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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한국의 난민들

“받았던 원조, 이제 돌려줄 때”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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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 난민 768명 등 총 1만2208명 난민 국내 거주 中
⊙ 난민 신청자 중 인정받은 이는 6%뿐… 아시아 최초로 통과한 ‘난민법’, 사실상 유명무실
⊙ 대기업의 난민 후원은 全無
  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難民) 아일란 크루디의 사진이 세계를 흔들고 있다. 꼬마의 비극적 죽음 앞에 독일은 가장 먼저 난민을 추가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영국도 속속 난민 수용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도 이 문제를 먼 나라의 일쯤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우리나라에도 난민이 있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면서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우리나라에 난민이 살아?” “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왔데?”였다. 보통 난민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 ‘아프리카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해서인 듯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시리아 난민 768명을 비롯해 1만2208명(지난 7월 31일 기준)의 난민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이 순간에도 이 땅에서 전 세계의 난민들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난민에 대해 너무 무지(無知)했다. 그들의 존재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시간 끌어서 난민 스스로 떠나게 하는 것”
 
  난민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으로 인해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공포를 가진 자다. 박해의 공포로부터 출신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받기를 원치 않거나, 또는 출신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이다.
 
  난민 보호의 역사는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혁명 이후 히틀러 치하에서, 또 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에서 12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유엔의 전신(前身)인 국제연맹이 초 국가적 차원에서 난민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국제연맹의 뒤를 이어 탄생한 국제연합(UN)이 난민의 긴급 구호, 법적 보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난민들에게 국제적인 보호를 제공하고자 지난 1950년 유엔총회 결의로 유엔난민기구(UNHCR)가 탄생했다.
 
  한국전쟁 때 유엔의 원조를 받았던 우리나라는 지난 1992년 12월, 난민 협약에 가입했다. 지난 1994년에 난민협약의 일부가 대한민국 출입국 관리법에 포함됐다. 유엔난민기구의 한국 대표부가 일본 도쿄의 지역사무소 산하 연락 사무소(지난 2001년)로 문을 열었고, 지난 2006년 7월에 대표부로 승격됐다.
 
  난민 관리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서 맡고 있다. 국내에 머무르려는 난민들은 법무부에 ‘난민으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서를 내고, 법무부가 이를 검토해 난민으로 인정하면 끝이다. 난민이 되면 투표권을 제외하고는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사회 보장을 받는다. 기초생활 보장은 물론, 미성년자의 초등·중등교육, 직업 훈련도 받는다. 외국에서 이수한 학력, 경력이 모두 인정된다. ‘신청-검토-인정’이 끝이니 참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국내의 난민 신청자(7735명, 1994년부터 2015년 7월 말) 중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522명(6.7%)뿐이다. 시리아 출신 난민 신청자(768명) 중 인정을 받은 이는 3명이다. 더구나 난민을 신청하고 인정받기까지 정해진 기간이 없다. 과거에는 5년 이상이 걸렸고, 요즘도 1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난민 인정률이 터무니없이 낮다”고 말한다.
 
  김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의 얘기다.
 
  “난민 인정률이 너무 낮습니다. 법무부가 말하는 난민 인정률보다 훨씬 낮습니다.”
 
  ―숫자가 나와 있는데 훨씬 더 낮다는 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난민 신청자 중에서 1차로 인정받는 경우가 있고, 탈락됐다가 법무부에 이의신청을 해서 2차에서 난민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본국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족 결합’이라고 합니다. 법무부의 순수한 1차 인정, 이의제기를 통한 2차 인정, 가족 결합을 다 합친 숫자가 법무부가 밝힌 인정 비율입니다. 실제로 법무부에서 1차로 난민 인정을 해준 사람을 따지면 인정률은 더 낮아집니다. 요즘 심사 기간이 짧아졌다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5년 넘게 걸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심사 과정 역시 난민들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었죠. 한국의 난민 정책은 ‘심사 기간을 길게 끌어서 난민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난민 신청을 포기해서 나가게 하는 제도’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법무부의 시각은 다르다. 법무부는 “난민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본국으로 갈 경우에 생명이나 신체의 자유를 현저히 침해당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체류 허가를 해주는 것을 ‘인도적 체류자’라고 한다. 시리아 내전으로 국내에 온 사람 중 3명은 난민 인정을, 또 621명에게는 인도적 체류 허가를 내줬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신청자를 보호하는 것이다”며 “인도적 체류자를 합할 경우 우리나라의 난민 보호율은 18%대”라고 말했다.
 
