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落胎 통계는 2005년 자료 유일, 한 해 34만여 건 시술
⊙ 낙태 현장에 있던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근절 운동 주도
⊙ 1970년대 대한가족계획협회가 피임법으로 권장한 ‘월경 조정술’은 낙태였다
⊙ “낙태가 쉬우니까 피임에 신경 쓰지 않는다”(최안나 프로라이프 의사회 대변인)
⊙ 낙태하는 미혼모는 재임신 가능성 커
⊙ 원죄 의식으로 고통받는 낙태 여성들
취재지원 : 具希彦 月刊朝鮮 인턴기자
⊙ 낙태 현장에 있던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근절 운동 주도
⊙ 1970년대 대한가족계획협회가 피임법으로 권장한 ‘월경 조정술’은 낙태였다
⊙ “낙태가 쉬우니까 피임에 신경 쓰지 않는다”(최안나 프로라이프 의사회 대변인)
⊙ 낙태하는 미혼모는 재임신 가능성 커
⊙ 원죄 의식으로 고통받는 낙태 여성들
취재지원 : 具希彦 月刊朝鮮 인턴기자
- 젊은 산부인과 의사 600여 명이 가입한 프로라이프 의사회 회원과 종교인들이 2009년 11월 1일 서울 대한의협에서 낙태 근절 운동 선포식을 열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의사들은 ‘임신부 생명을 구하기 위한 임신 중절 이외의 모든 비의학적 목적의 낙태 시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불법 낙태(落胎) 시술과 관련, 의사(醫師)가 의사를 고발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불법 낙태 근절 운동을 펼치고 있는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지난 2월 3일 불법 낙태 시술을 하고 있는 산부인과 세 곳에 대한 고발장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접수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관계자는 “1월 1일부터 한 달 동안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 구조·제보센터(www.prolife-dr.org, 02-3143-3554)로 국민들이 접수해 온 병의원 중 사안이 심각하다고 판단된 산부인과가 고발 대상”이라고 밝혔다. 이 단체가 운영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10여 건의 제보 및 구조 요청 건이 올라와 있었다. 일반인에게 오픈되지 않는 제보 내용은 ‘임신 25주에 아기 아버지에 의해 낙태를 강요받고 있다’는 구조 요청에서부터 ‘조산원에서 미혼모 낙태 및 영아 살해가 이뤄지고 있다’는 제보까지 충격적이었다.
고발장 접수 직후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제보된 기관에 하루만 나가봐도 알 수 있는 무법천지(無法天地)의 실태를 주무 부서인 복지부가 모르고 방치하는 것인지 알고도 묵인하겠다는 것인지 이제는 국민 앞에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며 비판의 메스를 정부에 들이댔다.
낙태는 태아(胎兒)가 착상(着床)된 후 분만하기 전까지 발육 중인 상태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태아를 제거하는 시술이다. 보통 산부인과 병원에서는 인공임신중절이라고 부른다.
낙태 시술 한 해 34만여 건
대한민국에서 낙태는 두세 집만 조사해도 경험자가 한 명씩은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 된 지 오래다. 최근 들어 뜸해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낙태는 TV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였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에게 낙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거나 복수심을 불태우는 계기로 그려졌다.
낙태는 형법상 엄연한 불법이다. 형법 제27장에 낙태하는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269조), 이를 시술하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270조)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낙태가 공공연히 자행되어 온 것은 1973년 예외 규정으로 제정된 모자보건법 14조 때문이다. 이 법은 부모에게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 및 전염성 질환이 있을 때, 강간이나 근친상간(近親相姦)에 의한 임신일 때,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母體)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을 때는 낙태를 처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마지막 조항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해석하기 나름이어서 낙태를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해 왔다. 시술 의사가 산모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진단하면 낙태는 곧 합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법의 맹점 때문에 최근 5년 동안 낙태죄로 기소된 사례는 30여 건에 불과하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2005년에 3건, 2006년에 10건, 2007년에 7건, 2008년에 9건, 2009(8월까지)년에 3건이다.
낙태가 불법인 까닭에 우리나라에는 낙태 시술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다. 2005년 고려대 연구팀이 전국에 있는 일부 산부인과 병원을 대상으로 조사 집계한 수치가 유일한 통계로 공인받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산부인과 병원 201곳을 조사한 고려대 연구팀은 2005년 한 해 국내에서 행해진 낙태 시술이 34만여 건에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기준으로 “현재도 매일 평균 1000명에 가까운 태아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낙태죄로 기소된 사례가 1년에 10건이 안된다는 것은 “정부와 사법부, 의사 등이 자기 역할을 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낙태를 인정해 온 격”이라는 것이 낙태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알고도 눈 감는 ‘불편한 진실’
알고도 눈을 감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낙태가 최근 우리 사회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지난해 정부가 저(低)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불법 낙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선포하면서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 전체가 방관하고 묵인해 온 낙태 시술 근절에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데는 낙태 현장에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들의 양심선언이 도화선이 됐다.
2008년 12월 30~40대 젊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진오비’(gynecology obstetric의 앞부분 발췌·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의 모임)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기형적으로 흘러가는 산부인과 의료정책을 바로잡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이들은 “‘동생이 최고의 선물’이라며 출산 장려 운동을 벌이는 시대에도 한쪽에서는 임신한 여성들이 낙태를 위해 몰리는 불합리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면 현장에 있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며 산부인과 의사들을 상대로 낙태 근절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했다.
뜻있는 의사들이 이 캠페인에 하나둘 동참하면서 모임은 커졌고, 이들의 목소리가 저출산 문제로 고심 중인 정부를 움직였다. 이에 탄력을 받은 이들은 지난해 10월 “더 이상 불법적인 낙태 시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산부인과 전문의 중심이던 낙태 근절 캠페인을 범국민 운동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프로라이프(pro-life) 의사회’라는 단체를 12월에 공식 출범시켰다.
이 단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안나 아이온산부인과 원장은 “의사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한편, 일반인도 참여해 공론화하자는 취지에서 단체명을 ‘프로라이프 의사회’로 바꾸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낙태 현장에서 우리는 범죄자입니다. 어느 의사도 낙태하려고 산부인과를 택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낙태는 의사로서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낙태를 안 하면 병원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법대로 하자면 우리부터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선 것은 심각하게 훼손된 생명윤리 의식이나 생명경시 풍조를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일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낙태가 안 좋다고 하면서 막상 자신의 문제가 되면 태도를 달리하는 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어야 가능하죠.”
낙태 합법화 주장하는 사람들
현재 프로라이프 의사회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는 600여 명이다. 초대 회장을 맡고 있는 차희제(車熙濟) 하늘스포츠클리닉 과장은 “출범 초기에는 700명이 넘는 의사들이 동참 의사를 밝히고 가입했는데, 현실적으로 생계와 연계된 일이라 일부가 빠져나간 상태”라고 말했다.
