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5일 오후 3시경 전국적으로 벌어진 정전(停電)사태로 9000여건의 피해가 발생했다. 지식경제부가 이달 초 정전사태 피해 접수를 마감한 결과 전체 신고건수는 8962건, 신고금액은 610억원으로 잠정집계됐다. 공장에 전력공급이 중단되거나 전자제품 고장 및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피해를 입은 경우 등 사례는 다양했다. 9월 정전사태는 금전적 피해가 엄청난 것은 아니었지만, 한전이나 언론 등의 예고나 경고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돌연 정전을 맞은 만큼 정신적 피해가 더 컸다고 피해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력(電力)사용량이 연중 최고치를 기록하는 것은 여름철 혹서기지만, 2009년부터 우리나라의 전력 최고 사용일은 혹한기인 1월에 나타나고 있다. 냉방·난방을 한껏 가동하는 한여름과 한겨울이 전력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럴 때는 전력수급에 이상이 생긴다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왜 냉·난방과 특별한 관계가 없는 9월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지식경제부는 정전 다음 날인 16일 정전 원인에 대해 “이상고온으로 인한 전력수요 급증과 발전소 정비로 인한 공급능력 감소가 겹쳐 순간적 과부하 상태가 발생했고, 비상시 수급조절 운영계획에 따라 광역정전사태 발생을 막기 위해 비상정전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날 대구 낮 최고기온이 34.2℃를 기록하는 등 9월 날씨로는 62년 만에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한전 대신 斷電 권한 가진 전력거래소의 정체는
이상고온으로 전력수요가 급상승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 정도 수요상승에 대응할 예비전력도 없이 전국에 급작스런 단전을 실시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2011년 10월 현재 발전능력이 최대 전력수요를 웃도는 예비율을 뜻하는 국내 전력예비율은 4.1%에 불과하다. 9월 15일 오후 3시 정전 당시 순간 예비율은 0.35%로 단전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전국 정전이라는 사태가 벌어질 찰나였다. 전국 정전 사태를 막기 위해 순환정전이 실시된 것이다.
전력예비율은 최근 10년간 계속 하락추세로, 1999년 8월만 해도 16.4%에 달했던 것이 2006년 10.5%로 떨어지면서 2007년부터는 계속 한 자리 수를 유지하고 있다. 예비율은 정비 중인 발전기의 용량까지 공급에 포함되기 때문에 예비율은 최소 15~17%가 돼야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전력수급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국내 전력공급을 담당하는 한국전력은 이번 사태에 대해 잠잠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전력수요를 예측하는 주체는 물론, 단전을 결정하고 실시한 주체도 한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전사태 다음 날인 9월 16일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를 찾았고, 당시 사장직무대행인 김우겸 부사장을 상대로 정전사태에 대해 질타했다. 여기서 문제는 좀 더 복잡해졌다. 수요·공급 전력을 파악하고 정전을 실시한 곳은 한전이 아니라 전력거래소였다.
이 대통령은 한전 김 부사장에게 “자기 마음대로 (전력공급을) 자르고 해도 되나”라고 비난했다. 김 부사장은 “그런 건 전력거래소에서 한다”고 답했다. 이에 대통령은 “한전이 하는 일은 뭐냐, 단전을 거래소에서 마음대로 하느냐”고 물었고, 김 부사장은 “한전은 전력거래소 요청에 따라 단전 등 전력을 조정하고, 단전에 대해 사전 홍보 등 조치를 한다”고 답했다. 대통령은 이후 거래소와 발전회사들의 브리핑을 들은 뒤, 다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며 자리를 떴다. 이후 한전 직원들 사이에서는 “솔직히 엉뚱한 데 와서 화풀이한 것 아니냐”는 불평이 쇄도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조직인 전력거래소는 어떤 곳이기에 임의대로 정전을 실시할 수 있을까.
