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窓日記] 영혼이 없는 秀才들 : 월간조선

평수가 비교적 넓은 빌라에 선배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은퇴를 하고 이제야 쾌적한 생활공간에서 노년을 즐기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 선배 부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주민 중 한 집이 주차장에서 세 자리나 독차지하는 바람에 다른 집은 차를 도로에 세워둬야 해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에요. 말해도 듣지 않는데 법으로 해결할 수 없어요?”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그런 얌체들이 있었다. 共有(공유)하는 녹지공간에 울타리로 막아 자기 집 정원으로 쓴다. 공동주택은 많은데 ‘함께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꼭 끼어 있다. 법은 이런 상황을 ‘알아서 양보하며 적당히 살아가라’며 방치하고 있다.

한 달 후.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무더운 밤이었다. 저녁 9시 뉴스를 보면서 깜빡깜빡 졸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빌라에 사는 선배였다.

“와이프가 같은 빌라에 사는 젊은 여자와 싸웠어. 그 여자가 경찰에 신고해서 집사람이 끌려갔다는데 도와줘.”

변호사 생활 20년에 그런 연락이 무수히 많았다. 본인들은 심각해도 변호사는 피하고 싶은 일이다. 결과는 뻔했다. 서로 합의하고 나오거나 나중에 경미한 벌금을 내는 정도였다. 검찰조사도 없고 재판도 사실상 없었다. 법적으로 변호사가 할 일이 없는 셈이었다.

“바쁘겠지만 경찰서로 와줄 수 없을까?”

선배의 목소리는 거의 사정에 가까웠다. 선배는 평생 파출소 한 번 가 본 일이 없는 착한 사람이다. 내게는 별게 아닌 남의 일이지만 선배 입장에서는 큰 사건이었다.

경찰서에서

나는 이제 변호사의 또 다른 임무가 뭔지 알 나이가 됐다. 변호사는 법 지식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생활을 이해하면서 더러 고통에 동참해 줘야 하는 것이다. 진공 같은 법적인 관점에서만 볼 게 아니라 현실에서 우왕좌왕하는 평균인과 스텝을 맞춰야 할 때가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차를 몰아 후텁지근한 밤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젖어서 검게 번들거리는 도로 위로 빗방울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경찰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형광등 불빛이 파랗게 비치는 건물 현관으로 들어섰다.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선배가 나를 보자 환한 표정으로 바뀌면서 다가왔다.

“집사람이 형사과로 끌려 들어갔는데 나는 못 들어가게 하네. 들어가서 어떻게 돼가는지 알아봐 줘.”

선배의 시선은 굳게 닫힌 철격자 문을 향하고 있었다. 형사과는 사무실 전체가 감옥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나는 형사과 철창문 앞으로 갔다. 50대쯤의 고참 형사가 문 바로 뒤쪽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파출소에서 인계된 부인의 변호인으로 왔어요.”

내가 그 형사에게 말했다.

“뭐요?”

형사의 얼굴에 웃긴다는 표정이 비쳤다. 경미한 싸움인데 한밤중에 변호사가 달려온 것이 아니꼽다는 눈치였다.

“변호사 신분증과 선임계를 봅시다.”

선임계는 당사자와 맺은 계약서를 말한다. 있을 리가 없었다. 구속되거나 체포된 사람의 경우 변호사는 서류 없이도 그냥 만날 수 있는 게 법적 권리였다. 형사가 시비조로 덧붙였다.

“로스쿨이 생겨서 변호사가 쏟아진다며? 옛날에는 변호사라면 그래도 좀 대접해 줬는데 이젠 못해 주지.”

형사는 노골적인 거부 감정을 쏟아냈다. 변호사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수첩을 꺼내 볼펜으로 즉석에서 선임계를 써서 찢어 주었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법적 양식을 갖춰야지.”

내가 말했다.

“수첩종이는 안된다고 적혀 있는 법 가져와 보슈.”

이럴 때는 유연하게 나가야 했다. 그 형사는 열등감 많은 어설픈 완장이었다. 좋은 경찰관들 사이에 그런 이단이 더러 끼어 있었다.

“들어가슈.”

형사가 그제야 귀찮다는 듯 턱으로 안을 가리켰다.

