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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 맞은 ‘58년 개띠’들이 말하는 한국 현대사

“가난했어도 이웃 간 정(情)은 돈독…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기회 얻었다”

글 : 신승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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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빈(國賓) 방한, 베트남전 파병 때 서울 초·중·고 학생들 국기 흔들며 환영·응원”
⊙ “미국 원조 받아 학교서 만든 빵으로 허기 채워… 고기는 물론 생선·계란도 귀해”
⊙ “경제발전 열매 맛보기도… 1970년대 초·중반, 자고 나면 TV·냉장고 집에 들어와”
⊙ “후배들, 남에게 힘을 주는 사람 되고 시대에 신의(信義) 잃지 말고 살아가길”
1960~70년대 열차 안에서의 흥겨운 기타 연주 풍경. 서정홍씨는 당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있었고 이웃이 있었다”며 “가난해도 같이 가난했고, 빈부격차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진=조선DB
  2018년은 무술년(戊戌年)으로 ‘황금 개의 해’다.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중 무(戊)는 흙과 황금색을, 술(戌)은 개띠를 뜻한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의 무술년인 1958년에 태어난 이들은 회갑(回甲)을 맞는 해다.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관통해 온 ‘베이비붐 세대’ 58년 개띠들의 인생 갑자(甲子)가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다른 출생연도와 달리 ‘58년 개띠’라는 말은 ‘현대사의 낀 세대’를 뜻하는 고유명사처럼 불려 왔다. 사회학자인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교수는 “58년 개띠들은 우리 사회의 세대 간 교량(橋梁)”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현대사의 중간에서 마치 다리처럼 각 시대와 세대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이다.
 
  58년 개띠 출신인 이정현 무소속 국회의원은 과거 이 세대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배고픔을 느끼고 극복한 세대”
 
   “어린 시절, 배고픔의 설움을 부모님과 함께 느끼며 자랐는데, 어느새 그 배고픔을 극복한 세대가 됐다. 이쪽저쪽 문화를 다 접했으면서도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는 주변인 세대였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학과 교수는 한 칼럼에서 58년 개띠의 정체성을 이렇게 소개했다.
 
  “태어난 연도와 띠를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8년 개띠’는 우리에게 참으로 친숙하다. (…) 전쟁 이후 학교와 교사의 수는 적고 시설도 열악한데 갑자기 커진 학령인구가 입학해서 이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훨씬 열악한 교육 환경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고, 또 그만큼 서로 경쟁도 더 치열했기 때문에 그 어떤 연령에 비해서도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설도 있다. 아마도 이 모든 이유가 복합돼 58년 개띠해에 태어난 사람들을 특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개들처럼 인구가 많았고 생존력이 강했다는 의미로 ‘58년 개띠’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실제로 1958년은 한 해 출생 인구가 90만명대로 증가한 베이비붐 시대의 중추에 해당한다. 이때 태어난 이들은 학령인구로 빽빽한 ‘콩나물 교실’에서 공부했고 ‘뺑뺑이’ 고교 입학제와 높은 대입 경쟁률을 경험했다. 10·26 및 12·12 사태 등 정치적 격변을 목도했고 1990년대 문화변동의 급류, IMF 외환위기 및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겪어 내며 살아왔다. 그랬던 이들이 지금은 은퇴의 기로에서 제2의 인생 준비를 하고 있다.
 
  60년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다양한 변화를 체험한 58년 개띠들의 옛 시절은 어땠을까. 오늘날 회갑을 맞은 심경과 백세시대의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은 어떨까. 20~30대 후배들에게 전하는 58년생 선배들의 교훈과 메시지는 무엇일까. 전후(戰後)의 폐허 속에서 가난을 이겨내고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일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00세 시대, 이제 겨우 60% 왔다”
 
  다큐멘터리 PD인 박승찬씨는 요즘 경조사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지금쯤 주변 친구들의 자녀들이 결혼을 하거나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박씨에 따르면 58년 세대의 결혼 적령기는 남자가 27~28세, 여자가 23~25세였다고 한다. 그때 결혼했던 친구들의 자녀들이 다시 장성해 연분을 맺고, 고령인 부모님들이 세상을 뜨는 시기가 온 것이다.
 
  “흔히 ‘세월이 유수 같다’고 말하던데 지금 저도 돌아보면 20대부터 50대까지 어제 일인 것만 같습니다. (웃음) 옛날로 놓고 보면 60세는 완전한 노인이지만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이제 겨우 60% 온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남은 40%를 어떻게 살아갈지 준비하고 있습니다. 학문에는 끝이 없다는 생각으로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등 컴퓨터 기술도 독학하고 있지요.”
 