2001년 전력사업구조개편으로 공기업 7개 신설
대부분의 국민은 지식경제부의 발표대로 이상고온 현상으로 지경부와 한전이 수요공급 예측을 제대로 못해 정전사태가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르다. 이상고온 등 자연재해에 무리 없이 대처해야 하는 것이 전력공급 기관의 원래 임무이고, 이번 사태는 2001년 전력사업구조개편법에 의해 조각조각 쪼개진 한전의 기형적인 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내 전력 전문가들은 “9·15 정전사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늘 ‘블랙 아웃(black out·대규모 정전)’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위험의 근본원인은 전력수급 관리체계가 명확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93~1998년 한전 사장을 역임한 이종훈 현(現) 한전이사회 의장은 “일각에서 이번 사태가 이상고온에 따른 전력수요 증가로 인한 자연재해인 것처럼 해명하지만, 실상은 정책적 과오로 인한 인재(人災)였다”고 단언했다.
그는 자신이 한전 사장 재직시 예비전력이 (이번 사태 당시보다) 훨씬 적었던 혹서기에도 정상적으로 전력운용을 할 수 있었다며, 이번 사태는 전력운용 체계의 불합리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상고온이 예측되는 순간부터 발전용량을 늘리고, 한전이 나서서 대형건물의 수요를 줄이는 방법 등으로 충분히 정상운용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신속하게 이뤄진다는 전제하에서요. 그런데 2001년 한전분할로 전력공급의 두뇌가 지식경제부 산하 전력거래소로 이관됐습니다. 전력운용을 지휘하는 곳과 관리하는 곳, 생산하는 곳이 다 다르니 어떻게 신속한 상황판단이 되겠습니까. 이 불합리를 바로잡고자 지난달 퇴임한 한전 사장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죠. 물론 이번 사태에 한전도 잘한 것은 없지만, 이런 시스템에서 이런 사태가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그는 기후변화와 이상기온은 전세계의 이슈가 된 지 오래고, 9월 15일의 이상고온도 기상청에서 며칠 전부터 예고됐다며 “이상기온을 핑계 삼는다는 것은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의장의 말대로 현재 국내 전력수급의 책임자는 한전이 아닌 지식경제부와 전력거래소다. 지식경제부가 국가에너지계획을 수립하고 전력수급을 관리하며, 이를 전력거래소에 통보한다. 전력거래소는 전력계통 운영계획을 수립하고, 전력시장 운영을 담당하며 한국전력에 전력수급과 관련해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한전은 전력거래소의 지시 이후에야 발전회사에 발전량을 늘리라는 요청을 할 수 있다. 이상고온이나 자연재해가 예견되더라도 지경부-전력거래소-한전-발전회사라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발전량을 늘리고 수요를 줄이는 등의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왜 이런 복잡한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일까. 10년 전까지는 한국전력이 지식경제부(당시 산업자원부)의 지휘하에 전력수급 계획을 세우고 발전, 송전, 배전 및 운영과 판매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정전이 발생하거나 전력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와 한전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데 2000년 12월 말 한전에서 발전기능과 계통운영기능을 분리하는 전력사업구조개편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2001년 4월 한전은 화력발전 5개사(남동발전·중부발전·서부발전·남부발전·동서발전), 수력원자력발전 1개사(한국수력원자력), 계통운영 1개사(전력거래소)를 독립시켰다. 한전에는 송배전과 변전, 전력판매 기능만 남았다. 당시 계획은 향후 분리된 발전사를 민영화하고 송배전 기능도 분할한다는 것이었다.
“전력거래소는 지경부 퇴직관료 자리보전용?”
전국전력 노동조합 김주영 위원장 역시 정전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왜곡된 구조 탓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력설비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된 네트워크 산업이기 때문에 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시스템이 신속하고 유기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밝혔다. 수요예측과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해 정전사태가 일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한전이 분할되지 않았으면 수요예측과 공급을 제대로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전력사업의 두뇌와 같은 전력거래소는 지경부 퇴직 관료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준정부기관”이라며 “국민이 내는 전기요금이나 서비스의 중요성을 절실히 알지 못하는 전력거래소는 수요예측 등의 결정을 정확히 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전은 현재 몸만 있고 책임질 권한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권한을 갖고 있는 전력거래소는 퇴직 관료의 자리 보전용이 된 지 오래고요. 이번 사태 당시만 해도 전력거래소가 수요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해 15일 오전 비상상황이 예상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정전사태에 이른 겁니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계통운영 업무와 발전 업무가 한전에서 분리돼 있는 이상 이 같은 사태는 재발할 가능성이 있어요.”