선배 부인은 당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마와 뺨에 피가 말라붙은 상처들이 보였다. 반대편 구석에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30대 말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보였다. 그 여자가 나를 보더니 발작을 하면서 소리쳤다.

“썅, 나도 변호사 살 거야.”

“준영이가 누구요?”

생긴 것과는 전혀 다른 거친 말들이 토해져 나왔다. 야전에서 뛰는 나 같은 변호사는 항상 욕과 증오가 가득 찬 막장 같은 환경 속에서 살아 왔다. 나는 선배 부인을 데리고 형사과 구석으로 갔다. 베니어합판 바닥 위에 리놀륨을 깔아놓은 평상이었다.

예전에는 그 앞에 철창이 있었다. 인권 시비가 있으니까 철창만 형사과 문 쪽으로 옮겨 단 것 같았다. 구석에 있는 열린 화장실에서 지린내가 흘러나왔다. 나는 선배 부인과 벽 아래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게 변호사의 일이었다.

한 시간이 흘렀다. 등과 허리가 욱신거렸다. 다시 30분이 흘렀다. 카운터 쪽의 고참 형사가 건너편 철책상 앞에 앉아있던 젊은 형사에게 소리쳤다.

“야, 이 형사. 이 사건 쉬운 거니까 네가 조서를 꾸며 봐라.”

젊은 형사는 청바지에 흰 셔츠차림이었다. 그가 구석에 있는 선배 부인과 나에게 말했다.

“한참 기다려야 할 거예요. 지금 바쁘니까.”

조금 대접받으려면 아는 경찰 간부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푸대접받는 쪽을 대개 선택했다. 언젠가 한번은 담당 형사가 경찰에 아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친한 친구 중에 준영이가 있다”고 했다. 형사가 “준영이가 누구요?”라고 묻기에 “당신네 경찰청장인데 모르느냐?”고 대답해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몸으로 겪어 봐야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진다. 밤 12시가 가까워서야 조서 작성이 시작됐다. 선배 부인과 싸운 여자가 먼저 젊은 형사 앞에 불려와 앉았다.

“인적사항부터 말한 다음에 어떻게 싸웠는지 경위를 말해 보세요.”

형사가 말했다. 상대방 여자의 이름은 오광미(가명)였다. 나이 39세. 갸름한 얼굴에 파란색이 돌 정도의 흰 피부였다. 그녀가 싸움의 전말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벤츠가 세 대 있거든요. 한 대를 끌고 나갔다 와서 주차장에 세워뒀던 두 대의 벤츠를 보니까 백미러에 스크래치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있는데 저기 저 여자가 갑자기 우산을 가지고 사납게 달려들었어요. 제가 너무나 겁이 나서 경찰을 부르려고 했더니 저 여자가 제 손에 있던 휴대폰을 빼앗아 던지고 우산 끝으로 제 눈을 찌르려고 했어요. 제가 그 우산을 손으로 막으면서 도와달라고 소리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다행히 윗집 여자가 제 소리를 듣고 내려와서 봤는데도 자기는 연관되고 싶지 않다면서 가버렸어요. 저 여자는 저를 폭행하고 마지막에는 이빨로 제 손가락을 물었어요.”

“이거 잘 모르겠는데”

굳이 벤츠를 세 대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이상했다. 형사가 다시 물었다.

―그 외에 다른 피해는 없었어요?

“저 여자의 남편이 그때 검은색 자기 승용차를 몰고 와서 제 차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액션영화의 한 장면을 묘사하는 것 같았다.

―같이 싸운 저 여자분 얼굴에 찢어진 상처가 있는데, 그렇게 하셨나요?

형사가 우리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여자는 불리하면 그렇게 말했다. 형사는 추궁할 생각은 전혀 없이 여자가 말하는 대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뭘 더 물어보지? 이거 잘 모르겠는데….

젊은 형사는 처음 써보는 듯한 조서 앞에서 어물거렸다.

다음에는 선배 부인이 젊은 형사 앞에 앉았다. 이름은 김정미(가명). 나이 57세. 가정주부였다. 거의 그 젊은 형사의 어머니뻘이었다.

―싸운 경위를 말씀해 주시죠.

