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인구보너스기 종료와 함께 ‘잃어버린 20년’ 시작, 한국은 2012년 인구보너스기 끝나
⊙ 한국도 低금리·低물가·低투자·低소비가 구조화하는 ‘日本化’ 현상 이미 시작돼
⊙ 지금의 불황은 일시적 아닌 구조적 문제, 세월호 핑계 댈 때 아니다
申志鎬
⊙ 51세.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日 게이오대 정치학 박사.
⊙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서강대 겸임교수, 자유주의연대 대표, 18대 국회의원 역임.
現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연세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 저서: 《고개 숙인 대한민국》 《 뉴라이트의 세상읽기》 《 북한의 개혁개방》 등.
⊙ 한국도 低금리·低물가·低투자·低소비가 구조화하는 ‘日本化’ 현상 이미 시작돼
⊙ 지금의 불황은 일시적 아닌 구조적 문제, 세월호 핑계 댈 때 아니다
申志鎬
⊙ 51세.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日 게이오대 정치학 박사.
⊙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서강대 겸임교수, 자유주의연대 대표, 18대 국회의원 역임.
現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연세대 경제대학원 겸임교수.
⊙ 저서: 《고개 숙인 대한민국》 《 뉴라이트의 세상읽기》 《 북한의 개혁개방》 등.
- 군산항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수출용 자동차들. 수출은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그로 인한 낙수효과는 줄어들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뉴욕 월가에서는 ‘일본화(日本化·Japanification)’라는 신조어(新造語)가 유행하였다. 금융위기 이후의 미국 경제상황이 일본의 1990년대와 비슷하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주택버블붕괴 이후 양적(量的)완화 등 경기회복을 위한 각종 정책을 구사해 봐도 효력은 없고 일본처럼 조금씩 ‘디플레이션 함정’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는 우려였다. 일부 전문가들은 일본을 전형적인 ‘신쇠퇴국(新衰退國·Newly Declining Country)’으로 지목하고 일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거침없이 전개하였다. 한때 전(全) 세계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일본경제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 버렸다.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 가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다. 실제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은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일본의 버블붕괴 시점인 1990년대 초반은 생산가능인구(15〜64세)의 증가율이 피부양인구의 증가율보다 높은 시기인 ‘인구보너스기’의 종료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의 경우 2012년에 인구보너스기가 종료했다. 2016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든다.
한국의 고령화(高齡化)는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비중이 7%인 고령화 사회에서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데 일본이 36년 걸려 세계 최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2026년에, 불과 26년 만에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전망이다.
高齡化로 인한 문제들
고령화로 인한 소비위축의 정도도 한국이 훨씬 심하다. 일본은 60세 이상 인구가 전체 개인 금융자산의 56%를 보유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근로의지를 나타내는 경제활동참가율(경제활동인구/생산가능인구)은 2012년 66.4%로 74%인 일본보다 낮다.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빈둥 노는 청년 니트(NEET) 비율은 2010년 기준으로 19.2%로 9.9%인 일본보다 높다. 청년 취업난이 심화하면서 젊음의 특권인 도전정신은 사라지고 공무원, 공기업 등을 무제한적으로 선호하는 ‘철밥통 신드롬’이 나타나고 있다.
출산율 또한 2013년 1.2로 1.4인 일본보다 낮다. 경제 역시 고성장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저(低)성장이 고착화되고 있다. 잠재성장률은 3%대로 저하되었고 복지 욕구가 분출하고 있어 한국경제의 최대 강점이었던 재정건전성은 악화 일로에 있다. 표(票)의 노예가 된 여의도정치는 무분별한 복지 확대에 정치적 명운을 걸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한국도 일본과 같은 장기복합불황(長期複合不況)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는 2013년 2월에 펴낸 <대한민국 중장기 정책과제>란 두툼한 보고서에서 그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관련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보자.
한국경제는 문제 없다?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식의 장기불황을 겪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양국 간 경제여건의 차이 등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UBS, 골드만삭스 등이 평가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자산버블의 붕괴 가능성이 낮고 가계부채도 관리 가능한 수준이다. 선제적인 구조개혁을 통해 이러한 리스크 관리가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노무라 등이 평가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지속적인 경제 시스템 개혁능력은 이러한 리스크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시킨다. 두 번째로 일본보다 인구가 적어 수출주도형 경제가 불가피한 것도 우리의 장점이다. 글로벌 경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지속적인 혁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은 우리 기업들 또한 글로벌한 유연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이는 일본 기업의 폐쇄성, 자국 기업끼리의 수직적인 분업 관행과 큰 차이점이다.>
한국경제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기획재정부의 판단이 이러하다면 묵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정말 한국은 일본식 장기불황의 위험성으로부터 안전한 것일까? 혹시 기획재정부의 상황인식이 주관적이고 자기편의적인 것은 아닐까?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들어 호들갑을 떠는 것도 문제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난 괜찮아’를 연발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기획재정부가 바로 그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획재정부는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처럼 되는 것, 즉 일본화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지적한 버블붕괴는 잃어버린 20년의 단초이지 그 본질이 아니다. 1990년대 초의 버블붕괴가 일본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버블붕괴가 ‘잃어버린 20년’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한 예를 들어 보자.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의 부동산버블은 급격히 붕괴하였다. 그 후 벤 버냉키가 이끄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양적완화 조치를 통해 경기회복에 진력한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우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였으며, 주택경기도 살아나 미국연방주택금융청(FHFA)이 발표한 2013년 주택가격 상승률은 8.5%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출구전략으로 양적완화를 축소하는 테이퍼링과 기준금리 인상을 언제 어떻게 실시할 것인가에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처럼 버블붕괴가 반드시 장기침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복이 잘되면 기저(基底)효과로 인한 깜짝 반등(反騰)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일본이 경험한 ‘잃어버린 20년’의 본질은 버블붕괴에 있지 않다.
4低 不況의 惡循環
그렇다면 ‘일본화’란 무엇인가? 금리가 내려가면 투자가 늘고, 물가가 내려가면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이 경제학 교과서의 가르침이다. 이것을 깨뜨린 것이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이다. 저금리·저물가에도 투자와 소비는 늘어나지 않고, 소비와 투자의 위축이 물가와 금리를 다시 하락시키는 악순환, 그로 인한 장기침체가 ‘잃어버린 20년’의 본질이다.
저금리·저물가·저투자·저소비의 악순환이라는 4저불황의 구조화와 실기(失機)를 거듭한 정책실패로 일본은 결국 1999년 디플레이션을 맞이하였다. 물가의 지속적 하락 현상인 디플레는 ‘잃어버린 20년’의 초기 단계부터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4저불황이 구조화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디플레는 1999년에 시작해 2006년까지 지속하였다. 이후 나아지는 듯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재발하였다.