정부가 낙태 시술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시점부터 산부인과 의사들 사이에는 찬반 논란이 일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회원들의 경우 “정부가 낙태 근절 의지를 보였다”며 환영했지만 그 외 의사들은 “낙태의 법적 규제 강화가 낙태를 줄이지 못한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장석일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은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국회 토론회 발제문에서 “저출산 극복 수단으로 낙태에 대한 법적 제재를 강화한다면 낙태 시술 비용은 위험부담금이 추가되어 비싸질 것이고, 돈 있는 사람은 낙태가 합법화된 나라로 가서 시술받고 오는 ‘해외 원정낙태’가 성행할 것이며, 그럴 수 없는 사람은 의사가 아닌 무자격자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비위생적 엉터리 시술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법으로 낙태를 완전히 허용하는 독일이나 네덜란드는 오히려 낙태율이 우리나라보다 낮다”며 낙태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여성의 신체 선택권을 우선시하는 관점에서 “임신을 원하지 않을 경우 임신 기간에 따라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낙태 외의 다른 대안을 최대한 권하는 상담절차를 의무화한다면 낙태율이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법 낙태 허용 여부에 대한 국민들의 입장은 어떨까. 최근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 사이에는 낙태 허용 반대 의견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대표 이택수)는 지난 2월 5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가구전화 자동응답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반대 의견이 53.1%, 찬성 의견이 33.6%, 무응답이 13.3%로 각각 집계됐다. 반대 의견은 남성(59.8%)이 여성(47.6%)보다 높은 반면 찬성 의견은 여성(37.4%)이 남성(29.7%)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가 한때 인구억제 위해 낙태 권장
한국은 ‘낙태 1위’ 국가이면서 동시에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입양아 수출 순위’(세계 5위)에 드는 국가다. 이 때문에 ‘낙태 공화국’과 ‘입양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에서 십수 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최안나 대변인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이를 세고, 태교와 태담을 중요하게 여길 만큼 태아의 인격을 존중했던 나라”라며 “그런 나라가 낙태 공화국이 된 것은 1970년대 정부가 낙태 허용 범위를 인구 억제 목적과 경제논리만으로 규정한 데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1970년대 초 정부는 4.54명에 달하는 높은 출산율을 낮추기 위해 보건복지부 산하 대한가족협회를 통해 ‘둘 낳기 운동’을 전개했다.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표어로 국민을 계도하는 한편 형법상 금지된 낙태 시술을 일부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했다. 그와 동시에 가족계획협회 전국 지부를 통해 국민들에게 ‘월경조정술’이라는 피임법을 권장했다. 월경조정술은 이름만 피임일 뿐 방법상 초기 낙태였다. 최안나 대변인의 설명이다.
“생리를 걸러 임신이 우려될 경우 자궁을 한 번 청소(긁어내는 것)해 주는 것이 당시의 월경조정술이었어요. 이 경우 임신이면 낙태이고, 임신이 아니면 자궁만 상할 뿐 필요 없는 시술이 되죠. 이걸 낙태라고 하면 국민들이 거부감을 가지니까 정부 기관이 월경조정술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권장한 겁니다. 이건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한 거나 다름없는 조치였어요.”
1977년 대한가족계획협회의 연보에 따르면 월경조정술은 정관수술보다 건수가 많았다.
정부의 인구 억제 정책은 1980년대 들어 ‘둘도 많다, 하나만 낳자’는 표어가 설명하듯 더욱 강력해졌다. 이러한 정부의 출산 억제 정책은 1990년대까지도 지속됐다. 그 결과 국민들 사이에서는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아이만, 그것도 성별을 골라 낳겠다는 의식이 팽배해져 낙태 시술이 무차별적으로 시행됐다. 이 때문에 1990년대부터는 심각한 성비 불균형 현상이 초래됐고 2000년대 들어서는 저출산 위기가 가속화됐다.
‘피임을 잘하면 되는데 왜 낙태를 할까’. 이 질문은 과거에 비해 피임법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품게 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한 최안나 대변인의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낙태가 쉬우니까 피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산부인과 병원은 산아 제한 정책으로 낙태가 절정을 이룬 1980년대와 90년대가 호황기였다. 서울 신촌의 한 산부인과 원장은 “이 무렵 낙태 시술로 돈을 벌어 소형 병원을 종합병원 수준의 대형 병원으로 성장시킨 곳도 있다”고 귀띔했다.
오전에 낙태, 오후에 분만
현재 낙태는 모자보건법에 따라 임신 24주 이내인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실질적으로 대부분 12주 이내에 행해지고 있으나 허용 범위가 아닌 정상 임신 상태에서 불법으로 시술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의학적으로 태아의 생존 능력이 인정되는 24주 이후에도 생명에 대한 윤리의식 없이 시술이 감행된다는 것이 문제다. 이는 엄연한 살인 행위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설사 12주 이내라 해도 자연유산이 아닌 경우 강제로 유산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산모(産母)의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궁 내막이나 골반에 염증이 생기고, 나팔관 폐쇄로 다음 임신이 안되는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
보통 임신 초기에는 일명 소파술이라고 해서 자궁 내벽을 긁어내는 방법으로 시술하고, 6개월이 지나면 자궁 수축제를 주사해 유도 분만하는 방식으로 사산(死産)시킨다. 이 경우 이미 몸체를 갖춘 태아의 사지(四肢)를 분해해 갈고리 같은 기구로 꺼낸다고 한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낙태 시술이 싫어 전직(轉職)한 한 여성은 “의사가 분해된 아기를 꺼내면, 자궁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태아의 팔과 다리 머리 등 사지를 되맞추는 일을 했는데,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데다 밤이면 그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분만과 낙태를 겸한 병원이라 바쁠 때는 오전에 낙태를 하고, 오후에는 분만을 하는 경우도 있어 괴로웠다”고도 했다. 그녀는 “사표를 쓰는 날 선배 간호사가 ‘자꾸 하다 보면 무감각해져서 괜찮으니까 좀 참아 보라’며 붙들었지만 도저히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낙태 시술 비용은 병원마다 다르나 임신 초기의 경우 보통 30만~40만원 선이고, 6개월 이상인 경우에는 100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대부분이 불법 시술이라 이 비용은 고스란히 병원의 수입이 된다. 또한 30분 안에 끝나는 일이라 수요만 있다면 하루에도 몇 건씩 시술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분만은 짧을 때는 몇 시간이지만 길어질 때는 2박3일씩 밤샘을 해야 하는 일인 데다 수가(酬價)가 낮아 수입이 적다. 출산율은 날로 줄고 있는데 24시간 문을 열어야 하고, 간호사를 여럿 고용해야 해 관리비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분만 중 아기가 숨지는 의료사고라도 발생하면 억 단위의 보상을 해야 하는 위험까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들이 분만을 접고 위험 부담이 적으면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낙태를 선호하게 된다고 한다.
현재 분만 수가는 29만(제왕절개)~30만원(자연분만)이다. 서울 시내 한 산부인과 원장은 “한 달 평균 분만 건수가 20건은 돼야 겨우 병원 유지가 되는데, 지난해부터 10건이 채 안돼 분만을 접고 피부 미용 등 여성 전문 병원으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현재 전국 201개 시·군 중 14개 지역에는 분만 병원이 없어서 임신부들이 진료를 위해 인근 도시를 오가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낙태는 산업
최근 몇 년 사이 산부인과 병원은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 현상을 보이고 있다. 낙태 수요가 일부 병원으로 집중되면서다. 이를 호기로 여겨 낙태 전문 병원을 표방, 인터넷에 ‘임신중절’ ‘낙태’ 등의 불법적 어휘 대신 ‘처녀 임신’ ‘미혼여성 임신 및 수술’ 등의 변칙적 키워드로 광고하는 곳이 많이 생겼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도 더욱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지난해 말 인터넷 홈페이지에 ‘낙태 구조 및 제보 센터’를 열고, 2010년부터는 낙태 시술 병원에 대한 본격적인 제보 접수 및 고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후 인터넷에 버젓이 등장했던 낙태 전문 병원들의 광고는 사라졌다.