형사가 똑같이 물었다.

“우리 아들을 어디 데려다 주고 주차장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저 여자가 계단 위에 서 있었습니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저를 포함한 우리 빌라 주민들이 모두 저 여자를 두려워하고 있었거든요. 평소에도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죠. 저 여자가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제 머리를 찍었어요. 그리고 긴 손톱으로 저의 얼굴을 찢었어요. 제가 사람 살리라고 소리쳤죠. 저 여자는 제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어요. 그때 저 여자 손가락이 입으로 들어오기에 순간 깨물었어요. 그랬더니 저 여자가 손가락을 보이면서 ‘너 이 의미가 뭔지 알지?’ 하고 웃는 거예요. 나를 법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저 여자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여기 잡혀오게 된 겁니다.”

사실은 하나일 텐데 두 사람의 얘기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변호사의 할 일

형사의 조서 작성은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오히려 젊은 형사가 옆에 있는 나를 보면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간단한 폭행 사건은 벌금 몇 푼만 내면 끝이 나는 사건인데 변호사가 왜 왔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는데….

내가 되물었다.

“이게 간단해요?”

그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다. 어느새 입구 카운터 뒤에 있던 고참 형사가 다가와 젊은 형사의 조서 작성을 지켜보다가 나를 달래듯 한마디 했다.

“변호사님은 한밤중에 아무것도 아닌 이런 사건 가지고 왜 와서 고생합니까? 재판으로 갈 것도 아니고, 그렇고 그런 뻔한 사건인데.”

고참 형사에게 조금은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형사생활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이 한밤중에 전화를 해대죠? 결과가 뻔히 보이는 사건이면 귀찮죠? 그건 우리의 시각이고 상대방은 대개 어떻습니까? 불안해하고 어쩔 줄 모르죠? 그럴 때 ‘법은 이렇다’고만 말해 주면 상대방이 뒤에서 뭐라고 할 것 같아요? 고맙다고 할까요? 빤들거린다고 할까요? 힘들고 귀찮더라도 이렇게 함께 철의자에 앉아있어 주는 것도 괜찮다는 걸 저도 법조생활 30년이 넘어서야 깨달았어요.”

변호사가 있어야 할 곳은 숭고한 법정만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생활현장 안에서도 항상 존재해야 한다. 관점도 법적으로만 볼 게 아니라 세속에서 힘들어하는 보통인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말 그렇겠네요. 이런 늦은 시각에 함께해 주면 참 좋아하겠네요.”

고참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의 표정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형사과 벽에 붙은 시계가 어느새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걸 보면서 선배 부인과 나는 그곳을 나왔다.

새벽에 들어와 늦잠을 잤다. 벌써 오전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다.

“어제 정말 고마웠어. 그 경찰서에 우리 마누라 혼자 있었더라면 얼마나 겁이 나고 이상했겠어?”

선배의 어조에는 정말 감사해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선배가 계속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될 것 같아? 어젯밤 조사하던 형사가 전화를 했는데 진단서를 보내 달라고 하는구먼.”

“벌금 50만원 정도 내라고 은행 지로용지가 갈 걸요.”

그게 검찰과 법원의 업무 관행이었다.

“더 조사는 하지 않고? 그 오광미라는 여자는 정말 나쁜 여잔데 말이야. 지난 6년간 우리 집뿐만 아니라 빌라 주민들 모두를 괴롭혔어. 주민들은 이 기회에 정식으로 수사가 되기를 원해. 하여튼 빌라 주민들이 찾아가겠다니까 만나줘.”

―그런데 왜 형수님 혼자만 당한 거요?

“엄 변호사도 우리 집사람 성격 알잖아? 틀린 걸 못 보는 성격이지. 거기다 주민 대표니까 한마디 했다가 당한 거지.”

빌라 주민들의 호소

선배 부인은 투사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은 지나가던 차가 개를 치고 뺑소니치는 걸 보고 끝까지 따라가 싸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못 본 척하고 비겁해야 많은 문제가 줄어드는 것이 세상이다.

다음날 빌라의 주민들이 나를 찾아왔다. 주민 중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내게 말했다.