문승일 서울대 전기공학과 교수도 현행 전력사업 시스템이 정전사태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비상상황에서는 시스템이 간단할수록 효율적이고, 특히 전력망 운영시스템처럼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면서 결정자의 순간적 판단이 중요한 시스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우리 전력시스템은 그렇지 못합니다. 15일 오전부터 예비전력이 고갈돼 가는 징후가 발견됐지만 전력거래소와 한전, 정부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지 못했고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특히 전력거래소가 한전에서 분리된 지 10년째인데, 이 상태로 계속 가면 전력거래소에는 전력현장 경험자가 계속 줄어들 것이고, 전력거래소는 현장감을 잃은 조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도 비효율적인데 갈수록 더 비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염명천 전력거래소 이사장은 15일 오전 11시반부터 1시45분까지 개인적인 약속을 이유로 자리를 비운 것으로 알려졌다. 염 전 이사장은 산자부-지경부 고위관료 출신으로, 2010년 4월 지경부에서 전력거래소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전 관계자들은 “이상고온 현상으로 전력예비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전력거래소가 전직원 비상체제를 유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외환위기 직후 공기업개혁 일환으로 한전 분할
결국 문제는 전력사업의 두뇌와도 같은 전력거래소가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있으며, 할 수도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한전을 왜 조각조각 분할시켰을까. 당시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공기업 개혁’에 나섰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자금을 마련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기업을 매각하거나 민영화하고 대폭 구조조정하는 등 공기업 개혁을 주도했다. 자산규모가 크고 수입이 충분한 공기업들이 1차 타깃이었다.
한전 분할 직전(99년 5월~2000년 1월) 산자부 장관을 역임하며 한전 분할을 지휘했던 정덕구 현 니어재단 이사장은 “당시 한전은 해외 부채 등 빚이 너무 많아 분할 및 매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IMF 외환사태 직후 외채상환 능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원래 한전과 가스공사, 관광공사 등 수많은 공사들을 민영화로 매각할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한전은 외채를 지나치게 많이 써서 재무구조가 형편없었고, 외채상환 요구를 받으면 파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할 형편이었지요. 청와대와 기획예산처는 한전을 해외자본에 매각한다는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원래 한전을 해외에 매각하려 했던 겁니까.
“김영삼 정부 시절 공기업 개혁안을 보면 한전은 민영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자 외채가 많은 공기업들을 정리하라는 IMF와 미 재무부의 제안이 있었고, 1997년 말까지 급박하게 전력사업 개편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이때 조직은 비대하면서 재무형편은 좋지 않은 한전을 민영화하는 방안이 수면위로 떠올랐고요. 청와대와 기획예산처가 한전 해외매각 계획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민영화와 매각은 결국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998년 초 뉴욕에서 한·미 외환협상이 타결되면서 외채문제가 고비를 벗어났고, 또 다른 이유는 노조의 극심한 반대 때문이었죠. 한전 노조가 상위노조를 탈퇴하고 파업을 벌이는 등 극심한 반발에 나섰습니다. 노조는 김대중 정부의 중요한 지지기반 중 하나인데, 대통령이 이를 짓밟을 수는 없었던 것이죠.”
―청와대가 한전을 해외에 매각하려고 했다가 노조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쉽게 말해 대통령 마음이 변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전을 비롯해 가스공사 등 공사 해외매각을 짧은 시간이지만 계획했었던 것은 사실이고, 정부는 노조에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전을 비롯해 공사들이 모두 민영화되거나 매각되지 못한 이유도 모두 노조 때문이라고 봅니다. ”
―한전 노조는 당시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한전을 분할했다고 주장합니다.
