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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50주년 맞은 포스코, 100년 기업을 꿈꾸다 (上)

창립 25년 만에 총 2080만 톤 조강생산 능력 갖춰 세계 철강업계의 신화를 쓰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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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對日청구권 자금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사용… 선조의 피 값으로 건설 중”(박태준)
⊙ 첫 삽 뜬 지 3년2개월 만에 용광로에서 쇳물 콸콸
⊙ 포항제철소와 바다 위에 건설한 광양제철소를 양대 축으로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터지던 날 포항제철 임직원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
  1968년 4월 1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 39명의 임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가 공식 출범했다.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이 비장한 목소리로 창립사를 낭독했다.
 
  “포항종합제철의 모든 성공 여부는 지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직접적인 사명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잘못은 영원히 기록되고 추호도 용납될 수 없으며, 가차 없는 문책을 받아야 합니다.”
 
  박 사장의 말 속에서는 포항제철의 창립과 성공 여부가 앞으로 대한민국의 백년대계를 결정짓는다는 강한 믿음이 녹아 있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흘렀다. 포스코는 국내를 대표하는 간판 기업으로 우뚝 섰다. 첫 쇳물이 생산된 1973년 416억원이었던 매출은 지난해 28조5538억원으로 686배 늘었다. 우리나라의 1인당 GDP는 1968년 198달러에 불과했으나, 지난 2016년에는 2만7539달러로 140배 늘었다. 포스코가 성장하고 철강 생산이 늘어나면서 자동차, 조선 등 국내 산업이 꾸준히 함께 성장했기 때문이다. 포스코가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철강 제품을 생산하면서 자동차·조선 등 국내 제조업은 양질의 철강재를 싸게 국내에서 공급받아 안정적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국내 자동차 생산 대수는 400만 대에 육박해 세계 5위권의 자동차 수출국이 됐으며, 조선업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게 됐다. 연간 44만9000톤이었던 포스코의 조강생산량(1973년)은 3720만 톤(2017년)으로 늘었다. 일본 철강 회사들의 도움으로 처음 일관제철소를 지어야 했던 포스코는 40여 년 만에 독자적으로 해외에 일관제철소를 지을 만큼 성장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염원하던 ‘영일만의 기적’을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지난 4월 1일 포스텍 체육관에서 창립 50주년 행사를 가졌다. 권 회장은 기업 포스코의 새로운 미션으로 ‘한계를 뛰어넘어, 철강 그 이상으로(Unlimit the Limit: Steel and Beyond)’를 내세웠다. 포스코는 창립 100주년을 맞는 오는 2068년에는 연결 매출 500조원, 영업이익 70조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주력 사업인 철강 외에도 트레이딩·건설·에너지·ICT·에너지저장소재·경량소재 등에 집중할 방침이다. 포스코가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이고, 포스코와 함께 대한민국은 성장했다.
 
 
  박정희 대통령, 1965년 코퍼스 포이 회장 만나 제의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 날.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왼쪽).
  한국 정부가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초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세운 것은 1958년이었다. 연간 선철 20만 톤 생산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자금 부족, 정국 혼란과 국내 언론의 반대 등으로 무산됐다. 5차례에 걸친 제철소 건설 시도는 모두 무위로 끝났다. 종합제철 건설 계획이 보다 구체화한 것은 1961년부터다. 당시 정부는 조국 근대화를 통해 빈곤에서 탈피하고 자립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철강산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최우선 역점 사업은 종합제철 건설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존슨(Lyndon B. Johnson)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차에 피츠버그 철강공업지대를 찾았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Inc)의 포이 회장을 만나 사업 실현에 필요한 외자(外資)를 조달하기 위해 국제제철차관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1966년 12월, 미국의 코퍼스를 중심으로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5개국 8개사가 참여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 발족했다.
 
포항제철 창립 현판식.
  정부는 1967년 6월, 조강 연산 3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지역으로 월포·포항·삼천포·울산·보성을 후보지로 선정했다. 지원시설과 투자 면에서 가장 유리한 포항을 건설 예정지로 결정했다. 종합제철 건설사업의 실수요자로 대한중석㈜이 선정(1967년 9월)됐다. 효율적인 내자 조달이라는 실무 차원의 고려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뛰어난 리더십과 경영 능력을 보유한 박태준 사장을 위시해 기업체 근무 경험이 풍부한 관리직 사원, 해외연수를 마친 기술직 사원이 다수 포진하고 있어서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68년 4월 1일에 박태준 사장을 비롯해 39명의 임직원이 창립식을 가졌다.
 