이렇듯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버블붕괴로 시작되어 4저불황의 구조화 단계를 거쳐 디플레로 진입하는 프로세스로 진행하였다. 즉 버블붕괴가 곧바로 디플레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버블붕괴부터 디플레 진입까지는 7〜8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의 특징은 물가는 상승하는데 상승률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둔화되어 저물가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1992〜97년 일본의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7%에 불과했다. 상승률 자체는 플러스이지만 전년(前年) 대비 상승률이 하락한 이 기간이 결과적으로는 ‘디플레 준비기간’이었던 셈이다.
디플레의 함정
그런데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저물가가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소비는 얼어붙었다. 일본의 가계소비지출은 버블붕괴 이후 1997년까지 완만한 상승세를 유지하였으나, 전년 대비 증가율은 1〜2%대로 급락하여 결국 1998년 마이너스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99년부터 디플레가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예비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9년 초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경기활성화를 위해 콜금리를 0.02%까지 떨어뜨리며 자본주의 역사상 전례(前例)가 없는 제로금리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은행에 자금이 넘쳐나는데도 기업의 투자수요와 가계의 소비수요가 늘지 않아 디플레를 치유하는 데 실패했다.
4저불황의 구조화가 없었다면 디플레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화의 핵심은 4저불황의 구조화에 있다. 디플레는 그 결과물이다. 1999년부터 시작한 디플레는 잃어버린 세월의 시간을 10년에서 20년으로 연장시켰다. 경제주체들이 물가가 더 하락할 것이라는 기대심리로 소비와 투자를 미루고, 이것이 다시 ‘가격파괴’ 마케팅을 촉진하는 ‘디플레 함정’에 빠진 것이다. 4저불황의 악순환은 디플레 함정으로 확대 심화하였다. 아베노믹스의 과녁이 디플레 탈출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1년 3.7%, 2012년 2.3%, 2013년 3.0%를 기록하였다. 올해 역시 전망치인 3.9% 성장을 하회(下回)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한국경제는 4년 연속 2~3%대 성장이라는, 한국은행이 GDP 성장률 통계를 발표하기 시작한 1953년 이래 초유의 저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연(年)평균 9%대의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경제가 불과 20여 년 만에 2~3%대의 저성장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일본이 그랬다. 한국전쟁 특수와 도쿄올림픽 등의 호재를 안고 탈공업화를 시작한 1973년까지 일본경제는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연평균 10%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이후 연평균 4%대 성장에 머물다가 1990년대 초 버블붕괴 이후 20년 동안 연평균 0.76% 성장이라는 잃어버린 세월을 경험하게 된다. 1973년에 시작한 일본경제의 성숙기는 1990년대 초에 끝나고 노화기(老化期)가 시작되었다. 고령화의 진행속도에서 확인되듯 일본은 타(他) 선진국과 비교해 성숙단계를 조기졸업한 것이다.
한국 역시 1990년대 시작한 성숙단계를 20년 만에 졸업하고 2010년 이후 노화단계에 들어섰다. 성숙을 넘어 조로(早老)하고 있는 것이다. 혹한기의 세계경제, 초고속·압축 고령화, 근로정신의 퇴화 등이 한국경제의 조로화를 촉진하고 있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빛을 발했던 초(超)고속성과 압축성은 쇠퇴의 초고속성과 압축성으로 전이(轉移)되어 나타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잃어버린 20년’의 일본과 같은 전철(前轍)을 밟을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미 배는 떠났다. 이제까지 나타난 증상을 종합해 볼 때, 한국은 이미 일본식 복합불황의 초기단계에 들어섰다. 일본과 같은 버블붕괴의 충격은 없었지만, 4저불황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수요공급 관계, 근본적으로 변화
일반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면 물가는 하락한다. 투자수요가 감퇴하여 투자재 가격이 하락하고, 민간저축이 늘어 소비수요가 줄면서 소비재가격도 하락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금리를 인하하면 투자와 소비가 늘어 물가는 상승하는 경향을 띤다.
고도성장기는 고금리 시대였다. 자금에 대한 수요가 늘 공급을 초과했다.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금리를 높게 받아도 상관없으니 제발 은행 문턱이라도 밟게 해 달라고 하소연하곤 했다.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명동의 사채시장을 찾았다.
그러나 한국경제가 성숙을 넘어 조로 증세를 보이면서 수요-공급 관계도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과거의 초과수요가 수요부족으로 바뀐 것이다. 돈에 대한 수요와 공급 역시 마찬가지다. 경기의 하강을 차단하고 회복을 촉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정책금리(기준금리와 콜금리)를 인하하였는데도 투자수요와 소비수요가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는 현상이 한국경제의 뉴 노멀로 자리 잡았다. 1997년 이후 금리는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시장금리는 역대 최저치(2014년 10월 현재 기준금리 2.25%, 콜금리 2.34%)를 기록하고 있다. 정기예금 금리는 2%대로 떨어져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는 0%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기업의 사내 현금유보 규모가 역대 최대인 데서 나타나듯이 저금리로 인한 투자수요는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은행 예금 잔액이 가파르게 늘면서 2013년 10월 기준 56개 예금은행의 평균 예금 잔액은 1001조4370억원으로 사상 최초로 1000조원을 돌파했다. 같은 해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돌파해 해당 가구의 자금여력이 줄어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유 자금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은행예금에 돈을 묻어 두고 있는 것이다.
유동성이 풍부한데 투자를 기피하는 현상은 설비투자 동향을 통해 확인된다. 설비투자란 기업이 장단기 경영계획하에 재생산을 목적으로 기계장치, 운반차량 및 건물 등의 설비를 도입하는 것을 말한다. 설비투자는 소비, 수출 등과 함께 GDP를 구성하는 주요 항목으로 자본재에 대한 수요증가를 통해 관련 산업의 생산활동을 증대시키고, 이것이 다시 고용증대 및 소득증가로 연결되어 소비의 증가를 가져온다. 소비수요 증가는 다시 소비재의 생산활동을 증대시켜 GDP 상승에 기여한다.
설비투자 증감률은 2012년 0.1%, 2013년 -1.5%로 하향세를 나타내고 있다. ‘투자 빙하기(氷河期)’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투자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고 했겠는가?
실질소비, 계속 감소
물가도 저공비행을 하고 있다. 201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대비 1.3%로 1999년 외환위기 여파로 0.8%를 기록한 이래 1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은 2012년 11월부터 1%대에 진입하여 2014년 9월까지 22개월째 1%대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둔화는 한국은행이 제시한 물가안정 범위(2.5〜3.5%) 하한선을 한참 밑돌고 있다. 선진국과 비교해 보면 한국의 저물가가 심각하다는 것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2012년 소비자물가 상승률(2.2%)은 OECD 회원국 평균(2.3%)보다 낮았고, 2013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소비자물가에 선행한다는 생산자물가는 2012년 10월에 전년 동월 대비 -0.5%를 기록한 이후 2014년 5월까지 20개월째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갔다. 전월 대비 생산자물가가 20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2014년 6월과 7월에 반등하였으나 0.1〜0.2%의 미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낮은 금리와 낮은 물가는 소비를 늘려야 정상이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정반대의 현상이 지속되고 있고, 그것이 뉴 노멀, 새로운 정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민간소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56%에서 2013년 50.6%로 하락하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3분기부터 2013년 3분기까지 실질소득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6%, 3.6%, 0.3%, 1.3%, 1.6%였으나, 실질소비 증가율은 각각 -0.7%, -0.3%, -2.4%, -0.4%, -0.1%였다. 실질소득이 완만하게나마 증가하는데 실질소비는 5분기 연속 감소한 것이다.