“김정미(선배 부인·가명)씨가 전체 주민들의 십자가를 지고 그렇게 당하신 거예요. 우리 모두 무서워하고 있어요. 앞으로 우리 중 누가 또 그런 피해를 당할지 모르니까요.”

경찰서에서 직접 오광미를 봤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가냘퍼 보이는 보통의 여자일 뿐이었다.

―오광미라는 여자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데 주민들이 그렇게 공포에 떨고 무서워하죠?

“아이도 없어요. 그 여자는 하루 종일 혼자 집안에만 박혀 있어요. 그러다가 한밤중이면 나와서 이상한 짓을 하는 거예요. 이제는 사람까지 다치게 하니까 검찰에 가서 우리 주민이 모두 말 좀 해야겠어요. 여태까지 주민 누구도 나서지 않았어요. 그 여자를 피해 이사 간 가구도 있었죠. 그러다 이번 일이 터진 거예요.”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앞으로 또 어떤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혹시 주민들이 그 여자를 왕따로 만드셔서 그런 건 아닌가요? 이상하게 행동해도 잘 대해 주시지 그랬어요?”

내가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는 사항이었다. 인격이 비틀린 사람의 경우 달래는 게 싸움보다 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그 말에 주민 중 온유해 보이는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랫동안 선생님을 하던 분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그 여자를 반장도 시키고 음식도 가지고 가고 대화를 하려고 나름 노력을 많이 기울였어요. 그냥 밉다고 경원하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빌라 주민들은 비교적 나이 먹고 온유한 사람들이었다.

“주민들이 지금 요구하시는 게 뭐죠?”

내가 물었다.

“검찰에서 정식으로 수사를 해 줬으면 하는 겁니다. 이제 주민들은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검찰에서 불러만 주시면 모두 다 가서 호소라도 하고 싶어요.”

경찰은 사건을 사소한 시비 끝에 서로 다툰 것으로 해서 검찰에 송치했다. 며칠 후 선배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담당 부장검사에게 그 사건의 실체를 수사해 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부장검사는 ‘그런 경미한 사건은 업무관행에 따라 일률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부하에게 말하기가 어렵다’더군. ‘그까짓 50만원 미친 개한테 물린 셈 치고 내지 그러냐’고 오히려 나를 설득하더라고.”

부장검사는 선배의 정당한 요구도 청탁으로 간주하는 것 같았다. 사람을 무는 미친개가 있으면 검찰은 그걸 잡아 주어야 한다. 검사들에게는 좋은 머리와 법률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팍팍한 삶과 고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권력이 그들의 일상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며칠 후 나는 그 사건이 배당된 검사직무대리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런 사건은 경미하다고 검찰청 서기관이 검사직무대리 역할을 한다고 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까무잡잡한 검사직무대리가 내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오랜 서기 생활로 익힌 저울질하는 눈길이었다.

“검사님, 이 사건은 단순한 싸움이 아닙니다. 공동주택 내에서 주민들이 오랫동안 피해를 입은 사건의 일부가 터져 나온 겁니다. 좀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면서 그를 높였다. 오랜 세월 서기로 있으면서 느낀 열등감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관례에 익숙한 법조인들

―제가 어떻게 해 달라는 말씀이죠?

검사직무대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기계적인 업무처리에만 익숙한 탓인지 이런 상황은 처음인 것 같았다.

“동네 주민들을 몇 명이라도 참고인으로 부르셔서 사건의 배경이나 본질이 뭔가를 조서에 남겨줬으면 합니다.”

그는 권한이 있었고 힘든 일도 아니었다.

“글쎄요….”

검사직무대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사건은 말이죠, 다른 것도 전부 다 똑같이 그냥 벌금형을 양쪽에 부과했습니다.”

검사직무대리는 자체적인 관례에 너무 익숙해 있었다. 동시에 그는 ‘사건떼기’밖에는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눈길 한 번만 돌리면 금세 보이는 사건의 이면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법적 관점’은 바로 ‘법적 盲點(맹점)’이었다.

그 며칠 후 선배 부인이 지로용지를 가지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은행에 돈을 내라고 검찰청에서 보낸 벌금통지였다.

“세상에 이런 검찰이 어디 있습니까? 불러서 한 번 물어보지도 않고 돈을 안 내면 하루에 5만원씩 쳐서 징역을 살리겠다고 겁을 줘요.”