  그는 2014년 자신이 겪은 58년 개띠 인생의 추억과 애환을 담아 수필집으로 펴내기도 했다. 박씨는 “60년 인생을 헤쳐 와 보니, 이제 자식들을 다 장성시켜서 출가도 하고 또 손주까지 보게 됐다. ‘할아버지는 그 시대에 이렇게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남겨 주고 싶어서 집필하게 됐다”고 출간 의도를 밝혔다.
 
  박씨의 부친은 평안북도 실향민으로 종로에 터를 잡고 낙산공원 자리에 있던 이대부속병원에서 근무를 했다. 박씨의 집안은 다섯 형제로 모든 가족이 베이비붐 세대에 속했다. 그중 박씨는 종로 6가에서 태어나 종로 5가의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해 서울 중심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베이비부머라고 하는 세대를 사회학적으로 규정할 때 1955년생부터 1963년생까지를 뜻합니다. 그런데 저희 집안의 다섯 형제 중 막내가 63년생이고 큰 누님이 55년생이라서 완전히 그 세대에 걸쳐서 태어났던 것이죠. 제가 다닐 때 국민학교에 한 학급당 7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어요. 반도 14반에서 15반까지 갔었고 2부제, 3부제 수업도 했었죠. 그때는 학생 수가 그렇게 많았었는데 지금은 졸업하는 학생이 수십 명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아주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일이 된 셈이죠.”
 
 
  “교실마다 70명… 2·3부제 수업에 15반까지”
 
1979년 서울문창초등학교 교실에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박승찬씨는 “제가 다닐 때 국민학교(초등학교)에 한 학급당 7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진=조선DB
  박씨에 따르면 1960년대 당시 학령인구가 많다 보니 학교는 거의 수용 개념으로 운영됐다고 한다. 더욱이 산업화 추세에 따라 초등학교 때 국문을, 중학교 때 영어를 어느 정도 읽을 줄만 알면 바로 산업현장으로 내몰리곤 했다는 것이다.
 
  박씨가 기억하는 유년 시절 추억 중 하나는 ‘동원문화’다. 외빈 방한이나 국가 행사가 열릴 때 초·중·고를 막론한 서울 종로의 모든 학생이 일제히 동원돼 환영 인파를 이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빈(國賓)이 온다고 하면 저희같이 종로에 소재한 학생들은 초·중·고 할 것 없이 그 나라의 국기를 열렬하게 흔들면서 연도(沿道)에 줄지어 섰습니다. 수십, 수백만 인파가 운집해 남녀노소 다 환영인사를 건넸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각 부대들이 파병되면 국민 전송(餞送)식이라고 해서 남대문서부터 동대문운동장까지 가두행진을 합니다. 그때마다 저희는 아침에 나가서 태극기와 월남기를 흔들면서 ‘잘 싸우고 오라’며 응원했었습니다.”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식수(植樹)·치산(治山) 사업에 참여했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박씨에 따르면 그때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나무 심는 일을 돕거나 해충 잡기에 투입됐다. 박씨는 “대나무 젓가락과 깡통을 들고 산에 가서 송충이를 잡는 게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박씨는 가난했던 1960년대를 지나 70년대로 들어서자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경제성장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어린 학생들은 미국 정부의 양곡 원조를 받아 학교에서 나눠주는 빵으로 허기를 채웠다. 소고기는커녕 생선·계란조차 귀했다. 잘사는 집 아이 도시락 반찬을 뺏어먹는 것은 예사였다. 그런데 박씨가 중·고등학생이 되자 고기반찬을 접할 기회가 늘고 아이스크림 등 새로운 식음료가 발달했다. “하루 자고 나면 TV와 냉장고가 집에 들어왔었다”는 그의 표현처럼 가속도가 붙은 경제성장은 전후의 가난했던 시절을 보상하듯 다가왔다.
 
 
  “1960년대는 옥수수빵, 70년대는 고기반찬”
 
1960년대 중반 울산 성남동 극장 앞 거리 모습. 박승찬씨는 가난했던 60년대를 지나 70년대로 들어서자 발전하는 경제성장을 체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조선DB
  “1960년대만 해도 학교에서는 미국이 지원한 우유가루, 옥수수가루를 섞어서 빵을 만들어 배급을 해 줬습니다. 없어서 못 먹었죠. 늘 단것을 먹고 싶은 나이에 모든 식음료가 부족했으니 항상 허기졌었죠. 그런데 1970년대 초·중반, 한 1972~74년 사이에 경제개발계획 프로젝트가 거의 끝나다 보니 우리나라 국민들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습니다. 경제발전의 과실을 맛보기 시작한 거죠. 어느 날 학교 다녀오거나 자고 나면 집에 TV와 냉장고가 들어와 있고, 푸성귀만 먹다가 고기반찬을 먹고 병으로 된 우유가 배달되고, 아이스크림도 돈만 있으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어요. 집안 형편은 물론 사회 경기 전체가 조금씩 나아지고 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박씨는 당시 사람들의 용모와 옷차림도 점점 말쑥해져 갔다고 회상했다. 위생관념도 높아졌다. 그 전에는 생일 때나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면 목욕조차 자주 못했었다고 한다. 명절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룬 목욕탕에서 매미채로 때를 걷어내던 시절은 저물고, 한 달에 한 번이었다가 2주에 한 번 꼴로 서서히 목욕의 횟수가 늘어났다.
 
