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암’ 이병철 회장의 호를 따 1990년 제정… 1995년부터 노벨재단과 교류
⊙ 과학상·공학상·의학상·예술상·사회봉사상 5개 분야… 상금 1인당 3억원으로 국내 最高
⊙ 김진의 교수, 서남표 총장, 고 백남준, 고 박경리, 강수진씨 등 총 101명 수상
⊙ “해가 갈수록 잘되는 느낌입니다”(2010년 호암상 축하연에서 이건희 회장)
⊙ 과학상·공학상·의학상·예술상·사회봉사상 5개 분야… 상금 1인당 3억원으로 국내 最高
⊙ 김진의 교수, 서남표 총장, 고 백남준, 고 박경리, 강수진씨 등 총 101명 수상
⊙ “해가 갈수록 잘되는 느낌입니다”(2010년 호암상 축하연에서 이건희 회장)
지난 6월 1일 오후 2시30분, 서울시 순화동 호암아트홀 주변은 검정 슈트를 입은 경호원들로 북적였다. 이들은 호암아트홀 정문으로 들어오는 차량을 일일이 확인하며 경계를 폈다. 큰 행사가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0분 뒤 경호원들 사이로 정운찬(鄭雲燦) 국무총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잠시 뒤 이건희(李健熙) 삼성전자 회장 내외가 검정 벤츠 자동차에서 내렸다. 자녀 재용(在鎔), 부진(富眞), 서현(敍顯)씨 남매가 뒤를 따랐다. 삼성가 이씨 패밀리가 총출동한 것은 고(故) 이병철(李秉喆) 그룹 창업주의 탄생 100주년 행사 이후 처음이었다.
평소 한자리에서 보기 힘든 삼성그룹의 전·현직 수뇌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학수(李鶴洙) 전(前)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 이윤우(李潤雨) 삼성전자 부회장, 황영기(黃永基) 전 KB금융지주 회장, 진대제(陳大濟)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이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建宇)·윤정희(尹靜姬) 부부도 함께했다. ‘호암상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오후 3시가 되자, 만 29세의 나이에 최연소 서울대 교수로 임용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김현진(金?辰)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의 오프닝으로 행사가 시작됐다.
올해 호암상 수상자인 유룡(劉龍) 한국과학기술원 특훈교수, 이평세 미(美) UC버클리대 교수, 윌리엄 한 미 하버드의대 교수, 연극인 장민호(張民虎)씨 부부와 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 측 인사 두 명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스크린에서는 이 상(賞)을 제정한 이건희 회장의 모습이 중계됐다.
“각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인류사회 발전에 원동력이 되고, 우리 시대의 사표(師表)로서 귀감이 될 분들을 찾아 지원해 드리는 일도 기업이 담당해야 할 소중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1991년 3월 22일, 제1회 호암상 시상식장에서 했던 말이다.
제정된 지 20년
호암상이 제정된 지 20년이 됐다. 이 상은 과학·예술·사회봉사 등의 분야에서 빼어난 업적을 일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수상자에게 상장과 순금 50돈, 3억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국내에서 가장 큰 상금이다.
하지만 호암상이 많은 상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관심을 끄는 것만은 아니다.
얼마 전 ‘논문 인용지 수 최다(最多)’로 꼽혔던 김진의(金鎭義)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서남표(徐南杓) 한국과학기술원 총장(호암상 수상 당시 미 MIT대 교수), 고 백남준(白南準) 비디오 아티스트, ‘토지’를 집필한 고 박경리(朴景利) 소설가, 독일 슈투트가르츠발레단의 수석발레리나 강수진(姜秀珍), 고 장기려(張起呂)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 등 한국 사회의 명사(名士)들이 이 상을 받았다.
하지만 호암상은 그 역사에 비하자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크게 높지 않은 학자들에게 주로 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호암상=삼성상’ 정도로 여긴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오산(誤算)이다. 호암재단은 이 상을 ‘노벨상’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권위의 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십수 년째 재단을 꾸려 오고 있다.
초창기, 주위의 반응 싸늘
호암상이 제정된 것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타계한 지 3년 되던 해였다.
후계자였던 이건희 회장은 1990년, 부친(父親) 이병철 회장의 사회공익 정신을 계승해 인류복지 증진에 힘쓴 사람들에게 포상을 한다는 목적으로 고 이병철 회장의 호인 ‘호암(湖巖)’을 본떠 이 상을 만들었다. 고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인재육성, 문화사업에 관심이 컸다. 대다수의 재벌 기업들이 사업 확장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1960년대 중반에 삼성문화재단을 세웠을 정도다.
호암상이 초기부터 오늘날의 권위를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기업이 무슨 상을 만들어 주느냐”고 수군거렸다. 호암 이병철 선생에 반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호암’의 이름을 땄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못마땅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정부가 아닌 기업에서 상을 제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낯선 일이었다. 딱히 본받을 만한 롤모델도 없었다.
호암상 제정 초기부터 업무를 담당했던 권순호 호암재단 상무의 얘기다.
