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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취재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원, 지금까지의 50년 앞으로 50년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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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 회담 때 설립 약속
⊙ 지금까지 창출한 國富만 600조… 세계 연구소 순위 6위
⊙ 경부고속도로부터 포스코-현대중공업-삼성전자의 ‘설계도’ 그려
⊙ “조국을 살리자”… 젊은 한국 과학자 1000명 귀향 행렬에 세계가 놀라
⊙ 이병권 원장의 슬로건 “앞으로 50년 MIRACLE 창조하겠다”
  1974년 삼성전자를 통해 가전매장에 나온 제품을 보고 국민들은 신세계(新世界)를 목격했다. 흑백(黑白)이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바뀐 것이다. 1972년 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국민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해준 이 제품의 연구비는 800만원이었다. 이것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손성재 연구원의 ‘작품’이다.
 
  1982년 KIST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아라미드 섬유는 지금도 과학기술인력들 사이에서 ‘기적’으로 통한다. 강철보다 5~6배 강하고 무게는 다섯 배나 가벼운 이 섬유는 2년 뒤 미국-유럽-일본 등에서 물질 특허를 획득했다. 그뿐 아니라 10년 전 미국 듀폰이 개발했던 초강도 아라미드 섬유보다 발전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광복 70주년 맞아 세계적 기술 13개 공개
 

  광복 70년을 맞은 2016년 KIST는 한국 과학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한 13개 개발품목을 공개한 바 있다. 첫 번째가 컬러TV, 두 번째가 고강도 아라미드 섬유, 그 뒤를 이어 캡슐형 내시경, 오디오-비디오테이프의 기초 소재인 폴리에스테르 필름, 축산폐수처리 정화 기술, VCR 헤드드럼, 광통신(光通信)용 광섬유, 환경친화성 및 개선용 셀룰로오스 신소재, 3차원 영상 뇌 분석기술, 공업용 다이아몬드 합성 및 인조 다이아몬드 박막제조기술, 불소화합물 제조공정, 지능형 휴먼로봇, 도핑 컨트롤 기술 등이다.
 
  이 가운데 도핑 컨트롤 기술은 88서울올림픽 때 남자 육상 100m 우승자 벤 존슨의 도핑 사실을 밝혀내 우리의 위상을 드높였다.
 

  더 구체적으로 KIST가 발간한 〈KIST 50년 주요 연구사업 및 사업성과〉라는 보고서를 보자. 보고서를 보면 KIST는 단순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화학공업 육성 및 과학기술 선진화를 위한 정책자료 조사연구’라는 항목이다. 이 연구의 기원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KIST는 두 개 부처로부터 중요한 연구를 의뢰받는다. 첫 번째가 지금의 재경부 격인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장기 에너지 수급에 대한 조사연구’를 해달라는 것, 두 번째가 같은 해 과학기술처가 부탁한 ‘과학기술진흥의 장기 종합정책 수립을 위한 조사연구’다. 그로부터 2년 뒤 경제기획원은 이런 조사를 부탁했다. ‘기계공업 육성 방안.’
 
  1967년과 1969년의 연구는 우리나라가 훗날 한국중공업-삼미특수강-포항종합제철 주물선 공장-현대중공업(조선소) 등 기계공업 초석(礎石)을 놓는 데 ‘설계도’ 같은 역할을 했다.
 
 
  기계공업 육성방안 등 중화학공업 건설의 초석 닦아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KIST는 1970년 ‘중공업 발전의 기반’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를 완성했으며, 이보다 한 해 앞서 1969년부터 시작된 정부의 ‘포항종합제철사업계획’에서 기술적·경제적 타당성 등을 검토하고 조광 생산 기준 연산 103만 톤 규모를 설정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다.
 