 
  법무부의 난민 인정 不許·이의신청 기각
 
지난 9월 13일, 서울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는 국내에 거주 중인 인도적 체류자 시리아인들의 ‘난민 관심 갖기’ 호소 집회가 열렸다.
  광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인 욤비 토나씨의 사연을 《월간조선》(2013년 11월호)에 소개한 적이 있다. 욤비 토나 교수는 “난민 인정을 받기까지 겪었던 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겠고, 대학교수가 된 지금도 차별적인 시선을 느낀다”고 말했다. 욤비 토나 교수의 ‘난민 인정 획득기’는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난민의 현주소다. 콩고비밀정보국에서 일하다 조셉 카빌라 정권의 비리를 밝히려다 비밀 감옥에 수감된 토나씨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해 지난 2002년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미구엘 신부를 만났고, 유엔난민기구 한국사무소와 인연이 닿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 신청을 했다. 욤비 토나 교수는 “서류만 제출하면 곧바로 난민 인정을 받아 일자리도 얻고, 살 집도 구하고, 한국에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법정 다툼까지 6년의 긴 세월이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토나씨의 법무부와의 1차 인터뷰는 넉 달 뒤 이뤄졌다. 조사관이 한국어로 미구엘 신부가 불어로 통역하고, 토나씨가 불어로 답하면 미구엘 신부가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는 식(式)이었다. 국적과 이름, 생년월일 등 기초적인 정보에서 탈출 이유와 경로까지 질문이 쏟아졌다. 토나씨는 이 인터뷰에서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탈출을 도왔던 콩고정보국 지인들의 신변이 걱정되어, 탈출 경로를 거짓 진술한 것이다. 출입국관리소와의 두 번째 인터뷰에서 토나 교수의 거짓말이 들통났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밝히고, 세 번째 인터뷰(지난 2003년 4월)에서 콩고에서의 체포와 구금사실을 상세히 설명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와의 인터뷰는 이후에도 네댓 번 이어졌다. 욤비 토나 교수는 “조사관들이 매번 인터뷰 때마다 똑같은 것을 묻고 또 물었다. 당시에 경기도 모처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는데 인터뷰를 하러 출입국관리소까지 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신청 후 2년 만에 그는 ‘난민 인정 불허’를 통보받았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신변이 위험할 것이 분명한 난민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억울했습니다. 신청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무작정 기다린 2년이 뭔가 싶었습니다. 난민 인정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난민의 처지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열악합니다. 본국에서 박해받는 얘기 등은 모국어로 할 때 가장 생생하게 전달되는데 그 나라의 말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난민 입장에서 불리합니다.”
 
  ―그동안 생계는요.
 
  “이태원에서 만난 아프리카 사람들을 통해서 여기저기 공장을 소개받아 근근이 먹고살았습니다. 한국이 난민협약에 가입된 나라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실제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콩고의 정글 오두막집에서 숨죽여 살고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난민을 돕는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와 끈이 닿았고, 법무부의 불허 통지에 이의신청을 냈다. 당시 사법연수원생이었던 김종철 변호사를 대동해 네 시간에 걸친 재인터뷰를 받았다. 결과는 이의신청 기각이었다. 결국 욤비 토나 교수는 법무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천운이었는지 그의 콩고에서의 박해 상황이 보도된 현지 신문까지 입수돼 그는 소송에서 이겼다. 대한민국에 거주할 수 있는 난민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신청에서 인정까지 무려 6년이 걸렸다.
 