“처음 시작하는 일인 만큼 어려움이 컸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주관하는 ‘서울평화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자료를 얻어서 공부해 가면서 호암상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쪽에서 저희의 취지와 열의를 보더니, ‘나중에 저희가 호암상을 벤치마킹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싶어서 웃어넘겼는데 어느새 20년이 흘렀습니다.”
호암상 초창기에는 수상 분야가 과학기술상(상금 1억원), 의학 및 언론상, 사회봉사(5000만원)였다.
1994년에는 학계·예술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호암상위원회가 발족됐다. 수상자의 선정 공정성과 전문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초기 위원장은 이현재(李賢宰) 전 국무총리가 맡았다. 이외에 고 이상수(李相洙) 한국과학기술원장, 김상주(金商周) 서울대 명예교수 겸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고 한용철(韓鏞徹) 삼성의료원장, 고 이대원(李大源)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고 서기원(徐基源) KBS사장, 권이혁(權彛赫) 성균관대 이사장이 호암상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됐다.
위원회는 1995년부터는 노벨재단과 교류를 시작했다.
1997년에는 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 오늘날까지 호암상을 운영하며, 각종 문화사업을 하고 있는 호암재단이다.
이건희 회장 외에 고 이병철 회장의 맏딸 이인희(李仁熙)씨가 이끄는 한솔, 차남 고 이창희(李昌熙)씨의 새한, 3녀 이명희(李明熙)씨의 신세계, 장손 이재현(李在賢)씨의 CJ 등에서 기금을 보탰다.
해를 거듭할수록, 호암상은 자리가 잡혀 갔다. 과학상·공학상·의학상·예술상·사회봉사상의 5개 부문과 이외의 분야에서 특출한 업적을 이룬 인사에게 수여하는 특별상으로 분야를 확정했다. 분야별 상금은 3억원으로 높였다.
해외출장 중에도 시상식 참석 위해 귀국하는 이건희 회장
호암상이 빠른 시간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애착이 한몫을 했다. 이건희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로 불릴 정도로 회사의 여러 공식행사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유독 챙기는 것이 바로 호암상이다. 이 회장이 호암상 1~4회에는 직접 수상자들에게 상장을 수여했다. 이후에는 시상을 이현재 이사장에게 넘겼지만, 그의 모습은 시상식장에서 늘 볼 수 있다.
호암재단 관계자는 “이 회장은 시상식이 열리는 매년 6월 1일에 반드시 참석한다. 해외출장 중에도 참석을 위해 일부러 귀국했다”고 했다. 그가 시상식에 불참한 것은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던 2008년, 2009년뿐이었다. 시상식장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에 진행되는 호암상 축하연에서 손님을 이끄는 호스트는 이건희 회장이다.
이 회장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상에 관심이 크지만, 호암재단의 여타 활동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재단 설립 때부터 현재까지 호암재단을 맡고 있는 이현재 이사장은 “이 회장이 재단에서 선정한 수상자나, 수상자를 뽑는 과정, 선정절차 등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호암상의 권위를 높이는 이유 중 하나가 수상자 선정의 투명성이다.
수상 후보자 찾는 데만 꼬박 6개월
호암재단은 수상 후보자를 찾는 데에만 꼬박 반 년을 쏟아붓는다.
호암재단 측의 설명에 따르면, 재단은 매년 6월 1일 신문에 후보자 추천 공고를 낸다고 한다.
재단은 학술, 예술, 사회봉사 부문의 전문가 1000여 명에게 수상자 후보를 추천해 줄 것을 부탁한다. 추천의뢰서에는 ‘귀하를 ○○○○년 호암상 후보자 추천인으로 위촉하오니, 시상요강을 참고해 우수한 후보자를 추천해 달라’고 씌어 있다.
수상 후보자 자격은 한국인 및 한국계 인사로, 추천 마감일에 생존(生存)해 있어야 한다. 사회봉사상 부문은 한국을 위해 업적을 이룬 외국인도 자격이 있다.
업적의 기준은 창조정신과 봉사정신으로 국가 및 인류 발전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 사회의 귀감(龜鑑)이 될 만한 사람, 공익(公益)에 공헌한 사람이다.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사회의 덕망가를 뽑는 상이 아니다. 추천인이 왜 이 사람을 추천하는지에 대한 업적증빙 자료를 첨부해야 한다. 과학·공학·의학상의 수상 후보자는 대표 논문 1편과 관련 논문 5편 이내, 예술·사회봉사상은 주요업적 증빙자료를 내야 한다. 추천인은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다.
호암재단 관계자는 “추천의뢰서 중 10~15% 정도가 회수된다. 분야별로 20명 정도가 추천된다”고 말했다. 누가 누구를 추천했는지는 비밀이다. 여러 명이 중복 추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작업은 매년 11월 30일까지 여섯 달 동안 계속된다.
재단이 이들 전문가에게 일임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재단은 그들대로 후보자를 물색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호암상 수상 후보자가 총 150여 명으로 선정된다.
매년 12월 1일이 되면, 수상 후보자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된다.
