‘의도’ 아래 해체됐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진=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김우중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절치부심하다가, 2014년 발간한 《김우중과의 대화》를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은 대우 해체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이 책에서 김 회장은 김대중(DJ) 정부 경제 고위 관료들과의 불화(不和) 등을 언급하며, 대우 해체가 DJ 정부의 ‘의도’ 아래 진행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먼저 대우의 유동성 문제에 대해 김우중 회장은 “우리에게 무슨 큰 문제가 있어서 갑자기 단기차입금을 늘린 게 아니다”라며 “제일 문제가 된 것은 수출 관련 금융이 막혔던 것”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수출 금융이 막혀서 할 수 없이 단자, 회사채로 돈을 빌려야 했으니까 그게 단기차입금이 된 것”이라며 “금융시스템이 정상이었으면 빌릴 필요가 전혀 없었던 돈”이라고 반박했다.
 
  ‘밀어내기 수출’에 대해선 “실적 올리기 위해 내보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밀어내기 수출’에 문제가 있었다면, 회계법인의 실사 과정에서 과잉재고 문제가 제기돼야 했으나 그에 대해선 아무 얘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가 우리에게 ‘밀어내기식 수출과 이로부터 창출된 매출채권을 기반으로 운전자금을 조달하는 행태를 계속했다’는 것은 상황을 거꾸로 얘기한 것”이라고도 했다. 김 회장은 당국의 이러한 조치에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김우중 회장을 비롯한 대우 전직 고위 간부들은 그룹 해체 당시, DJ 정부가 제기한 ‘대우 부실’ 주장이 사실과 다르고 과장된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대우 측은 2014년 〈대우 해체 관련 ‘잘못된 인식’과 ‘실체적 진실’〉이란 A4 용지 26쪽짜리 보고서를 작성했다. 양측의 입장을 비교하면 왼쪽 표와 같다.
 
  IMF 외환위기 전후로, 수많은 대기업이 간판을 내리며 그 이름 또한 관(棺) 속으로 들어간 경우가 허다하다. 대우는 다르다. 아직도 대우의 흔적은 우리 주변 곳곳에 남아 있다. ‘대우건설’을 비롯해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 ‘대우조선해양’(옛 대우중공업 조선해양 부문),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 ‘포스코인터내셔널(옛 ㈜대우무역 부문)’ 등이 그 명맥(命脈)을 이어가고 있다.
 

 
  GYBM 통해 부활한 ‘대우 DNA’
 
  이 기업들이 아직까지 대우란 브랜드를 유지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대우가 국내는 물론 세계 전역에 남긴 족적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우그룹은 사라졌어도, 오랜 시간 대우가 뿌린 씨앗의 수와 그로 인해 거둘 열매는 아직 존재한다는 의미일 게다.
 
  김우중과 대우는 다수의 ‘국내 기업 최초’란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김우중은 한성실업에 근무하면서 국내 최초로 섬유제품 직수출을 성사시켰다(1963년). 대우는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1969년)를 설립했다. 그리고 국내 최초의 종합상사를 설립하기도 했다(1975년). 대우는 국내 최초로 아프리카(수단) 진출(1977년)에 성공했고, 미(未)수교국 12개국과 수교를 맺는 데 막후(幕後)에서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09년 전직 대우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GYBM(Global Young Business Manager·글로벌청년사업가양성사업)’이란 프로그램을 내놓아 주목받고 있다.
 
  GYBM은 “도전정신이 남다른 미래를 이끌어갈 해외지향형 젊은 인재들을 발굴해, 어학과 직무교육, 인성 등 글로벌 인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 체계적인 멘토링 시스템을 통해 차세대 ‘글로벌 비즈니스 리더’로 양성하는 사업”이란 모토를 내세우고 있다. 해외 대학과 산학(産學) 협력을 통해 우리 청년들이 현지 교육을 받은 뒤, 해당 국가에 취업까지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단순히 취업만을 목표로 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취업은 물론 해외에서 창업이 가능하도록 관리·지원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이다. 그 일환으로 10년 이후까지 고려한 중장기 계획하에 교육과 멘토링을 진행한다. 핵심은 ‘중급 이상의 어학 능력 습득’이며 해당 국가의 상황에 맞는 ‘기업 경영 관련 실무 직무능력 습득’을 목표로 한다.
 