 
  “이태원, 안산 원곡동 등에서 생활”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주최로 열린 ‘난민콘서트’ 모습.
  욤비 토나 교수를 도왔던 사법연수원생 김종철 변호사는 현재 공익법센터 ‘어필’을 이끌고 있다. ‘어필’은 국내에 거주 중인 난민들의 대리인 자격으로 여러 차례 법무부와 송사를 벌여왔다. ‘어필’은 지난 2011년 9월, 케냐의 특수부족 출신인 M씨의 대리인 소송에서 법무부를 상대로 승소했다. M씨의 사연은 이렇다. 그는 ‘아내 상속’이라는 악습을 가진 부족 출신인데, 그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 뒤에 시형제들이 자신 혹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질 것을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는 그와 아들에게 위해를 가해 지난 2006년 한국에 입국해 난민을 신청했다.
 
  법무부는 M씨가 난민 신청을 한 이후 인터뷰를 하려 했으나 그와 전화연락이 닿지 않았고, 출석요구서를 발송했으나 송달할 수 없었던 점 등을 이유로 들어 3년 만인 지난 2009년 5월 난민 신청을 거부했다. ‘어필’은 ‘M씨가 신청서에 휴대전화번호와 거주지를 명확하게 적은 점, 체류기간 연장을 위해 주기적으로 출입국관리소를 방문했기 때문에 법무부가 관리자의 업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내세웠고, 결과적으로 법원은 ‘어필’의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 법무부가 말하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법무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김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 역시 이는 동의한다. 김 국장은 “난민들이 들어올 때 이태원 모텔 같은 곳 주소를 적었다 뒤에 다른 곳으로 이사한다. 주소지, 전화번호가 바뀌니까 법무부 입장에서 인터뷰를 하려고 해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해는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에 들어온 난민 중에는 열악한 상황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김성인 사무국장은 “기본적인 생존 수단을 제공받지 못하는 난민이 많다. 한마디로 ‘알아서 살라’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자든, 이슬람사원에서 자든 알아서 할 수밖에 없다”며 “이태원, 안산 원곡동, 동두천 보산동 등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난민들이 많다”고 말했다.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데 고용주들이 꺼린다”
 
  난민이 우리나라에 머물기 위해서는 난민 인정을 받거나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 난민 인정자는 대한민국 국민과 처우가 거의 같고, ‘인도적 체류자’는 본국으로 송환만 안 될 뿐 권리는 비교적 제한적이다. 인도적 체류자(2015년 4월 30일 기준 797명)에게는 ‘G-1’ 비자가 주어지는데 취업이 가능한 비자다. 하지만 대다수의 고용주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김성인 사무국장의 얘기다.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아는 고용주들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에 난민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이들 비자에 대해 누가 신경이나 씁니까. 게다가 인도적 체류자들이 먼저 직장을 구하고, 그 회사의 사업자등록증, 근로계약서를 갖고 가야 법무부에서 취업 허가를 내줍니다. 난민 입장에서는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일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 노동시장에 접근하기가 복잡하고 불편합니다.”
 
  우리나라에 온 난민이나 인도적 체류자는 자국에서의 학력이나 경력을 인정받기 쉽지 않다. 난민 인정자의 경우 그 법적 근거는 마련되어 있으나 증서 미비, 절차 부족 등으로 실무적으로 이를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국에서 변호사였든, 교수였든, 목사였든, 여기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 때문에 난민들 대다수는 폐차장, 자동차 정비업체, 막노동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코트디부아르 내전으로 지난 2002년 난민을 신청한 실라 마마두 숨씨는 인도적 체류 자격을 얻어 현재 수산시장 노동자로 지내고 있다. 정보국의 스파이였던 욤비 코나 교수는 한국에 온 뒤 난생처음으로 인쇄공장 등에서 ‘몸’쓰는 일을 해야 했다.
 
  우리나라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 난민의 대부분도 자동차 관련업에 종사한다. 시리아에서 중고차 판매사업을 했던 아자르 이흐마드(30세)씨는 당시에 현대차를 많이 보고 한국을 친숙하게 느껴 이곳으로 도피했다. 그 역시 인도적 체류자 신분이다.
 