호암상위원회는 과학·공학·의학·예술·사회봉사 부문의 전문가를 선정해 심사위원으로 위촉한다. 심사위원은 매년 바뀐다. 호암재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초창기에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사람 중에 거절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심사위원을 했다는 증명서를 떼 달라는 요청이 있을 정도다. 호암상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문별로 총 7~9명의 심사위원이 있고, 평균 나이는 50~ 55세다. 이들은 평균 세 번의 회의를 통해 수상 후보자에 대한 검증 작업을 한다. 회의가 5시간 이상씩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재단은 심사위원들이 공정한 심사에 임할 수 있도록, 후보자의 논문, 논문인용도 이외 필요한 모든 자료를 제공한다. 호암상위원회 위원들은 일절 이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심사위원들이 후보자에 대해 검증하는 데 넉 달이 더 걸린다.
한민구(韓民九)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의 얘기다.
“호암상이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외부의 간섭이 일절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위촉된 심사위원 그룹의 전문성을 100% 활용합니다. 어떠한 외부의 압력이나 청탁이 없습니다. 학자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이 됐습니다. 불과 20여 년 만에 이런 권위를 갖게 됐다는 것은 국내 학계, 문화계의 큰 수확입니다.”
세계 최상급 수준의 업적 수두룩해
2010년 호암상 과학상 분야의 심사를 맡았던 이기명(李淇明)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의 얘기다.
“첫 모임에서 수상자 선발 기준에 대한 토의가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갖고 탁월한 업적을 이룬 학자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학문적 업적, 독창성, 창조성,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투표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합리적인 논의를 통해서 수상자를 결정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전원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올해 과학상 후보자들의 일부 업적은 세계 최상급 수준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각각 호암상을 수상할 정도의 충분한 업적이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그만큼 고민했고, 서로 고민과 논의를 수차례 거듭해서 결정했습니다.”
―심사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요.
“후보들의 지리적, 시간적인 배경이 서로 달랐습니다. 연령대도 넓게 분포돼 있었습니다. 주요 업적을 이룬 시기가 연구 경력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했습니다. 이런 후보자들의 업적에 대한 자료를 읽고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들 연구 업적의 독창성과 깊이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심오한 수학적 발견부터, 자연의 근본구조 이론 발견, 다양한 생명현상 연구 등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분야의 업적을 비교 평가한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심사위원들끼리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의견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2010년 호암상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한홍택(韓弘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의 얘기다.
“모든 업적은 철저하게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바탕으로, 각 부문의 특성에 적합한 심사원칙을 설정해 후보자를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분야별 성격에 따라 정량(定量) 평가와 정성(定性) 평가를 종합해 적정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때 과학계의 핫이슈였던 A교수가 수상자 후보였던 적이 있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로 보자면, A교수가 충분히 수상자가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심사위원회 평가에서 탈락했다. 그의 업적이 아직 검증되지 않아, ‘모든 업적은 철저히 검증되어야 한다’는 대전제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암상의 심사는 이 정도로 까다롭다.
해가 갈수록 수상자의 수준 향상
호암재단 측에 따르면, 심사위원단의 후보자 검증은 3월 말 즈음이 되면 거의 끝난다. 이들이 호암상위원회에 수상 후보자에 대해 제청을 한다. 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의 제청을 거부한 적은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얘기다.
호암재단은 매년 4월 첫 주, 수상자에게 통보를 한다. 대부분은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올해 과학상 수상자인 유룡 카이스트 특훈 교수의 얘기다.
“선정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상식이 열리는 때에 해외출장을 잡아 놨었거든요. 권위 있는 상이지만, 통상 재외 한국인 과학자가 수상을 했습니다. 이제 제 연구가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서구(李瑞九)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얘기도 비슷했다. 이 교수는 22년 동안 미국 국립보건원에 재직하면서, 세포신호전달체계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은 공로로 1995년 호암상 과학상을 수상했다.
이 교수는 “해가 갈수록 상을 받은 사람들의 과학적 연구업적이 좋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외국에서 연구하고 있는 한국계에게 상이 주어졌는데, 국내에 있는 학자들의 수상이 점점 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호암상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영예로운 상”이라고 덧붙였다.
2006년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은 윤기 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도 뜻밖이었다고 기억했다.
윤 명예회장의 얘기다.
“수상자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누군가가 지켜봐 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하게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상자들은 공개 강의
이렇게 결정된 수상자들은 매년 6월 1일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을 한다. 호암상 시상식장에는 국무총리가, 저녁에 열리는 축하연에는 국회의장이 통상 참석한다.
호암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수상자가 시상식에 불참할 상황이어서 딱 한 번 수상 여부가 불투명했던 적이 있단다.
