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기준없는 정부 신규사업… 각 부처 예산만 챙겨 놓기 급급 : 월간조선

2010년 정부 부처가 새로 착수한 사업(신규재정사업) 예산 중 집행률이 한 자리 수에 불과한 것이 전체 신규사업 건수 중 10%에 달하는 등 각 부처의 ‘예산 우선 챙기기’ 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고에서 지원하는 대형 사업의 타당성을 미리 조사하기 위한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부가 조사 면제권을 남발, 대상의 절반 가까이에 대해 조사를 면제하는 등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것으로 분석됐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총 34개 부처에서 459개 사업을 2010년 신규재정사업으로 추진했다. 예산규모는 2조5669억원. 하지만 이 중 28개 사업은 집행률이 0%였고, 집행률 10%에 미달한 사업도 14개였다. 이를 포함해 총 91개 사업이 집행률 70%에 못 미쳤다.

집행률 0%인 사업 28개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예산집행률이 저조한 사업의 공통적인 특징은 사업계획 및 집행계획이 미비하거나, 예산집행 가능성이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예산을 먼저 배정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신규재정사업은 예산규모는 크지 않아도 국가재정사업 전체의 변화방향을 볼 수 있어 그 의미가 큰데, 2010년 신규재정예산 분석결과 예산심의를 보다 강화해 재정의 건전성과 효율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왜 각 부처는 수억~수백억 원의 예산을 애써 확보하고도 사용하지 않았을까. 예산불용 사례의 대부분은 사업진행 여부가 불투명한데도 마구잡이식으로 예산을 먼저 끌어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국방부는 1군지사 이전을 위해 예산액 4억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원주시와의 합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이전지까지 바뀌는 등 진통을 겪은 사업이다. 사실상 2010년 예산집행 가능성이 불확실한데도 예산을 배정한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을 위해 134억7300만원을 확보했지만, 기본계획도 제대로 수립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산을 받아 내부 의견수렴 과정에서 사업수행 방식이 변경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결국 집행실적은 총액의 18.5%에 불과했다.

농림수산식품부의 고부가가치 종자산업 육성사업(25억원)은 예산집행 시기를 잘못 계산해 예산액의 63.1%를 쓰지 않고 이월한 사례다. 이 사업의 대상품목인 무·배추의 파종시기가 10~12월이기 때문에 새 종자생산 및 사업집행은 2011년 7월에나 가능하다는 사실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예산을 미리 계상한 것이다.

방위사업청의 경우 특수전부대에서 운용중인 항공기 C-130H의 성능개량을 위한 장비보강 사업으로 67억5400만원을 확보했으나, 장비구매 가능 여부에 대한 조사가 부실하게 이뤄졌다. 미국의 대외수출 통제로 인해 애초 구매 예정이었던 5개 부품 중 1개를 사지 못하면서 사업기간이 1년 순연됐고, 결국 예산집행률은 0.1%에 불과했다.

교육과학기술부도 부산과학관 건립을 위해 15억원의 예산을 받았지만, 과학관건립 기본계획이 2010년 9월에야 수립되는 등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의 협의 및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예산을 받아 간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 예산 전부를 사용하지 못했다.

한편 2006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정부신규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국가재정법 제38조(예비타당성조사)에 따라(박스2 참조) 대형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를 받아야 하지만, 면제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0년 신규정부사업 중 예비타당성조사 대상 사업은 79개였으나, 면제 사업은 30개에 달했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남발

올 초 국가재정법 개정법률안을 발의한 민주당 김진애 의원은 “국가재정 효율성 제고에 주춧돌 역할을 해야 할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무용지물화한 상태”라고 말했다. 김 의원의 얘기다.

“현 정권 출범 이후 2011년 상반기까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500억원 이상 대규모 사업 789개 중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받은 사업이 597개로 75.67%에 달합니다. 예비타당성조사 제외 대상을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법의 취지에 어긋나고 있고, 따라서 심사권한을 국회가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국토해양부와 농림수산식품부, 방위사업청 등은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비율이 70%가 넘는 등 지나치게 높습니다.” 김 의원은 “현재 국가재정법 시행령은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남발을 방조하고 있다”며 “행정부가 이를 면제할 경우 기획재정부 장관이 그 사유와 내역을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제출해 심사를 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비타당성조사를 실시하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독립성도 문제다. 윤태범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책연구소가 대형 국책사업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의 얘기다.

“국책연구기관이 정부 추진 사업에 부정적 견해를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KDI는 사실상 정부의 업무를 대신해 오고 있었고, 왜 예비타당성조사 전문기관으로 지정됐는지 의문입니다. 예비타당성조사를 투명하게 하기 위해 조사분석 기준을 명확히 설정하고, 제3자 등에 대한 조사결과 공개 등으로 시스템을 보완해야 합니다.”