  KIST의 중공업연구실 일본 도쿄(東京)분실에서는 포항종합제철과 일본 제철업계와의 기술협력의 가교 역할을 수행했으며, 1975년까지 기술 지원을 계속했다. 이것만 봐다 현재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먹거리인 기계공업-조선-철강 등의 중공업이 KIST 과학 두뇌들의 정교한 예측과 설계에 의해 추진됐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반을 다진 KIST는 1970년대 전반, ‘전자공업 진흥·육성을 위한 국내 전자공업 및 관련 분야 조사’ ‘산업용 원자재 실태조사, 국산화 조사’ ‘기계기술 고도화를 위한 시설 연구’ ‘기계공업 종합육성계획’ ‘포항종합제철 확장사업’ ‘인천제철의 운영 합리화’ 등 한국 중화학공업 발전의 큰 틀을 설계했다.
 
  현재 전자산업은 대한민국의 간판 종목이다. 매출액과 생산 능력에서만큼은 세계 1위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앞서 말했듯 ‘전자공업 진흥·육성을 위한 국내 전자공업 및 관련 분야 조사’가 KIST가 전자산업에 기여한 전부는 아니다. KIST는 1966년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와 함께 우리나라 산업실태를 16개 분야로 조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전자공업의 수준은 전자산업의 특수성과 제반 여건을 감안할 때 성장 전망이 매우 밝다”는 결론을 내고 1968년 ‘전자공업 육성책 수립을 위한 국내 전자공업 및 관련 분야 조사사업’ 보고서를 냈다. 이것이 바로 전자공업 육성 8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KIST는 전자 분야에서 독보적 결실도 냈다.
 
 
  각종 신기술 개발 민간기업에 이전시켜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01을 개량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디지털 컴퓨터 ‘세종 1호’.
  1971년 국내 최초로 반도체 집적회로를 이용한 컬러텔레비전 수상기를 개발한 데 이어 탁상·포켓형 전자계산기(1971년), 전자교환기 KIST 500(1975년), 초단파 FM무전기(1975년), 액정표시기(LCD)와 이를 이용한 전자시계(1976년), 컴퓨터용 한글터미널(1976년) 등을 개발해 산업체에 기술을 이전시켜 준 것이다.
 
  전자교환기 KIST 500 개발의 기반이 된 ‘세종 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01을 개량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디지털컴퓨터로 기록되고 있다. 미국 GTE사는 KIST 500과 세종 1호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삼성그룹과 삼성GTE(삼성반도체통신의 전신)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1967년 9월 KIST 내에 ‘전자계산실’이라는 조직이 출범했다. 전자계산실은 1969년, CDC 3300 전자계산기를 도입해 국내에 전자계산기 이용기술을 개발해 보급하기 시작했다. 정부기관으로서는 경제기획원이 처음으로 ‘예산처리 및 배정업무 전산화’를 이뤘고 이후 1970년도 대학입시 예비고사 채점 등에 도입됐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같지만 ‘종합제철 건설 PERT’ ‘전화요금 EDPS화를 위한 시스템’ ‘예산 편성 및 배정업무의 터미널 이용’ ‘한국은행의 수출지원 금융관리시스템’ ‘관세행정 EDPS화’ ‘한일은행 예금 및 대출업무시스템’ ‘전매행정 EDPS화’ 등이 다 전자계산실이 일군 작품이었다.
 
  특히 당시 체신부의 전화요금계산시스템은 연구소가 저렴한 비용으로 개발해 한국의 정보산업이 노동집약적 두뇌산업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는데 공공 분야의 선도적인 전산화는 이후 민간 분야로 급속히 파급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사용된 경기정보시스템(GIONS)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서방 진영이 불참한 데 앙심을 품고 1984년 미국 LA 올림픽부터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러시아 등 공산권 국가들이 다수 참여해 경기 정보가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이를 신속 정확하게 처리해 뛰어난 시스템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그 원류가 바로 KIST였다.
 