“IMF와 미국정부 등이 외환위기 초기에 공기업 분할과 매각에 대해 제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뉴욕 외환협상 이후 외환위기는 어느 정도 극복돼서 외부의 압박에 따라야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분할은 왜 필요했나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공기업 해외매각을 추진했다는 정황은 분명하지만, 한전을 왜 조각조각 분할해야 했을까. 김대중 정부의 공기업 개혁에 참여했던 박진 미래전략연구원장(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으로부터 당시 상황을 들어 봤다. 그는 “시장에서 이미 잘 운영되고 있거나 공기업 설립 취지와 무관한 기능은 과감하게 떼내야 한다”며 “특히 지나치게 비대해진 공기업은 기능조정이 필수라고 여겨 에너지나 건설과 관련된 공기업을 분할 또는 민영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당시 정부투자기관 8곳의 민영화와 3곳의 부분민영화, 공기업 20개의 민영화·통폐합 등 민영화 및 공기업 매각수입이 20조원을 넘어서는 등 역대 정권이 시도한 공기업 개혁 중 표면적으로는 가장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국중공업과 포항제철, 한국통신 등 굵직한 8개 공기업이 민간에 넘어갔고, 이로 인해 마련된 자금은 외환위기 극복에 디딤돌이 됐습니다.”
특히 한전의 경우 과도한 시장지배력을 줄이고,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조직을 개혁한다는 취지에서 분할이 먼저 추진됐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민영화를 목표로 1차적으로 발전사를 분할하고, 향후 송배전 부문도 분할한다는 내용의 구조개편에 돌입한 것. 한전은 노조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1년 4월 6개사가 분리됐고, 이후 지속적인 분할 및 민영화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기업 개혁을 위해 한전을 분할했어야 하느냐는 데는 아직도 이견이 많다. 본격적인 민영화에 나섰던 포항제철과 한국통신의 경우와는 달리 한전 분할은 단순히 ‘자리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전 관계자의 얘기다. “한전 정년이 58세였거든요(2010년 60세로 연장). 새 공기업 사장직이 7개 생겼는데, 모두 60세 전후의 한전 출신자가 임명됐습니다. 이렇게 명백한 ‘자리 만들어 주기’는 다시 보기 힘들 정도 아닙니까. 감사들은 대부분 산자부 퇴직(예정)자였고요. 한전 구조개혁이라고 하는데, 결국 한전 조직만 조금 작아졌고 전반적으로 고위직은 늘어났어요. 비효율적인 조직을 개혁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새 회사들 모두 한전과 같은 처우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분할을 개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분할 후 전체적으로 관리비용도 늘었고, 한전과 발전사 모두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며 “분할 이후 전력수급은 늘 불안한 상태”라고 말했다.
김주영 전력노조 위원장은 “논리 없는 한전 분할 이후 정부의 낙하산 인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분할이 왜 이뤄졌는지 의심치 않을 수 없다”며 “직원들은 잘라 내고 임원 수는 늘리는 분할이 개혁인가”라고 반문했다.
정덕구 전 산자부 장관 역시 한전 관계사들의 인사(人事)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현재의 한전과 관계사들에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시스템 자체보다 인사가 문제라고 본다”며 그동안 전력거래소 등 한전 관련회사들에 지경부 퇴직관료가 계속 가는 바람에 전문성도 없고 경영능력도 없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만에 재통합? 한전의 앞날은
한편 애초 세웠던 계획대로 한전이 분할 후 본격적인 민영화를 이뤘더라면 현황은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 전력사업 자유화 이후 2003년 캘리포니아 일대가 정전되고 대도시와 실리콘밸리 등의 정전으로 산업계가 큰 피해를 입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국내 전력사업구조 개편안도 미궁에 빠져들었다. 전력사업 자유화가 또다른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후 2004년 한전 송배전 부문 분할계획은 백지화됐고, 2010년 1월에는 발전회사를 민영화하는 대신 기타 공공기관에서 시장형 공기업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전력사업구조 개편방안이 확정됐다. 결국 분할만 하고 민영화는 못한, 기형적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정전 사태 이후 한전 재통합 방안이 국회에서 발의되는 등 재통합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왔다.