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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분석

‘기내식 노밀(No meal)’ 사태로 촉발된 금호아시아나 사태

경영진의 무리한 사업 추진이 결국 아시아나 기내식 사태로 치달았나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글 :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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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원들의 촛불집회·미투…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는 분위기 팽배
⊙ 멀쩡히 기내식 납품하던 회사를 바꾼 이유는 경영진 말을 안 들어서?
⊙ 형제 불화·알짜배기 자산 매각·오너 낙하산 인사 총체적 난국
  지난 7월 1일, 아시아나 항공기 국제선 중 무려 51편이 예정시각보다 늦게 이륙했다. 비행기 내에 기내식을 싣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같은 날 금호아시아나항공의 수장인 박삼구 회장이 탄 비행기는 제 시각에 공항을 떠났다. 그것도 기내식을 잔뜩 실은 채로. 그리고 이날, 박삼구 회장의 1남 1녀 중 장녀는 회사 계열사의 상무로 발령이 났다. 회사 ‘상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평사원으로 입사한 이들이 ‘회사의 별’이라고 부를 정도로 쉼 없이 일해도 오르기 힘든 자리다.
 
  금호아시아나는 박삼구 회장의 장녀에 대해 장황한 이력을 제시하며, ‘상무’ 발령의 타당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사회생활 경험이 전혀 없는 가정주부여서 업계의 빈축을 샀다. 오너 경영인 가족이 평사원으로 입사하지 않고 부장으로 시작해, 초고속으로 상무, 전무를 밟는 일은 제법 흔하다. 하지만 가정주부가 곧장 ‘스트레이트 상무’ 발령을 받는 일은 몹시 드물다.
 
  다음날 아시아나항공에 기내식을 납품하는 재하청업체 대표는 최근 불거진 ‘기내식 노밀’ 사태에 압박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까지도 회사에서 ‘아시아나 노밀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이는 없었다. 하청업체 사람의 자살 사건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듯 그룹 경영진이 서둘러 사과를 했다. 사태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회사 직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촛불 집회장으로 향했다. ‘물컵 사건’으로 불거진 한진그룹의 사태가 국토부·검찰·국세청 등 모든 기관을 총동원하게 만들었듯이, 아시아나항공도 이제 탈탈 털릴 분위기다. 그룹의 총체적 난국이다. 재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두고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드디어 터졌다”는 분위기다. 그동안 금호아시아나그룹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석 달 ‘땜빵’으로 선정한 업체가 기내식 납품 못해 사태 촉발
 
2018년 7월 6일 아시아나 직원연대 등 직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계단에서 열린 ‘아시아나항공 No Meal(노 밀) 사태 책임 경영진 규탄 문화제’에 참가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아시아나항공의 ‘노밀’ 사태를 들여다보자.
 
  아시아나항공은 지난 2003년부터 ‘LSG’라는 독일 회사로부터 기내식을 납품받았다. 아시아나항공은 뛰어난 기내식 서비스를 인정받아서 여러 차례 기내식으로 상도 받았다. 큰 잡음이 없었던 기내식 납품회사를 바꾸게 된 것은 지난 2016년. 아시아나항공은 종전의 회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중국 하이난그룹 계열사인 ‘게이트 고메 스위스’라는 회사로부터 기내식을 받기로 했다. 아시아나 기내식을 위해 이 중국 회사와 아시아나항공은 4대 6의 비율로 ‘게이트 고메 코리아’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종전에 납품을 받던 독일 회사 대신에, 중국 회사와 아시아나항공이 같이 설립한 회사로부터 기내식을 제공받기로 한 것이다. 계약 기간은 무려 30년. 충실히 아시아나항공에 기내식을 납품해 온 독일 회사로서는 아쉬울 만한 일이지만, 절차상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 지난 3월에 일어났다. 아시아나항공에 기내식을 납품할 예정인 ‘게이트 고메 코리아’ 생산공장에서 불이 났다. 기내식 공급에 차질이 생길 상황이 벌어지자, 아시아나항공은 부랴부랴 다른 기내식 제공업체를 물색했다. ‘게이트 고메 코리아’가 정상 가동을 할 때까지 기내식을 ‘땜빵’ 제공할 회사가 필요했다. 그렇게 뽑힌 회사가 ‘샤프도앤코코리아’라는 회사다. 2016년에 만들어진 중소기업이다. 아시아나항공에 하루 필요한 기내식 분량은 2만5000인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시아나항공이 석 달 동안 기내식을 납품받기로 한 ‘샤프도앤코코리아’라는 회사가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분량은 3000인분 정도. 공급 능력이 없는 회사를 잠시 동안이지만 기내식 납품업체로 선정한 것이다. 항공업계에서 “예견된 참사”라고 하는 이유다. 결국 회사는 예상대로 제때 아시아나에 기내식을 공급하지 못했다.
 
