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吳源哲前 대통령 경제수석의 ‘貿易立國 동행기’ : 월간조선

2011년 우리는 무역 1조 달러·수출 5000억 달러 달성을 앞두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수출액은 4153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3% 늘었다. 무역수지는 222억 달러 흑자로, 견실한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품목별 수출비중은 ▲1차산품(미가공 상태 원료) 118억 달러(2.85%) ▲경공업제품 250억 달러(6.1%) ▲중화학제품 3780억 달러(91%)다. 전체 수출의 91%가 중화학제품이다. 우리의 경제발전 궤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다.

50년 전인 1960년도 수출은 3282만 달러였다. 수입은 10배 넘는 3억4353만 달러다. 10대1의 무역역조 속에서도 나라 살림을 꾸릴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美國)의 원조 덕분이다. 미국은 1954~61년에 20억8834만 달러를 지원했다. 1960년 수입대금 결제에 이용된 공공원조액은 2억4636만 달러로, 71.7%의 대미(對美) 의존도를 보였다.

원조자금으로 수입한 상품을 시장에 판매했고, 수익은 국고(國庫)로 넣었다. 이를 대충자금(對充資金)이라고 하는데, 1960년도에는 대충자금 397억원이 있었다. 당시 세입(稅入)실적은 925억원으로 대충자금의 비중이 42.9%다. 즉 미국의 도움이 아니면 국가경영을 할 수 없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100달러 사용도 장관 승인 없이는 못해

1960대 초 미국의 원조물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정상 국가라면 수출을 늘리거나 수입을 줄여 무역수지를 조정해야 하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수출할 상품이 없었다. 당시 주요 수출품목은 ▲식료품(돼지, 김, 쌀) ▲광산물(흑연, 중석, 철광석) ▲비식용원료(생사, 돈모, 한천) 등이다. 공산품은 합판, 면직물 등으로 394만 달러에 불과했다. 수입품목도 국민의 생필품과 밀접히 관계된 것뿐이어서 수입제한이 어려웠다. 미국의 원조가 끊긴다면 우리는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가 만든 <한국경제에 대해서>라는 보고서는 “한국경제는 인구과잉, 자원부족, 공업 미(未)발달, 군비압력, 정치의 졸렬, 민족자본의 약체, 행정능력 결여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어 경제성장과 자립을 이룩한다는 것은 절망적이다”라고 평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은 ‘군사혁명’을 일으키며 5개 항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이 중 ‘생활고 해소와 국민생활 향상’ ‘경제자립’ ‘대북경쟁 승리’가 경제 관련 공약이다.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동안 ‘한국형 산업혁명’을 이끌며 공약을 완수하고, ‘가망 없는 나라’에 희망을 줬다.

1961년 6월 국가재건기획위원회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해 강력히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각 부처에 떨어진 경제개발 5개년계획 작성 지시는 실무(實務)에 밝은 과장급 이하에게 배정됐다. 당시 상공부 화학과장으로 있던 필자는 ‘화학공업 5개년계획’을 맡았다. 8월 초 10여 장의 갱지에 그려 쓴 차트를 들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위원장실로 향했다. 위원장 김동하(金東河) 소장은 ‘화학공업 5개년계획’에 대해 “좋습니다”라고 짧게 말했다.

정부 청사 안에 ‘화학공업 계획’이 통과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상공부 각국과 각 부처에는 필자가 작성한 계획서가 ‘모범답안지’로 통하면서 보고 베끼느라 난리였다. 10여 장짜리 갱지 차트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년)’의 골격을 이루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62년 1월 경제기획원은 각 부처에서 올라온 사업안을 거시적 관점으로 재편성한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수출이나 내수를 위한 원자재를 들여올 외화가 태부족이었다. 정부 보유 외화는 감소해 파산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외환보유고는 ▲1961년 2억520만 달러 ▲1962년 1억6679만 달러 ▲1963년 9월 1억540만 달러로 떨어졌다. 단 100달러를 사용하는 데도 장관의 승인이 필요할 정도였다.