 
  간·폐 디스토마와 결핵 치료제 개발… 국민 건강에 기여
 
간디스토마 치료제 개발.
  KIST가 중공업-기계공업-조선-철강-전자산업의 연구에만 치우친 것 같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 걸리기만 하면 치명적인 기생충으로 인식됐던 간·폐 디스토마 치료제를 개발한 것도 KIST였다. 김충섭 박사팀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신약은 만드는 데 비용이 싸 지금도 세계 간·폐 디스토마 치료제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결핵은 저개발국가의 상징 같은 질병이다. 우리 역시 결핵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결핵 치료제 리팜피신의 중간체인 ‘리파마이신’의 생물학적 제조공정을 개발함으로써 막대한 수입대체효과는 물론 국민 건강에 크게 기여한 것도 KIST였다. 의학 분야에서 KIST의 간판품목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결핵 치료제인 에탐부톨, 항생제인 네틸마이신 등이 대표적이며, 각각 한독약품, 이연제약으로 기술 이전돼 상품화됐다. 암 환자들의 번거로움과 고통은 크게 줄이면서 기존 주사제보다 독성이 적고 복용이 간편한 먹는 항암제 제형도 개발하였다.
 
  1987년부터 국내에 도입된 물질특허제도를 계기로 KIST의 제약 분야 연구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향상됐다. 종전에는 공정을 개선하는 연구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신물질 의약품 개발 연구에 집중한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세계 최초의 고분자형 제3세대 항암제인 조절방출형 백금착물 항암제로, 32개국에 물질 특허를 출원했다.
 
  상온(常溫)에서는 액체로 있다가 인체에 들어가면 젤리처럼 바뀌는, 체내 의약품 운반체로서 응용 가능한 폴리포스파젠계 고분자 신물질 ‘온도 감응성 졸겔’(2001년) 역시 10개국에 특허가 출원됐으며, 2014년에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 표적치료제 선두 후보 물질인 퀴자티닙(AC220)의 단점을 극복한 표적항암제 후보 물질을 국내 신약개발 전문기업에 기술 이전해 신물질 항암제 출현의 기대를 높이고 있다.
 
 
  대한민국 연구소의 宗家, 16개 연구소 분가시켜
 
  KIST는 그뿐 아니라 국내 연구소들의 ‘비조(鼻祖)’와도 같다. 국내 대부분의 국책연구소들이 KIST에서 분가(分家)해 성장한 것이다. 가장 먼저 KIST에서 독립한 연구소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다. 1973년 KIST 부설 해양개발연구소는 3년 뒤인 1976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돼 지금은 극지연구소까지 갖추고 있다.
 
  KIST에서 분화해 나간 연구소는 부설기관까지 합쳐 모두 16개다. 그 가운데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전자산업의 르네상스를 맞아 모태였던 KIST에 버금갈 만큼 규모가 커졌다. KIST에서 분화된 연구소는 표1과 같다.
 
  올해 초 로이터통신은 전 세계 연구기관의 논문과 특허 실적 등을 분석해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25개 연구기관(http://www.reuters.com/article/us-innovation-rankings-idUSKCN0WA2A5)’을 선정해 발표했다. KIST는 여기서 6위에 올랐다. 로이터 통신이 정한 기준은 매우 정교한 분석의 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첫째, 논문은 2008년부터 2013년까지 ‘Thomson Reuters Web of Science’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학술 논문의 수를 반영했다. 둘째, 특허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Derwent World Patentes Index’와 ‘Derwent Innovations Index’에 등재된 특허 출원의 수인데, 특허와 논문 인용은 2015년 7월까지의 것이 대상이다.
 
  셋째, 위의 기준에 의해 정리된 기관 중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를 통해 최소 70개 이상의 국제 특허를 출원한 기관만을 대상으로 했는데 현재까지의 점수 50점에 특허인용도와 특허인용영향력 합산 점수 50점을 반영하여 총점을 계산했다. 이 평가에서 1위는 프랑스의 대체에너지 및 원자력 위원회(CEA)가 차지했다.
 

 
  로이터통신 선정 세계 연구소 순위 6위
 
1965년 5월 18일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한·미 대통령 공동성명.
  독일 프라운호퍼협회가 2위, 일본 과학기술국이 3위를 차지했으며, KIST는 아시아 연구기관 중 두 번째인 6위였다. 국내 연구기관으론 KIST가 유일했고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7위), 독일 헬름홀츠연구회(11위),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13위),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15위) 등보다 순위가 높았다.
 