통계청의 ‘2013년 연간 가계동향’에 따르면 2013년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은 248만1000원으로 전년 대비 0.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연간 소비지출 증가율이 1% 아래로 떨어진 것은 관련통계가 발표되기 시작한 2004년 이후 처음이다. 실질소비지출 증가율은 -0.4%였다. 평균 소비성향은 73.4%로 2003년 통계작성 이래 가장 낮았다. 쓸 수 있는 돈이 100만원인데 73만원만 쓴 것이다.
한국경제 발전단계, 완전히 바뀌어
이처럼 금리와 물가는 사상 최저 수준인데 투자와 소비는 냉각되어 있다. 4저불황이 구조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디플레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추세가 지속되면 디플레는 피할 수 없다. 한국은 지금 1990년대 초 버블붕괴 이후 1999년 디플레가 시작되기까지 일본이 걸었던 길의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책당국의 상황인식은 안이하기 짝이 없다. 기획재정부는 2013년 상반기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둔화를 국제유가 및 곡물가의 안정 그리고 무상보육 실시 등의 특수요인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며 하반기부터 다시 상승추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하였으나, 오히려 더 낮아졌다. 2014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전년 대비 2.8%로 전망하였으나, 2014년 9월 현재 1.38% 상승에 머물고 있다. 한국은행 역시 3% 안팎의 기대 인플레이션 심리를 언급하며 물가상승에 대비해야 한다며 기획재정부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디플레가 우려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다 보니 냉정한 현실인식보다는 희망적 사고(思考)의 유혹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舊)시대의 낡은 잣대로 현재를 진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한국경제의 발전단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고혈압을 걱정하던 시대에서 저혈압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의 3저호황과 지금의 4저불황을 비교해 보자. 저유가·저금리·수출호조라는 현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왜 그때는 호황(好況)이고 지금은 불황인가? 왜 그때는 인플레를 걱정했는데 지금은 디플레를 걱정하는가?
대개 디플레는 수요 측면에서 비롯된다. 소비와 투자가 줄어 물가가 떨어지는 것이다. 3저호황은 초과수요가 시대적 배경이었지만, 현재의 4저불황은 수요부족이 원인이 되고 있다. 라가르드 IMF총재가 글로벌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경제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내수(內需)를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가안정 중시는 5共시절 思考
물가안정은 거시경제 운영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 ‘물가가 잡혔다’는 말은 곧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5공화국 정권이 물가안정을 경제정책의 핵심목표로 삼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하지만 최근의 저물가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한국경제가 노화단계에 들어서면서 소비와 투자의 수요부족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근로자들의 실질소득 감소, 자산가치의 하락, 저금리로 인한 이자소득의 축소 등이 만성적 수요부족을 야기하고 있다. 1000조원을 넘어선 가계(家計)부채는 소비를 더욱 위축시키고 이로 인한 내수침체가 저물가현상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바닥을 기는 물가상승률은 부채의 실질부담을 감소시키지 못해 가계부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기업은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투자를 기피하고 임금을 줄이거나 기존 노동자를 해고하는 식으로 움직인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2013년 물가상승률을 당초 예상치인 2.3%보다 훨씬 낮은 1.3%로 안정시킨 것을 현오석 경제팀의 업적으로 꼽았다. 한국은행은 여전히 물가안정을 중앙은행의 성스러운 임무로 여기고 있다. 5공화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기획재정부는 앞서 인용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우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로 인해 지속적 혁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진단하였는데 이 또한 맥을 잘못 짚고 있다. 한국이 일본보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일본은 세계가 공인하는 수출대국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수출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수출전선에 이상이 생겨 장기불황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면 기획재정부의 진단이 맞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1992년 일본의 수출액은 3399억 달러, 2011년 수출액은 8225억 달러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의 수출은 2.4배 늘어났다. GDP 대비 수출의존도도 1992년 8.8%에서 2011년 14.0%로 높아졌다. 이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0.76%였던 점, GDP가 1992년 3조8530억 달러에서 2011년 5조8670억 달러로 1.5배 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장세다.
한마디로 수출은 잘나갔지만, 일본경제는 장기불황에 빠진 것이다. 한국의 사정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2013년 한국은 아베노믹스의 엔저로 인한 수출타격 우려 속에서도 3년 연속 무역 1조 달러 달성, 사상 최대 규모의 수출(5597억 달러)과 무역수지 흑자(442억 달러)를 기록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경상수지 흑자(黑字)는 최초로 일본을 추월하였고 대(對)중국 수출 1위 자리도 일본에게서 빼앗았다. 그러나 국내 체감경기는 싸늘하기만 하다. 수출주도형 경제구조 덕분에 장기불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획재정부의 진단은 과녁을 빗나갔다.
고용은 계속 줄어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수출호조가 내수활성화로 연결되는 고리가 끊긴 것이다. 이른바 낙수(落水)효과의 실종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수출신장에도 불구하고 내수부진, 소비위축으로 경기가 침체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수출이 늘면 기업 실적이 개선돼 고용과 가계소득이 증가하고 소비가 늘어났던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낙수효과의 실종으로 수출과 소비의 선순환구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트리플 크라운 달성에서 확인되듯이 수출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성장기여도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11년 한국의 무역액은 사상 최초로 1조 달러를 돌파하며 수출 세계 7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수출의 고용유발계수(생산액 10억원당 직간접적으로 유발되는 고용자 수)는 1999년 31.9명을 정점으로 계속 하락해 2009년에는 14.4명으로 10년 만에 절반 이하로 낮아졌다. 인력수요가 적은 정유화학과 같은 장치산업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노동집약도가 높은 자동차업체들도 수출은 늘었지만 고용은 줄었다.
내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용유발효과가 낮은 수출의 성장기여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한국이 그러하다. 한국의 4저불황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수출호조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경제의 봄날은 오고 있었나?
세월호 참사 이후 나라경제 운영에 비상이 걸렸다. 여행·운송·숙박·요식업 등은 직격탄을 맞았고 의류·주류·오락·식품류 등도 타격을 입었다. 사고발생 이후 보름간 개인 신용카드 사용액은 전년 대비 5% 줄어들었다. 금융연구원은 세월호 참사로 민간소비가 1조원 줄어 올해 경제성장률이 0.1%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정부는 대통령 주재로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열고 세월호 여파로 인한 경기하강을 막기 위해 2분기에 7조8000억원의 재정을 더 풀기로 결정하였다.