 
  1600억원과 기내식 납품 회사 교체
 
아시아나는 2012년 6월 7일 인천공항 LSG스카이쉐프에서 아시아나 SNS 회원들을 대상으로 기내식 체험행사를 진행했다. LSG는 2003년부터 2016년까지 아시아나항공에 기내식을 납품했다.
  업계의 시각은 ‘왜 멀쩡한 LSG를 두고 난데없이 중국 회사와 계약을 맺었느냐’에 쏠렸다.
 
  아시아나항공 측은 “LSG가 그동안 문제가 많았다”는 입장이다. 경영진은 “LSG와 IMF 때 계약을 맺어 불리한 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LSG와 계약에서 원가를 공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수차례 요청에도 원가를 공개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업체를 바꿨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LSG 측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LSG는 “아시아나항공에 기내식을 납품하면서 어떤 중대한 품질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다. 아시아나와의 계약 조건을 준수해 왔고, 계약에 명시된 사항을 적용해 왔다”며 “아시아나항공이 1600억원 규모의 투자를 거절하자, 기내식 공급을 해지했다”고 주장했다.
 
  ‘1600억원 규모 투자’가 논란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 부분이 바로 금호아시아나의 케케묵은 경영 손실과 이번 사태가 연관되는 부분이다.
 
  LSG그룹의 얘기다.
 
  “아시아나항공이 기내식 계약 연장 조건으로 1500억~2000억원 투자를 요구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계약을 끝냈다.”
 
  LSG는 공정거래위원회에 불공정거래 행위를 이유로 민원을 제기했다. 공정위는 아직 조사 중이다.
 
  공교롭게도 금호아시아나와 새로 계약을 맺은 게이트 고메 스위스는 이 조건을 수용했다. 정확히 말하면, 게이트 고메 스위스의 모기업인 하이난그룹이 지난 2017년 3월에 아시아나항공의 지주회사인 금호홀딩스에 1600억원을 투자했다. 때문에 업계에서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투자 유치를 위해 ‘알짜 사업’인 기내식 업체를 바꿨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1600억원이 물론 큰돈이지만, 이것 때문에 20년 가까이 우호관계를 맺어온 기내식 납품업체를 바꾼 것일까. 최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재정 상황을 보면 이해가 간다. 그룹은 몇 년 전부터 갖고 있던 자산을 팔았다. 광화문 사옥을 팔았고, 아시아나항공이 갖고 있던 CJ대한통운 지분도 팔았다. 시장에서 전환사채를 발행했고, 공모채도 발행했다. 오래전에 베트남 금호아시아나플라자, 금호건설 홍콩유한공사도 팔았다. 대우건설·금호생명·금호렌터카도 팔았다. 그룹은 소위 돈 될 만한 자산은 꾸준히 팔아왔다. 자금 사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영진의 오판(誤判)이 초래한 결과였다는 것이 재계의 평가다.
 
 
  ‘호남 최대 재벌’이라는 타이틀이 무색
 
  금호아시아나그룹 앞에는 ‘호남 최대 재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고(故)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는 ‘인내’와 ‘끈기’의 인물이었다. 전남 나주 출신인 그는 목화·잡화상 사업에 모두 실패한 이후 만 28세의 나이로 보통 문관시험과 고등 문관예시에 합격했다. 이후 박 창업주는 미제택시 2대를 갖고 ‘광주택시’ 회사를 운영했다. 그의 나이 만 46세. 2년 만에 광주여객(現 금호고속)을 설립해 버스 사업에 진출했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 사장은 정말로 끈질긴 사람이다. 지금까지 박 사장같이 끈질긴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고 했다. 광주여객이 돈을 버는 것은 운이 아닌 박 창업주의 끈질김 덕분이라고들 해, 그의 이름 앞에는 ‘집념’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녔다.
 