  당시 정부는 기업의 안정성과 순조로운 건설을 위해 특별법에 따라 정부의 재정 지원과 조세 감면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공사(公使) 형태로 출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포스코는 해외 철강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경영의 자율성과 조직의 기동성이 보장되고, 철저하게 책임 경영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상법상 주식회사 형태를 고집했다.
 
 
  국내외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
 
포항제철소 제1 입화. 포항제철소 건설현장 사무소 롬멜하우스(오른쪽).
  종합제철소 건설이 시작의 닻을 올렸지만, 국내외의 온갖 회의적인 시각과 반대여론, 주요 기관들의 잇따른 타당성 부인 등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일부 언론은 제철소 건설 사업은 외자 부담이 크고 생산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수입 강재를 쓰는 것보다 국민 경제에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농촌 출신 국회의원의 80%는 농수산 부문 개발 용도로 사용될 자금이 종합제철 건설사업으로 전용되면 자신들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
 
  세계은행(IBRD)은 1968년 11월, ‘한국의 종합제철 사업은 시기상조’라는 보고서를 내 우리의 제철소 건설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도 부정적 의견서를 냈고,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 총회에서 굿 맨 의장은 “한국의 제철 사업은 중단기 외채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외화의 획득분보다 상환부담이 더 커서 국내 자본 축적을 해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1966년 11월부터 오로지 일관제철소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관료들이 주도해 온 KISA를 통한 자금 조달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박태준 사장은 1969년 1월 말, 한일국교정상화 협상단 참가 때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가 남아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대일청구권의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자금으로 전용하는 구상을 하게 된 것이다. 박태준 사장은 일본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 선생과 야기 노부오(八木信雄) 한일문화협회 이사장을 만나 협력을 요청하고, 이들의 소개로 일본 철강 연맹 이사장인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야와타제철 사장, 나가노 시게오(永野重雄) 후지제철 사장, 아카사카 다케시(亦坂式) 일본강관 등 철강업체 지도자들을 만나 부탁했다. 이와 함께 지바 사부로(千葉三郞) 전 노동상, 이치마다 히사토(一萬田尙登) 자민당 해외경제협력위원장 등 정계 지도자들을 만나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결국 박태준 사장은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 회담에서 일본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실패하면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
 
포항3기 불량 구조물 폭파 모습.
  포항제철은 창립 2주년을 맞은 지난 1970년 4월 1일, 경상북도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건설 현장에서 조강 연산 103만 톤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종합착공식을 거행하고 대역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제철소 건설은 원칙적으로 제품이 생산되는 순서에 따라 제선-제강-압연공장 순(順)으로 건설하는 포워드(Forward) 방식을 택하나, 포항제철소는 제품생산공장부터 건설하는 백워드(Backward) 방식을 택했다. 이는 건설 공정이 짧은 압연 및 제강공장을 먼저 완성해, 수입한 반제품으로 완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생기는 이윤을 나머지 공장 건설에 투자하면서 제철소를 완성한다는 계획 때문이었다.
 
  포항제철은 1기 착공 후 경험과 기술 부족에도 가장 효율적인 설비를 구매하겠다는 일념으로 동분서주하는 동안 예상치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권으로부터 들어오는 외압이었다. 1971년 4월에 실시할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 재정위원장이 박태준 사장에게 정치자금을 요구하기도 했고, 또 다른 정치권 실력자는 설비 구매에 따른 리베이트를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박태준 사장은 이런 외압에 결코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바로 청와대로 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보고받은 메모지에 서명을 해주며 “소신껏 처리하라”고 힘을 실어줬다. 박 대통령이 사인한 메모지는 실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훗날 ‘종이마패’로 일컬어지면서 외부로부터의 압력을 방어하는 정신적 힘이 돼 주었다.
 