지난 1월 초 기자가 인터넷 검색창에 ‘미혼여성 임신’과 ‘인공임신중절’이라고 치자 산부인과 사이트는 몇 개 없고, 한방병원 사이트들이 주루룩 검색됐다. 임신 중절 수술 후 생길 후유증을 한방으로 예방해 준다는 광고 문구가 즐비했다.
정부가 낙태 시술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 의지를 보였고, 같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고발하겠다고 선포한 이후에도 낙태 전문 병원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라는 얘기가 들렸다. 이들 병원이 실제로 낙태 시술을 하는지 확인하고자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20대 초반의 본지 인턴기자가 미혼모(未婚母)로 가장해 전화와 온라인 상담을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낙태 시술로 유명한 강남의 모(某) 산부인과는 “저희 병원에서는 중절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인터넷 사이트에 ‘미혼여성 임신 전문’이라는 광고 문구를 내건 산부인과는 “온라인 상담을 하더라도 다시 전화 상담을 하라”는 답글이 달렸다.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기자에게 사전 정보를 준 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문의했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근 불법 낙태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시술 의사들 사이에 ‘기자의 낚시질에 걸리지 말라’며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도 가짜가 있을 수 있으니 시술 상담을 의뢰하면 무조건 초음파 검사부터 하라’는 사발통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낙태 시술 병원에 가 보니
결국 전략을 바꿔 신촌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 몇 군데를 직접 방문해 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역시 인턴기자가 투입됐고, 의사가 초음파 검사부터 하자고 할 것에 대비해 미리 임신 6주 된 임신부의 초음파 사진을 한 장 구했다. 초음파 검사를 하자고 하면 ‘다른 병원에서 이미 초음파 검사는 했으니 시술을 해 달라’는 식으로 위기를 모면할 작전을 짠 것이다.
다음은 본지 인턴기자가 신촌에 있는 A 산부인과와 B 산부인과를 연달아 방문해 간호사와 주고받은 내용이다.
먼저 A 산부인과 간호사와 나눈 이야기다.
―임신 6주 진단을 받았는데 지울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저희 병원에서는 중절 시술을 하지 않습니다.”
―이 병원에서 시술받았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보고 찾아왔는데….
“저희 병원은 중절 시술을 한 일이 없고 요즘은 법이 더욱 강화돼서 중절 시술은 할 수조차 없습니다. 시술은 불가능하지만 미혼 여성의 임신과 태아를 위한 진료는 가능한데 원장님과 상담하시겠습니까?”
―그럼 혹시 시술이 가능한 다른 병원을 알려줄 수 없나요.
“저희는 잘 모릅니다.”
다음은 B 산부인과 간호사와 나눈 이야기다.
―임신 6주째인데 지우고 싶어요. 가능한가요.
“일단 저희 병원 선생님께서 초음파 검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초음파 검사는 며칠 전에 다른 병원에서 했는데 그 병원은 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그래도 저희 병원 의사 선생님이 검사를 한 후 상담을 하셔야 해요.”
A 산부인과와 달리 B 산부인과는 “시술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자는 최근 1, 2년 사이의 낙태 시술 사례를 알아보기 위해 두 명의 미혼모를 만났다. 이 중 한 명은 낙태 경험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낙태를 하려다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출산을 한 경우였다.
미혼모 시설 욕하는 의사
2006년 가을. 중학교 3학년인 김미나(가명·16)양은 생리가 끊겨 산부인과 병원을 찾았다가 임신 12주 진단을 받았다. 그 순간 김양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지만 곧 두려움이 밀려 왔다. 평소 딸을 문제아 취급 하던 아버지의 노기 띤 음성이 환청으로 들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김양은 우선 동갑내기 남자친구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남자친구는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무조건 “아기를 낳자”고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김양 역시 자신 안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김양은 임신 사실을 가족에게 철저히 함구한 채 몇 달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해진 김양은 인터넷에서 지역에 있는 미혼모 보호시설을 찾아냈고, 가출을 하듯 집에서 나와 그곳에 입주했다. 학교도 가지 않았다.
시설에 은거한 지 2주가 되자 딸의 가출을 아버지에게 숨기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어머니가 걱정됐다. 김양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고 불과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달려온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설을 나왔다. “낳아서 키우게 해줄 테니 우선 집으로 가자”며 설득한 어머니는 김양을 데리고 곧장 동네 산부인과로 갔다.
40대 초반의 남자의사는 초음파 검진 후 “어쩌자고 이렇게 늦게 왔느냐. 미혼모 시설 같은 곳은 없어져야 한다. 어린애들을 상대로 뭐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벌컥 화를 냈다. “이미 임신 6개월이 넘어 아기를 낳는 것과 똑같이 시술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김양은 어머니와 의사의 강압에 못 이겨 그날 임신 촉진제를 맞은 후 다음날 낙태(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했다. 이후 아기를 해친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빠졌고, 학교생활도 제대로 이어 가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어린아이를 안고 가는 여자를 보면 ‘내 아이도 저만할 텐데’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시설에 함께 있던 언니들은 사정도 모른 채 “아기는 낳아서 잘 키우느냐”며 안부 전화를 해 김양을 아프게 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러 고3이 된 김양은 또다시 임신 진단을 받았다. 이번에는 낳아야겠다는 생각에 어머니에게조차 비밀로 한 채 서울에 있는 미혼모 시설에 입주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김양은 현재 백일이 지난 아이와 함께 서울의 한 보호시설에 기거하고 있다. 그녀는 “아빠를 제외한 가족 모두 출산 사실을 알고 있고 아기를 예뻐한다”며 “남자친구와 상관없이 아이를 혼자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임신 6개월 수술은 부르는 게 값
2008년 겨울. 전북의 중소도시에 사는 이유미(가명·18)양은 속이 불편해 병원에 갔다가 임신 24주 진단을 받았다. 한 살 연상의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6개월 된 시점이었다. 이양은 평소 생리가 불순했고 별다른 증상이 없어서 단 한 번도 임신 가능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뜻밖의 ‘선고’에 구조 요청을 하듯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했지만 돌아온 건 “내 아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싸늘한 대답뿐이었다.
부모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인터넷에서 낙태 시술 관련 정보를 검색해 보니 9개월까지는 시술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었다. 이양은 우선 시술이 가능한 병원 세 군데의 위치를 확보한 후 임신이 정확히 언제 됐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 찾아간 곳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규모가 제법 큰 병원. 의사는 ‘언제쯤 임신이 된 것이냐’는 이양의 질문에 “당장 부모를 데려오라”고 화를 냈다. “아이를 지우고 싶다”는 말에는 “우리 병원은 시술하지 않는다”며 “임신 6개월은 시술이 어렵거니와 부르는 게 값이어서 기본이 200만원이고, 싸게 한다 해도 150만원”이라고 겁을 줬다.