  이후 박 창업주는 학교법인 죽호학원(1959년), 삼양타이야공업(현 금호타이어·1960년 9월)을 만들었다. 타이어 생산은 하루 20개에 불과했다. 박 창업주는 여느 국내 재벌그룹이 그러하듯 1970년 경제개발 붐 속에서 회사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1971년에 한국 합성고무공업(현 금호석유화학), 1972년에 금호실업, 1977년에 금호문화재단을 만들었다. 이렇다 할 호남 기업이 없었기에 금호의 이름 앞에는 ‘호남 최대 재벌’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박 회장은 1973년에 그룹 회장이 됐고, 세월이 흘러 아들들이 속속 기업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장남 박성용(별세·전 금호그룹 명예회장), 차남 박정구(별세·전 금호그룹 회장), 삼남 박삼구(現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사남 박찬구(現 금호석유화학 회장) 등이다. 박 창업주의 다섯째 아들인 박종구(前 교육과학기술부 제2차관) 현 초당대 총장은 그룹 경영에 참여한 적이 없다.
 
  별세한 박성용 전 금호그룹 명예회장은 회사 경영에는 썩 흥미가 없지 않았나 싶다. 미 일리노이주립대 경제학 석사·예일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가진 그는 대통령 경제비서관과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다. 1974년에 금호실업 사장으로 회사 생활을 시작해 1996년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사업보다는 예술·학문을 사랑하는 지식인의 기질이 훨씬 강한 경영인’이었다. 맏형의 뒤를 이어 그룹의 경영권을 이어받은 고 박정구 그룹 회장은 달랐다. 고 박 회장은 형이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때부터 일찌감치 금호타이어에 입사해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광주고속·금호타이어·금호건설 대표이사와 그룹 부회장을 지냈고, 1996년에 형의 뒤를 이어 금호그룹 회장을 맡았다. 그는 한평생을 금호그룹에 몸 바친 전형적인 ‘금호맨’이었다. 둘째 형이 그룹을 한창 경영할 때 박삼구 현 그룹 회장도 회사에 입사했다. ‘형제 경영의 원칙’에 따라 박 회장은 늘 둘째 형보다 한 발 뒤에 있었다. 하지만 형이 전혀 발을 담그지 않은 그의 몫이 있었으니, 바로 아시아나항공이었다. 박 회장은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아시아나항공 대표이사를 맡았다. 2002년에 금호그룹 대표이사 회장이 됐다. 그의 동생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역시 일찌감치 금호그룹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주로 금호석유화학·금호미쓰이화학 등에서 근무했다. 이때부터 금호가(家)의 3남 박삼구 회장과 4남 박찬구 회장 사이에는 어느 정도 계열 분리가 이뤄지는 분위기였다.
 
 
  박삼구 회장은 형보다 사세를 확장하고싶었을까?
 
2013년 7월 3일 인천시 중구 운서동 LSG스카이쉐프에서 아시아나 항공 승무원과 셰프들이 선보인 삼계죽, 초계탕 등의 여름철 특별 건강 기내식.
  이번 아시아나항공의 ‘노밀 사태’를 말하면서, 그룹의 시시콜콜했던 과거를 인용하는 것은 이것이 오늘날의 사태와 직접 연결이 있어서다. 여느 재벌그룹이 그러하듯,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경제개발이라는 정권의 목표 아래 차츰차츰 사세를 확장해 갔고, 2세 경영 시대를 열었다. 고 박인천 창업주가 1세대 인물이라면, 2세대를 이끈 것은 고인이 된 고 박정구 회장과 오늘날 대권을 거머쥔 박삼구 회장이다.
 
  둘째 형인 고 박정구 회장과 박삼구 회장의 나이 차는 8세이고 박삼구 회장과 박찬구 회장의 나이 차는 3세에 불과했지만, 재계에서는 2남과 3남을 비교하는 일이 잦았다. 두 사람은 스타일이 판이했다. 두 명의 오너를 모신 전문 경영인은 두 사람을 이렇게 비교했다.
 
  “고 박정구 회장은 보스 기질이 강했습니다. 회사 임원들과 술자리에서 한 명 한 명 일일이 술잔을 주고받고 했습니다. 1994년 광주공장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 광주에 상주하셨죠. 다음날 노조와 회의를 하는데 끝까지 노조를 설득하셨습니다. 보스 기질 내면에 세심함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박삼구 회장은 시스템 관리 능력이 탁월합니다. 금호그룹의 대차대조표, 현금흐름표는 다른 기업보다 훨씬 세분화돼 있습니다. 우리 그룹의 관리 회계는 박 회장님이 독창적으로 개발해서 정리한 포맷입니다.”
 