광양연약지반공사 모습.
  박태준 사장은 밤낮으로 건설 현장을 시찰하며 직원은 물론 수주업체와 건설업체 요원들에게 민족의 숙원 사업에 동참한다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선조의 피 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고 있다.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리 모두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
 
  박태준 사장이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말이다. 박태준 사장의 의지는 모든 요원에게 큰 울림을 주어 현장에서는 ‘우향우 정신’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됐고, 현재까지도 포스코 사풍(社風)을 형성하는 원류가 됐다. 특히 1970년 가장 먼저 착공한 열연공장 건설이 지연되자 열연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행정, 사무직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을 공사 현장에 투입시켜 공기(工期)를 성공적으로 만회했다. 이 같은 정신과 노력으로 103만 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예정보다 1개월 앞당긴 39개월 만에 준공했다. 임직원들의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지로 다른 회사들이 통상 4~5년 만에 건설하던 제철소를 포스코는 2~3년 만에 만들었다. 따라서 1기 건설에 소요된 톤당 투자비도 다른 회사의 톤당 500달러에 비해 절반 수준인 260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전통은 광양제철소 건설에도 지속됐다.
 
 
  1973년 6월 9일, 첫 쇳물 터져 나와
 
포항제철 건설 전 동천동 전경.
  1973년 6월 7일 포항제철 본관 앞 광장. 박태준 사장은 태양열로 원화를 채화해 원화로에 보존하고, 다음날 원화봉송 주자 7명이 원화를 제철공장으로 봉송해 화입식을 갖고 오전 10시30분 1고로에 불을 붙였다. 그러고 21시간 만인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용광로에서 쇳물이 터져 나왔다.
 
  “만세, 만세!”
 
  고로 제2 주상을 가득 메운 채 쇳물이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박태준 사장과 건설 요원들의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국철강협회는 2000년에 이날을 ‘철의 날’로 지정했다. 이후 1973년 7월 3일 포항 1기 설비 종합준공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260만 톤 체제의 2기 설비를 준공한 1976년 5월부터는 한국의 철강 생산 능력이 사상 최초로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포항 1기는 일반 강재, 소형 구조물 등 소재류, 포항 2기 때는 철골, 강관 및 대형 기중기 등으로 확대했다. 전체 기자재 중 국산화 기기 비중은 1기 12.5%, 2기 15.5%, 3기 22.6%, 4기 35.1%까지 확대해 국내 관련 산업 발전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현재의 포항제철소.
  박태준 사장은 포항제철소를 지으면서 불량 시공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포항 3기가 건설 중이던 1977년 8월 1일, 발전송풍설비 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중 박 사장은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의 불량을 발견했다. 설비가 공기 지연으로 고전하고 있었지만, 박 사장은 이미 80%가 진행된 구조물을 망설임 없이 폭파했다. 완벽 시공에 대한 그의 의지는 임직원은 물론 참가 기업들에까지 전파돼 오늘날 포스코 설비 경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포항제철소가 한창 지어지고 있을 무렵, 바깥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제4차 중동전으로 인해 석유 파동이 생겼고, 1974년 말에는 철강 경기가 침체를 겪었다. 정부는 1977년에 제2 종합제철 건설을 다시 추진했다. 정부는 1980년대 철강 수요를 약 1200만~1300만 톤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포항제철의 1, 2차 확장 공사와는 별도로 연산 1000만 톤이 가능한 제철소가 필요했다. 제2 제철 실수요자로 포스코가 확정됐다. 한 민간기업에서 중소 규모의 철강사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제철 사업을 추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포스코는 제철업을 민간 기업에 맡기면 부(富)의 편재가 극심하고, 부실하면 결국 포스코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정부를 설득해 포스코가 실수요자로 뽑혔다. 제2 제철소의 부지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애초 경북 영해를 비롯해 아산만 등 여러 후보지가 검토됐지만, 1981년 11월 광양만의 바다를 메워 제철소를 건설하자는 포스코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포스코가 1981년에 광양제철소를 건설할 때 포항제철소는 4기 체제(연산 850만 톤)가 가동 중이었다. 또 포항제철 공장은 100%를 넘는 가동률과 흑자 경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1978년 중국의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을 만났다.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줄 수 없겠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요시히로 회장이 말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덩샤오핑이 이 대답을 듣고 한동안 중국에서는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박태준은 후세의 경영자들을 위한 살아 있는 교본”이라고 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지(志)와 의(義), 그리고 렴(廉)과 애(愛), 이 4가지 선비 사상을 행위 규범으로 실천한 현장의 선비”라고 칭송했다. 박태준 전기를 출간한 바 있는 소설가 조정래는 “한국의 경제 발전사 위에서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박태준 사장의 ‘우향우 정신’과 ‘제철보국’의 전통,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도전 정신, 책임의식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의 경영 이념은 글로벌 포스코의 정신적 자산으로 지금도 면면히 계승, 발전해 오고 있다.
 