첫, 외환위기였다. 외국 차관도 기대할 수 없었다. 195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는 ‘전쟁위험국가(War Risk Country)’로 분류돼 외자(外資)도입이 불가능했다. 1962년 7월 혁명정부는 ‘정부지불 보증법’ 등을 제정하는 과감한 조처를 했지만, 외환 사정이 나쁜 대한민국에 돈을 꾸어 주는 곳은 없었다. 미국은 “무상원조국에 차관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일본도 “국교가 없는 나라와 차관협정을 맺을 수 없다”고 했다. 벼랑 끝에 선 격이 됐다.

1963년 1차 5개년계획은 중공업을 빼고 경공업과 화학공업에 중점 투자하도록 수정됐다. 연평균 경제성장률도 당초 7.15%에서 5%로 하향조정했다. 외환 사정이 호전될 때까지 정부 지급보증을 중지하고, 생필품 수입도 극도로 제한했다. 국민들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큰 고민에 빠졌다.

1964년 12월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공식방문하는 박 대통령은 출국성명에서 “위대한 경제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서독의 부흥상을 샅샅이 보고 오겠다”고 밝혔다. ‘라인강의 기적’을 확인하겠다는 얘기지만, 더 다급한 속사정이 있었다. 공공차관을 얻는 일이었다. 필자는 대통령 일행보다 한발 앞서 독일에 가 있었다.

서독 수상, “한국 가서 경제고문 맡고 싶다”

박정희 육군 소장이 군사혁명을 일으키며 들고 나온 혁명공약 중 경제관련 내용은 ‘생활고 해소와 국민생활 향상’ ‘경제자립’ ‘대북경쟁 승리’다.

평소 과묵한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연설했다. 자유와 평화를 강조하는 내용에는 여운이 있었다. ‘서독과 같이 분단의 아픔을 겪는 우리도 자립과 번영을 이루겠다’는 굳은 의지를 호소하려는 흔적이 역력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한국에 가서 경제고문을 맡고 싶다”며 박 대통령의 손을 잡았다. 그는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서독의 5대 재벌을 조찬에 초대하고 박 대통령을 소개했다. 이어서 “한국과 독일은 분단국으로서 공동운명체와 같다”며 “한국의 어려움을 서독의 어려움으로 알고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부탁했다. 이 자리에서 대한(對韓)차관단이 결성됐다. 장기영(張基榮)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는 차관단의 승인을 구한 뒤 재정차관 1350만 달러·상업차관 2625만 달러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외자도입이 트이기 시작했다.

천연자원이 없는 우리로서는 수출 가능 품목이 여성 단순기능공을 활용한 섬유 등 경공업 제품뿐이었다. ‘노동집약산업’의 핵심우위는 인건비다. 1964년 당시 우리의 시간당 노임은 미화 16센트로 대만의 19센트와 비슷했다. 같은 조건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던 대만과의 경쟁은 승산이 없었다.

5월 박 대통령은 1달러 대(對) 130원이던 환율을 255원으로 올려 노임(勞賃)이 10센트가 됐다. 저임금은 경제건설에 필요한 ‘달러’를 버는 유일무이한 무기였다. 박 대통령은 경공업(輕工業)을 통한 ‘수출 제일주의’를 내걸고 총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했다.

그 결과 1964년 11월 30일에 박 대통령이 지시한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최종 집계된 수출액은 1억2090만 달러. 전년 대비 39.3% 증가한 것으로 ‘1차 5개년계획’의 수출목표 1억1750만 달러를 초과달성한 금액이다.

1960년대 초 신생 개도국들은 수입대체에 중점을 둔 개발전략을 펼쳤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일부 비관론자들은 “부존자원이 없는 개발도상국은 수출할 상품이 없고, 이에 따라 원자재를 수입할 외화가 없으므로 경제자립은 요원하다”는 주장을 했다. 수출 1억 달러 달성은 우리 무역사(史)의 원점이다.

이듬해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 시정목표를 ‘수출·증산·건설의 해’로 정했다. “우선 수출을 하고, 모자라면 증산하라. 그래도 부족하면 공장을 더 건설하라”는 의미다. 이 시정목표는 수년간 계속됐다. 1965년 수출목표는 전년 대비 40% 증가한 1억7000만 달러였다. 이때부터 시작한 월남(越南) 인력 진출이 수출목표 달성의 밑거름이 됐다.

