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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덕수와 같은 여정 걸어온 다섯 용사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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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전 참전하고, 파독 광부로 일하고 온 현실 속 ‘진짜 덕수’ 다섯 명의 인생 이야기
⊙ “우리가 벌어온 달러와 마르크가 조국 발전의 초석이 됐다면 그걸로 만족”
⊙ 공중도덕, 선진적인 가치관 체험하게 해준 독일 사람들, “독일이어서 다행이었다”
월남전과 파독 광부 시절을 함께 보낸 5명의 역전의 용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서재용씨, 김광우씨, 김길웅씨, 박병채씨, 김용문씨. 뒤쪽으로 서재용씨가 독일에서 귀국한 후부터 운영해 온 방앗간이 보인다.
  어쩌면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저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버지 세대와 화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젊은층이 많이 활동하는 인터넷 게시판마다 넘치게 올라오는 영화 〈국제시장〉 감상평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감상평에는 유독 ‘감동’ ‘눈물’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88만원 세대’니 ‘세대 간 착취’니 그것이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고 있든, 살벌하게 관계를 규정하는 단어들이 난무한 현실에서, 한번쯤 힘을 빼고 아버지의 과거를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물론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잠깐의 화해도 비정규직 일자리처럼 없던 일이 되겠지만.
 
 
  세대 간 화해 분위기 이끈 〈국제시장〉
 
〈국제시장〉 포스터.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독일에서는 광부로, 베트남전에서는 기술자로 활약한다. 제작사 관계자는 “윤재균 감독이 영화를 위해 취재를 많이 했다”고 했다. 영화와 현실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를까. 현실 속 덕수의 삶이 궁금했다. 한국파독협회(회장 하대경)의 도움을 얻어 월남전 참전과 파독 광부 근무를 모두 경험한 분들을 수소문했다. 연락 끝에 다섯 명의 ‘역전의 용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김광우(金光宇), 김길웅, 김용문(金龍文), 박병채(朴炳菜), 서재용(徐在用)씨. 이들은 고향과 나이, 사는 곳이 모두 다르지만, 이력에서 큰 공통점을 두 가지나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오랫동안 만나 온 친구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독일에서 귀국한 후 모일 기회 없이 살다, 3년 전부터 자주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이들은 자주 만난다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종종 모여도 옛날 얘기 꺼내는 건 오랜만이네요.”
 
  모임을 위해 전라남도 여수에서 올라온 박병채씨가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박씨는 1967년부터 이듬해까지 베트남에 있었다. 귀국하고 2년 후인 1970년에 독일로 떠나 1974년까지 머물렀다.
 
  옆에 있던 김용문씨가 맞장구쳤다.
 
  “옛날에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고 싶어도 말만 꺼내면 보수니, 수구꼴통이니 이런 얘기들을 하니까 쉽사리 말을 할 수 없었어요. 영화 〈국제시장〉이 계기가 돼 이런 얘기들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1946년생인 김용문씨는 부산 출신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국제시장 인근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월남에는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있었다. 청룡부대 소속으로 전투병으로서는 1진으로 베트남에 들어갔다.
 
  “영화에 독일 함보른이 나와서 반가웠지.”
 
  덕수처럼 함보른에 있는 탄광에서 일했다는 김길웅씨가 말했다. 김길웅씨는 영화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좋은 영화인데, 이념이니 과거 미화니 하는 얘기가 나와서 섭섭했어요. 그냥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린 것뿐인데….”
 
  1945년생인 김씨는 1964년부터 1966년까지 베트남에 있었다. 독일에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체류했다.
 
  예전 생각을 하듯 생각에 잠겨 있던 서재용씨가 말을 꺼냈다.
 
  “예전에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거나 파독 광부였다는 얘기를 어디 가서 못했어요. 월남에 있었다고 하면 혹시 고엽제로 몸이 상하지 않았을까 주변에서 의심을 했거든요. 파독 광부였다고 하면 ‘어디 외국까지 가서 그렇게 천한 일을 하고 왔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시사회 때 보고 그 후에 자식들과 함께 영화를 또 한 번 봤어요. 제가 가족들한텐 옛날 얘기를 하도 해서 그런지 손자들도 영화 내용을 잘 이해했지요. 손자 녀석이 유치원 다닐 때였나, 유치원 선생님이 며느리한테 그러더래요. ‘어머님, 아이가 파독 광부라는 말을 알고 있네요.’”
 