  박씨는 당시 SOC(사회간접자본) 시설들이 빠르게 건설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보면 고가도로가 생기고 터널이 뚫리고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전차 노선을 걷어내고 복공판(굴삭에 앞서 설치되는 안전 구조물)을 세워서 지하철을 파냈다.
 
1960~70년대 당시 아이들이 맛난 아이스크림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박승찬씨는 자신이 중·고등학생이 된 1970년대 중반부터 고기반찬을 접할 기회가 늘고 아이스크림 등 새로운 식음료가 발달했다고 회상했다. 사진=조선DB
  “온 서울 시내가 공사판이었어요. 그러나 서울 시민들은 이게 다 나라가 발전하는 길이구나, 풍요의 길이구나 생각하면서 불편을 감내하고 살았습니다.”
 
  박씨가 말하는 우리 현대사에는 회색빛 공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종로 인근의 낙산을 마음껏 뛰어다니면서 녹지대(綠地帶)를 놀러 다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삭막한 도심일 것 같았는데도 서울에는 나름 녹지공간이 많았습니다. 동숭동 뒤쪽, 종로 인근의 낙산을 오르내리면서 자연과 친해졌습니다. 마포종점도 가 보고 한강변으로 뚝섬, 광나루도 구경하고 장충체육관을 개구멍으로 들락거리면서 놀기도 참 많이 놀았습니다. (웃음) 그때 야외에서 놀았던 다양한 경험이 자양분이 돼서 이렇게 다큐멘터리 감독을 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드네요.”
 
 
  “폐타이어 녹여 고무신 때워 신기도”
 
1964년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 모습.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의 무술년 1958년생 개띠 출신들은 올해 회갑(回甲)을 맞는다. 사진=조선DB
  현재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서정홍씨도 과거 궁핍했던 시대 현실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노동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는 점도 지적했다. 58년 개띠 출신인 그가 온몸으로 지나온 60년 현대사는 명암이 교차되던 시대였다. 문명의 발전에서 비롯된 희망만큼 그 이면의 고통과 실의도 컸던 시절이었다.
 
  “제가 경남 마산 출신인데 그때만 해도 다 초가집에다 고무신에 나일론 양말을 신고 한 시간씩 걸어서 학교를 다녔었죠. 워낙 가난했던 시절이라 고무신조차도 쓰레기장 폐타이어를 녹여 구멍을 때워서 신었습니다. 그때 동상 걸린 발이 지금도 겨울이면 구두를 신지 못할 정도로 후유증이 남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가난한 58년 개띠들이 겪었던 일이었죠.”
 
  서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당시 경남대학교 앞에 있던 자동차 부품 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대부분 가난했던 서씨의 친구들도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공장에 다녔다. 그러면서도 서씨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공장생활을 하면서 야학(夜學)에 다녔던 것이다. ‘고등공민학교’라고 불렸던 야간 중학교에 입학한 서씨는 밤 11시까지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업을 마친 서씨는 20대 때 군대를 제대한 후 대기업에 취직했었다. 그러다 1980년 5·18을 겪으면서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서씨는 거리 시위가 많았던 당시를 회고했다.
 
  “80년대는 대부분 목숨 걸고 길거리에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최루탄 마시는 게 일이었죠. 저도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되면서부터 많이 참여했었습니다. 민주화가 이뤄진 뒤부터는 촌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마늘·양파·감자 등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은 이룩했지만 생명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던 과거의 시대를 반성하기 위해 농부가 된 것이죠.”
 
  그러나 서씨는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었어도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불안했거나 불행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지난 세월은 다소 불편했어도 앞날이 막막하진 않았다. 누구나 부지런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된 시대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난했지만 ‘불행한 시대’라고 생각지 않았다”
 
1975년 통일벼 보급을 위해 겨울철 필리핀에서 증식한 종자를 비행기로 공수해 오는 장면. 김웅원씨는 “선배들과 우리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도 남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 정을 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사진=조선DB
  “가난이 불편했다는 생각은 했지, 시대가 불행하거나 불안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항상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있었고 이웃이 있었어요. 가난해도 같이 가난했고, 빈부격차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불안하고 앞날이 막막하잖아요. 삶은 윤택해졌어도 이기주의가 만연해졌고요. 그때만 해도 그런 것은 없었죠. 부모를 아무리 잘못 만나도 부지런히 일하면 누구에게나 다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안타까운 이유입니다.”
 