고3인 이양에게 150만원은 큰돈이었다. 당장 구할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급한 마음에 이번에는 비용 문의를 할 요량으로 도시 변두리에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개월 수가 너무 많아 시술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어느덧 한 달이 훌쩍 지나갔고, 6개월 때까지만 해도 표가 안 나던 배가 서서히 불러 오기 시작했다. 이양이 세 번째 찾아간 병원은, 학교에 떠도는 소문에 선배 언니가 저렴하게 시술했다는 곳. 하지만 시술비는 만만치 않았고, 또 이미 7개월을 넘기고 있는 시점이라 차라리 출산하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었다.
임신 8개월째 보호시설을 찾은 이양은 2009년 4월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생후 9개월이 된 아기와 함께 보호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다니던 학교를 중퇴한 이양은 이곳에서 생활하며 2년 과정의 고교학력 인정 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양은 “학교 졸업 후 간호 조무사로 취업해 아기를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철없는 아이도 모성본능 강해
김양과 이양이 머물고 있는 시설은 한 기독교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사회복지 시설이다. 이곳은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 미혼 여성들을 보호하고 출산 후 자립할 때까지 지원하고 있다. 이런 미혼모 보호시설은 전국에 50여 군데가 있다. 김양이 머물고 있는 보호시설에는 현재 39명의 미혼모가, 이양이 머물고 있는 시설에는 14명의 미혼모가 아기와 함께 자립을 준비하고 있다.
김양이 머물고 있는 시설의 원장은 “이곳을 거쳐 가는 미혼모들의 연령 분포는 10대가 30%, 20대가 50~60%, 30대 이후가 10%”라며 “10대나 20대의 경우 부모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설사 이곳에 있더라도 끌고 나가 강제로 낙태 시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이다.
“10대 미혼모의 70%는 중·고교 중퇴 학력자들이에요. 또 이들의 82%는 부모가 알코올중독 같은 중증 질환자이거나 이혼과 폭력 등으로 가정이 깨진 경우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가치관이 형성돼 있지 않아요. 그런데도 아기를 낳겠다고 스스로 보호시설을 찾아오는 건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본능 때문이죠. 저는 이곳에 들어와 아기를 낳은 미혼모들이 후회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10대 미혼모가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오히려 상처를 치유해 가죠.”
부모 손에 이끌려 강제로 시술을 받은 10대들은 재임신으로 다시 보호시설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담을 통해 재임신 경로를 분석해 본 결과 ‘나는 내 부모보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더 나쁜 부모가 됐다. 나쁜 엄마니까 행복해서는 안된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원장은 “재임신해서 들어오는 여성들의 상태는 그나마 남아 있던 꿈마저 상실해 황폐화되어 있게 마련”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10대 미혼모 부모 중에는 저희에게 전화해서 ‘당신 딸이라면 낳게 하겠느냐. 당장 수술시켜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호통치는 분들이 많아요. 철없는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생긴 아이이고, 사회가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낳아서 어쩌자는 것이냐는 거죠. 그럴 땐 저희도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에 철없고 문제 많은 자식이라 해도 일단 임신하게 되면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모성 본능이 강하게 발동해요. 이들을 비정한 엄마로 만들고, 평생 자식을 떠나보냈다는 죄의식에 갇혀 살도록 유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들이죠.”
낙태 치유 프로그램
여성에게 낙태는 가슴에 찍힌 화인(火印)과 같은 트라우마다. 세월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가벼운 상처가 아니라는 얘기다. 가톨릭 서울대교구 가정사목회는 2003년부터 매월 둘째 주에 낙태 여성을 위한 미사를 열고 있다.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낙태 여성의 고통과 괴로움을 서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상처를 아물게 하는 일종의 치유 프로그램이다.
미사는 낙태 여성 10여 명이 그리 크지 않은 방에 빙 둘러앉아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죄 없이 떠나보낸 아기에게 용서의 편지를 쓰고 불에 태우며 마지막에 평화의 기도를 하는 순서로 거행된다.
프로그램 도입 초기부터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는 이숙희(李淑姬)씨는 “낙태 후 평생 죄의식에 시달려 온 여성들이 고백성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도 멍에를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신부님들이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7년여 동안 1000명에 가까운 낙태 여성들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주로 40대 이후 여성들이 참여하는데, 그 이유는 “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40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씨에 따르면 프로그램 도입 초기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 할머니들은 산아제한 정책이 한창이던 1970년대 낙태를 한 여성들이며, 자신의 낙태 건수만큼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씨는 “5회 6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참여한 할머니도 많았다”고 말했다.
“2003년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였어요. 그래서인지 아들이 사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에서 조기퇴직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분들은 아들의 사업 실패는 물론 며느리의 불임 등 가족의 불행은 모두 당신들이 젊었을 때 낙태를 많이 한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어요.”
반면 젊은 여성들은 가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원망이 많고, 사랑이 부족해 가족들이 자신을 방치했다는 피해 의식이 컸다. 심지어 자신이 힘들 때 교회는 뭐 했고, 하느님은 왜 나를 지켜주지 않았느냐고 원망하는 이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특이하게도 산전 진단(초음파 검사)으로 태아나 기형아일 확률이 높다는 진단을 받고 낙태한 경우가 많았다. 이씨는 “한국은 산전 진단을 쓸데없이 많이 해 낙태를 부추긴다”고 말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낙태 여성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혹독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삶이 긍정적이지 않은데, 이는 가정의 불화를 초래하는 요소가 된다.
낙태 근절해야 분만 수가 올라
낙태 후유증은 시술받은 여성뿐만 아니라 시술한 의사에게도 있고 오래간다. 차희제 프로라이프 의사회 회장은 낙태 시술이 싫어서 진료 과목을 산부인과에서 스포츠클리닉으로 바꾼 경우다. 경희대 의대 출신인 차회장은 30만, 40만원의 월급을 받던 레지던트 시절 아르바이트로 산부인과 병원 당직을 서며 낙태 시술을 한 이후 그쪽과는 담을 쌓았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듯한 태아를 강제로 꺼내는 일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내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군복무를 마친 후 그는 1992년부터 94년까지 성남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에서 부원장으로 근무했다. 산부인과 병원으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던 이 병원은 낙태 전담 여의사를 두고 한 달에 200~300건씩 시술을 했다. 덕분에 그는 낙태 시술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얼굴빛이 늘 어둡고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그 여의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수원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에 근무할 때도 용케 낙태 시술은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동료 의사 셋이 동업으로 병원을 개업하면서 생겼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분만만 하면 운영을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어서 낙태 시술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내에게 딱 1년만 하겠다고 동의를 구했으나 그의 아내는 낙태 시술을 할 거면 차라리 의사 생활을 그만두라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 일로 9개월 동안 하루도 편할 날 없이 다투기만 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다.
“아내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낙태 시술을 안 하는 대신 환자를 두 배 세 배로 보겠다는 조건으로 다른 두 동업의와 함께 병원을 개업하게 됐죠. 이후 5년 동안은 별 잡음 없이 잘 운영해 갔는데, 어느 날 셋이서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동업의 하나가 제게 ‘차 원장은 손이 고무손입니까?’라며 시비를 걸더군요. ‘누구는 낙태 시술을 하고 싶어 하는 거냐’며 그동안 쌓인 불만을 쏟아 놓는 거였습니다. 고성(高聲)이 오가고 결국 치고받고 한 끝에 동업 관계를 깨고 말았죠.”