“학회와 시상식 일정이 겹친 겁니다. 본인이 수상할 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미리 잡은 것이죠. 수상자들이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참석을 할 수 있다고만 하면, 회사 전용기라도 띄울 생각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학회에서 호암상에 대해 알고 있어서 일정을 조정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시상식이 열리기 직전에 공항에 내려서 겨우 참석만 하고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호암재단 측은 수상자들이 이후에 공개석상에서 강의를 해 줄 것을 요청한다. 업적을 쌓는 것 이상으로, 이를 사회에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지난 6월 11일 오후 4시, 이화여대 ECC 빌딩 146호에서는 올해 호암상을 수상한 유룡 박사의 강의가 열렸다. 기말고사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70여 명의 학생들이 속속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화여대 분자생명과학부 정다미(20세)씨는 강연 내내 메모를 열심히 했다고 했다. 그는 “특별강연이라 꼭 참석하지 않아도 됐지만, 호암상 수상자의 강연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고 오게 됐다. 유 박사가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연구과제에 도전하라고 말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이화여대 환경식품공학부 김정미(19세)씨는 “과거에 몇 차례 학술강의를 들었는데 자기 업적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넘어가서 서운한 적이 있었다. 이번 강의는 딱딱한 학술강의보다 자신의 삶과 철학, 그간의 노력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웃었다.
수상자 기준을 한국인 및 한국계로 규정하고 있다 보니, 호암상 수상을 통해 한국을 새롭게 인식하는 사람도 생겼다.
미국 럿거스대 정상욱 석좌교수는 2007년 호암상 과학상을 수상했다.
자주 인용된 논문 연구자 8명이 호암상 받아
정 교수는 “이전에는 한국과 협업(協業)을 하거나,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았다. 호암상을 받은 이후에 한국과 공동연구를 하게 됐고, 미국에서 배웠던 것을 한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줬다”고 말했다.
2010년 호암상 의학상을 받은 윌리엄 한 미 하버드 의대 교수는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한 박사는 “나의 DNA 속에 한국이 있다는 것을 이번 수상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고 했다.
올해 호암재단은 특별상으로 노벨재단을 선정했다. 20년 역사를 가진 곳이, 100년이 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주관하고 있는 곳에 특별상을 준 것이다. 호암상이 시상한 첫 번째 특별상으로, 설립자인 이건희 회장이 직접 시상해 눈길을 끌었다.
미카엘 술만 노벨재단 사무총장은 수상 소감에서 “호암상이 제정되고 발전된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결정”이었다며 “한국이 국제 과학계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데 한몫을 했다”고 말했다.
호암상은 최근 국제학계의 발표에 다시 한 번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미 과학정보연구소(ISI)는 최근 ‘자주 인용된 논문 연구자(HCR)’ 5000명을 발표했다. 한국계 연구자는 13명이었다. 이 중 8명이 호암상 수상자였다.
홍완기(洪完基) 미 텍사스대 MD앤더슨암센터 부장(4회 의학상), 이서구 미 국립보건원 교수(5회 과학상), 한창대 미 애크런대 교수(6회 공학상), 최원규 미 워싱턴대(7회 의학상), 피터 김 미 머크연구소 연구원(8회 과학상), 김정빈 미 UCLA 교수(12회 공학상), 신강근 미 미시간대 교수(16회 공학상), 정상욱 미 럿거스대 교수(17회 과학상) 등이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호암상은 여태까지 총 101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국인 56명, 한국계 39명, 순수 외국인 6명 등이다. 과연 호암상 수상자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지 주목된다.⊙
10분 뒤 경호원들 사이로 정운찬(鄭雲燦) 국무총리가 모습을 드러냈고, 잠시 뒤 이건희(李健熙) 삼성전자 회장 내외가 검정 벤츠 자동차에서 내렸다. 자녀 재용(在鎔), 부진(富眞), 서현(敍顯)씨 남매가 뒤를 따랐다. 삼성가 이씨 패밀리가 총출동한 것은 고(故) 이병철(李秉喆) 그룹 창업주의 탄생 100주년 행사 이후 처음이었다.
평소 한자리에서 보기 힘든 삼성그룹의 전·현직 수뇌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학수(李鶴洙) 전(前)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 이윤우(李潤雨) 삼성전자 부회장, 황영기(黃永基) 전 KB금융지주 회장, 진대제(陳大濟) 전 정보통신부 장관 등이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白建宇)·윤정희(尹靜姬) 부부도 함께했다. ‘호암상 2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오후 3시가 되자, 만 29세의 나이에 최연소 서울대 교수로 임용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김현진(金?辰)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의 오프닝으로 행사가 시작됐다.
올해 호암상 수상자인 유룡(劉龍) 한국과학기술원 특훈교수, 이평세 미(美) UC버클리대 교수, 윌리엄 한 미 하버드의대 교수, 연극인 장민호(張民虎)씨 부부와 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 측 인사 두 명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스크린에서는 이 상(賞)을 제정한 이건희 회장의 모습이 중계됐다.
“각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인류사회 발전에 원동력이 되고, 우리 시대의 사표(師表)로서 귀감이 될 분들을 찾아 지원해 드리는 일도 기업이 담당해야 할 소중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1991년 3월 22일, 제1회 호암상 시상식장에서 했던 말이다.
제정된 지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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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3월, 호암상 1회 시상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이건희 설립자. |
하지만 호암상이 많은 상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관심을 끄는 것만은 아니다.
