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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심산상(心山賞) … 역대 수상자 누군가 보니

글 :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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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류 유학·역사계 “심산은 대한민국 독립, 건국,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
⊙ 유교 전통주의 세력, 자본주의 개혁 세력과 갈등 빚어 … “심산도 구(舊)체제를 허물고 서구 문명을 들여오고자 했던 이승만과 대립각 세운 것”
⊙ 한 유학자 “좌파·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심산상 수상자의 면면은 일정 부분에서는 당시 유교계 그리고 심산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성균관대 중앙학술정보관 앞에 있는 심산 김창숙 동상.
  11월 3일 손석희 jtbc 보도담당 사장이 성균관대 명륜동 캠퍼스에서 제20회 심산상(心山賞)을 수상했다. 심산상은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초대총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金昌淑)을 기리기 위해 1986년 제정된 상이다. 심산 김창숙연구회(회장 김정탁 성균관대 교수)는 앞서 10월 17일 손 사장이 제20회 심산상 수상자로 선정됐음을 발표하며 선정이유를 지난해 촛불시위가 손 사장의 보도로 촉발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성대신문》은 2002년 5월 13일 자 보도에서 심산상의 의미와 선정기준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심산상은 항일 독립투쟁과 반독재 민주통일운동에 온 생애를 바치고 근대 성균관 대학을 재건해 민족의 창조적 역량을 키운 근대민족운동의 선구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으며 학술과 실천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공로가 큰 개인 및 단체에 대하여 연 1회 시상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수상자는 후보위원회가 추천한 후보 중 본교 교수 110여 명으로 구성된 연구회에서 위촉하는 심사위원들이 국내외에서 이뤄진 저술과 공적의 심사를 통해 선정하며 연구회 회장단의 인준을 거쳐 확정 발표한다.
 
  한편 심산상 시상식은 심산의 기일인 5월 10일을 전후해 거행되며 수상자에게 상장 및 부상(상금)이 수여된다. 다음 날에는 심산묘소를 참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상식이 끝이 난다. 또한 상금은 다른 상들이 스폰서나 모기업에서 출자하는 것과 달리 연구회에서 펴낸 서적 판매대금 등 연구회 기금으로 수여하고 있다.〉
 
 
  심산상 역대 수상자, 이념적 성향에 있어 논란의 여지 있는 인물들 있어
 
지난 11월 3일 성균관대에서 심산상을 수상하는 손석희 jtbc 사장. 사진=jtbc 방송 캡처
  심산상은 1986년 제정된 이래로 개인 18명과 단체 3곳에 상을 수여했다. 1992년 수상자인 임종국 시인은 1989년 타계해 사망한 후에 상을 받았으며 1997년에는 독립운동가 이규창과 홍남순 변호사가 공동 수상했다. 1991, 1998, 2003, 2005년도에는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2006년 리영희 교수가 제17회 수상자로 선정된 이래로 8년간 시상이 중단됐다. 성균관대 관계자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사회적 무관심과 변화한 시대상 등이 시상 중단의 이유였다고 한다. 수상자 선정은 2015년 재개됐다.
 
  역대 수상자 및 단체들을 보면 국민 모두에게 존경받는 인물들도 있지만 이념적 성향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들도 있다. 특히 강만길, 백낙청, 고(故) 리영희 교수 등은 진보 진영의 대부(代父)로 평가받는 인물들이다. 손석희 사장이 jtbc 보도를 통해 촛불시위를 촉발시킨 공로로 상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일기도 했다. 최근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됐던 jtbc 태블릿 PC 보도의 사실성・위법성 여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에 심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는 심산상은 정말 심산의 정신을 계승하는 인물과 업적에 대해 상을 수여하고 있는지, 심산 김창숙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봤다.
 

 
  독립운동가 심산,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심산 김창숙 평전》에 따르면 김창숙은 1879년 음력 7월 10일에 경상북도 성주군 조선 선조 때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 부친 김호림 모친 인동 장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세 때 부친이 별세하고 이종기, 곽종석, 이승희, 장석영 등 당시 유가 석학들의 문하에서 두루 공부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스승 이승희와 함께 이완용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1909년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기하자 일진회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중추원(中樞院)에 제출하고 각 신문 지상에 발표했다. 이 일로 체포돼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선비로서 세상에 산다는 것은 큰 치욕이다”며 한동안 술과 통곡으로 광인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학문을 닦으면서 서서히 우리 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되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곧 너의 나아갈 길이다”라는 모친의 견책을 듣고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린다.
 