  GYBM은 주로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등 성장 가능성이 높은 동남아 국가에서 실시한다. 2011년 베트남 1기 40명을 비롯해 2018년까지 1000여 명을 선발해 수료생 전원을 현지에 취업시켰다. 올해도 태국을 제외한 3개국에서, 총 150명을 선발해 지난 7월부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인터뷰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
 
  “금융 위주 정책 지양하고, 기간산업 관련 정책 나와야”
 
張炳珠
  1945년생. 서울대 섬유공학과 졸업, 아주대 경영대학원 석사 / 상공부 섬유공업국, 청와대 경제수석실 파견, 재무부 장관 비서관, ㈜대우 이사·상무·전무·부사장·사장 역임. 現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 대우재단 이사장
 
장병주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
  장병주(張炳珠·75)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회장은 GYBM 전도사이자 대우그룹의 산증인이다.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청와대·상공부·재무부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1979년 대우에 입사했다. 대우 입사 후, 관가(官街)에서 익힌 거시경제 철학을 실물경제에 접목했다. 장병주 회장은 김우중 회장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회장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장병주 회장이 그의 ‘창구’ 역할을 도맡아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외에도 전직(前職) 대우 임직원들의 구심점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 7월 4일 서울 퇴계로 대우재단빌딩에서 장 회장을 만나 대우 해체 20년의 소회와 GYBM 진행 상황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입니다.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룹 해체 후 10년이 지난 2009년의 일입니다. 그때 서울역 앞에 있는 ‘대우센터빌딩’ 이름이 ‘서울스퀘어’로 바뀌더라고요. 대우맨들에게는 아주 ‘쇼킹’한 일이었죠. 그 건물은 대우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근대화의 심벌(상징)이기도 하거든요. 사실 외국 같으면 이름만큼은 그대로 놔뒀을 거예요. 그걸 보면서 우리는 ‘진짜 대우라는 브랜드가 없어지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 2009년은 GYBM이 태동(胎動)한 해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대우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한 사람들의 모임인 ‘대우인회’가 있었어요. 그룹이 존재할 때는 임원이 되면 자동적으로 대우인회 회원이 됐어요. 월(月) 1만원씩 공제해 그 돈 가지고 경조사에 쓰는 그런 모임이었죠. 보니까 꼭 임원이 아니더라도 부·차장, 과장, 대리들도 아직 대우에 대한 로열티(충성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문호(門戶)를 좀 더 열어 ‘대우에 3년 이상 근무한 사람 중, 새로운 젊은 사람들을 모아보자’고 결심했습니다. 500명 정도 모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비(OB·Old Boys)와 와이비(YB·Young Boys)를 합쳐 4700~4800명이 모이더라고요. 이 모임이 지금의 대우세계경영연구회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사실을 김우중 회장에게 보고했습니다.”
 
  ― 김우중 회장은 뭐라고 하던가요.
 
  “구체적인 건 아니지만 ‘기왕 사람이 모였으니 국가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청년들을 위해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청년 취업이 어려우니까 ‘앞으로 청년들을 해외로 내보내자. 인구의 약 3분의 1이 해외 나가서 살아도 좋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저도 공감했고요. 우리는 기존 시장(市場) 중 제일 큰 중국, 일본, 미국, 유럽은 더 이상 커질 가능성이 없다고 봤어요. 앞으로 상대적으로 더 커질 수 있는 지역이 어딘지 봤더니 결국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2010년 한 해 동안 시장조사를 한 뒤 GYBM 사업에 착수하게 된 거죠.”
 
 
  GYBM의 첫발을 베트남에서 내디딘 이유
 
  ― 김 회장과 대우 전직 임직원들의 열정으로 탄생한 게 GYBM이란 말이군요.
 
  “김우중 회장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청년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커요. 100만 부 이상 팔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란 책을 쓴 것도 그런 연유죠. (김 회장은) 2018년 그 책의 증보판을 내면서 받은 인세를 GYBM 사업에 보태기도 했어요. GYBM은 김 회장이 주창(主唱)한 ‘세계경영’과도 맞닿아 있어요. 1993년 김우중 회장이 세계경영을 선언할 당시, 전 세계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어요.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1년 소련연방이 붕괴되면서 우리로서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 셈이거든요. 베트남도 그중 하나였어요.”
 
  ― GYBM을 처음 시작한 국가도 베트남 아닌가요.
 
  “그렇죠. 김우중 회장이 ‘앞으로 베트남이 제일 빨리 성장할 거다. GYBM 은 베트남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자’고 한 거죠. 2011년에 40명으로 시작했어요. 2012년에도 40명 정도 하다가, 2013년엔 정부의 일부 후원을 얻어 70명으로 확대했습니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돈이 많이 듭니다. 처음엔 후원금하고 대우 전직 직원들의 회비로 100% 충당했어요. 그러면 우리 자체로는 40~50명만 가능하지, 그 이상은 자금 여력이 없는 거예요. 마침 박근혜 정부 시절 ‘케이무브(K-move)’라는 청년들 해외취업을 지원하는 정책이 생겼습니다. 그때 우리가 신청해 추가 인원 양성을 위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죠.”
 
  ― 제가 알기론 그 예산이 되게 미미하던데, 1인당 800만원인가요.
 