얼마 전 ‘논문 인용지 수 최다(最多)’로 꼽혔던 김진의(金鎭義)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서남표(徐南杓) 한국과학기술원 총장(호암상 수상 당시 미 MIT대 교수), 고 백남준(白南準) 비디오 아티스트, ‘토지’를 집필한 고 박경리(朴景利) 소설가, 독일 슈투트가르츠발레단의 수석발레리나 강수진(姜秀珍), 고 장기려(張起呂)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 등 한국 사회의 명사(名士)들이 이 상을 받았다.
하지만 호암상은 그 역사에 비하자면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크게 높지 않은 학자들에게 주로 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호암상=삼성상’ 정도로 여긴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오산(誤算)이다. 호암재단은 이 상을 ‘노벨상’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권위의 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십수 년째 재단을 꾸려 오고 있다.
초창기, 주위의 반응 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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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호암상 시상식에 참석한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 이건희 설립자, 김대중 평민당 총재(왼쪽부터). |
후계자였던 이건희 회장은 1990년, 부친(父親) 이병철 회장의 사회공익 정신을 계승해 인류복지 증진에 힘쓴 사람들에게 포상을 한다는 목적으로 고 이병철 회장의 호인 ‘호암(湖巖)’을 본떠 이 상을 만들었다. 고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인재육성, 문화사업에 관심이 컸다. 대다수의 재벌 기업들이 사업 확장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1960년대 중반에 삼성문화재단을 세웠을 정도다.
호암상이 초기부터 오늘날의 권위를 갖게 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기업이 무슨 상을 만들어 주느냐”고 수군거렸다. 호암 이병철 선생에 반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호암’의 이름을 땄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못마땅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정부가 아닌 기업에서 상을 제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낯선 일이었다. 딱히 본받을 만한 롤모델도 없었다.
호암상 제정 초기부터 업무를 담당했던 권순호 호암재단 상무의 얘기다.
“처음 시작하는 일인 만큼 어려움이 컸습니다. 당시 정부에서 주관하는 ‘서울평화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자료를 얻어서 공부해 가면서 호암상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쪽에서 저희의 취지와 열의를 보더니, ‘나중에 저희가 호암상을 벤치마킹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싶어서 웃어넘겼는데 어느새 20년이 흘렀습니다.”
호암상 초창기에는 수상 분야가 과학기술상(상금 1억원), 의학 및 언론상, 사회봉사(5000만원)였다.
1994년에는 학계·예술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호암상위원회가 발족됐다. 수상자의 선정 공정성과 전문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초기 위원장은 이현재(李賢宰) 전 국무총리가 맡았다. 이외에 고 이상수(李相洙) 한국과학기술원장, 김상주(金商周) 서울대 명예교수 겸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고 한용철(韓鏞徹) 삼성의료원장, 고 이대원(李大源)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고 서기원(徐基源) KBS사장, 권이혁(權彛赫) 성균관대 이사장이 호암상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됐다.
위원회는 1995년부터는 노벨재단과 교류를 시작했다.
1997년에는 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 오늘날까지 호암상을 운영하며, 각종 문화사업을 하고 있는 호암재단이다.
이건희 회장 외에 고 이병철 회장의 맏딸 이인희(李仁熙)씨가 이끄는 한솔, 차남 고 이창희(李昌熙)씨의 새한, 3녀 이명희(李明熙)씨의 신세계, 장손 이재현(李在賢)씨의 CJ 등에서 기금을 보탰다.
해를 거듭할수록, 호암상은 자리가 잡혀 갔다. 과학상·공학상·의학상·예술상·사회봉사상의 5개 부문과 이외의 분야에서 특출한 업적을 이룬 인사에게 수여하는 특별상으로 분야를 확정했다. 분야별 상금은 3억원으로 높였다.
해외출장 중에도 시상식 참석 위해 귀국하는 이건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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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시상식에서 축사를 하는 김수환 추기경. |
호암재단 관계자는 “이 회장은 시상식이 열리는 매년 6월 1일에 반드시 참석한다. 해외출장 중에도 참석을 위해 일부러 귀국했다”고 했다. 그가 시상식에 불참한 것은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던 2008년, 2009년뿐이었다. 시상식장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후에 진행되는 호암상 축하연에서 손님을 이끄는 호스트는 이건희 회장이다.
이 회장은 아버지의 이름을 딴 상에 관심이 크지만, 호암재단의 여타 활동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재단 설립 때부터 현재까지 호암재단을 맡고 있는 이현재 이사장은 “이 회장이 재단에서 선정한 수상자나, 수상자를 뽑는 과정, 선정절차 등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호암상의 권위를 높이는 이유 중 하나가 수상자 선정의 투명성이다.
수상 후보자 찾는 데만 꼬박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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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회 예술상 수상자 임권택 감독 내외와 이건희 설립자 내외. |
호암재단 측의 설명에 따르면, 재단은 매년 6월 1일 신문에 후보자 추천 공고를 낸다고 한다.
재단은 학술, 예술, 사회봉사 부문의 전문가 1000여 명에게 수상자 후보를 추천해 줄 것을 부탁한다. 추천의뢰서에는 ‘귀하를 ○○○○년 호암상 후보자 추천인으로 위촉하오니, 시상요강을 참고해 우수한 후보자를 추천해 달라’고 씌어 있다.