  국가별로는 미국이 6개로 가장 많았으며, 프랑스와 일본이 4개였다. 반면, 대륙별로는 유럽 지역 연구기관이 9개, 아시아 지역 연구기관이 8개로 나타났다. KIST는 이런 위상을 바탕으로 막대한 국가적 부(富)를 창출했는데 2014년 기술경영경제학회 보고에 따르면 총 파급효과가 595조원이나 됐다.
 
  분야별로 세분해 보면 논문 및 특허 등의 지식스톡파급효과 199조8368억원, R&D 사업화 성과 181조1451억원, 정책적 파급효과가 213조8554억원인 것으로 분석됐다.
 
  R&D 사업화를 통해 산업체 매출 성과에 크게 기여한 10대 대표 기술로는 ▲ 가변용량 다이오드를 이용한 휴대용 TV 수상기 ▲푸시버튼 전화기 ▲염료합성기술 등이었으며, 정책적 파급효과 측면에서는 KIST가 국내 최초 해외 유치 과학자들의 브레인 풀을 구축했던 점, 16개 출연연구소의 모태가 됐다는 점이 평가됐다.
 
1966년 2월 3일 KIST 초대 원장에 임명된 최형섭 박사.
  이렇게 혁혁한 성과를 내며 창립 50주년을 맞은 KIST의 시작과 우리 근대화 역사를 되짚어보면 나는 ‘국운(國運)’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 전자,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이 조선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나 박 전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것이 좋은 예다.
 
  사실 KIST가 생긴 유래는 드라마틱하다.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에 갔다. 월남전에 젊은이들을 파병(派兵)해 피를 흘린 대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존슨 대통령이 뜻밖의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내놓았다. “종합 과학 연구소를 지어주겠다”는 제안은 처음 한미 교섭 항목에는 없었다.
 
  과학기술 인력이 1000명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은 그로부터 굉음(轟音)을 울리며 역사를 바꿨다. 홍릉(洪陵)에 KIST가 들어선 것은 그 1년 뒤였다. 1966년 2월 2일 박 대통령은 KIST 설립 정관에 서명했고 다음날 최형섭 박사를 초대 소장에 임명했으며 4일 양국 정부가 ‘한·미 공동 지원사업계획 협정서’에 조인했다.
 
  KIST 설립 출자금은 2000만 달러였다. 당시 80kg 쌀 한 가마니가 3000원이었으니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다.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가운데 하나로 자타가 공인했던 한국의 연구소 투자는 무모해 보였지만 훗날 가장 성공적인 ‘베팅’으로 기록되고 있다. KIST가 그간 창출한 가치는 600조가 넘는다고 한다.
 
 
  최형섭 원장, 미국 돌며 젊은 과학자들에게 “조국을 살려달라” 호소
 
  연구 인력을 모으는 것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초대 원장 최형섭은 미국을 돌며 한인 과학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돈이 없어 허름한 숙소에 묵으며 조국의 젊은 과학자들의 손을 붙들고 호소했다. “가난한 조국은 당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정성이 통했음인지 첫해인 1966년 18명이 귀국한 후 1990년까지 영구 귀국한 과학자가 1000명을 넘는다. 귀국 과학자들은 당시 국립대 교수 연봉의 3배를 받았지만 그것도 미국에 있을 때의 절반이 안 됐다.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이들을 흘겨보는 이들도 있었다.
 
  주로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귀국한 과학자들의 연봉이 월등히 높은 것을 알고 이런저런 경로로 문제를 제기했다. 논란이 일자 박 대통령은 그들의 급여 명세서를 훑어보았다. 그 후 “이대로 시행하시오!” 지시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날 몇몇 과학자의 연봉이 일국의 대통령인 자신의 연봉보다 높은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않았다. ‘이대로 시행하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대 교수들이 제기한 ‘형평성 논란’은 잠잠해졌다.
 