선배 부인은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정식 재판을 청구해야겠어요. 판사님은 그래도 다를 거 아닙니까?”

정식 재판을 하는 법정에는 검사직무대리가 작성해 보낸 이런 내용의 공소장이 도착해 있었다.

<피고인 김정미는 주차문제로 시비가 되어 들고 있던 우산으로 피해자를 때리고 머리채를 잡아 흔든 후 손가락을 물어 치료일수 미상의 상해를 입힌 것이다.>

검찰은 단 한번의 확인도 없이 오광미의 일방적 말만 그대로 받아들인 셈이 됐다. 검찰이나 법원의 업무처리 관행에 도전한 투사에게 던져지는 올가미가 대개 그랬다. 본질은 이미 증발해 버렸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이는 게 정식재판청구에서 흔히 보는 결과였다. 그래서 변호사인 나는 웬만해서는 정식재판청구를 말린다.

앳되어 보이는 여자 단독판사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정당방위라 이건가요?”

―정식재판을 청구하신 이유가 뭐죠?

“한 여자의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주민들이 괴로움을 당해 왔습니다. 그걸 얘기하려고….”

“그게 아니라 정식재판을 청구하신 이유가 뭐냐는 거죠.”

판사가 말을 끊으면서 어조를 높였다. 선배 부인은 순간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여판사가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머리채를 잡아 흔들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우산으로도 안 때렸다 이거죠?

“그렇습니다.”

―그게 정식재판을 청구한 이유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손가락으로 문 건요?

판사가 다시 확인했다.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볼 필요도 없네요. 그 자체로 이미 상해죄가 되고 벌금을 내기에 충분한데 왜 정식재판을 청구했죠?”

여판사는 이미 다 끝났다는 얼굴이었다.

―오광미가 저를 공격하는 바람에 깨물었어요.

“정당방위라 이건가요?”

여판사가 물었다. 선배부인은 법률용어가 주는 이질감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판사가 검사를 보고 말했다.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부인하는데 검찰 입증하시죠.

“피해자 오광미를 증인으로 신청하겠습니다.”

가해자 오광미가 피해자로 둔갑해 있었다. 또 선배 부인은 피고인인데 오광미는 증인의 자격이 됐다. 정식재판을 청구하여 더 억울한 위치가 되어버렸다.

검은색 고급 비로드 옷차림으로 오광미가 증언석에 올라와 앉았다. 신경을 쓴 엷은 화장이었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검사가 동정적인 어조로 그녀를 유도했다. 검사는 선배 부인을 가리켰다.

―저기 서 있는 피고인으로 인해 피해를 입으셨죠?

“그렇습니다.”

오광미가 슬픈 모습으로 대답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 때문에 다투시게 된 건가요?

“저 여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제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랬나요? 구체적인 것은 경찰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지요?

검사가 동정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끌었다.

“그렇습니다.”

오광미가 얌전한 태도로 대답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검사가 신문을 마쳤다. 검찰은 그들의 결정에 불복하고 정식재판청구를 한 선배 부인을 유죄로 만들기 위해 철저히 오광미 편이 되어 버렸다. 정식재판은 억울함을 풀어주는 제도가 아니라 까불면 혼내주는 제도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젊은 단독판사가 증인으로 나온 오광미를 보고 물었다.

가해자 편이 된 검찰

―그 사이 주민들이 진정서를 여러 장 보냈던데 모두 오광미씨에게 좋지 않은 내용들이에요. 주민들과 사이가 나쁜가요?

“주민들이 저만 따돌렸어요.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저도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주민들이 왕따를 시켰다 이거죠?

여판사는 오광미를 동정하는 표정이었다. 오랜 시간 여러 재판을 보면서 종종 이런 모습을 봤다. 판사는 눈앞에 보이는 슬픈 표정을 하는 범인을 동정하지, 보이지 않는 피해자들에게는 솔직히 관심이 없었다. 판사는 피해를 호소하는 주민들 편이 아니었다. 오광미가 왕따를 당했다고 동정하는 표정이었다.

―여기 조서를 보면 증인 오광미씨는 벤츠를 세 대 갖고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어요?