또 다른 문제는 일부 신규사업의 경우 첫해 예산만 볼 때는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이 아니지만, 중장기 계획상 웬만한 재정사업보다 큰 규모여서 예비타당성조사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예비타당성조사 기준이 국고지원 300억원 이상인데, 첫해에 이보다 적은 예산으로 신고, 확보해 두면 다음해부터는 예비타당성조사와 상관없이 거액의 국고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상 맹점이 있다”며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지 않도록 신규재정사업에 대한 평가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예비타당성조사란

대규모 개발사업에 대한 개략적인 조사를 통해 타당성을 검증하고 재정투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2006년 국가재정법 제정을 계기로 법제화했다. 조사대상은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 국가재정 지원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신규사업 중 건설공사가 포함된 사업, 정보화·국가연구개발 사업, 사회복지·보건·교육·노동·문화·관광·환경보호·농림해양수산·산업·중소기업 분야의 사업이다.

이런 사업의 범주에 들더라도 공공청사·교정시설·초중등 교육시설 신·증축사업, 문화재복원사업, 국가안보에 관련된 국방사업, 남북교류협력에 관계되거나 국가간 협약·조약에 따라 추진하는 사업, 도로유지보수·노후상수도개량 등 기존 시설의 단순개량 및 유지보수사업, 재해예방 및 복구지원·시설안전성 확보·보건/식품 안전문제 등으로 시급한 추진이 필요한 사업, 법령에 따라 설치하거나 추진하여야 하는 사업, 기초생활수급자·장애인 등 수혜자에 대한 현금·현물급여 지급 등 단순 소득이전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된다.

예비타당성조사는 기획재정부가 실시하며, KDI공공투자관리센터가 총괄 수행한다. 조사비용은 5000만~1억원, 기간은 6개월 이내로 정해져 있다.

관련 법규 없는 사업도 예산 받아

심지어 사업 세부계획은 물론, 기초계획이나 법적 근거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예산부터 먼저 편성한 사례도 다수 있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식품전문투자펀드’ 예산 507억원을 확보했으나, 근거법인 ‘농림수산식품투자조합 결성 및 운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전에 예산부터 받았다. 이 법은 2009년 12월 29일 의결됐고, 시행시기는 2010년 5월이었다.

보건복지부가 확보한 중증장애인연금 예산 1519억1900만원도 마찬가지다. 근거법인 장애인연금법은 2010년 3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됐고, 시행일은 7월 1일이었다. 중증장애인연금에 대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심사 및 의결한 것도 2010년 예산심의가 끝난 후인 2009년 12월 29일이었다. 중증장애인연금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예산부터 챙겨 간 것으로 보인다.

또 방위사업청은 사이버사령부 설치를 위한 예산액 30억5900만원을 확보했는데, 이 예산의 근거법인 국방정보본부령(대통령령 제21915호) 개정안은 2010년 예산심의가 완료된 2009년 12월 30일에야 개정했다.

국토해양부의 자전거도로 구축 예산(140억원)도 마찬가지다. 2010년 8월 행정안전부 주관으로 ‘국가자전거도로 기본계획’이 수립됐으며, 2010년 12월에야 국토해양부가 ‘국도상 자전거도로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등 초기 계획을 마련하는 시점에서 예산부터 배정받은 것이다.

올해 각 부처가 기획재정부에 제출한 예산요구서는 지난해 요구액보다 23조5000억원이 많은 332조6000억원이다. 문명재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가예산 규모가 늘어나고 채무이자도 늘어나는 상황에서 국가는 예산을 조정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며 “중복되거나 전시성 사업예산을 철저하게 솎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문 교수의 얘기다. “내년 예산지출만 해도 선거, 복지, 반값등록금, 평창동계올림픽 대비 등으로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수입에는 한계가 있고요. 유럽 몇몇 국가들과 미국 정부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군더더기 없는 예산을 편성하고, 편성된 예산을 어떻게 지출했으며 그 성과는 무엇인지 결산하는 것도 지금보다 훨씬 꼼꼼하게 해야 합니다.”

국토해양부는 국가자전거도로 기본계획을 수립하기 1년 전 관련 예산 140억원을 확보했다.

부처간 기 싸움도 사업지연 원인

한편 예산을 확보하기만 하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부처 측에서는 “전년도에 배정된 예산으로 사업을 집행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한 부처 고위 관계자의 얘기다. “기획재정부가 예산을 편성하면, 해당 부처는 사업 시행 시점에 가서 상황변화 등을 설명하며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때 원안대로 가자는 기획재정부와 예산을 늘려 달라는 부처가 기싸움을 벌이면서 사업이 미뤄지게 되죠. 예산이 불용되거나 이월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예산을 편성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