  “시작을 800만원으로 했죠. 지금은 1350만원 정도로 올랐어요. (과거 대우가 운영하던) 아주대 총장과 기획재정부 장관 겸 부총리를 지낸 김동연씨가 GYBM을 잘 알아요. 김동연씨가 아주대 총장 시절,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GYBM 참여 청년들을 상대로 강연도 했고요. 그 후 김동연 총장이 부총리로 간 덕분인지 (정부) 지원금이 늘어난 거죠. 지금은 정부 예산 60%, 나머지 40%는 우리 자체 후원금 등으로 운영하죠. 그와는 무관하게 GYBM은 아주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 GYBM은 해외 취업뿐 아니라 창업까지 지원하는 걸로 유명합니다.
 
  “GYBM을 통해 육성된 청년들을 단순히 해외에 취업시키는 걸로 끝낼 게 아니란 생각을 했어요. 진정으로 우리 청년들에게 도움을 주는 길은 창업을 통해 더 넓은 세계에서 맘껏 활동하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멘토링 제도’를 만들어 대우 출신을 비롯해 삼성, LG, 현대 등 타 기업 출신들까지 초빙해 청년들에게 창업 멘토링까지 하고 있어요. 우리 자체 역량만으로 GYBM을 이끌어갈 능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에요.”
 
 
  “GYBM, 꼭 우리만 해야 한다고 생각 안 해”
 
GYBM 프로그램 중 연수생들을 상대로 강연 중인 김우중 전 회장. 사진=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 능력이 부족하다고요?
 
  “재정적 문제는 물론 인력도 부족해요. 현재까지 이 사업이 가능한 이유가, 예를 들어 한 국가에 GYBM 연수생을 보내려면 현지 대학과 MOU(양해각서) 계약을 합니다. 현지 대학은 현지어와 현지 역사·문화를 가르치고 나머지는 우리가 교과과정을 짜서 합니다. 베트남의 경우 국내 2개월, 현지 9개월로 총 11개월 동안 교육을 합니다. 100~150명 교육하려면, 이들과 24시간 침식(寢食)하며 관리할 ‘팀장’이 필요해요. ‘연수원장’ 자격을 갖춘 사람도 필요하고요. 팀장만 해도 오십 넘으면 힘들어요. 젊은 애들하고 함께하니까요. 베트남은 연수 인원이 100명 정도 되는데 원장·부원장·팀장, 이 세 명이 다 해요. 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는 팀장과 연수원장 둘이서 하고요. 제대로 교육하려면 인력이 더 필요하지만, 그 이상의 인력을 구하는 건 힘들더라고요. 인도네시아는 교육팀장 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수소문해 겨우 구했는데 3~4개월 일하더니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 비(非)대우 출신들이 있는데.
 
  “비대우인들과 함께해봤는데 이게 ‘대우정신이 있어야 가능하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으니 충분하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잖아요. 현지에 있는 대우 오비들도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고요. 우리가 이미 기본 골격은 만들어놨으니 다른 곳에서 본떠서 진행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 ‘대우 DNA와 GYBM 철학을 이어나갈 수 있다면 다른 곳에서 운영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네요.
 
  “그럼요. 결국 네트워크가 중요한 거잖아요. 올해까지 GYBM 졸업생이 1000명 정도 돼요. 한 해 약 150~200명 나오니까 앞으로 5년 하면 1000명에다 기존 1000명을 합하면 2000명이에요. 엄청난 수입니다. GYBM 졸업생들이 제대로 역할하면 해외 교포사회의 중추로 거듭날 겁니다.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동남아의 국부(國富)를 가져다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셈이죠. 그들 중에 ‘제2의 김우중’이 나와 창업하면 또 몇십만명을 고용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 굳이 동남아에만 국한시킬 게 아니라 미주(美洲), 유럽도 노려볼 수 있지 않습니까.
 
  “미국이나 유럽은 특별한 기술이나 아이디어 없이는 어려워요. 동남아는 틈새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동남아의 중소기업에는 한국인이 2~3명밖에 없거든요. GYBM 졸업생들은 현지어를 완전히 정복해 해외에서 뿌리박겠다고 나간 거니까 동남아 기업들이 군침을 흘릴 만하죠. 이들은 처음에 현지에서 월급을 2500달러 받았는데, 지금은 평균 4000달러 정도 받아요.”
 
  ― 엄청난 신장이네요.
 
  “아주 신이 나죠. 정말로.”
 
  ― 젊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거 아닙니까.
 
  “‘좋은 인재 교육을 해 양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죠.”
 
  ― 김우중 회장이 GYBM을 아주 세심하게 챙겼다는데, 어느 정도였나요.
 
  “요새는 건강이 안 좋아 서울에 들어와 계신데요, 처음 베트남에서 진행할 적에는 하나하나 다 챙겼어요. 직접 애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한 달에 한 번씩 불러 밥도 먹이고요. 하다못해 기숙사를 찾아가 ‘방 깨끗이 안 치운다’고 야단도 치셨어요. 취업하면 해당 회사를 쭉 다니면서 잘 적응하고 일할 수 있도록 부탁도 하고, 적응하지 못해 회사를 관두고 나온 연수생들은 다른 회사로 취업시키는 등 관리도 계속하고요. 지금도 우린 다 관리해요. 그래야 다음 졸업생의 취업도 원활해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전통을 이어나가는 거죠.”
 