여판사의 표정에는 원인 모를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요. 그걸 주차장에 세워뒀었는데 누가 백미러에 흠집을 내놨어요. 그걸 살피다가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살고 있는 빌라가 몇 평인가요?

여판사가 물었다. 외제차들을 댈 정도면 부자동네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63평입니다.”

―그런 집 비싸죠?

“비쌉니다.”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비싼 넓은 집인가요?

“대충 비슷합니다”

순간 젊은 여판사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스쳤다. ‘썩은 부자 싸움에 내가 왜 끼어들어 뒤처리해야 하느냐’는 그런 느낌 같았다. 사건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변호사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은 사소한 다툼 같지만 공동주택이면 전국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중요하고 큰 사건입니다.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하는 삶에서 나타난 극단 이기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정식재판을 청구한 이유는 바로 그런 사건 裏面(이면)의 생활관계를 한 번 봐달라는 겁니다.”

젊은 단독판사의 얼굴은 공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판사 중에는 법적 요건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현실을 보고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박힌 법원칙에 현실을 끼워 맞췄다. 천장을 보면 바닥이 안 보이기 마련이다. 법적 관점은 곧 법의 맹점이었다. 여판사가 마지못해 말했다.

―증인을 신청하시죠.

“주민 모두 오랫동안 고통받은 걸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중 두 명 정도만 신청했으면 합니다.”

여판사가 차가운 어조로 잘랐다.

“안돼요. 한 명만 하세요.”

그나마 현실재판에서는 고마운 경우였다. 내가 새내기 변호사였으면 얼음장같이 차게 거절당했을지도 모른다.

3주 후, 다시 공판이 열리기 10분 전이었다. 나는 법정 밖에서 증인으로 나온 주민과 만났다. 40대 주부인 그녀는 빌라 동네에서 오광미와 매일 아침 茶(차)를 나누는 다정한 사이였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광미를 피해 아예 다른 곳으로 이사해 버렸다. 그녀가 나를 보자 두려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광미가 와서 지켜보고 있어요.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해라도 끼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 겁이 나시면 그냥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녀에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투사적인 발언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젊은 여자 단독판사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었다.

용감한 증인

현실생활과의 끊임없는 접촉과 아픈 경험이 있어야 판사도 사람들의 소리를 제대로 듣는다. 그래도 옛날에는 힘들고 험한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경우가 드문 것 같다. 좋은 환경에서 공부 경쟁만 해서 일찍 단독판사를 딴 책상물림들이 과연 어머니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도 제가 증언을 해야 판사님이 정의로운 결정을 내려주실 거 아니에요?”

주저하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그게 일반인의 판사에 대한 희망이었다. 들어주고 공감하는 표정 한 번만 지어줘도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데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는 판사들이 많았다. 그런 기대가 저주로 바뀌기도 했다. 심지어 재판에서 진 교수가 석궁으로 판사를 쏜 사건도 있었다. 그녀가 결심한 듯 말했다.

“두려워도 굴복하기 싫습니다. 말하겠습니다.”

잠시 후 그녀가 증인석에 올라갔다. 방청석 앞자리에 앉아있던 오광미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일고 있었다.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감옥에 넣겠다는 惡意(악의)가 번득였다. 증인으로 나온 여자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한 여자가 이사를 온 후 평화롭던 주민들의 삶이 팍팍해졌습니다. 그분은 주민들하고 접촉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도 없었고 혼자였습니다. 혼자 새벽 두 시경이면 빌라의 뜰을 거닐곤 하는 게 더러 보였을 뿐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 여자는 개인이 수리해야 할 부분을 공동경비로 해달라고 주민 대표에게 요구를 해 왔습니다. 좁은 주차공간을 독점하면서 다른 주민들이 차를 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에 대한 항의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주민들 차량이 날카로운 물체에 긁혔습니다. 타이어에 못이 박히는 일이 한 달에 한두 번씩 발생했습니다. 차에 쓰레기를 가져다 버리기도 하고, 미끄러지라고 계단에 식용유를 부어놓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자동차의 주유구에 본드를 붙여 놓기도 하고 동네 개똥들을 모아다 특정 주민의 집 앞에 쌓아놓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화단에 심어진 꽃들의 목이 모두 부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시퍼렇게 갈린 낫이 공동 출입문에 걸려 있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물에서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누군가 공동주택의 물탱크에 고의적으로 락스를 풀어 넣은 게 발견됐습니다.”