세월호 참사가 정부가 당초 기대했던 내수활성화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회복세를 보이던 경기가 세월호 참사로 꺾이게 되었다는 설명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한국은행은 2014년 4월 11일 <경기판단모형에 의한 현 경기 국면 진단>이란 보고서에서 한국경제는 2011년 상반기에 정점을 기록하고 2013년 상반기에 저점을 찍은 후 상승 국면에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과연 그럴까? 한국경제의 봄날은 오고 있었던 것일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 이전인 금년 1분기의 민간소비 증가율은 전기 대비 0.2%로 작년 4분기 0.6%의 1/3 수준이다. 작년 3분기는 1.0%였다. 도대체 무엇이 회복되고 있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민간소비의 위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간소비의 추세적 하락은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확인되어 온 현상이다. 과거 외환위기와 카드대란이 소나기와 같은 것이었다면, 최근 10년은 장마와 같은 상황이다.
최근의 4저불황은 몇 년 주기로 경기가 정점(頂點)과 저점(低點)을 왔다 갔다 한다는 식의 경기순환론으로 치유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구조적 틀을 혁파하고 체질을 바꾸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아픔 없이는 치유 불가능한 증상이다. 구조개혁 없는 재정확장과 금리인하는 병(病)을 키울 뿐이다.
세월호 핑계 대지 말자
지금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이나 퀀텀점프를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4저불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무엇으로 어떻게 끊을 것인가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베노믹스의 목표가 디플레 탈출이듯이, 현 단계 한국 경제정책의 과녁은 4저불황 탈출이어야 한다. 가계부채는 관리가능한 수준이며, 저물가는 일시적 현상이고, 디플레 위험은 거의 없다는 식의 안이한 상황판단이 몰고 올 재앙은 너무도 명확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멍청하게 뒤따라가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4.0%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수출보다 내수의 성장기여도가 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과거 참사 때는 소비위축이 한두 달에 그쳤는데, 이번에는 2분기 내내 지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올해 성장률과 내수의 성장기여도가 전망치에 미달할 것이 분명하니 한국은행은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인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소비를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 올해 2분기 민간소비 증가율은 전기 대비 -0.3%였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회복되던 경기가 다시 꺾이게 되었다는 구차한 변명은 하지 말자. 전 국민의 가슴에 멍울을 지운 세월호 참사가 안이한 경기전망을 한 정책당국자들의 도피처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한강의 기적을 낳았고 민주화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제공했던 수출·제조·대기업 중심의 불균형성장 전략은 수명을 다했고, 기업과 가계 그리고 수출과 내수를 연결해 주던 낙수의 고리는 끊겼다. 한국의 시장은 더 이상 포용적이지 않다. 교육 등을 통한 계층이동의 활성화는 현저히 둔화하였고 부(富)의 대물림 현상은 심화하고 있다. 기업과 가계 그리고 수출과 내수가 따로 노는 디커플링(Decoupling) 경제는 국민통합의 사회경제적 토대마저 침식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목표는 분명하다.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창출하여 경제주체 및 부문 간의 탈동조화 현상을 재동조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디커플링 경제를 리커플링(Recoupling) 경제로 개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그래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삼성전자 휴대폰을 100만원어치 수출하는 것보다 중국관광객이 국내에서 100만원어치 소비하는 것이 포용적 성장과 리커플링에 훨씬 이롭다는 사실이다. 전자(前者)의 낙수효과는 미미한 반면, 후자(後者)의 낙수효과는 크다.
이처럼 한국경제의 리커플링 전략은 발상의 전환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낙수효과가 실종하였다 해서 수출·제조·대기업에 화풀이를 하고 군기를 잡는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착오적 처방은 문제를 더 꼬이게 할 뿐이다. 잘나가는 사람 뒷다리 잡아 경제가 잘 풀린 사례는 없다.
‘內需의 世界化’ 전략 필요
경제발전의 기본은 나누기가 아니라 키우기다. 리커플링 전략의 핵심은 새로운 생태계 조성에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수출·제조·대기업에 비해 현저하게 낙후되어 있는 내수·서비스업을 획기적으로 키워야 한다.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 전략이라는 기존의 교과서적 해법을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와 같은 정부주도의 산업정책은 불가능하겠지만, 국가적 자원배분과 정책배려의 우선순위를 서비스산업 육성에 두어야 한다. 제조업은 이미 글로벌 플레이어가 된 대기업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 경제민주화라는 긁어 부스럼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 정부정책의 초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새로운 생태계 출현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쳐부수어야 한다. 새로운 인물들이 새로운 분야에서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새싹이 여기저기서 돋는다. 이것이 바로 서비스빅뱅의 요체다.
서비스빅뱅으로 인한 새로운 세계의 출현은 대한민국의 풍경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서비스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그에 따른 새로운 수요의 창출은 기존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한류를 통해 경험했다. ‘별 그대’가 없었으면 액티브 엑스는 X표 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치맥 열풍이 불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장금’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요우커(遊客)들이 성형을 하러 한국을 찾았을 리 없다. 이제 한국은 경쟁력을 확보한 문화콘텐츠뿐만 아니라 의료, 관광, 교육, 금융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을 새로운 성장의 기둥으로 삼아야 한다. 저출산 고령화로 쪼그라들고 있는 소비여력도 외국인 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여 돈을 쓰게 만드는 ‘내수의 세계화(世界化)’ 전략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노동의존도가 높은 서비스산업의 성장은 ‘고용 있는 성장’을 이루어 실종된 낙수효과를 복원하고 한국경제의 리커플링을 촉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비스빅뱅은 한국경제 리커플링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담을 그릇을 마련하는 것 역시 긴요하다.
핵심은 무엇인가? 고용·복지·교육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어 근로복지 문화의 일대혁신을 이루어야 한다. 무상복지가 아니라 일하는 복지를 지표로 삼아야 한다.
전술(前述)하였듯이 한국의 워킹 스피릿은 퇴화하고 있다. 표의 노예가 된 여의도정치는 무상복지를 남발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학진학률은 청년고용 시장의 미스매치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제 한국사회는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보다 잘사는 독일, 스위스보다 두 배 높은 대학진학률을 어떻게 졸업생들의 기대수준에 맞는 취업으로 연결시킬지 답해야 한다. 그건 손오공의 요술방망이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위선(僞善)을 거두어야 한다. 반값 등록금 같은 허황한 공약으로 젊은이들을 오도할 것이 아니라 마이스터고를 대대적으로 육성하여 가방 끈 길지 않아도 웬만큼 먹고살 수 있는 사회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
전업주부와의 합리적 차등을 두지 않음으로써 워킹맘 아이들의 보육을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무상보육정책을 시행하면서 여성의 경력단절을 극복하겠다는 이율배반(二律背反) 또한 부끄러워해야 한다. 재정건전성 강화를 이야기하면서 무상복지를 남발하는 낯 뜨거운 행위도 그만두어야 한다. 각 분야가 따로 노는 분절적(分節的) 정책으로는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 재정, 산업, 고용, 복지, 교육 등 분야는 다르더라도 모든 정책의 방향성이 일치해야 한다.