  두 사람을 오랫동안 경험했던 전직 고위 관료의 평도 비슷했다. 《주간조선》(2002년 9월호)의 내용이다.
 
  〈고 박정구 회장은 보스 기질이 있었다. 통이 커서 돈을 쓰면 한 번에 수천만 원씩 쓰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박삼구 회장은 돈을 꼼꼼히 쓰고, 지갑 여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또 완벽주의를 지향하며, 연세대 상대(경제학과) 출신답게 수치 경영을 무척 강조한다.〉
 
  두 사람의 판이한 경영 스타일을 비교하는 것은 어찌 보면 금호그룹이 무리수를 둬가면서까지 회사들을 인수했던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재벌가 2, 3세들 중 대다수는 “선대 회장으로부터 받은 것을 지켜내고, 거기에 하나를 더 얹는 내 회사를 갖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공통적 생각이다. 심지어 아버지가 아닌 ‘형’의 뒤를 이어 대권을 가진 박삼구 회장의 속내 또한 비슷하지 않았을까.
 
 
  위기의 순간에 대권 거머쥔 박삼구 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은 1997년 IMF 경제 위기가 불어닥치기 전까지 성장궤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91년에 중국 고속버스 합작사, 남경타이어 등을 만들어 글로벌 경영을 추진했다.
 
  하지만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회사 사정은 급속히 나빠졌다. 당시 그룹은 아시아나항공과 타이어사업(당시에는 금호산업의 한 부서였다)의 2개 축으로 운영됐다. 주력사인 아시아나항공의 매출은 추락했다. 아시아나항공의 1997년 영업수익은 1조3643억원이었으나, 3982억원의 적자를 냈다. 1998년에도 영업수익 1조5386억원, 순적자 1414억원을 기록했다.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99년에 1096억원의 순익을 내나 싶더니, 2000년 순적자 1560억원(영업이익 2조971억원), 2001년 순적자 3902억원(영업이익 2조2181억원)을 내며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1988년 제2 민항으로 출발한 아시아나를 1991년부터 맡아서 세계적인 항공사로 키운 것은 순전히 박삼구 회장의 성과였다. 하지만 ‘아시아나’라는 이름이 외부로 전파될 즈음에 항공회사의 속사정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에 박삼구 회장이 제4대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 일단 회사를 새롭게 재편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 회장은 2003년 6월에 우선 금호산업의 타이어 사업부를 분사해 금호타이어㈜로 독립시켰다. 금호타이어는 중국 톈진 공장을 일본 브릿지스톤에 1조1000억원에 팔아 모 그룹으로 넘겼다. 금호타이어 지분의 50%는 군인공제회에 넘겼다. 금호그룹은 “타이어의 지분 매각은 사업부 매각이 아니라 자본 유치 차원”이라고 했지만 사실 돈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던 때였다. 아시아나항공의 공항서비스도 팔았다. 박 회장은 2004년에 그룹 명칭을 기존의 ‘금호’에서 ‘금호아시아나’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외형 불리기에 나섰다.
 
  박삼구 회장은 “오는 2010년에 재계 5대 그룹에 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그룹 전체의 매출은 6조8000억원대(금융계열사 제외)로 재계 순위도 10위권 안이었다. 박 회장의 구상은 항공·고속 등 운수 분야와 석유화학·콘도 등 기존 사업 분야 외에 생명공학, 신소재, 물류사업 등 21세기 고(高) 부가가치형 유명 신규 사업에 적극적으로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위기 돌파하려던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100억 원대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는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이 2011년 6월 3일 오전 서울 양천구 신정동 서울남부지방검찰청으로 소환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자랑하던 것이 있다. ‘형제간의 우애’다. 2세 경영 시대로 넘어오면서, 경영권이 형제인 박정구-박삼구 회장으로 넘어온 탓인지, 그룹에서는 유독 ‘형제 경영’에 대해 홍보를 많이 했다. 재벌 중에서 그룹의 규모가 커가면서, 자식에게 대권을 물려주고자 그동안 한솥밥을 먹던 형제들을 내치는 일이 잦아지던 때였다. 그렇게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형제 경영’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문제가 많았던 듯 싶다. 바로 박삼구 회장의 동생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을 통해서였다.
 