  “처음에는 인근의 레바논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시리아의 난민이 늘어나면서 생활이 여의치 않았고, 평소 현대차가 친숙해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에서 즉시 인도적 체류 신분을 허가받고, ‘G-1’ 비자를 받았습니다.”
 
  ―인도적 체류자로 살기가 어떻습니까.
 
  “난민 인정자보다는 불안한 처지입니다. ‘G-1’ 비자는 1년마다 갱신해야 하고, 고용주들이 우리가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써주려 하지 않습니다. 시리아에 가족들이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난민 신청을 할 계획입니다.”
 
 
  “시리아에 두고 온 가족들 데려오게 해달라”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홍보대사인 배우 정우성씨.
  사실 ‘시리아 난민이 700명이 넘는다’는 얘기를 듣고 궁금했던 것이 있다. 시리아인들이 배를 타고 유럽 인근 국가로 피신하는 뉴스만을 봐서인지, 대체 저들이 어떻게 비행기를 타고 이 먼 나라까지 왔는지 싶었다.
 
  ‘피난처’의 이호택 대표는 “이번에 시리아 내전으로 피란 온 사람들이 아니라, 애초 한국과 자동차 무역 등을 했던 사람들인데 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 경우가 90%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들을 ‘체제 중 난민’이라고 부른다. 일을 할 목적이나 유학 등의 이유로 국내에 머물다가 자국의 상황이 좋지 못해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가족 초청’의 문제가 현실적 문제다.
 
  지난 9월 13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는 ‘세이브 시리아’라는 캠페인이 열렸다. 기독교 NGO 단체인 ‘피난처’와 한국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인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시리아인들에게 더 많은 피란처가 필요해요’ ‘시리아에 관심을 가져주세요’라는 피켓을 든 시리아인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한 시리아인은 가족사진을 옆에 두고 “인도적 체류자는 가족을 초청할 수 없다고 한다. 부디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는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호택 ‘피난처’ 대표의 얘기다.
 
  “영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난민 인정자 외에 인도적 체류자들에 대해서도 가족을 초청할 수 있는 ‘가족 결합’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리아 난민은 국제사회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경우입니다. 일본은 인도적 체류자의 ‘가족 결합’을 인정하지 않지만, 시리아 난민에 대해서만큼은 예외로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는 특수 상황으로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시리아 난민에 한해서는 그 가족들을 데려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난민은 우리의 또 다른 자산”
 
  우리나라에 난민이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 중에서 최초로 ‘난민법’이 통과된 나라다. ‘난민법’은 황우여(黃祐呂) 새누리당 의원이 처음 대표 발의했고, 지난 2013년 7월부터 전면 시행됐다. 난민 신청자의 절차적 권리보장과 난민 신청자·인정자에 대한 처우 개선 등이 주요 골자다. 대한민국에 난민이 사는 것을 아는 이도 없는데,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 통과라니 의아하다. 서창록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북한 인권법이 통과되지 않았는데 난민 인권법이 통과된 것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어서다.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라며 “하지만 법 개정보다 그 법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되느냐가 중요한데 법무부도 난민에 대해 배타적이고, 국민 정서도 그러하다”고 말했다.
 
  ‘난민법’ 통과로 ‘공항·항만에서 바로 난민 신청’이 가능하고 6개월간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김성인 난민인권센터 사무국장은 “난민법의 효력이 미미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얘기다.
 
  “2014년에 3억4000만원의 예산이 배분됐습니다. 당시 난민 신청자가 2896명이었습니다. 그 예산은 고작 150명한테 6개월 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최저 생계비에 못 미치는 41만9000원씩 말이지요. 올해 배정된 예산은 5억원 정도입니다.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모를까, 이왕 난민법까지 통과시켰으면 적어도 그들이 살 수 있게는 해줘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기자는 ‘난민법’이 통과돼 예산이 집행된다는 얘기를 듣고, ‘국민들이 이에 공감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년 취업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지금, 그들에게 배분될 일자리 양산과 한푼이라도 예산을 절감하려는 것이 추세 아닌가. 이호택 ‘피난처’ 대표는 이 질문에 단호했다.
 