문제는 뒷북대응
정치는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실기를 하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거나 처방이 가능하더라도 훨씬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디플레가 발생한 1999년이 되어서야 파격적인 제로금리 정책을 단행하였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1년 3월에서야 월례(月例) 경제보고서를 통해 디플레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뒷북만 치는 안이한 대응으로 화(禍)를 키운 것이다. 한국정부 역시 비슷한 우(愚)를 범하고 있다. 선제적(先制的) 금리인하의 타이밍을 이미 놓쳐 버렸고, 희망적 사고에 젖어 저물가 현상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서비스빅뱅 등의 고통스러운 구조개혁보다 재정확대 등의 손쉬운 단기처방을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이 몰고 올 결과는 자명하다. 경기부양에 실패하고 재정건전성도 악화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진단이 정확해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정책당국은 엉터리 진단을 남발하고 있다. 4저불황에 빠진 한국경제를 구출하는 작업은 자신이 병자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 가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다. 실제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은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일본의 버블붕괴 시점인 1990년대 초반은 생산가능인구(15〜64세)의 증가율이 피부양인구의 증가율보다 높은 시기인 ‘인구보너스기’의 종료와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의 경우 2012년에 인구보너스기가 종료했다. 2016년부터는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든다.
한국의 고령화(高齡化)는 일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하고 있다. 65세 이상 고령인구의 비중이 7%인 고령화 사회에서 20% 이상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데 일본이 36년 걸려 세계 최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2026년에, 불과 26년 만에 초고령 사회에 진입할 전망이다.
高齡化로 인한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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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시내의 텅빈 신생아실. 한국의 2013년 출산율은 1.2로 1.4인 일본보다 낮다. |
출산율 또한 2013년 1.2로 1.4인 일본보다 낮다. 경제 역시 고성장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저(低)성장이 고착화되고 있다. 잠재성장률은 3%대로 저하되었고 복지 욕구가 분출하고 있어 한국경제의 최대 강점이었던 재정건전성은 악화 일로에 있다. 표(票)의 노예가 된 여의도정치는 무분별한 복지 확대에 정치적 명운을 걸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한국도 일본과 같은 장기복합불황(長期複合不況)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는 2013년 2월에 펴낸 <대한민국 중장기 정책과제>란 두툼한 보고서에서 그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관련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보자.
한국경제는 문제 없다?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일본식의 장기불황을 겪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양국 간 경제여건의 차이 등이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UBS, 골드만삭스 등이 평가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자산버블의 붕괴 가능성이 낮고 가계부채도 관리 가능한 수준이다. 선제적인 구조개혁을 통해 이러한 리스크 관리가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노무라 등이 평가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지속적인 경제 시스템 개혁능력은 이러한 리스크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시킨다. 두 번째로 일본보다 인구가 적어 수출주도형 경제가 불가피한 것도 우리의 장점이다. 글로벌 경쟁에 노출될 수밖에 없어 지속적인 혁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은 우리 기업들 또한 글로벌한 유연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이는 일본 기업의 폐쇄성, 자국 기업끼리의 수직적인 분업 관행과 큰 차이점이다.>
한국경제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기획재정부의 판단이 이러하다면 묵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정말 한국은 일본식 장기불황의 위험성으로부터 안전한 것일까? 혹시 기획재정부의 상황인식이 주관적이고 자기편의적인 것은 아닐까? 작은 문제를 크게 만들어 호들갑을 떠는 것도 문제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난 괜찮아’를 연발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기획재정부가 바로 그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무엇보다 기획재정부는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처럼 되는 것, 즉 일본화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지적한 버블붕괴는 잃어버린 20년의 단초이지 그 본질이 아니다. 1990년대 초의 버블붕괴가 일본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버블붕괴가 ‘잃어버린 20년’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한 예를 들어 보자.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의 부동산버블은 급격히 붕괴하였다. 그 후 벤 버냉키가 이끄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양적완화 조치를 통해 경기회복에 진력한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우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였으며, 주택경기도 살아나 미국연방주택금융청(FHFA)이 발표한 2013년 주택가격 상승률은 8.5%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출구전략으로 양적완화를 축소하는 테이퍼링과 기준금리 인상을 언제 어떻게 실시할 것인가에 세계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처럼 버블붕괴가 반드시 장기침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복이 잘되면 기저(基底)효과로 인한 깜짝 반등(反騰)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일본이 경험한 ‘잃어버린 20년’의 본질은 버블붕괴에 있지 않다.
4低 不況의 惡循環
그렇다면 ‘일본화’란 무엇인가? 금리가 내려가면 투자가 늘고, 물가가 내려가면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이 경제학 교과서의 가르침이다. 이것을 깨뜨린 것이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이다. 저금리·저물가에도 투자와 소비는 늘어나지 않고, 소비와 투자의 위축이 물가와 금리를 다시 하락시키는 악순환, 그로 인한 장기침체가 ‘잃어버린 20년’의 본질이다.
저금리·저물가·저투자·저소비의 악순환이라는 4저불황의 구조화와 실기(失機)를 거듭한 정책실패로 일본은 결국 1999년 디플레이션을 맞이하였다. 물가의 지속적 하락 현상인 디플레는 ‘잃어버린 20년’의 초기 단계부터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4저불황이 구조화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디플레는 1999년에 시작해 2006년까지 지속하였다. 이후 나아지는 듯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재발하였다.
이렇듯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버블붕괴로 시작되어 4저불황의 구조화 단계를 거쳐 디플레로 진입하는 프로세스로 진행하였다. 즉 버블붕괴가 곧바로 디플레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버블붕괴부터 디플레 진입까지는 7〜8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의 특징은 물가는 상승하는데 상승률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둔화되어 저물가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1992〜97년 일본의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7%에 불과했다. 상승률 자체는 플러스이지만 전년(前年) 대비 상승률이 하락한 이 기간이 결과적으로는 ‘디플레 준비기간’이었던 셈이다.
디플레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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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을 앞두고 취업박람회에 몰려든 대학생들. 수출은 늘어도 고용은 줄어드는 현상이 고착화되고 있다. |
1999년 초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경기활성화를 위해 콜금리를 0.02%까지 떨어뜨리며 자본주의 역사상 전례(前例)가 없는 제로금리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은행에 자금이 넘쳐나는데도 기업의 투자수요와 가계의 소비수요가 늘지 않아 디플레를 치유하는 데 실패했다.