‘40% 증가’는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낮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앞으로도 40% 수준이 고착된다면 큰 낭패를 겪는다고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무역업계도 “우리나라 수출 한계는 3억 달러”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실제로는 ‘공업구조의 수출체제로의 전환정책’이 실효를 거둬서 공산품 수출이 대폭 증가했다. 이해 수출실적은 1억8045만 달러(+49%)였다. 연 수출증가율 40%는 하나의 공식이 됐다. 1966년 수출실적은 2억5575만 달러(+42%)였다. 1966년은 1차 5개년계획을 마감하는 해로 원래 수출목표는 1억1750만 달러였으니 계획대비 218% 초과달성이다. 산업혁명 1단계 완성이다.

“중소기업 ‘빽’은 대통령이야”

중소기업 육성책이 본궤도에 올랐을 때였다. 어느 파티에서 중소기업중앙회 김봉기 회장이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는 “각하, 감사합니다. 중소기업을 위해서 강력한 지원을 해 주신 데 대해 중소기업체를 대표해서 감사를 올립니다. 요즘 중소기업계는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박 대통령은 환하게 웃으며 “김 회장, 과거 중소기업은 죽을 때 ‘빽(밀어주는 사람)’하고 죽었다며? 이제 중소기업의 ‘빽’은 나야.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빽’을 가진 사람은 중소기업자야”라고 말했다. 그 후 김 회장은 “내 빽은 대통령이야”라며 다녔다.

朴 대통령, 수출확대회의에 15년간 한번도 안 빠져

서독 수상 에르하르트의 도움으로 결성된 대한차관단은 총 3975만 달러의 차관을 공여했다.

매해 수출을 40%씩 증가시킨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어떤 나라도 이런 예는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 밀어붙여”라는 박 대통령의 명령에 사력(死力)을 다해 따랐지만, 애로사항이 많았다. 대통령을 모시고 관계부처와 관련업계를 망라한 ‘수출확대회의’ 개최가 결정됐다. 박 대통령은 1965년부터 매월 열리는 수출확대회의에 만사를 제치고 참여했다.

총사령관으로서 전략회의를 지휘·감독·독전(督戰)했다. 월별·품목별·국가별 실적, 부진품목 점검, 신규계획 검토, 애로사항 해결이 즉석에서 이뤄졌다. 회의는 회를 거듭할수록 수준이 높아져 거의 전문가들의 회의가 됐다. 박 대통령은 15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수출 실무 및 행정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어졌다.

같은 해 3월 청와대에서 중소기업 육성에 대한 최고 정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공업의 지방분산과 공업단지화’ ‘특화산업 및 성장산업 육성’ ‘중소기업 자금 양적 증대’ 등의 내용을 보고했다. 이를 듣고 박 대통령은 “중소기업 육성시책을 강력히 추진하라”면서 “상공과도 없는 도(道)가 있으니 공업발전을 하겠는가. 각 시·도에 상공국을 설치하고 지방장관에게 수출산업에 적극적으로 지원토록 시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당시 지방 도청에는 내무나 농림에 관한 행정사무는 있었지만, 상공 분야는 담당 부서가 없었다. 바꿔 말하면 지방관리가 상공부에 들를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상공국 신설 후 각 지방장관에게 중소기업 육성과 수출에 대한 책임을 줬다. 시·도별 실적은 연말통계로 청와대에 보고됐다. 시장·도지사가 관심을 갖고 뛸 수밖에 없었다. 중소기업 수출이 나중에는 전체의 3분의 1까지 증가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年頭)교서에서 ‘70년대에 완전고용, 수출 10억 달러 달성’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당시 경제기획원이 수립한 제2차 5개년계획에 따르면 1967년 목표는 3억 달러. 10억 달러를 바라보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었다. 2차 계획의 최종 연도인 1971년에 ‘10억 달러’를 달성하기 위해 상공부는 ‘10억 달러 수출계획’을 작성해 수출확대회의에서 보고했다. 그리고 총력을 다했다.