  1946년생인 서씨는 독일에서 돌아온 후 덕수처럼 재래시장의 점포를 인수했다. 고춧가루를 빻고 기름을 짜는 가게였다. 서울 양천구의 신정제일시장에 있는 ‘경북상회’는 지금은 서씨의 아들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김광우씨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이들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전라남도 화순 출신인 그는 이들과는 조금 다른 경우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맹호부대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후, 1974년 독일에 간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에 머무르다 돌아왔다. 독일에서 태권도 도장을 하며 박사학위까지 딴 후 강의를 하다 한국에 들어왔다.
 
 
  현실 속 덕수, 200~300명 추산
 
서재용씨가 월남으로 위문 공연을 온 가수 송춘희와 찍은 사진.
  이들처럼 1960~70년대에 군인과 광부로 두 번이나 외국생활을 해본 이들은 얼마나 될까. 기자의 질문에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씨는 ‘파독협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조사를 해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파독 광부가 7900여 명 정도 됩니다. 이 중 귀국한 사람들이 약 4000명이에요. 전수조사해 보진 않았지만 주변의 경우를 토대로 보면 파독 광부 중 월남전 참전까지 하신 분이 200~300분가량 계시지 않을까 싶어요.”
 
  서씨가 옆에서 덧붙였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독일을 갔다가 베트남에 가는 걸로 나오는데 현실에서는 그 순서가 바뀐 경우가 대부분일 거예요. 월남전에 참전했던 사람이 파독 광부로 가는 거죠. 파독 광부에 지원하려면 반드시 군복무를 마쳐야만 했거든요.”
 
  월남전 얘기가 나오자 김용문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베트남전에서 우리 군인이 5500명 정도 전사했지요. 초반에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어요. 그래서 한때는 베트남 가면 죽는 걸로 생각하기도 했어요. 저도 초반에 간 경우지요. 제 옆에서 전우가 죽었어요. 6·25전쟁 때 부모님을 잃고 여동생이랑 둘이서 살다가 파병 온 친구였는데, 배가 터져나가서 창자가 나오는 걸 다 봤네요. 압박붕대로 감아 데리고 왔지만 살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 친구 꿈을 꿔요.”
 
  김광우씨는 좀 다르다. 그에게 월남전은 ‘기회’였다. 그의 설명이다.
 
  “저는 베트남에 지원을 해서 갔어요. 수송 분과였는데, 이쪽은 베트남 파병 인원이 많이 배정되는 과가 아니었어요. 인사계 쪽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특별히 부탁까지 하면서 갔지요.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미군과 함께 있으니까, 어찌하다가 미국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당시엔 군수물자를 운송하던 한진상사 같은 기업에 취직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참전한 걸 후회하지 않아요. 월남이 프랑스의 식민지였잖아요. 프랑스 문화를 간접 경험하며 보고 배운 것도 꽤 됩니다.”
 
 
  월남에서 프랑스 문화 체험하기도
 
  김길웅씨는 ‘월남전 당시 월급이 28달러였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김씨의 말이다.
 
  “일반 병사에게 돌아온 월급이 28달러 정도였는데, 미국이 지급한 돈 중 일부였잖아요. 나머지 돈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할 때가 있어요. 나라를 위해 잘 쓰였으리라 생각하지요.”
 
  월남전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다. 박병채씨는 박정희 대통령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월남에 가장 먼저 도착한 우리 군인은 전투병력이 아니었습니다. 의무중대와 태권도 교관단이었어요. 그런 후에 공병대나 수송 부대 같은 비전투 전력이 들어갔지요. 전투 병력은 그보다 후에 들어갔지요. 뒤돌아 생각해 보면 순차적으로 병력을 보낸 게 참 잘한 조치였지요.”
 