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은 지난 10월 5일 전력계통 운영업무를 한전에 이관하는 내용의 전기사업법과 한국전력공사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태근 의원은 “9·15 정전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전력거래소와 한전의 정보공유·협조부족 때문인 만큼 전력계통망 운영주체와 소유주체를 합쳐야 한다”고 법안 취지를 설명했다. 사실상 전력거래소를 다시 한전에 통합시키자는 것이다. 지경위 위원 25명 중 24명이 이 법안에 서명해 법안은 무리 없이 통과될 전망이다. 지경위 김영환 위원장(민주당)은 “과거 한전 분할은 민영화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민영화가 무산된 이상 어정쩡한 전력사업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차라리 합치는 게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아니면 말고’ 식의 국정운영이 아닐 수 없다. ⊙
일반적으로 전력(電力)사용량이 연중 최고치를 기록하는 것은 여름철 혹서기지만, 2009년부터 우리나라의 전력 최고 사용일은 혹한기인 1월에 나타나고 있다. 냉방·난방을 한껏 가동하는 한여름과 한겨울이 전력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럴 때는 전력수급에 이상이 생긴다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왜 냉·난방과 특별한 관계가 없는 9월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지식경제부는 정전 다음 날인 16일 정전 원인에 대해 “이상고온으로 인한 전력수요 급증과 발전소 정비로 인한 공급능력 감소가 겹쳐 순간적 과부하 상태가 발생했고, 비상시 수급조절 운영계획에 따라 광역정전사태 발생을 막기 위해 비상정전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날 대구 낮 최고기온이 34.2℃를 기록하는 등 9월 날씨로는 62년 만에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한전 대신 斷電 권한 가진 전력거래소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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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에 마련된 정전피해신고 접수센터. |
전력예비율은 최근 10년간 계속 하락추세로, 1999년 8월만 해도 16.4%에 달했던 것이 2006년 10.5%로 떨어지면서 2007년부터는 계속 한 자리 수를 유지하고 있다. 예비율은 정비 중인 발전기의 용량까지 공급에 포함되기 때문에 예비율은 최소 15~17%가 돼야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국내 전력수급이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국내 전력공급을 담당하는 한국전력은 이번 사태에 대해 잠잠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전력수요를 예측하는 주체는 물론, 단전을 결정하고 실시한 주체도 한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전사태 다음 날인 9월 16일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를 찾았고, 당시 사장직무대행인 김우겸 부사장을 상대로 정전사태에 대해 질타했다. 여기서 문제는 좀 더 복잡해졌다. 수요·공급 전력을 파악하고 정전을 실시한 곳은 한전이 아니라 전력거래소였다.
이 대통령은 한전 김 부사장에게 “자기 마음대로 (전력공급을) 자르고 해도 되나”라고 비난했다. 김 부사장은 “그런 건 전력거래소에서 한다”고 답했다. 이에 대통령은 “한전이 하는 일은 뭐냐, 단전을 거래소에서 마음대로 하느냐”고 물었고, 김 부사장은 “한전은 전력거래소 요청에 따라 단전 등 전력을 조정하고, 단전에 대해 사전 홍보 등 조치를 한다”고 답했다. 대통령은 이후 거래소와 발전회사들의 브리핑을 들은 뒤, 다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며 자리를 떴다. 이후 한전 직원들 사이에서는 “솔직히 엉뚱한 데 와서 화풀이한 것 아니냐”는 불평이 쇄도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조직인 전력거래소는 어떤 곳이기에 임의대로 정전을 실시할 수 있을까.
2001년 전력사업구조개편으로 공기업 7개 신설
대부분의 국민은 지식경제부의 발표대로 이상고온 현상으로 지경부와 한전이 수요공급 예측을 제대로 못해 정전사태가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르다. 이상고온 등 자연재해에 무리 없이 대처해야 하는 것이 전력공급 기관의 원래 임무이고, 이번 사태는 2001년 전력사업구조개편법에 의해 조각조각 쪼개진 한전의 기형적인 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국내 전력 전문가들은 “9·15 정전사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늘 ‘블랙 아웃(black out·대규모 정전)’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위험의 근본원인은 전력수급 관리체계가 명확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93~1998년 한전 사장을 역임한 이종훈 현(現) 한전이사회 의장은 “일각에서 이번 사태가 이상고온에 따른 전력수요 증가로 인한 자연재해인 것처럼 해명하지만, 실상은 정책적 과오로 인한 인재(人災)였다”고 단언했다.