  1919년 김창숙은 3·1 독립선언이 국내에서 큰 전기를 마련했으니 이제 필요한 것은 국제적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영남과 충청도 유림 137인의 서명으로 이루어진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3월 23일 중국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파리장서〉를 영역(英譯)해 프랑스 파리에 있는 김규식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고 장서를 수천 부 인쇄해 중국의 정계, 언론계, 각국의 대사관에 발송했다. 또한 이를 한인동포들이 거주하는 해외 각지와 국내 지방 향교에도 보냈다. 국내에서는 이 사건으로 유학인 500명 이상이 체포되는데 이를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 부른다.
 
  심산은 유학과 한문의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중국 정부 및 유력 인사와 교류하며 중국 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게 했다. 그는 당시 중국의 지도자 쑨원(孫文)과 단독회견을 갖기도 했다.
 
 
  일제에 끝까지 항거, 광복 후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통일국가 건설 주장
 
경북 성주군 소재 심산 김창숙 생가. 사진=국가보훈처
  1925년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나 계획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모금운동이 탄로나며 유림 600여 명이 체포된다. 이를 ‘제2차 유림단 사건’이라 부른다.
 
  1926년에는 이동녕, 김구 등과 함께 의열단을 국내에 파견해 무력투쟁을 벌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나석주를 국내에 밀파해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게 한 사건이다.
 
  1927년에는 장남 환기가 국내에서 일경에 체포돼 고문 끝에 사망한다. 심산은 지병 악화로 상하이 공동조계(共同租界)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던 중 일경에 체포돼 대구로 압송됐다. 1928년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로 이감돼 복역했다. 1929년 지병 악화로 가출옥됐다가 재수감되고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된 채 1934년 다시 가출옥된다.
 
  이때 이후로 앉은뱅이 노인, 벽옹(躄翁)이라는 별호를 갖게 된다. 그는 가출옥 상태에서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끝까지 거부했다. 1945년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됐다가 광복 직전 발각돼 일경에 붙잡혀 구속 수감 중 광복을 맞게 된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여운형·박헌영에 의해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이를 비판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반대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통일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46년에는 난립된 유도회(儒道會) 조직을 통합해 유도회총본부로 개편하고 위원장에 추대된다. 성균관대학을 설립해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에는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홍명희(洪命憙)·조소앙(趙素昻)·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이른바 ‘7거두(七巨頭) 공동성명(共同聲明)’을 발표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건국 이후 이승만 정권과 대립하며 반대 투쟁 벌이기도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독립청원서 〈파리장서〉. 사진=국가보훈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1951년 1·4 후퇴로 부산에 피란해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下野) 경고문을 보냈다가 체포돼 부산형무소에서 40일간 수감된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이시영, 신익희 등과 반(反)독재 호헌(護憲) 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다 다시 40일간 옥고를 치렀다.
 
  1953년 성균관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총장에 취임했다. 이승만 정권과 갈등을 빚으며 1956년에는 성균관대학 총장직을 사임하고 그 이듬해에는 성균관장, 유도회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됐다. 이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지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는 계속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이를 독재 정권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퇴진한 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돼 출마하나 윤보선에게 패해 낙마했다. 병중에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찾아왔으나 외면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훈했다. 1962년 5월 10일 노환으로 84세의 나이에 타계한다.
 
  심산은 구습타파와 개혁을 외친 개신유학자였고 온몸으로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 세력에 반대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또 성균관대를 세워 인재를 양성한 교육가이기도 했다. 말년에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학계의 평가가 갈리고 있다.
 