  ― 연수생들을 거의 섬기는 거네요.
 
  “그럼요.”
 
 
  GYBM 행사 때마다 ‘대우 社歌’ 부르는 이유
 
대우그룹 사가(社歌) 악보. “대우주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 육대주 오대양은 우리들의 일터다 / 우리는 대우가족 한 집안 식구 / 온 누리 내 집 삼아 세계로 뻗자”란 가사는 대우그룹의 정신인 ‘세계경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 GYBM의 토대는 김우중의 ‘기업가 정신’인데,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김우중에 대한 인식이 약하지 않나요. 그건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잘 모르죠. 책을 통해 할 수밖에 없는 거죠. GYBM 선발 시 제가 면접을 일일이 하거든요. 면접하다 보면 생각 외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어본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이 책의 개정 보완판을 낸 거예요. 우리 대우정신이 뭔 줄 압니까.”
 
  ― 저 액자에 걸려 있는 ‘창조(創造)·도전(挑戰)·희생(犧牲)’ 아닌가요.
 
  “맞아요. 저 사훈(社訓)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대우 사가(社歌)예요. GYBM 연수생들이 아침 5시30분 기상하거든요. 그때 대우 사가를 부르게 합니다. 사가는 고(故) 윤석중씨가 만들어줬어요. 윤석중씨가 아동문학을 돕는 ‘새싹회’라는 걸 만들었는데, 김우중 회장이 그때 도와줬대요. 그 고마움의 표시로 윤씨가 사가를 작사해온 거죠. 사가를 보면 공교롭게도 대우의 ‘세계경영’ 정신이 다 들어 있어요. 희한해요. 그래서 우리 GYBM 행사 때마다 꿈과 포부를 키울 수 있도록 따라 부르게 하는 거죠.”
 
  ― 연수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내가 맨날 (GYBM 연수생들에게) 하는 얘기가 ‘개인의 성공이 물론 중요하다. 그거 말고 한 단계 더 위의 세상을 생각하자. 너희가 네트워크를 형성하든지 하면 뭔가 더 큰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런 점을 우리가 이 친구들에게 자꾸 주입하는 거죠. GYBM의 핵심은 이런 정신과 현지어를 집요하게 가르친다는 겁니다.”
 
  ― GYBM 커리큘럼은 어떤가요. 도제식이라고 들었는데.
 
  “굉장히 터프하죠. 일단 육체적으로 힘들죠. 아까 말한 대로 아침 5시30분에 기상해 밤 10시까지 교육이 이뤄지는데, 보통 밤 12시나 돼야 잠잘 수 있어요. 공부해야 하니까요. 애들은 죽을 지경이지요. 전체의 5~7%가 중도탈락하기도 해요. 근데 내가 경험해봤는데, 3개월 정도 지나면 그들이 스스로 변하는 걸 느끼겠더라고요. 우리 기성세대가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는 거죠. 사실 우리 애들이 얼마나 우수합니까. 우수한 청년들인데 기회를 못 줘서 그렇지요.”
 
 
  김우중의 통 큰 배짱으로 진출한 베트남 市場
 
  ― ‘세계경영’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세계경영은 ‘대우 DNA’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발상이 나온 계기는 뭐였나요.
 
  “동구권의 붕괴로 새로운 시장이 열리긴 했지만, 유럽연합(EU)이나 미국의 나프타(NAFTA)라는 일종의 ‘보호무역’이 세계시장의 화두(話頭)로 떠올랐죠. 한마디로 ‘관세 장벽’이 생긴 겁니다. 그때 대우는 내수보다는 수출로 성장하는 회사였어요. 단순히 한국에서 제품 만들어 외국에 팔거나 중국이라는 국가에서 물건 사다가 쿠바에 파는 식의 ‘3국 간 무역’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봤습니다. 한마디로 대우의 세계경영이라고 하는 건 글로벌 성장의 중심축이 될 각 전략 국가에 대우 본사와 똑같은 회사를 만들자는 거였어요. ‘해외 본사 제도’라는 걸 만들어 그곳에서도 대우 한국 본사와 똑같은 일을 하도록 강구한 겁니다. 해외 본사가 생산도 하고, 마케팅도 하고, R&D도 하고… 모든 걸 하는 식이죠.”
 
  ― 보통은 ‘해외 지사’라고 할 텐데 ‘해외 본사’라고 한 게 특이합니다.
 