그 결과 수출실적은 ▲1967년 3억5589만 달러(+40.2%) ▲1968년 5억40만 달러(39.6%+) ▲1969년 7억300만 달러였다. 문제는 1970년도 목표였다. 1969년 실적에 40%를 보태면 9억8000만 달러가 나오지만, 이낙선 상공부장관은 대통령에게 10억 달러로 보고했다. 모두가 ‘과욕(過慾)’이라며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수출 10억 달러는 우리 수출 역사상 하나의 전기(轉機)를 이루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분발을 촉구했다. ‘달성하라’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주무 당국인 상공부는 수출진흥을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노력은 수출실적에 반영됐다.

상공부 통계상 수출은 상반기에 40%, 하반기에 60%가 이뤄졌다. 70년도 상반기 수출은 목표액 10억 달러의 43% 수준이었다. 매스컴은 ‘수출 기적’으로 표현했다. 자신감이 생긴 이낙선 장관은 “70년 수출실적은 10억480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70년도 실제 수출은 예상치에서 100만 달러가 부족한 10억380만 달러를 기록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다. 산업혁명을 시작한 지 5년반 만에 이룩한 성과였다.

수출이 증가하면서 일자리가 늘었다. 수출업체를 비롯한 전 경제부문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수출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고, 공장이 증설됐다. 본격적인 건설시대였다. 원료의 국산화가 시급한 과제로 등장해 기초원료 공업인 석유화학, 제철공업의 건설이 시작됐다. 국민들은 ‘민생고’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수출 제일주의’라는 걸 깨달았다. 가난의 한(恨)을 떨치기 위해 ‘땀과 눈물’로써 수출에 매진했다.

1970년, 보리밥은 먹을 수 있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연두교서를 통해 3대목표로 증산,수출,건설로 설정했다고 발표했다.

예전부터 우리나라에는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다. 춘궁기(春窮期)의 절박함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모두가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줄 사람도 없다. 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견디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농토는 한정돼 있어 해결할 방법이 없다. 곤궁한 생활은 ‘도전정신’ ‘개척정신’을 사라지게 한다. 그 자리에는 체념만이 남게 된다. ‘산업혁명’은 ‘기아’와 ‘절망’을 일소(一掃)했다.

1인당 GNP가 100달러(64년)를 돌파하고 250달러에 달했다. 이로써 외국으로부터 원조가 끊겼음에도 국가경영을 할 수 있게 됐다. 국민들도 배를 곯지 않게 됐다. 당시 국제시장에서 곡물가격은 쌀이 밀이나 보리의 2배 이상이었다. 당시는 쌀을 절약하기 위해 보리 혼식, 분식 장려를 했다. 쌀막걸리 제조도 금지된 시기였다. 쌀밥을 마음대로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리밥만큼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우리 민족 역사상 이런 변화는 겪어 본 적이 없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60년대 당시 수출됐던 거의 모든 품목이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제품이었다. 그것도 가냘픈 여공(女工)들의 손이었다. 머리카락을 판 것도 여자들이고, 가발을 만든 것도 그들이었다. 여공들은 봉제품을 만드느라 손에서 피가 나고,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스웨터를 짰다. 이들은 자신에겐 아끼면서도 고향에 생활비를 부치고, 동생들 학비까지 마련하는 희생정신의 소유자였다. 또 인내심도 강해 수출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지루한 작업을 반복했다. 우리가 절망적인 패배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에서 출발한다.

1960년대 여성근로자는 제1차 산업혁명의 전사(戰士)였지만, 70년대 들어서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70년 여성근로자의 노임수준은 일(日) 245원이었다. 경쟁국이었던 대만은 343원으로 우리보다 40%가 비쌌고, 싱가포르는 27%가 높다. 선임 여공의 노임은 세 나라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우리 수출량이 증가하자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신설 공장에서는 봉급을 올려 주면서 여공들을 스카우트했다. 공장 간 스카우트 경쟁은 임금상승을 부추겼다.

그 결과 70년대 우리 여성근로자의 노임은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 됐다. 이후 ‘값싼 한국 노동자’라는 말이 사라졌다. ‘값싼 인력 시대’는 여성근로자에 관한 한 1964~70년의 약 7년이라는 짧은 기간밖에 존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자 단순기능공을 자원으로 경제발전 도모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산업혁명 3단계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요구했다.