산부인과 전문의로서의 생활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막대한 손해를 안고 병원을 그만둔 그는 대기업 주치의로 일하다 지금은 퇴행성 관절염, 골다공증, 노화방지 등을 진료하는 스포츠클리닉 의사로 살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생명운동을 펼친 것이 인연이 돼 프로라이프 의사회 초대 회장을 맡게 됐다. 그는 “낙태 근절 운동은 결과적으로 분만 수가를 올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비현실적인 분만 수가를 올려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정부는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너희는 불법 낙태로 돈 벌지 않느냐. 다 알면서 눈감아 주고 있으니 엉뚱한 소리 마라’는 식으로 콧방귀도 안 뀌었어요. 낙태가 산부인과 의사들의 목을 겨누는 칼날이 돼 있는 상황이죠. 분만 수가를 당당하고 떳떳하게 요구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낙태 시술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발장 접수 직후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제보된 기관에 하루만 나가봐도 알 수 있는 무법천지(無法天地)의 실태를 주무 부서인 복지부가 모르고 방치하는 것인지 알고도 묵인하겠다는 것인지 이제는 국민 앞에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며 비판의 메스를 정부에 들이댔다.
낙태는 태아(胎兒)가 착상(着床)된 후 분만하기 전까지 발육 중인 상태에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태아를 제거하는 시술이다. 보통 산부인과 병원에서는 인공임신중절이라고 부른다.
낙태 시술 한 해 34만여 건
대한민국에서 낙태는 두세 집만 조사해도 경험자가 한 명씩은 있을 정도로 흔한 일이 된 지 오래다. 최근 들어 뜸해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낙태는 TV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였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에게 낙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거나 복수심을 불태우는 계기로 그려졌다.
낙태는 형법상 엄연한 불법이다. 형법 제27장에 낙태하는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269조), 이를 시술하는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270조)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낙태가 공공연히 자행되어 온 것은 1973년 예외 규정으로 제정된 모자보건법 14조 때문이다. 이 법은 부모에게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 및 전염성 질환이 있을 때, 강간이나 근친상간(近親相姦)에 의한 임신일 때,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母體)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을 때는 낙태를 처벌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마지막 조항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해석하기 나름이어서 낙태를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해 왔다. 시술 의사가 산모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다고 진단하면 낙태는 곧 합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법의 맹점 때문에 최근 5년 동안 낙태죄로 기소된 사례는 30여 건에 불과하다. 대검찰청 자료에 따르면 2005년에 3건, 2006년에 10건, 2007년에 7건, 2008년에 9건, 2009(8월까지)년에 3건이다.
낙태가 불법인 까닭에 우리나라에는 낙태 시술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없다. 2005년 고려대 연구팀이 전국에 있는 일부 산부인과 병원을 대상으로 조사 집계한 수치가 유일한 통계로 공인받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산부인과 병원 201곳을 조사한 고려대 연구팀은 2005년 한 해 국내에서 행해진 낙태 시술이 34만여 건에 이른 것으로 추정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기준으로 “현재도 매일 평균 1000명에 가까운 태아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낙태죄로 기소된 사례가 1년에 10건이 안된다는 것은 “정부와 사법부, 의사 등이 자기 역할을 하지 않고 암묵적으로 낙태를 인정해 온 격”이라는 것이 낙태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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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40일 된 태아의 모습. 24주 된 태아의 모습. 36주 된 태아의 모습. |
알고도 눈 감는 ‘불편한 진실’
알고도 눈을 감아야 하는 ‘불편한 진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낙태가 최근 우리 사회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지난해 정부가 저(低)출산 대책의 일환으로 불법 낙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선포하면서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 전체가 방관하고 묵인해 온 낙태 시술 근절에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데는 낙태 현장에 있는 산부인과 전문의들의 양심선언이 도화선이 됐다.
2008년 12월 30~40대 젊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진오비’(gynecology obstetric의 앞부분 발췌·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의 모임)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기형적으로 흘러가는 산부인과 의료정책을 바로잡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이들은 “‘동생이 최고의 선물’이라며 출산 장려 운동을 벌이는 시대에도 한쪽에서는 임신한 여성들이 낙태를 위해 몰리는 불합리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면 현장에 있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며 산부인과 의사들을 상대로 낙태 근절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했다.
뜻있는 의사들이 이 캠페인에 하나둘 동참하면서 모임은 커졌고, 이들의 목소리가 저출산 문제로 고심 중인 정부를 움직였다. 이에 탄력을 받은 이들은 지난해 10월 “더 이상 불법적인 낙태 시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산부인과 전문의 중심이던 낙태 근절 캠페인을 범국민 운동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프로라이프(pro-life) 의사회’라는 단체를 12월에 공식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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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안나 프로라이프 의사회 대변인. |
“낙태 현장에서 우리는 범죄자입니다. 어느 의사도 낙태하려고 산부인과를 택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낙태는 의사로서 자기를 부정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낙태를 안 하면 병원 운영이 어려워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법대로 하자면 우리부터 처벌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선 것은 심각하게 훼손된 생명윤리 의식이나 생명경시 풍조를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였죠. 이 일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낙태가 안 좋다고 하면서 막상 자신의 문제가 되면 태도를 달리하는 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어야 가능하죠.”
낙태 합법화 주장하는 사람들
현재 프로라이프 의사회 소속 산부인과 전문의는 600여 명이다. 초대 회장을 맡고 있는 차희제(車熙濟) 하늘스포츠클리닉 과장은 “출범 초기에는 700명이 넘는 의사들이 동참 의사를 밝히고 가입했는데, 현실적으로 생계와 연계된 일이라 일부가 빠져나간 상태”라고 말했다.
정부가 낙태 시술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시점부터 산부인과 의사들 사이에는 찬반 논란이 일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회원들의 경우 “정부가 낙태 근절 의지를 보였다”며 환영했지만 그 외 의사들은 “낙태의 법적 규제 강화가 낙태를 줄이지 못한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장석일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은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국회 토론회 발제문에서 “저출산 극복 수단으로 낙태에 대한 법적 제재를 강화한다면 낙태 시술 비용은 위험부담금이 추가되어 비싸질 것이고, 돈 있는 사람은 낙태가 합법화된 나라로 가서 시술받고 오는 ‘해외 원정낙태’가 성행할 것이며, 그럴 수 없는 사람은 의사가 아닌 무자격자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비위생적 엉터리 시술을 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법으로 낙태를 완전히 허용하는 독일이나 네덜란드는 오히려 낙태율이 우리나라보다 낮다”며 낙태의 합법화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대체로 여성의 신체 선택권을 우선시하는 관점에서 “임신을 원하지 않을 경우 임신 기간에 따라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하고, 낙태 외의 다른 대안을 최대한 권하는 상담절차를 의무화한다면 낙태율이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법 낙태 허용 여부에 대한 국민들의 입장은 어떨까. 최근 한 여론조사 전문기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 사이에는 낙태 허용 반대 의견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대표 이택수)는 지난 2월 5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가구전화 자동응답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반대 의견이 53.1%, 찬성 의견이 33.6%, 무응답이 13.3%로 각각 집계됐다. 반대 의견은 남성(59.8%)이 여성(47.6%)보다 높은 반면 찬성 의견은 여성(37.4%)이 남성(29.7%)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정부가 한때 인구억제 위해 낙태 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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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보건사회부가 제작 배포한 가족계획 포스터. |
최안나 대변인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이를 세고, 태교와 태담을 중요하게 여길 만큼 태아의 인격을 존중했던 나라”라며 “그런 나라가 낙태 공화국이 된 것은 1970년대 정부가 낙태 허용 범위를 인구 억제 목적과 경제논리만으로 규정한 데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1970년대 초 정부는 4.54명에 달하는 높은 출산율을 낮추기 위해 보건복지부 산하 대한가족협회를 통해 ‘둘 낳기 운동’을 전개했다.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표어로 국민을 계도하는 한편 형법상 금지된 낙태 시술을 일부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했다. 그와 동시에 가족계획협회 전국 지부를 통해 국민들에게 ‘월경조정술’이라는 피임법을 권장했다. 월경조정술은 이름만 피임일 뿐 방법상 초기 낙태였다. 최안나 대변인의 설명이다.