  “난민들에게 물어보세요. 여기에 ‘돈 벌려고 왔느냐’고요. 다들 자기 나라 사정만 좋아지면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세계에 6000만명의 난민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사람은 고작 1만명이 좀 넘어요. 6000분의 1입니다. 우리나라 경제 지표가 세계 10위인데, 우리나라의 명성, 국력을 고려한다면 미미한 수치입니다.”
 
  ―난민들에게까지 예산을 줘야 하느냐는 질문이 들어온다면요.
 
  “네덜란드는 우리나라보다 국토도 작고, 인구도 적습니다. 우리는 20년 동안 1만명의 난민이 들어왔는데, 거기는 1년에 1만명씩 들어와요. 그들에게 ‘난민들이 들어오니 피곤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더군요. ‘난민들이 들어오면 좋지요’라면서요. 교사, 의사 한 명을 양성하려면 많은 투자비가 들어가는데 이미 본국에서 다 교육받은 사람들이 오면 우리의 자산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인식 전환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난민을 도와줘야 한다, 걔들은 불쌍하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우리도 부담입니다. 난민은 부담이 아닙니다. 우리랑 똑같은 신체를 갖고 있고, 다 배운 사람들입니다. 아랍어 통역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고, 시리아에 대한 지리정보, 아랍의 문화유산, 음식 문화 등을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수 있지만, 잠깐의 전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우리에게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난민배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順
 
더크 헤베커 UNHCR 한국대표부 대표.
  실제로 인터뷰를 한 난민들은 한국인의 ‘외국인 차별’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방글라데시 줌머족 출신인 차크마 니니 로넬씨는 지난 2004년 난민으로 인정받았고, 2011년 귀화했다. 그는 자국에서 인권활동을 하던 중에 위협을 느껴 피신한 경우다. 로넬씨의 얘기다.
 
  “한국으로 귀화했지만 여전히 외국인을 차별하는 시선을 많이 받습니다. 버스에 타면 기사들이 ‘너 어디서 왔어? 돈 얼마 벌어?’라고 자주 물어봅니다. 저한테 그렇게 반말을 하다가도 초등학생이 버스에 타면 ‘어서 오세요’라며 반깁니다. 그때 참 기분이 그래요. 저는 몽골 계통이라 한국 사람들과 피부색이 비슷한데도 이 정도인데 피부색이 검은 난민들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한국인들의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몸으로 느낍니다.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난 2013년 난민으로서는 최초로 교수가 된 욤비 토나 교수는 학교 옆의 34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 난민으로 이태원 거리를 헤맬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의 얘기다.
 
  “‘난민=가난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있어 보입니다. 여전히 제 아파트 문 앞에 ‘중고 괜찮아’라고 써서 물건을 놓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콜라 사먹으라’며 1000원짜리를 두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피부만 쳐다봅니다. 난민의 처우에 관한 인권운동을 하면서 여태 미국, 유럽, 태국 등 수많은 나라를 다녔습니다. 한국처럼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라 국민이 없습니다. ‘야 새까맣다, 새까매’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어요. 아프리카가 54개 나라로 이뤄져 있습니다. 콩고에서는 한국이 촌 나라일 수 있습니다. ‘난민=아프리카=가난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은 불과 60년 전 전쟁국이었고 수많은 망명자가 나온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난민 문제에 대해 무관심합니까?”
 
  실제로 전 세계를 기준으로 봤을 때, 최대 난민발생국은 아프리카 지역이 아니다. 아시아가 2007만4000명으로 가장 많고, 아프리카(1354만7000명), 유럽·중남미(599만6000명) 순(順)이다.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신혜인 공보관은 “많은 사람이 아프리카를 난민 주요 발생 지역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중앙아시아에 속한 아프가니스탄이 매우 오래된 주요 난민배출국이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의 난민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이자 휴먼아시아 대표 서창록 교수는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해 언급했다. 서 교수의 얘기다.
 