평균인들의 삶을 무시하는 검사

―잠깐만요.

검사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키면서 경고했다.

―증거 있습니까? 확실하지 않은 건 말하지 마세요.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러면 여태까지 한 번이라도 고소를 한 적 있어요?

“아직 고소는 하지 않았습니다.”

검사가 빈정거렸다.

―그런 고통이 있었는데도 고소 한 번 없다? 이상하지 않나요?

“솔직히 말해서 주민들은 심정적으로 누가 한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검사가 얼음같이 찬 얼굴로 되쏘았다.

―심정적으로 다 안다? 그 근거가 뭐죠?

“오광미가 이사 오기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건 논리적인 근거가 안되죠. 그 외에 아무 근거도 없다 이거죠?

“저희 빌라에서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건 저기 오광미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단순한 추측이 아닌가요? 그런 걸 말하면 안되죠.

검사가 계속 말을 막았다.

“검사님은 당해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저희 주민들 전부가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검사님은 근거를 대라고 하면서 말을 막는데, 보통 사람들은 어떤 근거를 만들어 바쳐야 하는 건가요? 우린 그냥 고민하고 생활하는 일반인일 뿐입니다.”

검사가 다시 그녀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증인, 좋아요. 지금 나와서 함부로 말을 막 하셨는데 타이어에 박아놓았다는 못이 모두 같았나요?

“같은 종류였습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진술하면 안되죠. 어떤 제조회사가 언제 생산한 못이라는 걸 파악했어야죠.

그녀를 주눅 들게 하기 위한 검사의 말장난 같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은 논리와 법적 근거를 가지고 사는 게 아니다. 젊은 검사가 판단해야 하는 대상은 부대끼며 살아가는 보통인의 생활이었다. 그걸 세속에 찌든 평균인의 관점에서 봐 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각오하고 나왔는지 그녀는 계속했다.

“어느 날부터 저 오광미라는 여자는 주민들을 째려보면서 공격적인 성향을 보였습니다. 지하주차장에서 차량이 들어오고 나갈 때도 마주 오는 주민차량이 있을 때 절대로 비켜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 문제로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행동의 마지막이 바로 정식재판을 청구한 김정미씨에 대한 테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머지 주민 중 누가 어떻게 공격을 당할지 모릅니다.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입니다.”

검사의 신문이 끝나고 단독판사가 묻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 번 주민들의 차량에 흠집이 났다 이거죠?

“그런 것 같습니다.”

―한 달에 두 번으로 계산하면 1년에 25번 정도이고 4년만 해도 100번이네요. 6년이면 150회고. 정말 그렇게 했어요?

“제가 그렇게까지 정확한 횟수야 알겠습니까?”

―그럼 확실하지 않은 걸 얘기했군요.

증거가 없으면 판사에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판사가 덧붙였다.

―증거도 없이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 당하는 입장에서는 반감을 품을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지난 6년간 저희 주민들이 오광미씨가 그랬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던 사실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 주민들은 오광미씨를 감싸 안으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판사님은 저희 주민들이 오광미씨를 왕따로 만들었다고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주민들 그렇게 철없는 나이들은 아닙니다.”

―그러면 CCTV를 설치해서 증거를 확보해야 하지 않았나요?

판사가 다시 물었다. 그게 판사의 정신세계인 것 같았다.

인사이동이 있었다. 판사가 바뀌었다. 검사도 바뀌었다. 사건만 그대로였다. 이럴 때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재판은 논리 같지만 사실 느낌의 축적인 경우가 많다. 증인의 진실성 판단도 사실은 감각작용이다. 전임판사가 남긴 산더미 같은 기록 속에서 건조한 내용의 메모 한 장이 남은 전부였다.