  부자 나라 미국에서 과학자들이 이렇게 유출된 역사는 없었다.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 나라인 미국을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KIST의 재미 한국인 과학자 유치는 세계 최초의 역(逆) 두뇌 유출 프로젝트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험프리 미 부통령, “세계 최초의 역 두뇌 유출 프로젝트”라며 감탄
 
1969년 10월 30일 미국 험프리 부통령에게 연구 및 행정동 건설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초대 KIST 원장을 지낸 최형섭 박사의 비망록을 보면 KIST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사무실이 없어 간병하고 있는 병실에서 집무를 시작했다. 이후 한일은행 청계천6가 지점장이 본 지점을 사무실로 사용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고 이후 다시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로 옮겼다”고 했다.
 
  최 박사는 또 지금의 홍릉에 KIST가 자리 잡게 된 사연도 밝혔다. “홍릉 임업시험장을 부지로 사용하려 했으나 농림부 장관이 거부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께서 ‘임업시험장도 중요하지만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그보다 더 중요하니 38만 평 모두를 주라’고 했다. 나중에 연구소 부지는 15만 평으로 확정됐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KIST를 살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대통령께서는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고, 건설 현장에 직접 나와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뿐 아니라 국가기관의 부당한 간섭도 원천 예방해 줬다고 최형섭 초대 원장은 기록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열린 KIST 소장의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 대통령은 ‘예산을 얻으려고 경제기획원에 들락거리지 마라’ ‘절대로 인사 청탁을 받아들이지 마라’고 당부하셨다. 그것이 오늘의 KIST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출범한 KIST는 국가 건설의 초석을 쌓았다.
 
 
  자기보다 많은 연봉 받는 과학자 명단 보며 박 대통령 “이대로 시행하시오”
 
  미래를 내다본 대통령, 최형섭 등 선배 과학자들의 분투,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젊은 과학자들이 만든 신화는 1966년 처음 18명이 귀국한 이후 1980년까지 영구 귀국한 과학자가 276명, 1990년까지 1000명이 넘었다. 서울 인사동의 한 한식집에 가면 이런 신화(神話)를 직접 들을 수 있다.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나타나는 노(老)과학자들은 KIST 초기 멤버 40여 명이 만든 ‘4월회’라는 모임의 멤버다. 안영모 박사는 “처음 귀국한 과학자 20여 명 중 5명이 4년 만에 사망했다. 간암·대장암이었다. 모두 30대였다. 허허벌판에서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그 스트레스가 오늘날 번영의 바탕이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22대 원장을 지낸 문길주 박사 역시 1991년 귀국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KIST가 ‘그랜드캐니언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며 세계환경학회에서 이름을 떨친 문길주를 주목한 것이다. 경복고교 재학시절 캐나다로 간 그는 한국말을 못하는 브라질 교민 출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귀국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KIST는 베트남과 인연이 깊다. 지난 2009년부터 서울 홍릉에는 베트남객(客)들이 자주 보였는데 그들은 그냥 손님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이었다. 처음엔 과학기술원장이 오더니 과학기술부 장관, 국회의장, 부총리, 총리가 연달아 왔다. 그들은 왜 다른 곳도 아닌 홍릉에 온 걸까.
 
 
  베트남 권력자들의 모델도 KIST
 
KIST 초창기 연구원들은 한국 과학의 초석을 쌓은 애국자들이다.
  베트남의 국가 건설자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남겨놓은 위대한 유산(遺産), 바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에 산업의 ‘씨’를 뿌려 오늘날의 기적을 부른 KIST였다. 베트남은 월남전에서 우리와 총부리를 서로 겨눴고 프랑스 식민지배에 이어 대미(對美)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됐다.
 