그는 자신이 한전 사장 재직시 예비전력이 (이번 사태 당시보다) 훨씬 적었던 혹서기에도 정상적으로 전력운용을 할 수 있었다며, 이번 사태는 전력운용 체계의 불합리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이상고온이 예측되는 순간부터 발전용량을 늘리고, 한전이 나서서 대형건물의 수요를 줄이는 방법 등으로 충분히 정상운용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신속하게 이뤄진다는 전제하에서요. 그런데 2001년 한전분할로 전력공급의 두뇌가 지식경제부 산하 전력거래소로 이관됐습니다. 전력운용을 지휘하는 곳과 관리하는 곳, 생산하는 곳이 다 다르니 어떻게 신속한 상황판단이 되겠습니까. 이 불합리를 바로잡고자 지난달 퇴임한 한전 사장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죠. 물론 이번 사태에 한전도 잘한 것은 없지만, 이런 시스템에서 이런 사태가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그는 기후변화와 이상기온은 전세계의 이슈가 된 지 오래고, 9월 15일의 이상고온도 기상청에서 며칠 전부터 예고됐다며 “이상기온을 핑계 삼는다는 것은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의장의 말대로 현재 국내 전력수급의 책임자는 한전이 아닌 지식경제부와 전력거래소다. 지식경제부가 국가에너지계획을 수립하고 전력수급을 관리하며, 이를 전력거래소에 통보한다. 전력거래소는 전력계통 운영계획을 수립하고, 전력시장 운영을 담당하며 한국전력에 전력수급과 관련해 지시하는 역할을 한다. 한전은 전력거래소의 지시 이후에야 발전회사에 발전량을 늘리라는 요청을 할 수 있다. 이상고온이나 자연재해가 예견되더라도 지경부-전력거래소-한전-발전회사라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발전량을 늘리고 수요를 줄이는 등의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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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9일 열린 국회 지경위 국감에서 김중겸 한전 사장이 정전사태와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
그런데 2000년 12월 말 한전에서 발전기능과 계통운영기능을 분리하는 전력사업구조개편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2001년 4월 한전은 화력발전 5개사(남동발전·중부발전·서부발전·남부발전·동서발전), 수력원자력발전 1개사(한국수력원자력), 계통운영 1개사(전력거래소)를 독립시켰다. 한전에는 송배전과 변전, 전력판매 기능만 남았다. 당시 계획은 향후 분리된 발전사를 민영화하고 송배전 기능도 분할한다는 것이었다.
“전력거래소는 지경부 퇴직관료 자리보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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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9월 16일 한전 본사를 방문해 정전사태에 대한 보고를 듣고 한전측을 질책하고 있다. |
김 위원장은 “전력사업의 두뇌와 같은 전력거래소는 지경부 퇴직 관료들이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준정부기관”이라며 “국민이 내는 전기요금이나 서비스의 중요성을 절실히 알지 못하는 전력거래소는 수요예측 등의 결정을 정확히 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전은 현재 몸만 있고 책임질 권한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권한을 갖고 있는 전력거래소는 퇴직 관료의 자리 보전용이 된 지 오래고요. 이번 사태 당시만 해도 전력거래소가 수요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해 15일 오전 비상상황이 예상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정전사태에 이른 겁니다.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계통운영 업무와 발전 업무가 한전에서 분리돼 있는 이상 이 같은 사태는 재발할 가능성이 있어요.”
문승일 서울대 전기공학과 교수도 현행 전력사업 시스템이 정전사태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비상상황에서는 시스템이 간단할수록 효율적이고, 특히 전력망 운영시스템처럼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면서 결정자의 순간적 판단이 중요한 시스템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죠. 하지만 우리 전력시스템은 그렇지 못합니다. 15일 오전부터 예비전력이 고갈돼 가는 징후가 발견됐지만 전력거래소와 한전, 정부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지 못했고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특히 전력거래소가 한전에서 분리된 지 10년째인데, 이 상태로 계속 가면 전력거래소에는 전력현장 경험자가 계속 줄어들 것이고, 전력거래소는 현장감을 잃은 조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도 비효율적인데 갈수록 더 비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염명천 전력거래소 이사장은 15일 오전 11시반부터 1시45분까지 개인적인 약속을 이유로 자리를 비운 것으로 알려졌다. 염 전 이사장은 산자부-지경부 고위관료 출신으로, 2010년 4월 지경부에서 전력거래소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전 관계자들은 “이상고온 현상으로 전력예비율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상황에서 전력거래소가 전직원 비상체제를 유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았다.