오만한 秀才들

신임 재판장은 30대 초반의 하얀 얼굴을 가진 수재형의 여자 단독판사였다.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거쳐 대학을 다니고 사법시험을 거쳐 판사로 임용됐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선배 부인에게 질문 형식으로 몇 가지를 다시 묻기 시작했다. 사건의 본질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랫동안 공동주택의 주민들이 고통을 받아온 걸 말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어서 몇 가지를 묻던 중이었다. 새로 나온 젊은 검사가 내 말을 뚝 끊고 소리쳤다.

―잠깐만요.

“이 사건은 서로 싸운 단순한 사건입니다. 관계없는 것은 묻지 마세요.”

젊은 검사는 아예 판사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판사에게 이의를 신청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변호사는 변호사의 시각이 있고, 검사는 검사의 시각이 있다. 관계가 있고 없고는 각자가 판단할 사항이었다. 나는 검사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변호권을 행사하는 시간 아닙니까? 왜 방해하십니까? 재판장에게 먼저 허락을 얻어야 하는 게 법원칙 아닌가요? 왜 그러시죠?”

“….”

순간 젊은 검사는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가진 권력에 사람들이 숨죽이는 걸 버릇같이 보아온 그로서는 갑자기 원칙을 따지니까 이상한 것이다.

―잠깐만요, 변호인.

이번에는 바뀐 여자 단독판사가 나섰다.

―공동주택 내에서 생긴 이런 이상한 일들을 이 사건에서 굳이 말할 필요가 있나요?

검사와 마찬가지 생각인 것 같았다. 공식같이 법을 배워온 그들이 가지는 공통된 감정이 틀림없었다. 사법연수원에서 50명이 똑같이 제품 같은 결론이 나와야 하는 교육이었다.

단독판사의 얼굴에는 ‘사건은 많은데 짜증스럽다’는 표정이 나타났다. 그건 질문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좁은 시야를 가진 오만한 수재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말했다.

“재판장께서는 변호사가 하는 신문 중에 적절치 않은 게 있으면 그걸 제한할 소송지휘권이 있지 않나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권한을 행사하시죠. 그러면 그 질문사항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너무나 당연한 법원칙을 말했다.

“그렇군요.”

단독판사가 순간 멈칫했다. 재판장이 법적절차를 어겨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괘씸죄로 결과에 영향을 미칠까 모두 겁을 먹기 때문이다. 여판사의 눈에서 자존심을 상한 은은한 분노가 피어올랐다.

신문을 모두 끝냈다. 판사는 하나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론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등뼈같이 여기는 공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변론하시죠.

단독판사가 기계적으로 말했다. 따뜻하기를 기대했던 모든 과정마저 얼어붙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인근 도로변에 법원판결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현수막들이 가득 걸려 있다.

법은 천재가 아니라 어른의 영역

“우리 사회에 나타난 극심한 이기주의란 병이 공동체의 생활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주차시비가 살인사건이 되기도 하는 현실입니다. 이 사건 역시 겉으로는 작지만 본질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지만 인정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간여하고 싶지 않다면서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 또한 극단의 이기주의입니다. 그런 증인을 拘引(구인)해 주는 법정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또 다른 관료적 편의주의였다. 내가 계속했다.

“이 자리에 스스로 선 김정미씨는 바른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폭행을 당했습니다. 본질을 말하기 위해 정식재판 청구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본의 아니게 검찰과 법원에 대항하는 투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원칙을 지키려면 투사가 되어야 하고, 그 희생이 너무 큰 게 현실입니다.

지금 변호인이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판결문에 단 한 줄이라도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사의 판단을 써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여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律法(율법)이 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담는 판사들이 생기고 있었다.

판결의 선고가 있었다. 젊은 여판사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웅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의 경위와 피해자가 입은 상해의 정도에 비추어 볼 때 정당방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 및 변호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말 메마른 법정이었다. 그건 판결문집에 나와 있는 전형적인 예문이었다.

“다음 사람.”

판사는 그렇게 우리를 쫓아냈다. 법정을 나오면서 선배 부인에게 말했다.

―이제 법의 현실을 아시겠습니까?

법조인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었다. 선배 부인이 말했다.

“아니에요, 나름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문득 미국의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의 “법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고, 천재의 영역이 아니라 어른의 영역”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나라 법정에는 평생 공부만 열심히 하면서 논리로 무장한 수재나 천재들은 있어도, 삶의 경험이 풍부한 ‘어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