  그런 그들은 하루빨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여러 나라가 훈수를 뒀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베트남 실정과 동떨어졌던 것이다. KIST를 맨 먼저 찾았던 부데탕 베트남 개발전략소장이 당시 회고한 말은 지금도 KIST 관계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비로소 파트너를 만났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베트남 경제를 살리려면 한국의 경험을 배워야 하는데 그 원동력이 KIST였습니다.” 베트남 고위 인사들이 한국에 매달린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베트남은 이후 월남전의 상흔(傷痕)을 감추고 한국·베트남 관계를 ‘사돈의 나라’로 규정하는가 하면 특별법까지 제정했다.
 
  이 법에 따르면, 각종 편의와 함께 8만 평의 땅까지 연구소 부지로 내놓는 것이었는데 급기야 베트남 발전의 지도를 그릴 기관명을 ‘V-KIST(Vietnam-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즉 우리 국명(國名)을 넣겠다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매국노’란 소릴 들었을 것이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거기서 연구소 설립협정에 서명한 박근혜 대통령의 흉중(胸中)엔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지하에서 박정희 딸의 예방을 지켜봤을 호찌민도 착잡했을 것이다.
 
  이제 새로운 50년의 출발점에 선 KIST호(號)의 선장 이병권 원장은 50년 전과 지금의 KIST에 부여된 역할에 대해 “과거에는 당장 먹고살 기술을 개발하는 게 급했지만 지금은 다음 반세기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66년까지의 모토를 ‘MIRACLE(기적)’로 정했다”고 말했다.
 
 
  이병권 원장 “앞으로 50년 먹거리도 우리가 주도”
 
  MIRACLE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현재 KIST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각 분야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즉 차세대 반도체(Material), 양자컴퓨팅과 나노신경망 모사(模寫·Information), 인공지능로봇(Robotics), 스마트팜과 천연물을 포함한 미래농업혁명(Agriculural), 신재생에너지와 에너지 네트워크(Carbon), 치매진단과 바이오닉스(Life), 녹색도시 구현(Environment) 등이 그것이다.
 
  이 원장은 “양자컴퓨팅과 나노신경망 모사는 선진국들도 진입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며 20년 후 전개될 포스트 디지털 시대의 컴퓨팅 환경에 대한 이론을 선진국보다 먼저 확보하겠다는 도전”이라며 “이게 성공해야 우리 먹거리가 보장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KIST가 국내 대학과 연구소 간의 융합연구를 주선해 주는 선도적인 역할도 하겠다. 대학과 연구소가 인력을 프로젝트별로 KIST의 능력과 결합한다면 훨씬 다양한 성과가 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자금을 댈 용의도 있다”고 했다.
 
  2000년대 이후 침체기에 빠졌던 KIST는 지난 2~3년간 이병권 원장 체제에서 개혁과 혁신을 통해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고 있다. 그 신호탄이 개방형 연구사업(KIST ORP Program)이다. ORP 사업은 KIST가 연구비를 확보하여 배정하고 외부 전문가를 연구책임자로 선정하여 국내외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로 드림팀을 구성한다.
 
  그 대표적 예가 ‘혈액만으로 치매 진단이 가능한 키트’ 개발이다. 기존의 치매 진단은 인지기능 검사나 뇌 영상 등의 검사를 통해 이루어져 정확도가 떨어지거나 비용이 고가인 단점이 있으나, KIST의 기술은 혈액 검사만으로 치매 증상 발현 전에 저비용으로 진단이 가능한 혁신적 기술이다.
 
  이 연구는 대표적인 ORP 프로그램으로 뇌와 센서 등 상이한 연구 분야의 연구자가 분야의 벽을 넘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력한 성과물이며, 지난해 11월 40여 개의 제약사 및 의료기기 업체를 대상으로 기술이전 설명회를 개최하여 33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KIST의 변화와 혁신 노력은 연구조직의 개편으로 이어졌다. 과거 40여 년간 유지되어 왔던 KIST의 학제별 연구조직을 연구테마 중심의 임무수행형 조직인 전문연구소 체제로 전환한 것이다. 특히 정부출연 연구소로서 실천하기 어려운 전문연구소 소장에게 예산, 인사, 평가 등의 재량권을 대폭 부여하는 등 연구 특성에 맞는 자율과 책임의 경영시스템 구축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올해 4월 21일 과학의 날 행사에서 박 대통령은 ‘홍릉 클러스터’ 개발을 제시했다. 홍릉은 1조5000억원 규모의 R&D가 수행되는 지식 클러스터다. 반경 2km 이내에 박사급 인재 5000명과 대학생 10만명이 있어 런던 테크시티, 싱가포르 바이오폴리스, 홍콩 사이버포트 같은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의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최적지다.
 