  재계 복수의 관계자가 말한 바로는 박삼구 회장의 동생인 박찬구 회장의 스타일은 우직하고 묵묵한 스타일이다. 그는 형이 사세(社勢)를 확장, 일종의 ‘규모의 경제’를 통해 그룹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박찬구 회장의 입장에서는 적어도 금호석유화학은 선친이 그에게 남긴 ‘자신의 몫’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박삼구 회장이 대형 M&A를 추진하면서 박찬구 회장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오늘날 그룹 패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대우건설 인수(2005년)가 그것이다. 대우건설은 당시 종합시공능력 1위 평가를 받는 대형 건설사였다. 그룹에 자금이 넉넉지 않았지만, 이미 대우건설을 마음에 둔 박삼구 회장의 눈에는 이도 저도 들어오지 않았다. 박 회장은 계열사 자금을 총동원하고 투자금융자본까지 끌어들여 총 6조4255억원을 주고 대우건설을 인수(자산관리공사 소유의 대우건설 지분 72%)했다. 앞으로 3년 이내에 대우건설 평균 주가가 기준가격을 웃돌지 못할 경우 이번 딜에 참여한 투자자들의 차액을 보존해 주는 ‘풋백옵션’도 걸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애초에 대우건설이 그룹의 ‘캐시카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대우건설의 주가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고, 세계 경기가 불안해지면서 건설업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미국발(發)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국내 경제 또한 내림세를 면할 수 없었다. 대우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한 것 때문에 갚아야 할 회사채 만기가 다가왔고, 시장에서의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지자 금호아시아나는 2009년 6월에 대우건설을 도로 시장에 내놨다.
 
 
  돈 앞에 처참하게 갈라진 박씨 형제
 
  부실 경영으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자 업계에서 소문난 우애 경영도 끝장이 났다. 경영난을 부른 대우건설·대한통운 인수 책임을 놓고, 두 회장이 갈등을 빚었다. 애초 박찬구 회장은 대한통운 매각을 주장했지만, 박삼구 회장은 수용하지 않았다. 후계구도도 문제였다. 그룹 내 용상을 차지한 박삼구 회장은 아들 박세창 사장에게 금호의 옥새(玉璽)를 물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서명한 ‘형제 공동경영합의서’가 발목을 잡았다. 박삼구 회장은 형제·조카들과 완전히 결별해야만 자신의 ‘직계경영’ 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
 
  형제가 다툼을 시작하는 와중인 2009년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금호석유화학을 놓고도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그해 박찬구 회장은 금호산업 지분 전량을 팔고,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늘려 형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이듬해 박삼구 회장은 건설과 항공 부문을, 박찬구 회장은 석유화학 부문을 각자 나눠 맡아 분리 경영을 시작했다.
 
  돈 앞에 선 박씨 형제는 서로에게 잔인했다. 동생인 박찬구 회장은 2011년 3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금호그룹에서 제외해 줄 것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청했다. 적자 경영을 자초하는 형에게서 ‘알짜’ 계열사를 분리해 놓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해 4월, 박찬구 회장은 비자금 조성 의혹 등으로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미공개 정보를 통한 주식거래 혐의, 회사자금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박찬구 회장 측은 앙심을 품은 형 박삼구 회장 측의 제보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됐다고 의심했다.
 
  형제는 ‘금호’ 상표권을 두고도 분쟁을 벌였다. 애초 ‘금호’ 상표권은 박삼구 회장의 금호산업과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화학이 함께 등록했지만, 그룹 내 상표 사용권은 금호산업 몫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금호석유화학은 2009년 10월 이후 브랜드 공동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상표권 사용료 지급을 거부했다. 이에 금호산업은 2013년 9월 금호석유화학 계열사를 겨냥해 사용료 미납분 261억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지만 2년 후 1심에서 패소했다. 금호산업이 상표 권리자임을 인정할 만한 문서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항소심도 1심 판결을 받아들였다. 금호산업은 1·2심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금호아시아나의 지난 10년은 재정 압박의 연속
 
‘승자의 저주’로 돌아온 대우건설 본사 빌딩.
  오늘날 사람들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사세가 줄어든 것을 두고 ‘승자의 저주’를 들먹인다. 그룹이 자신보다 규모가 큰 대우건설을 덥석 안았지만, 외부 여건(2008년 세계금융위기)이나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다는 시각이다. 이것이 명백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외부 회사들을 사겠다며 매의 눈을 할 즈음에 정작 자신 내의 회사들 관리는 소홀히 했다는 점이다. 유동성 위기에 몰린 그룹은 2009년 6월에 재무구조약정을 체결하고, 그해 11월 금호생명을 팔았다. 이듬해 1월에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법정관리)에 돌입했다. 얼마 전, 중국 회사로 경영권이 넘어간 금호타이어의 불행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 두 군데 금호 계열사의 출자 전환을 맡은 곳은 산업은행이었다.
 