  “난민 문제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시리아 때문에 반짝 관심이 생겼지만 사실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난민은 외국인이니까 우리가 아니다’고 경계를 긋는 일이 계속돼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 아이덴티티를 벗어나 글로벌 시민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법무부의 난민인정률이 낮다는 얘기들을 하던데요.
 
  “일정 부분 이해가 갑니다. 난민도 나쁜 난민, 좋은 난민이 있습니다. 불순분자가 섞여 있으니 법무부에서 가려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난민 수용률에 비춰보자면 지나치게 배타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법무부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도 저조한 인정률에 한몫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의 인식이 변해야 할 텐데요.
 
  “독일이 난민을 받아주겠다고 하니까 메르켈 총리의 인기가 높아졌습니다. 독일을 전쟁을 일으켰던 국가가 아니라 세계의 리더 국가로 인식하는 데 한몫을 한 겁니다. 난민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에 정착한 난민 중에서 학계와 과학계에 엄청나게 기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발상을 전환해서 난민이라는 자원을 활용하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최동주 숙명여대 글로벌 서비스학부 교수는 “우리가 앞장서서 난민을 받아들이자”고 말했다. 최 교수의 얘기다.
 
  “시리아는 6·25전쟁 때 한국에 전략 물자를 공급해 준 국가입니다. 중동 국가 중에서 유일했습니다. 더구나 시리아의 현 정치 상황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고 봅니다. 외교의 전략적 차원에서도 시리아 난민을 앞장서서 받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속의 대한민국의 위상에 맞게 이제 난민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 단계가 됐습니다.”⊙
 
더크 헤베커 UNHCR 한국대표부 대표
 
“단 한 번의 후원도 난민들에게 큰 힘”

 
  지난 2001년 도쿄 연락사무소로 출범한 유엔난민기구 한국사무소는 지난 2006년 한국대표부로 승격돼 활동 중이다. 현재 30여 명의 국내 및 국제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더크 헤베커 대표는 터키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된 세 살 난 난민 어린이 얘기로 말을 시작했다.
 
  “사진이 공개된 후인 지난 9월 4~5일에 무려 1000명의 사람이 UNHCR에 후원을 약속했습니다. 평소보다 5배 많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희망을 봤습니다. 사실 많은 한국인이 난민 이야기를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하고, 또 지리적으로 이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후원을 약속한 분들을 보면서 한국인들이 기회와 계기가 주어진다면 언제든 난민을 도울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후원금은 어떻게 씁니까.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곳곳에 난민 1500만명 정도와 국내 실향민 등을 합한 6000만명의 보호대상자가 있습니다. 후원금은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는 유엔난민기구의 다양한 난민보호 사업을 위해 쓰입니다. 추위를 견딜 수 있는 담요, 매트, 비누 등 긴급구호물자와 난민들의 임시 거주처의 식수, 식량 공급에 쓰입니다. 의료, 교육 지원에도 쓰입니다.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는 유엔난민기구에 2600만 달러(지난 2014년 말)의 후원금을 전달했습니다. 정부와 개인이 주요 후원자들입니다. 아쉽게도 국내 대기업의 후원은 전무(全無)한 상태입니다. 지난 6월에는 배우 정우성씨가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의 친선대사로 임명돼 국내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습니다.”
 
  ―국내에 난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이 많은데요.
 
  “박해와 목숨의 위협을 피해 집과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인류애적 행동입니다. 난민은 부(富)를 꾀하거나 더 나은 생활환경을 찾아 자국(自國)을 떠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독자들께서 한국인 역시 수십 년 전에 전쟁의 피해자였던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한국인이 집을 잃고 실향했고, 유엔과 국제사회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많은 후원자께서 이제 한국이 당시에 받은 도움을 국제사회에 돌려줄 때라고 말씀하셔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기 후원자들은 저희에게 가장 소중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일시적 후원 역시 난민들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후원정보: www.unhcr.or.kr 02)773-7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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