  영화 얘기를 할 때는 기자가 채 받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다투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었는데, 월남전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서씨가 말을 꺼냈다.
 
  “사람을 죽인다는 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무리 훈련을 많이 받고 간 군인이라도 바로 사람을 못 죽입니다. 옆에서 동료가 총에 맞고 쓰러지는 걸 보면 그땐 정신이 나가버리는 거죠. 전쟁이 그런 겁니다.”
 
 
  신체검사 통과하려 속옷에 납덩이 넣기도
 
  ‘베르크만(Bergmann)’. 독일어로 광부라는 뜻이다. 베르크는 산(山), 만은 사람을 뜻한다. 사지에서 돌아온 이들이 산사람이 되겠다 자처한 이유는 뭘까.
 
  다시 외국에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김광우씨에게 파독은 꼭 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당시 저는 신민당 수석부총재를 지내신 김의택 의원의 경호관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집안 어른이셨거든요. 그런데 월급을 안 주는 거예요. 당시에 파독 광부를 선발하던 곳이 해외개발공사였어요. 김 의원님께 얘기를 했어요. ‘해외개발공사에 전화 한 통화만 해주십시오.’ 이유가 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광부가 되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가려면 태권도 교관으로 가든지 해야지 왜 광부냐고 하시더군요.
 
  제가 우겨서 전화는 해주셨어요. 덕분에 붙을 수 있었지요. 파독 광부로 일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어요. 제가 독일에 가기 전에 한국에서 요정을 경영했는데, 직원에게 사기를 당해서 빚이 2천만원가량 있었어요. 이 돈을 1년 만에 다 갚았으니까요.”
 
  9남매 중의 막내인 서씨는 덕수처럼 부인과 아이를 두고 독일로 갔다.
 
  “결혼하고 3개월 후의 어느 아침이었어요. 《조선일보》를 보는데 파독 광부를 뽑는다는 공고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응시를 했지요. 영화처럼 쌀가마를 들고 시험을 봤어요. 60미터였던가 걸어야 했지요.
 
  그때는 많이들 굶고 헐벗던 때였잖아요. 체중이 58kg이 넘어야 통과가 됐는데, 체중 미달도 꽤 됐지요. 팬티 속에 저울 추나 납덩이를 넣고 시험을 보기도 했다니까요. 광산에서 일해 봤다는 증명서도 필요했어요. 어떡합니까, 돈을 주고 발급받았지요.
 
  신원조회도 까다로웠어요. 진술서를 6장 써놓고 돌아오면 6개월간 신원조회 기간이에요. 친지 중에 북한과 연관된 사람이 있으면 못 가는 거죠. 그뿐이 아니었어요. 보증인을 세우라는데, 보증인 자격이 재산세를 1만8000원 이상 내는 사람이에요. 돈을 벌기 위해 말 한마디 안 통하는 나라에 일하러 가는 형편인데,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할 수 없이 술도가 주인, 이런 분들한테 부탁을 해서 받았지요.
 
  독일에서 월급을 받으면 생활비 정도만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재형저축에 넣었어요. 저는 3년 체류 비자가 끝나고 1년 더 연장했는데, 2년간 번 걸로 형님께 땅을 사드리고 나중에 2년간 번 돈으로는 서울에 집을 사고 자리를 잡았어요.”
 
 
  힘든 노동에 중도 귀국자도 발생
 
김용문씨는 1973년 독일로 건너가기 직전에 독일어 강의를 3개월간 들었다. 그때 썼던 교재.
  돈을 주고 경력증명서를 샀다는 얘기가 나오자 김광우씨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저도 인동탄광에 돈을 주고 탄광 경력증명서를 발급받았어요. 술도 한 잔 사면서 5000원인가 준 것 같네요.”
 
  〈국제시장〉을 보면 독일에 간 직후 어느 저녁 침대에 앉아 울고 있는 덕수의 모습이 나온다. 각오했던 것보다 더 힘들어서였으리라. 실제는 어땠을까. 김용문씨의 말이다.
 