  “우리는 23개 해외 본사 책임자 전원을 사장급 이상으로 임명했어요. 해외 본사가 들어가 있던 전략 국가는 모두 김 회장이 선정했어요. 그 조건은 첫째, 인구를 봅니다. 3000만~5000만명 되는 국가를 지목한 겁니다. 우리가 주력한 베트남은 당시 9000만~1억명이었어요. 둘째, 인구의 평균 연령대입니다. 베트남은 굉장히 젊어요. 셋째, 그 나라의 정치체제가 안정돼 있는지 여부였죠. 거기에 더해 정치 지도자가 경제개발에 대한 의지가 강한지도 고려 대상이었습니다. 또 어느 정도의 자원이 있는지 중요했고요.”
 
  ― 대우가 베트남에 진출한 최초의 대기업으로 알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공산국가 아닙니까.
 
  “베트남은 대우가 봤을 때 전략 국가로서의 가치가 매우 큰 나라였어요. 베트남은 벼농사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은 삼모작 정도 하지만 과거엔 오모작도 가능했어요. 거기에 더해 커피와 기름도 자급자족할 만큼 생산이 돼요. 다양한 천연자원이 많은 나라죠. 국민성 역시 머리 좋고 부지런하고, 특히 교육열이 우리나라하고 비슷합니다. 지리적으로도 훌륭해요. 현대 국가는 바다하고 육지가 얼마나 접해 있는지가 중요한데, 베트남의 경우 바다와 면해 있는 육지의 길이가 무려 2650km나 돼요. 그래서 택한 나라가 베트남입니다.”
 
  ― 대우가 하노이에 대우호텔을 준공했을 때 대대적으로 홍보한 기억이 납니다.
 
  “1990년대 초 하노이의 경우, 베트남 행정수도이긴 했지만 오랜 전쟁의 상처로 수도(首都)로서 인프라는 거의 없는 상태였어요. 1991년 하노이에 가보니까 10층 이상 되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김우중 회장이 ‘앞으로 하노이를 주목해야 할 거야’ 하시더라고요. 공산 정권이 어떻게 하든지 하노이를 개발할 거라고 본 거죠. 그 당시 호찌민이 상업의 중심지라 외국인들도 대부분 호찌민에 있을 때였어요. 그 무렵 김우중 회장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만났어요. 김 회장이 서기장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베트남 고위 간부들이 ‘외국 정상을 초청해 국제행사를 가져야 하는데 하노이에 그런 시설이 없다’고 했나 봐요. 그때 김 회장이 ‘우리가 호텔을 지어주겠다’고 한 거죠. 그게 바로 하노이 대우호텔하고 대하비즈니스 센터예요.”
 
  ― 수익성이 담보되는 사업이었나요.
 
  “사실 수익은 기대하기 힘들었죠. 그런데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 김 회장이 센스 있고 대담한 거죠. 김 회장이 대단한 게 국교 수립이 안 된 나라에 가서 장사한다는 게 목숨 걸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 나라에 투자하면 돈을 떼일 가능성도 크거든요. 그걸 알면서도 15억 달러가 넘는, 당시로선 큰돈을 베트남에 투자한 겁니다. 대우를 시발(始發)로 해 지금 베트남에 한국 기업이 공식적으로 약 8000개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비공식적인 기업까지 합하면 1만 개는 넘을 거예요.”
 
 
  “김우중 회장은 ‘2세 승계’ 안 했을 것”
 
2018년 3월 22일 대우그룹 창업 5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우중 전 회장(오른쪽)과 부인 정희자씨(왼쪽). 사진=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 대우의 아프리카 진출은 그보다 10여 년 더 앞선 것으로 압니다.
 
  “1977년 리비아, 1978년 수단에 진출했는데 모두 사회주의 국가라 당시 북한과 수교국이었어요. 당연히 우리와는 미수교 상태였고요. 1970년대는 국내에서 중동(中東) 붐이 일고 있을 때였죠. 그때 김우중 회장은 ‘우리는 중동에 나가지 말자. 중동 가서 국내 기업과 싸우지 말고 아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자’고 해 아프리카의 수단이 떠오른 거죠. 1980년도에 김 회장이 수단에 갔더니 수단 대통령이 ‘영빈관을 지어달라’고 했는데, 그때를 시작으로 타이어공장, 방직공장, 피혁공장, 제약공장을 세워준 거죠. 김우중 회장은 리비아의 카다피 원수하고 돈독한 사이였어요. 리비아에 비행장을 비롯해 도로, 주택, 학교 등 기간시설뿐 아니라 의과대학까지 지어줬어요.”
 
  ― ‘세계경영’이 나오자 다른 대기업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아주 생소해했죠. 김 회장은 다른 기업 총수들과 비교했을 때, 생각의 차원이 남달라요. 김우중 회장에 대해 평가해보라 한다면, ‘우리 기업의 세계화에 비즈니스맨으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실증해 보였으니까요.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김 회장과 대담한 신장섭 교수(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김 회장을 ‘민족주의자’라고 표현했는데, 그게 그런 의미이지 않나 싶어요. (김우중 회장은) 국가관도 특별나요. 대기업 회장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전문 경영인을 자처하기도 했고, 또 실제 행동을 그렇게 했어요.”
 