北 동영상 시청 후 朴 대통령 재떨이에 담배 수북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무역진흥공사 창립 15주년을 맞아 쓴 ‘무역입국’ 휘호.

1970년대 초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의 산업’이라는 동영상을 가져와 박 대통령과 각료, 비서관들이 시청했다. 선전용이겠지만 화면에서 보이는 가정에는 냉장고를 비롯해 다양한 전자제품이 등장했다. 3시간이 지나고 대통령 재떨이에는 담배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1972년 5월 30일 중앙청 홀에서 무역진흥 확대회의가 끝나고 수출상품 전시회에 갔다. 박 대통령은 기계제품이 전시된 걸 보고 흥미로워했다. 그날 오후 박 대통령이 서재로 불러서 갔더니 “임자! 100억 달러 수출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지?”라고 물었다. 필자는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라고 답했다.

이미 1980년 수출목표를 55억 달러로 확정한 상태에서 왜 100억 달러인가. 몇달 전 북한경제의 분석이라는 브리핑을 할 때의 일이었다. 이 회의 때 박 대통령은 “북한의 수출액은 얼마나 되느냐?”라고 물었다. “1976년에 5억~6억 달러가 될 것으로 추산한다”고 답하자,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1970년도 수준이구먼”이라고 했다. ‘의외로 많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 후 박 대통령은 80년대 초 50억 달러 수출로는 부족하고, 100억 달러는 돼야 우리의 국력이 북한을 완전히 압도하고, 체제경쟁에서 완승(完勝)하게 된다고 판단했다.

며칠 후 박 대통령은 “오 수석! 중화학기획단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 보도록 하지!”라며 중화학공업 발진 명령을 내렸다. 총리실 직속으로 중화학공업기획단이 구성됐다. ‘전(全) 산업의 수출화’라는 휘호를 써서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했다. 중화학공업기획단에선 이 휘호를 액자로 만들어 단장실 정면에 걸어 두었다. 회의 때 박정희 대통령 정면에는 <1980년대를 위한 공업입국 장기계획>이 붙어 있었다. ‘박정희 시대’는 이 표 하나로 설명할 수 있다. 그는 항상 도표를 보면서 국운을 건 사업에 골몰했다.

196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의 주력은 여성근로자였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후 한국 공업의 중심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했다. 산업혁명 3단계에도 수출은 계속 늘었다. 이후 한국 경제는 질적으로 도약했다.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제철소와 석유화학공장이 증설됐고, 조선소, 자동차공장, 공작기계공장, 전자공업공장 등이 건설됐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방위산업 육성으로 이어져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졌다. 수출액이 크게 늘어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룩했다. 1인당 GNP는 1000달러가 됐다. 국내 산업에서 중공업의 비중이 크게 높아진 덕분이다. 80년대의 민주화도, 오늘날 ‘무역 1조 달러’도 이때 건설한 제철, 자동차, 석유화학, 중화학공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호프만 계수(경공업 부문 부가가치/중화학공업 부문 부가가치)는 0.96이 됐다. 중화학공업 비중이 경공업을 앞질렀다는 뜻이다. 호프만 계수 ‘1.5~0.5’는 기계 및 금속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나라다. 공업 발달이 안된 1단계 공업국에서 3단계로 도약하는 것은 ‘혁명’적인 변화다. 와타나베 도시오 도쿄공업대 교수는 이를 일컬어 ‘압축형 경제발전’이라고 표현했다.

1973년 석유파동 등으로 인한 유가와 원자재가 상승이라는 악재가 닥쳤지만, ‘중동(中東) 진출’로 위기를 헤쳐 나갔다. 1977년 수출 100억 달러와 중화학공업 비율 50% 이상을 이룬 한국은 완전한 공업국으로 성장했다.