 
  바다 위의 제철소, 광양제철소
 
과거의 광양만 일대 모습.
  포항제철의 성공적인 건설과 함께 포스코의 광양제철소 건설이 구체화한 것은 1981년이었다. 하지만 포스코의 광양제철소 건설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특히 포항제철소 건설을 위해 설비 공급과 기술협력을 제공해 온 일본 철강업계는 더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양국 철강 교역사상 처음으로 물량 면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자, 일본 철강업계는 큰 충격을 받아 1981년을 ‘부메랑 원년’이라고 명명했다. 신일본제철은 제철소 설비 설계에 필수 사항인 광양제철소 기본기술계획 검토 요청을 거부했다. 포스코는 일본의 협력 없이 광양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에 따라 설비구매처를 유럽과 미국으로 전환코자 설비제작업체를 잇달아 방문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도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광양제철소 건설에 대해 간접 협력 방식으로 기술협력을 하겠다고 나왔다. 결국 포스코는 미국과 유럽, 일본 업체들의 경쟁 입찰을 유도해 당시 세계 최신예 설비를 싼 가격과 유리한 조건으로 확보했다.
 
  광양제철소는 국내 최초로 바다 위에 건설하는 공장이었다. 공장 배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했고, 단계별 확장을 감안해 부지를 확정했다. 제철소 부지 면적은 총 1488만m2(약 450만 평)였는데, 공장부지가 1015만m2, 준설매립 시 불량토를 저장할 수토장이 263만m2, 지원시설 기지 및 주택단지가 210만m2였다.
 
현재의 광양제철소.
  포스코는 1985년 3월 5일, 광양 1기 설비 공사에 착공했다. 조강 연산 270만 톤 규모에 제품 구성은 앞으로 대량 공급 부족이 예상되는 열연 제품으로 정했다. 고생산성 추구, 자원절약, 품질향상, 공해방지를 위해 최신 설비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1987년 4월 24일 1고로 화입식 후 시험조업 과정을 거쳐 같은 해 5월 7일 종합 준공했다. 광양제철소 건설 당시에 우리나라는 철강업과 중공업이 상호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발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는 건설, 조선, 자동차, 기계, 전기, 전자산업 등 철강 소비 산업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이들 산업이 계속 커 나가기 위해서는 철강재의 안정적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소 2기(1986.9.30~1988.7.12), 3기(1988.11.1~ 1990.12.4)에 이어 4기 설비(1991.1.5~ 1992.10.2)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1968년 창업 이래 제철소 건설의 대역사를 마무리 지었다.
 
  포스코는 광양제철소(1140만 톤)와 포항제철소(940만 톤)를 합쳐 총 2080만 톤의 조강 생산 능력을 보유하게 되어 세계 3위의 대형 철강 회사로 부상했다. 광양제철소는 단위 제철소별 생산 규모에서 1982년부터 9년간 세계 1위를 고수해 온 포항제철소를 추월해 최적의 생산 규모를 갖춘 세계 제일의 단일 제철소로 부상했다. 포항제철소는 고급강 위주의 다(多) 품종 소량 생산에 주력하고, 광양제철소는 열연코일 및 냉연코일 위주 소(小) 품종 대량 생산에 주력하는 등 제철소 특성에 맞게 제품을 구성했다. 생산원가 절감과 설비 효율 극대화를 달성해 국제 경쟁력을 갖게 됐다. 창립 이후 불과 25년 만에 이룩한 초고속 성장은 세계 철강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단 기간에 이룩한 것으로 세계 철강업계는 이를 신화라고 부른다.
 
 
  항구도시였던 포항시가 인구 52만명의 산업도시로
 
  포스코가 걸어온 연도별 경영 성과는 눈부시다. 설비가 본격 가동된 1973년에는 매출액 416억원, 영업이익 83억원이었다. 포항제철소 4기 2차가 완공된 1983년에는 매출액 1조7500억원, 영업이익 2720억원을 기록했다. 광양 4기가 정상 가동된 1993년에는 매출 6조9209억원, 영업이익 1조105억원을 기록했다.
 