  ― 대우는 ‘세계경영’을 포함해 캐치프레이즈가 강렬하고 쉽게 와닿았어요. 특히 ‘탱크주의’요.
 
  “최종 결정은 회장이 했겠지만, 탱크주의는 아마 당시 배순훈(前 S&T중공업 회장·정보통신부 장관 역임) 대우전자 사장이 일정 역할을 했을 거예요. 탱크주의의 요지는 ‘왜 꼭 최우수 제품이어야 하느냐. 가격 싸게 심플하면 된다’는 거였죠. 쓰기 편하고, 가격도 적당하고, 오래 쓸 수 있으면 좋은 거란 얘기죠. ‘최신 기술 접목해 비싸게 만들면 결국 소비자한테 덤터기 씌운다’는 논리인데, 그게 (소비자들에게) 먹혔죠.”
 
  ― 우스운 질문이지만 그룹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대우는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금쯤 승계가 이뤄졌을지 모르겠지만, 김우중 회장은 ‘2세 승계’를 안 했을 분이에요. 물론 그룹이 존속하던 시점에는 2세가 어렸지만, 김 회장 일가(一家) 친척들은 우리 그룹에 없었어요. 그런 부분에서도 굉장히 깨끗하다고 할까. 좀 특이한 면이 있죠. 김 회장이 해외에 돈을 은닉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잖아요. 내가 그분을 잘 알지만 진짜 돈 한 푼 없는 사람이에요.”
 
 
  대우만의 독특한 시스템
 
  ― 김우중 회장도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처럼 ‘인재제일(人才第一)’을 중시한 걸로 압니다.
 
  “김우중 회장은 사람 욕심이 많아서 굉장히 많은 인재를 모았어요. 1960년대 중후반에 누가 대우에 오려고 했겠어요. 결국 김우중 회장 고교(경기고) 동문이라든지, 대학 친구나 선후배들을 모았어요. 근데 정말 좋은 인재가 많이 왔어요. 김 회장이 나중에 해외에 있는 사람들, 특히 은행 등 금융권 인재를 많이 스카우트해왔죠. 특히 기획조정실이나 홍보 부서의 젊은 사람들이 경영하는 데 많은 아이디어로 성과를 냈습니다.”
 
  ― 대우는 특이하게도 하급 직원도 임원한테 보고하는 게 자유로운, 열린 시스템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우의 주(主) 업종이 ‘무역’이었잖아요. 일반적인 무역 시스템, 가령 와이셔츠를 수출한다고 하면 결재 라인에 대리-과장-부장이 있을 거 아니에요. 이 와이셔츠를 사갈 어카운트(account·거래처)가 20곳이면 모두 그런 식의 라인이 존재하겠죠. 대우는 그런 불필요한 라인을 없애고 과장 한 사람이 다 맡아서 처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거죠. 대리도 마찬가지고요. 대리나 과장이 사장하고 똑같은 일을 하는 거죠. 한번은 대우 계열사를 인수한 모(某) 기업의 관계자가 나한테 와서 ‘이상하다’는 거예요. ‘1000만 달러짜리 거래가 있는데 이걸 보고도 안 하고 팀장이 전결로 결재한다’고요. 그래서 내가 ‘당신들이 종합상사를 몰라서 그런다. 시간과의 싸움인데 그걸 보고할 시간이 있는 줄 아느냐’고 설명해줬어요.”
 
  ― 그게 결국 임파워먼트(empowerment·위임) 아닐까요.
 
  “그런 정신이 대우 계열사에는 다 퍼져 있었어요. 아마 다른 기업에서는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 거예요. 대우는 기본적으로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종합상사였기에 가능했죠. 상사는 항상 을(乙)의 입장이거든요. 메이커한테도 을이고, 바이어한테도 을이잖아요. 을의 입장에서 행동하니까 을의 입장이 이해되는 거죠. 상사가 갑질하는 문화도 없고요.”
 
  ― 대우인들이 세계 각지에 나가 있으니까 자칫 비행기 사고라도 나면 사상자 명단에 있을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많이 죽었어요. 1987년 북한이 자행한 KAL기 테러가 있었잖아요. 그때도 우리 직원 세 명인가가 죽었어요. 대우건설 서만석 사장하고, 이사성 부장, 한석 과장 셋이었어요. 1978년엔 방태환 부장, 1987년엔 김영철 전무도 안타깝게 세상을 떴죠.”
 
  ―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대우인들이 그만큼 신바람 나게 전 세계를 누볐다는 얘기잖아요.
 
  “그럼요. 신났죠. 아까도 얘기했지만 새로운 해외시장을 뚫을 때, 우린 직급 관계 없이 뛰었으니까 얼마나 신났겠어요. 대리, 과장도 가서 해당 국가원수도 만나고 했으니까요. 젊은 친구들이 고생은 했지만 얼마나 보람찼겠냐고…. 김우중 회장이 우리 뒤에서 방패막이를 해줬으니까 가능했던 거죠.”
 