“생리를 걸러 임신이 우려될 경우 자궁을 한 번 청소(긁어내는 것)해 주는 것이 당시의 월경조정술이었어요. 이 경우 임신이면 낙태이고, 임신이 아니면 자궁만 상할 뿐 필요 없는 시술이 되죠. 이걸 낙태라고 하면 국민들이 거부감을 가지니까 정부 기관이 월경조정술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에게 권장한 겁니다. 이건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한 거나 다름없는 조치였어요.”
1977년 대한가족계획협회의 연보에 따르면 월경조정술은 정관수술보다 건수가 많았다.
정부의 인구 억제 정책은 1980년대 들어 ‘둘도 많다, 하나만 낳자’는 표어가 설명하듯 더욱 강력해졌다. 이러한 정부의 출산 억제 정책은 1990년대까지도 지속됐다. 그 결과 국민들 사이에서는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아이만, 그것도 성별을 골라 낳겠다는 의식이 팽배해져 낙태 시술이 무차별적으로 시행됐다. 이 때문에 1990년대부터는 심각한 성비 불균형 현상이 초래됐고 2000년대 들어서는 저출산 위기가 가속화됐다.
‘피임을 잘하면 되는데 왜 낙태를 할까’. 이 질문은 과거에 비해 피임법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품게 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한 최안나 대변인의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낙태가 쉬우니까 피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산부인과 병원은 산아 제한 정책으로 낙태가 절정을 이룬 1980년대와 90년대가 호황기였다. 서울 신촌의 한 산부인과 원장은 “이 무렵 낙태 시술로 돈을 벌어 소형 병원을 종합병원 수준의 대형 병원으로 성장시킨 곳도 있다”고 귀띔했다.
오전에 낙태, 오후에 분만
현재 낙태는 모자보건법에 따라 임신 24주 이내인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실질적으로 대부분 12주 이내에 행해지고 있으나 허용 범위가 아닌 정상 임신 상태에서 불법으로 시술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의학적으로 태아의 생존 능력이 인정되는 24주 이후에도 생명에 대한 윤리의식 없이 시술이 감행된다는 것이 문제다. 이는 엄연한 살인 행위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설사 12주 이내라 해도 자연유산이 아닌 경우 강제로 유산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산모(産母)의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궁 내막이나 골반에 염증이 생기고, 나팔관 폐쇄로 다음 임신이 안되는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
보통 임신 초기에는 일명 소파술이라고 해서 자궁 내벽을 긁어내는 방법으로 시술하고, 6개월이 지나면 자궁 수축제를 주사해 유도 분만하는 방식으로 사산(死産)시킨다. 이 경우 이미 몸체를 갖춘 태아의 사지(四肢)를 분해해 갈고리 같은 기구로 꺼낸다고 한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낙태 시술이 싫어 전직(轉職)한 한 여성은 “의사가 분해된 아기를 꺼내면, 자궁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태아의 팔과 다리 머리 등 사지를 되맞추는 일을 했는데,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데다 밤이면 그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분만과 낙태를 겸한 병원이라 바쁠 때는 오전에 낙태를 하고, 오후에는 분만을 하는 경우도 있어 괴로웠다”고도 했다. 그녀는 “사표를 쓰는 날 선배 간호사가 ‘자꾸 하다 보면 무감각해져서 괜찮으니까 좀 참아 보라’며 붙들었지만 도저히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낙태 시술 비용은 병원마다 다르나 임신 초기의 경우 보통 30만~40만원 선이고, 6개월 이상인 경우에는 100만원을 훌쩍 넘어선다. 대부분이 불법 시술이라 이 비용은 고스란히 병원의 수입이 된다. 또한 30분 안에 끝나는 일이라 수요만 있다면 하루에도 몇 건씩 시술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분만은 짧을 때는 몇 시간이지만 길어질 때는 2박3일씩 밤샘을 해야 하는 일인 데다 수가(酬價)가 낮아 수입이 적다. 출산율은 날로 줄고 있는데 24시간 문을 열어야 하고, 간호사를 여럿 고용해야 해 관리비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분만 중 아기가 숨지는 의료사고라도 발생하면 억 단위의 보상을 해야 하는 위험까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들이 분만을 접고 위험 부담이 적으면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낙태를 선호하게 된다고 한다.
현재 분만 수가는 29만(제왕절개)~30만원(자연분만)이다. 서울 시내 한 산부인과 원장은 “한 달 평균 분만 건수가 20건은 돼야 겨우 병원 유지가 되는데, 지난해부터 10건이 채 안돼 분만을 접고 피부 미용 등 여성 전문 병원으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현재 전국 201개 시·군 중 14개 지역에는 분만 병원이 없어서 임신부들이 진료를 위해 인근 도시를 오가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낙태는 산업
최근 몇 년 사이 산부인과 병원은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 현상을 보이고 있다. 낙태 수요가 일부 병원으로 집중되면서다. 이를 호기로 여겨 낙태 전문 병원을 표방, 인터넷에 ‘임신중절’ ‘낙태’ 등의 불법적 어휘 대신 ‘처녀 임신’ ‘미혼여성 임신 및 수술’ 등의 변칙적 키워드로 광고하는 곳이 많이 생겼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도 더욱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지난해 말 인터넷 홈페이지에 ‘낙태 구조 및 제보 센터’를 열고, 2010년부터는 낙태 시술 병원에 대한 본격적인 제보 접수 및 고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후 인터넷에 버젓이 등장했던 낙태 전문 병원들의 광고는 사라졌다.
지난 1월 초 기자가 인터넷 검색창에 ‘미혼여성 임신’과 ‘인공임신중절’이라고 치자 산부인과 사이트는 몇 개 없고, 한방병원 사이트들이 주루룩 검색됐다. 임신 중절 수술 후 생길 후유증을 한방으로 예방해 준다는 광고 문구가 즐비했다.