수상 후보자 자격은 한국인 및 한국계 인사로, 추천 마감일에 생존(生存)해 있어야 한다. 사회봉사상 부문은 한국을 위해 업적을 이룬 외국인도 자격이 있다.
업적의 기준은 창조정신과 봉사정신으로 국가 및 인류 발전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사람, 사회의 귀감(龜鑑)이 될 만한 사람, 공익(公益)에 공헌한 사람이다.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사회의 덕망가를 뽑는 상이 아니다. 추천인이 왜 이 사람을 추천하는지에 대한 업적증빙 자료를 첨부해야 한다. 과학·공학·의학상의 수상 후보자는 대표 논문 1편과 관련 논문 5편 이내, 예술·사회봉사상은 주요업적 증빙자료를 내야 한다. 추천인은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다.
호암재단 관계자는 “추천의뢰서 중 10~15% 정도가 회수된다. 분야별로 20명 정도가 추천된다”고 말했다. 누가 누구를 추천했는지는 비밀이다. 여러 명이 중복 추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작업은 매년 11월 30일까지 여섯 달 동안 계속된다.
재단이 이들 전문가에게 일임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재단은 그들대로 후보자를 물색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호암상 수상 후보자가 총 150여 명으로 선정된다.
매년 12월 1일이 되면, 수상 후보자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이 시작된다.
호암상위원회는 과학·공학·의학·예술·사회봉사 부문의 전문가를 선정해 심사위원으로 위촉한다. 심사위원은 매년 바뀐다. 호암재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초창기에는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사람 중에 거절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심사위원을 했다는 증명서를 떼 달라는 요청이 있을 정도다. 호암상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문별로 총 7~9명의 심사위원이 있고, 평균 나이는 50~ 55세다. 이들은 평균 세 번의 회의를 통해 수상 후보자에 대한 검증 작업을 한다. 회의가 5시간 이상씩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재단은 심사위원들이 공정한 심사에 임할 수 있도록, 후보자의 논문, 논문인용도 이외 필요한 모든 자료를 제공한다. 호암상위원회 위원들은 일절 이 과정에 관여하지 않는다. 심사위원들이 후보자에 대해 검증하는 데 넉 달이 더 걸린다.
한민구(韓民九)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의 얘기다.
“호암상이 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외부의 간섭이 일절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위촉된 심사위원 그룹의 전문성을 100% 활용합니다. 어떠한 외부의 압력이나 청탁이 없습니다. 학자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이 됐습니다. 불과 20여 년 만에 이런 권위를 갖게 됐다는 것은 국내 학계, 문화계의 큰 수확입니다.”
세계 최상급 수준의 업적 수두룩해
2010년 호암상 과학상 분야의 심사를 맡았던 이기명(李淇明)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의 얘기다.
“첫 모임에서 수상자 선발 기준에 대한 토의가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성과 공정성을 갖고 탁월한 업적을 이룬 학자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학문적 업적, 독창성, 창조성,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투표를 하는 방식이 아니라, 합리적인 논의를 통해서 수상자를 결정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전원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올해 과학상 후보자들의 일부 업적은 세계 최상급 수준이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각각 호암상을 수상할 정도의 충분한 업적이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이 그만큼 고민했고, 서로 고민과 논의를 수차례 거듭해서 결정했습니다.”
―심사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요.
“후보들의 지리적, 시간적인 배경이 서로 달랐습니다. 연령대도 넓게 분포돼 있었습니다. 주요 업적을 이룬 시기가 연구 경력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다양했습니다. 이런 후보자들의 업적에 대한 자료를 읽고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들 연구 업적의 독창성과 깊이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심오한 수학적 발견부터, 자연의 근본구조 이론 발견, 다양한 생명현상 연구 등이었습니다. 너무나 다른 분야의 업적을 비교 평가한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심사위원들끼리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의견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2010년 호암상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한홍택(韓弘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의 얘기다.
“모든 업적은 철저하게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바탕으로, 각 부문의 특성에 적합한 심사원칙을 설정해 후보자를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분야별 성격에 따라 정량(定量) 평가와 정성(定性) 평가를 종합해 적정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때 과학계의 핫이슈였던 A교수가 수상자 후보였던 적이 있다.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로 보자면, A교수가 충분히 수상자가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심사위원회 평가에서 탈락했다. 그의 업적이 아직 검증되지 않아, ‘모든 업적은 철저히 검증되어야 한다’는 대전제에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암상의 심사는 이 정도로 까다롭다.
해가 갈수록 수상자의 수준 향상
호암재단 측에 따르면, 심사위원단의 후보자 검증은 3월 말 즈음이 되면 거의 끝난다. 이들이 호암상위원회에 수상 후보자에 대해 제청을 한다. 위원회에서 심사위원의 제청을 거부한 적은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다.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얘기다.
호암재단은 매년 4월 첫 주, 수상자에게 통보를 한다. 대부분은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올해 과학상 수상자인 유룡 카이스트 특훈 교수의 얘기다.