 
  대우는 ‘로비’에 강한 기업이었나?
 
1989년 대우조선에 노사분규가 일어나자 자전거를 타고 조선소 곳곳을 순회하는 김우중 전 회장. 김 전 회장이 근로자들을 일일이 설득한 끝에 노사분규는 원만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 그렇다면 대우그룹의 노사(勞使)관계는 어땠습니까.
 
  “1989년에 대우조선의 노사분규가 심했죠. 그걸 김우중 회장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해결했어요. 김 회장이 대우조선이 있는 거제에 1년 반가량 상주했어요.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아침마다 노조 간부 집에 방문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1년 반 만에 해결했죠. 거제에 가면 거제 사람들이 그러는 거야. ‘김 회장처럼 기업 총수가 와서 해결하는 건 드물었다’고 하더라고요.”
 
  ― 작년에 조선(造船) 경기 취재하러 경남 거제에 갔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1989년 대우조선 노사 갈등 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변호사였는데, 노사분규에 개입해 우리가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해서 구속됐지요.”
 
  ― 공교롭게도 김우중 회장이 사면된 건 노 전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나도 깜짝 놀랐어요. 사면될 당시는 우리가 로비하고 그럴 형편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가만 보면 노 전 대통령은 자기 나름의 철학이 있던 사람 같아요. 어쨌든 자기가 (사면해야겠다고) 판단을 한 거겠죠. 분명한 사실은 노 전 대통령과 김우중 회장은 인연이 없었다는 겁니다.”
 
  ― 대우가 ‘로비에 강했다’는 인식도 있는데, 사실입니까.
 
  “잘못된 겁니다. 대우는 체질상 그런 걸 못 해요. 내가 재무부 공무원 생활을 해봐서 알아요. 대우에 있을 때 관료들을 만나면 늘 하는 얘기가 ‘A그룹과 B그룹에 비하면 대우는 로비란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김 회장이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을 통해 건의한 적은 있었을 거예요. 그 이후엔 뭐 거의 없었죠. 박 대통령이야 개인적으로 김 회장을 좋아했으니 그럴 수 있고요.”
 
  ― 김우중 회장이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던 회사는 뭡니까.
 
  “대우자동차죠. 자동차를 해보니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세계경영의 기본 투자 규모 중에서 자동차가 제일 크거든요. 김 회장은 ‘생산 적정 규모가 250만 대 정도 되면 이걸 판매해 번 돈으로 다시 R&D를 통해 새 모델을 개발하면 된다’고 생각한 걸로 보여요. 그렇게 판로(販路)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IMF를 맞은 거죠. 만약 IMF가 조금 빨리 터졌든지, 조금 늦게 터졌다면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당하진 않았을 거예요.”
 
 
  DJ, 김우중 회장에게 ‘경제 대통령 역할하라’고 했지만…
 
  ― IMF가 없었다면 대우가 그렇게 쓰러지진 않았겠죠.
 
  “IMF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김영삼(YS) 정부 시절인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면서예요. 원래는 5대 시중은행만 외환거래를 할 수 있었는데, 종합금융회사(종금사)나 리스보험회사도 다 외환거래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한국이 잘나가니까 유럽, 일본, 미국의 메이저 은행에서 한국 금융기관에 돈을 막 빌려줬어요.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그 돈을 가지고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 금융기관을 상대로 일종의 ‘돈놀이’를 한 거죠. 그러다가 태국의 바트화 등 동남아 화폐와 증시가 폭락하니까 선진국들이 우리한테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한 거죠. 동남아 경제가 망가졌는데 그 돈이 회수가 되나요. 우리 시중은행은 급한 불 끄려고 달러를 꿔다가 갚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시중은행의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났어요. 이듬해 한보철강, 기아그룹이 잇따라 부도났고요.”
 
  ― 《김우중과의 대화》를 읽어보면, 김 회장은 IMF를 극복할 수 있는 복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 회장의 IMF 극복 지론은 ‘무역흑자론’이었습니다. 당시 (DJ) 정부는 ‘수출계획’에서 무역흑자 20억 달러 달성이 목표라고 발표했어요. 우리 예상으로는 ‘외환보유고만 채워 넣으면 IMF를 졸업할 수 있다’였어요. 생각해보세요. 원·달러 환율 800원 하던 게 1998년 상반기에 1600원까지 치솟았잖아요. 솔직히 말해 수출은 그냥 앉아서 되는 거였어요. 불요불급한 수입만 안 하면요. 1년에 약 500억 달러씩 2년, 1000억 달러만 흑자를 내면 IMF 졸업이 가능하다고 본 거죠. 하지만 정부는 흑자보다는 대기업 구조조정이 선행(先行)돼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김 회장은 ‘기업의 생산 장비를 돌려 수출해야지 그걸 매각하고 구조조정하면 되느냐’는 입장이었고요. 거기서부터 (정부와 대우의) 싸움이 일어났다고 보면 됩니다. 뭐, 다른 이론도 있겠지만요.”
 