  “갔는데 일이 너무너무 힘든 거예요. 돌아오고 싶은데 비행깃삯이 없어서 돌아올 수가 없었어요. 한국에서 귀하게 자라다 온 사람들은 실제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어요.
 
  영화에서 과장한 면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들게 산 사람들도 많았지요. 탄광에서 사고가 안 났다뿐이지 땀은 더 많이 흘렸어요. 일 마치고 샤워할 때 보면 시커먼 국수 가락 같은 게 끊임없이 나와요. 탄광에서 일하다 묻은 검댕은 그냥 지워지지도 않아요. 크림을 바른 다음 지워야 해요.
 
  해머드릴(hammer drill)을 이용해서 작업을 하곤 했어요. 나중에 파독 광부 기념관에 가서 해머드릴을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야, 저렇게 큰 걸 어떻게 들고 작업을 했을까.’
 
  딸 부부와 영화를 같이 봤는데 영화 끝나고 사위가 그러더라고요. ‘아버님이 저렇게 고생하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저것보다 더 고생했다.’ 그랬더니 ‘아버님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김용문씨는 훈장이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 중간쯤에 흡사 문신 같은 검푸른 점이 있었다. 상처가 난 손으로 탄광에서 일을 해서 피부에 석탄이 들어가 생긴 거란다. 파독 광부로 일한 사람이라면 손이나 가슴, 등에 대개는 갖고 있는 표식이다.
 
 
  탄광까지 들어온 《로동신문》
 
독일로 가기 전 탄광에서 실습을 하고 받은 증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등장했다. 바로 탄광에 등장한 《로동신문》이다. 서씨의 설명이다.
 
  “탄광에서 일을 하다 어느새 보면 《로동신문》이 이렇게 쌓여 있어요. 한국인 광부들 읽으라고 가져다 놓은 거예요. 일단 한글이니까 반갑기는 하죠. 들춰보는데 내용이 너무 유치해서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가 없어요. 캐나다나 동독에서 인쇄한 북한의 유인물이 서독 쪽으로 들어오곤 했지요. 그때만 해도 독일에 사는 교포 중에 북한 쪽으로 좀 기울어져 있는 분들이 있었어요.”
 
  영화에는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댄스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그런 일이 있었을까. 김길웅씨는 ‘그건 재미를 위해 넣은 얘기’라고 했다. 김씨의 말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지요. 광부들은 한국에 가족이 있는 유부남이 많았고, 간호사들은 처녀였어요. 간혹 그런 경우는 있었어요. 한국의 부인과 이혼하고 간호사와 결혼한 사람이 있었지요.”
 
  김용문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오히려 독일 여성들과 어울릴 기회는 있었어요. 우리로 치면 콜라텍 같은 댄스장에 가면 독일인 과부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여기에는 반바지를 입거나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못 들어가요. 품격을 갖춰야 들어갈 수 있었어요. 여성분에게 춤을 권해서 함께 춤을 추는데, 춤을 못 춘다고 하면 여성들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줬어요.”
 
  독일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들 눈을 빛내며 서로 얘기하려 했다. 반짝거렸던 이십대 시절, 독일에서 보낸 3~4년의 시간은 이들 생애에 퍽 큰 흔적을 남긴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잊지 않은 독일어 단어를 중간중간 구사했고, 다른 나라가 아닌 독일에서 살았던 걸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김용문씨의 말이다.
 
 
  공중도덕 가르쳐준 독일 사람들
 
파독 광부로 독일에 들어간 김광우씨는 태권도 슐레(학교)를 차려 제자들을 길러냈다.
  “독일 가자마자 교육을 받았어요. 공공장소에서의 예절 같은 거예요. 예를 들면, 건물이나 방의 입구를 들어갈 때 뒷사람이 있으면 문을 잡고 기다려줘라, 지하철에서는 다리를 벌리고 앉지 마라, 신문을 볼 때는 옆사람에게 피해 가지 않게 접어서 봐라, 이런 거예요.
 