  산업은행은 박삼구 회장이 재기할 수 있는 구멍을 터줬다. 박 회장이 부실 경영을 했지만, 두 계열사의 경영권과 우선매수권을 보장해 준 것이다. 결국 박삼구 회장은 두 계열사 지분 매각을 통해 마련한 사재 1200억원과 외부에서 조달한 6000억원으로, 2015년에 금호산업을 다시 산업은행에서 가져오게 된다. 그룹 재건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박삼구 회장은 금호타이어를 사오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 금호타이어는 박삼구 회장이 금호산업을 되찾기 직전인 2014년 12월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돈만 있었다면, 박삼구 회장이 금호타이어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산업은행이 부여한 ‘우선매수청구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팔 때, 제3자에게 경영권을 주기 전에 단 1원이라도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할 경우 다시 주식을 먼저 살 수 있는 권리다. 그러나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에 계열사까지 떠넘긴 금호의 형편을 보자면 그만한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박 회장은 결국 지난해 4월 19일 우선매수청구권 행사를 최종 포기했다. 청약 당첨이 돼도 입주금이 없으면 ‘도루묵 신세’인 아파트 분양권 처지나 다름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박삼구 회장에게 있어 금호타이어는 건설(금호산업), 항공(아시아나)과 함께 그룹 재건의 ‘3각 주춧돌’이었다. 하나라도 빠지면 금호의 재건이 순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둘은 다시 확보했지만, 금호타이어를 손에 넣지 못했다. 그룹 위상을 정상화시키고, 꾸준한 매출을 도모할 수 있는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할 수 있는 계열사가 바로 금호타이어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오는 12월까지 갚아야 하는 외부 차입금 규모는 2조원으로 추산된다. 상반기에만 6000억원을 갚아야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박 회장은 서울 광화문에 있는 금호아시아나 사옥을 팔고, 회사채를 발행했다. 지난 2월에는 아시아나항공이 보유하고 있던 대한통운 지분을 팔아 935억원을 마련했다. 여기저기서 십시일반으로 적은 돈이라도 그러모아야 하는 것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처지였다. 박 회장의 금호타이어를 도로 되찾아오려는 생각이 그동안 그룹의 중요 자산을 매각하게 만들었고, 어찌 보면 ‘아시아나 노밀 사태’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투자금’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박삼구 기쁨조’ 미투 재점화
 
  그동안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유일하게 지탱해 온 것은 아시아나항공이었다. 올해 들어서는 실적이 나아져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아시아나항공이 지난 1분기에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기록해서다. 회사의 잠정적 집계로 아시아나항공의 1분기 연결기준 매출은 1조5887억원, 영업이익 643억원이었다.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9%, 영업이익은 144%가 늘었다. 물론 순익은 여전히 적자 상태지만, 회사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번에 아시아나항공의 ‘노밀’ 사태로 인해 그간 감춰져 있던 회사의 민낯이 고스란히 노출될 위기다.
 
  박삼구 회장 딸 세진씨의 금호리조트 상무 인사는 ‘낙하산 논란’으로 확산되고 있다. 박삼구 회장의 ‘미투’는 재점화됐다. 박 회장이 인천공항에 등장하는 날에는 뛰쳐나가서 환영해 줄 여승무원, 꽃다발 전해주는 여승무원, 팔짱 낄 여승무원을 미리 정해놓고 ‘회장님 환영식’을 했다는 내용이다. 일부에서는 아시아나항공사의 여승무원을 두고 ‘박삼구 기쁨조’로 칭하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은 기내식 사건이 불거진 이후에 두 차례에 걸쳐 ‘경영진 규탄제’를 개최하며 촛불을 들었다. 아시아나항공 소액 주주들은 아시아나항공이 1600억원을 투자받기 위해 기내식 납품 업체를 변경했고, 이 배경은 금호홀딩스의 금호타이어 인수와 관계가 있다며, 박 회장 등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이다. 일부에서는 아시아나항공의 저가 항공회사인 ‘에어부산’의 상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전망하고 있다. 상장 심사 항목에 ‘총수 일가의 도덕성과 기업 신뢰도’ 항목이 있기 때문이다. 기내식을 제대로 싣지 못해 생긴 여파가 어디까지 번질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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