  ― 대우가 변화의 흐름를 읽지 못한 건 아닙니까. 김 회장이 DJ 정부 관료들과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고요.
 
  “DJ가 처음에는 ‘당신이 경제 대통령 하라’는 식으로 김우중 회장을 대했어요. 그 무렵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세상을 뜨자 김 회장이 최종현 회장 후임으로 전경련 회장직을 맡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김 회장은) 자연스럽게 재계의 ‘대(對)정부 카운트파트너’ 역을 맡았어요. 사실 DJ 정부는 YS 때랑은 완전 다른 정부였죠. 좋게 말하면 진보적, 나쁘게 말하면 약간 사회주의적이라고 할까요. 가령 있는 자의 것을 뺏어 나눠준다든가 하는 거죠. 결국 표적이 되는 건 재벌일 수밖에 없는 그런 풍토로 바뀐 겁니다. 관료도 그런 성향으로 다 바뀌었고요. 김 회장이 해외에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시대가 바뀐 것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고, 국내 정세를 잘 몰랐던 거 같아요.”
 
 
  대우 간부에게 부과된 ‘추징금 23조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김우중 전 회장(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김 전 회장도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마찬가지로 대북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사진=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 김 회장이 GM과의 외자(外資) 유치 협상을 너무 낙관한 것도 (그룹 해체의) 한 요인 같습니다.
 
  “꼭 GM이 아니더라도…. 그때 미국의 압력이 상당했어요 사실은.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한국 5대 그룹의 구조조정이 너무 미진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그랬어요. 그런 게 DJ 정부에 영향을 끼쳤을 거예요. ‘GM모략설’도 있는데, 그때 GM 한국 책임자 중 한 명이 미국 CIA 출신이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저는 그 사람 만나 MOU 체결하며 사인도 하고 그랬는데…. 결과적으로 나중에 GM이 헐값으로 대우자동차를 인수 했으니까 그런 설이 꼭 틀렸다고 볼 순 없지 않을까요.”
 
  ― 당시 DJ 정부가 IMF에서 권고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는 의혹이 있었습니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앞세워 기업 정리에 나선 거라고요.
 
  “IMF가 기준으로 제시한 부채비율이라는 게 근거가 부족했어요. 그건 자기네 기준이죠. 당시 일본의 종합상사들은 평균 부채비율이 700~800%에 달했어요.”
 
  ― 결정적으로 작용한 건 대우의 경영상황을 부정적으로 본 ‘노무라증권’ 보고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대우가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비상벨이 울렸다’는 노무라증권 보고서는 짜놓은 각본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당시 정부 조치가 거의 다 대우를 표적으로 하는데 노무라증권이 그렇게 쓰지 안 쓰겠습니까. 당연히 쓰죠. 경제 관료들은 언론에 대우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나 하고….”
 
  ― 2005년 대법원은 국내 자금 해외유출 및 불법 외환거래 혐의로 김우중 회장과 장병주 회장 등 대우 고위 간부 8명에게 총 23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추징금을 연대(連帶) 부과했습니다.
 
  “그때 나에게 부과된 추징금이 3조7000억원이었어요. 하루에 100만원씩 내면 무려 1만 년이 걸려요. 내가 그때 알았어요. 대한민국의 사법제도가 얼마나 엉터리인지요. 참 억울한 게 같이 재판받은 이상훈 전무하고 성기동 이사가 그만 세상을 뜬 겁니다. 모두 훌륭한 분들이었는데….”
 
  (외환위기 당시 외국환관리법에 따르면, 해외 현지 법인에서 현지 금융기관과 한 금융거래는 한국은행에 일일이 보고해야 했다. 당시 수출 기업들은 관행적으로 한국은행 보고를 누락하고 해외에서 쓸 자금을 자체적으로 관리해왔다. 대우를 비롯한 국내 많은 기업 대부분은 관행적으로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자 회사 자금의 해외 밀반출 및 분식회계가 돼버렸다. 결국 법인에 추징금 부과가 불가능해지자 개개인에게 추징금을 연대해 부과한 것이다.)
 
  ― 지금 국가 경제가 어렵습니다. ‘제2의 IMF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까지 나오는데, 이를 타개할 조언을 해주십시오.
 
  “금융위기 이후 경제정책 전반이 금융이나 재정 분야에만 치중되는 것 같아요. 매각이나 M&A를 보면 대부분 금융 위주의 판단이 주를 이룹니다. 우리도 기간산업에 대한 거시적 정책이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라도 관련 전문가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데 그런 전문가도 잘 안 보입니다. 기간산업을 어떻게 육성할지, 그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아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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