  독일어로 ‘구텐탁’이 ‘안녕하세요’잖아요. 독일에서는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눈이 마주치면 구텐탁 하고 말을 건넵니다. 당케(고맙습니다)라는 말도 습관적으로 하지요. 지금도 저는 그때 영향을 받은 탓에 습관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써요. 지금 생각해 보면 독일이 한국보다 거의 30년은 앞서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이미 주5일제를 시행하고 있었으니까요.”
 
  김광우씨도 맞장구를 쳤다.
 
  “둘째 아들이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어렸을 때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한국에 오고 나서도 동네를 지나면서 지나는 길에 있는 노점이란 노점에는 다 인사를 하고 다닌 거예요. 하루종일 인사를 하고 다녀 ‘뉘 집 아들이냐’고 동네 사람들이 궁금해 했을 정도였어요. 제가 ‘하루에 1번만 인사해도 된다’고 타일렀지요.
 
  독일에 가서 가장 인상깊었던 건, 외국인이라고 차별하지 않고 일한 만큼 대우해 줬다는 거예요. 독일인 반장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일은 저희보다 힘든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월급을 덜 받더라고요.”
 
  서씨도 공중예절 이야기를 했다.
 
  “독일에 있을 때는, 담배를 물고 길을 걸을 수가 없었어요. 물이나 전기, 물자를 아껴 쓰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여러 명이 모여야 불을 켤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이야 우리나라도 종량제 봉투를 쓰지만 그때는 어디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독일은 이미 쓰레기 배출에 엄격했어요. 한국에서 하듯이 쓰레기를 그냥 내버렸다가 안에 든 내용물을 보고 추적이 들어와서 걸려버렸지 뭐예요. 벌금도 냈어요.
 
  개인주의 문화도 독일에서 처음 접했어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당에 가도 각각 자신이 먹은 만큼 지불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독일 사람들 무뚝뚝해 보여도 상당히 친절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길을 물어보면 제가 제대로 알아들을 때까지 알려줘요. 잘 가고 있나 확인하다가 잘못 가면 다시 알려주기도 하고… 우리나라는 어디 그러나요?
 
  독일에서 4년간 지내면서 경기 변화에 따른 대응, 이런 것에 대한 식견도 넓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IMF 구제금융 시기가 왔을 때, 좀 더 일찍 대처를 할 수 있었어요. 사업을 확장하지 않고 다독거리면서 뒤를 돌아보는 식으로요.”
 
  이들은 입을 모아 ‘우리가 갔던 곳이 독일이어서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박병채씨는 ‘독일의 아우토반을 보고 경부고속도로를 깐 박정희 대통령은 참 대단한 사람’이라며 ‘우리가 벌어온 마르크화와 달러화가 조국 발전의 초석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그거면 됐다’고 했다.
 
 
  나라 위해 희생한 사람들 존중해 줬으면
 
  다섯 용사는 ‘꽃분이네’를 잘 꾸려 간 덕수처럼, 독일에 다녀온 뒤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는 데 성공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라고 한다. 월남전 참전 용사 중에는 고엽제 후유증이나 부상 때문에 힘들게 산 분들이 있고, 파독 광부 중에서는 힘들게 번 돈을 한국의 가족이 제대로 관리를 못해서 날린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고 한다.
 
  김용문씨는 영화 흥행을 계기로 나라에 기여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이다.
 
  “제가 작년에 미국을 다녀왔어요. 어느 집 주변에 작은 성조기가 가득 꽂혀 있는 거예요. 왜 그런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집에 사는 분 중의 한 분이 이라크전에 참전한 거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존경의 의미로 성조기를 가져다 놓은 거였어요.
 
  어떤 대우를 받길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시대를 만나, 나라를 위해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바친 사람들의 경험을 존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국제시장〉을 보며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 뭐였는지 묻자,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덕수의 대사 중 한 대목을 꼽았다. 베트남으로 독일로, 젊은 청춘을 보내야 했던 시대가 다 지난 후 태어난 기자에게도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대사였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던 건 아마 기자뿐만은 아니리라. 바로 이 대사다.
 
  “내는 그리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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