| ▣ 해외의 전력사업 민영화 전력사업은 초기 투자비용이 막대해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가 주도의 독점사업으로 진행돼 왔다. 그러나 독점과 조직의 비효율화 등 문제가 불거지면서 각국은 전력자유화 또는 민영화를 추구, 경쟁체제를 도입하게 됐다. 유럽의 경우 1990년 영국에서 전력 부문 자유화가 실시됐고, 1996년부터 EU가 전력자유화를 순차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영국은 1998년 정부가 전력 민영화를 전면 도입해 1999년 이후 공적인 독점 전기 공급자가 없어졌다. 미국은 1998년 캘리포니아주와 매사추세츠주를 시작으로 주별로 전력자유화가 실시됐다. 일본은 2차대전 종전 후 단계적인 전력자유화를 실시해 현재 10개의 민영 전기사업자가 존재한다. 그러나 200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대정전 사태와 2001년 브라질 전력사업 민영화 직후 전기료 400% 인플레사태 등 전력 민영화의 부작용이 이어지면서 최근 각국의 전력사업 민영화 바람은 주춤한 상태다. |
외환위기 직후 공기업개혁 일환으로 한전 분할
결국 문제는 전력사업의 두뇌와도 같은 전력거래소가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있으며, 할 수도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한전을 왜 조각조각 분할시켰을까. 당시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공기업 개혁’에 나섰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자금을 마련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기업을 매각하거나 민영화하고 대폭 구조조정하는 등 공기업 개혁을 주도했다. 자산규모가 크고 수입이 충분한 공기업들이 1차 타깃이었다.
한전 분할 직전(99년 5월~2000년 1월) 산자부 장관을 역임하며 한전 분할을 지휘했던 정덕구 현 니어재단 이사장은 “당시 한전은 해외 부채 등 빚이 너무 많아 분할 및 매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IMF 외환사태 직후 외채상환 능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원래 한전과 가스공사, 관광공사 등 수많은 공사들을 민영화로 매각할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한전은 외채를 지나치게 많이 써서 재무구조가 형편없었고, 외채상환 요구를 받으면 파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팔아서 빚을 갚아야 할 형편이었지요. 청와대와 기획예산처는 한전을 해외자본에 매각한다는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습니다.”
―원래 한전을 해외에 매각하려 했던 겁니까.
“김영삼 정부 시절 공기업 개혁안을 보면 한전은 민영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고 나자 외채가 많은 공기업들을 정리하라는 IMF와 미 재무부의 제안이 있었고, 1997년 말까지 급박하게 전력사업 개편 논의가 이뤄졌습니다. 이때 조직은 비대하면서 재무형편은 좋지 않은 한전을 민영화하는 방안이 수면위로 떠올랐고요. 청와대와 기획예산처가 한전 해외매각 계획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민영화와 매각은 결국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998년 초 뉴욕에서 한·미 외환협상이 타결되면서 외채문제가 고비를 벗어났고, 또 다른 이유는 노조의 극심한 반대 때문이었죠. 한전 노조가 상위노조를 탈퇴하고 파업을 벌이는 등 극심한 반발에 나섰습니다. 노조는 김대중 정부의 중요한 지지기반 중 하나인데, 대통령이 이를 짓밟을 수는 없었던 것이죠.”
―청와대가 한전을 해외에 매각하려고 했다가 노조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다는 말입니까.
“쉽게 말해 대통령 마음이 변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전을 비롯해 가스공사 등 공사 해외매각을 짧은 시간이지만 계획했었던 것은 사실이고, 정부는 노조에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전을 비롯해 공사들이 모두 민영화되거나 매각되지 못한 이유도 모두 노조 때문이라고 봅니다. ”
―한전 노조는 당시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굴복해 한전을 분할했다고 주장합니다.
“IMF와 미국정부 등이 외환위기 초기에 공기업 분할과 매각에 대해 제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뉴욕 외환협상 이후 외환위기는 어느 정도 극복돼서 외부의 압박에 따라야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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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전사태가 벌어진 9월 15일 저녁 한국전력거래소 상황실에서 한전 관계자가 대응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분할은 왜 필요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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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2월 한전 분할에 반대하는 한전 노조원들이 시위에 나서고 있다. |
“당시 정부투자기관 8곳의 민영화와 3곳의 부분민영화, 공기업 20개의 민영화·통폐합 등 민영화 및 공기업 매각수입이 20조원을 넘어서는 등 역대 정권이 시도한 공기업 개혁 중 표면적으로는 가장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한국중공업과 포항제철, 한국통신 등 굵직한 8개 공기업이 민간에 넘어갔고, 이로 인해 마련된 자금은 외환위기 극복에 디딤돌이 됐습니다.”