“선정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상식이 열리는 때에 해외출장을 잡아 놨었거든요. 권위 있는 상이지만, 통상 재외 한국인 과학자가 수상을 했습니다. 이제 제 연구가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서구(李瑞九)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얘기도 비슷했다. 이 교수는 22년 동안 미국 국립보건원에 재직하면서, 세포신호전달체계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은 공로로 1995년 호암상 과학상을 수상했다.
이 교수는 “해가 갈수록 상을 받은 사람들의 과학적 연구업적이 좋아지고 있다. 과거에는 외국에서 연구하고 있는 한국계에게 상이 주어졌는데, 국내에 있는 학자들의 수상이 점점 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호암상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영예로운 상”이라고 덧붙였다.
2006년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은 윤기 공생복지재단 명예회장도 뜻밖이었다고 기억했다.
윤 명예회장의 얘기다.
“수상자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사회가 무관심한 듯 보이지만, 누군가가 지켜봐 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하게 일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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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시상식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이현재 이사장,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 이건희 설립자 내외와 수상자들. |
수상자들은 공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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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반테 린드퀴브스트 노벨박물관장과 함께한 이건희 설립자. |
호암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수상자가 시상식에 불참할 상황이어서 딱 한 번 수상 여부가 불투명했던 적이 있단다.
“학회와 시상식 일정이 겹친 겁니다. 본인이 수상할 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미리 잡은 것이죠. 수상자들이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참석을 할 수 있다고만 하면, 회사 전용기라도 띄울 생각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학회에서 호암상에 대해 알고 있어서 일정을 조정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시상식이 열리기 직전에 공항에 내려서 겨우 참석만 하고 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호암재단 측은 수상자들이 이후에 공개석상에서 강의를 해 줄 것을 요청한다. 업적을 쌓는 것 이상으로, 이를 사회에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지난 6월 11일 오후 4시, 이화여대 ECC 빌딩 146호에서는 올해 호암상을 수상한 유룡 박사의 강의가 열렸다. 기말고사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70여 명의 학생들이 속속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화여대 분자생명과학부 정다미(20세)씨는 강연 내내 메모를 열심히 했다고 했다. 그는 “특별강연이라 꼭 참석하지 않아도 됐지만, 호암상 수상자의 강연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고 오게 됐다. 유 박사가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연구과제에 도전하라고 말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이화여대 환경식품공학부 김정미(19세)씨는 “과거에 몇 차례 학술강의를 들었는데 자기 업적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넘어가서 서운한 적이 있었다. 이번 강의는 딱딱한 학술강의보다 자신의 삶과 철학, 그간의 노력이 담겨 있어서 좋았다. 앞으로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웃었다.
수상자 기준을 한국인 및 한국계로 규정하고 있다 보니, 호암상 수상을 통해 한국을 새롭게 인식하는 사람도 생겼다.
미국 럿거스대 정상욱 석좌교수는 2007년 호암상 과학상을 수상했다.
자주 인용된 논문 연구자 8명이 호암상 받아
정 교수는 “이전에는 한국과 협업(協業)을 하거나, 활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았다. 호암상을 받은 이후에 한국과 공동연구를 하게 됐고, 미국에서 배웠던 것을 한국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줬다”고 말했다.
2010년 호암상 의학상을 받은 윌리엄 한 미 하버드 의대 교수는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한 박사는 “나의 DNA 속에 한국이 있다는 것을 이번 수상을 통해 다시 깨달았다”고 했다.
올해 호암재단은 특별상으로 노벨재단을 선정했다. 20년 역사를 가진 곳이, 100년이 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주관하고 있는 곳에 특별상을 준 것이다. 호암상이 시상한 첫 번째 특별상으로, 설립자인 이건희 회장이 직접 시상해 눈길을 끌었다.
미카엘 술만 노벨재단 사무총장은 수상 소감에서 “호암상이 제정되고 발전된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결정”이었다며 “한국이 국제 과학계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데 한몫을 했다”고 말했다.
호암상은 최근 국제학계의 발표에 다시 한 번 그 권위를 인정받았다.
미 과학정보연구소(ISI)는 최근 ‘자주 인용된 논문 연구자(HCR)’ 5000명을 발표했다. 한국계 연구자는 13명이었다. 이 중 8명이 호암상 수상자였다.