  이황직 숙명여대 교수는 최근 《군자들의 행진》이란 책을 통해 유교 세력이 대한민국 건국과 민주화에 앞장섰다며 심산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교수는 지난 4월 20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책 제목을 미국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의 《성자들의 행진》에서 따왔다”며 “독실한 청교도 신자들이 영국의 근대 혁명을 이끌었음을 밝힌 왈저의 연구처럼, 한국 현대사에서 유교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던 심산의 ‘파리장서운동’을 예로 들며 근대적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유교인들이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과 그 후학들이 광복 직후 새 국가 건설의 중추 세력으로 활약했다”고도 평가했다. 또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통일국가 건설을 세우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김창숙은 6·25 전쟁 이후 분열된 유교계를 결집해 ‘유교 네트워크’를 세우고 민주화 운동 전면에 나서게 된다. 4·19 혁명의 흐름을 바꿔 놓은 4월 25일 교수단 시위를 주도한 세력이 이 네트워크였다고 한다. 이 교수는 “당시 교수단 시위에는 정치 시스템을 이름에 맞게 바로잡는다는 ‘정명론(正名論)’, 패덕한 군주를 내쫓는다는 ‘방벌론(放伐論)’ 같은 유교적 개념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유학계 및 역사계 내에서 심산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이 교수의 평가와 비슷했다. 취재 과정에서 여러 의견을 듣던 중 심산과 과거 유교계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내리는 유학 연구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해방 정국 및 건국 과정을 거치며 대한민국의 주류세력이 된 ‘자본주의 진보파’에 반대해 ‘사회주의 반동파’와 ‘유교 전통주의 명분파’가 연대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자본주의 세력이야말로 국가의 근대화를 가져온 개혁 세력이라며 ‘진보파’라 명명했다.
 
  그는 “토지 기반의 농경 중심 사회에서 가부장적이고 전통주의적인 세계관을 가졌던 유가들은 현대 문명을 끌어오려는 자본주의 진보파에 반대하게 됐을 것”이라며 “그런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과도 연대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국제 공산·사회주의 세력이 레닌의 ‘피압박 민족이여 모두 단결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민족주의’를 자극하자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유교계 인사들은 친사회주의 성향을 갖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항일’은 지조있는 유학자들의 최고 명분이었다”며 “조선 성리학적 도덕정치관이 그것을 정신문화적으로 뒷받침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에 대한 원한, 앙심, 증오가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습득했던 모든 현대 문명적 능력까지 멸시, 증오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쉬웠을 것”이라며 “그래가지고서는 현대사회와 국가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일부 유교계가 가졌던 이런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김창숙도 구(舊)체제를 허물고 서구의 문명을 들여오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게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심산이 만약 역대 심산상 수상자의 목록을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까
 
  이러한 점에서 “민중사관, 좌파·진보 성향으로 분류되는 심산상 수상자의 면면은 일정 부분에서는 당시 유교계 그리고 심산의 정신과 맥을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개신유학자, 독립운동가, 교육가로서의 심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며 자신의 견해는 일부 유교계에 대한 분석이지 유교계 전체에 대한 평가가 아님을 강조했다.
 
  손석희 사장은 11월 4일 성균관대에서 열린 심산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수여된 상은 그분의 이름까지 지켜야 하기에 더 마음이 무겁다. 상을 받게 돼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다.”
 
  심사위원장이었던 박승희 성균관대 교수는 “불의에 대한 저항과 민족의 창조역량 고양에 공로가 큰 인물로 선정한다”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한 손 사장이 최적임자라고 생각해 시상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태블릿 PC 보도’ 등 손 사장과 jtbc의 보도는 촛불시위를 촉발하며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사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보도가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사실이다. 그 흐름의 변화가 긍정적 방향인지, 부정적 방향인지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리고 있으며 훗날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심산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평가를 떠나서 그가 자신의 평생을 국가 발전을 위해 쏟았다는 것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연 심산이 꿈꿨던 모습으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심산이 만약 역대 심산상 수상자의 목록을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지 의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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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cmaca    (2017-12-04)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1
필자는 한국의 학교교육에 의거, 한국사,세계사, 한문.국민윤리(삼강오륜이나 인의예지신, 충효등 유교교육 위주)및, 국내법.국제법등을 종합하여 한국과 세계의 대학 및 종교들을 판단해왔음.

http://blog.daum.net/macmaca/2448

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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