4저불황의 구조화가 없었다면 디플레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화의 핵심은 4저불황의 구조화에 있다. 디플레는 그 결과물이다. 1999년부터 시작한 디플레는 잃어버린 세월의 시간을 10년에서 20년으로 연장시켰다. 경제주체들이 물가가 더 하락할 것이라는 기대심리로 소비와 투자를 미루고, 이것이 다시 ‘가격파괴’ 마케팅을 촉진하는 ‘디플레 함정’에 빠진 것이다. 4저불황의 악순환은 디플레 함정으로 확대 심화하였다. 아베노믹스의 과녁이 디플레 탈출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1년 3.7%, 2012년 2.3%, 2013년 3.0%를 기록하였다. 올해 역시 전망치인 3.9% 성장을 하회(下回)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한국경제는 4년 연속 2~3%대 성장이라는, 한국은행이 GDP 성장률 통계를 발표하기 시작한 1953년 이래 초유의 저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연(年)평균 9%대의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경제가 불과 20여 년 만에 2~3%대의 저성장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일본이 그랬다. 한국전쟁 특수와 도쿄올림픽 등의 호재를 안고 탈공업화를 시작한 1973년까지 일본경제는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연평균 10%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이후 연평균 4%대 성장에 머물다가 1990년대 초 버블붕괴 이후 20년 동안 연평균 0.76% 성장이라는 잃어버린 세월을 경험하게 된다. 1973년에 시작한 일본경제의 성숙기는 1990년대 초에 끝나고 노화기(老化期)가 시작되었다. 고령화의 진행속도에서 확인되듯 일본은 타(他) 선진국과 비교해 성숙단계를 조기졸업한 것이다.
한국 역시 1990년대 시작한 성숙단계를 20년 만에 졸업하고 2010년 이후 노화단계에 들어섰다. 성숙을 넘어 조로(早老)하고 있는 것이다. 혹한기의 세계경제, 초고속·압축 고령화, 근로정신의 퇴화 등이 한국경제의 조로화를 촉진하고 있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빛을 발했던 초(超)고속성과 압축성은 쇠퇴의 초고속성과 압축성으로 전이(轉移)되어 나타나고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잃어버린 20년’의 일본과 같은 전철(前轍)을 밟을 것인가 아닌가를 두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미 배는 떠났다. 이제까지 나타난 증상을 종합해 볼 때, 한국은 이미 일본식 복합불황의 초기단계에 들어섰다. 일본과 같은 버블붕괴의 충격은 없었지만, 4저불황에 빠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수요공급 관계, 근본적으로 변화
일반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면 물가는 하락한다. 투자수요가 감퇴하여 투자재 가격이 하락하고, 민간저축이 늘어 소비수요가 줄면서 소비재가격도 하락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금리를 인하하면 투자와 소비가 늘어 물가는 상승하는 경향을 띤다.
고도성장기는 고금리 시대였다. 자금에 대한 수요가 늘 공급을 초과했다.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금리를 높게 받아도 상관없으니 제발 은행 문턱이라도 밟게 해 달라고 하소연하곤 했다. 은행 문턱을 넘지 못한 사람들은 명동의 사채시장을 찾았다.
그러나 한국경제가 성숙을 넘어 조로 증세를 보이면서 수요-공급 관계도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과거의 초과수요가 수요부족으로 바뀐 것이다. 돈에 대한 수요와 공급 역시 마찬가지다. 경기의 하강을 차단하고 회복을 촉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정책금리(기준금리와 콜금리)를 인하하였는데도 투자수요와 소비수요가 기대만큼 살아나지 않는 현상이 한국경제의 뉴 노멀로 자리 잡았다. 1997년 이후 금리는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시장금리는 역대 최저치(2014년 10월 현재 기준금리 2.25%, 콜금리 2.34%)를 기록하고 있다. 정기예금 금리는 2%대로 떨어져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는 0%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기업의 사내 현금유보 규모가 역대 최대인 데서 나타나듯이 저금리로 인한 투자수요는 별로 발생하지 않았다.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은행 예금 잔액이 가파르게 늘면서 2013년 10월 기준 56개 예금은행의 평균 예금 잔액은 1001조4370억원으로 사상 최초로 1000조원을 돌파했다. 같은 해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돌파해 해당 가구의 자금여력이 줄어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유 자금들이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은행예금에 돈을 묻어 두고 있는 것이다.
유동성이 풍부한데 투자를 기피하는 현상은 설비투자 동향을 통해 확인된다. 설비투자란 기업이 장단기 경영계획하에 재생산을 목적으로 기계장치, 운반차량 및 건물 등의 설비를 도입하는 것을 말한다. 설비투자는 소비, 수출 등과 함께 GDP를 구성하는 주요 항목으로 자본재에 대한 수요증가를 통해 관련 산업의 생산활동을 증대시키고, 이것이 다시 고용증대 및 소득증가로 연결되어 소비의 증가를 가져온다. 소비수요 증가는 다시 소비재의 생산활동을 증대시켜 GDP 상승에 기여한다.
설비투자 증감률은 2012년 0.1%, 2013년 -1.5%로 하향세를 나타내고 있다. ‘투자 빙하기(氷河期)’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투자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고 했겠는가?
실질소비, 계속 감소
물가도 저공비행을 하고 있다. 201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대비 1.3%로 1999년 외환위기 여파로 0.8%를 기록한 이래 1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년 동월 대비 상승률은 2012년 11월부터 1%대에 진입하여 2014년 9월까지 22개월째 1%대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둔화는 한국은행이 제시한 물가안정 범위(2.5〜3.5%) 하한선을 한참 밑돌고 있다. 선진국과 비교해 보면 한국의 저물가가 심각하다는 것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2012년 소비자물가 상승률(2.2%)은 OECD 회원국 평균(2.3%)보다 낮았고, 2013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소비자물가에 선행한다는 생산자물가는 2012년 10월에 전년 동월 대비 -0.5%를 기록한 이후 2014년 5월까지 20개월째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갔다. 전월 대비 생산자물가가 20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다. 2014년 6월과 7월에 반등하였으나 0.1〜0.2%의 미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낮은 금리와 낮은 물가는 소비를 늘려야 정상이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정반대의 현상이 지속되고 있고, 그것이 뉴 노멀, 새로운 정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민간소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56%에서 2013년 50.6%로 하락하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2년 3분기부터 2013년 3분기까지 실질소득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6%, 3.6%, 0.3%, 1.3%, 1.6%였으나, 실질소비 증가율은 각각 -0.7%, -0.3%, -2.4%, -0.4%, -0.1%였다. 실질소득이 완만하게나마 증가하는데 실질소비는 5분기 연속 감소한 것이다.
통계청의 ‘2013년 연간 가계동향’에 따르면 2013년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은 248만1000원으로 전년 대비 0.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연간 소비지출 증가율이 1% 아래로 떨어진 것은 관련통계가 발표되기 시작한 2004년 이후 처음이다. 실질소비지출 증가율은 -0.4%였다. 평균 소비성향은 73.4%로 2003년 통계작성 이래 가장 낮았다. 쓸 수 있는 돈이 100만원인데 73만원만 쓴 것이다.