  서씨는 후배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주문했다. 그가 회상하는 한국 현대사는 비록 가난했어도 이웃 간의 정이 돈독했고 배고픈 사람들의 인격도 존중해 주는 ‘인간미의 시대’였다. 나라 탓이나 부모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시대’였다.
 
  “우리가 입은 옷이나 신발이나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물건입니다. 밥도 그렇고 된장찌개 하나라도 다 이웃들이 땀 흘려 일해서 일군 것이에요. 일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누구나 땀 흘려서 일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4차 산업혁명 등 변화가 많아 힘든 시대라지만 긍정적인 마음으로 힘을 합쳐 나아간다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서씨는 같은 시절을 살아온 지금의 58년 개띠들에게도 어른으로서의 경청과 배려를 당부했다. 그에게 있어 여생은 ‘덤으로 사는 삶’이었다. 고맙게 남은 삶을 바쳐 “58년 개띠들도 하늘에 덕을 쌓고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여는 어른들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현재 IT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58년 개띠 출신 김웅원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음악에 심취했다. 목소리가 좋다고 알려져 방송국을 오가며 DJ 생활도 했다. 군 입대 후에도 ‘제대하면 오라’고 후한 보수로 손짓하는 곳이 많았다.
 
  그랬던 김씨는 대학 3학년 복학한 뒤 단호히 음악을 접고 공부의 길에 들어섰다. 도시락 3개를 싸들고 새벽마다 도서관에 들어가 밤 12시가 돼서야 나왔다. 그가 꿈꾼 진로는 공직이었다. 그것도 당시 처음 공채를 단행했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지원했다. ‘나라를 위해 말직이라도 뭔가 해 보자’는 죽기 살기의 의지로 223대1의 경쟁률에 도전했다. 아쉽게 낙방한 후 IT업계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전도유망한 첨단산업이었다.
 
  “튼튼한 기업이라 IMF 때도 사원 대우를 잘해 줬어요. 상여금을 많이 줘서 돈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사회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서울 노원구의 한 교회에다 유리 조형을 만들어 주고 경기도 안산의 독거노인들에게 매년 성금도 보냈습니다. 지금도 간간이 사회봉사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선 세대의 선배들 모시고 가르침 받아”
 
  그 역시 자녀들을 위해 책을 썼다. 58년생 개띠로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역정을 담아 아이들에게 깨달음과 가르침을 주는 교재로 활용했다. 예전의 그는 “아이들에게 공부에 대한 어떤 결정적 모멘텀(다른 방향으로 바뀌는 계기)을 주고 싶었다”며 잠자는 고등학생 아이들을 깨워 책을 건넸다.
 
  “발간하는 날 밤 10시쯤에 들어가서 자는 애들 깨워서 책을 쥐여줬습니다. ‘너희들이 펼쳐 보고 알아서 해라. 너희들 삶은 너희들 것이다’라고 말했더니 두 아들이 새벽에 그 책을 다 읽고 일어났더군요. ‘아버지,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각오한 뒤부터 둘 다 제대로 된 대학을 가서 정말 기뻤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전했듯 그가 60년 인생을 살면서 얻은 깨달음은 ‘사람과 시대에 대한 신뢰’와 ‘선배 세대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58년 개띠들보다 더 앞서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 온 선배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시대와 사람에게 신의를 잃지 않는 것은 그가 말년까지 추구한 인생의 방향이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내 선배들, 그분들 건강이 어떤지 안부도 전해 드리고 같이 운동도 다니고 술도 사 드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흔히 58년 개띠들이 현대사의 주역이라지만 사실 낀 세대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가신 선배들의 노력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도 70세 넘으신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내 남은 삶의 흐름을 어떤 자세로 그려 나가야 하는지 다시 인생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죠. (웃음) 선배들과 우리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도 남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사람, 정을 주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지금 시대에 신의(信義)를 놓치지 않는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씩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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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연    (2018-02-02)     수정   삭제 찬성 : 16   반대 : 5
북괴의 젊은이들도 따지고보면 우리나라의 1950년대1980년대의 정문화가 살아있는 사람인거 인정하오리다!!!! 다른점이라면 몰래 USB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서방자유국가들의 대중음악들과 TV드라마들을 본다는 사실!!!! ㅡㅡ
  박혜연    (2018-02-02)     수정   삭제 찬성 : 5   반대 : 5
월간좇선은 북괴신문같더구먼 긍정적인 기사만 올리고 부정적인 기사는 냉대하는....!!!!

2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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