특히 한전의 경우 과도한 시장지배력을 줄이고, 비대하고 비효율적인 조직을 개혁한다는 취지에서 분할이 먼저 추진됐다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민영화를 목표로 1차적으로 발전사를 분할하고, 향후 송배전 부문도 분할한다는 내용의 구조개편에 돌입한 것. 한전은 노조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1년 4월 6개사가 분리됐고, 이후 지속적인 분할 및 민영화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기업 개혁을 위해 한전을 분할했어야 하느냐는 데는 아직도 이견이 많다. 본격적인 민영화에 나섰던 포항제철과 한국통신의 경우와는 달리 한전 분할은 단순히 ‘자리 만들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당시 한전 관계자의 얘기다. “한전 정년이 58세였거든요(2010년 60세로 연장). 새 공기업 사장직이 7개 생겼는데, 모두 60세 전후의 한전 출신자가 임명됐습니다. 이렇게 명백한 ‘자리 만들어 주기’는 다시 보기 힘들 정도 아닙니까. 감사들은 대부분 산자부 퇴직(예정)자였고요. 한전 구조개혁이라고 하는데, 결국 한전 조직만 조금 작아졌고 전반적으로 고위직은 늘어났어요. 비효율적인 조직을 개혁한다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새 회사들 모두 한전과 같은 처우를 받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분할을 개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분할 후 전체적으로 관리비용도 늘었고, 한전과 발전사 모두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며 “분할 이후 전력수급은 늘 불안한 상태”라고 말했다.
김주영 전력노조 위원장은 “논리 없는 한전 분할 이후 정부의 낙하산 인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볼 때 분할이 왜 이뤄졌는지 의심치 않을 수 없다”며 “직원들은 잘라 내고 임원 수는 늘리는 분할이 개혁인가”라고 반문했다.
정덕구 전 산자부 장관 역시 한전 관계사들의 인사(人事)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현재의 한전과 관계사들에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시스템 자체보다 인사가 문제라고 본다”며 그동안 전력거래소 등 한전 관련회사들에 지경부 퇴직관료가 계속 가는 바람에 전문성도 없고 경영능력도 없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만에 재통합? 한전의 앞날은
한편 애초 세웠던 계획대로 한전이 분할 후 본격적인 민영화를 이뤘더라면 현황은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 전력사업 자유화 이후 2003년 캘리포니아 일대가 정전되고 대도시와 실리콘밸리 등의 정전으로 산업계가 큰 피해를 입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국내 전력사업구조 개편안도 미궁에 빠져들었다. 전력사업 자유화가 또다른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후 2004년 한전 송배전 부문 분할계획은 백지화됐고, 2010년 1월에는 발전회사를 민영화하는 대신 기타 공공기관에서 시장형 공기업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전력사업구조 개편방안이 확정됐다. 결국 분할만 하고 민영화는 못한, 기형적 형태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정전 사태 이후 한전 재통합 방안이 국회에서 발의되는 등 재통합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왔다. 한나라당 정태근 의원은 지난 10월 5일 전력계통 운영업무를 한전에 이관하는 내용의 전기사업법과 한국전력공사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태근 의원은 “9·15 정전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전력거래소와 한전의 정보공유·협조부족 때문인 만큼 전력계통망 운영주체와 소유주체를 합쳐야 한다”고 법안 취지를 설명했다. 사실상 전력거래소를 다시 한전에 통합시키자는 것이다. 지경위 위원 25명 중 24명이 이 법안에 서명해 법안은 무리 없이 통과될 전망이다. 지경위 김영환 위원장(민주당)은 “과거 한전 분할은 민영화를 염두에 둔 것이었는데 민영화가 무산된 이상 어정쩡한 전력사업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차라리 합치는 게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아니면 말고’ 식의 국정운영이 아닐 수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