4단계는 1977~86년의 계획이 마련돼 있었다. 공업구조 개편을 끝내고 내실을 다지는 단계다. 산업합리화 운동을 국가적 규모에서 추진하되 특히 생산성을 향상하는 동시에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간다. 공업규모는 국제 일류(一流)공장으로 키우고, 제품은 고급화한다. 정밀공업 같은 첨단산업을 개척하고, 플랜트도 수출한다. 결과적으로 수출 1000억 달러, 호프만계수 0.5 이하,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는 선진국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1990년에 호프만계수 0.5를 넘고, 1995년에 수출 1000억 달러·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했다. 경제개발 30년 만에 산업혁명을 완수한 것이다. 이는 난관(難關)을 무릅쓰고 ‘공업입국 장기계획’을 추진한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과 믿고 따라 준 국민의 인내가 이룬 놀라운 성과다.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 소양 있어야

그로부터 2년 뒤, 우리는 IMF 사태를 맞았다. ‘박정희식(式) 경제개발’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지만, 결국 외환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수출뿐이었다. 중화학공업은 외환위기 당시 수출의 85% 이상을 차지하면서 ‘달러’를 벌었다. 이로써 우리는 ‘IMF 체제’를 조기 졸업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 극복의 공은 ‘수출’에 있었고, 수출의 근간(根幹)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구축된 것이었다. 지도자 역량과 국가전략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다.

그런데 전두환(全斗煥)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에서 국가 장기개발전략이 사라졌다. ‘수출’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수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테크노크라트가 축출되고, 경제기획원 출신의 이코노크라트, 이코노미스트가 중용됐다. 이들은 통화량 조절로 경제운용이 가능하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들의 생각과 다르다.

현대경제는 공업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다룰 수 없다. 경제의 여러 요소는 서로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 상호 간 원인과 결과를 제공한다. 한 문제만 따로 떼어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로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되는 기법을 ‘시스템공법(System Engineering)’이라고 한다. 또한 제품에 대한 각종 지식과 생산공정을 파악하고 있어야만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이 계획에는 ▲청사진 ▲구체적인 비전 ▲연차별 시행계획이 포함돼야 한다. ‘엔지니어링 어프로치(Engineering Approach)’다.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 시스템공법이나 엔지니어링 어프로치를 다룰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한 정책수립자가 테크노크라트다. 기술에 대한 소양과 경험이 있고, 실무에 밝은 테크노크라트가 국가개발의 주역(主役)이 돼야 한다. 이는 경제발전사를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MB, 임시처방·사후약방문에 그쳐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What)을 위해 ‘7·4·7’이라는 비전을 제시했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국가발전전략(How)이 사라졌다.

2007년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이명박 후보를 선택한 것은 그의 ‘토목전문가’ ‘경영자’ ‘서울시장’ 경력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테크노크라트적 소양을 기대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기술자’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닌, 사업가였다. 미시적인 차원의 실물경제에 대해서는 알겠지만, 거시적 관점의 경제관리는 모를 수밖에 없다. 그가 자신의 실체를 얼른 파악하고 테크노크라트를 중용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4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큰 실망감을 느낀 듯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집권(What)을 위해 ‘7·4·7’이라는 비전을 제시했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자 이 ‘장밋빛 비전’은 자취를 감췄다. 그 뒤로는 목표도, 국가발전전략(How)도 없다. 현안에 대해 사후약방문·임시처방 정책만이 난무할 뿐이다. 원칙이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뿐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모든 정부에 해당하는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업을 추진할 때는 ▲원리 도출 ▲원칙 수립 ▲시행계획 작성 ▲집행 등의 단계가 있었다. 원리는 일단 정해지면 바꿔서는 안 된다. 박 대통령 시절의 원리는 수출제일주의, 공업입국, 남북 간 체제경쟁 승리, 선진국 진입 등이다. 박 대통령은 임기 18년 동안 이 경제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즉 ‘부국강병’을 제시하고 ‘경제개발’로 실현했다. 그래서 국민들도 믿고 따른 것이다.

2011년 현재, 1인당 GDP 2만 달러가 넘은 지금 굶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회 분위기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1960년대보다 더 흉흉하다. 온 사회가 불평·불만도 모자라 적대적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사회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시키는 세력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정치가 잘못됐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빈곤하다’ ‘불행하다’고 느끼게 한 위정자들의 책임이다. 대권 후보로 거론된 인물 중 이를 해결할 만한 역량을 갖춘 사람도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 다음에는 박정희 대통령 같은 인물이 나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국가전략으로 제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