정부가 낙태 시술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 의지를 보였고, 같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고발하겠다고 선포한 이후에도 낙태 전문 병원들은 여전히 성업 중이라는 얘기가 들렸다. 이들 병원이 실제로 낙태 시술을 하는지 확인하고자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20대 초반의 본지 인턴기자가 미혼모(未婚母)로 가장해 전화와 온라인 상담을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낙태 시술로 유명한 강남의 모(某) 산부인과는 “저희 병원에서는 중절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인터넷 사이트에 ‘미혼여성 임신 전문’이라는 광고 문구를 내건 산부인과는 “온라인 상담을 하더라도 다시 전화 상담을 하라”는 답글이 달렸다.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기자에게 사전 정보를 준 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문의했더니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최근 불법 낙태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시술 의사들 사이에 ‘기자의 낚시질에 걸리지 말라’며 ‘병원을 찾는 환자 중에도 가짜가 있을 수 있으니 시술 상담을 의뢰하면 무조건 초음파 검사부터 하라’는 사발통문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낙태 시술 병원에 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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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혼모들이 출산,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 아기들. 이중 많은 수가 해외로 입양된다. |
다음은 본지 인턴기자가 신촌에 있는 A 산부인과와 B 산부인과를 연달아 방문해 간호사와 주고받은 내용이다.
먼저 A 산부인과 간호사와 나눈 이야기다.
―임신 6주 진단을 받았는데 지울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저희 병원에서는 중절 시술을 하지 않습니다.”
―이 병원에서 시술받았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보고 찾아왔는데….
“저희 병원은 중절 시술을 한 일이 없고 요즘은 법이 더욱 강화돼서 중절 시술은 할 수조차 없습니다. 시술은 불가능하지만 미혼 여성의 임신과 태아를 위한 진료는 가능한데 원장님과 상담하시겠습니까?”
―그럼 혹시 시술이 가능한 다른 병원을 알려줄 수 없나요.
“저희는 잘 모릅니다.”
다음은 B 산부인과 간호사와 나눈 이야기다.
―임신 6주째인데 지우고 싶어요. 가능한가요.
“일단 저희 병원 선생님께서 초음파 검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초음파 검사는 며칠 전에 다른 병원에서 했는데 그 병원은 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그래도 저희 병원 의사 선생님이 검사를 한 후 상담을 하셔야 해요.”
A 산부인과와 달리 B 산부인과는 “시술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자는 최근 1, 2년 사이의 낙태 시술 사례를 알아보기 위해 두 명의 미혼모를 만났다. 이 중 한 명은 낙태 경험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낙태를 하려다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출산을 한 경우였다.
미혼모 시설 욕하는 의사
2006년 가을. 중학교 3학년인 김미나(가명·16)양은 생리가 끊겨 산부인과 병원을 찾았다가 임신 12주 진단을 받았다. 그 순간 김양의 머릿속은 하얘졌다.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지만 곧 두려움이 밀려 왔다. 평소 딸을 문제아 취급 하던 아버지의 노기 띤 음성이 환청으로 들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김양은 우선 동갑내기 남자친구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남자친구는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무조건 “아기를 낳자”고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김양 역시 자신 안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김양은 임신 사실을 가족에게 철저히 함구한 채 몇 달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배가 점점 불러 오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해진 김양은 인터넷에서 지역에 있는 미혼모 보호시설을 찾아냈고, 가출을 하듯 집에서 나와 그곳에 입주했다. 학교도 가지 않았다.
시설에 은거한 지 2주가 되자 딸의 가출을 아버지에게 숨기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어머니가 걱정됐다. 김양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고 불과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달려온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시설을 나왔다. “낳아서 키우게 해줄 테니 우선 집으로 가자”며 설득한 어머니는 김양을 데리고 곧장 동네 산부인과로 갔다.
40대 초반의 남자의사는 초음파 검진 후 “어쩌자고 이렇게 늦게 왔느냐. 미혼모 시설 같은 곳은 없어져야 한다. 어린애들을 상대로 뭐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벌컥 화를 냈다. “이미 임신 6개월이 넘어 아기를 낳는 것과 똑같이 시술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김양은 어머니와 의사의 강압에 못 이겨 그날 임신 촉진제를 맞은 후 다음날 낙태(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했다. 이후 아기를 해친 죄책감으로 우울증에 빠졌고, 학교생활도 제대로 이어 가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어린아이를 안고 가는 여자를 보면 ‘내 아이도 저만할 텐데’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시설에 함께 있던 언니들은 사정도 모른 채 “아기는 낳아서 잘 키우느냐”며 안부 전화를 해 김양을 아프게 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러 고3이 된 김양은 또다시 임신 진단을 받았다. 이번에는 낳아야겠다는 생각에 어머니에게조차 비밀로 한 채 서울에 있는 미혼모 시설에 입주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김양은 현재 백일이 지난 아이와 함께 서울의 한 보호시설에 기거하고 있다. 그녀는 “아빠를 제외한 가족 모두 출산 사실을 알고 있고 아기를 예뻐한다”며 “남자친구와 상관없이 아이를 혼자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임신 6개월 수술은 부르는 게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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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들이 서울 대학로에서 태아의 사진을 들고 낙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낙태 근절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번질 태세다. |
2008년 겨울. 전북의 중소도시에 사는 이유미(가명·18)양은 속이 불편해 병원에 갔다가 임신 24주 진단을 받았다. 한 살 연상의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6개월 된 시점이었다. 이양은 평소 생리가 불순했고 별다른 증상이 없어서 단 한 번도 임신 가능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뜻밖의 ‘선고’에 구조 요청을 하듯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전화했지만 돌아온 건 “내 아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싸늘한 대답뿐이었다.
부모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인터넷에서 낙태 시술 관련 정보를 검색해 보니 9개월까지는 시술이 가능하다고 나와 있었다. 이양은 우선 시술이 가능한 병원 세 군데의 위치를 확보한 후 임신이 정확히 언제 됐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 찾아간 곳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규모가 제법 큰 병원. 의사는 ‘언제쯤 임신이 된 것이냐’는 이양의 질문에 “당장 부모를 데려오라”고 화를 냈다. “아이를 지우고 싶다”는 말에는 “우리 병원은 시술하지 않는다”며 “임신 6개월은 시술이 어렵거니와 부르는 게 값이어서 기본이 200만원이고, 싸게 한다 해도 150만원”이라고 겁을 줬다.
고3인 이양에게 150만원은 큰돈이었다. 당장 구할 길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급한 마음에 이번에는 비용 문의를 할 요량으로 도시 변두리에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의사는 “개월 수가 너무 많아 시술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두 병원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어느덧 한 달이 훌쩍 지나갔고, 6개월 때까지만 해도 표가 안 나던 배가 서서히 불러 오기 시작했다. 이양이 세 번째 찾아간 병원은, 학교에 떠도는 소문에 선배 언니가 저렴하게 시술했다는 곳. 하지만 시술비는 만만치 않았고, 또 이미 7개월을 넘기고 있는 시점이라 차라리 출산하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었다.
임신 8개월째 보호시설을 찾은 이양은 2009년 4월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생후 9개월이 된 아기와 함께 보호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다니던 학교를 중퇴한 이양은 이곳에서 생활하며 2년 과정의 고교학력 인정 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양은 “학교 졸업 후 간호 조무사로 취업해 아기를 키울 것”이라고 말했다.