  양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포항제철소 건설 초기에 세계 생산 순위 46위(1975년)였던 포스코는 1983년에 처음으로 세계 10위에 진입했다. 이후 1987년에 세계 5위, 1989~1992년에 3위로 급부상한 데 이어 1997~1998년에는 세계 최초로 1위를 기록했다.
 
  포스코는 국가 경쟁뿐 아니라 지역사회 발전에도 기여했다. 포항시는 포스코 창립 당시에 인구 6만9000명에 불과한 항구도시였으나, 지난해 인구 52만명의 산업 도시로 성장했다. 울산의 자동차, 조선산업, 구미의 전자산업, 창원의 기계산업과 긴밀히 연계되는 동남권의 산업 거점으로 변모했다. 광양은 제철소가 들어서기 전인 1982년에 인구 7만8000명의 농촌 지역이었는데, 지난해 말 인구 15만명의 대표적 신흥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의 가동으로 세수가 늘어나고 관련 기업들이 늘어남에 따라, 포항시와 광양시의 재정자립도는 지난해 말 기준 37.1%, 35%로 경북도와 전남도에서 각각 2위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1994년 국내 기업 최초로 뉴욕 증시 상장
 
포항제철은 1994년 10월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미 뉴욕 증시에 상장했다.
  1990년대 포스코를 둘러싼 경영환경은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하던 1970~1980년대와 달랐다.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함께 사회 전체의 패러다임이 국제화되면서 개방이 급속히 진행됐고, 세계적으로 철강산업의 성장세가 크게 둔화됐다. 포스코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1990년대 포스코가 가장 역점을 둔 지역은 1992년에 수교한 중국이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국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우선 화베이, 화둥, 화난 세 지역에 생산 및 판매 거점을 구축한 후, 이 지역을 발판으로 중국 내륙에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포스코가 가장 먼저 중국에 만든 회사는 톈진(天津)의 포철천진강재가공유한공사(현 POSCO-CTPC)였다. 1995년 천진코일센터를 만들어 연간 10만 톤 규모의 냉연 강재를 가공 판매하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화난 지역 중심인 광둥성 순더에 진출, 순덕포항도신강판유한공사를 만든 뒤 1998년 연산 10만 톤 규모의 공장을 가동했다. 1997년에는 양쯔강 하류 장자강에 장자항포항불수강유한공사를 만들어 연산 11만 톤 규모의 스테인리스 냉연 공장을 가동했다.
 
  포스코는 1987년 산학연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철강을 비롯해 이공, 신소재, 경제, 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특히 선진 기술을 습득하고 그 기술을 자체 기술로 소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기술 개발로 응용 발전시키는 데 주력했다. 이를 위해 포스코경영연구소(1994년 6월 1일), 포스코기술연구소(같은 해 7월 1일), 포스코개발기술연구소(12월 1일)를 각각 만들었다.
 
  포스코는 1997년 3월 국내 대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했다. 전문 경영진의 책임 경영 체제를 강화하고 주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선진형 지배 구조 정착을 위해서였다. 종전의 포스코 이사회는 안건 심의와 승인을 주로 해왔다. 하지만 사외이사제도의 도입으로, 이사회가 최고경영자 육성과 보상, 기업가치 기준 설정, 위기관리 등을 할 수 있도록 역할을 대폭 강화했다.
 
  그즈음 포스코는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뉴욕 증시에 회사를 상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대 철강사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설비 증설 비용이 필수다. 포스코 경영진은 타인 자본에 의존할 경우 부채 비율이 상승하고, 국내에서는 대규모 증자(增資)를 하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했다. 그리고 1994년 10월 14일 오전 8시(한국시각 오후 9시),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조인서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뉴욕증시 상장이 이뤄졌다. 세계 금융 시장의 한복판인 월스트리트에서 포항제철 미국예탁증권(ADR)이 거래되기 시작했고, 포항제철은 이를 통해 약 3억 달러를 뉴욕 증시에서 조달했다. 포스코의 뉴욕 증시 상장은 한국전력, 삼성전자, 금성(현 LG), 유공(현 SK) 등 국내 기업들이 해외 증시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물꼬를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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