한국경제 발전단계, 완전히 바뀌어
이처럼 금리와 물가는 사상 최저 수준인데 투자와 소비는 냉각되어 있다. 4저불황이 구조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디플레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추세가 지속되면 디플레는 피할 수 없다. 한국은 지금 1990년대 초 버블붕괴 이후 1999년 디플레가 시작되기까지 일본이 걸었던 길의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책당국의 상황인식은 안이하기 짝이 없다. 기획재정부는 2013년 상반기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둔화를 국제유가 및 곡물가의 안정 그리고 무상보육 실시 등의 특수요인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며 하반기부터 다시 상승추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하였으나, 오히려 더 낮아졌다. 2014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전년 대비 2.8%로 전망하였으나, 2014년 9월 현재 1.38% 상승에 머물고 있다. 한국은행 역시 3% 안팎의 기대 인플레이션 심리를 언급하며 물가상승에 대비해야 한다며 기획재정부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디플레가 우려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다 보니 냉정한 현실인식보다는 희망적 사고(思考)의 유혹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舊)시대의 낡은 잣대로 현재를 진단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한국경제의 발전단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고혈압을 걱정하던 시대에서 저혈압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의 3저호황과 지금의 4저불황을 비교해 보자. 저유가·저금리·수출호조라는 현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왜 그때는 호황(好況)이고 지금은 불황인가? 왜 그때는 인플레를 걱정했는데 지금은 디플레를 걱정하는가?
대개 디플레는 수요 측면에서 비롯된다. 소비와 투자가 줄어 물가가 떨어지는 것이다. 3저호황은 초과수요가 시대적 배경이었지만, 현재의 4저불황은 수요부족이 원인이 되고 있다. 라가르드 IMF총재가 글로벌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경제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내수(內需)를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가안정 중시는 5共시절 思考
물가안정은 거시경제 운영의 주요 목표 중 하나였다. ‘물가가 잡혔다’는 말은 곧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5공화국 정권이 물가안정을 경제정책의 핵심목표로 삼은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하지만 최근의 저물가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한국경제가 노화단계에 들어서면서 소비와 투자의 수요부족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근로자들의 실질소득 감소, 자산가치의 하락, 저금리로 인한 이자소득의 축소 등이 만성적 수요부족을 야기하고 있다. 1000조원을 넘어선 가계(家計)부채는 소비를 더욱 위축시키고 이로 인한 내수침체가 저물가현상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바닥을 기는 물가상승률은 부채의 실질부담을 감소시키지 못해 가계부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기업은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투자를 기피하고 임금을 줄이거나 기존 노동자를 해고하는 식으로 움직인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2013년 물가상승률을 당초 예상치인 2.3%보다 훨씬 낮은 1.3%로 안정시킨 것을 현오석 경제팀의 업적으로 꼽았다. 한국은행은 여전히 물가안정을 중앙은행의 성스러운 임무로 여기고 있다. 5공화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기획재정부는 앞서 인용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경우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로 인해 지속적 혁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진단하였는데 이 또한 맥을 잘못 짚고 있다. 한국이 일본보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일본은 세계가 공인하는 수출대국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수출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수출전선에 이상이 생겨 장기불황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면 기획재정부의 진단이 맞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1992년 일본의 수출액은 3399억 달러, 2011년 수출액은 8225억 달러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의 수출은 2.4배 늘어났다. GDP 대비 수출의존도도 1992년 8.8%에서 2011년 14.0%로 높아졌다. 이 기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0.76%였던 점, GDP가 1992년 3조8530억 달러에서 2011년 5조8670억 달러로 1.5배 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장세다.
한마디로 수출은 잘나갔지만, 일본경제는 장기불황에 빠진 것이다. 한국의 사정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2013년 한국은 아베노믹스의 엔저로 인한 수출타격 우려 속에서도 3년 연속 무역 1조 달러 달성, 사상 최대 규모의 수출(5597억 달러)과 무역수지 흑자(442억 달러)를 기록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경상수지 흑자(黑字)는 최초로 일본을 추월하였고 대(對)중국 수출 1위 자리도 일본에게서 빼앗았다. 그러나 국내 체감경기는 싸늘하기만 하다. 수출주도형 경제구조 덕분에 장기불황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획재정부의 진단은 과녁을 빗나갔다.
고용은 계속 줄어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수출호조가 내수활성화로 연결되는 고리가 끊긴 것이다. 이른바 낙수(落水)효과의 실종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수출신장에도 불구하고 내수부진, 소비위축으로 경기가 침체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수출이 늘면 기업 실적이 개선돼 고용과 가계소득이 증가하고 소비가 늘어났던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낙수효과의 실종으로 수출과 소비의 선순환구조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트리플 크라운 달성에서 확인되듯이 수출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성장기여도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2011년 한국의 무역액은 사상 최초로 1조 달러를 돌파하며 수출 세계 7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수출의 고용유발계수(생산액 10억원당 직간접적으로 유발되는 고용자 수)는 1999년 31.9명을 정점으로 계속 하락해 2009년에는 14.4명으로 10년 만에 절반 이하로 낮아졌다. 인력수요가 적은 정유화학과 같은 장치산업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노동집약도가 높은 자동차업체들도 수출은 늘었지만 고용은 줄었다.
내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용유발효과가 낮은 수출의 성장기여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한국이 그러하다. 한국의 4저불황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수출호조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경제의 봄날은 오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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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환 경제부총리(오른쪽)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최경환 경제팀과 한은은 과거 고도성장시대에나 적합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
세월호 참사가 정부가 당초 기대했던 내수활성화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회복세를 보이던 경기가 세월호 참사로 꺾이게 되었다는 설명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한국은행은 2014년 4월 11일 <경기판단모형에 의한 현 경기 국면 진단>이란 보고서에서 한국경제는 2011년 상반기에 정점을 기록하고 2013년 상반기에 저점을 찍은 후 상승 국면에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과연 그럴까? 한국경제의 봄날은 오고 있었던 것일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 이전인 금년 1분기의 민간소비 증가율은 전기 대비 0.2%로 작년 4분기 0.6%의 1/3 수준이다. 작년 3분기는 1.0%였다. 도대체 무엇이 회복되고 있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민간소비의 위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민간소비의 추세적 하락은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확인되어 온 현상이다. 과거 외환위기와 카드대란이 소나기와 같은 것이었다면, 최근 10년은 장마와 같은 상황이다.
최근의 4저불황은 몇 년 주기로 경기가 정점(頂點)과 저점(低點)을 왔다 갔다 한다는 식의 경기순환론으로 치유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구조적 틀을 혁파하고 체질을 바꾸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아픔 없이는 치유 불가능한 증상이다. 구조개혁 없는 재정확장과 금리인하는 병(病)을 키울 뿐이다.