  KIST는 2012년 7월 출범한 홍릉포럼을 통해 고려대, 경희대, 서울시립대, 한국외국어대, 한국예술종합학교, KAIST 경영대학, 고등과학원, 한국국방연구원, 국방기술품질원, 국립산림과학원 등 16개 기관과 함께 국가 미래 어젠다를 발굴하고 홍릉 지역 발전을 위한 대안을 모색해 왔다.⊙
 
이병권 원장 《사이언스》지 기고문
 
이병권 KIST 원장.
  올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후유증과 심각한 경제난을 겪는 세계 극빈 국가 중 하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G20 회원국으로 경제규모는 세계 11위에 올라 있다. 국가 발전전략으로 진행된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대한민국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초고속 경제 성장국으로 만들어 냈다. 이제 대한민국은 과학기술이 새로운 혁신의 토대가 되는 창조경제를 촉진 중에 있으며, KIST는 새로운 50년을 맞이하고 있다.
 
  1966년 KIST의 설립이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현대 과학의 시초로 간주되고 있다. 50년 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개발도상국의 발전에 있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가 최초의 종합 과학기술 연구기관인 KIST를 설립했다. KIST는 기술개발과 해당 기술의 민간부문 이전으로 민간 기업계를 일깨웠다.
 
  기업들은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연구개발에 대한 거대한 투자가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KIST를 모태로 16개의 전문 연구기관을 설립했고, 지난 50년간 정부와 산업계의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지원은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전자, 기계·부품, 석유화학산업 등을 포함한 최첨단 기술 중심의 경제구조로 전환시켰다. 2014년에는 상기 산업 분야가 국내 총생산(GDP) 규모의 4.29%를 차지했고, 대한민국의 연구개발 투자비중(GDP 대비 연구개발투자)은 세계 1위를 기록했다.
 
  2013년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세계 경제의 성장 속에 국가의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기업들의 경쟁력 확보가 절실하다고 빠르게 판단했다. 이에 2013년 정부의 발전전략을 창조경제로 재설정한 바 있다. 창조경제는 대한민국의 강한 과학기술 역량을 기반으로 혁신적인 기술개발과 새로운 사업 창출을 통해 미래성장동력을 창출한다는 개념이다.
 
  이러한 정부의 계획에 부응하기 위해 KIST는 산업계, 학계, 정부 연구기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스타트업 기업과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기술과 경영 측면의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KIST의 주요 임무는 기초·원천기술 연구개발이지만, KIST의 연구성과를 실질적으로 상용화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여 출연연구기관으로서 경제 활성화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대한민국과 KIST가 세계 공동체를 위해 지속적인 도움을 주는 일도 중요하다. 1996년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여 세계 인류의 경제·사회적 행복을 위해 의견을 낼 수 있게 되었다. KIST는 미국 등 국제 원조를 통해 설립되었고, 이는 다른 국가들에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현재 KIST는 베트남-한국 과학기술연구원(V-KIST) 설립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이 이뤄낸 업적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향후 50년에는 모든 국가들이 인구증가, 지속가능 에너지, 식량자원, 건강과 질병이슈, 그리고 기후변화 등의 문제에 직면하여, 많은 발전을 일궈낼 것이다. KIST는 대한민국 연구개발의 선도자와 국가 연구개발의 중심으로서의 역할 외에 대한민국이 세계 인류의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기고문은 1970년 《사이언스》지가 KIST 설립을 보도하며 ‘KIST는 개발도상국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데 따른 46년 만의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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