철없는 아이도 모성본능 강해
김양과 이양이 머물고 있는 시설은 한 기독교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사회복지 시설이다. 이곳은 아기를 낳기로 결심한 미혼 여성들을 보호하고 출산 후 자립할 때까지 지원하고 있다. 이런 미혼모 보호시설은 전국에 50여 군데가 있다. 김양이 머물고 있는 보호시설에는 현재 39명의 미혼모가, 이양이 머물고 있는 시설에는 14명의 미혼모가 아기와 함께 자립을 준비하고 있다.
김양이 머물고 있는 시설의 원장은 “이곳을 거쳐 가는 미혼모들의 연령 분포는 10대가 30%, 20대가 50~60%, 30대 이후가 10%”라며 “10대나 20대의 경우 부모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설사 이곳에 있더라도 끌고 나가 강제로 낙태 시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이다.
“10대 미혼모의 70%는 중·고교 중퇴 학력자들이에요. 또 이들의 82%는 부모가 알코올중독 같은 중증 질환자이거나 이혼과 폭력 등으로 가정이 깨진 경우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라는 가치관이 형성돼 있지 않아요. 그런데도 아기를 낳겠다고 스스로 보호시설을 찾아오는 건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본능 때문이죠. 저는 이곳에 들어와 아기를 낳은 미혼모들이 후회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많은 10대 미혼모가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 오히려 상처를 치유해 가죠.”
부모 손에 이끌려 강제로 시술을 받은 10대들은 재임신으로 다시 보호시설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상담을 통해 재임신 경로를 분석해 본 결과 ‘나는 내 부모보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는데 더 나쁜 부모가 됐다. 나쁜 엄마니까 행복해서는 안된다’는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원장은 “재임신해서 들어오는 여성들의 상태는 그나마 남아 있던 꿈마저 상실해 황폐화되어 있게 마련”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10대 미혼모 부모 중에는 저희에게 전화해서 ‘당신 딸이라면 낳게 하겠느냐. 당장 수술시켜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호통치는 분들이 많아요. 철없는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생긴 아이이고, 사회가 책임져 줄 것도 아닌데 낳아서 어쩌자는 것이냐는 거죠. 그럴 땐 저희도 딱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보기에 철없고 문제 많은 자식이라 해도 일단 임신하게 되면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모성 본능이 강하게 발동해요. 이들을 비정한 엄마로 만들고, 평생 자식을 떠나보냈다는 죄의식에 갇혀 살도록 유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들이죠.”
낙태 치유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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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교구 가정사목회에서 낙태 여성들을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자원봉사자 이숙희씨. |
미사는 낙태 여성 10여 명이 그리 크지 않은 방에 빙 둘러앉아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죄 없이 떠나보낸 아기에게 용서의 편지를 쓰고 불에 태우며 마지막에 평화의 기도를 하는 순서로 거행된다.
프로그램 도입 초기부터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는 이숙희(李淑姬)씨는 “낙태 후 평생 죄의식에 시달려 온 여성들이 고백성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도 멍에를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신부님들이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7년여 동안 1000명에 가까운 낙태 여성들이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주로 40대 이후 여성들이 참여하는데, 그 이유는 “여자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40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씨에 따르면 프로그램 도입 초기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참석했다고 한다. 이 할머니들은 산아제한 정책이 한창이던 1970년대 낙태를 한 여성들이며, 자신의 낙태 건수만큼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씨는 “5회 6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참여한 할머니도 많았다”고 말했다.
“2003년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였어요. 그래서인지 아들이 사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에서 조기퇴직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분들은 아들의 사업 실패는 물론 며느리의 불임 등 가족의 불행은 모두 당신들이 젊었을 때 낙태를 많이 한 것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어요.”
반면 젊은 여성들은 가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원망이 많고, 사랑이 부족해 가족들이 자신을 방치했다는 피해 의식이 컸다. 심지어 자신이 힘들 때 교회는 뭐 했고, 하느님은 왜 나를 지켜주지 않았느냐고 원망하는 이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특이하게도 산전 진단(초음파 검사)으로 태아나 기형아일 확률이 높다는 진단을 받고 낙태한 경우가 많았다. 이씨는 “한국은 산전 진단을 쓸데없이 많이 해 낙태를 부추긴다”고 말했다.
나이가 많건 적건 낙태 여성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혹독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삶이 긍정적이지 않은데, 이는 가정의 불화를 초래하는 요소가 된다.
낙태 근절해야 분만 수가 올라
낙태 후유증은 시술받은 여성뿐만 아니라 시술한 의사에게도 있고 오래간다. 차희제 프로라이프 의사회 회장은 낙태 시술이 싫어서 진료 과목을 산부인과에서 스포츠클리닉으로 바꾼 경우다. 경희대 의대 출신인 차회장은 30만, 40만원의 월급을 받던 레지던트 시절 아르바이트로 산부인과 병원 당직을 서며 낙태 시술을 한 이후 그쪽과는 담을 쌓았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듯한 태아를 강제로 꺼내는 일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내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군복무를 마친 후 그는 1992년부터 94년까지 성남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에서 부원장으로 근무했다. 산부인과 병원으로서는 규모가 상당히 컸던 이 병원은 낙태 전담 여의사를 두고 한 달에 200~300건씩 시술을 했다. 덕분에 그는 낙태 시술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얼굴빛이 늘 어둡고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그 여의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수원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에 근무할 때도 용케 낙태 시술은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동료 의사 셋이 동업으로 병원을 개업하면서 생겼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분만만 하면 운영을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어서 낙태 시술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내에게 딱 1년만 하겠다고 동의를 구했으나 그의 아내는 낙태 시술을 할 거면 차라리 의사 생활을 그만두라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이 일로 9개월 동안 하루도 편할 날 없이 다투기만 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다.
“아내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낙태 시술을 안 하는 대신 환자를 두 배 세 배로 보겠다는 조건으로 다른 두 동업의와 함께 병원을 개업하게 됐죠. 이후 5년 동안은 별 잡음 없이 잘 운영해 갔는데, 어느 날 셋이서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동업의 하나가 제게 ‘차 원장은 손이 고무손입니까?’라며 시비를 걸더군요. ‘누구는 낙태 시술을 하고 싶어 하는 거냐’며 그동안 쌓인 불만을 쏟아 놓는 거였습니다. 고성(高聲)이 오가고 결국 치고받고 한 끝에 동업 관계를 깨고 말았죠.”
산부인과 전문의로서의 생활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막대한 손해를 안고 병원을 그만둔 그는 대기업 주치의로 일하다 지금은 퇴행성 관절염, 골다공증, 노화방지 등을 진료하는 스포츠클리닉 의사로 살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생명운동을 펼친 것이 인연이 돼 프로라이프 의사회 초대 회장을 맡게 됐다. 그는 “낙태 근절 운동은 결과적으로 분만 수가를 올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비현실적인 분만 수가를 올려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정부는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너희는 불법 낙태로 돈 벌지 않느냐. 다 알면서 눈감아 주고 있으니 엉뚱한 소리 마라’는 식으로 콧방귀도 안 뀌었어요. 낙태가 산부인과 의사들의 목을 겨누는 칼날이 돼 있는 상황이죠. 분만 수가를 당당하고 떳떳하게 요구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낙태 시술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