홍완기(洪完基) 미 텍사스대 MD앤더슨암센터 부장(4회 의학상), 이서구 미 국립보건원 교수(5회 과학상), 한창대 미 애크런대 교수(6회 공학상), 최원규 미 워싱턴대(7회 의학상), 피터 김 미 머크연구소 연구원(8회 과학상), 김정빈 미 UCLA 교수(12회 공학상), 신강근 미 미시간대 교수(16회 공학상), 정상욱 미 럿거스대 교수(17회 과학상) 등이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호암상은 여태까지 총 101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국인 56명, 한국계 39명, 순수 외국인 6명 등이다. 과연 호암상 수상자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인터뷰] 이현재 호암재단 이사장 “노벨상을 넘어서는 세계의 권위 있는 상으로 키우고 싶다”
삼성과의 인연이 고작 이것뿐인 그는 초대 호암상 위원장을, 1997년부터 지금까지 호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과는 별도로 호암상을 사회적인 상, 또 국제적인 상으로 키우고 싶다는 열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상이 하나 있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상이란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심사과정이 투명하고, 다른 상에 모범이 되는 그런 상입니다. 우리의 정서에 맞춰 가장 한국적이지만 국제적인 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재단을 맡겠다고 했습니다.” ―20년 만에 권위를 인정받은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엄정한 심사과정을 제일로 꼽고 싶습니다. 사적으로 수상을 부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설립자인 이건희 회장이 전혀 관여를 하지 않는데 누가 어떤 청탁이나 부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심사위원들이 위촉되면, 첫 회의 때 이런 부탁을 합니다. ‘한국에 제대로 된 상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고향, 출신학교, 소속을 잊어 달라.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거기에 얽매일 경우 이 상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여러분이 저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모든 것을 심사위원 여러분께 일임하겠다. 선정이 끝나고 난 뒤, 저녁 한번 사겠다’고요. 정말 눈물로 호소를 합니다.(웃음) 올해 축하연장 옆자리에 앉은 이건희 회장에게 ‘행사가 어땠냐’고 물으니, “해가 갈수록 잘되는 느낌입니다”고 하더군요. 상당히 감동받았다는 얘기죠.” ―이사장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심사위원 선정이 중요합니다. 제대로 된 수상자를 뽑기 위해서는 그를 결정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위원회에서 수차례의 검토를 통해 결정합니다. 지금은 과학, 예술, 사회 봉사 분야를 수상하지만, 한국학을 연구하는 한국인, 외국인을 위한 부문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예술 부문은 규정이 애매모호하지 않습니까. “정량·정성 분석이 어렵고, 가령 음악과 미술 분야 중 어느 분야가 더 낫다고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최대한 다면적인 평가를 통해 수상자를 정합니다. 과학 분야의 표절 시비 논란도 늘 걱정거리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창조작업을 한 사람보다는, 충분히 검증된 사람에게 상을 주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이외에 소속, 수상자의 도덕성, 사회적 평판 등 다양한 것을 고려합니다.” ―호암상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이라면요. “상의 문화를 새롭게 정립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제가 학술원장을 할 때, 회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크게 사고(?)를 친 적이 있습니다. 학술원상을 주는데, 회원들이 후보를 내세우고, 또 심사하고, 상을 주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전부 했더라고요. 아주 오래전에야 학술원 회원 이외에 학자가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즘의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원은 학술원상의 추천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호암상은 삼성그룹의 지원으로 탄생했지만, 완벽하게 독립성을 갖고 운영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상의 새로운 문화를 정립했다고 봅니다. 시상식장의 꽃장식 하나, 진행자 선정, 팸플릿의 글자 하나하나까지 재단 사람들의 피땀이 어려 있습니다.” ―노벨상과 같은 세계적인 상이 될 수 있을까요. “노벨상은 주로 학술원에서 후보자를 검증해 상이 주어집니다. 종종 방문해 보면, 우리의 기준이 훨씬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인 또는 한국계 DNA를 가진 사람들에게 시상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벨상처럼 세계인을 대상으로 시상을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의 관심이 크고, 이 정도의 권위가 생겼기 때문에 시상을 중단할 수도 없습니다. 노벨상을 넘어서는 한국적인, 하지만 세계적인 상으로 키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
| ▣ 노벨상 vs. 일본 국제상 호암상은 노벨상, 일본 국제상과 교류를 통해 발전을 꾀하고 있다. 노벨상은 1895년, 알프레드 버나드 노벨의 유언으로 설립된 상으로 1901년 1회 시상을 했다. 물리학·화학·생리학·의학·문학·평화 부문이다. 물리학과 화학은 스웨덴 왕립학술원에서, 생리학과 의학은 스톡홀름 카로린스카 인스티튜트, 문학은 스톡홀름 한림원, 평화는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임한 5인의 위원회에서 선정한다. 이사장은 정부에 의해 선임되고 나머지는 시상 기관의 평의원들에 의해 선임된다. 임기는 2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노벨상금은 노벨재단 기금으로부터 나온 수익금으로 결정되고, 2009년을 기준으로 수상자들에게 상장과 순금메달, 약 1000만 크로네(약 16억원)의 상금을 지급한다. 노벨상은 1940~1942년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시상이 중단된 경우를 제외하고 총 99회 시상했다. 역대 수상자는 총 830명으로,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호암재단은 노벨재단과 1995년부터 교류를 쌓아 오고 있다. 호암재단과 노벨재단 노벨박물관은 2002년 ‘창조성의 문화’를 주제로 세계 순회 전시회를 공동으로 기획해, 삼성이 운영하는 로댕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일본 국제상은 일본 정부와 마쓰시타에서 함께 제정한 상이다. 일본 천황 부부가 시상식에 매년 참석해 권위가 높아졌다. 시상 부문은 과학기술 분야로, 2명을 선정한다. 1985년도에 처음 시상을 했고, 상금은 5000만 엔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