세월호 핑계 대지 말자
지금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이나 퀀텀점프를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4저불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무엇으로 어떻게 끊을 것인가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베노믹스의 목표가 디플레 탈출이듯이, 현 단계 한국 경제정책의 과녁은 4저불황 탈출이어야 한다. 가계부채는 관리가능한 수준이며, 저물가는 일시적 현상이고, 디플레 위험은 거의 없다는 식의 안이한 상황판단이 몰고 올 재앙은 너무도 명확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멍청하게 뒤따라가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4.0%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수출보다 내수의 성장기여도가 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과거 참사 때는 소비위축이 한두 달에 그쳤는데, 이번에는 2분기 내내 지속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올해 성장률과 내수의 성장기여도가 전망치에 미달할 것이 분명하니 한국은행은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인한 것이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소비를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 올해 2분기 민간소비 증가율은 전기 대비 -0.3%였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회복되던 경기가 다시 꺾이게 되었다는 구차한 변명은 하지 말자. 전 국민의 가슴에 멍울을 지운 세월호 참사가 안이한 경기전망을 한 정책당국자들의 도피처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한강의 기적을 낳았고 민주화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제공했던 수출·제조·대기업 중심의 불균형성장 전략은 수명을 다했고, 기업과 가계 그리고 수출과 내수를 연결해 주던 낙수의 고리는 끊겼다. 한국의 시장은 더 이상 포용적이지 않다. 교육 등을 통한 계층이동의 활성화는 현저히 둔화하였고 부(富)의 대물림 현상은 심화하고 있다. 기업과 가계 그리고 수출과 내수가 따로 노는 디커플링(Decoupling) 경제는 국민통합의 사회경제적 토대마저 침식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목표는 분명하다. 포용적 성장(inclusive growth)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창출하여 경제주체 및 부문 간의 탈동조화 현상을 재동조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디커플링 경제를 리커플링(Recoupling) 경제로 개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그래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삼성전자 휴대폰을 100만원어치 수출하는 것보다 중국관광객이 국내에서 100만원어치 소비하는 것이 포용적 성장과 리커플링에 훨씬 이롭다는 사실이다. 전자(前者)의 낙수효과는 미미한 반면, 후자(後者)의 낙수효과는 크다.
이처럼 한국경제의 리커플링 전략은 발상의 전환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낙수효과가 실종하였다 해서 수출·제조·대기업에 화풀이를 하고 군기를 잡는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착오적 처방은 문제를 더 꼬이게 할 뿐이다. 잘나가는 사람 뒷다리 잡아 경제가 잘 풀린 사례는 없다.
‘內需의 世界化’ 전략 필요
경제발전의 기본은 나누기가 아니라 키우기다. 리커플링 전략의 핵심은 새로운 생태계 조성에 있다. 세계 최고수준의 수출·제조·대기업에 비해 현저하게 낙후되어 있는 내수·서비스업을 획기적으로 키워야 한다. 수출과 내수의 쌍끌이 전략이라는 기존의 교과서적 해법을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과거와 같은 정부주도의 산업정책은 불가능하겠지만, 국가적 자원배분과 정책배려의 우선순위를 서비스산업 육성에 두어야 한다. 제조업은 이미 글로벌 플레이어가 된 대기업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 경제민주화라는 긁어 부스럼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 정부정책의 초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새로운 생태계 출현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쳐부수어야 한다. 새로운 인물들이 새로운 분야에서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새싹이 여기저기서 돋는다. 이것이 바로 서비스빅뱅의 요체다.
서비스빅뱅으로 인한 새로운 세계의 출현은 대한민국의 풍경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서비스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그에 따른 새로운 수요의 창출은 기존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한류를 통해 경험했다. ‘별 그대’가 없었으면 액티브 엑스는 X표 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치맥 열풍이 불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장금’이 없었다면 그렇게 많은 요우커(遊客)들이 성형을 하러 한국을 찾았을 리 없다. 이제 한국은 경쟁력을 확보한 문화콘텐츠뿐만 아니라 의료, 관광, 교육, 금융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을 새로운 성장의 기둥으로 삼아야 한다. 저출산 고령화로 쪼그라들고 있는 소비여력도 외국인 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여 돈을 쓰게 만드는 ‘내수의 세계화(世界化)’ 전략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노동의존도가 높은 서비스산업의 성장은 ‘고용 있는 성장’을 이루어 실종된 낙수효과를 복원하고 한국경제의 리커플링을 촉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비스빅뱅은 한국경제 리커플링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담을 그릇을 마련하는 것 역시 긴요하다.
핵심은 무엇인가? 고용·복지·교육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이루어 근로복지 문화의 일대혁신을 이루어야 한다. 무상복지가 아니라 일하는 복지를 지표로 삼아야 한다.
전술(前述)하였듯이 한국의 워킹 스피릿은 퇴화하고 있다. 표의 노예가 된 여의도정치는 무상복지를 남발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학진학률은 청년고용 시장의 미스매치를 심화시키고 있다. 이제 한국사회는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보다 잘사는 독일, 스위스보다 두 배 높은 대학진학률을 어떻게 졸업생들의 기대수준에 맞는 취업으로 연결시킬지 답해야 한다. 그건 손오공의 요술방망이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위선(僞善)을 거두어야 한다. 반값 등록금 같은 허황한 공약으로 젊은이들을 오도할 것이 아니라 마이스터고를 대대적으로 육성하여 가방 끈 길지 않아도 웬만큼 먹고살 수 있는 사회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
전업주부와의 합리적 차등을 두지 않음으로써 워킹맘 아이들의 보육을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무상보육정책을 시행하면서 여성의 경력단절을 극복하겠다는 이율배반(二律背反) 또한 부끄러워해야 한다. 재정건전성 강화를 이야기하면서 무상복지를 남발하는 낯 뜨거운 행위도 그만두어야 한다. 각 분야가 따로 노는 분절적(分節的) 정책으로는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 재정, 산업, 고용, 복지, 교육 등 분야는 다르더라도 모든 정책의 방향성이 일치해야 한다.
문제는 뒷북대응
정치는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실기를 하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거나 처방이 가능하더라도 훨씬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일본 정부는 디플레가 발생한 1999년이 되어서야 파격적인 제로금리 정책을 단행하였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01년 3월에서야 월례(月例) 경제보고서를 통해 디플레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뒷북만 치는 안이한 대응으로 화(禍)를 키운 것이다. 한국정부 역시 비슷한 우(愚)를 범하고 있다. 선제적(先制的) 금리인하의 타이밍을 이미 놓쳐 버렸고, 희망적 사고에 젖어 저물가 현상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서비스빅뱅 등의 고통스러운 구조개혁보다 재정확대 등의 손쉬운 단기처방을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이 몰고 올 결과는 자명하다. 경기부양에 실패하고 재정건전성도 악화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진단이 정확해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정책당국은 엉터리 진단을 남발하고 있다. 4저불황에 빠진 한국경제를 구출하는 작업은 자신이 병자임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